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427)

* * *

SBC의 는 <뮤직뮤직>처럼 출근길이 없기는 하지만 사녹 시간이 굉장히 일찍 잡혀, 어스래빗은 새벽 1시 30분에 방송국에 출근했다.

숙소로 들어가서 고작 2, 3시간 잤을까.

“어우, 나 눈이 안 떠져.”

“얼굴 팅팅 부었는데 어떻….”

톡톡. 그들의 이른 스케줄에 맞춰, 비슷하게 몇 시간 만에 재출근한 스타일리스트들이 화장수로 듬뿍 적신 화장 솜으로 그들의 피부 결을 정돈했다.

“스스로 하고 있어 봐요.”

“…네엥.”

멤버들은 굳은 몸을 풀기 위해 대기실 안을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조유찬은 일부러 챙겨온 가습기를 틀어놓고, 멤버들이 마실 따뜻한 차를 탔다. 한율도 가볍게 스트레칭한 후 따로 챙겨온 레몬생강차를 마셨다.

멤버들이 차를 마시는 걸 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조유찬이 박수쳤다. 짝짝!

“드라이리허설 가자. 이동!”

무대로 향하는 동안 어스래빗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민낯에 편한 옷차림을 한 보이그룹과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 어색하게 웃으며 묵례 후 지나쳤다.

멤버들과 함께 덩달아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한율은 그들과 한참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어제도 만났던 사람들이구나. 풀썸.’

음방을 뛰면 활동시기가 겹친 가수들과 자주 만나는 경우가 다반사. 그러나 어제와는 달리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 민낯이라 누군지 전혀 못 알아봤다.

‘혹시.’

“형.”

“왜.”

앞서 가던 차남석이 돌아보았다.

“나도 메이크업 전후 차이 커요?”

문득 떠오른 가벼운 궁금증.

차남석은 한 쪽 눈썹을 찡그리면서 한율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브리칭 버전 메이크업은 조금 크지. 하지만 그 외엔 별로? 별 차이 없어.”

“그럼 나는요?”

길우성이 끼어들어 묻자, 차남석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안경 쓰면 비연예인이고.”

“…뭔 뜻이여, 그건.”

길우성이 은근슬쩍 말을 놓았지만, 차남석은 어깨만 으쓱일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함께 데뷔를 준비한지 몇 달. 팀 내에서는 슬슬 동생들이 말을 놓고 있었다. 형들 또한 동생들에게 계속 존댓말을 쓰라며 강요하지 않았다. 이건우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맏형인 유호에게 편히 말을 놓고 있었고.

이제 연상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건 한율과 차남석, 둘 뿐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그때 한 대기실에서 나온 보이그룹이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생글생글 웃는 낯짝으로 환하게.

방송국 스태프들도 돌아다니는 복도.

어스래빗 멤버들도 반가운 얼굴로 퍼스트라인에게 화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제 다친 덴 괜찮으세요?”

퍼스트라인 리더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못 알아낼 것 같지?

“아이돌이 이 거친 연예계 바닥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패시브 스킬 중 하나는 바로 철면피 스킬이다. 우리 어스래빗은 멤버마다 이 스킬 레벨이 1에서부터 만렙인 10까지 상이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만렙에 도달한 자는….”

“쟤 뭐하냐.”

“심심한가 보죠.”

“그만 떠들고 잠이나 자.”

드라이리허설을 마치고 오자 대기실 바닥에는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돗자리가 깔려있었다. 8장의 담요까지 차곡차곡 개켜져서.

사녹 예정시간까지 4시간. 샵 직원들이 오는 건 2시간 후. 그 동안 잠깐이라도 잠을 자라는 뜻이었다.

박가람이 투덜거리며 돗자리 위에 누웠다.

“나 딱딱한 바닥에선 잘 못 자는데.”

멤버들이 각자 담요를 챙기고 자리를 잡자, 지켜보던 조유찬이 소등했다. 캄캄해진 대기실엔 문 밖 복도를 지나는 기척들이 어수선하게 들어왔다.

“연차랑 인지도 쌓이면 넓은 방에 소파도 많은 대기실 쓸 수 있….”

중얼거리던 박가람의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이내 끊겼다.

바닥의 한기가 돗자리를 뚫고 스멀스멀 올라와, 한율은 담요로 몸을 돌돌 감았다.

넓은 침대가 있는 독방을 사용하다가, 2층 침대가 놓인 좁은 숙소. 그 다음엔 대기실 바닥에 돗자리.

수많은 팬들이 환호성을 질러주는 화려한 직업으로 데뷔했지만, 어째 잠자리 환경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비오는 날의 막사와 비교하면 안락한 편이지.’

자다가 암살이나 기습당할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고, 빗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막사에 깔릴 위험도 없다.

한율은 지금보다 굉장히 열악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어스래빗과 함께 달을 보는 꽃, 달맞이꽃, 이브닝 프림로즈(Evening Primrose). 줄여서 ‘프림’.”

“오, 괜찮다.”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에 한율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대기실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체감 상 눈을 감은 지 5분 밖에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2시간하고도 10분이 지났다.

“‘달빛고래’는 어때?”

“운치 있어서 좋은데?”

“‘달나라 고래’ 나왔다. 줄여서 달래.”

“이것도 좋다! 크래 선배님들 팬덤은 달나라 주민, 우리는 달나라 고래.”

“뭔 말만 하면 다 좋대.”

“진짜 다 좋은데 어떡하냐, 그럼. 그런데 이 이름 쓰려면 달나라 주민들한테 허락부터 받아야 될 것 같다.”

“그래야지. 안 해 줄 것 같지만.”

대기실에는 샵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메이크업 박스를 펼치고, 드라이어기를 코드에 꽂고 있었다.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요를 개켰다.

“저기 세면대에서 세수하고 와. 여기 수건.”

“네.”

조유찬에게 받은 수건을 들고 대기실 한쪽에 마련된 건식 세면대에서 세수. 얼굴을 닦은 후엔 붓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화장수로 적신 화장 솜으로 다시 피부 정돈, 차가운 마스크 팩을 붙였다. 그 상태에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신 뒤엔 가볍게 스트레칭.

“오늘 우리가 빨리 온 만큼 팬 분들도 새벽부터 기다리고 계셨다고 하던데.”

“그런 거 생각하면 다들 진짜 대단한 것 같아.”

“그러니까 잘 해.”

“얼른 빨리 돈 벌어서 팬들에게 사비로 역조공을…!”

“몇 시에 오셨는데요?”

눈을 감고 헤어메이크업을 받는 중. 드라이어기와 브러시가 잠깐 얼굴을 떠났을 때 묻자, 뒤에서 옷을 갈아입던 유호가 대답했다.

“새벽 1시부터 줄서고 계셨다더라.”

한율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 10분.

“…….”

조유찬이 나오려는 하품을 삼키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신 팬 분들마다 추우실까봐 담요랑 따뜻한 차 나눠드렸거든. 중간에 인원체크랑 입장번호 배부 받아서, 지금쯤 근처 카페나 PC방 같은 곳에 계시다가 슬슬 오고 계실 걸?”

“좋아, 난 팬덤 명 ‘달나라 고래’에 한 표!”

거울에 비친 길우성이 두 팔을 사선으로 활짝 편 괴상한 포즈로 스쿼트를 하며 외쳤다.

“왜냐하면 짱쎄보이니까!”

그 모습을 보는 한율의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어제 사녹 현장에서 본 [댄싱래빗 우성♡]이란 슬로건도 함께.

그 사람은 대체 길우성의 어딜 보고 팬이 된 걸까. 춤을 잘 추는 아이돌이라면 길우성 외에도 많을 텐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는 하지만, 기회가 되면 직접 한 번 묻고 싶네.’

* * *

오후 3시 무렵, 어스래빗은 SBC 스케줄을 끝낸 뒤 곧장 회사로 돌아갔다.

“남석, 보배, 라이언. 잠깐 사무실로.”

회사로 들어가자마자 조유찬이 세 사람에게 손짓했다. 동갑내기 셋은 의아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조유찬을 따라 2층 계단을 밟았다.

“뭔가 스케줄 제안이 들어왔나 본데?”

“고3들한테만?”

“설마 수능 대박 프로젝트, 이런 프로그램?!”

멤버들은 잡담을 나누면서 지하로 내려갔다.

“진짜 그런 프로그램 출연 제안이면, 나는 보배가 한 시간도 안 돼서 뛰쳐나온다에 백 원 건다.”

“아, 보배 은근 공부 못하더라.”

유호가 가방에서 출입증 카드를 꺼내 남자휴게실 문 리더기에 갖다 댔다.

“건우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삐릭, 덜컹.

“난 대놓고지.”

“자랑이다.”

“오, 아이돌이다!”

문이 열리자 휴게실 안 의자에 편히 앉아 핸드폰을 하던 박현우가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돌님들!”

박가람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배우님!”

“고3 셋은 어디 버려두고 다섯만 와?”

“걔네가 우릴 버리고 2층으로 올라갔어.”

“와, 그런데 무대 메이크업 가까이에서 보니까 진짜 진하다. 저리 가, 화떡!”

“뭣이?!”

두 박 씨의 소란을 뒤로 한 채 한율은 자신의 캐비닛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넣어둔 클렌징워터와 화장 솜을 꺼내 메이크업을 지웠다. 비슷하게 메이크업을 지우던 길우성이 거울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으음. 왜 내가 직접 하면 피부가 발갛게 될까. 샵 분들이나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해줄 땐 괜찮았는데.”

“네가 따로 쓰는 화장품이 너한테 안 맞는 건가 보다. 내 거가 조금 순한 거니까, 이걸로 닦아 봐.”

유호가 자신이 쓰는 클렌징워터를 내밀자 길우성이 냉큼 받았다.

“…오, 진짜 순하다! 형, 이거 얼마짜리예요?”

“3만원?”

“비싸!”

메이크업을 지우고, 샤워를 하며 다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고 나온 후엔 어슬렁어슬렁 연습실로 향했다.

1st EP앨범 [Breaching] 발매 기념 1차 팬 사인회는 8시. 저녁을 먹고 샵에 들르려면 남은 여유시간은 1시간 남짓이었다.

연습실에 오자마자 발라당 드러누운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개인기…, 노래와 춤을 제외한 개인기…….”

박가람은 거울 앞에 바짝 붙어 앉아서 여러 가지 표정을 연습했다.

“뭉크의 절규! …내가 곶아라니, 내가 곶아라니! …호박고구마, 호박고구마, 호박고구마아…!!

이건우도 조금 떨어진 거울 앞에 앉았다. 그러나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아 뭘 하나 하고 살폈더니, 그의 눈썹이 자유자재로 들썩거리며 춤추고 있었다.

“으음… 조금 약한 것 같은데.”

“…….”

“그렇지, 요가다! 나의 유연성을 살려서…!”

벌떡 일어난 길우성이 난데없이 다리 하나를 올려 목 위로 걸쳤다. 한율은 미간을 구기며 말을 내뱉었다.

“팬 앞에서 다리를 쩍 벌리겠다고?”

“……!”

…툭.

길우성이 얌전히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 비틀비틀 연습실을 나가며 중얼거렸다.

“토끼는 어떻게 울지…? 고라니 울음소리라도 연습해야겠다….”

유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개그 욕심 부리지 말라고 팀장님이 그렇게 말했는데….”

“그냥 팬이 보여 달라고 하는 거, 해 달라고 하는 거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이상하거나 이미지 상할 법한 요구는 매니저 형들이 컷한다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개인기를 잘해야 한다는 그 부담감을, 무대에 대한 부담감으로 바꿔서 더 집중하면 좋을 텐데.”

은근히 큰소리로 말하며 유호가 박가람과 이건우를 바라보았다.

입을 쩍 벌린 채 이상한 표정을 짓던 박가람과, 찡그린 눈썹이 과도하게 올라갔던 이건우는 거울을 통해 시선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

“…흠.”

삐릭, 덜컹.

문 틈 사이로 아직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은 차남석이 고개를 내밀었다.

“서한율, 2층 사무실.”

한율은 사무실로 올라가자마자 자연스럽게 매니지먼트 B팀 자리로 향했다. 현장전이 기다렸다는 듯 이동통신사 로고가 새겨진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오늘 낮에 너희 어머니가 한율이 너한테 전해 달라 주시고 가셨대.”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우리 회사 업무 봐주는 로펌에 연락하셨다니까, 내일 핸드폰 잠그지 말고 넘겨줘. 경찰 측에 보여줘야 하니까 중요하거나 사적인 사진이나 연락처, 내역 같은 건 미리 다른 데로 옮기거나 지우고.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새어나갈지 모르거든.”

“네.”

누구 명의로 개통했을까.

한율은 다시 B연습실로 돌아간 뒤에야 소파에 앉아 내용물을 꺼냈다. 핸드폰 케이스 안에 거친 필체로 적힌 쪽지가 담겨 있었다.

[폰 결제는 인심 써서 월 5만원까진 봐준다. ―외삼촌]

‘최은후 명의로군.’

한율은 우선 연락처를 옮기기 위해 원래 가지고 있던 핸드폰 전원을 켰다. 대체 어디에서 번호를 공수해오는지, 어제와는 다른 번호로 또 메시지와 부재 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계속 폰 꺼져있네... 진짜 폰 바꾼 거야ㅜㅜ?]

-[한율이 너 실수하는 거야, 지금. 누나가 못 알아낼 것 같지? ㅎㅅㅎ]

-[한율이 너는 날 못 찾아도 나는 너 찾을 수 있거든>_<)?]

-[오늘 무대도 정말 잘했어^^]

-[이따가 팬싸에서 봐ㅎㅎ]

이 인간이 하는 말을 모두 진실이라 믿진 않는다. <보컬리스트 시즌3> 때부터 봐왔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오늘 팬 사인회에 참석할 거라는 말까지.

하지만 전부 진실이란 가정을 해 본다면…,

‘귀찮네.’

머리를 굴리려던 한율은 뚝 생각을 멈췄다. 며칠 내내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이성보단 감정, 짜증이 슬슬 올라왔다.

왜 정신 나간 사람 하나 때문에 새 핸드폰에다 이것저것 옮기고 설치하는 귀찮은 작업을 해야 하는 건지. 하물며 타인 명의 핸드폰이면, 기본적으로 모바일 쇼핑 결제나 은행 앱, 카드 앱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지갑 없이 핸드폰 하나만 들고 다녀도 되는 이런 세상에.

“…….”

한율은 점점 구겨지는 미간을 손끝으로 꾹 눌러 폈다. 그리고 새 핸드폰을 다시 케이스 안에 고이 집어넣었다.

* * *

차남석과 강보배, 라이언 이 셋이 사무실에 불려갔던 이유는 짐작대로 프로그램 출연 제안 건이었다. 그러나 수능이나 공부 관련 주제는 아니었다.

“SBC 계열 케이블 채널이요?”

“어. <동갑끼리>라는 프로그램인데, 이번에 열아홉 살짜리 아이돌들이 모여서 미성년자로서 마지막 해를 맞이한 그들의 여행 어쩌고 컨셉으로 촬영한다더라.”

“형들 셋 다요?”

첫 팬 사인회 장소로 향하는 길.

어스래빗은 무작위로 차 두 대에 넷씩 나눠 타지만, 한율은 늘 길우성과 같은 차에 탔다. 이번에 같은 차에 탄 차남석과 강보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둘만.”

“팀장님이 우리 셋이서 의논해서 나갈 사람 결정하라 그러셨는데, 라이언은 나가기 싫대서.”

“다른 팀에서는 누가 섭외됐대요?”

“그건 첫 녹화 들어가기 전까지 비밀이라더라. 그런데….”

차남석의 시선이 한율이 들고있는 핸드폰으로 향했다.

“너 폰 안 바꿨냐? 아니면 같은 기종?”

“아아. 폰 안 바꾸려구요. 그렇게 자주 연락이 오는 것도 아니고.”

“신고는?”

“내일 하기로 했어요.”

“큰 기대는 하지 마. 잡아도, 인터넷 같은 곳에서 우연히 번호 알게 됐다, 팬심에 전화랑 메시지 좀 보냈을 뿐이라고 하면 스토킹범죄라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그냥 넘어갈 확률이 높거든. 그러니 일단 연락하지 말라고 답장이라도 보내. 거부의사를 밝혔는데도 계속 연락 오면 조금 더 처벌할 근거가 되니까.”

차창 밖으로 비공개 팬 사인회가 열릴 장소가 보였다.

한율은 손에 든 핸드폰을 앞뒤로 빙글빙글 뒤집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형.”

뛰는 X 위에 나는 X 위에

어스래빗의 첫 팬 사인회는 어스래빗 공식팬클럽 회원을 대상으로, 앨범을 구매하고 안에 찍힌 일련번호로 팬 사인회 응모를 한 사람들 중 100명을 추첨하여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당첨된 사람들에게만 안내된 팬 사인회 장소 입구에서도, 다시 당첨된 일련번호가 찍힌 앨범과 공식팬클럽 회원카드, 신분증으로 본인이 맞는지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아티스트가 직접 찍는 셀카, 포토타임 외 촬영은 금지입니다. 동영상 촬영은 포토타임 때도 안 됩니다. 핸드폰은 진동으로 해주시고, 음식 류나 기타 부적절한 선물은 금지입니다."

“네넵!”

“엽서와 펜은 앞쪽 우측 테이블에 있고, 질문은 멤버 별로 두 개까지 작성 가능하십니다.”

“넵!”

참가자격 확인을 거친 이아름은 힘차게 대답하며 직원이 넘겨준 번호카드를 확인했다. 투명한 비닐 안에 담긴 작은 카드 앞면에는 어스래빗 단체 사진이, 뒷면에는 달빛이 비치는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 일러스트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인쇄된 문구와 번호.

[Earth Rabbit]

[1st EP앨범 [Breaching] 발매기념 팬 사인회]

[32.]

“우와, 우와, 이쁘다…!”

팬 사인회 장소는 객석이 100여 개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아트홀이었다. 무대 위에는 책상과 의자가 길게 비치되어 있었고, 그 뒤로는 어스래빗의 대형 포토현수막이 걸렸다.

이아름은 엽서와 펜을 챙긴 후 ‘32’ 스티커가 부착된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다른 팬들을 보았다. 10대에서 20대 초중반이 많았지만, 간혹 30대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시 다들 오빠들한테 줄 선물을 챙겨왔구나.’

개중엔 명품 브랜드 로고가 찍힌 종이가방을 잔뜩 들고 온 사람도 있었다. 오만한 시선으로 다른 팬들의 모습이나, 가지고 온 선물을 훑어보기까지.

이아름은 고개를 휙 돌렸다.

‘으익, 재수 없어. 오빠들이 명품 선물한다고 다 좋아할 줄 아나?’

그러면서 이아름은 서한율을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은근히 비싼 신발과 가방을 걸치고 있던 그 모습을.

어스래빗이 만들어지기 전, ‘꽃을 단 토끼’ 팬들 사이에서도 서한율이 있는 집 자식인 것 같다란 이야기는 수차례 나왔었다. 몇 백 만 원짜리 명품을 가볍게 걸치는 재벌까진 아니지만, 어느 정도 부유한 집의 자제 같다고.

‘그렇다고 늘 비싼 물건만 고집하지도 않고. …음, 하지만 다른 오빠들은 아직 물질적 유혹에 약한 어린 나이이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네.’

그리 생각하는 본인이 아직 중학생이란 사실은 제쳐놓은 채, 이아름은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아름은 우연히 눈에 들어온 무언가를 발견하곤 무심코 목소리를 흘렸다.

“…어?”

이아름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경호원을 찾았다.

* * *

“……?”

“왜?”

한율이 음료를 마시다 말고 빨대를 잘근 씹은 채 문 쪽을 바라보자, 강보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한율은 입에 문 빨대를 놓고 대답했다.

“무대 쪽이 조금 시끄러운 것 같아서요. 꼭 싸우는 소리 같은데.”

“싸워?”

강보배가 심각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조심스레 대기실 문을 열자 무대 쪽의 소란이 조금 더 크게 들렸다. 잔뜩 흥분한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그녀를 말리는 듯한 남성의 목소리,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실수라고 몇 번을 말해요! 그리고 내가 여기 당첨되려고 앨범을 몇 장이나 산 줄 알아?!”

“가방의 뚫린 구멍에 녹화 모드인 카메라 렌즈가 맞춰져 있던 게 실수입니까, 선생님?”

“아직 애들 안 찍었잖아! 안 찍혔잖아!”

여성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 지, 문을 조금만 열었는데도 대기실 안까지 생생히 들렸다.

“너희, 팬한테 이 따위로 굴래?! 안 뜨고 싶어?! 사진 한 장이라도 더 찍어야 팔릴 거 아냐! 그런데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팬한테 이런 개쪽을 줘?! 내가 다 퍼뜨릴 거야! 어스래빗! 벌써부터 팬한테 좆같이 군다고!”

그 뒤로 악을 쓴 폭언이 이어졌다.

적반하장 식으로 되레 성을 내는 인간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앎에도, 이성과 감정은 따로 노는 법이다. 하물며 아직 사회경험이 부족한 미성년자들임에야.

타악! 유호가 대기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얼굴이 어두워진 멤버들에게 일렀다.

“우리 잘못 아니야. 상처받을 필요 없어.”

“맞아. 너희들 그거 알지?”

이건우도 옆에 있는 박가람과 차남석의 어깨와 등을 토닥거리며 달랬다.

“욕할 거리를 찾고 만들기 위해 일부러 팬인 척 숨어들어서 정보 캐고, 시비 걸고, ‘눈앞의 내가 안티인 줄 모르고 실실 좋아 웃더라’ 하면서 뒤에서 씹어대는 데에 삶의 희열을 느끼는 한심한 변태들도 있다는 거.”

“아는데… 위로는 안 되네요, 형.”

홀로 담담한 한율은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몰카 들켰다고 바로 저렇게 나오는 사람이 진짜 우리 팬일 리 없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써한.”

“……?”

“난 가끔 네 멘탈의 단단함에 놀란다?”

“개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거랑 멘탈의 강도는 다른 문제 아냐?”

“……?!”

“……!”

멤버들이 입을 벌리며 경악한 얼굴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한율과 붙어 다닌 시간이 가장 많았던 차남석까지.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역시 정치인 멘탈….”

“뭐?”

“아냐, 아무 것도.”

잠시 후. 예정된 시간이 되어 대기실을 나왔을 땐, 날이 선 목소리 대신 즐거운 기대로 가득 찬 웅성거림만 들렸다. 그리고 어스래빗 멤버들이 무대 위로 등장하자 웅성거림은 반가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밝은 팬들의 얼굴에선 조금 전 소동의 여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어스래빗 또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써드릴까요?”

“한율이가, 하트하트! 그 다음은 센스껏 부탁해요!”

한율은 앞에 앉은 팬의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엽서에다가 글을 쓰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이자, 머리띠의 토끼귀가 앞으로 흔들렸다.

[한율이가♡♡]

그 다음엔 팬이 미리 적어놓은 질문 두 개에 대답.

[Q1.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엄빠는 안 되나요? ㅎㅎ]

[Q2. 우주최강 대마왕 토끼는 누구?!]

[-수 억 년 동안 떡방아를 찧고 있는 우락부락 근육 달토끼?]

마지막엔 메시지.

[항상 건강하고 즐거운 삶!]

글을 적는 동안에도 팬의 시선은 한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율이 양손잡이였구나아! 손도 크고, 이쁘고. 가까이에서 보니까 피부도 정말 좋다아.”

호의로 가득한 그 눈망울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한율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누나도 예뻐요.”

“히힛, 악수 한 번 해도 돼?”

“네.”

기꺼이 손을 내밀자 팬이 덥석 잡았다.

팬 한 사람당 할애된 시간은 4, 50초 남짓. 그러나 한 사람을 맞이할 때마다 멤버들의 머리나 손목, 옷에는 무언가가 늘어났다. 책상 위의 팬레터도 차곡차곡 쌓였다.

한율의 경우엔 선물 받아 착용했던 머리띠만 벌써 6개째.

“우성아, 안녀엉~.”

앞에 앉았던 팬이 한율의 좌측에 앉아있는 길우성의 앞자리로 이동. 순서에 따라 우측에 있던 강보배에게 무언가를 씌워주었던 팬이 한율의 앞으로 왔다.

“율이 옵빠!”

“아.”

한율은 낯익은 얼굴을 보곤 환하게 웃어주었다.

“오랜만이네?”

“헤헷.”

웬일로 후드를 쓰지 않은 후드소녀, 이아름이 한율에게 머리띠를 내밀었다.

“짠! 어제 열심히 만들었어욥!”

“정말? 직접?”

이아름이 만든 머리띠에는 토끼 귀가 아니라, 아예 토끼 두 마리가 앉아있었다. 솜을 넣어 빵빵한 펠트 토끼인형은 한 마리는 당근을 마이크처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당근 끝을 먹는 모양새.

“정말 잘 만들었다. 이런 쪽으로 재능 있는 것 같은데?”

“히히히히히.”

한율은 본래 쓰고 있던 걸 벗고 이아름이 준 머리띠를 썼다. 이아름이 냉큼 카메라 앱을 켠 핸드폰을 내밀었다. 한율은 자연스레 셀카를 찍은 후 돌려주었다.

“정말 고마워. 밥은 먹었어?”

“응, 바로 옆에 지인짜 맛있는 국수가게가 있대서, 거기에서 먹고 왔어요. 오빠, 혹시 제주도 내려갔을 때 고기국수 먹어봤어요? 아, ‘아름아름’ 이라고 써주고 멘트는 알아서!”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껴서인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엽서를 내민다. 한율은 그 속도에 맞춰주면서도 입가에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름아름!!]

[Q1. 1호팬☆에 대한 솔직한 감상 한 줄!]

[-늘 고마워^^]

[Q2.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요? (๑◕︵◕๑)]

[-자전거로 질주!]

[늘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니, 아쉽게도 먹어보진 못했어.”

“괜찮아요! 나도 본토에선 못 먹어봤으니까 맛이 어떤지 비교해서 들려줄 수가 없넹?”

그러면서 이아름은 팬레터와 함께 또 다른 선물도 꺼냈다.

“이건 오빠네 고양이들 선물, 이건 목 베개, 이건 수면안대!”

“왜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용돈 아껴야지.”

“오빠가 평소에 선물을 안 받으니까 이 기회에 한꺼번에 푸는 거잖아욥.”

“하하.”

시작 전에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팬 사인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질문지에 답과 원하는 멘트를 적어주고, 악수를 하거나 간단한 농담도 주고받고. 팬들은 이아름처럼 친근하게 할 말 다 하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퍽 쑥스러워 하면서 시선을 마주치키는커녕 말없이 선물만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일대일 사인 시간이 끝난 후 무대엔 책상과 의자, 선물을 담은 상자가 모두 치워졌다. 객석을 채운 팬들의 머리 위 조명이 어둑해졌다.

“저희 데뷔 앨범 [Breaching] 발매 기념 첫! 팬 사인회에 와주신 여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기린 뿔이 달린 머리띠에, 길쭉한 당근 베개를 안은 유호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손목에 채워진 여러 종류의 팔찌가 조명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어깨에는 [지구토끼단 리더]라고 크게 새겨진 에코백까지 멨다.

유호뿐만이 아니라 멤버들 모두 팬들이 준 선물을 몸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아 우스꽝스럽고도 편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저희가, 소소하지만, 여러분을 위해 미니 공연을 준비했는데요. 아! 지금부터 플래시를 켜지 않은 사진 촬영은 가능합니다! 동영상은 안 돼요!”

꺄아아아! 팬들이 즐거운 함성을 지르며 핸드폰 혹은 거대한 카메라를 꺼냈다.

“여러분 이번 팬 사인회 안내받으셨을 때, 보고 싶은 무대 설문 메시지도 함께 나갔다고….”

누군가 크게 외쳤다.

월흐은!!

그에 질세라 누군가도 외쳤다.

브리치잉!!

박가람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의기소침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세 곡은 싫으신가봐….”

아니야악!!

화를 내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곤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팬의 모습에, 무대 위와 객석에 잔잔한 웃음이 지나갔다.

곧 스피커에서 <월흔> Inst가 흘러 나왔다.

첫 파트를 맡은 한율의 곧고 깨끗한 목소리가 작은 홀에 울려 퍼졌다. 누가 봐도 이곳을 찾아와 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한 얼굴로, 한율은 노래를 불렀다.

[희망에 취해 예뻤던 달이 이젠 미워.]

한율의 눈이 푸른색 조명으로 물들었다. 그 시선은 정확히—, 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 팬을 향했다.

[아름답다 속이고 웃어, 돌아봐줄 거라 웃어.]

감기에 걸린 것처럼 잔뜩 쉬고 작은 목소리로, ‘팬이에요’라고 했던 사람.

한율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미소 지었다.

[이제 그만 맞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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