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딩동. 핸드폰에 어스래빗의 그린라이브 방송 시작 알림이 떴다.
[어스래빗-두근두근 첫 라방! 새해인사 드립니다!]
“이렇게 갑자기?”
<수의형사> 촬영도 모두 끝났겠다, 휴식을 핑계로 며칠 내내 집에서 빈둥거리던 이희우는 소파에 널브러진 채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TV를 끄고 그린라이브 알림 창을 눌렀다.
영상에 한복을 갖춰 입은 곱상한 소년 여덟 명이 나왔다.
[···둘, 셋.]
[안녕하세요, 어스래빗입니다!]
아직 정해진 구호가 없는지 손만 휙휙 흔들며 인사한다.
[어우, 아직 우리 이름 말하는 거 어색해.]
[이 영상 보시는 분들도 어색하실 테니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까?]
[나이순으로 갑시다.]
[···꼭 그래야 돼?]
이희우는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 어스래빗의 멤버들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서한율과 차남석을 제외하고, 다른 멤버들은 방송 경험이 없거나 덜한 게 언행에서 티가 났다. 카메라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다가도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눈치를 살피고.
정말 풋풋하기 그지없는 신인들의 모습.
“좋으을~ 때다~.”
티 테이블을 끌어당겨와, 핸드폰 받침대를 놓고 편히 감상했다.
라이브에서 말할 대본은 미리 준비했는지, 오디오가 어색하게 비는 순간은 적었다. 빈다 싶으면 올라온 채팅을 읽었다.
[···어? 아, 다람이가 가람이 형 가리키는 거였어요?]
[다람이 얼굴 좀 부은 것 같은데? 라고 한 분이 물어보셨어요. 어떻게 된 거죠, 박가람 씨? 다이어트 중 아니었나요?]
[전 억울합니다, 여러분···!]
-나왔다! 도토리 빼앗겨서 충격 먹은 다람쥐 표정ㅋㅋㅋㅋ
-ㄹㅇ표정장인ㅋㅋㅋㅋ
-입술 파르르
얼굴은 작고 눈이 크고 동그래서 외적으론 제일 어려 보이는 박가람이 서한율을 가리켰다.
[한율이가 세상에, 어제 설을 쇠러 갔다가 맛있는 떡을 이마안큼! 싸들고 와서 제 다욧 결심을 무너뜨렸어요! 좋았어, 이참에 제가 꽃토끼의 실상을 낱낱이.]
[그 말 세 번째에요, 형.]
[두 번째 자아는 안 나오나요?]
-아니, 뺄 게 어디 있다구 다욧ㅠㅠ
-지금도 마른 것 같은데 왜?
-(번역)태국이다. 손과 하트 원한다.
“요즘 애들은 이러고 노는구나.”
친한 친구들끼리 카페에서 수다 떠는 것처럼 채팅으로 소통한다. 한없이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주며.
[세뱃돈 얼마 받았어요? 라는 질문이 들어왔네요. 얼마 받으셨죠?]
맏형으로 추정되는 유호가 길우성에게 물었다.
[넵! 0원 받았습니다! 하···.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이 굉장히 비싸더라구요···. 올해 대학 들어가는 누나에게 양보 당했습니다.]
···아니, 한없이 밝다는 건 취소. 난데없이 나온 현실적인 문제에 톡창이 ‘ㅠㅠ’ 이모티콘으로 도배가 되었다.
[누나에게 한 마디 하시죠.]
[누나, 조금이라도 내게 미안하다면.]
길우성이 세상 아련한 눈으로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5만 원 만이라도 넘겨줘. 지금 이 영상,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ㅋㅋㅋㅋㅋㅋㅋ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반전 무엇ㅋㅋㅋㅋㅋㅋ
“쟤 뭔데 귀여워.”
이희우도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리고 촬영장에서 내내 예의바르고 깍듯하게 행동했던 차남석을 살피다가, 서한율로 시선을 옮겼다. 무대나 촬영장과는 다르게 두 사람 다 편해보였다.
『WB래빗 직원이 그러는데, 둘 다 데뷔 후에도 한동안 연기할 생각 없다고 했대. 그룹 활동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대체 왜? 정산을 제때 잘해준다 그랬나?’
가볍게 떠올린 의문은 아니었다. 이희우에겐 아직도 출연료를 받지 못한 작품 다섯 개가 있었다.
하나는 드라마로, 외주제작사 대표가 배우에게 줘야 할 출연료를 제작비로 다 써버린 뒤 ‘쏘리, 너한테 줄 돈 없어짐’이러고 폐업 신고 후 잠적해버렸다. 출연 전 계약금 형식으로 사전에 10%를 받은 터라 사기로도 신고가 어렵게 되어, 아직도 민사 진행 중인 상황.
다른 하나는 영화였는데, 제작 도중에 투자자가 손을 떼는 바람에 제작사가 다급하게 여기저기에서 돈을 끌어 모으며 제작비를 아끼다가 그만··· 이도저도 아닌 작품이 되어, 망.
적자가 너무 많이 나서 출연료를 지급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감독은 휑한 정수리를 보이며 눈물을 쏟았다.
나머지 셋은, 예전 소속사가 떼먹었다.
“아, 내 돈···. 내가 고생해서 번 내 돈···.”
이희우는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해사하게 웃는 아이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덟 명의 합동 세배.
이희우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세배를 받았다.
“오냐.”
우웅. 타이밍 좋게도, 라이브방송이 끝나자마자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하이. 새해 복 많이 받아.”
-[응, 너도. 희우야, 저기 있잖아···.]
인사도 건성으로 받고 말부터 흐리는 게 퍽 수상쩍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그게···.]
“또 급전 필요해? 언니 재작년에 나한테서 빌려간 3천 아직 안 갚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실장님이 네가 출연했으면 하는 작품이 있는데···.]
“베드씬 찐하게 나오는 거야? 아니면 상체 완전 노출? 베드씬은 괜찮은데 가슴 까는 건 싫어.”
-[대체 무슨 기준이니, 그건. 아니, 그게 아니고.]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셋 셀 때까지 안 하면 끊는다. 하나, 둘.”
-[블블 뮤비 출연 좀 하자!]
이희우의 얼굴이 멍해졌다.
“······뭐?”
* * *
후우. 유호가 크게 심호흡 했다. ‘라이브 종료’가 뜬 영상엔 여전히 팬들의 톡이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이 눈에 안 보이니까 괜찮겠지 했는데, 그래도 라이브라고 생각하니까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라.”
“이 영상 계속 아무 때나 다시 볼 수 있는 거죠? 으으, 조금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반성은 나중에 하고, 옷 갈아입고 3층 가죠.”
“그 전에 셀카부터 찍고.”
한율의 말에 아, 하고 흩어지려던 멤버들이 차남석의 말을 듣곤 다시 모였다.
찰칵.
“···라이언 눈 감았다. 다시.”
“미안.”
찰칵.
그들이 급히 옷을 갈아입고 3층으로 향한 이유는, A&R팀장이 라방이 끝나면 바로 올라오라고 한 까닭.
이미 그들의 데뷔EP앨범에 수록될 후보 곡은 한 곡을 제외하고 모두 들어와 연습 중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곡은 어스래빗 멤버들은 물론 회사에서도 신경 쓰는 곡.
바로, 보이그룹 곡 전문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레몬사이다의 곡이었다. 높은 확률로 그들의 데뷔 타이틀곡이 될 수 있는 노래.
“레몬사이다가 곡을 보내왔습니다.”
“오오! 드디어!”
멤버들이 소파에 빼곡하게 자리하자 진장현이 곡을 재생시켰다.
[삑. 삐빅—.]
아주 약한 신호음 같은 게 들리더니,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with all one's might.]
[with all one's might.]
두 번째 속삭임과 함께 쿵, 쿵, 쿵, 쿵. 둔탁한 소리를 경계로 웅장하지만 절제된 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시작된 랩.
[하강 하강 끝없는 구름 속을 하강]
[다다른 푸른 하늘, 비친 수면 비친 날 봐]
[미친 날 봐 with all one's might!]
노래.
[약한 걸까 약은 걸까]
[끝없이 달리는 게 약한 거라면]
[약하다고 할게 빛을 쫓아 달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달만 쫓아 달려]
[약은 거라 할게]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음악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아이돌 노래 가사는 대체 왜 이럴까.’
사람을 괴롭힐 이유는 가해자나 찾는 거지
쾅쾅쾅. 한 남자가 마우스를 책상에다 내리쳤다. 아무리 색을 보정하고 자연스럽게 맞추려 해도, 사진이 갖다 붙인 티가 나 화가 났다.
‘하…, 포즈는 이게 제일 꼴리는데.’
그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다가 다른 폴더를 띄웠다. 외설적인 여성의 사진이 가득 나왔다.
‘영상이 존나 리얼한데 해상도가 천차만별이라 힘들고…. 나도 그 프로그램이나 구입할까…. 하, 씨발. 카드도 뺏겼는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공간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물든 작품들.
가장 크게 뽑은 사진을 뚫어져라 보던 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황급히 날짜를 확인, 한 고등학교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이 미친 새끼.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몇 달 전, 어떤 개새끼가 라나에게 섣불리 접근한 뒤로 크리스탈 래빗의 경호가 강화되었다. 바로 집 앞까지 늘 매니저나 경호원이 따라 붙었고, 숙소도 보안이 더욱 철저한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날이 오고 있었다.
남자가 모니터를 보면서 웃었다.
‘씨발년. 내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감히 날 고소해? 씨발, 씨발, 씨발….’
그는 자신이 만든 수많은 합성 이미지 파일을 불러왔다.
‘기다려라.’
식식. 곧 포토프린터기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오빠가 간다, 미랑아.”
* * *
“가람이 형 졸업선물 뭐 사면 좋을까요? 형은 뭐 살 거예요?”
여러 종류의 가게가 늘어선 거리. 한율은 함께 걷는 차남석을 향해 물었다.
“아직 생각 중이야. 다양한 물건이 있는 곳에 가면 느낌이 올 것 같기는 한데.”
“저기 가볼까?”
길우성이 한 가게를 가리키며 스마트폰을 끼운 짐벌도 돌렸다. 체인점이 많은 유명한 디자인문구점. 길우성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을 짐벌에 끼운 채 들고 있던 한율과 차남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셀카 영상이 더욱 자연스러워 보이죠. 선물을 고르는 건 여러분이 직접 촬영하세요.』
오 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촬영용으로 쓸 스마트폰 공기계를 세 사람에게 지급했다.
『가게 같은 곳에 들어가기 전엔 꼭 촬영해도 되는지 미리 허락 받는 거 잊지 마시고.』
가게 앞에 도착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허락을 구하러 갈 것이냐.
길우성이 냉큼 말했다.
“1번 타자, 잘생긴 남석 씨 출동.”
“…어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차남석의 모습을 찍으며, 길우성이 영상에 대고 말했다.
“한숨 쉬는 것도 잘생긴 남석 씨가 촬영 허락을 받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다음 가게에 허락을 구할 땐, 외모 순이니까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체 본인 얼굴이 잘생겼다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길우성의 화면에 한율이 길우성을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찍혔다.
“여러분, 써한이 남석이 형 닮아가나 봐요. 남석이 형도 입이 아니라 눈으로 욕하거든요.”
그때 가게에 들어갔던 차남석이 활짝 열린 출입문으로 나와 손짓했다.
“찍어도 된대.”
“예쓰!”
세 사람은 가게로 들어가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시 예의바르게 감사를 표한 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방과 후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 안에는 그들처럼 교복을 입은 손님이 제법 있었다.
“어? 쟤네….”
“서한율도 왔나 봐! 그 뭐지? 아, 지구토끼…!”
예전에 H&B스토어에 갔을 때처럼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도. 그러나 촬영 중이라 그런지 섣불리 다가오진 않았다.
“조금 전까지 뭘 살까 고민했는데, 다양한 물건이 있는 곳으로 와서 눈으로 쭉 훑으니까 바로 답이 나오네요.”
한율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그쪽을 향해 묵례를 한 후 욕실용품이 있는 곳으로 갔다. 디자인문구점답게, 차곡차곡 개켜진 수건에도 귀여운 캐릭터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한율은 렌즈를 한 번 쳐다본 후 수건을 찍었다.
“왜 수건이냐면, 저희가 연습할 때 땀도 닦고, 레슨이나 연습 중간 텀이 길면 아예 씻거든요. 그만큼 수건을 자주 쓰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매일 빠는데, 전에 보니까 형 수건이 많이 낡았더라구요. 그리고 이렇게 딱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어야 누구 건지 한 눈에 알 수 있고.”
한율은 한 손으로 곱게 개켜진 수건을 꺼내 펼쳐, 손으로 재질을 조심스레 만지는 모습도 촬영했다.
“캐릭터 종류별로 한 장씩, 총 여섯 장을 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 저도 온 김에 필요한 걸 사야겠네요.”
마침 곳곳에 장바구니가 비치되어 있어, 한율은 수건 여섯 장을 장바구니에다 담은 후 가게를 돌아다녔다.
15분 후. 세 사람은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그냥 한 가게에서 다 사버렸네?”
“선물 고르는 건 정말 짧게 나가도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럼 저희가 어떤 선물을 골랐는지는, 내일… 아니구나. 나중에 공개되겠네요. 안녕~.”
차남석이 화면에다 대고 인사하자 한율과 길우성도 거기에 끼어서 인사했다.
톡. 녹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그들은 내내 짐벌을 드느라 고생한 어깨를 돌리며 풀었다.
“진짜 두 사람 연예인 체질인 듯.”
길우성이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떻게 카메라 끄자마자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휙, 무뚝뚝하거나 뚱한 얼굴로 돌아오냐.”
“팬이 없는데 계속 웃을 이유가 없잖아.”
“아…, 듣고 보니 그러네?”
세 사람은 버스 정류장을 찾아 걸었다.
“그나저나 내일 가람이 형 졸업이면 미랑 선배님 졸업이기도 하지 않아요? 선배님 선물은 준비 안 해도 되나? 봉사활동도 같이 다녀왔잖아요.”
도중에 크래가 그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가버리긴 했지만.
“주려고 해도 시간이 안 맞을 걸? 크래 선배님들은 졸업식장 들어갈 수 있도록 학교에 사전허락 받아서, 우리보다 먼저 영상 촬영하고 갈 거라 들었거든. 우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진 후에 촬영하기로 했잖아.”
박가람과 미랑이 다니는 곳도 예고라, 졸업식이 열리는 날만 되면 졸업하는 연예인을 촬영하거나 축하하러 오는 인파가 몰리기 일쑤였다. 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졸업생의 가족만 출입을 허락하지만, 그럼에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들어오는 극성적인 사람들도 적잖았다.
그래서 어스래빗은 졸업식이 끝나고 바로가 아닌, 몇 시간 더 지난 점심시간 끝자락 즈음에 촬영하기로 했다.
“어… 그러면 안 되는데.”
길우성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곰순이가 미랑이 누나한테 전해주라고 나한테 택배로 선물 보내왔는데.”
“그저께 너한테 온 택배가 그거였어?”
“어.”
“나중에 따로 주면 되겠네.”
“으음…. 하지만 의외로 만날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단 말이지. 같은 회사인데도 말이야.”
“팀장님이나 유찬이 형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하든가.”
후우.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겠다.”
그러나 다음 날, 길우성은 가방에 책과 학용품 대신 미랑에게 전해 줄 선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등굣길. 굉장히 빵빵한 길우성의 가방을 보며 차남석이 의문을 표했다.
“대체 안에 뭘 넣은 거야?”
“선물!”
“그러니까 뭐냐고.”
“선물!”
“…….”
그 순간, 한율은 차남석이 길우성을 눈으로 욕하는 걸 본 듯했다.
차남석이 짧게 한숨 쉬더니 길우성에게 말했다.
“설령 시간이 맞아서 줄 수 있다고 쳐. 그러다 오해라도 사면 어쩌려고 그래? 보는 눈도 굉장히 많을 텐데.”
“요즘은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대요, 형님.”
“뜬금없이 뭔 소리야.”
길우성이 과거를 회상하는 노인처럼 먼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나에게 미랑이 누나는, ‘너희 집엔 고양이 없지?’라며 툭하면 고양이를 가지고 사람을 약 올리던 누나 친구였습니다.”
“…….”
“하지만, 애들한테 괴롭힘 당하고 찌질하게 울고 있던 날, 네가 찌질하게 찌그러지는 게 저것들이 원하는 것이다, 저 못돼 처먹은 것들이 원하는 대로 할 거냐면서 정신 차리라고 사랑의 매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준 동네 누나, 은인 중의 은인.”
“…아, 그래.”
“솔직히 이런 사연을 말하면 다들 그렇구나, 이해해주지 않을까요? 이야기에서 사람 냄새가 짙게 나잖아요.”
차남석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체념했다.
“그래, 알아서 해라.”
한율은 지나가는 식으로 물었다.
“괴롭힘은 왜 당했는데?”
“왜긴.”
길우성은 한 번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들이 사람을 괴롭히고 싶어서, 괴롭혀야 하는 이유를 찾아 괴롭히는 나쁜 것들이라 그랬던 거지.”
* * *
박가람의 졸업을 축하하러 가는 영상을 찍기 위해, 세 사람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조유찬의 차를 탔다.
“잘하면 거기에서 크래 멤버들이랑 만날 수 있겠다.”
“아직 촬영 중이래요? 오래 하네.”
“으음…. 걔네 이번에 졸업하는 애들 중에 ‘히아신스’의 ‘호수’ 있잖아.”
“아….”
K-POP 걸그룹 정상 ‘온더로즈’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인지도와 성적을 무섭게 쌓아올리는 걸그룹 ‘히아신스’. 공교롭게도 두 팀 모두 꽃의 이름을 따고 있어 더욱 라이벌 시 되는 분위기였다.
“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호수 보러온 사람들이랑 기자가 엄청 몰려서, 사람이 빠지길 조금 기다리느라 촬영도 늦게 시작했다나 봐.”
조유찬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히아신스는 크래보다 데뷔가 1년 늦은 후배. 그러나 이 바닥은 인기가 곧 깡패였다.
우웅. 차남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호 형이랑 건우 형, 꽃다발 사들고 먼저 도착했대요.”
“몇 개 샀대?”
“넉넉하게 세 개요. 셋 다 큰 걸로 샀다고.”
“혹시 모르니까 하나는 남겨두라고 해야겠다. 미랑이한테도 주는 거 찍으려면.”
그들이 탄 차가 박가람과 미랑이 다니는 학교 앞에 도착하자, 마침 강보배와 라이언을 태우고 온 현장전의 차도 도착했다. 카메라를 든 기획홍보팀 직원들도 함께.
사전에 이곳 학교에다가 촬영 허가를 받은 터라, 학교 경비원은 조유찬과 현장전의 WB래빗 사원증을 본 후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멤버들은 둘 셋씩 짝을 지어 셀프 영상도 찍었다.
길우성이 제 모습을 촬영하며 신나게 말했다.
“오늘의 졸업생, 박가람 씨와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 선배님을 찾아서! 와, 그런데 이 학교도 좋다. 특히 화단이랑 주차장이 엄청 깔끔하게 잘 꾸며졌는데? 앗, 대한예고 교장쌤, 방금 이 말은 제가 한 게 아니라 써한네 고양이가….”
“우리 집 고양이가 여기에서 왜 나와?”
“아뇨, 너희 집 고양이 보고 싶다구요. 우리 귀여운 퓨마랑 호랑이는 잘 지내고 있나요?”
퓨마, 호랑이.
한율의 집에 있는 고양이들의 이름이었다.
부친이 지었다고 들었다.
“얼마 전에 아버지 머리 위로 올라갔대.”
“맙소사. 냥아치군요!”
카메라 앞이라 길우성의 심심한 말장난에 어울려주던 한율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
“왜?”
무심코 스쳐 지나본 한 차량.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주차된 차량의 번호판을 읽었다.
‘저 차….’
분명 작년, 미랑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특정신체부위를 찍고, 악의적으로 짜깁기한 사진과 허위사실을 유포하던 그 스토커의 차였다.
콘서트나 방송 스케줄 때와는 달리, 졸업식은 졸업생 가족이라 사칭하면 쉽게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졸업하는 아이돌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주변에 스태프나 경호원도 많이 둘 수 없는 날.
‘보복이라도 하러 온 건가?’
“왜 그래?”
길우성이 두 번 물어서야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
지난 번 그놈이 경찰에 잡혔을 때 길우성도 그놈에게 고소를 진행하면서 얼굴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애먼 사람을 그 스토커라고 오해하는 일 없이, 보면 바로 알아볼 터.
‘반대로 스토커 역시.’
미랑만큼이나 길우성에게도 악감정이 쌓이지 않았을까.
“주차장에 처음 보는 차종이 많이 보여서.”
뒤에서 조유찬이 외쳤다.
“애들아, 가람이 크래랑 같이 온실 쪽에 있대!”
조유찬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 순간, 한율의 손에 주변의 마나가 순식간에 휩쓸려 들어가 투명한 화살이 되었다.
퍼엉!
“—깜짝이야!”
갑작스런 굉음에 모두들 놀라 펄쩍 뛰었다. 꽃다발을 한 가득 들고 있던 유호는 하나를 위로 날려 떨어뜨릴 뻔했는데, 다행히 옆에 있던 이건우가 아슬아슬하게 잡았다.
“무슨 소리지?”
“뭐 터지는 소리 같았는데?”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두리번거렸다. 한율의 눈에만 스토커의 차량 뒷바퀴가 서서히 쭈그러드는 게 보였다.
‘이걸로 허튼 짓을 해도 쉽게 도망치진 못하겠지.’
방송에 내보낼 건 뽑아야지
겨울에도 여름식물들이 화사하게 자라난 온실. 박가람은 온실 안에서 웃고 떠들며 촬영 중인 크리스탈 래빗이 아닌, 본인의 사진이 잘 나올 법한 곳을 찾아 온실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온실은 밖에서 안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으음. 역시 저 돌덩이랑 난초 사이에 쭈그려 앉아서 찍으면 예쁘게 잘 나올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때요?”
졸업식을 맞이한 당사자로서, 박가람은 숙소에서 나올 때부터 셀프 영상을 촬영 중이었다.
“그리고, 우리 멤버들이랑 같이 사진 찍기 좋은 장소가….”
박가람은 짐벌을 높이 들어 함께 제자리에서 돌았다.
“어디가 좋을…, ……?”
휙. 영상에 나오는 제 모습과 배경을 살피던 박가람은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소나무 뒤에 누가 서있었던 것 같은데.’
박가람은 아예 그곳으로 렌즈를 돌려 영상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미동조차 않고 영상을 노려보았다.
그러길 10초.
나무 뒤에서 납작하고 새카만 무언가가 비죽이 나오던 그 순간,
“형!”
덥석!
“—깜짝이야!”
박가람이 놀라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았다. 살금살금 박가람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은 길우성이 활짝 웃었다.
“졸업 축하해!”
“졸업 축하한다!”
“왜 그림 안 살게 이런 데에 혼자 있어요?”
길우성 뿐만이 아니라 찾아온 멤버들이 축하를 건넸다. 카메라 앞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살가운 태도로.
박가람도 일단 웃으면서 멤버들이 건네는 꽃다발과 선물을 받았다.
“감사, 감사! 고마워!”
“졸업 축하해요, 형. …어?”
턱. 차남석이 준비해온 선물을 박가람에게 안겨주다 흠칫 놀랐다.
“왜?”
혹시 차남석도 소나무 뒤에 숨어있는 수상쩍은 걸 발견한 걸까.
그러나 차남석은 손을 수평으로 들어 박가람의 머리 위를 휙휙 가늠했다.
“깔창 깔았어요? 하룻밤 새에 키가 자랐네?”
“…….”
노골적으로 놀리는 어조가 아니라서 더욱 약이 오른다.
박가람을 두 팔을 위로 활짝 벌려 하늘에 대고 외쳤다.
“여러분!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응징하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쏭님! 나에게 정답을 알려줘!”
사람이라면 어지간히 이성이 마비되지 않은 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허튼 짓을 하기가 어렵다. 그리 생각한 박가람은 멤버들과 떠들썩하게 온실 입구 쪽으로 향했다.
“…….”
한율은 스태프를 비롯한 멤버들이 자리를 이동할 때 같이 움직이는 척 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박가람이 주시했던 소나무를 돌아보았다.
“한율아, 안 와?”
유호가 뒤늦게 혼자 멈춘 한율을 발견하고 물었다.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던 한율의 눈이 새카맣게 돌아가며 유호를 바라보았다.
“형, 그런 구절 알아요?”
“무슨 구절?”
“귀신은 늘 나무 사이에 서있다.”
“……?!”
“귀신이 아니라 마녀였나? 분명히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어느 책에서 나온 구절인지 통 기억이 안 나네요. <하룬과 이야기 바다>였나?”
“안 들려!”
유호가 두 귀를 막으며 황급히 멀어졌다.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이 거칠게 흔들리며 좋은 향기를 뿌렸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곤 유호를 쫓아갔다.
…투둑, 툭.
소나무 뒤.
털썩. 거친 소나무 껍질을 등으로 쓸며 한 남자가 힘없이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