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린라이브의 어스래빗 채널. 새로운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EP.01 - 그 다람…, 그 남자의 졸업식]
해당 영상에는 멤버들이 박가람의 졸업 선물을 고르는 모습부터, 졸업식 당일 박가람의 설레발 넘치는 모습, 축하를 받고, 학교 여기저기 멤버들을 끌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에피소드 등이 담겼다.
같은 회사 선배인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에게도 졸업 축하 꽃다발을 전해줄 땐,
[스캔들은 안 돼!]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매니저가 유호가 든 꽃다발을 가로채, 크래의 매니저에게 전달, 크래의 매니저는 따로 뭐가 든 게 없나 확인 후 리더인 라나에게, 라나도 꽃다발을 진지한 얼굴로 살핀 후 미랑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ㅋㅋㅋㅋ 짜고 치는 거란 거 알아도 웃기닼ㅋㅋㅋ
-스캔들은 안 돼!!! ㅋㅋㅋ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요, 매니저님들ㅋㅋㅋ
-유호 표정 벙찐 거 봨ㅋㄱㅋㅋ
[이거는 제가 아니라 저희 누나가 미랑 선배님께 전달해달라고 특별히 제주도에서 보내온 건데요.]
길우성이 가방을 빵빵하게 채우고 있던 물건을 꺼냈다.
겨울 태양에 반사된 범고래 인형의 눈알이 반짝거렸다.
[제주도에 사는 누나가 인터넷으로 구입하여 다시 저한테 택배로 보낸 메이드 인 차이나 범고래 인형입니다.]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야 하는 거니ㅎㅎ
길우성에게 선물을 받은 미랑은 얼떨떨하면서도 기쁜 얼굴을 하다가 휙 정색했다.
[꼬리가 꺾였잖아, 친구 동생님아. 얼마나 가방에 강제로 쑤셔 담았으면!]
[어허. 주는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불평은 하면 안 되죠! …매니저님, 선배님이 눈으로 나 욕해요!]
-미랑이가 누나 친구였음?
-아 그러고 보니 미랑이 고향도 제주도
-우성이도 제주에서 올라왓구나
-크래 영상에서는 구도가 다르게 짧게 올라왔는데, 미랑이가 설명하기를, 어릴 때 친구가 항상 동생을 같이 데리고 다녔는데 그게 우성이였대요ㅎㅎ 그리고 셋이서 음악방송 보면서 막 춤 따라 추면서 놀았었다고ㅋㅋ
-역시 아이돌이 될 재목은 어릴 적부터 보인다더니ㅎㅎ
그렇게 아직은 많지 않은 어스래빗 팬들이 어스래빗의 영상을 보며 소소하게 즐거워할 때 즈음, 포털사이트 사건뉴스란 구석에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경찰, 한밤중 학교에 있던 괴한 체포]
[2월 7일 졸업식이 열린 서울의 모 고등학교의 뒤뜰에서 자고 있던 괴한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지구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 중 괴한은 자신의 차를 타고 도주를 시도하였으나 차 뒷바퀴가 모두 터진 상태라 교정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경찰은 그의 주머니와 차 안에서 해당 학교에서 졸업한 학생의 얼굴과 음란물을 합성한 사진 수십 장과 흉기가 나온 점을 들어, 그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한밤중에 학교에 있었는지, 피해자가 있는지 등을 조사하기 위해 관할 경찰서로 인계….]
한밤중. 좌기훈 대표는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네, 압니다! 아주 잘 아는 개새—, 크흠. 곧 가겠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야동이나 사진을 진짜 사진처럼 흐릿하게 조작하여 사진 속 여자가 미랑이라고 우기고, 미랑에게 스폰서 의혹이나, 문란하게 논다는 등의 루머를 그럴싸하게 꾸미고 유포한 놈.
거기에 오래 전부터 미랑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특정신체부위를 찍어대기까지!
‘그놈이 오늘 학교에 갔었다니…!’
그것도 또 더럽게 합성한 사진과 흉기까지 들고.
어쩌면 오늘 크리스탈 래빗과 어스래빗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좌기훈 대표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열도 확 뻗쳐올랐다.
‘이런 자식은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야 하는데…!’
좌기훈 대표는 투지가 만만하여 대표실을 박차고 나섰다. 그리고 크리스탈 래빗을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A팀의 팀장, 유재용을 찾았다.
“팀장님! 나랑 같이 어디 좀 갑시다!”
한편 그 시각, 어스래빗 멤버들은 사내 녹음실에 모여 있었다.
어스래빗의 데뷔EP앨범에 들어갈 트랙은 5개. 그러나 만약을 위해 7개의 후보 곡을 모두 연습하고, 오늘밤엔 곡 하나를 녹음할 예정이었다.
소파에 앉은 멤버들은 각자 가사지를 들고 자신의 파트를 흥얼거렸다.
문득 차남석이 눈썹을 문지르며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3월은 정말 힘들겠네요. 트랙 하나는 발라드라 쳐도, 나머지 네 곡은 안무 습득해야 할 텐데.”
“거기에 개학까지 겹쳤지.”
유호가 말을 이어받자 박가람이 활짝 웃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데 올려 묵은 앞머리가 흔들렸다.
“우리 미자들, 홧팅!”
차남석이 질색하며 그 앞머리 끈을 확 잡아당겨서 뺐다.
“귀여운 척 금지.”
“으씨, 앞머리가 거치적거려서 묶은 거라고!”
“그럼 잘라요.”
“흐, 팀장님이 혹시 모르니 그냥 기르라고 하셨지롱.”
“형 몸무게 몇?”
“…나쁜 19살 시키. 아직 민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시키.”
텀블러에 담아 온 레몬생강차를 마시던 한율은 의아하게 눈을 굴렸다. 어째 차남석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평소보다 박가람을 괜히 툭툭 더 건드는 느낌.
‘…아.’
한율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때 녹음실 문이 열리고 스튜디오 엔지니어와 A&R팀 장 팀장, 그리고 녹음할 곡의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들어왔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본래 WB래빗 엔터의 녹음실은 장비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초창기에 크래가 나왔을 때만 해도 정식녹음은 늘 전문 녹음스튜디오를 대여해 진행했었다.
그러나 재작년, 크래가 어느 정도 수익을 거두며 녹음실 장비가 싹 바뀌었다. 덤으로 7명 정도는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소파까지. 크래 멤버가 7명이었으므로.
그래서 오래 앉아도 불편한 건 덜했지만, 그럼에도 몇 시간 내내 똑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그걸 또 지켜보는 건 사람을 지치게 했다.
“아… 바로 쓰러져서 자고 싶은데 왜 녹음실은 3층인 걸까….”
곡은 3분 42초짜리였으나 녹음은 몇 시간에 걸쳐 자정이 지나서야 끝났다. 첫 정식녹음이라 더욱 긴장했던 멤버들은 녹음실을 나서고 나서야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왜 우리 회사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걸까요….”
“흐헝엉.”
“애들아, 다음부턴 본인 파트 녹음 끝나면 그냥 가도 돼.”
“그래도 되는 거였어?!”
박가람이 충격 받은 얼굴로 유호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우리 첫 데뷔앨범인데 멤버들이 잘 녹음하는지 봐야…. 아니, 정 없어 보이게 어떻게 그러냐?”
차남석이 대답했다.
“의리 지킨답시고 몇 시간 멍 때리느니, 그 시간에 차라리 나가서 다른 거 연습하는 게 나중을 위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럼 형이랑 남석이 넌 왜 계속 자리 지켰던 건데?”
“그야 카메라가 있었으니까요.”
“……?!”
“눈치 못 챘어요?”
다섯 명이 놀라 덜컥 멈췄다.
길우성이 차남석과 유호와 더불어 태연해 보이는 한율을 붙잡고 물었다.
“써한, 너도 눈치 챘었어?”
“어.”
작년 <보컬리스트 시즌3>를 준비할 때 한창 녹음실에서 연습한 적이 있었다. 여전히 녹음실 장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땐 없었던 게 오늘은 있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디자인과 색을 지닌 스피커와 나란히, 카메라가.
“계속 빨간색 램프가 깜빡거리던데.”
“허얼.”
“잠깐만. 그럼…, 차남석 너 이 자식! 일부러였구나! 일부러 나에게 욕을 유도하였어?!”
“방송에 내보낼 만한 그림은 뽑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박가람이 악악거리기 직전, 대표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매니지먼트 A팀의 유재용 팀장과 좌기훈 대표, 그리고 슈트를 갖춰 입은 낯선 남성이 나왔다.
막 차남석의 멱살을 잡으려던 박가람이 황급히 두 팔을 뒤로 돌리며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듯 슥 내렸다.
“안….”
“차는 제 차로 갈까요?”
“아니요, 팀장님 차는 눈에 띄니까 제 차로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논현동에서 보기로 했죠?”
멤버들도 그들에게 인사를 하려 했으나, 세 사람은 뭐가 그리도 바쁜지 어스래빗이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방금….”
“왜? 아는 분이야?”
무심코 말을 흘렸던 길우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끝자락을 올렸다.
“대표님 양말 짝짝이였던 것 같은데?”
“그게 보였냐? 눈썰미도 좋다.”
잠시 후, 멤버들과 조금 떨어졌을 때 길우성이 한율에게 슬쩍 말했다.
“아까 대표님이랑 팀장님이랑 같이 있던 사람, 예전에 그 스토커 고소 진행할 때 왔던 변호사 선생님이야.”
“상대방 변호사 보자마자 선배님? 하면서 맥을 못 췄다던?”
길우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우리 회사랑 계약한 로펌 소속이라고 들었어. 크래 선배님들 악플러도 거기에서 다 잡아서 고소하고. 아마 너랑 남석이 형한테 악플단 놈들 잡은 곳도 거기일 걸?”
“아아.”
하지만 단순히 악플 문제로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 회사까지 찾아올 린 없을 텐데?
‘혹시.’
한율은 박가람의 학교에서 잠재워버린 스토커를 떠올렸다.
몇 시간만 얌전히 있게 만든 후 틈이 생기면 적당히 손보려 했지만, 그 후 촬영이 진행되고 일에 신경 쓰느라 그만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려— 그냥 버리고 나왔다.
나중에 생각나기는 했지만, 어차피 몇 시간 지나면 스스로 깰 수 있을 정도로 약하게 기절시켰던 터라 그냥 놔두었다.
‘뭐, 이 회사와 그 변태 간에 문제가 생겼다 하더라도, 이쪽은 직접 접촉한 적이 없으니 별 상관없겠지.’
이틀 후. 유명포털사이트 연예 뉴스 란에 한 언론사가 준비한 기획기사가 올라왔다.
[[기획기사]①내 아이는 팬심이 강할 뿐, 스토커는 아냐….]
###진짜 리얼리티가 아니야
2월 14일. 숙소로 돌아와 보니, 직원들이 가져다 놓았는지 거실에 팬들이 보낸 선물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주인이 헷갈리지 않도록 멤버 별로 분리해두고 그 위에 포스트잇으로 이름까지 적어.
선물을 빙자한 이상한 물건이 오진 않았는지 검수하느라 전부 열어본 흔적도 있었다.
박가람이 자신에게 온 선물을 끌어안은 채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재물이 쌓이고 쌓여, 마음이 풍족하구나. 으흐흐.”
멤버들은 기뻐하거나 얼떨떨한 얼굴로 각자에게 온 선물과 편지를 살폈다. 예전부터 선물은 받지 않겠다고 했던 한율에겐 작은 상자에 편지들이 담겨 왔다.
“일주일 동안 온 걸 모아서 가져다 놓은 거래.”
“그래도 아직 정식데뷔도 안 했는데 이렇게 많이…. 이게 방송의 힘이구나.”
“오오오! 그런데….”
“초코….”
기대감에 잔뜩 부푼 얼굴로 포장지를 뜯었던 라이언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호가 웃으며 설명했다.
“회사에서 우리 공식 SNS 계정 만들었잖아. 거기에서 음식선물은 받지 않는다고 공지 띄웠어. 와도 반송할 거라고….”
“왜?!”
“…….”
유호는 말없이 웃다가, 라이언을 소파에 앉혀두고 예전에 한율에게 들려주었던 음식 테러 사건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라이언에게 온 선물을 슬쩍 들여다 본 강보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엄청 비싼 티셔츠 아냐? 아무리 봐도 정품인데….”
옆에서 본인에게 온 선물을 살피던 차남석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둬. 저놈한텐 먹을거리가 더 중요한 모양이니까.”
한율은 편지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 전, 침대 구석자리에 둔 미니 무드등을 켜고 편히 누운 채 편지를 하나씩 뜯어 읽었다.
답장을 일일이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예전에 SNS로 양해를 구했음에도, 일주일에 한두 통씩 꾸준히 보내는 팬이 이번에도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본인의 소소한 일상과 조심스레 공감을 바라는 문장들. 한율이 나온 콘텐츠에 대한 감상도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많이 화도 나고 억울했지만, 그래도 오빠 웃는 얼굴을 보면서 위안을 얻어요. ㅎㅎ]
“…….”
그렇게 한 장, 한 장. 편지를 모두 읽은 후에야, 한율은 팬레터를 모아두는 상자에다가 정리한 뒤 잠이 들었다.
* * *
[[기획기사]②음란물과 합성해도 개인 소장이니 처벌이 불가능하다고요?]
[인기 아이돌그룹 멤버인 A는 최근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A의 사생활을 과도하게 침범하여 스토킹 범죄로 경찰조사를 받았던 B의 집에, 자신의 얼굴과 음란물을 합성한 사진 수백 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도 모자라 B는 차에 A 얼굴과 음란물을 합성한 사진을 잔뜩 싣고, A의 졸업식이 열리던 학교까지 찾아갔다.
그러나 B를 잡은 경찰은 음란물을 유포하지 않고 ‘개인’ 소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죄를 물을 근거가 없다며 B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B는 예전에 경범죄 처벌(스토킹)과 관련하여 벌금 7만원만 부과 받았으며, 오히려 A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자신에게 ‘그만 따라다니라’고 외쳐, 수치심을 안긴 점 등을 들어 명예훼손 소송을 걸겠다는 입장을….]
-아이돌이면 대입은 해도 졸업 진짜 늦게 하는데... 졸업식에 갔다고??? 그럼 고딩이란 소리잖아;; ㅆㅂ ㅈㄴ소름이네
-대체 피해자 누구임? 이번엔 2편이네?
ㄴ응 소설^^
ㄴ피해자를 왜 찾냐 가해자 ㅅㄲ를 찾아야지ㅡㅡ
-역겹다.. 스토커도 역겹고 법도.. 남의 얼굴을 음란물에다 갖다 붙여놓고 뭔 짓을 했는지를 모르는데, 갠소니까 처벌 불가 땅땅? ㅋㅋㅋㅋㅋ
ㄴ그러게 티비에 얼굴 팔고 웃음 팔러 나왔을 땐 그만한 각오를 하고 나왔어야지
ㄴ으으... ㅆ극혐 마인드.
ㄴ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그거 생각난다. 얼마 전에 누가 제발 음란사진 보내지 말라고 그라방에서 호소했었는데
ㄴ누구요?
ㄴ아... 진짜 얼마나 심했으면 라방에서 그런 말을 해ㅠㅠ..
ㄴ누구요?
ㄴ애가 진짜 휴식기인데도 핼쑥해져 가지고 힘도 없어 보이고 우울해보이고.. 진짜 타팬인데도 짠했음
ㄴ아 누구요
ㄴ그런데 상대방한테 보내는 건 처벌 가능하지 않음? 기사는 갠소 경우잖아요
ㄴ대포폰으로도 보내고, 뭔 해외 서버 프로그램 이용해서도 보냈다 함. 심지어 그 라방 중에도 왔음. 그만 좀 보내라고 애가 사정하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보낸 거임. 핵극혐ㅅㅂ;
ㄴ지들끼리만 대화하고ㅡㅡㅅㅂ
“끔찍하다, 진짜. 이 기사 봤어?”
이동하는 차 안. 옆에 앉은 길우성이 한율에게 핸드폰에 띄운 기사를 보여주었다.
“…….”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남의 얼굴을 이상한 거랑 합성해놓고 소리 좀 질렀다고 명훼로 고소…. 와, 당사자는 얼마나 빡쳤을까. 나 같으면 주먹 나갈 것 같은데.”
“이 댓글에 달린 것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길우성은 댓글을 살피곤 차남석에게 패스했다.
“이거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핸드폰을 받아 기사와 댓글을 휙휙 훑은 차남석이 미간을 구겼다.
“어. 그런데 이거 범인 잡혔어.”
“그래요? 그나마 다행….”
“중학생이라 처벌 안 받았지만.”
“…….”
아무리 그래도 도가 지나치지 않나, 라고 생각하던 한율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여자애였어.”
“……?!”
“가족 노트북에 있던 야동을 캡쳐해서 보낸 거라고 하더라. 그걸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놀라는 게 재밌어서 그랬다나?”
“…와, 나도 모르게 당연히 피해자가 여자고, 남자가 가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
길우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뭔가, 그 뭔가가.”
“고정관념?”
“맞아, 그거! 그게 와장창 부서진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얘들아.”
운전하던 조유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들어 그의 말에 주목했다.
“너희들 밖에서 선물 받을 때 조심해. 요즘은 인형 안에다가 카메라나 도청기 넣는 사람들도 있다더라.”
“미친….”
헛.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은 이건우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거 크래 선배님들이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회사에선 선물 들어오면 탐지기로 한 번씩 다 훑거든.”
“……!”
“처음 알았다….”
침체된 분위기 속,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앞에는 먼저 도착한 기획홍보팀 직원들이 촬영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조유찬이 돌아보며 말했다.
“얘들아, 스마일!”
“…하하.”
샵에서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러운 메이크업과 헤어 손질까지 받은 어스래빗 멤버들이 줄줄이 차에서 내렸다.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카메라엔 인사와 함께 한 번만 시선을 주고, 그 후론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와, 우리가 그 분의 작업실을 오게 되다니!”
“그냥 지나가다가 봐도 여기에 스튜디오가 있는 거 아무도 모를 것 같아.”
“계단 조심해, 계단.”
오늘 어스래빗이 데뷔 리얼리티 촬영을 겸하여 찾아온 곳은,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레몬사이다’의 스튜디오. 스튜디오는 평범해 보이는 상가 건물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좁은 폭의 계단을 한 사람씩 줄지어 내려갔다. 내벽은 낡았으나, 지하에 설치된 문엔 경비업체와 보안시설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CCTV 카메라.
멤버들은 누가 초인종을 누를 거냐 괜히 한 번 더 떠들었다.
한율은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지난번에 본 여러 보이그룹의 데뷔 리얼리티를 떠올렸다.
‘똑같이 어색하네.’
최근 핫한 프로듀서로 떠오르고 있는 레몬사이다는 생각보다 젊은 남자였다. 그는 어스래빗을 보자마자 반갑다며 한 명씩 포옹했고, 그린라이브 방송을 다 봤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앞서 어스래빗 멤버들은 유호를 통해 그의 진짜 성격을 들었다.
『겉으론 굉장히 힙하고 사교성도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이 굉장히 없어. 아마 카메라가 꺼지면 곡 얘기 밖에 안 할 거야.』
하지만 유호의 말은 증명되지 못했다.
레몬사이다가 어스래빗을 ‘위해’ 만든 곡을 들려주고, 멤버들이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놀라워하며 불러보는 등, 그의 스튜디오를 떠날 때까지 내내 카메라가 돌고 있던 까닭에.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요, 녹음 날 봐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형!”
유호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왔다.
미리 나와 계단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메라. 멤버들은 아직도 꿈만 같다는 등의 ‘대사’를 서로 주고받기도 하고, 차남석은 카메라에다가 ‘정말 멋진 곡이 나올 것 같아요! 기대해주세요!’ 라고 환하게 웃은 후 차에 올랐다.
드륵, 쿵.
차 문이 닫히자마자 라이언이 앞좌석에다 이마를 툭 대고 중얼거렸다.
“배고파….”
유호가 토닥거렸다.
“조금만 참아.”
아직 지하에선 레몬사이다에게, 자신이 만든 곡을 부르는 어스래빗의 모습에서 어떤 점을 느꼈는지 등등을 묻는 인터뷰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형, 점심은 회사 가서 먹어요?”
아침 일찍 샵에 가서 단장을 한 뒤, 스튜디오가 있는 이곳 인천까지 이동. 스튜디오에서도 촬영하는 데에 몇 시간 소요된 터라 벌써 오후 2시가 훌쩍 넘었다.
“아니, 여기에서 먹고 갈 거야. 그러므로 메뉴 추천 받겠습니다.”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건가?
아침부터 굶어 비실거리던 멤버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인천하면 냉면이죠!”
“라떼리아!”
“겨울에 냉면은 무슨 얼어 죽을! 쫄면이지!”
“둘 다 찬 거잖아….”
“라떼리아!”
“무슨 소리야, 인천하면 꽃게! 꽃게찜!”
“일단 신포동 시장으로 갑시다, 기사 양반.”
“중간에 라떼리아 누구냐.”
“누구긴, 라이언이지.”
순식간에 차 안이 시끌벅적해졌지만, 조유찬은 조용하라는 주의 대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차 안에 설치한 카메라가 켜진 까닭.
‘나도 한 마디 끼어들어야 하나.’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평소대로 시트에 뒷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했다.
‘‘리얼리티’니 괜찮겠지.’
메뉴는 너무 맵거나 날생선이 들어간 음식만 아니면 된다.
* * *
2월 마지막 한 주를 남기고 트랙리스트에 올릴 후보 곡의 녹음이 모두 끝났다.
레몬사이다의 곡은 앨범에 싣기로 확정되어, 지난 번 <보컬리스트 시즌3>에서 오프닝무대 안무를 가르쳐주고 월평에도 잠깐 참석했던 안무가에게 안무 의뢰가 들어간 상태.
트랙에 오를 다른 유력한 곡 중 하나는 WB래빗의 댄스트레이너가 안무를 짜는 중이었다. 여기에 이건우와 길우성이 자주 그녀의 작업실을 들락거렸다. 기획홍보팀의 카메라도 함께.
“이제 슬슬 내려가 봐야 할 것 같다.”
보컬연습실에서 함께 연습하던 차남석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한율은 조금 전까지 치던 디지털피아노를 정리하고, 악보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무슨 내용으로 촬영할 거래요?”
“모르겠다. 하지만 어제 갑자기 적으라고 했던 거랑 연관이 있을 것 같기도.”
“아, 그거.”
일요일 오후 1시.
오늘 찍을 데뷔 리얼리티 촬영은 2층 회의실 씬부터 찍는다고 했다. 회의실에는 이미 다른 멤버들이 모두 와 있었다. 기획홍보팀 직원들을 비롯해 외부 업체 카메라맨들도 함께.
“꽃토끼 왔는가.”
이건우가 카메라를 의식하여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박가람도 이어 물었다.
“꽃은 어디에 두고 몸만 와?”
차남석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집에요. 원래 귀한 건 집에 고이 모셔둬야 하잖아요.”
어스래빗 멤버가 모두 모이자 기획홍보팀 강순철 팀장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자, 오늘 우리가 어스래빗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이유는요. 여러분들, 멤버마다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최소 5개월 이상 함께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고, 숙소에서도 동고동락하고 있잖아요?”
“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팬 분들에게도 여러분에 대해 더 잘 알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주제가 적혔다.
[지금도 친하지만, 더 친해지길 바라.]
강순철 팀장이 유순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둘씩 팀이 되어, 멤버들의 취미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취미라면… 프로필에 적었던 그거요?”
약 한 달 전, 그룹 이름이 정해지고 나서 오동식 팀장은 멤버들에게 각자 프로필을 적어보라며 종이를 나눠주었다. 나중에 공홈에 올라갈 거라면서.
“아니면.”
이건우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어제 정말 솔직하게 적으라고 한 그거요…?”
“취미는 변하기 마련이니, 가장 최근 취미로 보는 게 타당하겠죠?”
“으아아….”
“형 대체 뭐라고 적었기에….”
“막 이상한 거 써놓은 거 아니야? 취미 말고 취미로 삼고 싶은 거?”
“하지만!”
강순철 팀장이 성량을 높여 주의를 끌었다.
“단순히 팀원과 서로 취미를 공유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똑같이 생긴 파란색 봉투 8장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여기에 어제 여러분들이 적은 취미를 적어 넣었습니다. 여러분은 2인 팀으로 나뉘어 봉투 두 장에 담긴 취미 활동을 즐겁게 즐기시면 됩니다. 참고로 누구의 취미인지는 적지 않았어요.”
###취미활동 결과는 방송에서
“누구 취미인지도 맞혀보는 건가?”
“에이, 그래도 척 보면 누구 건지 다 알 수 있겠지. 붙어 다닌 시간이 얼만데.”
강보배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럼 취미에 총싸움 게임이라고 적혀 있으면 PC방 가서 그 게임해도 되는 거예요?”
“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은 3시간. 이 말인즉슨, 무슨 취미이냐에 따라 시간이 굉장히 촉박할 수도,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겠죠?”
“오우, 쫄깃한데?”
“그리고 이 3시간 동안 알차게 취미 활동을 보냈다고 모두가 인정한 상위 두 팀에게는 상품을 드리는데, 1등 팀에게는.”
강 팀장이 의자 아래에서 상자 두 개를 꺼냈다. 금빛 봉투 한 장도 함께.
“반납하지 않고 사용, 소장할 수 있는 사과패드 최신 모델. 물론 한 사람에 하나씩.”
“오오오!”
“플러스, 여러분이 앞으로 오늘 같은 리얼리티 예능을 촬영할 때 저희를 상대로 한 번 쓸 수 있는 ‘무적의 소원권’입니다.”
“대박!”
“그리고 2등 팀에게는 고가의 스포츠 시계.”
“빨리 합시다, 빨리!”
“나 손목시계 갖고 싶었는데!”
상품을 보자 눈이 뒤집힌 몇몇 멤버들이 진행을 재촉했다. 덕분에 그 외의 자질구레한 룰 설명과 잡담, 팀을 나누는 시간이 빠르게 이어졌다.
20여 분 후, 한율은 파란색 봉투 한 장을 손에 쥐었다.
“그럼….”
강 팀장이 3시간 타이머를 띄운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스타트.”
톡.
[03 : 00 : 00]
[02 : 59 : 59]
멤버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팀끼리 모였다. 팀마다 셀프 영상 촬영용 스마트폰이 끼워진 짐벌도 하나씩 주어졌다.
카메라가 붙은 작위적 연출은 지난번 레몬사이다의 스튜디오 방문에 이어 두 번째. 그러나 그것도 경험이라고, 멤버들은 카메라가 와서야 봉투를 열거나, 혹은 시간이 없으니 일단 움직이면서 보자고 나가기도 했다.
한율도 팀원과 만났다. 붙은 카메라는 WB래빗 직원.
“동시에 꺼내볼까?”
“네.”
한율은 같은 팀이 된 유호와 머리를 맞대고 봉투를 열었다.
“하나, 둘….”
셋, 하면서 두 사람은 동시에 내용물을 꺼냈다.
[너튜브에서 고양이 영상 보면서 댓글 달기]
[공포영화 감상]
“…….”
“…….”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는 누구의 취미인지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잘 알 것 같았지만,
‘문제는.’
“왜 하필…, 왜 하필…….”
으아아. 유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진심으로 질색하고, 진저리치는 그의 모습을 보던 한율은 자신들을 찍는 카메라에 대고 당혹스런 미소를 지었다.
“어떡하죠. 호 형이 무서운 거라면 질색을 하는데.”
그리고 [공포영화 감상]이 적힌 종이를 들었다.
“이런 취미가 나와 버렸네요. 참고로 제 취미는 아닙니다.”
그때 다른 팀에서 과한 리액션이 나왔다.
“취미 등산 누구야, 등산!”
“그것도 정상에서 바람 쐬기?! 이거 3시간 안에 가능해?!”
한율은 그곳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카메라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일단 출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형, 언제 앉았어요. 일어나요, 영화 보러 가야죠.”
“아니야, 영화는 여기에서도 감상이 가능하잖아. 사과패드로, 무료로 풀린 영화보자. 요즘 같은 시대에 일일이 극장까지 가서 보는 건 괜히 연료를 소모하고, 그리고, 팝콘도 비싸고….”
한율은 횡설수설하는 유호를 잡아 밖으로 끌고 갔다.
공포영화 성수기인 여름과 정반대 계절이라 과연 극장에 걸린 작품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한 작품 있었다.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극장에, 상영시간도 적당했다.
찬바람을 쐬자 유호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극장에 도착해선 표를 끊고 팝콘과 음료까지 샀다.
“즐겁게, 취미생활은 즐겁게. 그런데 이거 누구 취미인 것 같아?”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고양이가 나오는 너튜브를 보며 댓글을 달았다.
“고양이 영상보고 댓글 쓰는 취미는 길우… 아니, 우성이요.”
“공포영화 감상은?”
“으음.”
매일 레슨에 연습만 하느라, 다른 멤버들이 취미다운 뭔가를 하는 걸 본 적은 극히 드물었다. 딱히 크게 관심도 없고.
그러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으므로, 추리를 해본다.
“일단 저랑 형, 우성이는 제외고. 건우 형도 아까 반응 봐선 아닐 것 같아요.”
“그럼 라이언이랑 보배, 가람이랑 남석이가 남는데….”
“남석이 형이 공포영화 보는 건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요. 딱히 언급한 적도 없고. 차타고 이동할 때도 음악만 듣던데.”
“나는 의외로 보배가 범인일 것 같아.”
“범인이요?”
“아니, 취미 주인. 말이 헛나왔어.”
“…….”
얘 정말 괜찮을까.
2시간 후.
한율은 유호와 나란히 서서 상영관 청소 직원들에게 거듭 죄송하다고 꾸벅꾸벅 사과했다.
유호에게선 콜라 냄새가 짙게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