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민솔은 며칠 내내 회사에도 나오지 않았다. 정민솔과 같은 학교인 박가람의 말에 따르면 학교는 잘 나오지만, 대화를 해보려하면 정민솔이 피한다고.
“예감이 좋지 않아. 형수 형 때와 비슷한 촉이 와···, 으음······.”
토요일.
두 팀으로 나뉜 데뷔조의 라이브가 치러졌다.
그들의 교과서가 된 한국의 보이그룹 대부분이 5명 이상인 경우가 많은 까닭에, 네 명과 세 명으로 나뉜 만큼 각자 소화해야 하는 분량도 늘었다. 노래도, 랩도.
테스트를 마친 후 거칠어진 숨을 애써 가다듬는데, 강무기 팀장이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두 팀, 잘하는 포지션이 보컬과 랩으로 나뉘었네요? 의도한 거예요?”
시무룩한 보컬트레이너를 사이에 두고 댄스트레이너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원래 이쪽 팀에 민솔이가 있었거든요.”
“······.”
“아, 그랬지 참.”
“한율아, 아까 랩 다시 해볼래?”
왜 하필 랩을.
좌기훈 대표의 요청에, 한율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속으로 박자를 센 후 시작했다. Inst는커녕 간단한 비트도 없이 시작된 랩을 듣는 대표와 직원들, 트레이너들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한율의 랩이 끝나자 그들이 속닥거렸다. 다 들렸다.
“잘하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이미지와 괴리감이···.”
“한율인 웬만하면 랩 시키면 안 되겠네요.”
처음 WB래빗에 들어왔을 때, 한율을 테스트했던 신인개발팀의 강무기 팀장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강 팀장이 눈썹 끝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왜 저래.’
제 딴엔 격려를 보내는 것 같긴 한데, 썩 기분이 좋진 않은 미소였다.
“어쨌든 다들 수고했어요. 이쪽 팀은 중간에 한 명이 빠져서 더 부담됐을 텐데.”
“아닙니다!”
“그래도 우성이는 노래 연습 조금 더 하자?”
“네에···.”
“참, 그리고 우성아. 다음 주부터는 연기레슨 안 받아도 돼.”
“······!”
길우성이 입을 벌리며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 대신 랩 트레이닝 시간을 늘리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좌기훈 대표가 소리 없이 웃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돌리던 펜을 내려놓았다.
“이제 4월까지 앞으로 몇 달 안 남았네요. 그래서 저희가 요즘 고민이 많아요. 데뷔시킬 인원은 7명인데, 만약을 위해 한 명 더 붙여서 8명을 데뷔조에 넣었으니까요. 여러분들에겐 잔인한 짓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자신의 말에 집중하는 멤버들을 한 사람씩 천천히 보며 좌 대표가 말을 이었다.
“내일, 데뷔조엔 다시 건우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8인 체제는 12월 마지막 주 토요일, 딱 맞물려서 12월 31일이네요. 그때까지입니다. 월평이 끝나면 최종 데뷔멤버 7인이 결정될 겁니다. 여러분들의 의사와 의견도 반영하여.”
“그 말은, 저희도 멤버들에게 점수를 매긴다는 뜻입니까? 데뷔조를 뽑았을 때처럼?”
“같은 팀이 되면 최소한 몇 년 동안은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게 될 텐데, 당연히 여러분의 의사도 존중해야죠. 이번··· 민솔이 일도 있고.”
멤버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복잡한 시선으로 서로를 본 차남석과 라이언은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음 달 월평이 있기 한 주 전 크리스마스 시즌.”
좌 대표가 씩 웃었다.
“WB래빗의 간판인 크리스탈 래빗과 내년에 나갈 데뷔조. 너무 기니 통틀어서 ‘토끼돌’이라고 할게요.”
대표의 작명 센스가 형편없다 못해 아주 건성 레벨이 되었다.
“토끼돌 전원, 그리고 WB래빗 임직원이 함께 봉사활동을 갈까 합니다.”
놀라는 멤버들의 표정을 보며 좌 대표가 덧붙였다.
“여러분의 데뷔 리얼리티 예행연습을 겸하여.”
* * *
별 다른 사건사고 없이 하루하루가 흘렀다.
여전히 정민솔은 회사를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캐비닛에 붙은 이름표는 떼어지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스타믹스의 지헌이 <가미난무> 웹드라마를 촬영하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기사가 떴다.
-준비되지 않은 PD가 결국 큰 사달을 냈네요... 열악한 환경에서도 프로의 정신으로 임하다 사고 난 훌륭한 아티스트의 쾌유를 빕니다..ㅠㅠ
그리고 해당 기사 링크를 본인 SNS에 띄우고 빙 돌려 비난한 이희우의 행동이 실검에 떴다. 스타믹스의 팬들은 몰려가 좋아요를 눌렀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뒤끝 쩌네’라고 적기도 했다.
한 보이그룹의 멤버는 술에 잔뜩 취해 공원 벤치에서 잠들었다가, 하얗게 질려가는 그를 발견한 노숙자가 119에 신고해 무사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웃픈 기사가 뜨기도 했다.
팬들은 중간에 그를 버리고 간 그의 친구들을 비난했다. 그 친구들 중에는 혜성처럼 등장해 인기 급상중인 배우도 있어, 기사 댓글란에서는 두 아티스트 팬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못생겼네.’
한율은 모친이 매일 보내주는 사진으로 새끼고양이 두 마리의 성장과정을 관찰했고, 허브는 쑥쑥 자라며 여전히 좋은 향을 뿜었다. 너무 잘 자라서 화분과 위치도 바꿨다.
하루는 길우성이 떠들었다.
“써한! 내가 저 허브 사진 찍어서 엄마한테 보내줬거든? 그런데 크기가 너무 비정상적이래! 괜찮은 거야?”
가끔 연락하는 블블의 민준은 해외 일정이 너무 빡세다며 종종 삼계탕 교환권을 보냈다. 본인 대신 몸보신으로 먹어달라며.
한율의 SNS엔 왜 요즘 부쩍 활동이 뜸하냐는 댓글이 종종 올라왔다.
-오빠 요즘 왜 얼굴 안 보여줘요???(,,Ծ‸Ծ,, )
-데뷔 준비로 많이 정신없나부다ㅜㅜ
그렇게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다.
짐벌에 끼운 핸드폰을 향해 차남석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차남석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이죠? 죄송해요, 여러 가지로 조금 많이 바빴거든요.”
화면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았다. 때맞춰 한율은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흔들었다. 미소도 잊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서한율입니다.”
“안녕하세욥!”
화면에 박가람의 손이 휙 나타났다 사라졌다.
“네, 방금 저희랑 같이 데뷔를 준비하지만, 그럼에도 데뷔를 함께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형이 끼어들었는데요.”
“남석?!”
박가람이 상처 받은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떠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한율이 생글생글 웃는 낯짝으로 말했다.
“꼭 그 동물 닮지 않았어요? 도토리 빼앗겨서 충격 받은 다람쥐.”
“서한율?!”
“가람이 형은 프레리독 아니었어?”
“설치류인 건 변함없지만··· 프레리독은 좀 크지 않아요?”
“아, 그럼 다람쥐 맞네. 우리 중에서 키가 제일···.”
덥석. 박가람이 손을 뻗어 짐벌을 낚아챘다. 그리고 잔뜩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충격 보도! 꽃을 단 토끼의 실체를 오늘 제가 낱낱이···!”
“푸하하! 프레리독···!”
누군가 뒤늦게 웃음을 터뜨리자, 박가람이 발끈하여 고개를 돌렸다.
“웃지 마, 186!”
“호 형 186이었어요? 187 아니고?”
“정확히는 186.9cm인데.”
차남석이 박가람에게서 짐벌을 되찾아 빙글 돌렸다. 반대쪽 창가자리에 앉은 유호가 손을 흔들면서 대답했다. 그 옆자리에는 라이언이 입을 헤 벌린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가람이가 소수점이하는 필요 없다고 버려버리네?”
“나보다 큰 사람은 소수점이하 취급 불가야. 왜냐하면 내가 상처 받으니까.”
“해괴한 논리 잘 들었습니다, 박가람 씨.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차남석이 차창 밖을 한 번 찍은 후 다시 제 모습을 촬영했다. 다른 손으론 앞머리를 슥슥 정돈하며.
“저희가 지금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고 있냐면요.”
너 왜 이렇게 잘하니?
창 사이로 크리스마스트리가 어렴풋 비치는 건물 앞. 새카만 밴 한 대와 미니버스 두 대가 주차장에 자리했다.
데뷔조 멤버들은 내리기 전, 오동식 팀장에게 주의사항을 들었다.
“안에 들어가면 김장 재료들이랑 반찬, 케이크를 만들 온갖 식자재가 있을 텐데, 여러분은 절대 무거운 거 들지 마십시오. 무거운 건 우리 직원들 몫입니다. 괜히 도와주려다 삐끗해도 아무도 책임 안 져요.”
“네.”
그들이 할 봉사활동은 오전엔 김장을 비롯해 반찬, 크리스마스케이크를 만드는 걸 돕고, 오후엔 만든 음식으로 사랑의 도시락을 싸서 이곳 복지센터가 담당하는 소외계층 가정에 배달하는 일이었다.
오늘을 위해 얼마 전, 보건소로 가서 보건증 발급을 받기 위한 검사까지 받았다.
“안에 들어가면 우선 크래 멤버들이랑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맡게 될 지 정할 텐데, 너무 다정하게 보이진 않도록 조심하세요. 철저히 비즈니스 관계로 보이도록···.”
“그건 너무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아요? 차라리 그럴 거면 아예 다른 델 가지···.”
“데뷔도 전에 달나라 주민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다면 용기내도 괜찮습니다. 말리지 않아요.”
“······.”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과 입사 동기이자 같은 반 친구사이인 박가람이 시무룩해진 가운데, 오 팀장이 당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하다가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안 좋다? 지체 없이 알려주세요. 괜히 오기 부리다 건강 나빠지면 여러분만 손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네. 아주 작은 중얼거림도 전부 카메라에 담긴다는 경각심을 갖되, 너무 의식은 하지 말고 열심히, 그렇다고 다큐로 보이지는 않게. 알겠습니까?”
“···네.”
“그럼.”
오 팀장이 차창 밖의 상황을 살폈다. WB래빗 직원들이 회사에서 준비한 온갖 지원물품을 안으로 바지런하게 옮기고 있었다.
“하차.”
덜컹. 오 팀장이 버스기사에게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뒷문이 열렸다. 박가람과 길우성이 가장 먼저 튀어나갔다.
“좋은 일 하러 가즈아!”
“가즈아!”
내내 차분했던 오 팀장이 그들의 등 뒤에다 대고 버럭 외쳤다.
“뛰지 마!”
그 모습은 버스 안에 설치된 카메라, 밖에서 데뷔조가 나오는 모습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카메라, 거기에 차남석이 든 핸드폰에까지 고스란히 찍혔다.
한율에게 요리란, 먹을 수 있는 재료를 무조건 익히는 게 기본이자 끝이었다.
한 마디로, 요리에 관해선 전혀 몰랐다.
그러나,
탁탁탁탁.
“오오···!”
한율이 잡은 식칼 아래로 당근이 일정한 크기로 썰려 나갔다. 얇게 썬 당근을 바로 눕혀, 다시 탁탁탁. 순식간에 곧은 채가 되더니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옆에 대기 중이던 볼로 떨어졌다.
“서한율 너 뭐냐? 왜 이렇게 칼질을 잘 해?”
“어머니가 음식 할 때 가끔 옆에서 도왔었거든요.”
칼질 실력은 그때 쌓은 게 아니지만.
『한율아, 위험해, 안 돼. 엄마 도와주려는 건 고마운데, 그러다 손 다치면······, 너 왜 이렇게 잘하니?』
본래 세상. 무능하기 그지없는 황족을 지휘관으로 모실 때,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진영 막사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취사병의 신나는 도마 난타.
생각을 비우기엔 단순한 반복 작업이 최고였다. 깨끗하게 썰려나가는 재료를 보면 기분이 나아지기도 하고.
황족을 잘게 썰어버릴 순 없었으므로.
“구경 그만하고, 손 움직여요.”
위생모자와 장갑, 마스크에 앞치마, 장화까지. 완벽히 무장한 아이돌 및 아이돌 연습생들이 어슬렁어슬렁 흩어졌다. 한 사람만 빼고.
“안 가세요?”
맞은편에 서서 한율의 현란한 칼질을 보던 크래의 채아가 고개를 들었다. 옆에는 그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가 있었다.
채아가 퍽 진지한 표정과 낮게 깐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진지하게 요리해 볼 생각 없나?”
“···선배님의 상황극엔 어떻게 맞춰드려야 할까요?”
근처에 서서 떡갈비 반죽을 치대던 차남석이 웃었다.
“그걸 왜 카메라에 대고 물어.”
“상황극 아닌뎅. 여러분, 꽃토끼가 센스가 없네용. 나중에 후배교육 좀 단단히 시켜놓겠습니다.”
크래의 예능담당다웠다. 넉살좋게 두 팔을 걷어붙이는 척 고개를 끄덕끄덕.
“채아야, 일 안 하니?!”
그때 멀리서 라나가 부르자, 채아는 우아하게 턴하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넵, 선배님! 갑니다!”
오후 1시 경. 복지센터 소속 영양사와 조리사의 도움을 받으며 조리가 마무리되었다.
“그럼 우린 먼저 갈게요. 뒤는 후배님들에게 맡기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선배님들!”
“수고하세요! 홧팅!”
스케줄 문제로 크리스탈 래빗이 먼저 복지센터를 떠났다. 카메라의 2/3도 함께.
데뷔조 멤버들은 남아 도시락 싸는 작업을 시작했다. WB래빗에서 준비한 기부물품이나 이곳으로 들어온 물품 등과 함께.
가정마다 아이가 있는 집엔 학용품과 책, 어르신만 있는 집에는 장갑과 양말이 따로 들어가게끔 포장하는 데에도 시간이 적잖게 소모되었다.
“문 두드리고, 기척이 느껴진다 싶으면 ‘배달입니다’ 하고 앞에 걸린 주머니에다 도시락 넣으시면 돼요. 사람을 직접 만나길 꺼려하는 분들이 많으니까 괜히 확인하려 하지 마시구요. 사람이 없어도 그냥 넣으시면 됩니다.”
“네!”
위생복 대신 복지센터 조끼를 걸친 데뷔조 멤버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준비된 차량에 나눠 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고층 아파트 단지와 빌딩을 배경으로, 차들이 좁은 길을 천천히 달렸다. 그러나 상상했던 것처럼 빈부격차가 확연히 느껴지는 동네에만 배달을 간 건 아니었다.
“이런 좋은 아파트에 사는 분도 지원을 받···.”
“쉿.”
무심코 중얼거리는 강보배의 말을 유호가 막았다. 한율은 그들과 함께 도시락과 물품 박스를 들고 쾌적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우음.”
복지센터 직원의 말처럼 지원받는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며, 그들은 열심히 돌아다녔다. 데뷔 리얼리티 예행연습치고는 너무 심심한 장면만 나오는 거 아닌가 살짝 걱정이 들 정도로. 그러나 카메라를 들고 쫓아오는 기획홍보팀 직원은 내내 별 말이 없었다.
“어? 고양이다. 고양아, 안···.”
하악!
“······.”
10미터 너머의 길고양이에게 반갑게 인사했다가 거친 대답을 들은 강보배가 어깨를 축 늘어뜨려도.
“그러게 왜 초면에 함부로 말을 걸고 그래요.”
“내 잘못이었던 거야?!”
오후 6시 30분. 배달이 다 끝났다. 다시 복지센터로 모인 그들은 복지센터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후 철수했다.
“뭔가 크게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저녁이네요.”
차남석이 짐벌에 끼운 스마트폰을 향해 말했다.
“이제 저희는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갈 건데요, 아직 대표님께서 뭘 사주실지 못 들었어요. 넌 들었어?”
아침처럼 차남석의 옆에 앉은 한율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빙긋 미소를 지은 채 설레설레. 박가람이 적절히 끼어들었다.
“여러분, 제가 꽃토끼의 실체를···, 읍읍!”
“저런 걸 보고 자체 입단속이라고 합니다.”
푸하. 스스로 제 입을 틀어막았던 박가람이 비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에겐 두 개의 자아가 있는데···.”
“네, 아무말 대잔치는 패스할게요. 그럼 여러분, 메리크리스마스~.”
차남석이 짐벌을 높이 들어 돌리자, 화면에 잡히는 데뷔조 멤버들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메리크리스마스!”
“컷!”
차남석이 짐벌 높이를 낮췄다. 직원도 기둥에 고정시키거나 들고 있던 카메라를 껐다. 그제야 얌전을 떨던 데뷔조 멤버들이 마음 놓고 떠들었다.
“그런데 오늘 촬영한 거 언제 나가는 거야?”
“몰라?”
“건우 형이 양파 썰다가 통곡한 장면은 꼭 나가야 되는데.”
“상남자의 눈물! 두둥.”
“아, 아까 배달할 때 완전 웃긴 일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라이언한테—.”
“하지 마!”
한율은 말없이 차남석을 쳐다보았다. ‘컷’을 외친 차남석은 정작 녹화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창밖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화면엔 버스 좌석 등받이만 나오고 있지만, 소리는 모두 녹화 중.
나중에 영상이 편집될 때 들어갈 만한 거리를 수집하는 건가.
“센터에서 나왔냐니까 라이언이 세상 슬픈 얼굴로, ‘나 센터에서 내려왔어여’라고 말한 거야.”
“그 센터가 그 센터가 아닐 텐데, 크큭.”
“으으···.”
“그래서 할머니는 자신이 뭐 잘못 말했나 당황해하시면서 울지 말라고 사탕 하나 쥐어주시고.”
“아니, 그런데 라이언 너 센터 맡았던 거 지난달 라이브 테스트 때 아니야?”
“나한텐 소중한 추어억이야!”
“추어억 아니고 추억.”
“추엌.”
“엌 아니고 억.”
“몬 차이야?”
“엌은 어엌, 억은 얌전히 억.”
“······?”
지난 달 정민솔의 일이나 두 건의 도난사건의 범인이 밝혀지면서, 지금껏 조금 겉도는 면이 없지 않았던 라이언과 다른 멤버들의 사이는 조금 가까워진 듯했다.
‘상담’에 관해서는 누구도 직접 묻진 않았지만, 라이언이 또 무심코 차남석의 곰발바닥 무늬 양말을 집어 들면 말없이 손에서 슥 앗아가 본래 위치에 내려놓기도.
“남석, 너 이따가 성당 갈 거야? 성탄전야 미사.”
톡.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차남석은 그제야 녹화중지 버튼을 누르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시간 맞으면요. 형도 가게요?”
“엄마가 하도 갔다 오라고 하셔서.”
알고 보니 이건우도 가톨릭 신자였다. 비록 1년에 서너 번 갈까 말까 한 불량 신자지만. 마지막으로 성당에 간 게 데뷔조 발표 전 날이라고 했던가.
“······.”
그때 한율의 눈에 라이언이 꾹 다문 입술을 움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가고는 싶지만, 차남석이 다니는 곳이라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힘든 모양.
지난 달 이후 싸우는 횟수는 부쩍 줄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람의 거리는 평행을 유지 중이었다.
“라이언도 종교 있어요?”
“어?”
“Protestant? Catholic?”
라이언이 차남석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가톨릭···.”
“그럼 셋이 같이 가면 되겠네.”
“······.”
차남석이 짧은 한숨과 함께 툭 대답했다.
“그러든가.”
“그럼 나도 간다!”
“가람이 너희 집 불교라며.”
“맞아, 형 베개 밑에···.”
“괜찮아! 부처님은 자비로우시니까 잠깐 한눈팔아도 용서하실 거야! 대인배시거든!”
“뭐야···?”
유호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쟤 베개 밑에 뭐 있어?”
“아, 귀신 쫓는 염ㅈ···.”
“아냐, 안 들을래!”
* * *
[크리스탈 래빗,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봉사활동!]
[인기 걸그룹 크리스탈 래빗의 소속사 WB래빗 엔터테인먼트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봉사활동에 나섰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진행된 봉사활동에는 이 날 오후 방송 스케줄이 있던 크리스탈 래빗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참여했다. 여기에 뮤닷의 <보컬리스트 시즌3>에 나왔던 ‘꽃을 단 토끼’ 차남석과 서한율을 비롯한 WB래빗 연습생들과 직원들까지 나서서 ㅇㅇ복지센터에서 김장도 하고 사랑의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 준비한 기부물품과 함께 배달도 마쳤다.
WB래빗 엔터테인먼트는 2000년대에 히트곡을 연달아 발표한 가수 좌기훈이 대표로 있는 곳으로, 크리스탈 래빗은 데뷔한 연도 때부터 그룹 이름으로 어려운 곳에 기부를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등 따뜻한 선행에 앞장섰으며··· (중략).
해당 에피소드는 1월 1일, 크리스탈 래빗의 그린라이브 채널에서 특별히 공개된다.]
-24일이면··· 와, 쟤네 저기서 김장하다가 바로 몇 시간 안 돼서 무대 올라가서 공연한 거임? ㅋㅋㅋㅋㅠ 빡세네ㅋ
-클쓰 봉사는 매년 20일에서 23일 사이에 했었는데 이번엔 좀 늦게 했네ㅋ
-떠비 애들 작작 좀 굴려라 진짜ㅜㅜ 연말까지 ㅈㄴ달려야 하는 애들한테 휴식시간은 못 줄 망정... 크래 1월 초에 또 해외스케줄 있드만... 중순엔 일본서 앨범 발매하고ㅋ
ㄴ24일에 미랑이 잠깐 라방 켰었는데, 엄청 즐거워 보이던데? 좋은 일 하러 간다고.
ㄴ넌 그걸 믿냐?
ㄴ님보단 믿음ㅇㅇ
-서한율, 차남석 꽃을 단 토끼 1호 팬입니다☆ 방송 기대합니다♡
“용쓴다, 진짜.”
한껏 뒤로 젖힌 시트에 편히 늘어져 인터넷기사를 보던 멤버가 중얼거렸다. 멍하니 차창 밖을 보던 이해원이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크래 소속사.”
“크리스탈 래빗이요?”
“어. 상위권으로 갈 둥 말 둥 좀처럼 못 치고 올라가니까 어떻게든 이름 알리려고 헛돈 쓰잖아.”
기부와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은 굉장히 많다. 팬덤도 요즘엔 아티스트의 이름으로 좋은 일에 동참해 서포트하는 추세이기도 하고.
“헛돈까지야···.”
“헛돈이지. 거기 대표가 존나 융통성 없어서, 예전에 불독 사장 칼 같이 쳐냈단다. 그냥 한 번, 어? 애들 예쁘니까 밥 한 끼 사주고 싶다고 했는데 완전 정색하면서 필요 없다고 싹둑.”
“······아.”
“그래서 걔네 전에 그 뭐냐, 뭐였지? 아무튼 그 CF 3개월하고 재계약 없이 잘린 거잖아. 불독 사장이 광고주 라인이란 거 알면서. 좆소면 좆소답게 예, 좆심 한 번 굽히면 될 걸. 누가 뭐 수청 들라 그랬나? 술 따르라 그랬냐고. 존나 비싼 척 쩔어, 시발.”
잠시 쉬어도 괜찮잖아요
“이 새끼 전에 미랑이한테 까여서 그럼.”
“걔 아직 열아홉 아니었어요?”
“뭔 상관이야, 몸이 다 컸는데. 그리고 경험이 없겠냐? 존나 놀게 생겼잖아.”
크리스탈 래빗과 마주친 건 기껏해야 네댓 번 뿐 아니었나?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외에 말을 주고받을 틈은 없었을 텐데.
이해원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멤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스무 살이니까 상관없지.”
“걔 나 다니는 학교로 온다던데.”
“연영?”
“어.”
“헐~. 인섭쓰, 너 먼저 먹지 마라 진짜. 의리!”
“개솔 닥치고.”
“야, 섭이 요즘 파성줌마한테 의부증 당하고 있잖아. 불난 집에 기름 붓냐?”
“크크크.”
그때 운전하던 매니저가 음악 볼륨을 높이 올렸다. 시끄러우니 슬슬 닥치라는 신호라, MOHE 멤버들은 입을 다물고 다시 각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잠을 잤다.
이해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며 차창 밖을 보았다.
간판조차 없는 회원제 클럽에서 처음 보는 여성들 앞에서 춤을 추고 웃음을 팔아, MOHE는 연말무대 중 한 곳에 오를 수 있었다. 그것도 지상파나 케이블이 아닌,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가 주최한 무대에.
보통 중소기획사에서 나온 새파란 신인이 올라가기에도 과분한 무대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썩 기쁘진 않았다.
‘계약금, 얼마나 더 이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야 다 깔 수 있는 걸까.’
그리 생각하며 이해원은 물티슈를 꺼내 손을 꼼꼼하게 닦았다. MOHE로 데뷔하면서부터 차츰 생긴 버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