소설리스트

28화 (28/427)

* * *

새벽 1시. 전엔 이 시간까지 남는 연습생은 얼마 되지 않았었는데, 회사를 나왔을 때 함께 나온 면면들을 보니 모두 데뷔조 멤버들이었다. 그것도 한율 본인을 포함해 8명 전부. 

아직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칼을 털면서 이건우가 위로 쭈욱 기지개 켰다. 

“아, 개운하다.”

“누가 보면 우리 회사 목욕탕인 줄?”

“하나 밖에 없는 숙소 화장실에서 씻는 것보단 낫잖아.”

“남석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건 뭐야? 선물?”

유호가 차남석이 애지중지하게 품고 있는 종이가방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네. 낮에 팬 분이 저랑 서한율 같이 먹으라고 준 생강··· 도라지청?”

“줘 봐.”

차남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호가 굳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차남석이 의아해하며 넘기자, 유호는 거리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종이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가로등 불빛에 투영시켰다.

유리병 안 가득, 얇게 썰린 배와 생강, 도라지가 환히 보였다. 안쪽 표면에 붙은 설탕이 반짝거렸다. 

“왜요, 형?”

“남석이 너 팀장님이나 매니저 형한테서 팬한테 음식선물, 특히 직접 만든 음식은 받지 말라고 안 들었어?”

“하···.”

차남석이 짧게 한숨을 토하며 유호의 손에서 유리병을 가져갔다. 

“의심하기 싫은데요. 이거 준 애, 보컬 나가기 전부터 우리 팬이라고 한 애에요.”

“그래도···.”

“의심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한율은 자연스레 걸음을 멈춘 두 사람에게 물었다. 수제청은 후드소녀가 한율과 차남석에게 함께 먹으라고 준 선물이었으므로. 

유호가 종이가방을 차남석에게 돌려주며 대답했다.  

“들어가서 말해줄게.”

숙소까지 워낙 가깝다 보니 금세 도착했다.

8명이 한꺼번에 들어가자 현관은 무척 좁게 느껴졌지만, 지친 멤버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바로 방으로 들어가 북적거림은 짧았다. 

한율은 유호와 잠깐 소파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과거, 한 연예인이 팬에게 음식선물을 받았는데, 고마워하며 아무 의심 없이 먹고 난 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바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건이 있었음을. 

“그것뿐만이 아니야. 상상만 해도 구역질나는 것을 선물에다 함께 집어넣고, 호의로 무장한 채 다가와서 주는 사람도 많아. 설마 나한테 그런 일이 벌어지겠어? 설마 조금 전까지 나한테 사랑한다고 외친 팬이 그런 짓을 하겠어?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해선 절대 안 돼. 알았지?”

‘하긴.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맹목적으로 악의를 품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네, 주의할게요.”

그러면서 한율은 냉장고 앞에 쭈그리고 앉은 차남석을 보았다.

팬에게 선물을 받으면 꼭 인증 사진을 찍을 정도로 좋아하던 그는, 유리병에 뭐라 끄적거린 라벨을 붙이곤 냉장고 깊숙한 곳에 집어넣고 있었다. 

이윽고 숙소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캄캄한 방 안에서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아··· 전의 숙소 침대보다 튼튼ㅎ······.”

“···쟤 말하다가 잠든 거 맞지?”

침대 아래에서 박가람이 황당하다는 듯 낮게 웃었다. 강보배가 소곤거리듯 작게 말했다. 

“그런 듯요.”

그 순간 옆방에선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그 소리에 괴로워하는 누군가의 낮은 신음도 함께. 그러나 다들 피곤에 지쳐서 그런지 작은 불평의 목소리도 이내 사그라졌다. 

‘모두 잠들었나?’

한율은 조용히 침대를 내려갔다. 모두 곯아떨어진 걸 확인한 후 거실로 나가며 문을 가볍게 닫았다. 그리고 냉장고 안쪽에 있는 유리병을 끄집어냈다. 뚜껑엔 오늘 날짜와 ‘3개월 개봉금지’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달칵. 조심히 뚜껑을 연 한율은 손끝을 마력으로 휘감았다. 드르렁. 왼쪽 방 안에서 새어나오는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닫아놓은 오른쪽 방 문을 확인. 그리고 유리병 안으로 손끝을 아주 살짝 넣었다.

어둠 속에서 냉장고 불빛에 물든 푸른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역시나.’

인체에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독성분은 감지되지 않았다. 

할짝. 손끝에 묻은 액체를 맛보자 설탕의 단 맛과 생강의 매운 맛, 도라지의 쓴 맛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배 맛은 미미했고. 아직 숙성되지 않아 맛이 다 따로 놀았다. 

유호의 말을 듣고 혹시 몰라 확인하기는 했지만, 괜히 애꿎은 후드소녀를 의심한 것 같아 한율은 조금 미안해졌다. 

‘다음에 만나면 사진 한 장 더 찍어줘야겠다.’

한율은 유리병 뚜껑을 닫고 다시 냉장고 안쪽 깊숙이 집어넣었다. 

다음 날.

위이이잉!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한율을 깨웠다. 누군가 ‘어떤 놈이 저딴 걸 알람으로 해놨어!’라고 외친 듯도 했다.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은 한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8시 1분···.’

쾅!

“······?”

난데없이 들린 굉음에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

“흐윽······.”

맞은편 2층 침대 위에서 자던 길우성이 머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본인 앉은키와 천장 높이를 생각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가 머리를 부딪친 모양.

한율은 다시 눈을 감았다. 

‘10분만 더 자자.’

길우성이 꾸무럭꾸무럭 침대를 내려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바압······.”

아. 한율은 다시 눈을 떴다.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선 회사에 더 일찍 가야한다. 

‘레슨도 9시부터 시작이니.’

한율은 길우성처럼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히 일어났다. 

사람은 여덟. 그러나 건식 세면대와 화장실 세면대, 싱크대로 사람이 분산되어 양치와 세수를 하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율은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도 금세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먼지를 느끼곤 미간을 찡그렸다. 

“형, 청소기 어디 있어요? 어제 박스 본 것 같은데.”

“저기.”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지나가던 유호를 붙잡고 묻자 유호가 거실 옆 발코니를 가리켰다. 

“지금 조립해서 돌리려고? 자칫하면 밥시간에 늦을 텐데.”

“나 먼저 간다!”

그 사이 한 명이 먼저 숙소를 나갔다. 한율은 발코니에서 청소기 박스를 들고 와 테이프를 뜯었다. 그리고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미간을 구겼다. 

아침햇살로 환해진 거실 여기저기에 멤버들이 뚝뚝 흘리고 간 물 자국들이 선명했다. 그 위로 부옇게 부유하는 먼지들. 

“형.”

“응?”

“이 근처에 따로 집 알아본다고 해도 괜찮을까요?”

듣기론 유호도 숙소 생활이 처음이라고 했다. 하물며 간밤에 이건우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 잤는지, 아직 얼굴에 피곤이 묻어있었다. 

유호가 충분히 이해된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데뷔하고 3년쯤 지나면?”

“······.”

“야, 라이언!”

왼쪽 방에서 차남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젠 아주 당당하게 내 앞에서 내 양말을 가져가?! 안 내놔, 새꺄?!”

“구냥 앞에 있어, 잡아써! 그리고 나 네 새끼 아냐, 새꺄!”

“내 가방 위가 그냥 앞이냐, 새꺄? 좋은 말로 할 때 내놔라?”

“거짓말! 나쁜 말 썼잖아!”

“써한!”

오른쪽 방에서 길우성이 고개만 내밀어 한율을 불렀다.

“혹시 어젯밤에 내가 입었던 티 못 봤어? 가져가서 빨아야 하는데 안 보여!”

대답은 박가람이 대신했다. 

“미안! 걸렌 줄 알고 발 닦았어!”

“아악!”

“호 형, 형 치약 좀 써도 돼요? 내 거 어디로 갔··· 야이, 누가 내 치약 쓰고 다른 데로 옮겼어!”

“······.”

“······.”

한율은 끊이질 않는 시끄러운 오디오를 들으며 유호에게 되물었다. 

“데뷔하고 3년 지나서요?”

“···우리 한번 대표님에게 건의해볼까?”

* * *

9시부터 3시간 동안 댄스레슨을 받은 후, 한율은 샤워하고 나오며 숙소에서 질색했던 아침을 떠올렸다.

본래 세상에서는 몇 달간 제대로 씻지 못한 병사들과 좁은 천막에서 빽빽하게 지냈던 날도 적잖았었는데, 고작 먼지와 물기 좀 떨어져 있다고 불쾌감을 느끼다니. 그간 안락하고 청결한 환경에 저도 모르게 퍽 물든 모양이었다.

‘지금도 땀을 잔뜩 흘린 상태로 다니는 건 불쾌하다고 또 씻었으니.’

물론 불결함이 건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잘 알지만. 

“네 피부 비결이 그거였냐?”

“······?”

착착.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익숙하게 기초화장품을 바르고, 몸 여기저기 뿌린 바디미스트를 두드리며 흡수시킬 때였다.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아낌없이 바르네.”

연습생들은 회사와 숙소에 각각 기초화장품을 놔둔다. 아이돌은 외적인 모습도 중요하기에 피부 관리에도 소홀해선 안 되는 까닭. 그래서 박가람도 스킨로션을 발랐지만, 그는 한율의 캐비닛에 나란히 놓인 화장품으로 집요한 시선을 옮겼다. 

“보송에서 보내준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거야? 얼마짜리야?”

“어머니가 사준 거라 잘 모르겠는데요.”

“어머니! 저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싶습니다!”

“그럼 집으로 돌아가.”

휴게실 의자에 편히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현우가 손을 들며 까불었다. 

“박가람 데뷔조 탈락. 굳굳. 예에!”

학교에서 공부 안 하고 뭐했냐

박가람이 쿵쾅거렸다. 

“까불래, 박현우? 한 살 위 형한테?”

“고작 4개월 먼저 태어났다고 유세는.”

“4개월 우습게보냐? 4개월이면, 네가 포대기에 싸여서 옴짝달싹도 못할 때 난 팔팔하게 굴러다닐 때거든?”

유치한 말싸움을 뒤로 하고 한율은 캐비닛을 잠그고 휴게실을 나섰다. 비슷하게 나온 강보배가 나란히 걸었다. 

“춤추는 거 그냥 눈으로 볼 땐 몰랐는데··· 이것도 체력 정말 많이 먹더라.”

강보배는 댄스레슨 때마다 예전에 한율이 그랬던 것처럼 업앤다운 동작만 반복해서 연습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중에 라이브까지 하라면··· 와아.”

“단련되고 익숙해지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그런 날이 올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강보배의 깊은 한숨엔 여러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같은 동작임에도 잘 추는 사람과 초보의 춤사위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거기에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제 몸뚱이가 야속하게도 느껴지기도 하고, 괜히 분하기도 하고. 

한율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해야죠. 격한 안무에 라이브까지 소화하는 괴물같은 선배들도 처음부터 다 잘했던 건 아니었을 테니. 그나저나 월평 곡은 정했어요?”

“아직.”

“정 고르기 힘들면 댄스는 길우성한테 물어봐요. 찌르는 족족 추천 곡이랑 영상 제목이 줄줄이 나올 거예요.”

“그럼 우성이한테 방해되지 않을까?”

“걔한텐 7곱하기8 물어봤을 때랑 비슷한 수준의 질문일 걸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강보배가 되물었다. 

“54?”

“56인데요.”

“그런데, 오늘밤 10시에 잡힌 ‘심신안정’ 시간은 뭘 하는 시간이야? 가람이 형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고 하던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랫동안 연습생 생활을 한 연습생들도 대체 뭘 배우는 시간인지 의아해했던 ‘심신안정’ 첫 번째 시간. 데뷔조 멤버 8인은 스케줄 표에 적힌 대로 2층의 영상실로 향했다. 

대형 스크린이 펼쳐진 아늑한 영상실 내부엔 8개의 의자가 두 줄로 놓여있었다. 

“나 여기 처음 들어와.”

“나도.”

“스크린 엄청 크다. 영화보기에 딱인데?”

“평소에 크래 선배님들이 모니터링할 때 사용하는 곳이야.”

“오오!”

유호의 설명에 박가람이 냉큼 자리에 앉았다. 

“성공한 선배님들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성공한 선배님들의 기를 물려받는다! 이것이 직속 후배의 특권이지.”

“···라고 미랑 선배님과 같은 반 친구인 박가람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심신안정이라기에 아로마 향초 피워주고 요가라도 하는 건가 했는데, 힐링 영상이라도 틀어주나 보다.”

“아니면 강의영상 같은 거? 그런 거 틀어주면 10분도 안 돼서 바로 잠들 것 같은데.”

“다들 자리에 착석해주세요.”

오동식이 노트북을 들고 들어왔다. 그가 노트북과 프로젝터를 연결해 조작하자 곧 스크린에 영상 프로그램이 떴다. 

오동식이 앞에 서서 설명했다. 

“심신안정 시간은 말 그대로, 고된 레슨과 연습으로 지친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처럼 영상을 보거나, 전문가 선생님을 모시고 집단 상담을 하거나, 반성하는 시간을 갖거나, 요가나 명상을 하거나.”

“그럼 오늘은 뭐 봐요?”

“다큐멘터리입니다.”

“······.”

다들 입은 다물었지만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다. 

무조건 잠들겠다. 

오동식이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내일까지 감상문 제출하셔야 합니다.”

“흐어어···.”

“팀장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손을 들었던 박가람이 일어났다.

“저희 심신을 안정시키는 가장 효과 좋은 수단은 수면이라 사료되옵니다.”

“편안히, 원 없이 자고 싶다는 말씀인가요?”

말 한 번 까딱 잘못하면 ‘그럴 거면 집에 가서 아주 편히 푹 자렴’이라고 받아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박가람이 쭈그러들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수면의 유혹이 그만큼 강렬해서 저도 모르게 도중에 잠들어버릴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말씀···.”

“앉아.”

“네.”

“여러분 혹시 이런 말 들어봤는지 모르겠는데.”

오동식이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돌은 무식하다.”

“······!”

“아이돌은 개념이 없다.”

“···크윽.”

“아이돌은.”

짧게 한숨 쉰 오동식이 말을 이었다. 

“사회성이 결여된 관종이다.”

“······.”

“안타깝지만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평가죠. 매일매일 새벽 늦게까지 몸이 부서져라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그렇게 몇 년 고생해서 드디어 데뷔를 했는데! 철없이 경솔하게 작성한 SNS 글 한 줄, TV에 나가 지식의 일천함을 드러낸 말 한 마디로 아주 쉽게 날아갑니다. 여러분이 몇 년 동안 땀 흘리며 노력했던 시간들이 말이죠.”

“으으···.”

“그럼 학교에서 공부 안 하고 뭐 했냐! 뭐하긴 뭐했습니까. 조금 전 한 연습생의 말처럼, 연습하느라 피곤에 찌든 몸이 수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다 놓친 거죠.”

“······.”

“하지만 대중은 그런 사정 안 봐줍니다. 전교 상위권에서 놀고도 아이돌로 데뷔해 성공한 케이스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회사 측에선 적어도, ‘우리 애가 조금 모자라도 심성은 착한 아이랍니다’라는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 이런 교양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길우성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수긍하는 내 자신이 슬프다···.”

“그럼 심신안정 첫 번째 시간, 여러분이 시청하고 감상문을 제출할 영상은.”

저벅저벅. 오동식이 노트북으로 다가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스크린에 푸른색 행성이 떴다. 

“우리가 사는 아름다운 지구에 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

한율의 어깨가 살며시 처졌다. 

* * *

[인기 웹툰 <가미난무> 웹드라마 제작 확정! 주인공은]

[현재 N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인 웹툰 <가미난무>의 웹드라마 제작이 확정되었다.

<가미난무>는 가상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월요일. 한율은 버스정류장에 서서 인터넷 기사의 스크롤을 휙휙 내렸다. 누군가의 화보 사진이 나왔다. 

[<가미난무>의 주인공 윤가미 역으로 캐스팅된 스타믹스의 지헌.]

‘이 사람이구나.’

일반인들 사이에 있으면 잘생겼다고 느껴질 수 있으나, 아이돌들이 와글거리는 연말 가요시상식 같은 곳에서는 한 눈에 찾기 힘들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 사람은 왜 봐?”

옆에 서있던 차남석이 물었다. 

“그냥요.”

“어제 은훤이 형한테서 전화 왔었다.”

“잘 지낸대요?”

JZ엔터의 고은훤. <보컬리스트 시즌3> 참가자들끼리 CF를 촬영한 이후 간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당시 안 좋은 꾐에 빠지려는 친구이자 같은 소속사 연습생인 이해원 때문에 상심해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수로 데뷔하는 건 포기하고, 알바도 뛰고, 새로 연기학원도 다니고 이런저런 오디션도 보면서 대입 준비하고 있대. 목표는 연영과.”

“같이요?”

“아니, 혼자. 이해원이랑은 진짜 대판 싸우고, 그 뒤로 이해원이 회사를 나가서 아주 연 끊었다고 하더라.”

“결국 안인섭이 있는 회사로 간 모양이네요.”

“아마도 그렇겠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대, 아예 신경을 끊어서. 아무튼 시간 날 때 만나자고 하더라.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시간이 언제 날 것 같아요?”

데뷔조 레슨 스케줄 표에 휴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말에도 밤 10시, 11시까지 레슨이 꼭꼭 들어차있었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6시 레슨이 시작되기 전 사이가 비긴 해도, 그 시간은 주로 회사나 학교에서 받은 숙제를 하고, 석식을 먹는 시간이었다.

‘평일에 공휴일이 박힌 날이 오면 또 모르겠지만.’

차남석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한테 묻지 마.”

한편 그 시각, 무공공 프로덕션. 

부대표 부윤방은 전화를 끊은 뒤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직도 이희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쨍쨍 울리는 것 같았다. 

‘씨발, 그래. 이건 진짜 아니지.’

<가미난무>의 주인공 역이 확정되었다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걸려오는 프로불만러들의 항의전화는 일도 아니었다.

부윤방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엎드리고 있던 유용진 대표가 부스스 일어났다.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잖습니까, 대표님. 대사 한 줄 읽는 것도 안 보고 그 자리에서 덜컥···!”

“그만, 그만. 이미 도장 찍은 거 어쩌라고···.”

“후우.”

부윤방은 속에서 확 끓어오르는 화를 숨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흘끔거리며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사원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이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나서야 부윤방은 책상에 손을 짚으며 유용진에게 말했다. 

“<마법의 달력>은 처음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도 이런 식이면 그 다음, 그 다다음도 친분으로 OK, 선물을 줬으니 OK, 술김에 OK, OK, OK! 이딴 식으로 똥 같은 작품만 만들게 된다는 걸 왜 모릅니까. 연기가 거지같은 화장떡칠 아이돌이 ‘나도 연기했어요!’라고 필모에 올렸다가, 나중엔 본인도 쪽팔려서 지워버리는 작품이 되는 그런 꼴!”

점점 빨라지던 부윤방의 목소리가 대표실에 쩌렁 울렸다. 

“그런 꼴 보자고 이 회사 세운 거였습니까, 대표님?”

씩씩거리는 부윤방을 향해 유용진이 슬쩍 웃었다. 

“왜 예민하고 굴고 그래, 윤방아. 우리가 무슨 지상파에 내보낼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 웹드 판이 대부분 이런 걸 너도 잘 알잖아. 누가 배우 연기 보려고 웹드를 봐? 배우 얼굴 보려고 보지. 그리고 우리처럼 이제 막 생긴 작은 회사에 누가 대작을 만들라고 거액을 턱턱 맡겨주겠어? 다들 이렇게 자존심도 팔아가면서 조금씩 경력도 쌓고, 인맥도 만들어가면서···.”

“그래서 백자 역에 블블의 민준을 끼얹으셨어? 서한율의 그 뛰어난 연기를 보고도?”

유용진의 변명을 중간에 끊으며 부윤방이 따졌다. 유용진이 한쪽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건 걔한테도 잘 된 일이야. 걔가 논 첫 물이 이PD님 드라마였는데, 거기서 검증 받은 배우들이랑 연기하다가 개발연기 천국인 이쪽으로 오면 성에 차겠어? 나 같으면 돌아버리겠다.”

결국 부윤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책상에 쌓인 바인더와 기타 등등을 엎어버리고 말았다. 

“돌아버리긴 내가 돌아버리겠다, 내가!”

쿠당탕. 

그날 오후. 유명 포털사이트 연예뉴스 란에는 [블랙블러드 민준, <가미난무> 백자 역 캐스팅 확정]이라는 기사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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