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목요일은 음방이 없었지만, 미성년자 멤버들은 학교에 갔다가 오전 수업만 받고 조퇴. 매니저의 차를 타고 SBC 방송국으로 향했다. 오후 2시에 진행되는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하기 위함이었다.
2시간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 시간 중 그들의 출연은 20분가량.
“생방이기는 하지만 그리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사연 읽는 건 남석이랑 한율이가 하기로 했으니까.”
“거 너무 얘들만 부려먹는 거 아니오?”
“그럼 가람이 네가 할래? 지금이라도 작가님한테 말씀드려서 바꿔도 되는데.”
보이는 라디오가 아니어서 그들은 편한 복장으로 SBC 라디오국으로 들어갔다.
박가람이 부담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회사에서 너희들한테 괜히 연기레슨을 시키는 게 아니야. 나중에 너희 활동영역을 넓혀주려는 목적이 가장 크기는 하지만, 감정 표현이랑 딕션, 딜리버리를 키워야 방송에서도 말이 잘 나오는 법이거든.”
설명을 하면서도 조유찬의 표정엔 작은 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회사가 한율과 차남석만 밀어준다는 생각을 다른 멤버들에게 심어주는 건 아닐까, 하는 작은 우려도 함께.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유호가 괜찮다는 얼굴로 웃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이 우리 팀 라디오 첫 출연인데, 확실히 잘하는 애들을 앞세우는 게 청취자 분들한테도 좋게 어필되잖아요.”
“이해해줘서 고맙다.”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이 자리에 앉아 병풍처럼 리액션만 한 건 아니었다.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한율과 차남석을 제외한 멤버들은 스태프나 DJ의 신호에 맞춰 대본을 보며 그룹소개, 자기소개, 노래소개를 번갈아 가면서 했다. 시간에 맞춰 읽는 연습을 미리 하고 왔기에 큰 실수는 벌어지지 않았다.
사연을 읽어주는 시간, 한율과 차남석은 연기실력을 가감 없이 발휘해 사연을 안정적으로 읽었다. 모니터엔 청취자들의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지금 사연 읽는 목소리 누구예요???
-남석이 목소리 대박ㅇㅂㅇ! 고딩 맞나욥
-한율이 목소리 진짜 좋다^^
-둘 다 발음 좋네요ㅎ
-귀 호강 중저음 보이스 차남석
-한율인 아나운서해도 되겠다
-어스래빗 대박꽃길 걷즈아!
-둘 다 학교 안 가고 여기에서 뭐해ㅋㅋㅋ
-신인 같은데 방송 잘하네요. :)
출연 시간 막바지. 어스래빗은 준비된 스탠드마이크 앞에 서서 헤드셋을 낀 채 라이브로 을 열창, 그리고 DJ의 요란한 환호를 받으며 퇴장했다.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진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후, 이건우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작을 취했다.
“별 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다.”
“다들 수고 많았어. 이따가 저녁 뭐 먹을래?”
“어? 회사에서 안 먹고 외식해요?”
조유찬은 대답대신 품속에서 WB래빗 법인카드를 꺼냈다.
“오오!”
“오늘은 너희가 먹고 싶은 저녁을 마음껏 사주라는 대표님의 지시가 있었다.”
“오오오!”
“쉿. 복도에서 시끄럽게 떠들면 안 되지.”
멤버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먹고 싶은 메뉴를 하나씩 조용히 읊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삼겹살, 갈비, 치킨.
“써한, 넌 뭐 먹고 싶어?”
“느끼하지 않고 맵지 않은 음식이면 아무거나.”
“어, 안녕하세요!”
인사소리가 들려오자 어스래빗 멤버들과 매니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인사가 이쪽을 향한 것인지 확인 0.5초.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SBC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지만, 품에 안고 있는 바인더와 사과패드에 가려 어느 국 소속의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2시 라디오 출연 게스트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스래빗은 정체모를 여성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목적지는 1층과 지하1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여성이 한율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하울링 1화에서 보여준 연기, 정말 인상 잘 봤어요, 한율 씨.”
“감사합니다.”
“이쪽은 수의형사에서 나쁜 고등학생 역할 맡은 분이고. 연기 잘 봤어요. 반가워요.”
“네, 감사합니다.”
차남석과도 악수한 여성이 조유찬에게 물었다.
“다음 작품은 언제 해요? 계획 있나?”
“당분간은 없지만,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려 합니다.”
“그래요? 그럼 명함 좀 주시겠어요?”
“네, 잠시만요.”
대체 당신 누군데. 명함을 꺼내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조유찬의 얼굴에 그런 생각이 스친 듯했다.
“여기 있습니다.”
띵.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여성이 명함을 받은 손을 흔들며 내렸다. 그제야 가려졌던 사원증이 언뜻 보였다.
[SBC 드라마제작국 임미숙PD]
“감사합니다. 나중에 시간되면 연락드릴게요.”
* * *
금요일 밤. MBS의 <뮤직센터> 스케줄이 끝난 후, 대기실에서 오늘 했던 방송을 모니터링하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어스래빗은 뒤늦게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을 살폈다.
[블루액션, 완성형 신인 아이돌 출격!]
[신인이 맞나? 블루액션 생방송 데뷔쇼케이스 성공!]
[대형기획사도 주목하는 신인 아이돌!]
뮤닷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고동 엔터의 신인 보이그룹 ‘블루액션’의 데뷔 쇼케이스는 이제 막 끝난 참이었지만, 이미 연예뉴스 란에는 관련 기사가 적잖이 올라와 있었다.
“와…, 반응 장난 아닌데? 이따가 재방으로 틀어주나?”
“내일 낮에 재방 있네요.”
“기자들한테 잘 보였나 보네요. 데뷔 쇼케가 끝나자마자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좋은 기사를 올려준 걸 보니.”
“친구를 질투하는 건 나빠, 남석아.”
“누가 질투를 했다고. 기사 수만 보고 반응 괜찮다 믿지 말란 소리죠.”
“그래도 얘네 그라 팔로우 수나 앨범 예약판매 수량 높더라. 블블 팬들이 블블 후배 기죽지 말라 팔로우 수는 채워줘도, 팬클럽 가입이나 앨범까지 사주진 않잖아.”
한율도 비슷한 인터넷기사를 훑다가 한 댓글을 보았다.
-올해 신인상 후보는 어스래빗VS블루액션이라 본다. 누가 받을까?
너희 라이벌이야
대한민국 3대 연예기획사 중 하나라고 불리는 아림 엔터테인먼트. 아림 엔터에서 작년에 내놓은 7인조 보이그룹 ‘원카운트’의 숙소는 미국으로 떠날 준비로 어수선했다.
“대체 뭘 챙겨가야 되는 거야? 핸드폰 충전기는 챙겼고….”
“고추참치 가져가도 돼?”
“일본에 갔을 때 싼 캐리어 그대로 들고 가면 되지 않아?”
“…너 설마 아직도 일본에서 돌아올 때 넣었던 속옷이랑 옷 전부 그대로 썩힌 건 아니지?”
“으흐.”
“아, 이 새끼 너무 더러워!”
찬형도 본인의 캐리어를 펼쳤다. 그리고 [미국여행 준비물]을 검색한 핸드폰도 옆에 두었다.
“기내에서 쓸 미스트랑, 치약, 칫솔….”
“찬형.”
슥. 그때 막 개인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한 멤버가 찬형의 옆에 앉았다.
“너 락뮤에서 라이언 만났다며? 엔딩 무대 때 네가 걔한테 잠깐 보자고 말하는 거 애들이 들었다던데.”
“어.”
“무슨 얘기했어?”
“그냥, 데뷔 축하한다고. 그리고 나 번호 바꿨잖아.”
“호구냐? 걔가 너희 집에서 스팸 훔친 거 애들이 다 아는데….”
“형.”
찬형이 멤버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듣진 않는지 살핀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떠비 대표가 라이언을 데려간 것도 모자라서 데뷔까지 시킨 거 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걔가 마스크 되고 랩도 잘하니까….”
“라이언이 훔쳤다고 확실히 밝혀진 건 우리 집 스팸뿐이었잖아. 자잘한 동전 몇 푼 없어진 건 본인 짓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고. 애가 빈대 붙어서 얻어먹는 게 조금 부담스럽고 껄끄럽다는 소리는 나왔지만, 라이언이 나간 건 그놈의 스팸 때문이었다고.”
“그런데?”
“우리 회사 연습생 리스트는 갱신될 때마다 돌아. 라이언이 원래 우리 회사였던 거 아는 애가 많다고. 그런데.”
찬형은 목소리를 가늘게 냈다.
“라이언이 원래 아림 엔터에 있다가 WB래빗으로 옮겨간 이유가, 라이언이 손버릇이 나빠서래요. 그 사실을 WB래빗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데려가서 데뷔까지 시켰네요? 심지어 어스래빗은 멤버들끼리 사이가 좋아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여러분? 아림에서 진짜 손버릇 나쁜 게 들통 나서 쫓겨난 거 맞아요? 친구네 집에서 스팸 훔친 건 나쁘지만, 증거도 스팸뿐이잖아? 혹시—.”
찬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따돌림 당한 거 아니야?”
“비약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애초에 따돌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해봐요, 형. 라이언 나가기 전에 애들끼리 모여서 라이언 뒷담깐 건 사실이잖아요. 여기에서 수군, 저기에서 수군. 누군가가 ‘아, 그랬던 적 있기는 해. 라이언에 대해 애들끼리 말했었어.’ —이거, 제삼자가 보면 정말 오해하기 딱 좋은 이야기라고요. 특히나 우리 안티들한테는 더더욱.”
“…….”
찬형은 새 칫솔과 치약을 파우치에다가 넣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라이언이랑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야죠. 왜 떠비가 라이언을 거뒀는지는 몰라도, 라이언이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우리 전부 따돌림 가해자가 될 테니까… 그 방지차원에서.”
* * *
토요일. 다시 KBC <뮤직뮤직>에 출근한 어스래빗은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 여기 우리 대기실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지난주는 대기실 인터뷰가 잡혀 독실을 주었구나 하고 받아들였지만, 별 다른 이벤트가 없는 이번 주 역시 독실이 주어진 까닭이었다. 그것도 지난주에 썼던 곳보다 훨씬 넓고, TV까지 설치된 곳으로.
멤버들은 문에 붙은 [어스래빗/뮤직뮤직] 종이를 다시 한 번 살피곤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 넓잖아! 좋잖아!”
차남석과 유호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조유찬을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데뷔한 지 여드레 째.
어스래빗의 곡은 음원 사이트에서 10대, 20대 차트에만 간신히 올랐을 뿐, 종합차트에선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도 팬의 반응을 제외하면 ‘신인치곤 잘하더라’라고 가볍게 언급하거나 관심 없다는 듯 그냥 지나가는 게 대다수. 그런데 이렇게 좋은 독실을 주다니?
“나도 몰라. 진짜 여기냐고 물어보니까, 뮤직 스태프도 ‘나도 이유를 알고 싶다’란 표정으로 맞다고 대답하던데.”
“허얼….”
어스래빗 멤버들은 얼떨떨해하면서 푹신한 소파부터 찾아 앉았다. 한율은 8명이서 쓰기에 넉넉한 대기실을 둘러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혹시 그 사람이?’
<뮤직뮤직> PD에게 ‘나 시사교양국장인데, 어스래빗에 내 아들 있다?’라고 언급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잠시 후.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
“인사드립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스래빗이 PD에게 인사를 하러가자, PD는 굉장히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지난주처럼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한율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래.”
바로 어제 데뷔한 블루액션과 만난 건, 오늘 처음 만나는 선배들의 대기실에 찾아가 인사와 함께 앨범을 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블루액션은 어스래빗 대기실 앞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남석! 한율!”
작년, <보컬리스트 시즌3>에서 만났던 안세현이 먼저 손을 번쩍 들어 아는 척 했다.
동시에,
“안녕하십니까, 블루액션입니다!”
다른 블루액션 멤버들이 어스래빗을 향해 깍듯한 태도로 우렁차게 인사해, 홀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손을 들었던 안세현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어스래빗도 그들을 향해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어스래빗입니다!”
그들은 복도에서 서로 앨범과 인사를 나눴다. 한율과 차남석은 <보컬리스트 시즌3>에 함께 출연했던 안세현과 은강을 찾았다.
“데뷔 축하해요, 형들.”
“고마워, 한율아. 조금 늦었지만 너희… 아니, 선배님들도 데뷔 축하드립니다.”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따가 대기실 놀러 와도 돼?”
“우리는 괜찮지만, 너희는 그래도 돼?”
“어? 안 되나?”
뒤에서 멀찍이 서서 지켜보던 블루액션 매니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 돼.”
“아…. 안 된다네. 하하.”
“우리도 아직 신인이니까 다른 사람 대기실 함부로 놀러 다니지 말라더라. 나중에 심심하면 톡이나 해.”
“어. 수고해.”
“너희도.”
“수고하세요, 형들.”
인사는 길지 않게 끝났다.
블루액션을 보낸 후 대기실에 들어온 박가람이 궁시렁거렸다.
“죄다 키 크고 잘생긴 애들만 모아놨네. 사람 기죽게.”
“그러게. 일곱 명 전부 훤칠하더라.”
“그래도 우리 남석 씨보다 잘생긴 사람은 없던데여.”
차남석은 길우성의 말을 못 들은 척, 선물 받은 블루액션의 앨범을 열었다. 앨범은 안에 사인과 메시지를 적어 놓느라 포장지가 제거된 상태였다.
멤버들은 앨범에 적힌 사인과 메시지를 보다가 한 명 두 명, 테이블 위에다가 블루액션의 랜덤 포토카드를 나열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앨범에 든 포카는 랜덤 2종. 16장이 모였다.
“오, 일곱 명 다 있다.”
“원래 이럴 확률이 높나? 인기 있는 멤버 포카는 수량 일부러 적게 뽑는다고 하던데.”
“우리는 다 동일하게 뽑지 않았어?”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한 명당 두 가지 버전이 있는 것 같아.”
“어쨌든 일곱 명 다 있으니까.”
박가람이 핸드폰을 들었다.
“인증샷!”
찰칵.
“형, 이 사진 SNS에 올려도 돼요?”
“저쪽에 물어보고.”
5분 후. 박가람의 개인 SNS엔 블루액션 앨범과, 전 멤버의 포토카드를 나란히 놓은 사진이 올라갔다. 블루액션의 앨범을 든 어스래빗 단체 샷도 함께.
[블루액션 분들이 주신 앨범으로 포카를 모아봤습니다! 으하하! #어스래빗, #블루액션데뷔축하, #블루액션포카, #KBC뮤직뮤직, #같이꽃길걸읍세]
-갑분블루액션ㅋㅋㅋ 일주일 후배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ㅎ
-지나가던 블루액션 팬입니다. 우리 파랑이들 포카 확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진지)
-지나가던 어스래빗 팬입니다. 우리 애들 얼굴에 만족하며 마저 지나가겠습니다.
-아래 사진 가람이랑 호 나란히 서니깤ㅋㅋㅋㅋㅋ(이하생략)
-아니 애들 왤케 해맑아; 너희 라이벌이야, 라이벌!! 왜 얘넬 띄워주고 있어8ㅂ8!!!
-블루액션포카 검색했더니 어스래빗이 나와서 ㄹㅇ당황;; 윗분, 거 팍팍하게 살지 맙시다ㅎ 신인들끼리 돕고 사는 거죠ㅎㅎ(지나가던 블루 팬)
* * *
일요일은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다.
토요일 <뮤직뮤직>을 마친 뒤 숙소에서 1시간 자고 밤 11시에 SBC로 출근. 새벽에 사녹을 하고 퇴근했다가 정오에 다시 출근해서 생방무대를 뛰고, 방송이 끝난 후엔 가까운 역으로 이동, KTX를 타고 부산으로 직행했다.
부산에서 팬 사인회 일정을 마친 후엔 미성년자 멤버들만 다시 KTX를 타고 서울 귀환. 숙소에 쓰러져 몇 시간 잤더니 금세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오, 팬덤 명 투표결과 나왔어!”
길우성이 침대 위에서 아직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
“달맞이꽃, 이브닝 프림로즈에서 따와서 간단하게 이프림…!”
강보배가 웅얼거리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프림 이쁘다…, 하하, 예쁘다….”
“이제 우리 팬 분들을 이프림! 이라고 부르면 되는 구나. 히히….”
삑삑삑삑, 덜컹.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숙소로 들어왔다.
“다들 일어나! 밥 먹고 학교가야지!”
매니저가 학교까지 태워다주는 건 교통비도 절약되고 몸도 편하기는 하지만, 회사 사람 앞에서 꺼내기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불편한 점도 있다.
“고동이 일을 빡세게 굴리기는 하는데, 그만큼 일도 잘 따오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차남석도 차에서 내리고 교정을 한참 가로지르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블루액션, 이미 지난주에 ‘주말의 아이돌’ 촬영하고 왔다고 하더라.”
“단독 출연?”
“어. 블블 멤버 중 한 명도 스페셜 MC로 지원 나갔다던데.”
“대박. 거기 3대 아니면 웬만하면 쌩신인은 출연 안 시켜주잖아. 출연시켜줘도 다른 팀이랑 같이 무슨무슨 특집해서 꼽사리 끼우는 식이었었는데.”
길우성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고동이 그 정도였나…?”
“뮤닷에서 데뷔 리얼리티랑 데뷔 쇼케를 내보낸 효과가 크게 돌아올 거라 생각해서 섭외한 거라면, 완전히 이해 못할 바도 아니긴 하지.”
한율은 가만히 차남석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형, 요즘 제대로 못 잤죠?”
“나만 그러냐?”
“아니. 잠깐씩 시간 날 때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아서요. 생각이나 말투에서 점점 여유 없이 예민해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차남석이 걸음을 멈추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한율과 길우성도 멈췄다.
“…그렇게 보여?”
“네, 블루액션 얘기 나올 때마다 특히 더.”
한율은 제 미간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너 지금 인상 쓰고 있다고.
“하…….”
깊은 한숨과 함께 차남석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어느새 구겨진 미간을 손끝으로 꾹 눌러 폈다.
차남석이 중얼거렸다.
“아무 걱정 없이 20시간 정도 푹 잤으면 좋겠다.”
“수업시간에라도 자요.”
“사진 찍혀.”
길우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난 그냥 자는데?”
“…….”
“…이 형님, 또 눈으로 사람 욕하네.”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온 한율은 교실에 앉아 매점에서 사 온 커피를 마시면서 핸드폰으로 느긋하게 영화를 보았다. 지난 주, 스케줄이 오프인 날은 일부러 연락 안 했다는 사생팬도 오늘은 잠잠했다.
고소는 지난 주 수요일 바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건 접수가 되어도 경찰이 피고소인에게 통보를 하기까지 며칠. 아직은 아무런 연락을 못 받았는지, 사생은 어제까지 한율에게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부산 팬싸도 수고했어!
-우리 연예인, 오늘도 귀엽고 멋졌다>ㅂ<)♡
안 왔으면서 온 척 거짓말까지 해가며.
어제 연락 왔던 내역을 조유찬에게 보여줬더니, 조유찬은 지금 오는 것은 형사 판결이 나온 후 증거로 더 첨부해 민사로 가져가 본때를 보여주자며 씩씩거렸다.
우웅.
그때 조유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형.”
-[한율아, 혹시 점심시간에 남석이 봤어?]
“네, 같이 밥 먹었어요.”
-[남석이 괜찮았어? 뭔가 화났다거나 불안해보였다거나….]
“잠 좀 푹 자고 싶다고 하긴 했는데요.”
-[아, 그럼 괜찮은 거구나. 알았어, 고마워. 내가 이거 물어봤다는 말은 하지 말고!]
뚝.
“……?”
전화 수신 화면이 일시 정지된 영화로 돌아갔다.
한율은 미간을 찡그리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 있나?
지구꽃토끼
오후 6시. 어제 부산에서 연 팬 사인회가 끝난 후, 부산에 남겨졌다가 그린라이브에 올릴 영상을 촬영하고 올라온 유호, 이건우, 박가람이 2층 회의실로 들어왔다.
크고 작은 밀폐용기를 가득 들고.
“손은 씻었어?”
“어. 그리고 여기 항균 물티슈.”
“크으, 드디어 우리가 먹방을 찍는구나!”
“카메라는 이쪽에다 세팅해서, 테이블이 세로로 나오게 하자.”
오늘은 어스래빗 팬덤 명이 정해진 걸 자축하는 의미로, 만찬 라방을 진행하기로 했다.
밀폐용기에 든 건 세 사람이 부산에서 산 온갖 먹거리를 이곳 구내식당에서 다시 데운 것들. 여기에 조금 전 배달시킨 음식들까지 세팅했다.
“앞접시랑 수저 다 있어?”
“제일 앞은… 라이언이 제일 맛있게 먹으니까 앞에 앉는 게 좋으려나?”
“방송 안 하고 먹기만 할 것 같은데? 중간이 낫지 않을까?”
“먹는 방송 아니야?”
“팬 분들이랑 소통도 해야지.”
그렇게 자리까지 정한 후, 노트북과 카메라가 잘 연결되었는지 확인하고 유호가 라이브방송을 켰다.
[어스래빗-이프림♡파티]
금세 팬들이 라방에 접속했다.
-토끼야 이프림 받아라!!!
-이프림 왔습니다!♡
-이프림 왔... 히익 음식들 봨ㅋㅋㅋ
-이프림 출석 111111111
어스래빗 멤버들은 카메라에 대고 인사했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이프리이이임!”
“안녕, 이프림!”
-아아안녀어어엉ㅠㅠ!!!!!
-이프림 이곳에 잠들다...
-토끼가 이프림을 부를 때 이프림은 저프림하며 춤을 추지 얼쑤♪
-ㅎㅎㅎㅎ
-어제 부산 팬싸에서 보고 하루만이네☺
-파티다! 나도 라면 물을 빨리..!!
반가워하는 인사가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카메라 앞에 앉은 유호가 대표로 말했다.
“오늘 아침에 드디어 우리 팬덤 명 투표결과가 나왔잖아요. 그래서 이프림 탄생 기념을 축하하는 의미로 다 함께! 파티를 하자, 해서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했습니다!”
“와아아!”
짝짝짝짝!
-라이언 저렇게 해맑게 웃는 거 첨봐ㅋㅋㅋ
-애들이 평소에 얼마나 굶주렸으면ㅜㅜ
-이런 기회에라도 든든히 먹어야 함ㅇㅇ!
-뭐뭐 있어?
멤버들은 카메라와 가까운 순서대로 음식을 살며시 들어 설명했다. 그리고 어느새 몇 만 명까지 불어난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카메라가 없을 때처럼 묵묵히 먹진 않았다.
특히 카메라 바로 앞에 앉은 유호와 길우성은 톡창의 메시지를 시시때때로 확인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여러분은 저녁 뭐 드세요? 뭐 드셨어요?”
“치킨 배달이 70분 걸린다고 떴다구요? 와, 정말 맛집인가보다.”
“…아, 왜 치킨은 없냐구요? 튀김 종류는 일부러 뺐어요. 그리고 한율이가 치킨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구요.”
-왓??????????
-치킨을 안 좋아한다고?!!
-(충격)(말잇못)
-한율아.... 그렇게 안 봤는데...(배신감)
모니터가 멀어서 핸드폰으로 라방을 켜서 보고 있던 한율은 입 안의 음식물을 삼킨 후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열여덟 살 인생에 치킨을 딱 한 번 먹어봤는데요.”
한 번이라는 소리에 톡창이 더 난리 났다.
-세상에, 치킨을 한 번 밖에 안 먹어봤다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치느님 맙소사
-한율아 너 한국인 아닌 거 아니지???
“처음 먹은 치킨이 너무 기름 냄새가 심하고 맛이 없었어요.”
-아직 인생치킨을 못 먹어본거구나ㅠㅠ
-부모님이 치킨 안 좋아하시나 보다
-한율아 너에겐 아직 희망이 남아있단다
그 아래로 서울의 치킨맛집 상호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 다음 주제는 자연스레 다른 멤버들의 음식 취향.
한 시간 가까이 느릿하게 라방이 진행되는 동안, 톡창에는 ‘너희 먹는 모습 보면서 나도 밥 먹고 있다’라는 팬들이 늘었다.
“그럼 저희는 우리 이프림 여러분의 응원과, 오늘 먹은 이 맛있는 음식들의 힘으로!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무대를 뛰겠습니다. 그럼 다들 즐거운 저녁 되세요!”
“안녀엉!”
[라이브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화면이 꺼진 걸 확인한 후 멤버들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댔다.
“후아…, 진짜 간만에 배부르게 먹은 듯.”
“그런데 이거 진짜 맛있다. 어떻게 식어도 맛있냐.”
“그만 먹어. 내일 후회하기 싫으면.”
배가 잔뜩 부른 상태로 안무 연습을 하면 체하기 십상이기에, 그들은 각자 개인연습을 하다 한 시간 후 연습실에 모이기로 하고 뒷정리를 했다. 일회용기나 자잘한 쓰레기, 그릇 등을 비닐봉투에 분류해 담아 회의실을 나섰다.
그때 사무실에서 조유찬이 얼굴을 내밀며 차남석에게 손짓했다.
“남석아, 잠깐.”
“네.”
혹시 따로 스케줄이 들어온 걸까. 차남석은 가벼운 의문을 품은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 후.
연습실에 들어온 차남석의 표정은 평소처럼 덤덤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