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427)

* * *

“씨발, 얼굴 팔려고 나온 것들이.”

쾅. 불과 몇 시간 전, 어스래빗 팬 사인회에서 시작도 전부터 몰카가 들통 나 쫓겨난 김진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세게 닫았다.

“니넨 사람 잘못 건드렸어. 팬을 떠받들어 모셔야 할 신인 듣보가 팬을 내쫓아?”

그러면서 김진아는 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올린 커뮤니티 게시글을 확인했다.

[덕질 5년 차에 팬ㅈ같이 대하는 아이돌 처음 겪음.]

[이제 막 데뷔한 듣보라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ㅇㅅㄹㅂ이라고 애들 와꾸 이쁘장해서 보자마자 픽했거든? 이미 연기력도 괜찮다는 애 둘씩이나 있고 해서 롱런도 할 것 같고.

그런데 첫 팬싸 당첨돼서 좋아라 갔더니ㅋㅋㅋㅋㅋㅋㅋ

인증샷으로 팬싸 건물 사진 찍었던 카메라 전원 안 끈 거 보고 경호원이 뭐라 하는 거임ㅋ 꼭 사람을 몰카범 취급하면서!!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ㅈㄴ개쪽주고...ㅠㅠ

나 진짜 돌덕질 5년 차에 이런 일 처음 겪고 당황해서 일단 나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건 진짜 아닌 것 가틈.

내가 카메라 전원 안 끈 건 실수인 거 ㅆㅇㅈ. 그런데 내가 그 팬싸 가려고 앨범 5장이나 샀거든??? 솔까 비공 팬싸라도 팬들이 좋아서 찍는 거니까 아량 넓게 봐주는 게 보통인데 시작도 전부터 전원 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쫓겨난 거임ㅋ;

와나... 어떻게 팬을 몰카범 취급하냐 진짜

차라리 진짜 찍었으면 억울하지도 않겠다..]

새로 고침을 누르니 댓글이 5개나 달렸다.

김진아는 입가를 올리면서 댓글을 확인했다.

-떠비 일처리 진짜 융통성 없게 하긴 함ㅇㅇ

-잘 되라는 훈수도 악플로 치부해서 고소장 날리는 곳임ㅋㅋ

-무슨 팬싸를 어떻게 은밀하게 하려고 하기에 시작도 전부터 저러냐ㅋㅋㅋ 국가기밀이라도 발설하나?

-인증 샷을 구멍 뚫은 가방 속 몰카로 찍냐, 넌?

-ㅅㅂㄴ이 어디에서 약을 팔아.

“……어?”

댓글을 훑으며 올라갔던 그녀의 입가가 부들 떨렸다.

-ㄱhㄴ아, 목록 새로 고침 해 봐. 내가 네 ㄴ이 한 짓거리 올려놨으니까.

타닥. 김진아는 다급히 게시글 목록을 갱신했다.

[87201번 글 주작 증거]

해당 게시글에는, 김진아가 악을 쓰면서 경호원과 WB래빗 직원, 어스래빗을 향해 폭언을 퍼붓는 영상이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작성자의 메시지도 함께.

[한 번만 더 멀쩡한 애들 ㅂㅅ만들려고 개수작부리면 손모가지 분질러 버린다.]

바쁠 때가 좋은 거야

아무 스케줄도 없는 월요일. 미성년자 멤버들은 교복을 걸치고 학교 방향에 따라 조유찬과 현장전의 차에 올랐다.

조유찬이 한율의 말을 듣고 놀라 되물었다.

“신고를 나중으로 미루겠다고? 왜?”

“어떻게 번호를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자꾸 이렇게 연락하면 불편하다, 신고하겠다고 그랬더니 그 이후로 연락이 뚝 끊겨서요. 아직 하루 밖에 안 지났지만, 조금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으음…, 그래도 번호 여러 개 가지고 집요하게 연락했던 사람인데. 아무튼 알았어. 대표님한테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한율이 넌 부모님한테 말씀드려. 나중에라도 다시 연락 오면 그땐 꼭 말하고.”

“네.”

어제 팬 사인회가 끝난 건 밤 10시 즈음. 늦은 시간이라 혼자 빠져나갈 핑계거리가 마땅치 않고, 또 새벽에 나가려니 피곤해서 일단 놔두었는데, 여태 잠잠하다.

‘어제 시선을 너무 맞췄나?’

한율이 유독 저를 쳐다보는 것에서 이미 다 들켰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느껴 자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평일이니 본인 나름대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중일지도.

“아, 그리고 너희들.”

조유찬이 룸미러를 통해 한율과 차남석, 길우성을 보았다.

한율은 입을 헤 벌린 채 자는 길우성의 다리를 툭 차서 깨웠다. 창 밖을 보며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던 차남석이 고개를 돌렸다.

“학교 가서 만약에 애들이 아는 사람 부탁이라고 앨범이나 포카 들고 와서 사인해 달라 그러면 예쁘게 잘 말해서 거절해. 알았지? 그런 거 가볍게 해주다간, 너희 팬 사인회 오려고 앨범 여러 장 사면서 노력한 팬 분들 무시하는 거라고 나중에 말 나올 수 있거든. 이제 너희 진짜 연예인이고 아이돌이다?”

“네에.”

“행동거지 조심하고, 말투도 조심하고! 특히 학교에서 일 얘기나 방송국에서 있었던 얘기, 다른 가수들 얘기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네에.”

“너희 학교에도 이미 데뷔한 애들도 있고 준비 중인 애들도 많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늘 사진 찍힐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조유찬의 잔소리는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야 중단되었다.

“데뷔 축하한다!”

“데뷔 축하해!”

교실로 들어가자 동급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축하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감사함다!”

반쯤 감긴 눈으로 감사를 외친 길우성은 비실비실 제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 가방에서 팬에게 선물 받은 책상 베개를 꺼내더니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피곤한가 보다.”

작년에 보이그룹으로 데뷔한 동급생, 황성연이 다가와 말했다.

“하긴, 음방 뛰는 게 피곤하긴 하지.”

“그런 것도 있고, 어제 스케줄 끝나고 밤에 또 연습 있었거든.”

“떠비도 빡세게 굴리는 구나. 이번 앨범 활동 언제까지 해?”

“한 달 정도?”

“크, 한 달 동안은 진짜 정신없을 거다.”

평소엔 필요한 대화만 주고받던 건조한 사이였지만, 황성연은 아예 한율의 옆 책상에 걸터앉았다.

“자다 깨서 리허설하고, 자다 깨서 방송하고, 그 와중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한테 인사하고, 팬들 만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그러다 보면 나중엔 꿈도 엄청 리얼하게 꾼다? 그래도….”

황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바쁠 때가 좋은 거야.”

“왜. 너흰 컴백 미뤄졌어?”

자려는 줄 알았던 길우성이 부스스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컴백은커녕 다음 앨범 얘기도 없다. 아, 너네 수요일에 <로얄K뮤직>도 나가?”

MBS 계열 케이블 채널에서 수요일 저녁 6시에 방송되는 <로얄K뮤직>.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성연이 황급히 주위를 살피더니 상체를 슬며시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거기 스튜디오에 귀신 나온다?”

“귀신 없는 방송국도 있어?”

연습생 생활을 하다보면 바깥으론 잘 알려지지 않는 연예계 뒷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어느 방송국의 어느 스튜디오에 어떤 귀신이 자주 출몰하는지에 관한 소문 역시.

그러나 심드렁한 길우성의 반응에도 황성연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따끈따끈 신상 귀신이야. 최초 목격담이 바로 작년이거든.”

* * *

외부 스케줄은 없지만,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율은 등교했을 때처럼 길우성, 차남석과 함께 조유찬의 차를 타고 회사로 들어갔다. 그러고 2층 회의실로 직행.

회의실의 화이트보드에는 큼지막하게 회의 주제가 적혀 있었다.

[어스래빗 그린라이브 콘텐츠 회의]

어스래빗의 웹 예능제작을 맡게 된 영상콘텐츠 제작업체 관계자들과, WB래빗 측 기획마케팅 직원들이 참여한 본 회의는 멤버들이 학교 혹은 회사 작업실에 처박혀 있을 때 모두 끝나, 사실상 수렴된 의견과 결정된 플랜 등을 멤버들에게 전달하는 자리였다.

더불어 앞으로 스케줄에 관한 이야기도.

“…남석이랑 보배가 촬영하게 될 <동갑끼리> 컨셉과 겹치기도 하고, 이번 앨범 활동이 끝나면 바로 일본에 낼 앨범 준비 작업에 들어가야 해서, 멤버들끼리 여행가는 콘텐츠 제작은 여름휴가가 다가오기 직전,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으로 미뤘습니다. 그리고 이건 라방에 내보낼 짤막 콘텐츠 아이디어인데….”

이건우가 심각한 얼굴로 화이트보드에 적힌 걸 읽었다.

“어스래빗의… 깡총깡총 영어 연극…?”

“다들 알다시피 우리 어스래빗 멤버들 중에는 워싱턴 출신 라이언이 있고, 라이언 못지않게 영어가 유창한 한율이도 있습니다. 유호도 어릴 적에 잠깐 영국에서 살았던 이력이 있고.”

“아니, 아니, 팬 분들한테 영어 강의를 하자는 거예요?”

“‘연극’이란 단어에 주목해주십시오. 우리는 팬 분들이 읽어주기를 요청한 이야기나 사연을 연극처럼 각색하여, 맛깔나게 들려주는 겁니다. 편당 분량은 부담이 가지 않도록 5분 남짓. 잘만하면 영어권 국가에 사는 팬 분들에게도 좋게 통하겠죠?”

유호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럼 영어 연극은 저희 셋만 하는 거예요?”

“돌아가면서 해야죠. 멤버의 어설픈 발음을 그때그때 친절하게 교정해주는 장면까지 나가도록.”

“…어우으.”

그 외에 다른 컨텐츠에 대한 설명이 한참 이어진 후에는 스케줄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번 주 일요일, 앨범 발매기념 2차 팬 사인회가 부산에서 열리는 거 다들 알고 있죠? 미성년 멤버들은 팬 사인회 일정이 끝나면 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하지만, 성인 멤버들은 그곳에서 하룻밤 묵은 후 아침에 부산시내로 나가….”

2층 회의실을 나온 후엔 곧바로 저녁을 먹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연습실. 수백 번이고 연습했던 타이틀곡 무대를 연습하고, 팬 사인회에서 할 미니 공연까지 연습했다.

그러나 내일부터 다시 뮤닷의 <락뮤닷>을 시작으로 일요일까지 음방 순회를 돌아야 하는 터라, 연습은 10시에 끝. 멤버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박가람이 소파에 널브러졌다.

“으아…, 데뷔 겨우 사흘 찬데 일정 진짜 빡세게 느껴지네….”

“그래도 이렇게 바쁠 때가 좋은 거야.”

한율은 핸드폰을 확인하며 발코니로 향했다. 멋대로 연락해오던 사생스토커는 오늘 하루도 잠잠했다.

드륵. 발코니로 가서 창을 활짝 연 한율의 눈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잠깐 눈을 감고 집중. 그녀에게 심은 추적마법의 신호가 깨끗하게 잡혔다. 낮, 잠깐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확인했을 때와 위치 변동이 없다.

‘백순가? 아니면 자택 근무 프리랜서?’

본래의 어둑한 색으로 돌아온 눈을 뜨며, 한율은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오는 창을 닫았다.

‘어쨌든 오늘 하루 잠잠했고, 피곤하기도 하니까 일단 두자.’

그러나 다음 날.

우웅.

-[어제는 하루 종일 스케줄 오프라서 일부러 연락 안 했오. 우리 연예인도 휴일엔 편히 쉬어야 하니까( ´╹ᗜ╹`*)ㅎ]

“…….”

하루 걸러서 온 사생팬의 메시지. 분명히 무섭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원래 친한 사이였던 것처럼 유들유들하게 딴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이런 애는 어떻게 혼내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한율이 사생팬의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였다.

아래로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아, 그저께 팬싸에서 몰카 찍으려다 걸려서 쫓겨난 냔은 내가 잘 처리했어^^]

“……?”

-[알고 보니 신인 남돌만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갑질하는 상습범이더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한율은 사실 확인을 위해 조수석에 앉은 조유찬을 부르려다, 열었던 입술을 도로 닫았다. 이 사생팬은 팬 사인회 도중에 자리를 뜬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끝까지 남아서 조용히 박수를 치고, 입가만 빙긋 올린 채 웃기만 했다.

‘소란을 피운 사람을 원래 알고 있었나? 아니면 허언?’

-[앞으로 그런 냔들은 누나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우리 한율이는 걱정하지 말고, 오늘도 홧팅! :D]

한율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

[멋대로 제 연락처를 알아내고, 번호를 바꿔가면서 연락하시는 거 정말 불쾌하고 무섭습니다. 한 번만 더 전화나 메시지를 보내면 그땐 바로 법적 대응하겠습니다.]

답변은 오지 않았다.

오늘 어스래빗이 출연할 음악방송은,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 뮤닷의 <락뮤닷>. <락뮤닷> 방송이 진행되는 홀은 예전, <보컬리스트 시즌3>의 본선무대이자 공개녹화가 진행된 곳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오네, 여기.”

작년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내부를 둘러보며 차남석이 감회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보컬 첫 회랑 예선 무대로 썼던 스튜디오는 지금 다 해체되고 다른 프로그램 녹화장으로 쓰인다던데….”

“그러고 보니 그거 시즌4는 안 한 대요? 소식이 없네?”

“보컬 PD님 중간에 새 프로그램 하나 하신 것 같긴 한데, 나도 잘은 모르겠다.”

대기실은 거대한 공간에 아티스트마다 사용할 공간이 칸막이로 나눠진 곳이었다.

어스래빗은 같은 대기실을 사용하게 된 다른 선배 가수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돌아다녔다. 처음 만나는 가수들에게는 앨범도 선물하며. 그런 후에야 [락뮤닷/어스래빗]이란 종이가 부착된 분류 공간으로 들어갔다.

‘좁아.’

거대하고 환한 거울에 멤버들을 비롯해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 등, 사람들의 모습이 한 눈에 다 들어오자 더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거울 앞에 놓인 의자도 세 개 뿐.

박가람이 멋쩍게 웃었다.

“와…, 음…, 락뮤닷 대기실이 이렇구나아…. 하하.”

“사실 이게 보통이죠. MBS 제외하곤 원래 독실 잘 안 주잖아요. 이번 주에 다시 KBC랑 SBC 가면 이런 대기실일 걸요?”

조유찬이 한 쪽 구석에다가 돗자리를 깔았다.

“옷은 다 여기에 둬. 지갑이랑 핸드폰, 사과패드는 분실위험 있으니까 다 장전 씨한테 맡기고.”

대기실 환경은 썩 좋지 않았지만, <락뮤닷> 측은 오늘 어스래빗에게 앞에 30초가량의 Inst를 더한 데뷔 스페셜 무대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더 주었다. 여기에, 한율과 차남석에게 특별히 MC석에 서서 짤막하게 인사하고, 다음 무대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까지.

조유찬이 스태프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보컬리스트 시즌3>가 당시 동시간대에 방영된 다른 프로그램과 비교하면 성적이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같은 채널, 비슷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화제를 끌어주었던 출연자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했다. 주 타깃 시청자도 비슷하고.

“리허설 끝난 후엔 한율이랑 남석이는 스태프 따라 MC들이랑 만나서 잠깐 연습하고 오자.”

<락뮤닷> MC가 할 질문에 대한 답과 소개 멘트는 사전에 작성하여 넘긴 상태. 외투를 벗고 대신 리허설 조끼를 걸치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형 진짜 어이없는 형이네.”

그때 핸드폰을 맡기기 전, 잠깐 들어온 연락을 살피던 박가람이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왜요, 형?”

“기억 나? 설날에 나더러 데뷔는 개뿔, 군대나 가라고 했던 사촌 형 있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오늘 여기 ‘히아신스’ 선배님들 나오니까 나더러 사인 좀 받아달란다. 와, 어이가 없어서 진짜.”

길우성이 조용히 공감하며 화냈다.

“데뷔 일주일도 안 된 신인이 어디 감히!”

“내 말이! …어? 화낼 포인트는 이 부분이 아닌데?”

“하뉼.”

라이언이 슬그머니 한율에게 다가왔다. 칸막이 너머에서 리허설을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네.”

“이따가 MC 만나?”

“네.”

“찬형, 착해.”

“……?”

한율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가 아 하며 되물었다.

“원카운트 찬형 선배님이요?”

<락뮤닷> MC이자 보이그룹 원카운터의 멤버인 찬형은, 예전에 라이언이 있었던 아림 엔터 소속이었다. 데뷔한 지는 아직 5개월도 안 되었지만, 3대 기획사 출신인데다 외모도 출중하고 센스가 좋아 데뷔하기도 전부터 팬이 많았고 지금도 인지도가 상승 중인 인물.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영어로 말했다.

[혹시 나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땐 내가 많이 미안했다고 전해줘. 직접 따로 만나기는 힘들 것 같아서….]

“네, 알겠어요.”

걔가 스팸 주인이야

“라이언이 뭐라고 한 거야? 그놈 입에서 찬형 이름이 나온 것 같았는데.”

드라이리허설을 마치고 멤버들과 떨어져 MC 대기실로 가는 길. 차남석에게 라이언이 한 말을 고스란히 옮겨 대답해주자, 차남석이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스팸 주인이야.”

“아.”

“거기에서 나오기 전에 다 돌려주고 사과했다 듣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만나 제대로 다시 사과하는 게 나중을 위해 좋을 텐데.”

“걱정하는 거예요?”

차남석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새…, 그놈 말고 우리 팀을 걱정하는 거지. 아무리 인간극장 찍을 만한 사연이라도, 제대로 알려지기 전까진 쉬쉬하며 떠도는 이상한 소문으로 변질되잖아. 그럼 괜히 옆에 있는 우리한테까지 불똥 튈 수 있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와중에도, 차남석과 한율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입니다.”

<락뮤닷>의 MC는 두 명. 다른 한 명은 또 다른 대형기획사인 스엔 엔터 소속 보이그룹 ‘스카이러너’의 멤버 ‘용맹’이었다.

MC 대기실에 갔을 때 두 사람은 출근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지만, 그들은 반갑게 한율과 차남석을 맞아주었다.

네 사람은 스태프가 건넨 큐카드를 보면서 생방송 중에 할 소개와 인사 멘트를 연습했다. 주변에 두 사람의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가 돌아다녀도 아랑곳없이,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연습은 서너 번 만에 끝났다.

“이만하면 된 것 같네요.”

“역시 방송 경험도 있고 연기도 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어색함이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무대에서 뵐게요.”

찬형과 용맹이 예의바르게 머리를 숙이자 한율도 차남석과 함께 고개를 꾸벅였다.

“네, 이따가 뵙겠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MC 대기실에서 퇴장.

“…라이언 얘기는 안 나왔네요.”

“꺼낼 분위기도 아니었잖아. 다른 사람들도 많았고.”

* * *

<락뮤닷>의 강정진PD는 아이돌이 라인업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프로그램 성격과는 달리, 상당히 무뚝뚝하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실제로, 월드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최정상 걸그룹이 컴백해서 인사하러 와도, ‘네, 수고하십시오’ 한 마디 대답만 들려줄 정도.

그의 이런 태도는 다른 직원들을 대할 때도 한결 같았다.

“PD님, 다음 주에 정말 괜찮을까요?”

“뭐가요?”

<락뮤닷>팀으로 온 지 이제 겨우 두 달 차인 조연출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 주는 서한율이랑 차남석을 스페셜로 MC석에 세워서 인사하게 하고, 데뷔 스페셜 무대. 다음 주는 블루액션의 안세현이랑 은강 세우고 걔네도 데뷔 스페셜 무대를 하는데…. 보컬에서 준우승한 하승헌과 이재가 속한 콩콩의 ACCOM은 데뷔 타이틀곡 하나만 부르고 그냥 내려가잖아요. 이러면 같은 보컬 출신인데 왜 차별하냐란 말이….”

“준태 씨.”

“네?”

강정진PD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제가 왜 어린애들한테 인사 받을 때 무뚝뚝하게 대하는지 아세요?”

모니터에는 본방이 시작되기 전, MC석에 서서 마지막으로 멘트 연습을 하는 두 MC와 어스래빗의 차남석과 서한율이 나오고 있었다. 워낙 곱상한 애들을 나란히 넷이나 세워두니 제법 그림이 되었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강정진PD가 웃었다.

“애들이란 게 그래요. 뒤로는 그 사람의 주제에 따라, 오가는 성의에 따라 더 큰 차별작업이 벌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평등엔 만족해. …그래, 굉장히 인기 있는 사람한테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하는 사람인데, 단순히 감정 따라 차별할 리 없잖아? 이러고 차별당한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아 알아서 납득하더라고.”

“…….”

“그런 겁니다.”

일그러진 미소가 드러났던 감정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냉정히 말하면 ACCOM이 어스래빗과 비슷한 대우를 바라는 건 욕심 아닙니까? 보컬 끝난 이후에도 여기저기 간간이 얼굴을 내비치면서 활동한 이 둘과 다르게, 그쪽은 잠잠했잖아요.”

‘그럼 블루액션은? 조용한 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조연출은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간신히 삼켰다. 그러나 이내 혼자 납득했다.

‘될 만한’ 신인을 찍어놓고 그 그룹이 커가는 걸 곁에서 지켜보고 싶어 팬이 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그리고 블루액션은 블블을 성공적으로 키운 고동 엔터가 내놓는 신인 보이그룹.

선배인 블블이 커다란 스캔들이나 자잘한 사고도 치는 일 없이 컸으니, 후발주자인 그들도 소속사와 선배그룹의 지원을 바탕으로 무난하게 성장할 거라 믿고 미리 팬으로 붙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 블루액션의 그린라이브 팔로우 수나 앨범 사전예약판매 수는 어스래빗보다 조금 더 많았다.

‘여기에 뒤로 오간 성의…?’

조연출은 작년, <보컬리스트 시즌3>팀 스태프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떠돌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김PD님이 고동 애들 티나지 않게 은근히 띄워주라고 하더라. 자막도 조금 더 신경 쓰라 그러고.』

『거기 실장이랑 자주 통화한다던데?』

조연출은 조심스럽게 강PD를 살폈다.

‘설마 강PD님도?’

* * *

[안녕하십니까, 꽃을 단 토끼! …가 아니라.]

생방송으로 방영되는 뮤닷의 <락뮤닷> 스튜디오 MC석. 어스래빗의 차남석이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아 둥근 원을 만들며 선창했다.

[어스!]

이어서 한율.

[래빗!]

[인사드립니다. 차남석!]

[서한율입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이 해사하게 웃자, 옆으로 살짝 물러나서 지켜보던 두 MC가 와 하며 두 사람 곁에 나란히 섰다.

[지인짜 깜짝 놀랐어요. 작년 <보컬리스트 시즌3>에 나왔을 때에도 정말 데뷔한 아이돌못지 않았던 두 분이셨는데, 이렇게 멋있게 성장해서 데뷔해 돌아오셨다는 게!]

[뮤닷에는 얼마 만에 오신 거죠?]

[거의 8개월 만입니다.]

“우리 멤버들이지만, 참 잘한다.”

실제 방송으로 나가는 모니터를 보면서 이건우가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어스래빗은 이번 무대 다음 순서라, 무대 뒤쪽에서 대기 중이었다.

“남석이랑 한율인 작년에 보컬 나갔을 때부터 잘했잖아. 한 번도 긴장하거나 실수하는 일이 없는 거 보면, 둘 다 완전히 무대 체질이라니까?”

이번 무대에 대한 소개 멘트가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곧 서한율과 차남석이 무대 뒤쪽에 도착했다. 기다리던 스태프들이 달라붙어 두 사람에게 인이어와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채우고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두 사람 다 잘했어.”

“어, 화면도 잘 받더라.”

멤버들의 칭찬에 차남석은 말없이 씨익 웃었다.

마침내 앞 가수의 무대가 끝나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일제히 인이어와 마이크를 체크했다. 이번 방송도 앞서 다른 음방에서처럼 사녹 영상이 나갈 예정이지만, 그렇다고 생방 무대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 현장에는 다른 가수들의 팬이 많으므로.

내 가수의 실수는 귀엽지만 다른 가수의 실수는 연습 부족, 노오력 부족, 주제와 분수도 모르는 무성의한 태도이자 흠. 조금이라도 미흡하게 보이면 먹잇감을 잡은 하이에나들처럼 두고두고 씹고 뜯을 터다.

스태프가 신호했다.

“어스래빗 올라갈게요.”

오늘 어스래빗의 무대 순서는 5번째. 비교적 앞이었기에, 무대를 끝내고 내려오자 1위 곡 발표시간에 올라가기 전까지 대략 1시간이 비었다.

대기실로 돌아온 멤버들은 의자나 돗자리가 깔린 바닥에 앉았다. 아직 메이크업을 지워서도 안 되고, 의상을 갈아입자니 나중에 또 갈아입는 게 번거로워서 그대로.

“뭐 하지.”

“뭐 하냐.”

“셀카나 찍읍시다.”

찰칵. 다른 선배 가수들에게도 진작 인사를 돌고 온 터라 할 일이 없었다. 강보배는 현장전을 찾았다.

“형, 저 가방 주세요. 숙제해야 해서.”

“여기 의자에 앉아서 해.”

의자에 앉아있던 유호가 자리를 비켜주었고, 강보배는 널려있는 헤어메이크업 도구를 한쪽으로 옮긴 후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곧 그 옆에 라이언도 나란히 앉아 챙겨 온 교과서와 노트를 펼쳤다. 차남석은 구석자리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사과패드로 영어 강의를 들었다.

찰칵.

그 모습을 박가람이 찍었다.

“학업에 열중하는 고3 아이돌.”

“잘 나왔네. 그라에 올릴 거야?”

사진을 확인한 조유찬이 묻자 박가람이 반문했다.

“그래도 돼요?”

“어, 이 정도면 잘 나온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방송 중이니까, 나중에 끝나고 올리면 되겠다.”

한율도 현장전에게 맡겨 놓았던 핸드폰을 켰다.

모친이 두 고양이의 중성화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났다는 메시지와 곤히 잠든 고양이들의 사진을 보냈다. 방송 잘 봤다는 말도 함께.

그 외엔 소소한 광고 메시지 뿐, 사생스토커에게서 들어온 연락은 없었다.

두 번째 경고가 잘 먹혔나?

그때 유호가 조유찬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형 이거 봤어요? 팬 분이 제보해주신 건데….”

조유찬이 액정을 슥슥 밀며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봤지. 너희랑 관련된 거, 너희가 언급되는 커뮤나 카페 전부 살펴보는데.”

“뭔데?”

이건우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유호가 대답했다.

“그저께 팬싸 때 조금 소란스러웠었잖아. 그때 쫓겨난 분이 억울하다고 한 커뮤에 하소연했는데, 누가 그때 당시 현장을 찍었던 영상을 올렸어.”

그 소리를 듣고 다른 멤버들도 다가가 함께 유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한율도 살며시 끼었다.

[ㅇㅅㄹㅂ 팬싸 진상녀 사건 진상]

[1. 촬영금지 비공 팬싸에 진상녀가 카메라 켜고 들어감.

2. 쫓겨남.

3. 몰카범 취급당하면서 쫓겨났다고 억울하다 징징거림.

4. 실제 진상녀 지랄발광 영상 뜸.

5. 사실은 그냥 카메라가 아니라, 구멍 뚫은 가방 속 몰카였음.]

게시글에는 링크주소 세 개도 첨부되어 있었다.

이하, 댓글.

-첫 번째 링크 주소는 삭제된 거라고 뜨네. 진상ㄴ이 삭튀함?

ㄴㅇㅇ 그런데 아카이브에 박제됨. 그게 세 번째 링ㅋ

-몰카범을 몰카 증거영상으로 보내버리넼ㅋㅋㅋㅋ꼴조탘ㅋㅋㅋ

-가방에 구멍 뚫어서 몰카찍으려고 해놓고 팬한테 ㅈ같이 대하지 말라고ㅋㅋㅋ 처돌앗나ㅁㅊㄴ이

-저러면서 가수 쪽이 개쪽줬다고 억울하다고 한 거임??? ㅈㄴ한심하다 왜 저러고 사냐ㅉㅉ

-증거 영상도 몰카라 찝찝하기는 한데, 저 영상 안 찍었으면 ㅇㅅㄹㅂ만 욕처먹었을 거 아님?? 팬들이 암만 아니라고 실드쳐도 타팬들은 응빌미를준니네오빠들잘못 ㅇㅈㄹ하면서 씹어댔을 테니까

-근데 민폐녀 얼굴, 아는 사람은 알아볼 정도로 약간만 흐릿하고, 다른 사람은 확실하게 모자이크 처리해놓은 거 보니까 뭔가 전문가의 향기가 솔솔 느껴진다

-나 이ㄴ 누군지 알 것 같음. ㅅㅌㅁㅅ 데뷔 초 때 ㅈㅎ 얼굴에 카메라 들이대려다가 친 ㄴ임. 그 후로 애들 몰카샷으로 이상한 물건 만들어서 뒤에서 팔아먹다 걸려서 블락당한 ㄴ

ㄴ이상한 물건???

ㄴ귀 썩음. 묻지 말고 듣지도 마.

“어…….”

“으음….”

사람들은 쌤통이다 하며 비웃고 있었지만, 어스래빗 멤버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아꼈다. 솔직한 감상을 내뱉기엔 장소가 너무 안 좋았다. 칸막이 너머에 누가 있을 줄 알고.

그리고,

“증거 영상을 올린 사람도 몰카를 찍고 있었다는 소리네요. 구도가 딱 그런 위치 같은데.”

한율의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한율은 오늘 아침에 왔던 사생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그저께 팬싸에서 몰카 찍으려다 걸려서 쫓겨난 냔은 내가 잘 처리했어^^]

무슨 소린가 했는데, 이 얘기였던 모양이다.

한율은 유호에게 말했다.

“형, 이거 제 톡으로 링크 좀 보내주세요.”

음방마다 투표 집계 방식이 다 다른데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어 순위에 변동이 생겼는지, <락뮤닷>의 이번 주 1위는 오늘 출연하지 않은 한 발라드 가수에게 돌아갔다.

마침내 온에어 표시가 꺼지고 가수들이 무대에서 차례로 퇴장했다. 어스래빗도 느릿느릿,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움직였다. 그때 자신을 보러 와 준 개인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던 MC 찬형이 어스래빗 쪽으로 다가왔다. 마이크가 꺼진 걸 몇 번이나 확인하며.

“라이언.”

“어?”

찬형이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라이언에게 물었다.

“이 다음에 바로 스케줄 있어?”

“아니….”

“그럼 이따가 잠깐 MC 대기실 들러. 10분이면 돼.”

라이언은 얼떨떨한 얼굴로 리더인 유호를 한 번 쳐다봤다가 찬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누가 받을까?

PD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온 후, 라이언은 조유찬에게 허락을 구했다. 조유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현장전과 이건우, 강보배를 불렀다.

“장전 씨가 애들 데리고 다녀와 주세요. 아직 신인이라 혼자 다니게 했다 문제생기면 곤란해질 수 있어서 같이 왔다고.”

남은 멤버들은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돗자리와 의자에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스타일리스트들은 자리를 비운 세 사람의 옷과 신발을 담을 캐리어만 남기고 짐을 옮겼다.

똑똑.

“안녕하세요, 어스래빗 분들….”

“어?”

“안녕하세요!”

의자 위에 발을 올려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멍때리던 박가람이 냉큼 다리를 내렸다. 칸막이를 조심스레 두드리며 방문한 이는 보이그룹 ‘풀썸’의 리더 ‘효운’이었다.

다른 앉아있던 멤버들도 얼른 일어났다.

“저기, 괜찮으시면….”

효운이 머쓱한 얼굴로 손에 든 어스래빗 데뷔 앨범을 내밀었다.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 동생이 여러분 팬이라고 사인 좀 받아와달라고 해서…. 하하…….”

토요일에 <뮤직뮤직> 대기실 순회를 돌았을 때 각각 멤버의 사인과 메시지가 들어간 앨범을 돌렸었다. 그러나 일부러 찾아와 부탁한다는 건 받는 사람의 이름과 특별한 메시지를 새로 적어달라는 뜻.

“물론이죠!”

“동생 분이 누구 팬이신데요?”

“어스래빗 멤버 분들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특히 한율 씨랑 보배 씨 팬이라고 하더라구요.”

“오오! …그런데 보배 지금 자리에 없는데.”

한율은 빠르게 조유찬을 보았다. 동급생은 몰라도 아이돌 선배의 부탁은 들어줘도 괜찮은 건지, 조유찬은 괜찮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은 미소를 지으면서 효운에게 다가갔다.

“원하는 멘트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보배 형 오면 그때 적어달라고 한 후에 돌려드리러 갈게요.”

“감사합니다. ‘TO. 효선’이라고 한 다음에….”

MC대기실에 갔던 네 사람이 돌아온 건 1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낯짝으로 원카운트의 앨범까지 가지고 돌아온 라이언을 보니 재회의 회포는 잘 푼 듯했다. 그러나 함께 갔던 이건우는 조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보배에게 풀썸의 효운이 앨범에 사인과 메시지를 부탁하고 갔다고 설명하며 앨범을 넘기자, 강보배는 메이크업 효과로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무너뜨리며 바보같이 웃었다.

“여기에 쓰면 되는 거야?”

“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뒤에서 유호가 이건우에게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우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딱히 일은 없었는데 조금 묘한 구석이 있어서. 나중에 말해줄게.”

다음 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어스래빗은 음방을 위해 새벽 일찍부터 숙소를 나섰다. 오늘 온 곳은 MBS K의 <로얄K뮤직>.

다른 방송국보다 대기실이 잘 갖춰져 있다는 소문답게, <로얄K뮤직>은 데뷔 일주일도 안 된 신인 어스래빗에게도 독실을 턱하니 배정해주었다.

“여기는 대기실이 길쭉하네.”

“화장대가 나란히 다섯 개…!”

“형, 여기요.”

한율은 대기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조유찬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중요한 건 삭제하거나 잠가놨지?”

“네.”

단순히 일방적으로 연락 온 것만 가지고 신고를 하면 처벌 근거가 미약하다는 차남석의 말을 듣고, 두 번의 거부에도 또 다시 온 연락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우리 연예인이 아직 신인이라 잘 모르는구나. 찐팬은 밀어내는 거 아냐, 한율아^^*]

-[그냥 안티보다 팬이었던 안티가 얼마나 무서운데>ㅅ

-[좋아서 응원하고 칭찬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여기에 어제 유호가 보낸 링크의 사건까지 곁들이면 뭔가 더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녀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닥속닥, 혹은 날카로운 벨소리 환청이 들리는 저주마법을 걸어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바쁘고 피곤하니 개인적인 처벌은 잠깐 뒤로 미루고, 일단 법적으로 혼내주기로 했다.

“변호사 쌤들이 검토하고, 적당하다 싶으면 바로 부모님께 연락한 후 고소 진행할 거야. 괜찮지?”

“네.”

한율의 핸드폰은 드라이리허설을 하는 동안 신입 매니저인 윤승우를 통해 WB래빗의 법적인 업무를 봐주는 로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사녹과 본방을 끝낸 저녁이 되자 다시 주인인 한율에게 돌아왔다.

“우리 직원이 보는 앞에서 사생이 보낸 메시지랑 전화수신 내역만 복사하고 찍었을 뿐 다른 건 건들지 않았다니까, 안심해도 될 거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핸드폰을 살폈다. 혹시 새로 깔린 프로그램은 없는지 확인한 후, 임시로 삭제했던 은행 앱 등을 재설치했다.

“그러고 보니 그 얘길 안 해줬네.”

MBS K를 나와 차에 올라탔을 때, 길우성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무슨 얘기?”

돌아가는 차 운전석에는 신입 매니저 윤승우, 조수석에는 조유찬이 앉았다. 한율은 중간 자리에 길우성, 라이언과 함께. 뒷자리에는 스타일리스트와 박가람이 탔다.

“로얄K 스튜디오에 귀신 있다는 얘기. 반 친구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직접 봤대.”

“잉? 로크뮤 스튜디오에 귀신 있다는 얘긴 처음 듣는데?”

박가람이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되물었다. 조유찬도 흥미가 돋는지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나도 처음 듣는데?”

“반 친구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작년에 거기에서 리허설 하다가 상체를 뒤로 휙 넘기는 안무 동작을 했는데, 바로 그 위 천장 조명에 매달린 귀신이랑 눈이 딱 마주쳐서 놀라서 그대로 뒤로 넘어졌대요. 지어낸 얘기치곤 너무 구체적이잖아.”

라이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오마갓.”

“으어….”

박가람이 길우성의 좌석 시트를 꽉 잡았다.

“그 얘기 호 형한텐 절대 하지 마. 호 형 고개 뒤로 젖히는 동작 있잖아. 완전 카리스마 쩌는 표정으로 샥!”

“당연한 소릴! 이번 활동 끝나면 말해줄 거임.”

박가람과 길우성은 잠시 서로를 보더니, 이내 음험하면서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큭.”

“으흐흐흐.”

“…….”

뾰롱. 그때 라이언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두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라이언은 핸드폰에 뜬 메시지를 보곤 반가운 얼굴로 액정을 두드렸다.

박가람이 물었다.

“누구야? 친구?”

“응.”

“찬형이?”

“응.”

“뭐래?”

“다음 주에 미국 K-POP 콘서트하러 간다, 선물 모 피료해?”

“메로나?”

라이언이 박가람을 돌아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한국 아이스크림을 왜 미국에서 차자? 가람, 바보야?”

“형한테 바보라니! 아무튼 이놈의 한 살 터울 자식들은 말이야, 차남석도 그렇고 말이야, 박현우도 그렇고, 툭하면 형한테, 응? 형한테!”

길우성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다람 씨 진정하시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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