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수업이 모두 끝나고 교정을 가로지를 때,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리던 길우성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써한. 우리 과 실무용 2시간씩 있잖아.”
“그렇지?”
“그런데 회사에서도 2시간 필수고, 11시에 레슨 끝나면 1시까지 또 자율연습 하잖아? 다 합하면 6시간이다?”
“그런데?”
“따로 떨어뜨려놓으면 실감이 잘 안 나는데, 합쳐놓으니 어마무시하게 느껴지지 않냐? 학교 다니는 학생이 하루에 6시간씩 춤을 춘다는 게?”
별 게 다 새삼.
“그렇게 치면 주말엔 9시간씩 추잖아.”
“히익···! 그러네? 우리 뭔가 대단한 것 같지 않냐?”
“연습생이면 다들 이러지 않아?”
“그런가? 다른 회사 연습생 친구가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같은 반에도 다른 회사 소속 연습생들이 있지 않나? 이미 데뷔한 사람도.
한율은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같은 학교에 다닌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학교에서 본 길우성은 의외로 교우관계가 협소했다. 아이들과 사이가 원만하기는 하지만, 따로 어울리는 친구는 일부러 만들지 않은 느낌.
‘그러고 보니.’
처음 길우성을 SNS로 찾았을 때에도 길우성의 팔로워와 팔로잉은 제로였다. 지금은 소수의 팬들이 붙어 숫자가 조금 늘긴 했지만.
“야, 길우···.”
어느새 교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교문 뒤에서 낯선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 명이 불쑥 튀어나와 인사했다.
“받아주세요!”
그리고 거절할 새도 없이 대뜸 종이가방을 덥석 넘기더니,
“힘내세요!”
“싸랑해요!”
손하트를 날리면서 쏜살같이 도망쳤다.
“······?”
3초도 안 되어 벌어진 상황.
뭐지. 종이가방을 들고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한율을 길우성이 핸드폰으로 찍었다.
“써한, 강제 기습선물 인증샷.”
찰칵.
한율은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받은 선물을 꺼냈다. 박세은이 자주 사용하는 이모티콘과 퍽 닮은, 솜사탕처럼 생긴 새하얀 토끼인형이었다. 새카맣고 동그란 두 눈에 당근을 품에 안고 있는 인형은 굉장히 보들보들했다. 인공적인 사과향기도 났다.
[언제나 응원할게요♡
P.S-거절은 진지하게 거절합니다.]
귀여운 토끼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읽은 한율은 작게 한숨 쉬었다.
선물은 손편지만 받겠다고 한 걸 알고, 그렇게 떠넘기듯 주고 바로 도망친 게 분명했다.
지난 번, 다음부터는 선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싫다고, 자기만족이라고 외치던 후드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자신에게서 뭘 보고 호감을 품는 것인지.
‘외모? 막연한 동경?’
예전에 차남석에게 듣기론, 일부러 인지도가 적은 연예인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좋아서 팬이 된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로 각인되고 싶다는 마음에 팬이 될 대상을 선택한다고.
토끼인형을 보며 진지하게 생각하는데, 길우성이 그런 한율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사진 찍고 SNS에 올리는 게 좋지 않아? 선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면 실망할 것 같은데.”
“······.”
“뭐야, 왜 그렇게 봐?”
“네가 그런 조언을 하니까 이상해서.”
“뭣이?!”
그래도 쓸모 있는 조언이라, 한율은 토끼인형을 안은 채 셀카를 찍었다. 그러나 당장 SNS에 글을 올리진 않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회사로 간 뒤 한율은 2층 사무실로 향했다. SNS에 글을 올리기 전엔 꼭 자신한테 먼저 검사받으라고 한 조유찬의 당부가 있던 까닭.
메모 앱에다 먼저 작성한 메시지를 조유찬이 훑는 동안, 한율은 사무실 한쪽에 설치된 TV로 무심코 시선을 옮겼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심을 녹일 뜨거운 신인의 데뷔! MOHE]
곧 6시부터 방영될 뮤닷 채널의 <락뮤닷> 예고방송. 빠르게 지나간 화면에서 이해원과 안인섭을 본 것 같았다.
‘결국 안인섭이 있는 회사로 갔네.’
조유찬이 한율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음, 이대로 올리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한율이 너 정말 벌써부터 선물 안 받아도 괜찮아?”
“네.”
한율은 TV에서 시선을 떼고 SNS에 글을 올렸다. 숙소에서 인형을 안고 찍은 사진과 함께.
[오늘 갑자기 나타나 선물을 안겨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번만이에요! :)]
“네 말 듣고 들어오는 선물 모두 반송하거나 거절하고 있기는 한데···, 전에 메이커 로고 찍힌 신발도 왔었어. 요즘 너희 또래 애들이 좋아하는 그 비싼 브랜드.”
“괜찮아요, 집에 많거든요.”
“솔직함은 넣어두고.”
한율은 정정했다.
“팬 분이 준 걸 아까워서 어떻게 신어요. 닳는 걸 볼 때마다 마음 아플 텐데.”
“그렇지, 그렇게 대답해야지.”
왜냐하면 길우성이니까
자율연습시간. B연습실에서 만난 차남석에게 TV에서 본 걸 이야기하자, 차남석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엔 데뷔했네. 하, 나중에 방송국에서 만나면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노래도 춤도 그저 그런 것 같던데, 오래 안 가지 않을까요?”
“그래도 최소 몇 년은 이 바닥에 붙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릴 걸. 분명 돈 많은 스폰도 붙었을 테니, 아주 끈덕지게.”
큰 스캔들이 터지지 않는 이상 말이지. 차남석은 그렇게 덧붙이며 사과패드를 들고 멀어졌다. 9월 말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 데뷔조 멤버들은 슬슬 월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율도 빈자리를 찾아 몸을 풀었다. 그러다 시무룩한 얼굴로 들어오는 길우성을 보았다.
“하아······.”
땅이 꺼져라 큰 한숨까지.
“왜 그래?”
“아냐, 아무 것도. ···후우.”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고민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또 한숨 쉰다. 8시 댄스레슨 때는 별 다른 일이 없었으니, 조금 전 10시에 있었던 연기레슨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아직은 댄스를 더 배워야 하는 강보배, 연기레슨보다 한국어공부를 선택한 라이언, 작곡과 프로듀싱 공부를 우선시하겠다는 유호. 이 세 사람을 제외한 데뷔조 멤버들은 수준별로 나뉘어 연기레슨을 받고 있었다. 길우성은 이건우와 함께였다.
“선생님이 왜 그렇게 진지하게 몰입하지 못하냐 혼냈거든. 이대로라면 연기 쪽으론 가망 없는 건 차치하고, 진중한 분위기 곡을 무대에서 하게 될 때 혼자만 따로 놀 거라고 팩폭 미사일을 두두두.”
결국 길우성은 웬일로 1시까지 채우지 않고 먼저 숙소로 들어갔고, 한율은 이건우에게 이야기를 듣고 납득했다.
예전에 길우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데 난 진지한 건 정말 안 되겠단 말이지···.』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다고 했던가?
‘혹시 다른 사람과 필요 이상 가까워지지 않으려는 태도와도 관련 있나?’
초반, 과거의 인연이 전혀 보이지 않던 길우성의 SNS.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올해 이전의 인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SNS든 사소한 말에서든.
과거에 대인관계로 문제가 있었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굳이 깊이 파헤치고 싶진 않았다.
왜냐하면 길우성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그러나 다음날. 오늘도 요란한 사이렌소리에 눈을 뜬 한율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써한···.”
비가 내려 습하면서도 어스름한 방 안. 사다리 위로 불쑥 올라온 퀭한 얼굴이 한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I need your help···.”
* * *
그들이 다니는 예고엔 안무나 연기를 연습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많았다. 그러나 길우성은 점심을 먹자마자 차양이 있는 야외로 같은 회사 식구들을 데려갔다.
투둑투둑. 차양을 타고 빗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연기란 무엇일까요.”
벤치에 앉은 세 사람을 앞에 두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던 길우성이 멈추며 운을 뗐다.
“배우 여러분, 진지한 연기는 어떻게 하는 거죠?!”
“비슷한 상황을 겪은 기억을 소환해서 그때의 감정도 덧칠한다는 느낌?”
아역 배우 출신이자 최근에도 드라마를 찍었던 박현우가 먼저 대답했다. 한율이 이어 말했다.
“기저엔 시선 처리나 딕션 등 기술적인 부분도 깔고.”
“나를 버리고 그 배역 자체가 되어야지.”
“그···게 아니라! 진지하게 감정 잡아서 독백하거나, 눈물을 글썽거리는 내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막, 뭐랄까,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아요? 저놈 저거 뭐하는 짓이지? 왜 혼자 지랄··· 아, 정정.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비춰질지, 쌩쑈하네, 이러고 비웃진 않을지 안 겁나요?”
“너도 춤출 땐 곧잘 몰입하잖아.”
“언제는 개허접이라면서! 그리고 춤출 땐··· 춤에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 시선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하고······.”
“춥다. 들어가자.”
차남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사람들 불러놓고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냐.”
“도와주십쇼, 형님!”
길우성이 두 팔을 완만하게 내리며 허리를 숙였다. TV에서 흔히 본 조폭처럼.
박현우가 일어나 길우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전에 후배님 연기 실력 좀 체크해볼까? 영상 있으면 내놔봐.”
“쌤이 찍었지, 저는 찍은 적 없는뎁쇼.”
“그럼 라이브로 봐야겠네. 서한율, 아무 거나 꺼내봐. 대사 있는 거면 뭐든.”
아무 거나? 한율은 핸드폰에 최근에 봤던 <가미난무> 웹툰을 띄워 박현우에게 건넸다. 길우성도 본 적 있는 웹툰이니 캐릭터를 파악할 시간도 아낄 겸.
“웹툰? 길우성, 너도 띄워.”
길우성도 핸드폰에 같은 걸 띄우자 휙휙 웹툰을 살피던 박현우가 한 부분을 가리켰다.
“3화. 대사만 봐도 뭔 상황인지 한 눈에 잘 알겠지? 내가 이 캐릭터 대사할 테니까, 너는 꼭 잘해야 한다는 부담 갖지 말고 자연스럽게 해. 못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잘할 거라 기대도 안 하니까.”
박현우가 방송에 데뷔한 나이는 세 살. 처음엔 CF였지만 6살에 아침드라마에 캐스팅되어 자연스레 연기실력을 키운 인물이었다. 사실상 배우로 치면 이들 중 대선배였다.
길우성이 그제야 가벼운 느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
가려던 차남석이 다시 자리에 앉아, 핸드폰의 카메라 앱을 실행시켰다. 뺀질거리던 박현우의 인상이 무표정해지더니 곧 슬픈 감정으로 얼룩졌다.
박현우는 연기레슨을 회사가 아닌 연기학원에서 따로 받고 있어, 한율도 박현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털썩. 박현우가 길우성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자, 지금껏 아버지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 아버지와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으려 낮이고 밤이고 열심히 글을 읽고, 무예를 연마하였습니다.”
‘윤가미가 부친에게 아씨와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 애원했던 회상 씬이구나.’
박현우가 간절함 섞인 진지한 얼굴로 길우성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엔 전혀 보지 못했던 가면을 쓰고.
비록 한 손에 핸드폰을 쥔 채 대사를 보고 읊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놀라운 몰입이었다. 발성도 쩌렁쩌렁했다.
“그럼에도 부족한 게 있다면 채우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윤가미의 부친이 윤가미의 말을 가로막을 차례. 그러나 뺀질거리던 평소 모습과 수억 광년 떨어진 갭에 놀란 건 길우성도 마찬가지인지, 길우성은 잠시 박현우를 멍청히 쳐다보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다, 닥쳐라!”
‘라’가 삐끗하여 새되게 번졌다. 사극과도, 캐릭터의 나이와도 안 맞는 어색한 톤이 이어졌다.
“혼인은 가문의 결합이다! 너 하나 잘났다고 성사될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란 말이다!”
스스로도 인지되어 부끄러움이 밀려오는지 대사를 내뱉는 길우성의 얼굴이 빨개졌다. 목소리도 점점 기어들어갔다.
“벼,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겠다며 아등바등 거리는 것이 안타까워 가만히 지켜 보았더, 더니 모든 게 우···, 스워 보이더냐?”
이렇게 허접한데, 계속 해도 되겠냐는 듯 연신 눈치를 살피기까지. 그러나 박현우는 끄떡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소자는 아직 한참 부족하옵니다! 모자라고 못났습니다! 그러니 채우고 싶고, 채우기 이전에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그···.”
그래서일까. 길우성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웹툰의 캐릭터처럼 표정을 굳힌 채 팔을 휘둘렀다.
“그래서 선택한 게 고작 깨진 물그릇이더냐?!”
흠칫. 박현우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실제론 없지만, 웹툰에선 ‘아씨’의 용모파기가 구겨진 채 떨어진 까닭.
“네가 천한 것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고 네 자식까지 그리 만들 것이냔 말이다아!”
“천한 것이라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품어놓고 천하다 하는 것입니까!
그런 뜻이 담긴 분노가 박현우의 얼굴에 번졌다.
뛰어난 연기는 상대방까지 휘어잡는다. 특히나 연기를 배운지 얼마 안 된 아마추어 길우성은 쉽게 말려들어갔다.
“오냐, 네가 이젠 여색에 눈이 멀어 이 아비도 몰라보는구나! 이 배은망덕한—, 콜록, 콜록.”
긴장한 채 힘을 주어 발성한 탓에 목이 건조해졌는지, 길우성이 마른기침을 뱉었다.
“여기까지.”
박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툭툭 바지를 털었다.
“길우성 씨의 연기력 수치 측정이 완료되었습니다. 길우성 씨 당신은.”
길우성이 긴장한 얼굴로 박현우를 바라보았다. 박현우가 한율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처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와 함께 연기로드를 걸으실 수 없습니다.”
“······!”
“어림잡아 10년은 힘들어 보이니, 그 시간에 무대 표정연기만 집중 습득하시길 강력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털썩. 이번엔 길우성이 무릎을 꺾었다.
* * *
MBS의 새 예능, <댄스단!수(秀)!>의 첫 방송 예고 풀버전이 해당 채널에서 흘러나왔다. 비록 길우성은 1화 녹화이자 3차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조유찬은 예고 영상을 따로 저장하고 <댄스단!수(秀)!> 공홈에 가서 게시판과 길우성이 올렸던 예선 영상의 댓글을 살폈다.
그러다 한 댓글을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보란 듯이 꼭 성공하길 바란다.
언뜻 보면 별 다를 거 응원 같지만, 두 번 읽으니 마치 길우성을 아는 사람이 작성한 것처럼 보인다.
‘보란 듯이? 누구한테?’
“안녕하세요!”
그때 문이 열리며 낭랑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고개를 든 직원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반가운 기색이 떴다. 스토커에게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충격으로 한동안 쉬었던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였다.
이전보다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라나는 씩씩하게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라나 씨!”
“몸은 괜찮은 거예요?”
지금은 담당이 아니지만, 3년 동안 크리스탈 래빗의 매니저를 했던 조유찬도 벌떡 일어났다.
사무실은 이내 반가움과 걱정, 감사한 인사로 소란스러워졌다.
라나의 복귀 소식이 전해지자 WB래빗 연습생들 또한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크리스탈 래빗은 이 회사의 간판이자 지주인 자랑스러운 선배였으므로.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공지에 연습생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번 월평 심사엔 크리스탈 래빗도 참여합니다.”
그렇게 9월 마지막 주 토요일.
WB래빗에서 가장 넓은 연습실에 소속 연습생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다.
“정기 월평에 너 참석하는 거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지난달엔 미국에 있었으니까요.”
“7월에도 촬영 때문에 나랑 따로 봤었지.”
누구도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자리를 잡고 앉다보니 데뷔조 멤버들끼리 옹기종기 모인 형태였다. 겹치는 레슨이 부쩍 줄어들었거나 아예 마주칠 일이 없어진 다른 연습생들 간엔 어색한 기류도 돌았다. 특히 굴러온 돌인 강보배는 데뷔조 멤버들하고만 있었을 때보다 더욱 주눅 든 모습이었다.
“보배 형은 첫 월평이죠? 소감이 어떻습니까?”
길우성이 살짝 쥔 주먹을 마이크처럼 내밀었다. 강보배는 어버버 하다가 더욱 쪼그라들었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네,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연습한 대로 해. 가람이는 처음 월평 했을 때 사람들 보면서 못하겠다고,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눈감고 했다가 카메라랑 부딪혀서 코피났···.”
“으아아! 흑역사! 으아아!”
유호의 폭로에 박가람이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부림쳤다. 차남석이 강보배에게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처음은 너랑 다를 바 없었으니까. 실수해도 비웃을 사람 없어.”
“···땡큐.”
“······.”
“······?”
고마움을 표하는 강보배의 옆에서 길우성이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한율은 의아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좌기훈 대표를 위시해 트레이너들 그리고 크리스탈 래빗 멤버들이 연습실 안으로 줄줄이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다들 열심히 해요!”
연습생들이 긴장한 얼굴로 술렁거렸다.
“진짜 선배님들이 다 왔어.”
“현역 앞에서 더 떨려서 어떻게 하냐···.”
월말평가가 시작되기에 앞서, 좌기훈 대표가 연습생들에게 알렸다.
“이번 월말평가부터, 데뷔조는 가장 마지막 순서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마지막이라니.
데뷔조가 되고 첫 월평이었다. 데뷔조 멤버로서 손색이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뜩이나 평소보다 긴장하고 부담감을 느끼던 멤버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금 전까지 까불던 박가람도 입을 꾹 다물고 하얗게 질린 제 손을 연신 주물렀다.
오늘의 실수로 자칫 데뷔조 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걱정. 그리고 다른 연습생들보다 집중레슨을 많이 받았음에도 자리를 빼앗긴다면, 그것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신경 써야 할 건 실력만이 아니다
반대로 데뷔조에 들지 못한 남자연습생들의 눈엔 투지가 만만했다. 한두 명은 회사를 옮기지 않을까 했던 예상과도 달리 그들은 인원 변동이 없었다.
한율은 호승심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정민솔을 외면하고 미랑을 보았다. 다른 크래 멤버들도 그렇지만, 이렇게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내내 웃는 낯이었던 미랑은 한율과 시선이 마주치자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툭.
“······?”
길우성이 한율의 어깨를 잡으며 눈을 부라렸다. 잔뜩 구겨진 미간 아래로 눈알이 튀어나올 법한 해괴한 얼굴. 한율은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시선으로 응수했다.
월평은 노래부터, 여자연습생들부터 진행되었다.
‘잘 하네.’
한 마디라도 더 나눠본 사람에게 시선이 가기 마련. 한율은 수많은 사람들과 카메라의 중심에서 흔들리지 않고 노래하는 박세은을 보며 생각했다. 깊은 울림은 부족하지만, 귀에 박히는 독특한 음색이었다.
전부터 노래를 잘한다 느꼈던 연습생 몇몇도 눈에 들어왔다. 데뷔조가 아닌 남자연습생들 중에서는 정민솔의 노래실력이 가장 뛰어났다.
연습생들의 박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길우성이 속닥거렸다.
“민솔이 형 완전 칼 갈았나 보다. 저번 달보다 훨씬 좋아졌어.”
반면, 쉰 목소리로 연달아 음이탈을 낸 김형수는 수치로 붉어진 고개를 숙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목이 쉰 게 과한 연습 탓이라 해도 정작 선보여야 하는 날 컨디션이 엉망이면, 그건 관리를 못한 스스로의 책임. 평가하는 이들은 굳은 얼굴로 펜을 놀렸다.
이윽고 데뷔조 멤버들의 순서가 되었다. 호명에 따라 길우성이 첫 타자로 나갔다. 길우성은 방송 때와는 달리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길우성의 노래가 끝나자 보컬트레이너가 무뚝뚝하게 평했다.
“음정을 발음 흘리는 척 뭉개려는 버릇이 많이 사라졌네. 교정하느라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레슨 때마다 트레이너에게 온갖 구박을 다 받는 것 같더라니. 칭찬을 받자 길우성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나 한율의 순서가 되었다.
『노래 해석에 따른 감정은 넣되, 나 이런 감정이다, 알겠냐? 라는 식으로 주장하진 마세요. 지금은 기본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직은 무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히 통해요.』
한율이 연기레슨 때 찍은 영상, <보컬리스트 시즌3> 영상 및 CF까지 모두 챙겨보고 왔다는 왕연수가 한 조언.
‘최대한 힘을 빼고 기본으로만.’
한율의 노래가 끝난 후, 좌기훈 대표가 물었다.
“기교를 다 빼서 부른 건 선생님 의견인가요?”
왕연수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네. 데뷔하기 최소 3개월 전까지는 쓸데없이 기교 넣지 말라고 하셔서요.”
오오. 연습생들이 낮게 감탄했다. 담담하게 ‘데뷔’를 내뱉는 한율의 태도에서, 이미 본인의 데뷔를 기정사실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 까닭.
좌기훈 대표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연습생들의 노래 평가가 끝난 후엔 점심시간 겸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길우성과 박가람은 긴장이 풀려 흐느적거리는 강보배를 부축하며 걸었다.
“중간에 가사를 씹었어···.”
“걱정 마요, 형. 우리 귀엔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
좌기훈 대표는 강보배에게 노래 다음으로 랩까지 시켰다. 직접 고르고 온 돌의 저력을 보여주기 위함인 듯 했으나, 당사자인 강보배는 갑작스런 프리스타일 랩 요청에 적잖이 당황해했다.
“속초바람 맞다 노래바람 맞아, 춤바람도 신! 들릴까 걱-정 쉿!”
“하지 마···, 으으···.”
“흑역사 적립을 축하하네, 동향 후배.”
“쉿 맞죠? 쉣 아니고? 일부러 둘 다로 들리게끔 한 건가?”
“흐즈믈르그.”
강보배가 WB래빗에 온 건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같은 방을 사용하고 회사에서도 몇 시간씩 붙어 있다 보니 빨리 친해졌다.
유호가 식당에선 장난치는 거 아니라고 주의를 주고 나서야 셋은 얌전히 식판을 들었다.
“그런데 진짜 크래 선배님들 얼굴에서 빛이 나더라···. 학교에서도 그래요? 형, 미랑 님이랑 같은 반이라면서요.”
강보배가 기대어린 시선으로 박가람에게 물었다. 박가람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평범한데? 그리고 너무 님님 그러면서 받들지 마. 선배이기 이전에 우리랑 같은 사람이야. 안 그러냐, 서한율?”
조용히 그들 뒤에 줄서있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는 진 모르겠지만.
“그렇죠.”
“저것 봐. 밖에선 ‘꺄! 꽃토끼!’라고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쟤도, 여기선 귀염성이라곤 전혀 없는 뚱한 후배1일 뿐이라고.”
“그럼, 그럼.”
“······.”
* * *
[남자연습생 9월 월말평가 보컬/댄스 도합점수]
[1. 차남석(100/97)
2. 유호(96/94)
3. 이건우(93/95)
4. 박가람(95/92)
5. 서한율(96/89), 정민솔(98/87)
7. 라이언(91/92)
8. 박현우(94/88)
9. 길우성(81/100)···.]
부담감과 긴장으로 여느 때보다 힘들었던 9월 월평이 끝나고 바로 한 시간 후. 5시 레슨이 있기 전 휴게실에 들른 연습생들은 패닉에 빠졌다.
“이게 뭐야아!”
지금껏 개별적으로 점수와 피드백만 통지하던 회사에서, 이번엔 아예 대놓고 점수에 등수까지 매겨 휴게실 벽에 턱하니 붙여놓았다.
[추신-랩은 개별 점수가 따로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 것! 노래와 춤이 다가 아니에요^^]
“하단에 적힌 추신이 전혀 위로가 안 돼···.”
박현우가 불끈 쥔 두 주먹을 번쩍 들었다.
“예쓰! 길우성 이겼다아!”
“그, 그래도 나 댄스론 1등이거든요?”
“남석이 형 쩐다. 보컬 1등에 댄스도 2등이야.”
“얼굴도 잘 생겨, 노래랑 춤도 잘 해, 연기도 해. 대체 못하는 게 뭐냐?”
차남석은 담담한 얼굴로 캐비닛을 열었지만, 미미하게 실룩거리려는 입가까진 잡지 못했다. 라이언이 뚱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쌈 모태.”
“···야.”
“오올, 민솔! 5등이네? 데뷔조한테 안 밀렸어?”
김형수가 큰소리로 말하며 정민솔과 어깨동무를 했다. 점수표를 노려보던 정민솔이 입가를 올렸다.
“그래봤자 공동인데요, 뭘.”
한율은 정민솔이 자신을 흘기는 걸 느꼈지만, 5시에 잡힌 일본어 교재와 필기구를 챙기고 먼저 휴게실을 나섰다. 지난번보다 점수가 올랐다는 것에 만족하며.
‘댄스는 1점만 오르면 90점대.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
그러나 아이돌 연습생이 신경 써야 할 건 노래, 춤을 비롯한 실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바로 다음 날 일요일 밤. 예정대로라면 ‘심신안정’이 있는 시간.
한율은 라이언, 박가람과 함께 조유찬의 차에 올랐다. 차는 10여 분을 달려 한 소형 빌딩 주차장에 세워졌다.
“조용히 따라와.”
조유찬이 그들에게 손짓하며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대부분의 조명이나 간판이 꺼진 건물을 올려보다가 그를 좇았다.
“어디 가는 거예요?”
“형, 설마 우리 팔아넘기려고···?”
“무서.”
조유찬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곤 씩 웃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안심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박가람과 라이언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조유찬을 바라보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한율이 마지막으로 오르자 조유찬이 누른 건 5층. 세 사람의 시선이 절로 한쪽 벽면에 부착된 안내판을 향했다.
라이언이 어설픈 발음으로 읽었다.
“산부잉가, 치이꽈, 피부 간리실?”
띵. 경쾌한 차임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설마···.”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박가람의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조유찬이 박가람의 어깨를 감싸며 함께 내렸다.
“자, 가자, 가자.”
조유찬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진료시간이 끝난 지 한참 된 치과였다. 환하게 불이 켜진 안에는 치과 의료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WB래빗에서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접수할 동안 잠깐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
“저 중딩 때 치아교정 다 끝내서 더 할 것도 없는데요! 양치도 매일 열심히 하는데!”
그제야 박가람이 조유찬에게서 성큼 떨어지며 외쳤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걸로 보아, 치과에 어지간히 학을 뗀 모양이었다.
한율도 조유찬이 대답하기 이전에 끼어들었다.
“저도요. ···중1 때 교정 끝냈는데.”
사실 치과가 질색인 건 한율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세계, 로건 워커의 삶까지 통틀어 난생 처음 치과를 찾았을 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생생했다.
누군가에게 입을 쩌억 벌려 안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수치심을 넘어, 입을 벌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의사가 어떤 처치를 하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으며, 위잉위잉 울리는 차가운 기계음은 마치 그대로 뇌까지 뚫어버릴 것 같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한율은 투영 마법을 쓸까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었다.
조유찬이 안심하라는 얼굴로 씩 웃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등학생이지. 안심해, 간단히 검사만 할 거거든.”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다행히 별 문제 없으니, 한율인 자연스러워 보이게 한 톤만 밝게 하는 게 좋겠네요.”
한율은 스케일링과 치아미백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전혀 아프지도 않고 생각보다 빨리 끝나 안심한 건 잠시 뿐. 의료진이 난데없이 소독약으로 적신 탈지면으로 귓불을 닦고 아프게 주무르더니, 이상하게 생긴 도구를 귀에 댔다.
뚜둑.
“······?!”
“손으로 만지지 말고, 오늘 밤은 물 안 닿게 조심하세요. 잘 때 베개에 눌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소독할 땐···.”
뚜둑. 마저 다른 쪽 귓불에다가도 피어싱을 박으며 의료진이 말을 이었다.
“탈지면에 소독약 적셔서 톡톡톡. 대가 14k이기는 하지만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염증 생기면 바로 빼고 피부과 가셔야 해요.”
“······네.”
한율의 양쪽 귀에 푸른색 모조보석 피어싱 한 쌍이 반짝거렸다. 다른 치료실에서는 라이언의 비명이 새어나왔다.
“오마갓, 오마갓, ···므아아아!”
위이이잉.
“그리고 2주 동안은 콜라나 홍차, 커피처럼 착색을 일으킬 수 있는 음료 피하시고, 너무 차가운 물도 안 돼요. 얼음은 절대 금물이고요.”
치과에 오자마자 거부반응을 보였던 박가람은 의외로 조용했다. 검사를 한 후 깊은 충치가 발견되어 신경치료를 받았음에도.
그는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젠 누구도 믿지 않겠어.”
그 옆에선 라이언이 동감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붉게 충혈된 눈과 쉬어버린 목소리로.
“나도.”
예고 없이 치과에 끌려갔었다는 세 사람의 이야기에, 숙소에서 만난 멤버들은 비웃기는커녕 안색을 창백하게 굳혔다.
깊은 새벽.
WB래빗 데뷔조 숙소엔 이를 박박 닦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