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427)

* * *

스윽. 

“먹어.”

“······?”

마지막 수업을 앞둔 쉬는 시간.

교실에 앉아 다큐멘터리 감상문을 작성하던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평소 돈을 아끼기 위해 군것질도 자제하던 길우성이, 웬일로 비싼 아침햇빛이란 쌀음료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힘내, 친구.”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까지. 

‘캐스팅 무산 건 때문인가.’

<가미난무> 웹드라마 ‘백자’ 역으로 블블의 민준이 캐스팅되었다는 기사는 한율도 봤다. 그러나 크게 실망하거나 분하진 않았다. 세상일은 본래 개인이 아닌 이권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역이 재밌어 보여 조금 아쉽긴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슬슬 들었다. 액션 씬을 찍으려면 따로 액션스쿨도 다녀야 하지, 사극이니 촬영장소도 거의 지방이지, 다른 배우들도 NG를 심심찮게 낼 것 같았으므로.  

“거기보다 더 좋은 곳에 캐스팅될 거야.”

“그러게, 아쉽게 됐네.”

달칵. 한율은 음료의 뚜껑을 땄다. 

“대본리딩 상대해달라는 핑계로 네 허접한 표정연기 좀 손볼 작정이었는데.”

“······?!”

길우성이 충격 받은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그런 무서운 계략이···!”

우웅. 한율의 핸드폰에 차남석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너 전에 희우 선배님이랑 따로 얘기 주고받은 적 있냐?]

이희우?

[없는데요.]

-[선배님이랑 너 실검 떴는데?]

“······?”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이야기인가 싶어, 한율은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다. 정말로 포털사이트 실검 말미에 [이희우 서한율]이 떠있었다. 고개를 내밀어 메시지를 훔쳐보던 길우성도 자신의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가더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허얼···.”

발단은 이희우의 SNS였다. 

[가능성 있는 신인배우들에게 열린 새로운 기회의 장이라 생각했더니, 아랫물의 아랫물이 되어 고착되는 현실에 한탄만 나오네요. 저예산이라는 핑계는 이제 그만.]

[여담이지만, 전 뛰어난 연기실력까지 갖춘 아이돌이 좋아요(*´∇`)♡ 오늘의 힐링 영상(www.n······). #꽃토끼포에버, #좋은작품에서다시만나, #서한율홧팅]

이희우가 띄운 링크는 <보컬리스트 시즌3> 꽃을 단 토끼 팀의 2차 본선무대 영상이었다. 

슥. 길우성이 한율의 손에 들린 음료를 앗았다. 그리고 한율의 멱살을 아주 사알짝 잡으며 정색했다. 

“뭐야. 너 희우님이랑 무슨 사이야.”

이제 막 실검에 떠서 그런지 같은 반 학생들의 시선도 한 번씩 한율을 향했다. 한율은 길우성의 손을 툭 쳐냈다. 

“아무 사이 아냐.”

음료를 다시 집으며 이희우 SNS로 시선을 옮겼다. 이희우의 프로필 사진은 드라마 촬영 당시 본 분장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율은 청순하면서도 해사한 이희우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내 팬으론 보이지 않았는데. 기껏 본인이 추천한 사람을 떨어뜨려 화가 난 건가?’

우리는 억울하다

-뭐임? 이희우가 왜 뜬금없이 서한율 거론한 거임?

ㄴ전에 드라마 촬영 같이 했잖아. 그것 때문인 듯. 

ㄴ그때 ㅅㅎㅇ 까메오라 분량 개적었을 텐데??

-저예산 운운한 거 보니까 저예산영화 같은 거에서 서한울 까인 거 보고 빡친 거 같다. 서한울 연기 잘한다고 알음알음 소문났다고 하던데. 

ㄴ소문은 무슨ㅋㅋㅋ찍은 게 있어야 소문이 나짘ㅋㅋ

ㄴ이사문 감독 신작 찍고 온지가 언젠데. 까려거든 조금 검색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까라ㅉ 그리고 서한울 아니고 서한율. 

ㄴ좀 이상하지 않음? 독립영화는 연기만 잘하면 아이돌이라도 쓰잖아.

ㄴ독립영화라곤 누구도 말 안 했다. 

-이상하게 오늘 뜬 모 웹툰 웹드 기사가 생각나네. 

ㄴ그거다!!! 웹드!!!!!! 

-무슨 일인지 확실하게 말 안 해주니까 방구석 코X들이 무한증식하고 있잖아; 어쩔 거야 이거ㅡㅡ

-님들 그거 암? 이희우가 이사문 드라마 감독 조카임. 

-희우님 존예ㅠㅠ

블랙블러드 소속사, 고동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은 조금 전부터 걸려오는 기자들의 전화, 팬들의 항의전화로 정신이 없었다.

기자들은 어디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희우가 블블의 민준 캐스팅을 저격한 거 아니냐, 이희우와 무슨 불화라도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댔다. 어떤 기자는 한술 더 떠, 서한율이 들어갈 자리를 ‘일부러’ 뺏은 건 아니냐는 억측을 내놓기까지 했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서한율이 <가미난무> 웹드라마 제작을 맡게 된 무공공 프로덕션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목격담이 뜨면서, 이희우가 돌려서 저격한 게 <가미난무> 웹드라마가 확실하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러자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해놓고서, 어떻게 신인 후배의 기회를 인지도를 무기로 날름 강탈할 수 있냐는 네티즌들의 비난도 합세했다. 

-막 데뷔하려는 신인 자리 빼앗는 블블 인성ㅋ

블블 팬들은 험한 액션도 모자라, 도살까지 하는 궂은 백정 역할을 어떻게 아이돌인 민준에게 시키냐고 난리였다. 당장 출연 계약을 엎지 않으면 회사를 엎어버리겠다는 진심어린 협박까지. 

공식 팬카페에서도 성명서를 내놓을 기세였다. 

“말만 백정이지, 사극로맨스에 가깝게 각색되어서 힘든 건 없···, 여보세요? 네, 일단 진정하시고···.”

“민준이를 양아치로 만들다뇨, 저희는 서한율 군이 앞서 미팅한 것도 몰랐···, ···선생님, 욕은 하지 마시구요······.”

고동 엔터 측에선 블블의 민준이 드디어 연기할 기회를 잡았다고 자축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회사로 불려나왔던 민준도, 이희우의 SNS가 실검에 오르자마자 말없이 숙소로 돌아갔다. 

“떠비에선 뭐래? 우린 그쪽이 캐스팅 제안 받은 것도 몰랐는데, 꼭 우리가 그쪽 애 자리를 뺏은 꼴이 됐잖아!”

제 머리를 쥐어뜯던 홍보팀장의 물음에 직원이 쩔쩔 매며 대답했다. 

“그게··· 무공공에서 캐스팅 제안을 받아 지난 주말에 미팅을 다녀온 건 맞대요. 하지만 무공공이 사흘 안에 답변을 주겠다고 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기들도 일이 이렇게 터질 줄은 몰랐다고···.”

“그럼 이희우 혼자 지랄한다는 거야? 어떻게 알고?! 왜!”

“그건 잘···.”

“이희우 쪽이랑은 아직도 연락 안 돼?”

“네, 촬영 중이라 통화 불가능하다고···. 그쪽 회사에다가도 연락해봤는데, 배우의 개인 SNS까지는 터치할 수 없다고만···.”

무공공 프로덕션 대표와 술자리를 가진 직후 계약서를 받아온 매니저는 이희우의 촬영장으로 달려간 지 오래였다. 

홍보팀 직원이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팀장님, 아무래도 이 일은 떠비 쪽에서 잘 말해줘야 우리 애가 욕을 덜 먹을 것 같은데요.”

출연계약서에 좋다고 도장 한 번 찍었다가, 하루아침에 후배 자리를 빼앗은 못돼 처먹은 양아치가 되었다.

고동 엔터 측에선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괜히 말이 더 많아지기 전에 이 일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환장하겠네, 진짜. 아오!”

사무실이 떠나가라 괴성을 지른 홍보팀장은 결국 직접 WB래빗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편 정신이 없는 건 WB래빗 엔터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들의 확인 전화는 차치하고, 블블 팬들 중 극성적인 팬들이 비난 및 항의전화를 걸어대는 까닭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대체.”

인터넷에서도 블블 팬들 +팬을 빙자한 악플러들이 WB래빗과 서한율을 욕하고 있었다. 

평소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바로바로 법적조치를 취한다는 입장문을 내놓던 WB래빗이, 왜 이번에는 가만히 있냐고, 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잘못된 오해가 퍼지도록 방관하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WB래빗에서 이사문PD와 이희우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해괴한 주장까지 나왔다. 

WB래빗으로서는 정말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이쪽도 서한율이 캐스팅에서 떨어진 사실을 인터넷 기사로 먼저 접해 속상한 마당에. 

“이희우 씨랑은 연락 안 돼요?”

“네. 대신 이희우 씨 매니저한테 연락해봤는데, 지금은 촬영 중이라 통화가 안 되고, 휴식시간 되면 이희우 씨한테 연락 하라고 전해주겠대요.”

오동식 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발 본인 말 한 마디가 불러올 파장 좀 생각하고 적으라고···, 그놈의 SNS···.”

“팀장님, 고동 엔터에서 전화요!”

오 팀장은 재차 한숨을 쉬고 심호흡까지 하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네, WB래빗 매니지먼트 B팀 오동식 팀장입니다.”

그리고 이 두 기획사가 어떻게든 잘 해결해보려 대화를 진행 중일 때, 한 인터넷기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전도유망한 감독이 서한율보다 블블을 선택한 이유]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 N사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웹툰 <가미난무>의 웹드라마 제작이 확정되었다.

제작을 맡은 무공공 프로덕션은 <가미난무>의 주인공 윤가미 역으로 스타믹스의 지헌을 캐스팅한 후, 곧바로 또 다른 주연인 백자 역으로 블랙블러드의 민준을 캐스팅했다. 

무공공 프로덕션 측은 민준을 캐스팅한 이유로 그가 백자의 외적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져 제안을 했으며, 블랙블러드 소속사인 고동 엔터테인먼트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무공공 프로덕션은 드라마의 대가로 알려진 눈길 프로덕션의 이사문PD 밑에서 5년간 경험을 쌓은 젊은 감독 유용진이 대표로 있는···.]

-그러니까 제작사가 ㅅㅎㅇ보다 민준 이미지가 더 맞는 것 같아서 캐스팅했다는 거잖음? 뭐가 문제야?

ㄴ연기가 문제지.

ㄴ연기고 뭐고 제작사가 뽑았으면 그만인 거지, 왜 민준 욕하고 ㅈㄹ하냐는 거임. 

-이건 이희우 잘못ㅇㅇ 주제넘게 지랑 아무 상관없는 작품 캐스팅까지 이래라 저래라 나불대니까 이 사달이 나지ㅋ

-ㅅㅎㅇ예전에 인성 문제 나왔을 때 언플하는 거 보고 ㅈㄴ 쎄했는데 이ㅅㄲ가 문제였네

ㄴ나 아는 애가 ㅅㅎㅇ 직접 봤는데 실제로도 ㅆㄱㅈ 없다함. 

ㄴ그 아는 애가 누군데. 네 뇌내망상 속 친구?

-떠든 건 이희운데 왜 가만히 있는 한율이 후려치고 ㅈㄹ이냐. 이 빌어먹을 악플러들아. 

ㄴ떠든 건 이희운데 왜 가만히 있는 민준이 후려치고 ㅈㄹ이냐. 이 빌어먹을 악플러들아. 

-이희우랑 서한율이랑 사귄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희우가 이럼?

ㄴ떨어진 동전 대신 주워줘도 너 내 여자다 할 ㅅㄲ네, 이거.

-스승인 이사문 감독은 ㅅㅎㅇ 캐스팅했는데 그 제자인 대표는 블블이 더 좋아욧! 하고 깠다는 거네? ㅋㅋ

-근데 님들, 진짜 웃긴 게 뭔지 아심? 아무도 민준 연기 잘한다고 안 해줰ㅋㅋㅋ 심지어 블블 팬들 사이에서도 민준 연기 잘함?? 이런 반응임ㅋㅋㅋㅋㅋ

ㄴㄴㄴㄴㄴㄴㄴㄴㄴ블블 팬들 현재 민준 절대 그 드라마 출연시키면 안 된다고 단체항의 중임.

ㄴ고동ㅅㅂ미친고동ㅅㅂ 첫 연기로 백정역 뭐냐고ㅅㅂ

ㄴ애들만 열심히 잘하면 뭐하냐고 진짜... 소속사랍시고 ㅈㄴ사생은 안 잡고 애들 발목만 잡음ㅡㅡ 빨리 계약 끝나고 다 같이 좋은 회사 같으면 소원이 업겟다..ㅠ

-민주니가 서한율 자리 일부러 뺏은 거 아니에요ㅠㅠ.. 하 진짜 억울하고 답답하다;;

-서한율은 피코 그만해라 진짜.. 왜 이번엔 아닥하고 있는 건데

* * *

검붉은 액체가 여기저기 튄 싸늘한 수술실. 피가 검게 변색된 붕대가 어지러이 널브러진 소파 끝자락에, 피가 묻은 하얀 원피스를 걸친 여성이 앉았다. 드라마 촬영이 진행될수록 점점 메이크업과 분장이 창백해지는 이희우였다.

이희우는 자신의 SNS에 달린 온갖 악플을 보면서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진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불대기는.’

그 옆에는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있었다. 

“괜히 기분만 나빠지니까 댓글 그만 보고, 계정 잠깐 비공개로 돌리자. 해명은 회사 측에서 공식적으로 내면 되니까. 응? 희우야.”

“내가 욕을 했어, 뭘 했어?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닥쳐야 돼?”

“그런 문제가 아니란 거 너도 잘 알잖아. 지금 블블 소속사랑 서한율 소속사까지 난리가 났는데···.”

“난리 날 만한 일이 아닌 걸 그렇게 키운 게 나야? 억측해서 부풀리고 욕하는 거 좋아하는 골빈 새끼들이지.”

거침없는 입담에 매니저는 기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스태프들은 모두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각자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저들의 귀는 이쪽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는 걸. 

매니저의 머릿속에 기사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이희우, 네티즌들 향해 골빈XX들이라고 욕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아, 쫌!”

“알았어, 알았어. 내가 적당히 해명할게. 됐지?”

“안 됐어. 대체 왜 무공공에 서한율을 추천해선···!”

“걔가 그 역 연기하면 완전 쩔거 같아서 추천한 것도 죄야?”

“그래, 그래, 아이돌이 옳다구나 하고 그런 역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너도, 재밌겠다면서 하겠다고 나선 걔도 걔다 진짜.”

“지금 한율이 비꼬는 거 맞지? 나한텐 전도유망한 배우 후배거든? 귀한 애거든?”

“배우 아니고 아이돌!”

“겸업이지. 어우, 이분법 사고방식 대박.”

“···곧 사무실에서 오더내려올 테니까 일단 핸드폰 이리···.”

“이희우 매니저님!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네, 갈게요!”

부리나케 대답한 매니저는 이희우에게 단단히 일렀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마! 그냥 웹툰이나 보면서 쉬고 있어.”

이희우는 멀어지는 매니저의 뒤에다 뒤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래.”

핸드폰을 쥔 이희우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희우의 머릿속엔 며칠 전, 이사문PD의 작업실에서 몰래 훔쳐 본 <하울링> 메이킹필름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리얼한 연기를 보고도 계속 아이돌이나 하라고 놔두는 게 이상한 거 아냐? 그나저나 유용진 이 빌어먹을 눈 병신 새끼, 눈길에 있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내가.’

* * *

스윽. 

“먹어.”

“······?”

한율은 에너지 바를 내미는 차남석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조금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은 것 같은데. 

하교 시간이라 버스 안에는 다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의 힐끗거리며 훔쳐보는 시선을 느끼면서 한율은 에너지 바를 받았다. 

“이거 혹시 선물 받은···.”

“내 돈 주고 산거거든?”

“내 건요? 형은 맨날 써한만 편애하더라?”

“너도 억울하게 욕먹으면 사줄게.”

그러면서 차남석은 주머니에서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길우성에게 건넸다. 

“그 전엔 이거나 먹고 있어.”

“감사!”

한율은 가늘게 뜬 눈으로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지난 번 드라마 촬영할 때 드라마 감독이 차남석에게 잔뜩 주었던 그 사탕이었다. 극중에서 결정적인 증거 소품으로 사용되었던. 

시선이 마주치자 차남석이 검지를 세웠다가 휙 내렸다. 말하지 말란 뜻이었다.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에너지 바 포장지를 뜯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 박현우가 한율에게 말했다. 

“넌 당분간 인터넷 댓글 보지 마. 뭐 하나 꼬투리 잡을 거 뜨면, 욕하고 싶어서 욕하는 인간들까지 몰려들어서 정신 건강에 안 좋아.”

“진짜 면전에선 못 할 말을 모니터 뒤에 숨어서 지껄이는 사람들 면상 좀 보고 싶다.”

“봐서 뭐 하려고?”

길우성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권투 자세를 취했다. 

“같이 봉사활동?”

“자세랑 말이 안 맞는데?”

“어떤 배우 분 얘기지? 악플러들하고 합의해주는 조건으로 같이 봉사활동 갔다는.”

“난 아프리카로 데려갈 테다.”

“길우성 스케일 보소.”

“아프리카 사람들은 뭔 죄냐.”

우웅. 그때 조유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회사에서 잘 수습 중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

‘···아닌 것 같은데.’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이번엔 [이희우 저격]이 실검에 떠있었다. 이번에도 발단은 이희우의 SNS. 올린 시간은 고작 30분 전이었다. 

[잘하는 사람을 응원한 것뿐인데 그게 엉뚱한 사람을 저격하는 죄가 될 줄 꿈에도 몰랐네요. 그 해석법, 한 수 배웠습니다>_

우웅. 핸드폰 화면이 전화 수신으로 바뀌었다. 

“네, 팀장님.”

잠시 후, 한율은 한동안 방치했던 자신의 SNS에 들어갔다. 가장 최근에 올렸던 글이 지난달이었는데, 그 아래로 괜찮냐 걱정하는 팬들의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한율은 SNS에 새 글을 올렸다. 

[응원하고 걱정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그러나 전 제가 입기엔 부담스럽다 여기던 옷이기에,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미난무> 웹드라마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 #미안해하지마세요, #감사합니다]

곧 밑으로 댓글이 달렸다. 

-이렇게 말 예쁘게 하는 애를...ㅠㅠ 아무것도 모르면서 욕하는 나쁜 사람들은 벌 받아야 함!! 한율아 너무 상심하지 마ㅜㅜ

-진짜 심사가 뒤틀린 악플러들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오빠;ㅅ;)/ 

-내가 괜히 미안하네, 그래도 응원함/미안해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래..ㅠㅠ... 해시태그로 주고받는 이 선후배 간의 대화 무엇8ㅅ8

-차라리 잘 됐어 한율아. 아무리 인기웹툰 원작이라드 백정 역이라니이..(。ŏ﹏ŏ) 후.. 누나 많이 속상할뻔햇따..

-더 좋은 작품 들어올 거야! 서한율 홧팅!ヾ(o´∀`o)♡♡♡ 

한율이 SNS를 올린 직후 WB래빗 공식 SNS에도 간략한 입장문이 올라왔다. 언론매체를 통해 기사도 띄웠다. 

<가미난무>에 캐스팅 제안을 받아 미팅을 진행한 건 사실이지만, 확정되진 않았기에 다른 배우에게 역이 갈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배우 A씨를 비롯해 보이그룹 B와 관련하여 악의적인 허위사실 유포나 소속 아티스트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및 악플은 선처 없는 법적 조치를 취할 거라 못 박았다. 

비슷하게 고동 엔터에서도 소속 아티스트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및 악플에 대해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블블의 민준의 <가미난무> 웹드라마 출연에 대해서도 다시 신중히 재검토하겠다는 말도 함께. 

블블의 민준은 개인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미래가 기대되는 후배와 방송국이 아닌 기사에서 먼저 만날 줄은 몰랏어오..(´•_•`)]

이렇게 당사자들이 직접 나선 뒤에야 <가미난무> 캐스팅 소란은 빠르게 진정되었다.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연습을 마치고 핸드폰을 돌려받은 한율은, 만 하루도 안 지나 훅 꺼진 반응을 확인하곤 고개를 흔들었다. 네티즌들에겐 이미 지나간 사소한 일 중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길우성도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이럴 때 보면 냄비근성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무턱대고 욕하던 것들 입 싹 닦고 사라졌네.”

우웅. 

-[연습 끝나면 민준 SNS에 좋아요라도 눌러줘^^ 오늘도 수고했다.]

조유찬이 보낸 메시지엔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걸 타고 가자 블블 민준의 SNS가 떴다. 

-오빠 정말 회사에서 시킨다고 다 하지 마요.. 자꾸 이러면 진짜 앞으로 민호구라고 부른다(⊙▂⊙✖ )

-꽃길만 걸어도 모자를 판에 정말ㅠㅠ..

그의 SNS에는 백자 역은 절대 안 된다며 뜯어말리는 팬들의 댓글이 가득이었다. 

한율은 민준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나왔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우웅. 

[BBM-Jun님이 당신을 팔로우했습니다.]

대화가 뭐 이러냐

“······?”

오늘 일로 인해 엮이긴 했지만, 실제론 말 한 마디 섞어본 적이 없는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데. 하지만 아이돌로선 선배고, 별 문제있을까 싶어 한율은 맞팔 버튼을 눌렀다.

민준으로부터 DM이 날아왔다. 

-[고맙고맙! 쏘리소리ㅜ]

-[안 자고 뭐해?]

한율은 예의바르게 연습이 지금 끝났다고 대답했다. 민준이 이번엔 대뜸 번호를 날려 보냈다. 

-[많이 피곤하겠다. 내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언제든 연락해!]

SNS에 좋아요를 눌렀기로서니, 바로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것도 모자라 번호까지? 영 부담스럽다. 

한율은 앞서 가던 차남석을 잡아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이 사람 원래 이래요?”

단숨에 정황을 파악한 차남석이 고개를 기울였다. 

“블블에 대해선 멤버 대부분이 호구같다는 것 외엔 잘 모르겠는데. 회사에서 시켜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니까 적당히 예의바르게 대답해. 아니면 내일 현우한테 물어보든가. 걔 친구가 고동에 있거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점심시간. 얼굴 보기 지겹다고 하면서도 오늘도 굳이 찾아와 옆자리에 앉은 박현우가 물었다. 

“혹시 민준 형님한테 또 연락 왔어?”

이미 차남석에게 간략히 들은 모양이었다. 

“네, 아까.”

“뭐래?”

한율은 말로 설명하기 귀찮아 민준과의 톡방을 보여주었다. 

-[넌 사이다 파야 콜라 파야?]

-[네 대답에 한우스테이크가 걸렸어ㅠ]

[탄산은 레몬맛 탄산수요.]

-[...]

-[찍먹? 부먹?]

[볶아서 나온 건 먹어봤어요.]

-[...]

-[양념? 후라이드?]

[치킨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요.]

-[.............]

-[고양이가 좋아, 강아지가 좋아?]

[먹는 걸로요?]

-[말고ㅡㅡ]

[고양이요.]

-[^^]

“대화가 뭐 이러냐···. 한우스테이크는 또 뭐야.”

그러면서 박현우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삐약, ···삐약, 삐약.

열심히 밥을 먹던 길우성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한 마디 했다. 

“형, 그 알림음 다른 걸로 바꾸면 안 돼요? 좀 깨는데.”

“넌 냐옹이잖아, 이 냥덕후야. 그리고 동생이 설정한 거야. 바꾸면 삐쳐.”

“동생이 있었어요? 몇 살?”

“여덟 살. 초1.”

“와··· 열 살 터울 대박. 엄청 귀엽겠다.”

“귀엽긴 무슨.”

박현우가 자신의 핸드폰을 한율에게 보여주었다. 고동 엔터에 있다는 친구가 보낸 메시지인 듯했다. 

-[민준이 형?]

-[그 형 차캄ㅇㅇ]

-[ㄹㅇ]

삐약. 

-[가끔 우리한테 치킨도 사 줌ㅇㅇ 1인1닥]

삐약. 

-[닭]

착하다는 근거가 단순하네. 

박현우가 핸드폰을 회수했다. 

“캐스팅 건은 고의가 아니지만 그래도 괜히 너한테 미안해서 연락하는 거 아냐? 이 형 은근 호구기질 강하다고 들었거든. 그런데 너 진짜 치킨 안 좋아해?”

박현우의 시선이 예전, 한라산에 가겠다고 했을 때 저를 신기한 생물처럼 바라보던 길씨 남매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안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예요?”

* * *

“안 돼. 인정할 수 없어.”

“왜! 볶먹이면 부먹에 가깝잖아!”

케이블 채널 뮤닷의 음악방송 <락뮤닷> 블랙블러드 대기실. 

블블 멤버들은 테이블에 각종 도시락을 펼쳐놓은 채 민준을 중심으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지. 탕수육도 볶먹파가 따로 있으니 탄산처럼 무효처리하는 게 맞지.”

“맞아, 맞아.”

“좋아, 그러면 민준! 이번엔 이렇게 물어봐. 짜장이냐 짬뽕이냐.”

그들은 서한율의 대답을 두고, 많이 맞추는 사람이 가장 비싼 한우스테이크 도시락을 먹기로 내기 중이었다. 

민준은 대놓고 한숨을 쉰 후 한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짜장? 짬뽕?]

-[둘 다 별로요.]

“···이 자식 은근 입맛 까다롭네.”

“혹시 일부러 아냐?!”

“차라리 딴 거 묻자.”

그때 서한율이 연달아 메시지를 보냈다. 

-[저 이제 수업 들어가 봐야 해서. 맛점하세요.]

“안 돼···, 가지 마···!”

“고양이 파는 손을 들어라. 가위바위보다.”

똑똑.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소파에 편히 앉거나 늘어져있던 블블 멤버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네, 들어오세요!”

무대 의상을 갖춰 입고 메이크업과 헤어 손질까지 다 받은 보이그룹 여섯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블블 멤버들이 일어나자 그들이 일렬로 서더니 우렁차게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다. 

“오늘 데뷔하게 된 melt one's heart! MOHE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데뷔 축하해요!”

같은 판에 들어온 이상 좁은 성공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이지만, 블블 멤버들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서로 CD를 교환하는 와중, 블블 멤버 중 한 명이 누군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 혹시 보컬리스트에 나왔던 그 분 아니에요?”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선 MOHE의 멤버가 입가를 올렸다. 그리고 재차 고개를 숙였다.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해원이라고 합니다!”

이해원 옆에는 <보컬리스트 시즌3>에 함께 나갔던 안인섭과 또 다른 한 명도 있었지만, 안인섭은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실망하거나 분한 내색 없이 힘차게 외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블블 리더 수재가 넉살 좋게 웃었다. 

“무서우니 조금은 덜 열심히 해줘요, 후배님들.”

MOHE는 대기실마다 전부 들러 똑같은 인사를 반복하고, CD를 돌리고, 본인들의 대기실로 돌아올 때까지도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싹싹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문을 닫는 순간, 그들의 안면은 180도 바뀌었다.

“무서우니 조금 덜 열심히 해달란다, 크.”

“어차피 지들한테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가식 쩔어, 씨발.”

“가까이서 보니까 지들도 화장 떡칠했더구먼. 그러면서 TV에선 존나 잘생긴 척 했던 거였어?”

“솔직히 우리 해원이가 걔네 얼굴 다 발랐다. 안 그러냐?”

안인섭이 이해원과 어깨동무를 하며 멤버들에게 물었다. 멤버들이 인정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해원은 입가를 올리곤 거울을 보는 척 슬쩍 떨어졌다. 

“블블 걔넨 솔직히 시기를 잘 타서 뜬 거지.”

“대형 가수들 해외로 다 빠졌을 때 빈집털이 연달아 성공. 인정?”

“어, 인정. 근데 인섭쓰, 민쓰, 해원이만 알아보고 너희 둘 개무시했을 때 어땠냐?”

“솔직히 한 대 날리고 싶었다 진짜.”

“야, 그런데 아까 감소 순형이 존나 쩔더라. 시발, 가슴이—.”

“걔 남친 존나 부럽. 나라면 침대에서 안무 춰달라고 한다.”

“미친 새끼. 그럼 나는···.”

괜히 세팅된 머리를 손으로 슬쩍슬쩍 건들던 이해원은 거울에 비친 멤버들의 모습을 보았다. 조금 전에 직접 본 사람을 대상으로 귀가 썩을 것 같은 음담패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조는커녕 껄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저들의 날카로운 비난과 뒷담화가 저를 향할 것임을 알기에, 곧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순형이 아직도 안 깨졌냐? 열애설 터졌을 때 남자 쪽이 존나 정색하면서 부정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몰랐냐? 순형이 새 남자로 갈아 탄 지가 언젠데. 이번엔 야구선수라고 하더라.”

“존나 밝힌다, 걔도.”

“그러니까 운동을 해, 운동을. 허벅지를 키우라고.”

혹시 다른 보이그룹 사이에서도 이런 대화가 일상적으로 오고 가는 걸까. 이해원은 몇 달 전, 처음 이 방송국에 발을 들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함께 방송을 했던 연습생들을. 다들 어리바리하고 순둥순둥했다. 

‘그래, 그땐 다들 뭘 모르던 때였으니 조용했던 것뿐이야. 이 바닥 더러운 거 누가 모른다고.’

어쩌면 조금 전 만난 블랙블러드도, 자신들이 찾아가기 전까지 여자 얘기나 나누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추잡스러운 얘기를 늘어놓는 저들이 방송국에, 그것도 자신과 같은 그룹 동료로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도 그럴게, 매니저도 멤버들이 뭐라 떠들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고은훤. 넌 나보고 더러운 시궁창에 스스로 들어가는 거라 말했지만, 너 역시 이 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고 지껄인 거잖아. 원래 남에게 잘 보여야 뜨는 게 이 직업이라고. 거기에 덤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지.’

이해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나마 성격이 유한 멤버에게 말을 걸었다. 

“난 리더인 제유가 제일 예쁘던데, 형은요?”

멤버가 가만히 이해원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야, 제유 그거 성괴야.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걔한테 말 한 마디 걸어보려고 수작부리지 마. 갓 데뷔한 뭣도 없는 신인이 들이대면 그날로 바로 감소 년들이 돌아가면서 씹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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