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427)

* * *

새벽 1시 23분. 적막하고 어두웠던 숙소가 데뷔조 멤버들의 귀가로 환해지고 떠들썩해졌다. 숙소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박가람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놈의 아들시키,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안 들어왔어?!”

“가람이 형 우리 엄마랑 똑같다.”

“호 형···, 가람이 형이 형보고 아들시키라고 했, 어요···.”

“야, 톡 보내지 마!”

드륵. 한율은 습관처럼 온 창을 죄다 열어 환기시켰다.

한율이 창을 열면 늘 유호가 ‘시끄러우니 조용.’ 하면서 주의를 줬기에, 멤버들은 유호가 없어도 절로 성량을 낮췄다. 창밖으로 소란이 덜 새어나가도록. 

이건우가 소파에 앉아 유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어디야? 설마 술 마시는 건 아니지? ······취했냐?”

회사에서 씻고 온 터라 한율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잘 준비를 했다. 다른 룸메이트도 모두 침대에 몸을 뉘였다. 닫힌 문 너머 거실에서 이건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핸드폰이랑 지갑 잘 챙겨.”

툭. 문틈으로 들어오던 거실 조명이 꺼지고 숙소는 다시 어둠에 잠겼다.

오늘도 아침부터 새벽까지, 하루 종일 학교 수업이나 회사에서 레슨을 받느라 고단해진 데뷔조 멤버들은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그르릉. 이건우의 코 고는 소리도 제대로 못 들을 정도로. 

그러다, 

쾅!

난데없이 울린 굉음에, 멤버들의 눈이 동시에 떠졌다. 

“뭐야···.”

“아우씨, 놀래라······.”

“흐어무언데에······.”

삐릭. 전자자물쇠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한율도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눈을 뜨곤 핸드폰을 찾았다. 02시 21분. 유호가 이제야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해. 

거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금방 온다더니···, 술 더 마셨냐?”

“마셨냐? 형한테, 냐아?”

“···많이 드셨나보네요, 형님.”

“건우 너 그거 아냐? 일본 애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끝마다 냐냐 거리는 거 엄청 귀엽대에. 고양이 울음소리랑 같다고. 푸하하!”

“남석, 넌 반대쪽 들어.”

박가람이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오더니 문을 열었다. 거실의 환한 불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새벽에 뭔 난리여···. 어우, 술 냄새.”

거실에선 이건우와 차남석이 술에 취한 유호를 방으로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나 걸을 수 있어, 애들아아.”

“알았으니까 문턱만 넘어주라, 형.”

“와아~, 너희들 언제 이렇게 키도 크고 힘도 세졌냐? 형은 참 놀랐다아?”

“주정 그만 부리고 잠이나 자요, 아저씨. 애들 다 깨우지 말고.”

“나 아저씨 아니야아, 스물 둘이 무슨 아저씨야아.”

“네에, 네에, 주무세요.”

소란은 유호가 얌전히 잠들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숙소엔 잠시 한숨을 푹푹 내쉬는 소리가 퍼지다,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

위이이잉! 위잉! 위잉!

아침. 데뷔조 멤버들은 오늘도 유호의 핸드폰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한율은 어느새 닫힌 창을 모조리 다 열고나서 청소기를 돌렸다. 주말은 9시부터 레슨이 있었지만 학교를 가지 않기에 평소보다 조금 여유가 있었다. 

“오늘 여기 세탁기 쓸 사람 있어?”

“나. 시트랑 베개 커버 빨려고.”

“오후에 비 온다는데?”

“기상청과 나의 예지력 대결이 될 것이다.”

한율은 청소기를 돌리며 아직도 침대에 누워있는 유호를 보았다. 숙취 탓인지 멍하니 끔뻑거리던 눈이 한율을 향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어, 한율은 잠깐 청소기를 정지시켰다. 

“냉장고에···, 물 있어?”

한율은 냉장고의 생수를 가져다주었다. 

“···고맙다.”

새벽에 자신이 부린 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지, 유호는 머쓱하게 눈치를 보며 물을 마셨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청소기를 돌렸다. 

잠시 후, 유호가 숙취로 창백해진 얼굴로 데뷔조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맏형이 되어가지고 새벽 늦게 술 처먹고 들어와서 주정까지 부려 미안하다. 그러니 사과의 의미로···.”

“치킨!”

“붓꼬기버거!”

박가람이 손을 번쩍 들어 외치자 라이언도 질세라 외쳤다. 유호는 스윽 웃다가 잘렸던 말을 이었다. 

“닭가슴살 샐러드랑 단백질 셰이크 살게. 우리 살찌면 안 되잖아?”

“우우···.”

“아직은 괜찮습니다, 형님! 그러니 좋게 말로 할 때 치킨을 내놓으시죠!”

척. 박가람이 인터폰 옆에 붙은 숙소 규칙안내서를 가리켰다. 

“그렇지 않으면 팀장님한테 다 꼰지를 겁니다, 술 먹고 왔다고! 저기 보이시죠? 음주 금지!”

“음주는 숙소 내에서만 금지야, 밖에서 마시는 건 괜찮다고.”

“9시 이후 외출 금지 조항은 어쩔 건데요.”

“어제 회사에서 나가기 전에 형수랑 밖에서 얘기할 거라고, 팀장님한테 미리 말했거든?”

유호가 이리저리 빠져나가자, 박가람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짓다가 이건우를 바라보았다. 

“둘째 형. 우리, 트레이너 쌤에게 오늘 댄스레슨은 조금 더 빡센 안무로 부탁합시다. 기왕이면 반고리관을 최대한 괴롭히는 걸로.”

“···야.”

* * *

김형수가 회사를 옮기기 위해 나갔다는 소식이 들린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자율연습은 자주 빼먹어도, 레슨은 결석은커녕 지각 한 번 한 적 없었던 김형수였다. 그랬던 그가 토요일 온종일 나오지 않자 의아해하면서도 설마··· 하던 연습생들은 맞아떨어진 불길한 예감에 입을 다물었다. 김형수와 친하게 지내던 정민솔은 따로 언질을 들었는지 담담해 보였다. 

“형도 알고 있었어? 형수 형 나갈 거라는 거?”

오전 댄스레슨을 마친 뒤 몸을 풀면서 이건우가 유호에게 물었다. 바로 그젯밤 김형수와 얘기를 해보겠다고 나갔다가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왔었으니. 

유호가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평 점수표 보고 생각이 많아졌었나 봐.”

“그래도 점수가 다는 아닌데···.”

씁쓸하게 중얼거린 박가람이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댄스는 100점이지만 보컬은 81점 나온 길우성이 욱하며 받아쳤다.

“그러면서 왜 날 보는 거죠, 형?”

“그것보다 나는 남은 애들이 걱정이다. 가뜩이나 노골적으로 점수 차이가 드러나 상심하고 있을 텐데, 여기보단 다른 회사로 가서 데뷔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새삼 깨우쳐준 거잖아.”

“글쎄···. 그것도 본인하기 나름이잖아요. 요즘 기획사들 추세가 연습생들을 처음부터 소수정예로 뽑아 집중 관리하는 건데.”

무슨 감성인거지

“그래도 형수 형 정도면··· 음, 괜찮지 않을까? 음색도 매력 있는 편이고. 안무 익히는 속도가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그것도 연습으로 메울 수 있는 정도고.”

쭉쭉. 3시간 동안 댄스연습을 하느라 쓴 근육을 어느 정도 풀어준 뒤 한율은 연습실을 나섰다. 비슷하게 나온 멤버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형수 형은 어디로 옮긴대?”

“모르겠어.”

“같이 술 마신 거 아니었어?”

“······.”

유호가 입을 꾹 다물자 이건우가 미간을 구겼다. 

“위험하게 혼자 마셨냐?”

“형, 호 형한테 냐로 말 끝내면 안 돼요. 또 뭐라 그럴라.”

“형한테 마셨냐아? 냐아?”

“지금 냐라고 했냐?”

동생들이 킬킬 웃으며 놀리기 시작해서야 유호가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주정부린 건 사과했잖아! 하지 마! 그리고 이건우, 길우성! 안무는 잘 짜고 있어?”

“말 돌린다.”

“대충 가닥은 잡았어요.”

“그럼 이따가 밥 먹고 3층 작업실로 와. 그저께 우성이 네가 말했던 부분부터 살짝 건드려보긴 했거든?”

“오케이.”

‘전부터 느꼈지만.’

한율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한창 나이대의 사내놈들이 모인 것치곤 분위기가 참 둥글둥글하다고. 차남석과 라이언 사이가 여전히 삐거덕거리기는 하지만, 데뷔조 발표 전과 비교하면 서로 날을 세우는 일이 줄었다. 

‘서로에게 관심 자체를 안 주는 것에 가깝긴 해도.’

“한율아!”

복도 끝에서 조유찬이 한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밥 먹고 사무실!”

샤워하고 밥 먹고 양치하고. 12시 40분이 되어서야 사무실로 올라가자 조유찬은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한율을 회의실로 끌고 갔다. 오동식 팀장도 함께 들어왔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무슨 일로 불렀겠어요, 일 얘기로 불렀죠.”

자리에 앉자마자 조유찬이 사과패드에 한 영상을 띄웠다. 몇 달 전 찍었던 감성소녀 M/V였다. 조유찬이 재생 바를 쭈욱 넘기다, 한율이 넘어지고 제유가 손을 내미는 장면에서 멈췄다. 

“이번에 제유가 솔로 앨범을 내는데, 제유랑 네 이야기가 솔로곡 뮤비에서 연결되는 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나봐. 가사도 적절하고.”

“그래서 이번 뮤비에도 나와 줄 수 있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오동식 팀장이 설명을 이었다. 

“한율이 네가 괜찮다고 하면 우리가 고양고양 측에다 곡, 뮤비 콘티 등등 자료요청하고 검토 후에 진행여부를 결정할 거야.”

“순서가 조금 이상한데요. 저도 자료부터 봐야 괜찮은지 아닌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유찬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 쉬었다. 

“고양고양 쪽 담당자가 속이 좁아서 그래. 한율이 네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할게요! 당연히 해야죠! 의리!’ 라고 하길 바라는 거지.”

“인지도가 거의 없었던 보컬 초반에 뮤비에 출연해달라고 처음으로 제안해준 곳이기도 하잖아. 그리고 그때 우성이도 넣어 달라 부탁한 것까지 들어주기도 했고.”

“그래도 괜찮을까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같이 작업을 하면···.”

말 한 마디, 무심코 한 사소한 제스처조차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 해석되어 쉽게 부풀려지는 바닥이다. 

‘지난 번 일을 떠올려 봐도.’

한율은 <가미난무> 웹드라마 캐스팅 문제로 잠깐 시끄러워졌을 때, 이희우와 한율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억측 댓글을 본 적이 있었다. 사귀는 사이니까 이희우가 이렇게 나오는 거 아니겠냐는 식으로. 

실제론 드라마 촬영장에서 딱 한 번 본,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인데. 

“스캔들? 괜찮아. 제유랑은 아니고, 미미랑 잠깐 손잡고 걷는 게 끝이라 하더라고. 그리고 최근엔 아예 서로 눈 쳐다보면서 사랑노래 부르는 남녀유닛그룹도 많잖아.”

“같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요즘 팬들도 비즈니스와 사적인 부분을 잘 구분하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음··· 감소가 조금 시끄러운 소문이 있는 그룹이긴 하지만, 그나마 제유가 착하고 싹싹하기도 하고.”

‘그런가?’

사실 감성소녀는 이 바닥에서 태도와 관련하여 평판이 조금 안 좋고, 인터넷에서도 인성 모음집이 돌아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성적과 인기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대형 팬덤을 몰고 다니는 상위까진 아니더라도, 크리스탈 래빗과 붙으면 비등비등한 정도. 비록 크래가 그들보다 2년 후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소속 그룹들끼리 경쟁하는 관계이기는 해도 회사 간의 교류는 다른 문제. 

“전에 찍은 뮤비랑 연계된다고 하면 조금이나마 화제성으로 삼을 수도 있고 말이지. 본격적으로 데뷔 준비하기 전에 너무 공백을 오래 두는 것도 아깝잖아.”

“그럼 촬영은 언제 들어가는 거예요?”

한율이 납득하는 듯하자 오 팀장이 씩 웃었다. 

“일단 자료부터 요청하고.”

* * *

한율은 자기 전, 핸드폰으로 제유를 검색했다. 

[제유(유제희) 만20세

신체: 165cm, 44kg

소속그룹: 감성소녀

소속사: 고양고양 엔터테인먼트

데뷔: 2008 <꿈과 요리하자(MBS)>]

기본적으로 나오는 프로필을 넘기고, ‘인성소녀 모음집’ 내용을 제외한 정보를 살폈다.

제유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성형’. ‘제유의 얼굴변천사’라는 제목으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사진까지 쭉 나열된 이미지도 많았다. 안티들은 아예 제유를 성형괴물, 줄여서 성괴라고 부르고 있었다. 

‘눈매가 더 또렷해보이게 살짝 집고, 코도 약간 세우고, 가슴 보형물삽입수술 의심···. 치아교정도 성형으로 치나? 그럼 나도 성형한 건데?’

이 외에 부정적 이슈는 나오지 않았다. 감성소녀 그룹 활동과는 개별적으로, 개인 팬들과 봉사활동을 자주 나간다는 좋은 이슈가 종종 눈에 띄었다. 

그리고 모호한 이슈. 

[제유, 어릴 적 LA에서 같은 한인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했다고 밝혀] 

-얘 락뮤닷에서 멤버들한테 ‘적당히 해, 이 미친년들아!!’라고 소리 지른 거 생방 오디오에 잡혔었는뎈ㅋㅋㅋㅋ 따돌림 당할 만했을 것 같닼ㅋㅋㅋㅋㅋ

ㄴㅋㅋㅋㅋㅋㅋㅋ

ㄴ야.. 암만 그래도 그건 아니짘ㅋ

멤버들과 함께 싸잡혀 떠도는 루머에 비해, 제유 한 사람을 둘러싼 소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6명을 혼자 단속하느라 얘도 참 피곤하겠다. 

ㄴ끼리끼리는 과학이다. 

ㄴ비즈니스 관계에선 통용 안 됨.

한율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예전에 제유가 혼자 불렀던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제유가 부르는 발라드는 자장가로 딱이었다. 

* * *

학교가기 전, 아침밥을 먹기 위해 회사로 가는 길.

박가람이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도 연애하고 싶다. 외롭다아.”

“군대 갔다 와서 해요.”

“열아홉 살한테 군대나 가라니, 나쁜 18살 시키.”

“······.”

차남석이 박가람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강보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TV에서 보면 기획사들마다 아이돌들 연애 허가조건 같은 거 있던데. 우리 회사에도 그런 거 있어?”

“어. 크래 선배님들 데뷔하고 5년, 공중파 음방 1위 스무 번하면 연애해도 된다던데.”

“스무 번?! 지금까지 몇 번 채웠는데?”

“다섯 번?”

“으아···, 멀었네.”

“그래도 그거 그냥 보여주기식 약속이야. 사실은···.”

박가람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끼어들자 강보배가 집중했다. 

“사실은?”

박가람이 슬픈 얼굴로 외쳤다. 

“선배들도 모솔력이 충만해, 애초부터 조건 따윈 걸 필요가 없었어···!”

숙소에서 일찍 나간 길우성과 이건우는 식당에서 노트를 사이에 두고 안무를 짜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름을 주고받으며 안무 영상을 보기도 하며. 

길우성은 학교에서도 원곡 주인의 영상을 보며 노트에다가 동선을 그리며 끙끙 거리고, 점심시간엔 이건우와 영상통화를 하며 교실 뒤쪽에서 춤추며 의논까지 했다. 

춤에 관해서만 볼 수 있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안무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어쨌든 그 덕분인지 안무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연습실에 모인 멤버들 앞에서 길우성과 이건우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원곡 안무 중 칼군무가 돋보이는 킬링포인트는 대부분 살렸지만, 인원수와 파트에 맞춰 새로 바꾼 곳도 적잖았다. 

시범을 마친 뒤엔 길우성이 노트에다 그린 동선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안무의 이름은, 강보배는 감춰라, 강보배는 소중하니까.”

“오오.”

“······.”

유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강보배를 말없이 토닥거렸다. 

어쩐지 칼군무 포인트마다 ‘강’이라고 적힌 동그라미만 유독 사선으로 교묘히 감춰지더라니. 

“그럼 지금부터 안무 연습을 해볼까요, 여러분? 라이브 연습까지 하려면 시간이 없습니다!”

최근에 나온 곡이라 아직 커버 안무를 배우지 않은 곡이기도 했다. 멤버들은 노트에 그려졌던 삼각대형을 갖춘 채 거울을 보았다. 대형에서 유일하게 빠진 길우성이 가장 앞에 서서 시작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은 오른발, 왼쪽은 왼발, 어깨넓이 정도 옆으로. 가장 먼저 전주 원, 투, 쓰리···, 포로 가기 직전 고개 각자 정면에서 45도 위로, 파이브, 왼발 플렉스하면서 양쪽으로 30도! 고개랑 상체 동시에 움직일게요. 다시 한 번 더.”

안무 연습은 처음부터 자잘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진행되었다. 새벽 1시, 현장전이 와서 ‘미성년자들 퇴근!’을 외치기 전까지. 

휴게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멤버들은 비틀비틀 복도를 걸었다. 남자연습생들만이 사용하는 지하는 고요했다. 

“다른 애들은 먼저 연습 끝내고 갔나보네.”

“난 작업 좀 하다 갈 테니까 먼저들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서 유호가 멤버들을 돌아보며 고했다. 

“편의점에서 군것질하지 말고. 어제 쓰레기 버리려고 보니까 삼각김밥이랑 핫바 포장지 나오더라.”

“대체 누가 어느 틈에 숙소에서? 난 한 번도 누가 뭐 먹는 거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배고픈데.”

“배고파도 자기 전엔 안 돼. 참아. 어차피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잠들잖아.” 

데뷔하려면 반년이나 남았는데 이 맏형은 왜 벌써부터 식단 단속을 하는 것일까. 몇몇 멤버들이 서로를 보며 불만스런 시선을 교환했다. 딱히 살도 안 쪘구만. 찔 틈이 있기는 한가?

그 기류를 읽은 유호가 이건우에게 당부했다. 

“이건우, 같이 먹지 말고 네가 애들 단속해.”

“네, 대답하고 몰래 먹는 게 더 맛있는 법이지.”

“오, 웬 빵이에요?”

“빵 아니고 파이야, 애플파이. 하나씩 먹어.”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이건우가 가방에서 애플파이가 가득 든 비닐 봉투를 꺼냈다. 멤버들은 거실에 모여 앉아 하나씩 집어 먹었다.

한율도 그 틈에 끼었다. 애플파이는 바삭바삭해서 부스러기가 잘 떨어졌지만 안에 든 사과 잼은 새콤달콤하니 맛있었다. 

“형이 산 건 아닌 것 같은데, 팬이 줬어요?”

“그럼 오죽 좋겠냐만은, 친구가 제과제빵 실습하면서 대량으로 만들었다고 나눠줬어.” 

“여자 친구는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대답 전 잠깐의 머뭇거림이 묘하게 거슬린다.

“······.”

“······.”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박가람이 입 안의 파이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서야 외쳤다. 턱 아래로 부스러기가 지저분하게 떨어졌다. 

“—이 형 미쳤나 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중딩 때부터 알던···.”

“중딩 때부터 사겼다고?!”

“아니라니까! 성별만 여자인 친구라고!”

바삭바삭. 한율은 파이를 마저 먹은 후 자리를 떴다. 그리고 물티슈를 가져와 바닥에 흘린 부스러기를 닦았다. 

박가람이 떠들었다. 

“우리한텐 여사친도 있어선 안 된다는 거 몰라?!”

길우성이 옆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라고 미랑이 누나 남사친이 말했습니다.”

“있어도 없는 척 해야지! 데뷔하고! 자리 잡고! 군대 다녀오고! 그러고 나서야 용납되는 존재를! 데뷔도 전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 인마···!”

대충 깨끗해진 것 같아, 한율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있어도 없는 척이라.’

최근 아이돌 관련 기사나 댓글을 보며 한율도 슬슬 깨달은 참이었다. 아이돌 팬들 대부분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이성 친구가 있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는 걸. 별 뜻 없이 게임 내에서 친구선물 아이템을 보내는 것조차. 

아이돌과 같이 나이를 먹어가며 20대 후반 정도나 돼야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넘길까. 그래서 아이돌들은 여사친, 남사친이 있어도 웬만하면 직접 언급을 피하는 듯했다. 심지어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사이라는 것도. 

“누구는 외로워도 슬퍼도 꾹꾹 참는데, 누구는 달달한 파이나 처묵하고 있고···, 고자질은 안 할 테니까 썰 좀 풀어봐요, 형님!”

“너도 먹었잖아, 인마···. 그리고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그만 떠들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응?”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난 거실에선 라이언이 끝까지 남아, 남은 애플파이를 입 안으로 열심히 욱여넣었다.

프로모드 ON/OFF

지난 번 뮤비를 제작한 곳이 다이아필름이어서 그런지, 이번 제유의 뮤비 제작도 그곳이 맡았다. 한율은 고양고양에서 보낸 노래를 들으며 다이아필름에서 보낸 콘티를 함께 살폈다. 

남자친구와 크게 다툰 제유. 

돌아서서 한참을 걷던 제유의 눈에 비친 건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교복을 입은 앳된 남학생과 어설픈 화장으로 꾸민 여대생. 누가 봐도 남학생이 누나를 좋아해 쫓아다니고 있다.

제유는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도 저랬을 때가 있었는데. 

[돌려줘 돌아가 나만 보던 너로]

[돌아가 돌려줘 네가 가진 하트]

하지만 이젠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과거에 남자친구에게 받아 퍽 기뻐했던 크고 작은 선물들을 다시 들춰봐도 감정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 뒤로도 구구절절 과거를 그리워하는 가사가 이어지고, 고음으로 클라이맥스. 

[다시 사랑하고 싶어.]

잔향이 사라질 때 즈음, 제유가 알바를 하는 카페가 나온다.

들어오다가 넘어진 소년을 일으켜주며, 제유는 그때 본 학생이란 걸 깨닫는다.

[다시 반복해, 되살릴래.]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목소리. 

[One more stimulation, LOVE, LOVE, in LOVE]

마침 오랜 짝사랑에 지쳐 흔들리는 소년의 눈동자를 보며, 제유가 붉게 칠한 입술을 올린다. 

[With another boy.]

그리고 음소거가 된 마지막 장면. 

제유와 싸우던 남자친구와 소년이 거울 틀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본다. 그들 뒤로는 시간 차이만 느껴지는 똑같은 방이 비춰진다. 제유의 방이 아닌, 남자친구의 방이. 

[END]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친구와 소년이 동일 인물이었어?’

주인공의 정신상태가 조금 걱정되는, 혼란스러운 이야기였다. 

“촬영날짜는 28일이랑 29일이야. 28일은 밖에서, 29일은 스튜디오에서.”

“29일이면 월평 날짜랑 겹치는데요.”

이번 월평은 그룹댄스에 라이브까지 해야 하는 터라 갑자기 한 사람이 빠지면 팀 전체에 민폐를 끼치는 꼴이 된다. 

진심으로 미안하진 않겠지만, 사과하는 건 싫은데. 

그러나 조유찬은 한율의 곤란한 표정을 보고도 생글생글 웃었다. 간만에 담당 아티스트의 스케줄이라 신난 모양이었다. 

“괜찮아, 저녁에 찍기로 했거든. 그것도 우리가 그 날은 조금 곤란하다고 말하기 전에, 그쪽에서 먼저 시간이 늦어도 괜찮냐 물어보더라고. 어차피 짧은 씬이라 쿨하게 괜찮다고 해줬지.”

“아아.”

이번 뮤비에서 감소 멤버들과의 씬은 모두 야외, 28일 촬영이었다. 29일 스튜디오 씬은 남자친구 역을 맡은 배우와만. 

“28일도 찍어야 할 분량이 많은 건 아니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마 오후 수업은 받을 수 있을 걸?”

한율은 예전, 미미의 무한 NG 연발을 떠올렸다. 

‘과연.’

* * *

평일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촬영이 진행될 거리엔 행인이 얼마 없었다. 차량에서 내린 한율은 다이아필름 프로덕션 스태프들에게 큰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서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이에요, 한율 씨!”

다이아필름 프로덕션 대표이자 감독인 강은혜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키가 좀 자랐네요? 어? 귀도 뚫었나 보다.”

성장은 되돌릴 순 없지만, 지난 번 뮤비 촬영 때는 피어싱을 하지 않았기에 오늘은 임시로 뺐다. 

“네.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죠. PC로 사삭, 티 안 나게 처리하는 거 쉽거든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뒤늦게 조유찬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강은혜도 화답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분, 아침은 먹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한 새카만 밴이 세워진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드륵. 안이 전혀 보이지 않게 짙게 선팅된 차량 문이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차례대로 내린 감성소녀의 제유와 미미가 한율과 조유찬을 향해 밝게 인사를 건넸다. 한율도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불쑥. 그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끼어들어 우렁차게 인사했다. 뮤비에서 제유의 남자친구 역을 맡게 된 신인 배우였다. 3년간 패션모델로 활동했다는 사람답게 그는 키가 훤칠했다. 

“신인배우 김수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감소 멤버들뿐만이 아니라 한율과 조유찬에게도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한율도 그에게 화답했다. 

“서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미 프로덕션 측 사람들에겐 인사를 마친 상태인지, 김수진은 환하게 웃는 낯을 고수하며 제유와 미미를 바라보았다.

“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유가 김수진의 눈을 보며 차분하게 인사한 반면, 미미는 무슨 촬영하려나 하고 다가오는 사람들 쪽을 빠르게 힐끗한 후 활짝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기 직전, 강 대표가 적절히 끼어들었다. 

“10분 후에 콘티 순서대로 제유 씨랑 수진 씨 씬부터 리허설 들어갈게요.”

새벽부터 일어나 샵에 들러 헤어메이크업을 받고 옷도 미리 갈아입고 온 터라, 한율은 여유롭게 제유와 김수진의 촬영을 구경했다. 미미는 다시 차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제유와 김수진은 정말 파국을 맞은 연인처럼 서로 소리를 지르고, 밀쳐내고, 붙잡고, 울고불고···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저런 씬은 감정소모가 심해서 힘들다고 하던데, 제유 씨도 연기 참 잘하네. 상대 배우 NG에 잘 흔들리지도 않고.”

나란히 서서 촬영을 구경하던 조유찬이 말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상파 드라마에서 조연, 웹드라마에서는 주연을 맡았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퍽 잘하고 있었다. 모니터링을 하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걸리면 기꺼이 다시 찍겠다고 하고.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빼어난 미모 탓인지, 제유가 조금만 몰입을 떨어뜨려도 그녀의 연기가 아닌 얼굴만 보인다는 점이었다. 

“좋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이동할게요!”

두 사람의 촬영이 끝나고 제유의 단독 씬 촬영이 이어졌다.

김수진과 함께 찍어야하는 씬이 아직 남았지만, 프로덕션 측 스태프는 한율과 미미가 나오는 씬을 이어서 먼저 촬영할 거라고 했다. 자연스레 김수진은 뒤로 밀려 한참 대기하게 되었지만, 그는 불만스런 기색이 없었다. 

“미미 씨 슬슬 준비요.”

제유의 단독 씬 촬영이 끝나고, 조연출의 말에 감소 매니저가 벤을 뚝뚝 두드렸다. 

“미미야, 나오자.”

WB래빗의 스타일리스트와 샵에서 파견 나온 직원도 한율의 머리와 옷매무새, 메이크업을 점검했다. 

“립만 조금 보완하면 되겠다. 입 살짝 벌리고.”

톡톡. 입술에 발색이 자연스러운 틴트가 스치더니 휴대용 선풍기가 등장했다. 그렇게 한 번 말린 뒤, 샵 직원은 잠깐 거리를 두고 한율을 보다가 음, 고개를 끄덕이곤 이번엔 투명한 립밤을 꺼내 덧칠했다. 찰칵. 그 옆에선 조유찬이 핸드폰으로 한율의 사진을 찍었다. 

“색이 정말 진짜 바른 듯 안 바른 듯 자연스럽네. 한율아, 미소.”

“······.”

입술에서 립밤이 떨어졌다. 한율은 뒤늦게 눈을 살며시 휘며 입가를 올렸다. 

찰칵. 

“미미 씨랑 한율 씨 리허설부터 갈게요. 지난번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부탁드릴게요. 스탠바이, 액션.”

앳된 얼굴에 약간 어색해 보이는 화장.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구두를 신은 것처럼 미미가 앞서 걸었다. 손에는 선물 받은 작은 꽃다발을 든 채. 그 뒤를 교복을 입은 한율이 따랐다.

“누나, 내일 나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잖아. 잊었어?”

M/V 오디오엔 잡히지 않지만, 콘티에 적혀있었던 대사. 

미미가 한율을 휙 돌아보며 약 올리듯 웃었다.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했거든?”

“또 그 형 만나러 가는 거 아니지?”

한율은 미간을 구기며 정색했다. 그러나 미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생글생글 웃었다. 그 순간 강은혜 대표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미미의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먼 탓이었다. 그러나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는 대신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한율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화냈다. 

“야, 내가 그놈 만나지 말랬잖아!”

“······.”

그 순간 미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본래라면 바로 한율의 양 볼을 잡으며 장난처럼 되받을 차례. 그러나 미미는 한율의 시선을 휙 피했다가, 뒤늦게야 웃으며 손을 뻗었다. 

“···어이구, 또 삐치시게요? 언제 어른 될래? 응?”

“······.”

한율은 입을 꾹 다문 채 미미를 바라보았다. 한율의 눈엔 말로 내뱉지 않은 진심이 섞여 있었다.

언제까지 날 아는 동생으로만 볼 건데. 이제 그만 내 마음 좀 알아줘. 지금의 나 좀 제대로 봐달라고. 

“···아, 늦겠다. 가자, 레고레고!”

미미가 휙 몸을 돌려 다시 앞장섰다. 두 팔을 삐거덕삐거덕 휘젓는 게 우스꽝스러웠지만, 한율은 끝까지 몰입을 놓지 않았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에 대한 섭섭함. 언제까지 혼자서만 이렇게 좋아하고,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 

“안 와?”

하지만 돌아보며 손을 내미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자, 금세 마음이 녹고 만다.

한율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이 감정을 이기는 걸 단념하며 미소 지었다. 

“···가.”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 나란히 걸었다. 재잘재잘 잘도 떠드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담으며. 

“···컷. 모니터링 후 본 촬영 바로 들어갈게요!”

한율은 잡고 있던 미미의 손을 놓고 조유찬을 바라보았다. 너무 경험을 토대로 몰입해 과하게 보인 건 아닐까, 괜찮았는지 반응을 살피기 위해.

‘왜 저래.’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조유찬은 가슴을 활짝 펼친 채 의기양양한 얼굴로 턱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리허설 때는 어색한 실수가 많았지만, 모니터링을 하며 강은혜가 이런저런 조언을 꼼꼼하게 해주자 미미는 본 촬영에 들어가자 NG를 덜 냈다. 오히려 더 잘하려 오버하다가 지적받을 정도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율은 그 이유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나는 구경꾼들과, 그들의 손에 들린 핸드폰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늘 조금 쌀쌀하지 않아요? 언니, 다리 안 아파? 조금 앉아있지···. 언니 혼자 두기 걱정되니까, 나도 다음 촬영장 따라갈게!”

미미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뿌리고 친절을 베풀었다. 제유 또한 그런 미미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장난을 치는 등 다정한 장면을 연출했다. 

몰입이 안 된다며 짜증을 부리고, 함께 있어도 서로에서 눈길 하나 안 주고 대화조차 않던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조금 전 우리가 와서야 김수진도 끼어들어 인사한 걸 보면, 김수진이 왔다는 걸 앎에도 먼저 나와 인사를 나눌 생각조차 않고 그저 차 안에 틀어박혀 있었단 거겠지.’

그런데 주변에 일반인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180도 달라지다니. 

‘꼭 프로모드 ON/OFF 스위치가 달린 것 같네. ···아니, 가면 스위치인가?’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볼 때에도 그렇게 느낀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한율은 감성소녀가 괜히 이 바닥에서 5년이나 버틴 게 아니구나 속으로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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