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427)

* * *

[서한율, 이번엔 제유 솔로 앨범 M/V 촬영!]

[지난 감성소녀 앨범 타이틀곡 ‘예쁜 게 죄지’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화제를 일으켰던 서한율이, 이번엔 감성소녀 리더 제유의 솔로 앨범 타이틀곡 뮤직비디오에 출연한다.

뮤닷 <보컬리스트 시즌3>로 이름을 알리고 CF 촬영과 1월 MBS에서 방영예정인 <하울링>에도 출연하는 등, 범상치 않은 신인의 행보를 이어가던 서한율은 이번 제유의 솔로곡 M/V에도 출연해줄 수 있냐는 제유 측 요청에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11월에 만날 수 있는 제유의 솔로 활동은 2년 만으로···.]

-???? 감소 뮤비에 나왔었다고? 보러감<<<

ㄴ거기에 남석이도 나와염ㅋㅋㅋ

ㄴ댄스단수 1화에서 떨어진 길우성도 나옴ㅇㅇ 다시 보니 최근에 방송에서 본 것보다 다들 조금씩 앳되네ㅎㅎ

-감소랑 같은 기획사였나?

ㄴㄴㄴ 전혀 다른 곳. 한율이네 있는 곳은 크리스탈 래빗. 

ㄴ왜 크래 놧두고 다른 회사 뮤비에 나감?

-ㅆㅂ ㅈㄴ불안하다... 왜 하필 감소냐 한율아ㅠㅠ.. 걔네 남자 밝힌다는 소문 있던데..ㅜㅜ

ㄴ여자를 밝히는 것보단 낫잖아. 

ㄴ....ㅈㄴ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말이 없네ㅋ

“···길우성?”

인터넷기사 댓글을 보던 여학생이 놀라 중얼거렸다. 행여 누가 듣진 않았을까, 입을 가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설마.’

여학생은 다급히 ‘댄스단수’를 검색했다. 동영상 클립 중 길우성이 나온 영상을 확인하는 여학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대박···.’

여학생은 황급히 메신저에 들어가 옛 친구들을 찾았다.

다들 피곤한가 보네

“한 곡만 더··· 부릅시다.”

“끄으으···.”

철퍼덕. 강보배가 가장 먼저 바닥에 널브러졌다. 다른 멤버들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다리, 발끝에 힘을 주며 버텼다. ···후우. 한율 역시 최소한 두 번째로 낙오되는 꼴은 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텼다.

유호가 외쳤다. 

“사과야, 음악 틀어줘!”

앞에 놓인 사과패드가 응답했다. 

[삐링. 알겠습니다.]

월말평가로 퍼포먼스와 함께 라이브로 부를 곡 Inst가 흘러나왔다. 

“각자 호흡 흔들리지 않게 주의하고! 배에 힘 빡 줘! 목은 소리가 스쳐 나가는 곳이다! 힘들다고 쌩목 긁지 마!”

강보배가 비틀거리며 다시 플랭크 자세를 취했다. 곧 연습실엔 플랭크 자세유지에 괴로워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기 위한 처절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우···, 죽겠다······.”

퍼포와 동시에, 혹은 플랭크와 병행하며. 그렇게 라이브 연습이 끝나자마자 멤버들은 바닥에 시체처럼 축 늘어져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토할 것 같아···.”

“하려거든 나가서 해라···.”

삐릭. 연습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조유찬이 나타났다. 

“미성년자들 퇴근!”

어느덧 새벽 1시. 한율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새벽부터 일어나 샵에, 촬영에, 뒤늦게 등교, 그리고 레슨과 연습.

처음 WB래빗에 발을 디뎠을 때, 아이돌을 두고 TV에서 재롱이나 부린다고 가볍게 여기던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허얼···. 써한, 너 대체 오늘 촬영가서 무슨 짓을 한 거냐?”

터덜터덜 회사를 나오는 길.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길우성이 진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하기 귀찮아 시선만 던지자 길우성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감소 미미가 SNS에 네 얘기 올렸는데?”

[언제나 우리 돌보느라 고생하는 제유언냐 솔로 앨범 뮤비 촬영갔다왔어요>ㅂ<)♡ 이유는 저도 나오기 때문!ㅋㅋㅋ 지난 번 뮤비에서 같이 촬영한 서한율 님두 왔는데! 이번에두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놀랐어욥Σ( ꒪⌓꒪)!! 실제론 그런 동생이 쫓아다니면 구냥 넘어갈 듯ㅋㅋㅋ 그래도 내 맘속 1순위는 우리 갬성러들인 거 알죠?? >ㅂ<)쿄쿄쿄♡♡♡]

차남석이 슥 끼어들었다. 

“이 정도는 통상적인 인사치레나 다름없으니 별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어그로 끄는 거니까.”

“어그로요? 어디가?”

“너 연기 잘한다 팔아서 한 명이라도 더 뮤비 보게 하려는 어그로.”

길우성이 한 수 배웠다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도 알뜰하게 이용하는구만. 이용당한 기분이 어때?”

“주목 받기 위해 다들 서로 이용해먹는 게 이 바닥 아냐?”

“일찍 깨우쳤군. 이제 하산해도 되겠다.”

“그 산은 에베레스트였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높이가 몇이더라.”

“8850. 걔 지금도 성장 중이라더라.”

“나도 오공반점 짜장 먹고 성장하고 싶다.”

“거기 맛있지. 난 탕슉.”

“부먹파는 조용히 손을 드세요.”

멤버들 사이에서 되는 대로 내뱉는 아무 말이 이어졌다. 

한율은 자신의 SNS에 새로 달린 댓글들을 확인하다가 WB래빗 공식 계정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오늘따라 댓글이 많더라니, 오늘 촬영 현장에서 조유찬이 찍은 사진이 몇 장 올라가 있었다. 

-감소 뮤비로 예습하고 왔는데 이건 진짜 말이 안 됨(정색) 저렇게 눈에서 사랑이 흘러넘치고 아련하기까지 하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잘생쁜 애를 찬다고?? 

-방송국은 머하냐!! 얼른 한율이한테 10대들의 풋풋한 스쿨라이프가 살아 숨 쉬는 대본을 갖다 바치지 않고!! 미리 말해두는데, 여주는 나다!!!!!

ㄴㅋㅋㅋㅋㅋㅋ

-님들, 내일 OSN <수의형사> 3화에 남석이랑 한율이 나옵니다! 우리 모두 본방사수하여 이 예쁜 것들을 혼내줍시다!! 

여기에서도 아무 말 대잔치가.

‘다들 피곤한가 보네.’

다음 날. 데뷔조가 되어 두 번째로 치르는 월말평가 시간이 돌아왔다. 한율은 지난번보다 더욱 긴장하여 두 손을 모아 중얼거리는 강보배를 보았다. 

“하느님, 부처님, 고양이별에 있는 로얄, 캣닢아, 부디 오늘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아멘, 나무아미타불, 츄르, 할렐루야.”

“······.”

누가 래퍼 아니랄까봐 이 와중에도 딕션이 좋다. 

어쨌든 오늘 댄스 평가는 라이브까지 병행하며 팀의 전체적인 호흡과 밸런스를 선보이는 자리. 그리고 다들 말은 꺼내지 않아도, 데뷔할 최종 멤버가 7인이란 사실은 누구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룹으로 평가에 임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긴 하지만.’

데뷔하자마자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는 아무리 대형기획사라 하더라도 힘들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 높게,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가다듬어 내보내야 하는데, 곡을 받아 노래와 안무를 익히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최대한 12월 말까진 데뷔조 자리는 유동적일 터. 

9시 정각이 되자 대표를 위시하여 직원들 몇 명과 트레이너들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어···?”

“이 쌤이다.”

연습생들이 웅성거렸다. 트레이너들 사이에 외부인이 섞인 까닭. 그러나 한율에겐 낯익은 사람이었다. <보컬리스트 시즌3>를 촬영했을 때, 한율이 있던 팀의 오프닝무대 안무 연습을 지도해주었던 안무가. 

“데뷔조 보러 왔나 보다.”

“전에 블블 1위한 곡, 이 쌤이 안무 짜주신 거였지?”

“그럼 데뷔조 안무도 나중에 저 분이 짜주시는 건가?”

그를 바라보는 연습생들은 대개 호의적이었다. 이쪽 바닥에서 제법 평판이 좋은 모양. 

마지막으로 신인개발팀 강무기 팀장이 들어오며 고했다. 

“오늘은 댄스와 노래 순으로, 남자연습생들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몸은 풀고 왔죠?”

데뷔조가 아닌 남자연습생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C연습실은 내부가 환히 보여, 무슨 곡을 선택해 연습하는지 오며가며 볼 수 있었다.

센터는 정민솔.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오고, 눈에 익은 안무가 시작되었다. 

‘100% 커버.’

정민솔과 임승준이 부딪치고 부쩍 분위기가 흐려졌을 때, 맏형이었던 김형수가 회사를 나갔다. 위기를 기회로. 그때 다시 서로의 목표를 위해 의기투합하여 노력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한율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팀의 호흡이 안 맞는다는 게 바로 저런 걸 말하는 거구나.’

안무는 예전 단체레슨 때 배운 곡이었다. 그것도 지금 인원수처럼 7명으로 된 보이그룹의 곡을, 노래와 랩 파트까지 고스란히 일치시켰다.

그럼에도 그들은 제각기 따로 놀고 있었다. 원곡 주인인 보이그룹이 7쌍둥이라 불릴 정도로 조화가 강점인 그룹이라 더욱 비교되었다. 

솔직히 쉬운 안무는 아니었다. 거기에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부르는 정민솔의 노래실력은 좋았다. 박현우도 평소의 가벼운 모습을 치우고 뛰어난 표정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칼군무 포인트는 우둘투둘, 한 사람이 엇박으로 늦자 동선도 금세 꼬여 어지러워졌다. 곡의 해석에 따른 사소한 디테일도 전부 갈렸다. 이건 팀원들 간의 대화부족, 연습부족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했다. 

라이브도 함께 한다지만 이미 배웠던 안무에, 따로 노는 팀워크.

댄스트레이너의 얼굴이 점점 싸늘하게 굳었다. 

···뜬!

이윽고 음악이 끝났다. 다른 연습생들이 박수치려 손을 들었을 때, 한율은 남들보다 손을 더 올려 귀를 막았다. 

연습실에 트레이너의 노성이 쩌렁 울렸다. 

“—지금 장난해?!”

콰당. 벌떡 일어난 그녀의 뒤로 의자가 넘어갔다. 

“너희들 지금 서로 같은 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야?! 내 팀은 저기 데뷔조다! 그러니 지금 너희들이랑 합 따위 맞출 필요 없으니 알아서 따라오라는 거야, 뭐야! 어?!”

격한 삿대질까지.

한율이 WB래빗에 들어온 이후 본 그녀의 화난 모습 중 제일이었다. 데뷔조를 운운할 때 엉겁결에 삿대질을 당한 라이언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라이브해서 힘들어? 네, 아~주 잘나셨어요! 배려 없는 한 명, 지들끼리 맞춘 세 명, 어설픈 두 명, 눈치 보는 한 명! 지금 너희들이 해체해도 받아줄 팀이 있다고 생각해?!”

“······.”

“······.”

연습생들의 고개가 점점 내려갔다. 거칠어진 숨을 억누르느라 완만하게 움직이는 어깨도. 

툭. 강무기 팀장이 조용히 쓰러진 의자를 세웠다.

“남한테 맞출 생각도 전혀 없으면서 무슨 그룹을 하겠다고···!”

트레이너가 쏟아내던 말을 멈추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를 잡으며 심호흡. 

“후우.”

털썩.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댄스평가 의견은 이상입니다.”

누군가는 자존심에 금이 간 얼굴로, 누군가는 분노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눈치를 보던 보컬트레이너가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안무하면서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중한 건 좋았어요.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더 꾸벅 인사를 한 후 자리로 돌아왔다.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어째 또 대판 싸울 필인데···.”

그도 그럴게, 서로를 쳐다보는 정민솔과 임승준의 시선에 독기가 흐르고 있었다. 말로 내뱉진 않아도 뭐라 하는지 잘 알 것 같았다. 

너 때문이잖아, 새꺄. 

평가는 계속 진행되었다. 

이번엔 여자연습생들도 라이브를 하며 그룹댄스를 췄다. 자잘한 실수 몇 가지는 있었지만 팀워크는 좋았다. 실수했다며 속상해하는 멤버를 조용히 다독거려주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데뷔조 한 번 볼까요?”

나중에 한 명이 빠지기는 해도, 이대로 데뷔할 가능성이 높은 팀이었다. 데뷔조 멤버들이 일어나자 평가서를 앞에 둔 사람들의 눈에 기대가 서렸다. 특히 좌기훈 대표는 의자를 앞으로 바짝 붙이며 더 집중했다. 

삼각대형의 가장 앞은 라이언. 한율은 센터자리에 섰다.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 1시까지 연습에 연습을 했던 곡. 청량한 분위기에, 안무 중간 중간에도 애교를 부리는 듯한 동작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작까지 들어간 사랑노래였다. 

라이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외쳤다. 

“It's showtime!”

직원이 유호에게 미리 건네받은 파일을 재생했다. 

음악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무표정했던 한율의 얼굴에 천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연습생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간 뒤, 연습실에 남은 직원들과 트레이너들은 서로 의견을 나눴다. 주요 화두는 내년에 내보낼 데뷔조. 

“아까 애들 단체 군무하는 거 보니까, 분위기가 대체로 좋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보배가 아직 안무에 많이 취약한 걸 은근히 커버 쳐주려는 배려도 엿보이고.”

“실제로도 사이가 좋나요?”

댄스트레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레슨할 때 애들 사이에 날카로운 신경전? 그런 게 오가는 기류를 느낀 적이 없거든요.”

“송곳 같은 애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맏형인 호가 애들을 잘 다독거리기도 하고··· 보배 같은 경우엔 솔직히 미울 수가 있잖아요. 데뷔할 수 있는 인원은 7명이니까.”

“대표님이 보배를 직접 데려왔으니 웬만하면 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저놈이 들어온 만큼 우리끼리 경쟁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분위기가 안 좋았겠지만···.”

데뷔조 관리를 맡은 오동식 팀장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끔 불시에, 특히 새벽에 데뷔조 숙소를 검사하러 가는데, 사내놈들 사이에서 벌어질 만한 싸움의 흔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저는 조금 아쉬운 게···.”

보컬트레이너가 평가서를 들추다 한 장을 위로 올렸다. 

“민솔이에요. 한율이랑 민솔이가 고음 파트에서 더블링치면 시너지 효과가 장난 아니게 났었거든요?”

“애들 데뷔조 뽑히기 전에요?”

“네. 그래서 한 번 다시 시켜보고 싶은데.”

강무기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애들 사이가 안 좋아요.”

“저런. 크게 싸웠어요?”

“화해시키면 되지 않나?”

“예전에 데뷔조 뽑기 전에 다들 보셨잖아요. 애들이 민솔이에 대해 기타 의견란에 뭐라 써놨는지.”

“아···. 그래도 목소리가 너무 아까운데···.”

아쉬운 얼굴로 평가서를 바라보던 보컬트레이너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쯤이면 민솔이도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실력이 되는데 본인이 떨어진 이유에 대해서. 전처럼 애들을 대했다가는 데뷔를 하지 못할 수 있다고, 스스로 깨우치고 태도를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면요?”

“조금 전 그룹댄스할 때 보셨잖아요, 민솔이 혼자 잘났다는 듯이 하는 거. 저는 민솔이가 지금 데뷔조에 들어가면, 지금 데뷔조의 좋은 분위기가 바로 깨질 것 같거든요?”

“하지만 아이돌그룹은 친목단체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호랑 남석이가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그 둘이 혼자 팀에서 제멋대로 구는 걸 가만히 놔두는 성격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민솔이도 가능성이 있어서 데리고 있는 건데.”

“음···.”

무거운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던 좌기훈 대표가 입을 열었다. 

“강 팀장님, 민솔이 좀 불러주세요.”

뺏길 지도 몰라

남자연습생 휴게실에 지난번처럼 평가 점수가 붙었다. 

[남자연습생 10월 월말평가 보컬/댄스 도합점수]

[1. 차남석(100/98)

2. 유호(95/95)

3. 박가람(94/93)

4. 이건우(91/95), 서한율(96/90)

6. 정민솔(99/85), 라이언(92/92)

8. 길우성(83/100)···.]

한율은 댄스점수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댄스를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네, 여보세요? ···네, 네.”

누군가와 통화를 한 박현우가 유호에게 말했다. 

“데뷔조는 지금 대표실로 올라오라는데? 서한율은 2층 사무실로.”

대체 무슨 일로?

한율은 의아해하는 데뷔조 멤버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다, 2층에서 갈라졌다. 

* * *

스튜디오 씬은 M/V에 3초나 겨우 나갈까 싶을 정도로 짧았다.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김수진과 거울 틀을 사이에 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보고서는 장면. 

촬영은 금세 끝났지만, 헤어메이크업을 받는 등 준비하는 시간이나 이동시간이 적잖이 걸려, WB래빗으로 돌아왔을 땐 10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어떡할래, 한율아? 레슨시간도 다 끝났으니, 오늘은 이만 숙소 들어가서 쉴래?”

지금 시간이면 숙소에 아무도 없겠네. 

한율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데뷔조 숙소에 들어간 이후 한율은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드물었다. 늘 누군가가 함께 있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숙소에서도.

마지막으로 마나를 마음껏 유동시켜본 게 언젠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비가 잔뜩 쏟아지던 날이었던가?

‘배도 고프지만 마나가 더 고프네.’

그래, 간만에 20분, 아니 10분만이라도 마나를 유동시키자.

그렇게 생각하며 한율은 숙소가 있는 계단을 가볍게 밟았다. 그러나 숙소 문을 열기 직전, 가벼웠던 발걸음은 무겁게 멈췄다. 

안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왜?’

지금쯤이면 한창 자율연습 중이어야 할 텐데.

자율연습이 강제는 아니긴 하지만,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낮게 웅성거리는 것 같아, 한율은 전자자물쇠에 비밀번호를 빠르게 입력했다. 

덜컹. 

“왔냐? 일하느라 수고했다.”

TV도 켜지 않은 적막한 거실. 데뷔조 멤버 전원이 모여 있었다.

한율은 뒤로 문을 닫으며 신발을 벗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이건우가 뒤로 두 손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쭉 폈다.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나 내일 나간다.”

“네?”

“대신 민솔이가 들어올 거야.”

한율은 미간을 구겼다. 

이건 또 무슨. 

“왜요? 정민솔··· 아니, 민솔이 형보다 평가 성적 좋았잖아요.”

이건우가 길우성, 라이언, 강보배를 빙 둘러 가리켰다. 

“그렇게 치면 얘네 중 한 명이 진작 나갔겠지.”

“그럼 이것 때문에 아까 대표실로 불려간 거였어요?”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길우성이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건지, 회상 씬으로 보여줄게. ···엣헴!”

* * *

데뷔조 멤버들이 들어갔을 때, 대표실엔 정민솔이 좌기훈 대표와 함께 있었다.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채. 

그걸 본 순간 데뷔조 멤버들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데뷔조 자리에 변동이 생기겠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일부러 데뷔조 멤버들을 부른 자리에 다른 연습생을 세워둘 리 없으니. 

“2주.”

멤버들을 회의용 테이블 의자에 앉힌 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좌기훈 대표가 입을 열었다. 

“2주만 시험해보기로 했다.”

“······.”

“한 달에 비하면 팀으로서의 호흡을 맞추기에 굉장히 짧지만, 그래도 보배를 제외하면 다들 몇 달, 몇 년 동안 함께 단체레슨도 받으며 연습생 생활을 했으니 그 정도면 족하다는 생각에 나온 기간이다.”

정민솔을 2주 동안만 데뷔조에?

멤버들 간에 시선이 얽히는 가운데, 좌 대표의 시선이 제일 표정이 굳어진 라이언을 향했다. 

“휴게실에 붙여진 점수표를 봤다면 알겠지만, 보컬 점수로만 보면 민솔이가 2등이지.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너희를 뽑은 기준은 점수가 다가 아니었어. 그래서 이제 와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라이언이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내렸다. 좌 대표가 마치 저를 달래려 하는 말인 듯 하여. 

“그래서 조금 전 민솔이를 불러 얘기를 나눠보았다. 사실, 회사 입장에서 민솔이 노래실력이 아까운 건 사실이거든. 너희들도 민솔이 노래 실력, 인정하지?”

속으론 긍정하는 바이나, 데뷔조 멤버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한 명이 정민솔을 대신해 최소 2주 동안은 나가야 한다는 말이므로. 

드륵. 정민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민솔은 라이언을 가장 먼저 바라보고, 그 다음엔 강보배와 길우성을 차례로 찾은 후 모두를 향해 말했다. 

“데뷔조에서 탈락한 후 많이 생각했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틱틱 던졌던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고, 그게 결국 나한테 돌아왔구나, 내가 계속 이딴 식으로 살면 평생 데뷔는커녕 옆에 남겨지는 친구 하나 없겠구나 하고. 그래서 많이 반성하고···,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연습도 열심히 했어. 그러니까 2주만···.”

정민솔이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외쳤다. 

“2주만 지켜봐줬으면 좋겠어! 절대 팀에 민폐가 되지 않도록 또 노력하고 노력할 테니까, 2주만!”

뒤이어 사과가 이어졌다. 

한국말이 어눌한 걸 두고 놀려서 미안하다는 사과, 질투심에 무시를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 너무 편한 동생 같아서 장난을 친다는 게 도가 지나쳤다는 사과.

“그렇게 대표실엔 사과 파티가 벌어졌다는 이야기.”

“두둥.”

“······.”

말로만 회상 씬이지, 실상은 길우성과 박가람이 상황 묘사와 대사를 통통 주고받았다. 길우성이 좌기훈 대표 역을, 박가람이 정민솔 역을. 

“그러니까, 2주 동안 민솔이 형을 데뷔조에 넣어서 정말 달라졌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 대신 건우 형은 잠깐 나가고?”

“어. 대표님이랑 팀장님들, 트레이너 쌤들 앞에서 단단히 약속했대. 예전처럼 사람들한테 말을 함부로 하는 등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로 데뷔조에서 빠지겠다고.”

“그 달라진 결과는 어떻게 확인한대요?”

“2주 후 토요일에 라이브를 보겠대. 자세한 건 나중에 댄스 쌤이 설명해주실 거라고.”

이건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 2주 후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올 테니까. 아무렴 민솔이가 아무리 노래를 잘 해도, 나보다 너희랑 호흡이 잘 맞을까.”

“맞아. 정민솔 그것 때문에 저쪽 팀도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는데, 여기 온다고 바로 사람이 달라지기야 하겠어?”

박가람이 차남석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성적순으로 분량 나눠가지자고 한 것 때문에? 솔직히 말투에 따라 정말 재수 없이 들렸을 것 같긴 한데···.”

“형들 앞에선 거의 얌전떨었으니 잘 모를 거예요. 알고 보니 애가 좀 짜증나는 타입이더라고. 오늘 이놈들한테 사과한 건 본인이 나불댔던 거 반의 반도 안 될 걸요?”

“나 개 시러. 진짜 짜증나.”

“개냐, 걔냐?”

차남석에 이어 라이언까지 진심으로 싫은 티를 팍팍 내자, 박가람이 유호와 이건우를 바라보았다. 이건우가 목 뒤를 긁었다. 

“사실 지욱이한테 민솔이에 대해 조금 안 좋게 듣긴 했는데··· 애가 진짜 성격이 그래?”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까 우리 없을 때 애들한테 말을 함부로, 많이 했더라고.”

“써한, 너도 네가 들었던 말 좀 풀어. 솔직히 따지고 보면 민솔이 형한테 제일 심한 소리를 들은 건 넌데, 넌 아예 사과도 못 받은 거잖아. ···뭐, 내일 너 만나면 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만큼 참 변하기 힘든 종족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어쨌든 2주 동안 테스트해보기로 한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 뭐 어쩌겠어. 건우 형, 내일 조심히 가고, 이참에 이비인후과 다니면서 코고는 것 좀 고쳐요.”

“······!”

“역시 써한···. 냉정해, 가차 없어···.”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이건우는 일찍 숙소를 나가고 없었다.

9시에 있는 댄스레슨 시간. 정민솔이 B연습실로 들어왔다. 본인의 출입증으로 문을 열어서. 

어찌됐든 최소 2주 동안은 같은 데뷔조 멤버였다. 숙소를 나오기 전, 데뷔조 멤버들에게 그래도 너무 날을 세워 대하지 말라고 당부한 유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민솔.”

“민쏘르, 하이! 올라온 거 축하한다!”

박가람이 신나게 이어 받았다. 차남석은 대충 손을 드는 걸로 대신했고, 라이언은 휙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강보배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하이.”

“어서 오십쇼, 형님.”

“어서 오세요.”

길우성과 한율까지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정민솔이 웃으며 화답했다. 

“열심히 할게, 잘 부탁해!”

세상 착하고 밝은 얼굴로. 

“서한율.”

한율에게 다가온 정민솔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도 사과하고 너랑 풀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땐 정말 미안했다.”

진심이다, 믿어라! 라고 호소하려 노력하는 눈을 직시하며,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2주도 못 채우고 나가게 될 테니. 

회사에서 데뷔조 멤버가 다 모이는 건 댄스레슨시간과 자율연습시간, 심신안정 시간 뿐. 그러나 오늘 하루 본 정민솔은 예전에 길우성이나 한율, 라이언에게 싫은 소리를 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싹싹하게 굴었다. 무시를 했던 강보배에게도. 

“짐은 아침에 회사로 가져왔다가, 낮에 오 팀장님이랑 같이 숙소로 가서 옮겼어. 나 왼쪽 방 쓰는 거 맞지?”

“어···, 응.”

“그런데 너 우리 회사 들어오고 나서야 댄스 배운 거 맞냐? 어제 평가받을 때 보니까 잘하던데?”

“어···, 하하. 우성이랑 건우 형이 많이 도와줬어.”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가는 길. 

강보배에게 친한 척하는 정민솔을 보며 길우성이 속닥거렸다. 

“미리 말해두는데, 민솔이 형도 한 깔끔한다? 이제 너 청소기 뺏길지도 몰라.”

“···그게 대체 언제부터 내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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