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월은 예전에 누군가 정말 힘들겠다고 말한 그대로였다.
회의와 투표를 거쳐 데뷔앨범에 실을 다섯 곡이 정해지고, 본격적으로 데뷔 쇼케이스 무대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일단 연습시간을 위해 레슨 커리큘럼이 대폭 조정되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그들의 데뷔 타이틀곡이 된 레몬사이다의 곡을 포함, 총 네 곡의 안무를 습득했다. 한율의 경우엔 따로 피아노 연습까지 더해졌다.
도중에 리얼리티 촬영도 한 번.
그린라이브가 너무 뜸해도 안 된다고 하여, 멤버들은 무작위로 순서를 정하여 이틀에 한두 명씩, 10분 정도만이라도 라방을 켰다. 하루는 공부하는 걸 내보내도 되냐 했더니 의외로 OK 허락이 떨어져 진행해보았다.
[어스래빗-막내들의 숙제하는 방 #ASMR]
장소는 2층 회의실. 사무실에서 빌려온 노트북으로 라방을 켜고, 한율은 길우성과 나란히 앉아 카메라를 향해 꾸벅. 그리고 미리 자리 뒤에 세워둔 화이트보드를 말없이 가리켰다.
[조용히 숙제만 하고 갑니다.]
그러나 톡창은 시끌벅적해졌다.
-교복이다!!!!!
-한율이 교복!!
-우성이도 교복!!!
-교복!!! 교복!!!
-둘이 같은 학교? 교복이 똑같네? ㅎㅎ
-맞아 얘네 학생이짘ㅋㅋㅋ
-3월이라 개학했겠네ㅎ
-울희 애긔들 무슨 숙제해??
-손하트 plz.
톡창의 글자가 잘 안 보여, 길우성이 잠시 일어나서 화면을 보는 게 화면에 크게 잡혔다.
-어? 우성이 눈물점 있다
-안경 벗어보자, 우성아
길우성은 안경을 벗고 손하트를 휙휙휙 날리다가 수학 교과서를 들어 카메라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속닥속닥.
“이 문제 아시는 부운…?”
-칠판에 적어봐. 누나 수학교육과임ㅋ
-오오오오!
-전문가 등장!!
“대박…. 수학교육과시래. 써한, 너도 물어봐, 빨리.”
한율은 말없이 교과서를 들어 보여주었다.
[국어]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여기 국문학과 없나요ㅋㅋㅋㅋ
-숙제하다가 오빠들 숙제하는 거 보느라 숙제를 안 하고 있어여ㅎ
한율은 그걸 보며 새삼 느꼈다.
누가 봐도 시시한 콘텐츠인데, 팬이란 사람들은 참 너그럽게 받아준다는 걸.
화이트데이 및 파이데이인 3월 14일이 다가올 무렵에는 어스래빗 멤버 전원이 구내식당 한 구석을 빌려 요리 콘텐츠 영상을 촬영했다.
그들은 룸메이트 별로 팀을 나눠, 한쪽은 사과파이, 한쪽은 호두파이를 구웠다.
“반죽은 이대로 냉장고에서 30분 숙성시키고….”
“써한, 네 차례다.”
한율은 껍질과 씨가 있는 기둥을 잘라낸 사과를 도마에 올렸다. 박가람이 두 팔을 벌려 길우성과 강보배를 보호했다.
“위험해! 물러나!”
탁탁탁탁! 도마 위에서 한율이 든 칼이 춤출 때마다 사과가 무자비하게 썰려 나갔다. 탁! 그러다 작은 쪼가리 하나가 날아, 박가람의 이마를 치고 떨어졌다.
“아얏!”
3월 14일, 영상이 공개되자 이전보다 조금 더 늘어난 팬들이 하트를 부지런히 눌러주었다.
-오오, 겉만 봐선 퍼펙트하당
-메이플 시럽?
-아ㅎㅎ 파이 그리는 거야?
-잠간
-잠깐
-..얘들아?
-아니 대체 왜 거기다 막대사탕을 꽂는 건뎈ㅋㅋㅋㅋ
-얘들 왤케 진지햌ㅋㅋㅋㅋ
-[한땀 한땀 정성스레 심는 사탕]자막ㅋㅋ
-심지어 사탕 포장지 색 안 맞는다고 위치 지시까지ㅋㅋㅋ
격자무늬 사이마다 온갖 종류의 막대사탕이 꽂힌 애플파이 사탕화분이 완성됐을 때엔 하트 수 올라가는 속도도, 톡창의 톡이 올라가는 속도도 폭발했다.
그리고 두 팀이 완성한 사과파이와 호두파이를 교환하는 장면.
-나 남석이가 눈으로 욕한다고 들었을 땐 읭???? 했는데 오늘 보니 알겠네욬ㅋㅋㅋㅋㅋㅋ
-음식장난 NO! 라이언 진심 화났어ㅋㅋㅋ
영상은 멀쩡한 호두파이와 막대사탕 탓에 구멍이 숭숭 뚫린 사과파이를 멤버들이 나눠먹는 모습까지 담은 뒤 끝나…는 척 새카맣게 되었다가, 그룹 이름이 스르륵 올라왔다.
[Earth Rabbit]
-어?
-머지???
촤악. 새카맸던 배경이 파도소리와 함께 밤하늘과 바다로 나뉘었다. 그리고 물살을 가르며 움직이는 완만한 무언가.
-뭔가 나온다!!!
-떡밥????
또 다른 문구가 새겨졌다.
[Breaching]
[2017. 04. 14.]
* * *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벽.
크리스탈 래빗의 3개월간 스케줄이 모두 기재된 거대한 스케줄표 옆에 새로운 스케줄표 하나가 더 걸렸다.
조유찬은 뿌듯한 얼굴로 새 스케줄표 위에다가 그룹이름을 적었다.
[Earth Rabbit]
그리고 3월 달력부터 만들어 놓은 뒤, 일정대로 스케줄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03. 23. -프로필 촬영]
[03. 25. -앨범 재킷 촬영]
[03. 27. -Breaching M/V]
[03. 30. -월흔(月痕) M/V]
...[04. 14. -Début Showcase(그린라이브 생방송)]
* * *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어스래빗 멤버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동안 안 보여서 끝난 줄 알았는데, 이 기획기사 아직도 올라오고 있었나봐.”
길우성이 한율에게 한 인터넷 기사를 보여주었다.
[[기획기사]마지막⑤-아티스트와 팬, 올바른 거리는.]
“처음엔 미랑이 누나 스토커가 떠올라서 신경 쓰여서 봤는데, 누가 댓글에 기획기사 1, 2번에 등장하는 가해자가 중소제과업체 사장 아들이라고 써놓은 걸 보니까 왠지….”
“그놈이 제과업체 사장 아들이었어?”
“짐작이기는 한데, 그놈이 초반에 미랑이 누나한테 항상 백화점에서나 팔 법한 비싼 카스테라 같은 걸 잔뜩 보냈었거든.”
걷는 속도를 늦춰 멤버들과 거리를 벌린 뒤에야 길우성이 덧붙였다.
“초콜릿이나 쿠키 같은 것도 늘 같은 브랜드로. 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대. 자기랑 하루만 따로 만나주면 이런 맛있고 고급스러운 거 계속 먹여줄 수 있다고. 으으, 진짜 극혐. 변태 개새끼.”
진저리를 치던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진짜. 그딴 새끼 안 잡아가고.”
“귀신이 사람을 어떻게 잡아. 사람은 사람이 잡아야지.”
“안 잡아가니까 그렇지.”
슥.
“밤중에 길에서 떠들면 잡아갑니다.”
“—엄마얏!”
조용히 길우성의 뒤에서 나타나 끼어든 안경이 가로등 불빛에 번쩍 반사되었다.
길우성의 볼썽사나운 비명이 울리자 앞서 가던 멤버들이 돌아보았다.
“오 팀장님?”
오 팀장이 그들의 뒤를 밟은 이유는 숙소 불시검문이었다. 그는 좁은 숙소를 여기저기 살피고, 멤버들이 팬들의 선물을 어떻게 보관하는지 확인한 후에야 싱겁게 퇴장했다.
“그럼 다들 내일 봅시다. 잘 자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괜히 긴장하여 서성거리던 멤버들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엔 우리 없을 때나 들르시는 것 같더니, 오늘은 별일이네.”
“그러게.”
한율도 그제야 침대로 올라갔다.
우웅.
“……?”
이 시간에 웬일로 블블의 민준이 톡을 보냈다.
-[혹시 이희우 선배님이랑 친해?]
[아뇨.]
-[그 분이 너 엄청 칭찬하셔서 친한 줄 알앗는데]
-[아니엇구나]
[만나셨어요?]
-[ㅇㅇ]
-[진짜 이쁘시더라ㅎ]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심ㅎ 예전에 나 일부러 저격하려던 거 아니엇다고ㅎ]
-[그런데]
-[진지하게 걱정돼서 하는 얘긴데, 나 연기 안 하는 게 조켓대ㅜㅜ]
“…….”
어째 평소보다 주절주절 잘도 떠드는 게, 술이라도 마신 것 같다.
-[아. 혹시 우리 회사에 안세현이라고,. 알아? 너랑 같이 보컬 출연햇엇는데]
[네.]
-[우리 애들도 너희랑 같이 4월에 데뷔한다^^]
-[히ㅣ히]
취했네.
한율은 그 후 적당히 대답해주다, 감기는 눈꺼풀을 더 이상 들어 올리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톡방을 확인해보니, 톡방에는 민준이 새벽에 쓴 취중진담이 올라와 있었다.
-[이 바닥서 오래 일햇는데도 같은 돌친 만들기가 쉽지안다.. 하... 친해지다가도 어느 순간 안 보이고... 연락처 바뀌고..ㅋ 그러니까 빨리 올라와]
-[같이 활동하자ㅜ]
그리고 불과 10분 전에 온 메시지.
-[주정 부려 죄송합니다;;;]
###멤버의 낯선 모습을 처음 마주하는 시간
간만에 점심시간에 한율과 길우성이 앉은 자리로 찾아온 박현우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어째 너희 살 빠진 거 같다?”
설 이후로 하루도 푹 쉬어본 날 없이, 매일 연습에 연습. 여기에 곧 다가올 프로필 촬영과 앨범 재킷 촬영에 대비해 식단 조절까지. 살이 빠지는 건 당연했다.
“요즘에 탄수화물이랑 나트륨 절제하고 있거든요. 봐요, 김치 하나 안 담은 거.”
“크, 데뷔가 쉽진 않지?”
“흐흐.”
“그런데 형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어스래빗 멤버들은 데뷔가 확정된 이후 월말평가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박현우의 경우엔 회사에서 보컬과 안무를 제외하곤 따로 받는 레슨이 없어, 좀처럼 만날 일이 없었다.
“휴게실에서도 안 보이고.”
“헉. 혹시 잘린 거 아니죠?”
“하하하하. 길우성 후배, 밥 먹고 잠시 나랑 옥상에나 올라가볼까?”
“얘 요즘 영화 촬영했잖아.”
“헐?!”
“무슨 영화요?”
박현우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공포영화. 7월에 개봉 예정.”
“히익…. 별 일 없었어요? 그 왜, 공포영화 같은 거 촬영할 때 귀신들이 막 따라와서 구경한다고 하던데?”
“주연?”
“내가 아직 주연 맡을 짬은 아니고, 그냥 조연. 그리고 촬영할 때 별 일은…….”
차칵차칵. 박현우가 빈 젓가락을 맞부딪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개봉하면 알려주지?”
“있구나! 뭔가 있어!”
“그나저나 너희 데뷔 쇼케 장소는 정해졌어? 날짜는 봤는데.”
“네, 마포에 있는 무슨 스퀘어라던데.”
“몇 명 수용 가능한 곳인데?”
“스탠딩으로 900명 정도? 그린라이브로 생방송으로도 진행된다니까 보세요.”
“…티켓 줄 생각은 없냐?”
“회사에서 연습생들 자리 빼둘 거야. 멤버들 가족 자리도.”
“오호. 기자 쇼케는 언제 해?”
차남석이 고개를 저었다.
“따로 안 하고, 데뷔 쇼케 끝나고 바로 기자 간담회 진행할 거라 하더라.”
“기자들, 팬 쇼랑 같이 하는 거 안 좋아하지 않나?”
“왜요?”
“걔넨 항상 지들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공격적으로 질문 던지고 신인들 당황해서 말실수하는 거라도 건져야 자극적으로 포장해서 내보내기 쉬운데, 팬들이 있는 곳에선 아무래도 눈치 보이잖아. 시간에도 쫓기고.”
기자 쇼케? 데뷔 쇼케?
본인 일임에도 멍해졌던 길우성이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그럼 형도 개봉하면 시사회 티켓 줄 거예요?”
“그때 봐서. 아, 블블 이번 신곡 뮤비에 희우 선배님 나오더라?”
“블블 뮤비에?”
차남석이 이상하다는 듯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게 M/V엔 대부분 신인 배우를 기용한다. 뛰어난 연기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출연료도 싸게 먹히므로. 하물며 블블은 해외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는 K-POP 보이그룹. 같은 소속사 연습생이나 신인의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텐데, 몸값이 적잖은 이희우를 쓰다니.
한율은 오늘 새벽에 온 민준의 톡을 떠올렸다.
‘만났다고 한 게 뮤비 촬영 때문이었구나.’
“어. 아직 티저만 공개됐는데, 희우 선배님 진짜 예쁘더라. 실제로도 예뻐?”
“<수의형사>에서 그 분 역을 떠올려 봐.”
“아, 섬뜩하게 분장한 모습만 봤겠구나.”
“형 지난번엔 미랑이 누나한테 관심 갖더니, 예쁘면 다 좋은 거예요?”
“아니? 강하고 예쁜 누나들만.”
“…….”
두 사람이 가늘게 뜬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는데도, 박현우는 담담히 어깨를 으쓱였다.
“내 취향이 범죄는 아니잖아?”
* * *
프로필 촬영 전날, 오동식 팀장은 피부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보여야 한다며 10시가 되자마자 멤버들을 회사에서 숙소로 쫓아냈다. 제법 비싼 마스크 팩까지 쥐어주고.
다음 날, 프로필 촬영 스튜디오로 출장 온 샵 직원들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기에 앞서, 멤버들의 얼굴에다 마스크 팩을 붙였다.
“이틀 연속 팩이라니, 이런 사치가…!”
“프로필 촬영은 처음이라 두근두근하네요.”
허연 마스크 팩을 붙인 이건우가 가지런해진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말 그대로 이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여 얻은 비싼 미소였다.
옆 자리에 앉은 박가람이 이건우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
“형 진짜 잘생겨 보여.”
“팩 붙여서?”
“응.”
“그래, 너도 우주최강미남이야.”
“고마워!”
이들 곁에는 카메라도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데뷔 쇼케이스에 오를 때까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담아버리겠다는 것처럼.
인원수가 많다보니 꽃단장이 완료된 순서부터 옷을 갈아입고 개인 프로필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WB래빗 직원들은 멤버들이 촬영에 들어가기 전, 짤막하게나마 소감 인터뷰를 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프로필 촬영은 두 번째죠? 소감이 어때요?”
“음…. 작년에 프로그램을 촬영하면서 찍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잖아요. 의지할 수 있는 형도 남석이 형뿐이었고. 그런데.”
한율은 분장실로 나뉜 가벽 쪽을 한 번 봤다가, 감독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유호와 라이언을 본 뒤에야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멤버들이랑 같이 촬영하는 거라서 그런지 마음이 편해요. 매일 땀에 절거나 그런 모습만 보다가 여기에서…, 꽃단장한 모습을 보니까 낯설고 신기하기도 하고.”
“달라진 모습 중에 누가 제일 적응이 안 돼요?”
한율은 망설임 없이 가벽 쪽을 가리켰다.
“보배 형이요.”
한율이 강보배를 지목한 건 진심으로 아주 살짝 놀란 까닭이었다.
처음 WB래빗에 왔을 때 후드티셔츠에 교복을 걸치고 왔던 강보배는, 회사나 숙소에서 늘 회색 혹은 검은색 옷만 입고 다녔다. 머리도 스타일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충 빗질만 하고 끝.
그러나 전문가가 송충이 같던 눈썹을 다듬어주고, 머리카락은 소프트투블럭 댄디컷으로 잘라 앞머리에도 살짝 펌을, 여기에 아주 얇은 쌍꺼풀을 가진 시크한 눈매를 강조하여 메이크업을 하자 사람의 인상이 180도 변했다.
강보배의 변신에 놀란 건 한율만이 아니었다. 단장이 다 끝나자 괜히 다른 멤버들의 변신 모습을 지켜보던 박가람이, 거울에 비친 강보배를 보고 입을 벌렸다.
“보배 너 엄청 세 보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카리스마 래퍼 같아.”
“헤헤…, 진짜?”
“아니, 잠깐 입 좀 다물어 봐. 시크함이 깨지잖아.”
“…….”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어깨 펴.”
옷도 몇 번씩 갈아입고, 헤어메이크업도 따라 조금씩 수정하고.
멤버들은 처음 모니터링을 할 땐 평소 거울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에 놀라워했지만, 그것도 서서히 적응해나갔다.
“턱을 조금 더 기울이면 좋았을 것 같은데.”
“웃는 게 조금 어색해 보이지 않아?”
“헉…, 오늘 찍은 거 나중에 포토카드로 나갈 수도 있어요? 앨범 재킷도 찍는데?”
“영구 박제로 남겨지는 건가!”
이틀 후 앨범 재킷 촬영.
그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차를 타고 경기도 외곽으로 향했다.
재킷 촬영은 세 가지 버전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첫 번째는 데뷔 타이틀곡인 과 맞춰 조금 어두운 톤에 날카로운 이미지로. 옷에는 무언가가 치렁치렁 많이 달렸고, 피어싱을 비롯해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도 수시로 바뀌었다. 소품도 많이 등장했다.
“호 형 어두운 붉은 머리 잘 어울린다.”
“역시 키가 크니까 핏이 죽이는데?”
창과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철골 구조가 드러난 폐건물 세트장 내부. 촛농이 흘러내린 채 굳은 크고 작은 초가 있는 구석엔 타다 만 악보와 재가 흩어져 있었다.
유호는 그런 좁은 공간에서 유난히 깨끗한 피아노 앞에 섰다. 건반을 누르거나, 너덜거리는 악보를 쥔 채 부서진 벽 너머를 바라보거나.
“표정 좋고, 조금 더 슬프지만 화난 것처럼!”
“맏형 턱선 보소.”
“멋지다, 호우!”
그러나 촬영 내내 무겁고 복잡한 표정 연기에 몰입하던 유호는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멤버들에게 달려와 물었다. 한심한 얼굴로.
“여기 꼭 뭔가 나올 것 같지 않아?!”
“모니터링을 해보면 있는지 없는지 확인가능하지 않을까요?”
“어? 형, 모니터 봐요. 형 뒤에 그림자가…!”
“하지 마!”
“형 그림자도 잘생겼다고요.”
한율도 지금껏 받아온 메이크업보다 조금 어두운 이미지로 변했다. 여기에 검붉은 컬러렌즈까지.
“차분하지만 그리운 시선으로, 손 뻗고…, 그렇지, 좋아요!”
한율은 이번 앨범 재킷과 M/V 촬영을 위해 준비된 거대한 고래 그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귀를 누르는 여러 귀찌의 감촉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몇 분 정돈 참을 만 했다.
모니터 영상 주변에 모여 구경하던 멤버들이 숙덕거렸다.
“오, 예쁘게 나오는데? 흑백도 이 정도면 뭐….”
“써한 피부 보소.”
“진짜 백옥 같다.”
“이번엔 라이언도 들어갈게요.”
앨범 재킷 촬영은 정말 이만한 컷이 다 쓰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계속 되었다. 개인 컷을 제외하고 멤버 한 두 명과 여러 가지 포즈나 표정을 짓거나, 중간 중간 서비스 컷처럼 장난을 친다던가 하는 모습까지도.
“배… 배고파아…….”
폐건물 세트장에서 촬영이 끝나자마자 차를 타고 다음 장소인 스튜디오로 이동. 그곳에서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밝은 이미지로 변신했다.
감독의 취향인지, 스튜디오엔 히아신스와 크리스탈 래빗의 발랄한 노래가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다들 환하게 웃어볼까? 하하하하!”
“하하하하…!”
조금 전까지 배고프다고 빌빌 거리던 멤버들이 한 데 모여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여덟 명의 인원. 한 번에 만족스러운 단체 웃음 컷이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다시, 하하하하!”
“하하하하!”
두 번째 버전 소품으론 거대한 토끼인형이 등장.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감독이 굵은 목소리로 몰입을 지시했다.
“아이, 부드럽다! 촉감 좋다!”
멤버들은 토끼 인형의 다리나 몸에 기대어 눕거나 앉거나, 팔을 끌어안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하얗고 깔끔한 방의 침대에 누운 채 찍거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얼굴을 갸웃한다거나.
평소였다면 ‘왜 저래’라고 서로 꼴 보기 싫어할 법한 모습의 촬영이 이어졌다.
“배고파….”
세 번째 버전은 비교적 평범하고, 짧았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색 진을 입은 수수한 모습으로, 건물 위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에 걸터앉아 밤하늘—이 될 예정인 천장을 바라보는 여덟 명의 사진.
“밥죠…….”
한 가지 버전씩 촬영이 끝날 때마다 배고프다고 호소하던 라이언이 결국 매니저를 붙잡았다. 새벽부터 먹은 거라곤 물과 음료 종류뿐이라 당연했다.
“오늘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여기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조유찬이 보온가방에서 작고 납작한 밀폐용기를 여러 개 꺼냈다.
“호박죽을 챙겨왔어요.”
“…….”
“밤에 먹어도 안 붓는다! 호박죽 최고다!”
“…….”
지친 멤버들은 조용히 호박죽을 하나씩 챙겨든 채, 철수하는 스튜디오 업체 직원들을 향해 수고하셨다며 꾸벅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활짝 열린 차 안에 들어가 호박죽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호박죽은 간을 전혀 하지 않았는지 심심했다.
“얘들아, 형수 있잖아.”
숙소로 돌아가는 길.
몇몇 멤버가 곤히 잠든 차 안에서 유호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네, 형수 형이 왜요?”
“다음 달 말쯤에 데뷔하게 됐대.”
“오오…, 한동안 소식 없더니 잘됐네요. 어디에서요?”
“콩콩 엔터.”
부스스. 눈을 감고 있어 자는 줄 알았던 차남석이 고개를 돌렸다.
“…콩콩이요?”
“콩콩이면 보컬 시즌3에서 준우승한 거기네요.”
한율의 머릿속에 작년의 기억이 빠르게 스쳤다.
콩콩 엔터 팀, 강렬한 붉은색으로 염색했지만 과묵하기도 하고, 실수를 하면 쑥스럽게 웃던 하승헌.
그때 갑자기 올라온 학폭 이야기에 떠들썩해질 뻔했지만, 본인도 극구부인하고 해당 댓글을 달았던 사람도 삭제하고 사라져서 곧 잠잠해졌었다.
유호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그때 준우승한 팀원 두 명이랑 같이 그룹으로 데뷔한다고 하더라.”
“다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음 달 말이면 우리보다 후배가 되는 거네요?”
“그렇지?”
“그럼.”
별안간 라이언이 끼었다.
“형수 만나면 ‘후배야’라고 해도 돼?”
“안 돼.”
“고동에서도 다음 달에 신인 그룹 나온다고 하던데.”
조용했던 차 안이 하나 둘 깨어난 멤버들까지 가세하여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보컬 시즌3 연장전이야?”
“우승팀은 어디 갔어?”
“이미 데뷔해서 드라마 OST 부르고 계시던데.”
“잠깐만, 지금 4월에만 신인그룹이 둘이나 더 나온다는 거잖아!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길우성이 검지를 흔들었다.
“아뇨, 아뇨.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존잘 차남석 씨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꺼져.”
“유찬이 형! 카메라 돌아가고 있죠? 방금 찍었죠?! 찍었어야 해!”
운전석에서 조유찬이 대답했다.
“응, 안 켰어.”
###데뷔는 프랑스어, 쇼케이스는 영어
3월 31일 오후 6시.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에 10초도 안 되는 프로필 티저 영상이 올라왔다. 밝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멤버의 프로필 이미지가 한 장씩 빠르게 스친 영상은, 모두 함께 웃으며 토끼 귀를 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대박.. 애들 미모 실화냐♡ 실화다♥
-마지막 단체 토끼 귀ㅋㅋㅋㅋ
-이 와중에 남석이랑 한율이 능숙한 거 보소ㅎㅎ
-님들!! 그라 1기 팬클 모집 떴음!!!!!!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 1기 팬클럽 모집이 시작됐다. 다른 아이돌이 그렇듯, 웰컴키트 포함 옵션도 따로 선택할 수 있도록.
‘회원카드는 웰컴키트에…, 쇼케이스, 콘서트, 팬사인회, 공개방송 우선 예매 특권, 1기 전용 영상 시청 특권, 추첨 후 대형 포스터 및 … 아, 뭐가 이렇게 많고 복잡해?’
저녁 약속이 있어서 막 차에 올랐던 이희우는 핸드폰에 뜬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 알림을 보곤 투덜거렸다.
‘모르겠다. 대충 비싼 거 사면 되겠지.’
뭔가 동의하라는 게 잔뜩 나와 누르고, 본인확인 인증하고, 주소지를 입력하라는 창이 떠서 적고, 공식 팬클럽 가입비결제를 하자 이번에는 그 외에 링크 안내가 나오기에 눌러서 타고 이동, 거침없이 빠르게 다시 뭔가를 작성, 좌석 선택하고, 다시 결제하고 했더니.
‘어? 된 건가?’
데뷔 쇼케이스 예매에 성공했다.
이희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핸드폰을 조수석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쉽네. 애들이 아직 인기가 없나?’
그리고 여유롭게 시동을 걸었다.
20분 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 한 기사가 올라왔다.
[크래 동생그룹 ‘어스래빗’, 데뷔 쇼케 예매시작 3분만 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