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427)

* * *

데뷔조 멤버들의 레슨 스케줄엔 기본적으로 휴일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단 하나 예외가 있기는 했다. 

바로 평일에 스며든 공휴일. 

일반 연습생이었을 땐 오전과 이른 오후에 단체레슨이 있었지만, 데뷔조가 된 이후 단체레슨에선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공휴일이라 학교도 가지 않으니, 오후 6시 레슨시간까지는 사실상 자유였다. 

개천절을 맞이하기 하루 전날 밤.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일은 단군 할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

오동식 팀장도 모처럼 휴일이니 오후 레슨이 있기 전까진 푹 쉬라고 했다. 

『그렇다고 너무 풀어지면 안 됩니다. 다 검사합니다.』

대체 뭘 어떻게 검사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데뷔조 멤버들은 간만에 늦게까지 실컷 잘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들떴다. 

그리고 다음 날. 

위이이잉!

“—사이렌 알람 누구야, 대체!”

알람을 사이렌 소리로 설정해둔 게 유호란 사실은 다들 알게 된 지 오래였지만, 자다 깬 목소리엔 짜증이 가득 담겼다. 

“미안···, 설정 해제하는 거 깜빡 했어···.”

한율은 옆방의 소란을 들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오늘의 날씨를 확인했다.

[하루 종일 맑음/미세먼지 좋음 단계]. 

한율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어디 가?”

간단히 씻고 외출 준비를 하자 2층 침대 위에서 길우성이 고개를 뒤로 꺾은 채 물었다. 한율은 자신의 침대자리로 올라가 이불과 시트, 미리 벗겨둔 베개커버를 챙겼다. 

“빨래방.”

집에 있을 때나 모친이 깔끔하게 관리해줬지, 여기에선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그리고 숙소에도 세탁기가 있긴 하지만 건조대 자리가 넉넉하지 않았다. 늘 다른 사람 옷도 널어져있고. 

툭. 뭉친 빨랫감을 아래로 떨어뜨린 한율은 침대 구석에 놔둔 토끼인형과 베개도 집었다. 아직은 깨끗해서 세탁은 불필요해 보이지만, 햇볕에 소독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면 괜찮겠지.’

한율은 볕이 잘 드는 발코니 건조대 자리에 베개와 토끼인형을 집게로 대롱대롱 달아놓았다.

내가 데뷔조의 센터다

숙소 근처에 있는 셀프 빨래방. 대형 세탁기가 빨래를 대신해주는 동안, 한율은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산에 다녀오기엔 조금 빠듯할 것 같고. 집에 한 번 들르는 게 좋으려나?’

그렇잖아도 매일 모친이 보내는 메시지에서 슬슬, 언제 집에 올 수 있나 서운해 하는 기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가끔 사진을 보내고 영상통화도 하는데 말이다. 

‘빨래 다 되면 숙소에 갖다놓고 다녀와야겠다.’

두 시간 후. 건조까지 다 된 빨래를 들고 숙소로 돌아온 한율은 의아한 광경과 맞닥뜨렸다. 

“어···.”

발코니에서 한율의 토끼인형을 가지고 나오던 라이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들고 와요?”

라이언이 한율과 제 손에 들린 인형을 번갈아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기여워서! 자!”

“······?”

“야, 서한율.”

인형을 넘기고 허둥지둥 화장실로 들어가는 라이언을 의아하게 보는데, 차남석이 한율을 불렀다. 

“오늘 은훤이 형이 볼 수 있겠냐고 연락 왔는데, 시간 괜찮냐?”

대체 뭐지. 한율은 햇볕 냄새와 더불어 여전히 인공적인 사과 향기가 나는 인형을 살폈다. 토끼 귀 끝에 집게 자국이 생긴 것 외엔 아무 이상 없었다. 

“몇 시예요?”

“4시 30분에 홍대.”

집에 들렀다 가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숙소에 들어간 이후 처음 들러보는 집. 

그러나 한율은 그 며칠 동안 뭐가 달라졌는지, 아니면 그대로인지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퍽 반가워하며 다가오던 모친이 덜컥 동작을 멈춘 까닭. 

“귀걸이··· 했네?”

“아, 네.”

심신안정과는 거리가 먼 치과방문을 하고 그곳에서 피어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 부모도 동의한 부분이었다. 염색을 포함하여.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지가 조금 오래되고, 방송이니 드라마 촬영이니 하는 동안에도 별 다른 언급이 없어 한율도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데뷔하기 전쯤에 하게 될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안 아팠어? 씻을 때나 잘 때 불편하진 않아?”

“괜찮아요.”

한율은 현관에서 모친에게 귀의 상태나, 그동안 자란 키 등등을 확인받은 후에야 거실로 올라갈 수 있다. 

“아빠는 개천절 특집방송이니 뭐니 신경써야할 게 많다고 출근하셨어. 참, 한율이 너랑 의논할 게 있는데···.”

한율이 집에 들르겠다고 연락했을 때부터 준비했는지, 모친이 자연스레 이끄는 식탁엔 온갖 다양한 음식이 올라와있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모친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집에서 개나 아니면 고양이를··· 키울까해.”

“개나 고양이요?”

한율은 따뜻한 색감으로 인테리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넓은 공간이 주는 적적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때때로 모친의 지인이나 외숙 내외가 놀러오기는 하지만, 모친 혼자 시간을 보낼 때가 많은 곳이다. 

“네, 뜻대로 하세요.”

“괜찮아? 집안에서 동물을 키우면 아무리 관리에 신경을 써도 털이 날리고 냄새가 나잖아. 물론 율이 네 방엔 절대 못 들어가게 할 테지만.”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도 동의하신거죠?”

“네 아빠가 먼저 말을 꺼냈어. 얼마 전에 유기동물 보호소에 사람들이랑 함께 봉사활동 갔다 온 썰을 20분 내내 늘어놓다가. 그래서 말인데···.”

모친이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보호소에서 어미가 죽고 남겨진 새끼고양이들이 있거든? 이 애들 아니면, 이 강아지가 정말 사람 손길이 필요한 앤데···.”

외조부모의 집에서도 현재 개 두 마리와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운다. 모친도 결혼하기 전에 키워본 경험이 있으니, 딱히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율은 식사 내내, 모친이 그동안 구상한 엄청난 맞춤형 캣타워 설계 계획까지 듣게 되었다. 

‘다음에 이곳에 들를 땐 왠지 각오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괜찮겠지.’

* * *

쌈밥정식집에서 간만에 만난 고은훤은 살은 조금 빠졌지만, 인상은 더 환해져 있었다. 

“세현이한테도 연락했는데, 하루 종일 연습해야 해서 힘들다고 하더라. 애가 컨디션도 좀 안 좋아 보이기도 하고.”

“고동이 애들을 좀 빡세게 굴린다고 하더라고요.”

한율은 예전, 안세현이 자신을 대나무 숲처럼 여기고 주절주절 떠들었던 온갖 이야기를 떠올렸다. 본인은 본래 보컬보단 래퍼 포지션인데, <보컬리스트 시즌3>에 나가게 되자 분위기가 조금 시끄러워졌었다고 했던가. 

“그나저나 형은 아깝지 않아요? 연습생 생활 오래했잖아요.”

“해원이 그렇게 나가고 냉정히 생각해봤어. 저런 시궁창 길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치열한 바닥인데, 내가 과연 아이돌로 데뷔해도 잘 할 수 있을까··· 막막해지더라고. 그리고 연기에도 관심 있었고.”

“그럼 회사는 계속 거기에?”

“어, 빚 갚아야지. 하하···, 사실 대표님은 빚 그런 거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솔직히 그럴 순 없잖아. 몇 년 동안 날 믿고 케어해주신 분인데. 그래서 열심히 알바도 뛰고 학원도 다니고 있어. 그러니까.”

고은훤이 넉살좋게 웃었다. 

“좋은 오디션 자리 있으면 정보 좀 주라. 우리 회사가 작아서 그런지 관련 정보가 잘 안 들어와.”

“밥 사주는 진짜 목적이 그거였어요?”

직원이 와서 주문한 음식을 세팅했다.

한율은 좋아하는 각종 채소가 올라오는 걸 유심히 보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우웅.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보컬에 나왔던 잘생긴 그 분?!]

-[구청에서 플라스틱 재활용 캠페인 홍보 모델들 뽑는다는 연락이 왔었어. 지난번에 <종이비행기를 탄 풀피리> 제작한 프로덕션에서도 이번에 뉴페이스 조연급 배우 포함 단역들 구한다고, 회사로 연락 왔었고.]

-[한율이 너도 볼래?^^]

한율은 배우 윤상진에게서 온 답장을 고은훤에게 보여주었다. 아는 사람, 혹은 배우 전문 기획사로만 도는 정보들이었다. 고은훤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와, 진짜 고맙다, 한율아!”

“···후.”

옆에서 짧게 한숨을 쉰 차남석이 입을 열었다. 

“엘디 핸드워시, 독립영화 <고래와 새우잡이> 박 감독님 신작, 딘라면에서도 CF 출연할 단역 구한다고 들었어요.”

“이래서 이 바닥은 인맥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고은훤이 핸드폰에다 들은 정보를 입력했다. 다음엔 더 비싼 걸 사주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며. 

“그런데 형. 혹시 TV봤어요? 해원이 형 나온 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밥을 다 먹었을 때 즈음, 차남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음. 인터넷에서 봤어. 그놈들하고 같이 데뷔했더라. 정말 돈은 있는 모양인지, 화제의 신인 어쩌고저쩌고 띄워주는 기사가 몇 개 올라오더라고. 댓글 반응은 거의 없었지만.”

“그 돈, 곡이랑 안무에 더 투자했으면 좋았을 테지만요.”

한율이 덤덤하게 말하자 차남석이 이어 받았다. 

“인간들도 좀 바꾸고.”

“그럼 아예 다른 그룹이 되어버리잖아.”

고은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늘이 없는 그의 웃음에선, 정말 5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구, 이해원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끊어 내쳤다는 게 느껴졌다.

* * *

10월 중순. 댄스레슨이 끝나자마자 트레이너는 수고했다는 인사 대신, 멤버를 한 사람씩 유심히 바라보다 고했다. 

“이번 달 말에 진행될 월평의 그룹댄스는, 데뷔조 여덟 명이 한 팀이 되어 치릅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기에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너가 덧붙였다. 

“라이브도 병행해서.”

“오마갓?!”

발작처럼 나오는 반응에 댄스트레이너가 씨익 웃었다. 

“곡 선정 자유, 안무 자유. 100% 커버를 해도 되고 창작을 해도 되지만, 창작을 했다고 특별히 가산점은 없습니다. 오로지 이전보다 실력이 나아졌는지, 멤버들 간에 호흡이 맞는지, 완성도가 어느 정도인지만 볼 예정이니까요.”

“자유라니···, 그게 더 까다로운데.”

“쌤, 그럼 팝도 괜찮아요?”

“네, 여러분 역량이 잘 드러날 수 있는 곡이면 뭐든 좋습니다. 그럼 오늘도 다들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트레이너가 나가자 멤버들은 곧바로 둥글게 모였다. 

“라이브까지 하라니···, 이거 진짜 본격적으로 빡세지는데?”

“이번 달 월평 29일이지? 앞으로 보름 남았네.”

“일단 10시 레슨 받고난 다음에 다시 모여서 의논하죠.”

“오케이, 콜.”

“콜.”

원은 금세 점이 되어 연습실을 나섰다. 

“그런데 우성, 너 오늘 방송 나오는 날 아니야? 댄스단수.”

“으윽···. 기껏 잊고 있었는데···!”

“자고로 흑역사는 다 같이 보는 게 참맛이지. 연습실 TV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떠들면서 들어간 휴게실엔 중학생 둘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숙덕거리던 두 사람은, 데뷔조 멤버들이 들어가자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막내들, 둘이 여기에서 뭐해?”

“잠깐 쉬는 중이야?”

“그게···.”

김권과 변지욱이 서로를 보며 머뭇거렸다.  

“왜. 무슨 일 있어?”

유호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가며 물어서야 김권이 대답했다. 

“형들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요.”

“분위기가 왜?”

뒤이어 변지욱의 대답.

“트레이너 쌤이 이번 월평 때 그룹댄스 자율, 그것도 라이브도 하라 그래서 의견 모으고 있었는데, 너무 민솔이 형 위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승준이 형이 한 마디 했더니 민솔이 형이, 라이브에 고음까지 하고, 그걸 또 돋보이게 하려면 당연히 월평 점수 순으로 비중을 가져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을 조금, 아니, 많이 재수 없게 했거든요.”

“그래서 싸움난 거야?”

“다행히 싸움까진 안 갔는데 분위기가 작살났죠. 승준이 형이 열 받아서 먼저 나가니까 현우 형도 바로 따라 나갔고.”

이야기를 들은 멤버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만했다. 데뷔조가 아닌 연습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형수는, 친분을 떠나 사람들을 아우를 만큼 리더십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사소한 충돌도 바로 잡기는커녕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방치했을 터. 

유호가 김권과 변지욱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내가 나중에 형수하고 민솔이랑 한 번 얘기해볼게. 그리고 오늘은 늦었으니까 너희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 밝은 큰길로만 다니는 거 잊지 말고.”

“네, 형.”

잠시 후 B연습실. 10시 레슨을 받고 온 데뷔조 멤버들은 약속대로 모여서 월평에 선보일 그룹댄스에 대해 논의했다. 한참의 추천과 논의 끝에, 한 보이그룹이 최근에 발표한 신곡이 선택되었다. 

“보배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오히려 라이브란 점이 부족한 면을 덜 부각시켜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한 번 잘 궁리해보자.”

“그럼 안무는··· 100% 커버론 가지 말죠. 아무리 창작에 대한 특별 가산점이 없다 해도.”

“내가 일단 우성이랑 같이 안무에 대해 생각해볼게. 어쩌면 형한테 도움 청할 수도 있어.”

“도움?”

이건우의 말에 유호가 되묻자 길우성이 대신 대답했다. 

“편곡?”

“아. 하지만 너무 어려운 건 아직 힘들어.”

“짧게만요. 여기 1분 23초부터 시작되는 퍼포 부분이 적당해 보이는데, 이 부분 안무를 새로 짜면서 더 적절하게··· 그 뭐시냐, 새로 짠 춤에 맞게 따다다당, 휙휙, 휘익!”

“······.”

두루뭉술하기 그지없는 설명. 유호는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너희 둘이 안무 짤 때 나도 같이 껴서 의논하자는 거지?”

“욥.”

“랩 파트 가사도 새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내가?”

차남석이 던진 화살에 강보배의 안색이 하얘졌다. 

“이왕 라이브로 하는 거니까 장점을 살려야지. ···라이언 너도.”

강제로 시선을 맞추고 이름을 내뱉는 것처럼 차남석의 표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라이언도 뚱한 얼굴을 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조아.”

“그럼 보배랑 라이언 너희들도 랩메이킹하면서 비트를 조금 바꾸고 싶다 그러면 나한테 와.”

“네.”

“고음 파트는 서한율이랑 가람이 형한테 다 떠넘기면 되고.”

“······.”

“잠깐, 우리 의견은? 댄스에, 그것도 라이브로 고음 지르는 거 엄청나게 힘들거든?”

“이참에 플랭크하면서 라이브 연습 좀 하면 되겠네.”

유호가 활짝 웃으면서 박가람을 달랬다. 

“이 노래, 고음 파트가 센터나 다름없는데. 그래도 싫어?”

박가람이 한율을 돌아보며 주먹 쥔 손을 위로 올렸다. 

“서한율, 가위바위보해. 이긴 사람이 센터다.”

“그냥 형이 해요.”

“앗싸아! 내가 데뷔조의 센터다!”

“자, 그럼 가람이랑 한율이가 고음파트 쭉 불러보고, 누가 더 적절한지 정해볼까?”

“······?!”

우리 살찌면 안 되잖아

“가람이 형 의견 또 무시당했다.”

“크큭.”

그러나 웃고 떠든 건 잠시 뿐. 멤버들은 다시 한 명씩 노래를 불러가며 파트를 정했다. 원곡의 보이그룹 멤버가 13명인 까닭에 분배에도 시간이 걸렸다.

본격적인 연습은 안무가 어느 정도 나온 후 진행하는 걸로 하고, 그들은 얼추 연습 시간을 조율한 뒤 흩어졌다. 한율은 박가람과 화음 쌓는 연습을 하기위해 마주보고 앉았다. 

“형 어디 가?”

유호가 캐비닛에 연습용 신발을 넣자 이건우가 물었다. 

“형수랑 먼저 얘기 좀 해보려고. 오늘 아니면 시간이 잘 안 날 것 같아서.”

“너무 참견하는 인상은 주지 말고, 말 안 통한다 싶으면 그냥 둬. 그 형 속 좁은 거 알잖아. 괜히 애들한테 더 불똥 튈라.”

“알았어. 그럼 숙소에서 보자.”

“숙소에서 보자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박가람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저 형도 오지랖 참···.”

“그런 일이라뇨?”

김형수와 무슨 일이 있었나? 

박가람이 눈을 일자로 만들며 사과패드를 들었다. 

“그런 일이 있어요, 센터 님. 연습이나 하시죠, 센터 님.”

“그나저나 TV본다고 하지 않았어요?”

“엇! 맞다!”

박가람이 남은 멤버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우리 길우성 흑역사 단체관람하기로 했잖아! 벌써 끝났으면 어쩌지?!”

“으아아아···!”

진지하게 원곡 영상을 보며 고뇌하던 길우성이 괴성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 * *

갓 튀긴 치킨 냄새가 깔린 가게는 음악과 사람들의 말소리로 시끄러웠다. 입구에 들어선 유호는 기름진 냄새에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김형수를 찾았다. 김형수는 안쪽 테이블 자리에 낯익은 얼굴들과 함께 있었다. 

한 명은 유호가 스엔 엔터테인먼트에 있을 당시 함께 연습생 생활을 했다가 지금은 대학을 다니며 연기하는 친구고, 또 한 명은 아이돌로 데뷔했지만 썩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 현재 긴 휴식기를 갖고 있는 친구였다.

그들은 김형수까지 넷이서 같은 예고를 졸업한 동창이었다. 

사실 유호는 고교 시절엔 김형수와 친하지 않았지만, 김형수가 WB래빗에 들어온 뒤 친구의 친구란 걸 알게 되어 가끔 이렇게 넷이 모이곤 했었다. 

“김형수, 요새 주말마다 술 마시는 것 같다?”

“유호 왔냐?”

“올만이다, 호? 왜 이렇게 얼굴보기 힘드냐?”

“그래, 너희도 오랜만이다.”

유호는 반갑게 입가를 올리다가 말았다. 빈자리에 앉자 친구가 새 맥주잔을 넘겼다. 유호는 손을 들어 이어서 다가오는 병맥주를 막았다. 

“아니, 난 술은 됐어. 내일 아침부터 댄스레슨 있거든. 사이다 줘.”

“역시 범생이.”

내내 입을 다문 채 유호를 쳐다보던 김형수가 씩 웃었다. 

“야, 그렇게 말하면 난 뭐가 되냐?”

김형수의 옆에는 이미 빈 소주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소주가 아닌 맥주파. 김형수 혼자 한 병을 비웠다는 뜻이었다. 

유호는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주말 아침부터 댄스레슨이 있는 건 데뷔조가 아닌 다른 연습생들도 마찬가지이기에. 

“뭐가 될 건지는 네가 스스로 정하고 행동해야지. 네가 지금 술 마실 때야?”

“야, 오자마자 왜 그래. 형수가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냐.”

“나도 오죽 답답하면 너희들 있는 앞에서 이렇게 얘길 꺼내겠냐고.”

“나왔다, 정색유호.”

배우 친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김형수도 웃으면서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유호는 두 친구를 향해 말했다. 

“애들아,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켜주라. 나 진짜 형수랑 진지하게 할 얘기 있거든.”

“그냥 지금 해.”

탁.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던 김형수가 도로 내려놓았다. 

“훈계질하려면 여기에서 그냥 하라고.”

“야, 김형수.”

“뭘 해도 존나게 안 되는 나랑 달리, 존나 잘나서 당연하다는 듯 데뷔조 된 거 알겠고, 또 인정하니까 그냥 여기에서 말하라고. 좋잖아?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도 너 잘났다는 거 알아야지, 알려야지.”

유호는 김형수의 주량이 고작 한 병이 아닌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건 취기에서 나오는 아무 말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이성을 가지고 내뱉는 시비였다. 

유호는 김형수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포기할 거냐?”

김형수는 소주를 쭉 들이켜고 포크로 치킨을 뒤적거렸다. 

“실력 차이가 숫자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니까 현타 세게 오더만.”

“그래서. 관두겠다고?”

“지금 회사에선 힘들지 않겠냐? 내 위로 애들이 줄줄이 있는데?”

“······.”

맏형으로서 동생들을 두루 다독거려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유호는, 그제야 김형수가 생각보다 더 큰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니 다른 아이들의 신경전이 안중에 없을 수 밖에. 

그러나, 

“그 애들 못지않게 노력해놓고 안 됐단 식으로 포장하지 마. 너 점수표 나오기 전, 그보다 데뷔조 발표 전부터 자율 연습도 제대로 안 나왔었잖아.”

“씨발, 팩폭 존나.”

“야, 김형수. 욕.”

분위기가 험악해질까 친구가 황급히 끼어들었고, 김형수도 곧바로 유호에게 손을 저었다. 

“아, 쏘리. 호 너한테 한 게 아니라 그냥 입버릇. 알지?”

“언제 이뤄질지도 모르고,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걸 위해서 매일 레슨에 연습만 반복하면 지칠 수도 있지. 이해해,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쉬는 것도 잠깐이어야지, 이딴 식으로 술이나 마시면서 한탄만 할래?”

“그럼 안 될 거 뻔히 알면서 계속 하라고? 네 밑에서?” 

“그런 말이 아니잖아!”

높아진 언성에 주변 손님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친구들이 일어나 이리저리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넌 저번에도 그렇고 왜 자꾸 나한테—!”

“······.”

“······후우.”

화가 섞인 한숨을 내쉰 유호는 사이다가 아닌 병맥주를 들었다. ···탁. 그리고 순식간에 비운 맥주병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형수는 고개를 숙인 채 빈 소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 못난 새끼야. 그만 두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그리고 의욕도 없는 남 걱정보다 내 앞가림을 더 걱정해야 할 만큼 만만한 바닥도 아닌데, 주제넘게 훈계질해서 미안하다 새끼야.”

유호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거 내가 마신 맥주 값. 나 먼저 간다.”

“어···. 어, 그래.”

“다음에 보자.”

유호는 여전히 말이 없는 김형수를 노려보듯 일별하곤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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