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기실 인터뷰는 방송이 시작되기 전, 스태프들과 카메라, MC들이 미리 대기실을 찾아와 진행되었다.
“MC들이 들어오면 깜짝 놀라거나 기대했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고, 키가 작은 분들은 앞에, 키 큰 멤버들은 뒤에 서서…. 이쪽 분은 여기. 너무 퍼지면 카메라에 다 안 들어오니까 바짝 붙어서.”
미리 준비된 대본으로 아주 짧은 리허설을 거치고 본 촬영. 다시 복도로 나간 <뮤직뮤직>의 MC, 보이그룹 스타믹스의 JE와 걸그룹 아이허니의 유린의 목소리가 밖에서 울렸다.
“안녕하세요, 뮤직뮤직 MC, JE!”
“유린입니다!”
“저희가 오늘 찾아온 대기실의 주인공은 바로바로…!”
두 MC가 천장까지 뚫을 정도로 과하고 상큼한 텐션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MC들이 자연스럽게 좌우로 피했고, 어스래빗은 카메라를 향해 손 구호와 함께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멤버들은 MC의 질문에 맞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그룹 이름의 뜻과, 데뷔 타이틀곡에 대해 자연스레 설명했다. 데뷔 쇼케이스 전부터 카메라를 두고 여러 번 반복 연습한 결과였다.
“그럼 여기에서 포인트 안무 잠깐만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네, 보여주실 수…, 아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긴장으로 인한 자잘한 실수는 나왔다. 하지만 이런 어수룩한 모습도 나와 주어야 한다고 여기는지, 스태프는 계속 하라고 손짓했다.
“쓰리, 투, 원.”
“수면 위 구름을 갈라 도달한 곳, 우리의 새 Earth, ISLAND!”
후렴구와 함께 하는 포인트 안무는 본래 동작이 컸지만, 서로 간의 간격이 좁아 소심해졌다. 그럼에도 MC들은 와아! 크게 환호하며 박수쳤다.
“잠깐만 봐도 신인의 패기가 활활! 뿜어져 나올 정도로 멋진데요!”
“그럼 이 멋진 어스래빗의 강렬한 퍼포먼스와 무대는 나중에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뮤직~!”
카메라를 차지한 MC들이 외쳤다. 어스래빗은 그들 뒤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뮤직!”
“컷.”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이 바삐 대기실 밖으로 철수했다.
“수고하셨….”
스태프들 중에는 어스래빗의 인사를 끝까지 받아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건성으로 고개만 까딱하고 나갔다. MC중 하나인 스타믹스의 JE는 인사를 하기는커녕, 받기도 싫다는 듯 횅하니 나갔다.
반면, 아이허니의 유린은 친절하게도 멤버 한 명, 한 명씩 보면서 인사했다.
“정말 데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이따가 저희 앨범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아, 이거 저희 앨범인데….”
유린은 넉살 좋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우리 멤버 여섯 명이에요!”
6장을 달라는 뜻이었다.
이건우가 당장 앨범을 넣어둔 박스에서 7장을 꺼내 유린에게 주었다.
“6+1 행사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히힛.”
유린이 정체불명의 어깨춤을 들썩들썩 추면서 퇴장했다. 이건우가 멍하니 그 뒷모습을 향해 대답했다.
“네….”
타악. 유호가 이건우의 등을 때렸다.
“정신 차려, 이건우.”
“…어? 아, 어? 내, 내가 뭘?”
이건우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허둥지둥, 앨범이 담긴 박스를 정리했다.
* * *
방송은 생방송 무대와 VCR, 사녹 영상이 교차 편집되어 나간다. 어스래빗도 방송엔 세트에서 찍은 사녹 영상이 나갈 예정이지만, 생방송 큐시트 순서에 맞춰 무대에도 올랐다.
방청석에는 생방송을 보기 위해 찾은 여러 팬덤이 끼리끼리 운집되어 자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무대를 하고 내려온 어스래빗 멤버들은 인이어와 마이크를 다 빼고 대기실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짤막한 감상을 말했다.
“보는 사람들 전부가 우리 팬이 아니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던 것 같기도.”
“으음. 절대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부담감이 덜 들어서 그런가?”
“나는 그냥 몸이 알아서 움직였던 것 같아. 이러다 자면서도 출 듯.”
“이미 췄었어, 너.”
“……?!”
새벽부터 일어나 드라이리허설, 사녹, 미니 팬미팅, 대기실 인터뷰, 다시 무대. 잠도 부족하게 잔데다가 중간 중간 편히 쉬는 시간도 없어서 그런지 참 길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한율은 말없이 멤버들 뒤를 따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
좌측으로 난 복도 안쪽, 누군가 황급히 몸을 피하며 숨은 듯했다.
의아해서 잠깐 멈춰 서있자, 복도 안쪽 모퉁이에서 누군가 다시 얼굴을 스륵 내밀더니—, 덜컥 굳었다.
“…….”
“…….”
짧은 정적.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마주친 부자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하.”
부친이 머쓱한 얼굴로 작게 웃었다. 그러곤 누가 볼 새라 주위를 휙휙 살피더니, 한율에게 손을 짧게 흔들곤 다시 모퉁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안쪽에서 누군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서 국장님?! 여기는 무슨 일로….”
“하하, 잠깐 산책 좀 왔습니다.”
“…여기로요?”
한율은 속으로 작게 한숨 쉬었다.
다른 건물 꼭대기 층에서 근무하는 시사교양국장이 난데없이 예능국, 그것도 음악방송이 한창 진행 중인 별도의 공개홀을 어슬렁거리면 당연히 이상하게 보이겠지.
“써한, 왜 그래? 거기에 뭐 있어?”
길우성이 한율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멤버들도 이동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한율을 보고 있었다.
한율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아냐, 아무 것도.”
* * *
어스래빗의 공식데뷔날짜는 데뷔 쇼케이스와 음원을 발매한 어제였으나, 멤버들은 학교나 학원, WB래빗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기획사의 지인이나 친구를 통해 ‘이 바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항상 화려하고, 예의 바르고, 밝지만은 않다는 걸.
오늘 <뮤직뮤직> 마지막 무대는 블블의 사녹 영상. 해당 영상이 나가는 동안, 무대에는 전 출연진이 올라와 대기 중이었다.
“존나 기생오라비 삘.”
“여자들이 뭣 빠지게 번 돈을 여기저기 처바르고 데뷔했으니 완전 틀린 말은 아니지 않냐?”
“그 돈으로 다른 년들한테 또 잘 봐달라고 뿌리고.”
“시발, 기둥서방이냐고. 크큭.”
어제 갓 데뷔한 신인인 어스래빗은 당연히 뒤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팀을 사이에 두고 들리는 비웃음 소리.
몇 시간 전 대기실을 돌며 인사하러 다녔을 때, 지금은 만나기 곤란하니 앨범만 달라고 했던 팀 중 하나인 보이그룹 ‘퍼스트라인’이었다.
“저거 어째 우리 말하는 것 같지 않냐?”
“쳐다보지 마.”
그쪽을 돌아보려던 이건우를 유호가 막았다.
“무시하고 카메라 보면서 웃어. 지금 방송엔 안 나가도 카메라엔 다 잡히고 있어. 인상 쓰지 마.”
그때 라이언이 그쪽으로 눈알을 굴렸다. 비웃으면서 어스래빗 쪽을 보던 퍼스트라인의 멤버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뭘 꼬라 봐, 새끼야.’
“…….”
라이언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건우를 단속하는 유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으면서 영어로 말했다.
[나 네 새끼 아니야, 이 뭉개진 찹쌀떡 같은 놈들아.]
풉. 그때 라이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들 사이에 있던 팀의 멤버 중 한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반응을 보고 욕이라는 걸 직감한 퍼스트라인의 멤버가 욱한 얼굴로 받아쳤다.
“저 검머외 새끼가 뭐라는—.”
“라이브 전환, 3초!”
스태프가 외치자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프롬프터에 라이브 표시가 켜지고 감독이 큐 사인을 내리자, 가장 앞에 서있던 MC들이 큐카드에 적힌 대로 멘트를 쳤다.
“생방송 <뮤직뮤직>, 오늘의 1위는—, 축하합니다! , 블랙블러드! 블랙블러드에게는 저희가 트로피를 잘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생방송, 뮤직~.”
“뮤직!”
“즐거운 주말되세요!”
카메라가 무대 위의 가수들을 한꺼번에 잡으며 멀어졌다. 지미집도 완만하게 움직였다.
1위 당사자가 있었다면 당사자에게 시선이 집중되어야 하므로 튀는 행동을 해선 안 되지만, 가수들은 홀에 울리는 블블의 노래를 티나게 따라 부르거나, 안무를 얼추 따라 추면서 조금이라도 주목받기 위해 몸부림쳤다. 무난하게 방청석과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실제 방송으로 송출되는 영상모니터에는, 이번 1위 곡인 블블의 노래 안무를 무대 뒤쪽에서 완벽하게 따라 추는 길우성과 박가람이 2초 남짓 잡혔다.
퍼스트라인이 그 옆을 지나가면서 어스래빗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시비를 걸었다.
“지랄한다, 새끼들.”
귓전을 생생히 스치는 목소리.
“…….”
한율은 먼저 무대를 내려가는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악!”
쿠당탕!
카메라에는, 아무도 밀칠 법한 사람이 없는 곳에서 저들끼리 뒤엉켜 나자빠지는 퍼스트라인의 모습도 잡혔다.
이곳엔 다양한 팬들이 있습니다
-우성아 가람아 아깤ㅋㅋㅋㅋㅋㅋㅋ 방송에 잡힌 거 봤닼ㅋㅋㅋㅋ
방송이 끝나고 PD와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러 다녀왔더니 어느새 8시. 어스래빗은 무대의상도 벗지 않고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은 채, 첫 음방 기념 라방을 켰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엔딩 무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했다.
-블블 춤 왤케 잘 췈ㅋㅋㅋ
-너희 노래에 너희가 1위한 줄ㅋㅋㅋ
길우성이 뻔뻔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후배 된 도리로 어찌 선배님의 춤을 모르겠사옵니까.”
-ㅋㅋㅋㅋㅋㅋ말투ㅋㅋㅋ
-그런데 아까 다른 팀 내려가다가 넘어지던데; 너흰 괜찮았어?
박가람이 길우성 옆으로 끼어들었다.
“저흰 멀쩡하옵니다.”
이후 톡창에는 오늘 방송 잘 봤다느니, 잘했다는 칭찬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그들 닉네임 옆 대부분에는 어스래빗 공식 팬클럽 회원임을 나타내는 녹색 표시가 반짝거렸다.
“감사합니다. 사실 어제 데뷔 쇼케 끝나고 라방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잠들어버렸어요. 죄송해요.”
-아니야아 준비하느라 고생하고, 어제 그렇게 열심히 햇는데.. 그럼 됏어ㅠㅠ
-몸 챙기는 게 우선이지ㅜㅜ
-오늘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방송국왔잖아
-내일은 SBC 가지??
-내일은 꼭 우리 토끼들 보러 사녹간다ㅜㅜ
-내일도 팬미팅 해?
어스래빗 멤버들은 눈치껏 한 명씩 대답하며 팬들과 잡담 같은 라방을 진행했다. 어제 데뷔 쇼케 전에 공개된 데뷔 리얼리티의 감상을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취미에 등산이 나올 줄은 몰랐다ㅎㅎ
-근데 진짴ㅋㅋㅋ 3시간 안에 정상까지 올라갈 줄이야ㅋㅋㅋ
-막내가 적은 취미로부터 시작된 이 고행의 끝은 정상에 오른 산토끼의 포효이리라
-자막 센스 도랏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그런데 한율이 취미가 정말 산 정상에서 바람 쐬는 거야??
대답은 길우성과 차남석이 먼저 했다.
“네, 써한 취미 맞아요.”
“작년에 한율이랑 저랑 CF촬영하러 제주도 내려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우성이도 집에 잠깐 들르고 싶다고 같이. 그때도 한율이가 혼자 한라산 정상엘 가겠다고 해서—.”
길우성이 핸드폰을 꺼내 작년에 한라산 백록담에서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을 띄워 카메라에 들이댔다.
“보시죠, 증거입니다.”
-ㅋㅋㅋㅋㅋㅋ진짜였어ㅋㅋㅋ
-우리 엄마도 취미가 등산인데
-나중에 우리 랑도 등산ㄱㄱ??
-산 정상에서 팬 사인회하는 건가요ㄷㄷㄷ
해당 리얼리티 촬영 당시, 3시간 만에 산 정상까지 올라갔던 이건우가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지 마세요, 여러분. 그때 저희가 간 곳이 그나마 쉬운 우면산이라 살았지, 진짜 본격적으로 등산하라 그러면….”
함께 갔던 강보배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한율을 보며 손을 들었다.
“저 그때 병가내도 될까요?”
한율은 말없이 웃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그때 2등 해서 스포츠시계 받으셨잖아요.”
“그나저나 진짜 웃기지 않았어? 건우 형 취미.”
차남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콩나물 다듬기가 취미일 줄이야….”
“그… 그게 뭐! 내 노래 실력이,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콩나물 다듬으면서 갈고 닦인 거라고.”
“그런 것치곤 취미 즐기기 시작 초반에 엄청 당황해하던데?”
-남석이랑 라이언이 시장가서 콩나물 다듬는 거 보고 정말ㅋㅋㅋㅋㅋㅋ
-곱디고운 아이돌 둘이 시장 바닥에 앉아섴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나 우울할 때 그 장면 계속 돌려봐
-다듬으라 그랬더니 머리를 왜 다 따버리냐곸ㅋㅋㅋ
라이언이 진지하게 말했다.
“콩 싫어요.”
여덟 명이다보니 고작 한두 명 얌전히 입을 다문다고 수다가 빨리 끝나진 않았다. 라방은 결국 9시까지 진행되었고, 보다 못한 조유찬이 슬슬 끝내라는 신호를 보냈다.
박가람이 아쉬운 얼굴로 카메라를 잡았다.
“그럼 우리 소중한 팬 여러분, 편안한 밤 되시고 제 꿈꾸세요!”
“안녀엉~!”
라이브 종료 버튼을 툭 누르고 핸드폰으로도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문구까지 확인한 뒤에야, 멤버들은 소파나 벽으로 몸을 기대며 널브러졌다.
“흐아아….”
드디어 길고 길었던 오늘 하루 스케줄이 끝났다.
“형,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요?”
“내일은 1시에 일어나면 될 것 같아.”
앞으로 고작 4시간.
“흐으어어….”
먼저 옷을 갈아입은 한율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띠링. 지문으로 잠금을 풀자 그동안 들어온 부재 중 전화나 메시지, 앱 알림이 떴다.
[부재 중 전화 5건]
[읽지 않은 메시지 12건]
부재 중 전화에 찍힌 번호는 셋. 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 문자와 초코톡 앱으로 들어온 메시지 번호도 모두.
-[오늘 팬미팅 때 센스 좋았어. 그런 년은 손모가지를 분질러야 하는데.. 다음엔 내가 처리할게ㅎ]
-[스케줄할 땐 진동? 아니면 무음? 안 울리네]
-[방송이랑 그라 잘 봤어^^]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 새벽에 전화를 건 여자인가? 이게 말로만 듣던 사생스토커? 어쨌든 내용을 보니 오늘 미니 팬미팅에 왔었던 모양. 조악한 벨트차단봉으로만 둘러진, 환히 노출된 야외에서 진행되어 그 안까지 들어온 사람이라고 속단하긴 힘들지만 말이다.
“형.”
한율은 조유찬에게 부재중전화 수신내역과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단숨에 정황을 파악한 조유찬이 미간을 구겼다.
“으아…, 한율이 너 핸드폰 네 명의지?”
“네.”
“그럼 일단 번호 바꿔보고, 그래도 계속 연락 오면 가족 명의로 바꾸는 게 좋겠다. 정말 집요한 사람들은 이통사 대리점 나오는 순간 알아차리거든.”
“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요?”
“처리도 굉장히 늦고, 잡아도 훈방조치 아니면 경범죄 벌금 몇 만원 물고 땡일 거야.”
“왜, 사생 붙었어?”
차남석이 다가와 물었다.
한율이 말없이 핸드폰을 보여주자, 다른 멤버들도 왜 그러냐며 몰려오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남석이 넌 괜찮냐? 한율이가 이 정도면 너한테도….”
“내 폰은 내 명의가 아니라서 알아내기 힘들 거예요.”
“선견지면인가!”
“지면 아니고 지명.”
그러는 동안에도 WB래빗 직원들은 오늘 어스래빗 멤버들이 받은 팬레터와 선물을 담은 상자, 앨범 상자를 비롯하여 무대의상과 소품 등을 부지런히 챙겨 날랐다.
현장전이 다가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아, 이거.”
“뭔데요, 이게?”
“아이허니 매니저가 와서 주던데요. 앨범 교환하기로 했다고.”
“아아.”
종이가방 안에는 아이허니의 최신 앨범 9개가 담겨 있었다. 이건우가 건넸을 때처럼 멤버 수보다 하나를 더 챙겨 넣은 듯.
이건우가 종이가방을 건네받았다.
“이미 짐 다 정리해서 번거로울 테니, 이건 제가 챙길게요.”
“…….”
“…아, 왜, 뭐. 그래, 나 원래 아이허니 팬이다! 뭐 잘못 됐어?”
“호 형은 아무 말도 안 했구만. 왜 혼자 난리야.”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가장 뒷좌석에 앉은 한율은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바꿔야겠다고 하자, 모친은 이유도 묻지 않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혹시 모르니까 아예 새로 개통해서 보낼게. 그리고 이상한 사람이 도를 넘는다 싶으면 바로 엄마한테 말하고! 알았지?]
“네.”
-[참, 그런데 혹시 방송국에서 아빠 만났니? 괜히 말 생기면 너한테 피해가니까 섣불리 가서 아는 척 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핸드폰 너머에서 ‘커흠’하는 부친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 듯했다. 한율은 앞에 앉은 멤버들을 살폈다. 피곤한지 셋 다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는 척은 안 하셨어요.”
-[만나긴 만났다는 소리네.]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친 후엔 한율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때 한율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반짝거렸다. 무음모드로 놔둔 핸드폰 액정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오고 있었다.
-[한 번만 답장해주는 게 그렇게 어렵니ㅠㅠ?]
-[나 네 보컬 첫무대도 찾아가서 본 찐팬인데.. 섭섭하다 진짜.]
..-[누나가 좋은 거 잔뜩 보내줄게, 폰번은 바꾸지 마8ㅂ8..]
* * *
“후우….”
후드소녀, 이아름은 WB래빗 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의 어스래빗 스케줄을 노려보며 심호흡을 했다.
일주일에 있는 음악방송은 5개.
화요일은 뮤닷의 <락뮤닷>, 수요일은 MBS K채널의 <로얄K뮤직>, 금요일은 MBS의 <뮤직센터>, 토요일은 KBC의 <뮤직뮤직>, 일요일은 SBC의 .
어스래빗은 다다음 주까지 모든 음방을 돌며 으로 활동할 예정이었다. 그 다음엔 후속곡으로 다시 2주. 중간엔 아이돌 전문 프로그램 녹화도 하나 잡혔다.
‘내일은 SBC 촬영하고, 저녁엔 팬 사인회…!’
명색이 1호 팬이고 데뷔 쇼케이스 예매에 성공한 것까진 좋았는데, 기념비적인 공방 첫 무대 사녹 방청은 떨어지고 말았다. 내일 사녹까지도.
‘만약 이번 앨범 발매기념 팬 사인회 추첨에서도 떨어졌다면… 나도 모르게 폭주했을 지도 몰라.’
그리고 보통 갓 데뷔한 신인은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에게 노출되라고 불특정다수도 볼 수 있는 공개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팬 사인회는 100명 한정 비공개로 진행된다. 장소 역시 당첨자들에게만 개별 공지.
‘간만에 오빠들이랑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히힛….”
띠링. 저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던 그때, 어스래빗 공식 SNS계정에 달았던 질문에 답변이 달렸다.
[율이 오빠가 선물 안 받는다는 건 잘 아는데... 팬싸에서도 선물 가져가면 빠꾸먹을까요;ㅅ;)/???]
ㄴ[이번 팬 사인회에서는 음식 류를 제외하고, 아티스트에게 큰 부담이 가지 않는 선의 선물은 가능합니다.]
이아름은 주먹을 콱 쥐었다.
“예쓰!!”
이아름의 방에는 하얀 솜뭉치 같은 재료가 잔뜩 널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