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427)

* * *

[배우 이희우, 당당히 아이돌 덕밍아웃?!]

[지난 14일, S카드 스퀘어 홀에서 열린 신인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데뷔 쇼케이스 현장에 인기배우 이희우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큰 화제다.

이희우는 이 날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2층 객석에 있었으며, 공연이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채 공연을 즐겼다.

[어스래빗의 응원봉을 흔드는 이희우의 모습(사진=익명의 제보자)]

사실 이희우와 어스래빗의 인연은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년 이희우가 출연했던 OSN의 <수의형사>에서 어스래빗의 멤버 차남석이 한 에피소드에 출연했으며, 해당 화에는 서한율도 카메오로 출연한 바 있다. 이후 이희우는 본인 SNS를 통해 ‘꽃을 단 토끼’의 팬이라 밝혔으며…(중략).

한편 이희우는 개인 SNS에 어스래빗의 데뷔 쇼케이스에 간 게 사실이냐는 질문이 올라오자 ‘ㅇㅇ’, 이라고 대답, 당당히 어스래빗의 팬임을 밝혔다.

이날 열린 어스래빗의 데뷔 쇼케이스는 그린라이브 공식 1기 팬클럽 모집과 동시에 예매 시작 3분 만에 매진을 기록했다.]

-언니.. 작년에 왜 쓸데없이 오지랖 부려서 한율이 욕먹이게 햇냐그 뭐라해서 죄송해영(함께 흔드는 지구토끼 응원봉)

-부럽다.. 그냥 부럽다...

-초대받아서 간 게 아니면 3분 만에 매진된 걸 스스로 예매했다는 소리잖음ㄷㄷ 찐팬ㅇㅈ;

-ㅋㅋㅋ웹드로 난리 났을 때 뭔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ㅋ

ㄴ있긴 뭐가 있음ㅡㅡ 드라마 촬영 후 따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ㄴ오히려 이희우가 최근 직접 만난 그룹은 블블임

ㄴ양다리냐?!!

ㄴ그쪽은 비즈니스ㅇㅇ 어스래빗은 팬심ㅇㅇ

-이희우랑 서한율이랑 열 살 차이 아님?

ㄴ덕질에 나이가 뭔 상관?

-시집이나 가라. 옛날에 스물여덟이었으면 애 셋은 낳았다.

ㄴ시집이야 가든 말든. 뭔데 ㄱㄴㄹ질이야

ㄴ이희우 씨, 여기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ㄴㅋㅋㅋㅋㅋ

-어스래빗 ㅈㄴ 부럽다.. 희우느님...ㅠㅠ...

-ㅅㅂ나도 아이돌할 걸

ㄴ?

-언니 사랑해요♡

* * *

그린라이브로 생중계된 데뷔 쇼케이스는 마지막 무대와 인사로 끝이 났지만, 현장에서는 데뷔 쇼케이스에 찾아온 팬들을 위해 스페셜 무대를 한 번 더 하고, 사전에 팬들로부터 설문으로 요청 받았던 1위, ‘애교’까지 한 번씩 선보이며 시작 2시간 만에 데뷔 쇼케이스를 마무리 지었다.

“어이고, 삭신이야….”

데뷔 쇼케이스 다음 날 새벽.

위잉! 위잉! 여느 때보다 더 일찍 유호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침대 아래층에서 박가람의 앓는 소리가 올라왔다.

“마이 머슬…, 마이 레그…….”

한율은 피곤한 눈을 끔뻑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새벽 4시.

핸드폰에는 간밤에 모친이 보낸 톡이 들어와 있었다. 토끼 모양을 한 임시응원봉에 앞발을 턱하니 올려놓은 고양이, ‘퓨마’의 사진과 함께.

-[어제 정말 멋졌어, 우리 아들!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어^^]

-[[어머니]님이 [서한율]님의 초코톡 계좌로 (비공개)원을 입금하셨습니다.]

임시응원봉은 어제 라이브 홀 앞에 설치된 MD부스에서 처음 판매되고, 오늘에서야 온라인 판매가 시작된다고 들었다. 부모 대신 초대 티켓을 받고 왔던 외숙 내외가 사서 가져다 준 걸까.

우웅, 우웅.

“……?”

날이 밝으면 답변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가끔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는 몰라도 팬이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가 있어,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하며 한율은 거절 버튼을 눌렀다. 하물며 이 새벽에.

…우웅, 우웅.

또 걸려왔다.

“……네.”

-[자고 있었어? 그치마안, 음방 출근하려면 이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한율아?]

친근하게 말을 걸곤 있지만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누굴까아? 알아맞히면 칭찬해주지!]

미친 사람인가.

뚝. 한율은 전화를 끊고 바로 수신차단 버튼을 눌렀다.

삑삑삑삑. 그때 누군가 숙소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어스래빗 기상! 음방하러 가자!”

아래에서 다시 박가람의 앓는 소리가 올라왔다.

“흐으으므으….”

바로 어제 데뷔를 했다는 감동의 여운도, 오늘 공중파 음악방송 첫 무대를 갖는다는 기대도 멤버들의 새벽잠을 쫓아주지는 못했다.

양치와 세수를 했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상태로 차 두 대에 나눠 실린 채 샵으로 이동. 가볍게 헤어메이크업을 받았다. KBC의 음악방송인 <뮤직뮤직>에 ‘출근길’이라는 독특한 시간이 있는 까닭이었다.

멤버들은 샵에서 나와 방송국으로 이동할 때 즈음 되어서야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한율이 탄 차에는 강보배와 길우성, 이건우가 함께였다. 운전은 이번에 입사한 신입 매니저에게 맡기고, 편히 조수석에 앉은 조유찬이 말했다.

“건물 앞에 차 세우고 바로 들어가면 생얼에 마스크만 써도 괜찮은데, <뮤직뮤직>은 가볍게라도 단장하고 가는 게 좋아. 연예기자나 대리 찍사, 팬들이 와서 사진 찍거든.”

대형 팬덤을 거느린 정상급 아이돌은 안전상의 이유로 출근길을 패스, 차를 타고 바로 건물 입구까지 가기도 한다. 그리고 반드시 출근길을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말란 법도 없지만 어스래빗은 어제 막 데뷔한 신인.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노출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리 팬덤 이름 뭐가 좋을까?”

핸드폰으로 어스래빗의 공식 1기 팬클럽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을 훑으며 이건우가 말했다.

“팬 분들이 추천으로 올려준 이름이 다 좋아서 고르기가 힘들던데.”

통상적으로 토끼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연관 단어는 달, 토끼풀.

그러나 이미 크리스탈 래빗의 팬덤 명이 ‘달나라 주민, 달주’여서 달 관련 단어는 패스, 토끼풀은 영어인 ‘클로버’란 이름을 지닌 그룹도 이미 존재하여 패스.

“어? 새로운 이름 추천 떴다.”

“뭔데?”

같은 게시판을 살피던 길우성이 대답했다.

“우RU사.”

“…대한민국 최초로 아이돌 팬덤 명이 PPL로 경고 먹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라.”

한율도 게시판을 살폈다.

“‘당근’이랑 ‘솜뭉(치 꼬리)’, ‘별토끼’가 막상막하네요.”

“어감은 솜뭉이 귀여운 것 같은데, 뜻이 조금 약하네.”

“당근도 팬을 먹이 취급하는 것 같아서 별로.”

아직 새벽의 푸른빛이 가시지 않은 6시 20분. 방송국 후문 앞에는 이미 음방에 출연하는 가수들을 찍기 위한 사람들이 펜스나 벨트차단봉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히익…,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고?”

“말로만 들었을 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진짜 사람 많다.”

조유찬이 그들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너희 팬 아니야. 대놓고 무시하거나 인상 쓰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그냥 그렇게 생긴 마네킹이다 생각하고 밝게 웃으면서 인사해. 미소 연습이다! 하고.”

“네에.”

한 눈에 봐도 연예인이 탄 승합차 두 대가 멈춰 서자, 수십 대의 카메라가 먹잇감을 포착한 사냥꾼처럼 이쪽을 향했다.

한율은 먼저 차에서 내린 조유찬과 경호원의 뒤를 따라 내렸다.

차칵차칵, 파파파팟.

카메라 셔터음이 시끄러운 빗소리처럼 귀를 때렸다.

“헉….”

한율 다음으로 내리던 길우성이 순간 당황하여 덜컥 굳었다. 한율은 길우성의 앞을 교묘히 가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큰 목소리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뒤이어 차에서 내린 이건우와 강보배도 한율을 따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제야 길우성도 정신을 차렸는지, 두 손을 번쩍 들어 평소의 뻔뻔함으로 무장했다.

“아안녕하십니까!”

큭큭. 10대 아이돌답지 않은 구수한 인사에, 타팬으로 보이는 학생 몇몇이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다른 차에서 내린 멤버들과도 함께, 그들은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며 걸었다. 정말 조유찬의 말처럼 보란 듯이 썩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랑곳없이.

중간 즈음 가자, 누군가 [지구 박다람이♡]라고 적힌 슬로건을 높이 들었다.

“가람아아!”

“우와아아!”

박가람이 요란한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일순, 매니저와 경호원의 손이 허망하게 허공을 허우적거렸으나 그들은 바로 뒤따라가 막진 않았다.

“어제 데뷔 쇼케 잘 봤어!”

“감사합니다!”

박가람을 부른 팬 옆에는 [꽃길만 걷자 어스래빗], [지구접수 지구토끼] 슬로건을 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비록 이곳에 모인 수많은 타팬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수였지만, 어스래빗 멤버들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이 뻗은 손을 잡아 악수하고, 함께 셀카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시간은 짧았다.

“힘내에!”

“어스래빗 꽃길만 걷자악!”

“감사합니다아!”

인기가 많은 다른 가수가 도착했는지 뒤가 어수선해졌다. 팬들은 오래 붙잡아선 안 된다는 걸 아는 것처럼 먼저 응원과 인사를 보냈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그들의 배려에 한참 뒷걸음질 치며 화답했다. 팬들이 안겨준 선물과 손 편지를 들고.

“시간되면 이따가 또 만나요!”

공개홀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앞 주차장에는 포토존 표시가 바닥에 부착되어 있었다. 어스래빗은 먼저 온 아이돌그룹이 사진을 다 찍는 걸 기다렸다가, 그들이 안으로 들어간 뒤 조유찬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포토존 위에 일렬로 섰다.

인사를 하기도 전인데 수많은 카메라가 그들을 찍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유호가 선창하며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둥글어 모아 둥근 지구를 형상화, 곧바로 7명의 다른 멤버도 손을 들었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검지와 중지만 세워 붙여, 토끼 귀처럼 까딱 구부렸다. 가슴 앞 지구에 토끼 귀가 붙을 법한 위치와 각도에서.

“래빗!”

회사와 멤버들이 생각한 인사법 가운데에서, 바로 어제 데뷔 쇼케에서 팬들이 가장 낫다고 하여 채택된 손 구호였다.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환하게 웃었다.

“이쪽 봐주세요!”

포토존 앞에 진을 친 연예기자들의 요청에도 순순히 응해주며 한참. 어스래빗은 이만 됐다는 조유찬의 신호를 받고, 다시 예의바르게 여기저기 꾸벅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등을 훑었다.

“남석아아!”

차남석이 움찔 놀라 돌아보자, 한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잘생겼다아!”

생각보다 적지 않다는 보이그룹의 남팬이었다.

차남석은 당황한 내색 없이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나마 우리는 나은 거야

[어스래빗/뮤직뮤직]

그룹 이름이 붙은 대기실은 무대와 굉장히 멀고, 8명 플러스 스태프들이 다 들어가기엔 협소한 곳이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신기해하면서 핸드폰부터 찾았다.

“공중파 첫 입성! 역사적인 이 순간을 인증샷으로 남겨야 한다!”

“난 공중파 두 번짼데….”

“닥쳐, MBS 데뷔!”

“녹화 10분 만에 탈락한 것도 서러운데…!”

박가람과 길우성이 떠드는 가운데, 한율은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냈다. 안에는 미리 레몬생강청을 덜어서 담아왔다.

“한율아, 어디 가?”

“복도 정수기요.”

조유찬이 손을 뻗었다.

“줘, 이따가 내가 대신 담아줄게. 그리고 너희들 잘 들어!”

높아진 목소리에 멤버들이 집중했다.

“대기실을 나갈 땐 반드시 나 아니면 장전 씨한테 허락 받고 나가고, 혼자 나가는 건 절대 금지야. 화장실도 최소 네 명씩 같이 가!”

“네엑?!”

“아는 사람 있는 대기실에 놀러가는 것도 안 돼요?”

“그건 나아아아중에. 일단 PD님한테 인사하러 가야 하니까 다들 일어나.”

어스래빗 멤버들은 조유찬을 따라 나섰다.

한율은 눈썹을 찡그렸다. 인사하러 가는 건 좋은데, 왜 자신의 텀블러를 든 채 그냥 가는 걸까.

어스래빗이 인사하러 갔을 때 <뮤직뮤직>PD는 먼저 도착한 걸그룹에게 인사를 받고 있었다. PD는 복도를 가득 채우면서 오는 8명의 어스래빗을 보고도 못 본 척, 걸그룹에게 미소와 함께 격려의 말을 보내다가, 그들이 물러가고 나서야 조유찬에게 아는 척 했다.

“크래 회사 분, 맞으시죠?”

“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김 PD님!”

조유찬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한 후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유호가 냉큼 선창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뮤직뮤직>에서 첫 무대를 뛰게 된 신인!”

“어스래빗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그래.”

“…….”

“…….”

…끝인가?

간결하게 돌아온 대답 후, 멤버들은 2초 정도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PD는 어스래빗이 아닌 조유찬을 보고 있었다.

“크래는 한국 언제 들어와요?”

* * *

“대형기획사 출신이 아닌 신인한텐 정말 눈길조차 제대로 안 준다더니…, 애들 말이 사실이었네.”

“그래도 그나마 우리는 나은 거예요.”

스태프들에게도 꾸벅꾸벅 인사하고, 드라이리허설까지 마친 뒤에야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차남석이 조용히 말했다.

“무대 순서가 너무 앞도 아니고 VCR 소개영상에 대기실 인터뷰까지 잡혔잖아요. 대기실도 우리만 쓰는 독실에 소파까지 있고.”

“아…….”

데뷔를 해도 인터뷰는커녕 MC의 소개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녹 없이 생방으로 첫 무대만 하고 내려가는 신인그룹도 적잖았다.

“듣고 보니 그렇…, 으헉. 대기실이 더 좁아졌어.”

대기실로 돌아와 보니, 그렇잖아도 좁은 곳이 무대의상과 신발, 소품이 모두 들어와 더욱 좁아져 있었다. 여기에 샵에서 출장 나온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들과 스타일리스트들, 매니저들까지.

조유찬이 작게 투덜거렸다.

“어우, 좁아.”

그러나 불평은 짧았다.

“네 명씩 거울 앞! 누구부터 할래?”

한율은 이름이 크게 적힌 리허설 조끼를 벗었다.

[한율/어스래빗]

활동이름을 모두 본명으로 가되, 성은 빼기로 하여 간결해진 이름. 각자 리허설 조끼를 벗은 멤버들이 모였다.

“가위바위보!”

진 사람들이 차례대로 거울 앞에 앉아, 무대에서 더 빛날 수 있는 헤어메이크업을 새로 받았다. 헤어드라이어기 열기와 사람, 먼지 탓에 에어컨이 가동되고, 멤버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드라이어기 소리가 잠잠해지자마자 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배고파.”

“그 말 할 줄 알았다.”

“이따가 맛있는 거 시켜줄게. 그 전까진 이거라도 마시고 있어.”

조유찬이 가방에서 꺼낸 건 호박즙이었다.

“…….”

“우리 팀에 호박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없어서 참 다행이에요, 형.”

“그런데 사녹 오신 팬 분들은 어쩌고 계세요? 사녹 방청하려면 일찍부터 와서 줄서야 한다고 하던데.”

“아까 잠깐 보고 왔는데, 너희들 첫 음방 데뷔라고 다들 열심히 응원법 외우고 계시더라.”

차마 메이크업을 한 얼굴에 손은 못 대겠는지, 박가람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흐으, 감동!”

찰칵.

“못생겼다.”

“야!”

어스래빗의 사녹 예정시간은 11시 30분.

중간에 어디 나갔다 오기에도 애매한 시간인지라, 그들은 일을 마친 샵 직원들을 복도까지 배웅하고 난 뒤 대기실에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발매된 앨범을 들고 대기실을 순방하는 건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가기로 한데다 대기실엔 TV도 없어, 각자 안무를 연습하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써한, 그런데 너 민준 선배님한테 안 가봐도 돼?”

심심한 얼굴로 핸드폰 게임을 하던 길우성이 물었다.

“너 보면 엄청 반가워하실 것 같은데.”

“오늘 선배님 안 나오는데?”

“잉? 분명 오늘 <뮤직뮤직> 라인업에 블블이….”

“지난주에 이번 주 나갈 것까지 미리 녹화했다고 하더라. 지금쯤 해외 스케줄 때문에 비행기 안이실 걸?”

“으아…. 그 분들은 어째 쉬는 날이 없는 것 같다. 국내활동 끝나면 곧바로 해외가고, 해외스케줄 끝나면 또 다음 앨범 준비하고, 홍보 차 각종 예능에 나가고, 활동하고, 무한 반복.”

뭘 그리는지 쓰는지 모르겠지만, 사과패드에다 사과펜을 끄적거리던 차남석이 대답했다.

“고동이 고동하는 거지.”

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작년에도 이맘때쯤에 블블 선배님들 중 한 명 과로로 쓰러지지 않았나? 리더는 발목 부상당하고.”

“그렇게 단체스케줄 취소돼서 조금 쉬나 했더니, 바로 남은 멤버들 개인 스케줄 잡아와 또 일 시켜서 좀 난리 났었죠.”

그러고 보니.

한율은 예전에 민준이 보냈던 톡을 떠올렸다. 해외 일정이 빡센 자기 대신 몸보신으로 먹어달라며—.

한율은 생각이 난 김에 민준이 보내온 수많은 먹거리 선물을 보았다. 교환권 기한이 다 되었다는 알림이 올 때마다 연장만 시키고 한 번도 사용하질 않아서 수십 개나 되었다.

“형, 저 점심 이걸로 시켜도 돼요?”

한율은 그 중 하나를 띄워서 조유찬에게 보여주었다.

“어. 네가 선물 받은 거 쓴다는데 누가 말리겠… 잠깐만. 이거 누가 보낸 거야? 블블 민준?! 아니, 대체 언제 친해진 거야?”

“형이 그 분 SNS에 ‘좋아요’ 누르라고 한 그때부터요.”

“……!”

사녹은 무슨 이유에선지 시간이 딜레이되어, 어스래빗은 12시 10분이 되어서야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바다, 고래, 달이 몽환적으로 그려진 세트와 어우러져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명. 드라이리허설 때와는 전혀 다른 무대 바로 앞에는, 어스래빗의 각종 슬로건과 임시응원봉을 든 팬들이 서있거나 좌석에 앉아있었다.

무대의상 위에다 다시 리허설 조끼를 걸친 어스래빗은 조유찬의 당부대로 가장 먼저 스태프들이 있는 곳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팬들에게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꺄아아아! 즐거운 환호성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카메라리허설 가겠습니다.]

아침에 드라이리허설을 하면서 카메라 위치와 타이밍을 숙지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멤버들은 완전히 긴장을 놓지 못했다. 바로 어제 있었던 데뷔 쇼케와 달리, 객석의 팬들보다는 카메라를 우선으로 봐야 하므로.

멤버들이 진지한 얼굴로 대형을 갖췄다.

인이어와 와이어리스 마이크가 어둑해지는 검푸른 빛 조명으로 물들었다. 무대 바닥에 희미한 연기가 슬며시 깔렸다.

[삑. 삐빅—.]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아주 약한 신호음.

수백, 수천 번을 연습하여 익힌 정확한 타이밍. 센터에 선 라이언이 혼자 고개를 들며 속삭이듯 랩을 뱉어냈다.

[with all one's might.]

[with all one's might.]

카메라리허설을 마친 뒤엔 곧바로 무대 아래로 내려가 모니터링. 스태프에게 미흡했던 부분에 대해 지적이나 부언설명을 듣는 동안, 스타일리스트는 그들의 얼굴이나 목에 맺힌 땀을 톡톡 닦아주고, 미니 선풍기로 열기를 식혀 주었다.

그러고 바로 리허설 조끼를 벗고 본 녹화에 들어갔다.

100% 라이브로 나가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라이브를 하며 가볍지 않은 안무까지 하다 보니 무대 하나만 해도 체력이 닳았다. 조명도 어찌나 세고 뜨거운지, 열이 더 오르는 듯했다.

[잠깐 쉬고 한 번 더 갈게요.]

“네!”

무대에서 퇴장했던 어스래빗은 우렁차게 대답한 후 숨을 골랐다. 다시 스타일리스트들이 달려와 땀을 식혀주고 메이크업을 수정해주었다.

유호가 무대 앞쪽으로 다가가 팬들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우리 팬 분들, 배고프지 않아요? 배고프죠?”

“괜찮아!”

“그런데 우리 팬 분들, 팬덤 명 뭐라고 해야 좋을까요?”

저렇게 그냥 대화해도 되는 건가?

한율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스태프들과 조유찬을 살폈다. 말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조유찬은 신경 쓰지 않고 스태프와 대화중이었다.

되는 구나.

“오빠는 뭐가 좋은 것 같아요?!”

“뭐든?”

공식 팬클럽 가입을 하고, 사녹 방청신청을 해 추첨이 되어도 새벽 일찍 방송국으로 달려와 밖에서 줄을 서고, 그렇게 입장을 해도 좋아하는 가수를 눈앞에서 보는 건 고작 몇 분.

그럼에도 팬들은 좋아해하며 웃었다. 반짝거리는 응원봉으로 입을 가리거나 하며.

어느 방송에선가 누군가 떠드는 걸 들은 적 있었다.

아이돌은 본인의 춤과 노래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만 무대에 서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수단 삼아 팬들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겠으나, 뭐 어떤가.

‘즐거운 기억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그래야 예상치 못한 재앙이 닥쳐도 희망을 쉽사리 놓지 않고 살아갈 테니.

물론, 현재의 즐거움이 통한의 후회로 변질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한율은 메이크업 수정이 완료되자 웃으면서 유호 옆으로 다가갔다. 팬들이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한율아아, 아까 정말 잘했어어!”

“오늘도 음색으로 무대 찢었다!”

“그래요? 더 잘해야겠다.”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팬들이 좋아라 화답한다. 꺄아!

그때 스태프들이 슬슬 준비하라고 외쳤다. 그제야 보완을 다 받은 다른 멤버들이 다급히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열심히 할게요!”

사녹은 두 번으로 OK사인을 받아 끝냈다. 멤버들은 사방팔방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친 뒤, 팬들에게는 나중에 보자면서 인사를 하곤 무대에서 내려갔다.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길우성이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흥얼거렸다.

“팬미팅, 팬미팅, 미니 팬미티잉~.”

이번엔 팬들과 미니 팬미팅을 가질 예정이었다. 첫 음방 무대를 기념하여, 회사에서는 역조공 이벤트도 마련했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사녹을 위해 이동하는 한 보이그룹과 마주쳐, 그들은 잠깐 멈춰 서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데뷔하게 된 어스래빗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반갑습니다. 풀썸이라고 합니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풀썸’은 데뷔한지 1년 정도 되었지만 아직까지 크게 빛을 보지 못하는 6인조 보이그룹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데뷔하면서부터 적잖이 주목받은 신예 후배그룹의 등장이 달갑지 않을 텐데도, 한 명도 얼굴을 찌푸리는 법 없이 살갑게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데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또래 남자애들이 복도에 길게 늘어서서 악수를 나누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화이팅입니다!”

“이따 대기실로 찾아뵐게요!”

“무대 수고하세요!”

주변에 매니저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있어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한율은 그리 나쁜 인상은 받지 못했다. 경계보다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조금 느꼈을 뿐.

멀어지는 그들의 목소리가 복도에 작게 울렸다.

“저 분 TV에서 본 것보다 더 잘생겼다.”

“다들 얼굴이 조막만 해.”

어스래빗 멤버들은 잠시 머쓱하게 서로를 쳐다보다가 다시 대기실로 이동했다.

방송국 측으로부터 사전에 허가받은 미니 팬미팅 장소는 벨트차단봉이 크게 둘러져 있었다.

사녹 방청 인원은 150명. 그러나 미니 팬미팅에 모인 사람은 그보다 더 많아 보였다. 하지만 WB래빗 직원들과 팬매니저가 사녹 참여인원인지 먼저 체크하고, 공식 팬클럽 회원인지도 체크하여 들여보낸 어스래빗 팬들이었다.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가장 먼저 팬들 앞에 서서 정해진 구호와 함께 인사를 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WB래빗 직원들이 설치한 임시 테이블 안쪽에 섰다. 테이블에는 팬들에게 나눠줄 에코백과 샌드위치가 쌓여 있었다. 한쪽에는 크리스탈 래빗이 동생 그룹을 위해 보내준 커피차까지.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기다리느라 힘들었죠. 뭐로 드릴까요?”

질서정연하게 줄을 선 팬들에게 어스래빗 로고와 아수라 토끼가 그려진 에코백부터 먼저 나눠준 길우성은, 세가지 종류로 준비된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샌드위치 포장지에는 모두 어스래빗 로고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에그? 햄치즈? 돈가스 샌드위치도 있다.”

“우성인 뭐 좋아해?”

“저라면 이 세 종류 다아아아 먹겠지만, 역시 고기가 많은 돈가스!”

“그럼 나도 돈가스!”

다른 멤버들도 팬들에게 준비된 선물과 샌드위치를 나눠주고, 함께 셀카를 찍기도 했다.

“한율아, 토끼 귀 포즈로 찍자!”

한율은 팬들의 사진 요청에 응했다.

“팔 아플 테니 제가 대신 들게요.”

“응!”

한율은 팬의 핸드폰을 대신 들었다. 그리고 함께 생긋 웃으면서 머리 위로 올린 한 손을 토끼 귀처럼 살짝 구부렸다.

찰칵!

###네 새끼 아니고 남의 집 귀한 새끼다

예전에 <보컬리스트 시즌3>를 촬영할 때에도 팬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긴 했지만, 이번엔 그보다 인원이 많아 조금 정신이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소홀이 대하면 안 되는 터라 더더욱.

그리고 그들 중에는 팬이라 하면서 무례하게 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누가 내 허리를 슬쩍 꼬집었는데 말이지….”

미니 팬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대기실. 소파에 걸터앉은 유호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누군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헐, 형도 당했어요?”

“어? 너도?”

“아? 나도 당했는데.”

“…….”

팬들 중엔 ‘나쁜 손’도 있었다.

한율은 블블의 민준이 준 삼계탕 교환권으로 배달 주문을 하며 말했다.

“핑크색 선이 들어간 크로스백을 메고, 사녹 입장 팔찌를 차고 있었어요. 그리고 검은색에 은빛 펄 들어간 운동화.”

“봤어?”

“써한 너도 당한 거야?”

“아니. 만지려고 하기에 피하고, 대신 손에 샌드위치 쥐어줬더니 웃던데.”

조유찬이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장 촬영한 사람들한테 영상 요청해서 확인해볼게. 시대가 어느 땐데 뻔뻔하게 성추행이야.”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복도로 나갔다. 현장전은 핸드폰에 음식배달앱을 띄워 멤버들에게 돌렸다.

“점심메뉴 골라. 음료도 시켜도 돼.”

“와, 아무거나 시켜도 돼요? 칼로리 높은 것도?”

“어. 너희 아마 저녁은 못 챙겨먹을 테니까.”

“…….”

신나하던 멤버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방송 끝나서 PD님한테 인사하고, 라방도 하다보면 8시, 9시나 되어야 퇴근 가능할 거야. 그리고 내일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음방 가야 하니까…, 아, 호박죽 미리 시켜줄까?”

“…됐어요.”

“나는 시켜죠요.”

조유찬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음식 시켰어요? 음식 올 동안 다른 대기실에 앨범 돌리러 가자.”

“나 삼겹살 도시락!”

“난 소불고기!”

“나 그냥 정식.”

따로 점심을 시킨 한율을 제외하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대충 메뉴를 골라 외쳤다. 그러고 며칠 전 직접 사인도 하고 메시지도 적은 앨범을 챙겨 대기실을 나섰다.

찾아가는 순서는 데뷔연차. 조유찬이 앞장서서 어스래빗을 이끌며 알려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새로 데뷔한 어스래빗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건 저희 CD….”

인사를 받는 선배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소소한 반김’ 딱 이 정도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앨범을 교환한 후엔 곧바로 서로 수고하라며 대기실을 나왔다. 가끔 지금은 인사받기가 곤란하다고,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비친 매니저와 앨범만 교환하기도 했다.

앞서 복도에서 만났던 풀썸은 이번에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연달아 다른 팀도.

“솔직히 다는 못 봤지만, 그래도 잠깐 어제 라이브 봤었어요. 와, 정말 신인 맞아요? 다들 잘하시던데?”

그리고,

“개놈아, 지금 내 말 씹냐?”

“조용히 해, 손님 인사하러 온 거 안 보여? …야! 얼굴은 때리지 마!”

쿠당탕.

“…….”

“…….”

신인 후배나 다른 기획사 매니저가 보든가 말든가, 주먹다짐을 하는 팀도 있었다. 대신 그 팀 매니저가 다가와 ‘인사는 됐다’란 말 한 마디만 던지고 문을 툭 닫았다.

“뭔가… 음, 뭔가…… 아니야.”

“뭐가?”

대기실로 돌아오는 길. 다른 가수들에게 받은 앨범을 품에 소중히 끌어안은 채, 박가람이 고뇌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저쪽도 고생고생해서 데뷔했을 텐데, 왜 저리 서로 싸우….”

“형.”

차남석이 박가람의 말을 중간에 막았다.

“듣는 귀가 없어 보여도 누군가는 다 듣는 곳이에요. 다른 팀 얘기는 대기실에서도 안 꺼내는 게 좋아요.”

“어….”

장난기가 없는 차남석의 얼굴에, 박가람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엉.”

“귀여운 척 금지.”

박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AI처럼 대답했다.

“고3시킹 나쁜시킹.”

“…[어제 갓 데뷔한 신인 어스래빗, 방송국 복도에서 멤버들 간에 멱살잡이]란 기사제목 좀 띄워볼까요?”

“하하하.”

유호가 건조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대기실 안으로 밀었다.

“들어가서 밥이나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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