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2월 31일. WB래빗 올해 마지막 월말평가이자 데뷔조 최종멤버 선발평가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데뷔조 멤버들은 아무도 먼저 숙소를 나가지 않았다. 한 명이 ‘슬슬 시간이 되었으니 나가볼까’ 해서야 어슬렁어슬렁 움직였다.
숙소를 나가기 직전, 유호가 거실에 모인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누가 떨어지느니 붙느니 그런 걱정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각자 스스로나 챙겨라! 다 너보다 잘났으니까!”
유호는 말없이 웃으며 박가람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참고로 난 떨어질 생각 저언혀 없다. 알아서들 붙어.”
“배려 없는 맏형, 욕심 보소.”
“너도 내 나이 돼 봐. 안달나지 않곤 못 버틸걸?”
“그런데 형은 작곡 작사 프로듀싱으로 돈 벌 수 있잖아. 좀 내려놓으시죠?”
“박가람, 잠깐 회사 옥상에서 면담 좀 할까?”
“히익.”
심심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숙소를 나갔다.
오늘 마지막 평가를 받아 최종 데뷔멤버로 발탁되어도, 정식 데뷔까지 다시 몇 달. 그러나 이전까지 받았던 레슨과 연습은 세상에 선보일 무대와, 무대 밖에서의 활동, 대외용 이미지를 위해 다시 조정될 것이다.
‘내가 떨어질 거란 생각은 전혀 안 들지만.’
한율은 긴장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더 경직된 웃음을 짓거나, 아무 농담이나 입에 올리는 데뷔조 멤버들의 면면을 보았다.
‘누가 떨어질 지도 감이 안 오네.’
월말평가 점수야 오로지 보컬과 댄스 부분만 기재하니, 같은 연습생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다른 특기가 있을 지도.
WB래빗에서 가장 넓은 연습실에 소속 연습생이 모두 모였다. 남자연습생들 중 장기휴식 중인 정민솔을 제외하고.
같은 학교인 박가람이 하루는 정민솔을 붙잡아 언제까지 쉴 거냐고 물었더니, ‘다 모르겠고 일단 쉬고 싶다’라고 그랬다던가.
“단체레슨 시간이 너무 허전합니다.”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데뷔조 멤버들 바로 옆에 앉은 박현우가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한 명, 빨리 여기로 돌아오라고.”
박가람이 박현우를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아예 악담을 해라, 이 망할 놈.”
“아닌데? 난 성할 놈인데?”
“차남석, 너는 친구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킨···.”
“······?”
차남석을 돌아보며 따지던 박가람이 입을 벌린 모양새로 멈췄다. 멤버들을 비롯한 연습생들이 의아해하며 박가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언제 들어왔는지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가 서있었다.
“하이.”
손을 흔드는 라나의 뒤로 다른 크래 멤버들이 입장했다. 좌기훈 대표와 트레이너들, 평소엔 월평에 참석하지 않던 A&R팀장···.
“왜 이렇게 많이 들어오시지···?”
신인개발팀은 물론 매니지먼트 A, B팀 팀장과 스타일리스트팀장, 기획홍보팀장까지. 일부러 의자를 적게 준비한 건지, 몇 명은 연습생들의 옆에 섰고, 몇 명은 준비된 자리 뒤쪽에 병풍처럼 섰다.
“다들 몸은 적당히 풀고 왔죠?”
“네!”
판다처럼 눈 밑이 시커먼 좌기훈 대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WB래빗 올해의 마지막 월말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 * *
1월 1일.
해가 바뀌었다.
한율은 차가운 겨울바람 냄새를 맡으면서 빠르게 지나치는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4년.’
고개를 더 올려, 높디높은 고층 건물 끝자락에 거대한 마물의 그림자가 비치는 광경을 그려보았다.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 세 쌍을 지니고 뱀과 같은 머리가 두 개 달렸으며, 시커먼 비늘이 번들거리는—.
“도롱뇽 진짜 귀엽지 않냐?”
“······.”
불쑥. 길우성이 한율의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댔다. 새카만 눈동자가 인상적인 도롱뇽이 떠있었다.
“토종 도롱뇽은 키우는 게 불법인데, 해외에서 들여온 애는 키워도 된대.”
“···어쩌라고.”
사고가 감회에 젖기도 전에 바싹 말랐다.
길우성은 왼쪽 편에 앉은 차남석에게도 도롱뇽 사진을 들이밀었다.
“이거 키워도 돼요, 형아?”
“닥쳐. 절대 안 돼.”
“너 도롱뇽이 뭘 먹고 사는지는 아냐?”
“뭐 먹고 사는데? 올챙이?”
“플러스, 거미, 곤충.”
“···짜식, 귀엽게 생겨서는 그렇지 못한 걸 즐겨먹는군. 내가 졌다.”
조수석에 앉은 강보배가 한율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말 나까지 가도 괜찮은 거야?”
데뷔조 멤버들은 회사에서 특별휴가 이틀을 받았다.
유호와 이건우는 각자 집으로, 박가람은 라이언을 본가로 함께 끌고 갔다. 한율도 집으로 가기 전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남은 친구들을 데려오는 게 어떠냐 하여 함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택시를 타고.
“네, 혼자 숙소에 있는 것도 심심하잖아요. 어머니도 세 명까지는 괜찮다 그러셨고.”
“······?”
길우성과 차남석, 강보배의 얼굴에 비슷한 의문이 스친 듯했다.
음식 때문에?
한율은 자세한 설명은 삼키고, 대신 다른 정보를 주었다.
“아, 그리고 집에 고양이 두 마리 있어요.”
“······!”
길우성과 강보배의 눈이 번뜩거렸다.
“어머님, 보고 싶었습니다!”
“어서 와, 우성아!”
와락. 뻔뻔하게 남의 모친과 감격스런 상봉을 한 길우성과 달리, 차남석과 강보배는 예의바르게 자기소개를 했다. 모친도 반갑게 화답했다.
“한율이랑 같이 프로그램 나갔을 때 옆에서 잘 챙겨줬다고 들었어. 정말 고마워, 남석아.”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었는데요.”
“보배는 속초에서 왔다 그랬지? 타향살이도 힘든데 애들끼리 사는 거 힘들지 않아? 부담 갖지 말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있다가 가.”
“네, 감사합니다.”
먀옹먀옹. 태어난 지 4개월도 안 된 새끼고양이 두 마리가 꼬리를 부풀리며 폴짝 폴짝 정신 산만하게 뛰었다. 길우성이 소파 옆에 놓인 낚싯대를 집어 들었다.
“너희 진짜 귀엽게 생겼다. 먀앙, 먀앙.”
“어, 어, 그렇게 움직였다간 애들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쳐서 다칠 수 있어. 이리 줘 봐, 내가 숙련된 집사의 낚시 솜씨를 보여줄 테니까.”
“오오, 강보배 씨 믿음직스러운데?”
한율은 조용히 다가가 낚싯대를 앗았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리켰다.
“손부터 깨끗하게 씻고.”
“네에.”
먀아.
식탁 가득 차려진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그들은 고양이와 잠시 놀다가 한율의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TV가 크니까 좋다.”
예전에 이 집에서 생활한 적이 있던 길우성은 익숙하게 의자를 집어 벽걸이 TV 앞에 놓았다.
“그런데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강보배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희 어머니 진짜 미인이시다. 네가 누구 닮았는지 알겠어.”
“그렇죠? 나도 써한네 어무니 첨 봤을 때 완전 놀랐어요. 꼭 TV에 나오는 배우처럼 고우셔서.”
그렇긴 하지. 침대에 걸터앉은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모컨으로 VOD서비스를 띄웠다. 그리고 곧장 뮤닷을 찾았다.
“그런데 이건 뭐야?”
말없이 어슬렁어슬렁 방을 구경하던 차남석이 책장에 붙은 카드명세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길우성이 저한테 갚아야 할 빚이요.”
의자 위로 두 다리를 올려 감싸 안은 길우성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세뱃돈··· 세뱃돈··· 한 방을 노린다, 세뱃돈···.”
“······.”
“그런데 누구 거 볼 거예요? 데뷔 리얼리티.”
“으음···.”
“그린라이브에만 뜬 것도 있지 않나?”
“포트 연결하면 그만이니 상관없어요.”
잠시 멍하니 있던 강보배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우리 아직 최종 데뷔멤버 발표 안 났잖아.”
“이번에 떨어졌다고 포기할 거 아니잖아요.”
“아.”
바로 납득한 강보배까지, 그들은 어떤 보이그룹의 데뷔 리얼리티를 볼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현재 K-POP 정상에 있는 보이그룹의 것부터 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와··· 진짜 선배님들도 초반에 고생 많이 하셨네. 말투도 다들 교과서 읽는 것처럼 나긋나긋해.”
“신인 때니까.”
“그런데 나도 저렇게 시키면 그냥 하라는 대로 할 것 같아. 왜냐하면 회사 분들이 나보다 더 전문가일 테니까, 또 우리 잘되라고 찍어주는 거잖아.”
“회사도 늘 좋은 방향, 답이 되는 방향만 찾아 제시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런 걸 처음부터 환히 알면 이미 신인이 아닌 거 아닐까요.”
“억, 엘브 선배님 표정 봐. 크크큭. 눈으로 욕하는 게 남석이 형이랑 닮았···, 억!”
퍽.
그 다음엔 최근 핫하게 떠오르는 그룹의 데뷔 리얼리티나, 다른 소속사에서 자체 제작한 리얼 버라이어티도 몇 화 감상했다.
“새삼 느꼈는데, 선배님들 진짜 라방 자주 하는 구나. 특히 아직 인지도가 애매할수록 이틀에 한두 번 이상은 짧게라도 하는 것 같아.”
“민낯으로 먹방까지 하다니.”
“요즘 돌판에선 신비주의 컨셉이란 말 자체가 사라진지 오래지. 작위적인 거에 거부감 느껴진다는 팬들도 많고.”
“내내 고개 들고 우러러 보는 건 많은 피로감을 부르잖아요. 그만큼 탈덕했을 때 허탈감도 더욱 심하고. 쟤가 뭐 그렇게 잘났다고 내가 그렇게 목을 맸지?”
“아, 뭔지 조금 알 것 같아.”
똑똑.
“애들아, 저녁 먹어.”
“네!”
* * *
밤 9시. 그린라이브 크리스탈 래빗 채널에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올라왔다. 일부러 시간까지 맞춰 방송을 보던 후드소녀, 이아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나···.’
크래 위주로 촬영되고 편집된 터라, 서한율과 차남석을 비롯하여 WB래빗 회사 앞에서 본 낯익은 얼굴들은 잠깐 비춰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이아름은 가끔 실실 웃었다.
“율이 오빠 요리솜씨 대박이다. 그런데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불러, 벌써? 와··· 우리 반 놈들이 보고 배워야 하는뎅. 아니, 당장 나부터 배워야 하나?”
[자네, 진지하게 요리해 볼 생각 없나?]
[···선배님의 상황극엔 어떻게 맞춰드려야 할까요?]
“오빠, 그걸 왜 카메라에 대고 물···.”
차남석의 목소리가 중첩되었다.
[그걸 왜 카메라에 대고 물어.]
“허얼. 남석 씨, 허얼.”
[상황극 아닌뎅. 여러분, 꽃토끼가 센스가 없네용. 나중에 후배교육 좀 단단히 시켜놓겠습니다.]
“아니에여, 언니. 안 시켜주셔두 돼여, 언니 너무 이뻐서 불안행.”
“뭘 그렇게 혼자 중얼 거리냐? 미쳤냐?”
“아, 깜짝이야!”
소리 없이 난입한 동생의 목소리에, 이아름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폰을 떨어뜨렸다.
“뒤지실?!”
“엄마! 누나가 또 나쁜 말 썼어!”
“이아름!”
이아름은 벌떡 일어나 동생을 문 밖으로 꾹꾹 밀어 쫓아냈다.
“쏘리!”
거실을 향해 외친 후 쿵, 문을 닫아 잠갔다.
“후우.”
이아름은 본인이 만든 오픈톡방으로 들어갔다. ‘꽃을 단 토끼’를 좋아하는 팬들이, 그 사이 크래의 방송을 보고 난 후기를 하나 둘 올리고 있었다.
이아름도 질세라 톡을 썼다.
-꽃토끼 데뷔하면 요리콘텐츠도 한 번 했음 조켓어욥☆
-전 나중에 팬싸하면 율이한테 제 손을 손날로 썰어달라고 할거임ㅎㅎㅎㅎ
-ㅋㅋㄱㅋㅋㅋㅋㅋㄱ
-정식데뷔하면 우리랑도 같이 봉사활동가겟죠>ㅅ<)? 크래 보니까 회사가 팬들이랑 같이 가는 봉사활동 자주 기획하는 모양이던뎅
-ㄹㅇ기대되네욯ㅎㅎ
드라마처럼 극적이진 않습니다
이틀의 휴가를 즐기고 돌아온 WB래빗. 2층 사무실 문 바로 옆엔 이전에 없던 두 장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WB래빗의 새로운 보이그룹명을 지어주세요!]
[대상: WB래빗 소속 직원, 연습생, 트레이너 분 누구나 참여가능!
방법: 사무실 투표함 박스에 본인 이름과, 보이그룹명, 왜 이렇게 지었는지 이유나 의미를 꼭꼭 적어서 넣어주세요!
※대표님 왈- 토끼관련 이름 대환영!!!!
기간: ~2017. 01. 19.
채택 시 상품: 4인 가족 동반 유럽여행 10박]
[WB래빗 보이그룹 리얼리티 프로그램 기획 아이디어 공모전]
[대상: ←왼쪽이랑 같음.
방법: 기획홍보팀에서 기획서 양식을 받아 강순철 팀장님께 제출해주세요! (타인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경우, 어마무시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기간: ←왼쪽ㅇㅇ
채택 시 혜택: 벽걸이에어컨부터 시작해볼까요? 연습생일 경우··· 세상에! 레슨비를ㅇㅂㅇ?!(말잇못)]
“이름 공모전은 그렇다 쳐도, 오른쪽은 대체 누가 작성한 걸까요?”
“대박. 가족 동반 유럽여행 10박 보내준대. 이거 우리도 참여 가능한 거 맞죠?”
“잠깐. 여기 작게 쓰여 있는데.”
한율은 그룹명 사내공모전 포스터 하단에 깨알같이 적힌 글자를 읽었다.
“데뷔확정 멤버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었을 시, 안타깝지만 당신은 빡세게 굴러야 하므로 가족 분들만 보내드립니다.”
“빡세게 굴···.”
“······.”
“추신, 정 가고 싶다면 해외투어 콘서트를 노려보세요. 자유시간이 주어질 지도.”
후우. 데뷔조 멤버들의 한숨이 복도에 울렸다. 그들은 기운 빠진 걸음걸이로 영상실로 향했다.
영상실 안은 암막 커튼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하고, 조명도 모두 소등된 상태였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기다리고 있던 오동식 팀장이 화답했다.
“네, 휴가는 잘 보냈습니까?”
“아니요.”
“그렇군요. 자리에 앉으세요.”
오 팀장이 흐릿한 푸른색으로 물든 스크린 앞에 섰다.
“서로에 대한 평가표를 작성하기 전, 함께 볼 영상이 있습니다.”
스크린에 영상 프로그램이 떴다. 재생 목록도 함께.
[201609-d]
[201610-d]
[201611-d(a)]
[201611-d(b)]
[201612-d]
[201612-d-Christmas]
“이거 설마···.”
“네, 데뷔조 여러분들이 데뷔조가 된 후 치른 월평과 라이브 영상입니다. 마지막엔 봉사활동 영상 편집본이구요.”
“아, 이러지 마세요. 저 이런 거에 약하단 말이에요···.”
슬픈 예감을 직감한 박가람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 팀장은 아랑곳없이 설명을 이었다.
“예전 영상을 보면서 그때보다 멤버들이 얼마나 발전하고, 그리고 팀으로서 여러분의 호흡이 어떻게 점차 어울리게 되었는지 눈으로 직접 보며,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런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팀장님, 그런데요···.”
강보배가 조심히 손을 들었다.
“데뷔조 발표 때 말씀하시길, 상황을 봐서 8명 그대로 갈 수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제가요?”
“아니요, 강 팀장님이.”
“아아, 분명 초기에 그런 말도 있었죠.”
오 팀장이 씨익 웃었다. 가뜩이나 빛을 등지고 있는데다 안경까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 속을 가늠하기가 힘든 미소였다.
“뭐,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순 없겠네요. 그럼 이제 영상을 감상해볼까요?”
* * *
데뷔조 멤버들에게 4장의 용지가 끼워진 바인더가 주어졌다.
한 장마다 두 명씩 이름이 적힌 평가표는 지난 번 데뷔조 멤버를 뽑기 전에 썼던 평가표와 항목이 동일했지만, 기타 의견란 칸이 굉장히 컸다.
[본인도 객관적으로 평가해주세요!]
『우리, 서로한테 제발 나 뽑아주라는 말을 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는 하지말자. 만약 그러면 난,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이 노력을 덜했다는 반증이라고 여길 거야. 그렇지 않고선 뽑힐 자신이 없어 그런 거라고.』
앞으로 4년. ‘그날’이 올 때까지 함께 아이돌그룹으로 지낼 멤버들.
혼자 2층 회의실에 앉은 한율은 네 장의 평가표를 나란히 펼쳐놓은 뒤, 가만히 그 안에 새겨진 이름을 하나씩 보다가 펜을 들었다.
30분 후, 매니지먼트B팀의 오동식 팀장 자리에 8개의 바인더가 쌓였다. 오 팀장은 그걸 열어보지 않은 채 그대로 대표실로 들고 갔다.
“이럴 때보면 애들이 우리보다 참 이성적이네요. 친분에 휘둘려서 쓴 애가 어째 한 명도 없네.”
최종 데뷔멤버 평가의 마지막 참고자료를 돌려보며 강무기 팀장이 웃었다.
“라이언이 남석이에 대해 쓴 거 봐요. 짜증나게 노래 잘함. 남석이는··· 재발 위험성을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영어 랩을 생각하면 필요한 것 같음.”
“익명 평가인데도 맞춤법이랑 필체로 누가 썼는지 다 들통 나네요. 하하.”
“애들 일지 검사하면서 자주 봤었으니까요.”
A&R팀 진장현은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평가표를 들여다보고, 의견도 꼼꼼히 읽었다. 그는 며칠 내내 잠도 제대로 안자며 데뷔조 멤버들의 월평이나 레슨 영상을 보느라, 좌기훈 대표보다 눈가가 거뭇해진 상태였다.
“우성이가 춤을 제일 잘 추는 친구죠?”
“네.”
“보배는 어때요, 윤 쌤? 안무 습득력이?”
“나쁘지 않아요. 3개월 더 빡세게 굴리면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을 거예요.”
“가람이는 귀염성이 있기는 한데···.”
“걔는 예능캐에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웬만큼 추는 예능캐.”
“아뇨, 전에 조금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요. 애가 밤에는 절대 혼자 안 나간다고.”
“그런 소문이 있어요?”
좌 대표가 의아한 얼굴로 진장현을 바라보았다.
“매일 작업실에 박혀 작업하는 줄 알았더니, 그런 소문은 또 언제 들으셨대.”
“딱히 어두운 거 무서워하는 낌새는 전혀 못 느꼈는데요? 그리고 애들 매일 새벽에 퇴근하잖아요.”
“아니면 말고요.”
“건우는 어릴 때 특이한 경력이 있네요? 어린이 낚시대회 1등?”
그들의 회의는 4시간 넘게 이어졌다.
* * *
오늘도 데뷔조 멤버들의 레슨은 전부 오프.
최종 데뷔멤버 발표는 내일 아침이 될 테니 오동식 팀장은 숙소로 들어가 쉬어도 좋다고 했지만, 바로 회사 밖을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호는 3층의 작업실로, 차남석은 보컬연습실에 틀어박혔다. 다른 멤버들은 B연습실에.
한율은 빈 보컬연습실에 들어가 혼자 디지털피아노를 쳤다. 소리가 제 귀에만 들리도록 헤드셋을 끼고, 본래 세상의 곡을 연주했다.
‘이 음정이 아니었나? 위화감이 드는데.’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가며.
우웅.
레슨이 없어, 반납하지 않은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들어온 메시지엔 아는 이름이 거론되어 있었다.
[상진이 매니저입닏.라디오중인데전화갈수.잏어요]
“······?”
윤상진 매니저? 라디오?
오타에서 다급함이 느껴진다.
그 순간, 액정이 전화수신으로 바뀌며 윤상진의 이름이 떴다. 한율은 헤드셋을 벗은 후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어? 전화 받네? 뭐 해?]
“피아노 연습하고 있었어요.”
-[오오, 그렇구나아···. 레슨은 끝난 거야?]
통화 볼륨을 높여보니 윤상진을 제외한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말소리는 전혀 없다. 일부러 숨을 죽이는 것처럼.
“오늘은 레슨 없는 날이라서요.”
-[그래? 그럼 있잖아, 밥 먹었어? 날이 많이 추우니까 이상하게 뜨끈한 국물 같은 거 땡기지 않아?]
난데없이 전화해서 하는 말치곤 내용이 이상하게 휜다.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한율은 일단 어울려주었다.
“어묵 탕이나 전골 같은 거요?”
-[그 막, 해산물 들어간 거.]
“꽃게탕?”
-[어어! 그게 막 먹고 싶은 거 있지? 하하···. 아, 최근에 뉴스 봤어? 요즘 영국 때문에 유럽이 시끌벅적하잖아. 그 뭐라 그러더라···.]
메시지에 라디오라고 언급됐었지.
“브렉시트?”
-[맞아, 맞아! 아,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하하. 아, 내가 뭐 물어보려 그랬더라? 아, 그 영국에서 보트에서 여러 사람들이 막 노 젓는 스포···.]
“조정.”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자, 윤상진도 한율이 눈치 챘다는 걸 깨달았는지 목소리가 고양됐다.
-[우리 같이 촬영한 드라마 제목!]
“하울링.”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는?!]
“1592년.”
-[우오와아아!]
대답하기 무섭게 핸드폰 너머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율 씨, 안녕하세요. SBC 라디오 랄라밤 DJ 강가운이라고 합니다.]
-[서한율! 서한율! 꽃토끼! 서한율!]
누군지는 몰라도 패널들이 난리가 났다. 소란이 진정되고 나서야 한율은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곧 개봉을 앞둔 독립영화의 홍보를 위해 주연을 맡은 윤상진을 비롯한 배우들이 라디오 게스트로 나왔다. 그리고 윤상진과의 토크 중에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예정인 <하울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과정에서 한율의 이름이 거론되자 DJ가 지인찬스 퀴즈 코너에서 소환을 요청한 거라고.
-[그럼 갑작스러운 퀴즈에도 당황하지 않고 정답을 맞춰주신 한율 씨에게 선물을 보내드릴 건데요.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주세요. 첫 번째 도레땡피자 신제품 L사이즈 교환권, 두 번째 향수, 세 번째 아무거나 만두 세트.]
“피자나 만두 세트, 제가 받지 않고 상진이 형한테 넘겨도 되는 거죠?”
-[어? 그래도 괜찮아요?]
“네. 제가 살찌면 안 되거든요.”
-[나는 살쪄도 되는 거야···?!]
“······.”
한율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한율아···?]
그렇게 예상치 못한, 짧게나마 생방송 라디오에 출연한 뒤 한율은 다시 피아노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포털사이트 실검 말미에 잠깐 [랄라밤 서한율], [윤상진 서한율]이 떴다가 사라진 것도 모른 채.
다음 날 아침 9시. 데뷔조 멤버들은 3층의 대회의실로 모였다. 데뷔조로 발표되었던 바로 그 장소로.
숙소에서도 일부러 최종 데뷔 멤버 선발에 관한 언급을 피한 그들은, 여기에서도 시시한 잡담을 나눴다.
“남석이 너 팔로워 엄청 늘었더라? 역시 그 맛보기 영상 때문인가?”
“아무래도요.”
“그런 거 보면 조금 신기하기도 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게.”
“그게 아니라, 남석이만큼 잘생긴 놈이 더 있을까 구경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흐윽!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들 아침밥은 맛있게 먹었어요?”
“네!”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 데뷔조 멤버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좌기훈 대표와 오동식 팀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상석에 자리한 좌 대표는 멤버들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운을 뗐다. 좌 대표의 앞에는 그가 들고 온 노트북이 놓였다.
“다들 지난 몇 달 동안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레슨을 따라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또래 친구들처럼 신나게 놀러 다니거나, 밤늦게 맛있는 치킨을 시켜먹고 싶다거나 하는 유혹도 많이 들었을 텐데.”
“···하하.”
아주 가끔, 밤에 몰래 편의점 음식을 먹었던 누군가가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좌 대표가 눈을 부릅뜨더니 익살맞게 찡그리며 웃었다.
“그럼 더 이상 여러분의 진이 빠지지 않도록 올해 4월, WB래빗의 이름을 걸고 새로이 나갈 보이그룹 멤버의 이름을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회사에서 뽑은 최종 데뷔멤버는 치열하고도 화려한 연예계란 전장으로 나갔을 때,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조합이라 판단해 선발한 것이지, 결코 재능과 실력만 보고 뽑은 게 아니란 점입니다.”
“이름을 불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동식 팀장이 덧붙이는 사이, 천천히 심호흡을 한 좌 대표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호.”
“감사합니다!”
“서한율.”
“감사합니다.”
한율의 담담한 대답에 이어, 곧 차남석, 길우성, 라이언이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이윽고 남은 건 강보배, 이건우, 박가람.
“······.”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강보배는 해탈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제일 미숙하니 떨어져도 당연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기대를 갖지 말라 수십 번 수백 번 마음을 다잡은 사람처럼.
박가람은 앞서 한 사람씩 호명될 때마다 어깨와 눈썹 각도가 처지더니, 지금은 책상 아래로 흘러내릴 것 같은 상태였다.
지난 번 정민솔이 임시로 들어왔을 때 빠졌던 이건우는 이번에도 자신인가, 하는 얼굴로 멍 때리고 있었다.
언젠가 이건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냉정히 돌아보니, 내가 이 중에서 제일 개성이 약한 것 같다.』
유호는 작곡작사, 프로듀싱 능력자이자 다정한 맏형, 박가람은 예능캐, 차남석은 존잘의 중저음 보이스, 한국말을 할 땐 바보 같지만 영어로 속사포로 떠들 땐 제법 멀쩡해 보이는 라이언, 박가람과 케미가 좋은 또 다른 예능캐이자 춤을 잘 추는 길우성, 랩할 때는 카리스마가 폭발하지만, 순둥순둥한 평소 모습의 갭에서 충격을 부르는 강보배.
‘나한테는 깨끗한 고음이라고 했었지.’
이윽고 좌 대표가 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보배, 이건우, 박가람.”
가장 처음 불린 강보배가 어깨를 크게 움찔거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불린 박가람은 ‘이건우’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좌기훈 대표가 판다 같은 얼굴로 웃었다.
“WB래빗의 새 보이그룹은 지금 있는 8인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우오와아아!”
끼익, 쿵! 의자 두 개가 쓰러졌다. 그러나 멤버들은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다다. 박가람이 먼저 회의실 안을 질주하자, 그 뒤를 길우성이 따랐다. 그나마 차분한 성격의 꽃토끼와 맏형만 자리를 지켰다.
오동식 팀장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좌 대표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바로 어제 보배가 8명으로 갈 수도 있지 않냐고 했을 때 솔직히 가슴이 철렁거렸습니다.”
“데뷔조에 넣지 않기엔 아까운 한 명을 덧붙였더니, 나중에도 내보낼 한 명을 고르기가 힘들어졌죠.”
이들이 데뷔를 하게 되면 자연스레 처음 스포트라이트는 꽃을 단 토끼, 차남석과 서한율에게 쏠릴 터다. 그러면 남은 멤버들은 나머지 분산된 시선에 기대어 인지도를 쌓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인원이 많을수록 개개인에겐 불리하게 작용된다.
그래서 좌기훈 대표는 그 한 명에겐 잔인한 일이 될 수 있으나, 데뷔할 팀을 위해선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을 내려야 했던 바로 어제, A&R팀의 진장현 팀장과 장재천이 말했다.
『인원이 많으면 처음엔 누가누군지 헷갈려 하긴 하죠. 하지만 그룹 전체의 색 따로, 그룹 내 유닛이 추구하는 음악성 따로, 이렇게 다양한 모습과 색을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지금도 많이 제시되고 있잖습니까. 평가표만 봐도 애들 사이가 좋은 게 보이는데, 괜히 한 명 내보내서 신파극 찍게 하지 마시고 그냥 다 같이 데뷔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율이 노래에 건우의 단단한 랩, 라이언과 보배의 힙합, 가람이랑 우성이는 신나고 경쾌한 노래, 여기에 호가 중심을 잡아줘도 괜찮을 것 같네요.』
『···남석이는요?』
『남석이는 아무데나 끼어도 잘할 것 같아서 굳이 언급 안 했습니다.』
아티스트의 스타일과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곡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작업실에서 데뷔조 아이들에게 어울릴 법한 곡을 몇 곡 만든 상태였고, 좌 대표는 허밍으로 가이드 된 음악을 감상하며 데뷔조 아이들이 부르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 이제 슬슬 다들 진정하고···.”
“대표님 싸랑합니다!”
“싸랑합니다, 대표님!”
“살펴가세요! 번복하기 없음!”
“하하하하.”
좋은 소식만 날름 받아먹고 나가라니.
좌 대표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오 팀장을 바라보았다. 오 팀장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착석!”
까불대던 멤버들이 넘어간 의자를 바로 일으켜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좌 대표가 노트북을 열었다.
“그럼 지금 바로, 회사에서 여러분을 위해 만들었거나 모집한 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첫 데뷔곡이 이 중에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 집중해서 잘 들어주세요.”
진짜 데뷔 멤버가 되었다는 감동도, 기다렸던 현실 앞에선 얌전히 몸을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