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427)

* * *

화요일. 칸막이로 나눠진 넓은 대기실에 10인조 보이그룹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데뷔하게 된 신인, ACCOM!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분류된 공간 안쪽이 잘 보이지 않도록 칸막이가 이중으로 설치된 데다 10명이나 되는 손님이 모두 들어오기엔 비좁았다. 그런 까닭에 어스래빗은 칸막이 안에서 모두 나와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입니다!”

“데뷔 축하드립니다!”

“여기 저희 앨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ACCOM 리더가 손에 든 종이가방을 유호에게 넘겼다. 유호 역시 그들의 인원수에 맞춰 앨범 열 장을 담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형수 형.”

박가람이 멤버들 사이에 섞여 머쓱하게 서있는 김형수에게 다가갔다.

“여기에서 다시 만나니까 느낌 색다르다. 살 좀 많이 빠진 것 같은데?”

“하하…, 그래? 너도 살 많이 빠졌다?”

“흐흐. 나의 처절한 다이어트 일화를 책으로 엮으면 동화책 정도가 나올 거야.”

“…뭔 소리야.”

“다이어트 정석이 간단하지만 어렵잖아. 얇다는 소리지.”

“……?”

한율과 차남석도 함께 <보컬리스트 시즌3>에 출연했던 하승헌과 이재에게 다가갔다. 당시 인사만 주고받던 사이였기는 하지만, 그래도 방송가에선 짧은 인연도 인연이기에.

“데뷔 축하드립니다.”

“네, 고맙습니다.”

그 사이 다른 멤버들도 ACCOM 멤버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혹시 예전에 잠깐 다이스 보컬학원에 다닌 적 있지 않으세요? 낯이 조금 익는데?”

“네, 맞아요! 저도 TV보면서 ‘어? 저 분 조금 낯익은데?’ 했었는데… 같은 학원 다니셨구나.”

그러면서 한 명씩, 김형수에게도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김형수는 웃으면서 화답했지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형수는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말없이 떠난 사람이었다. 콩콩 엔터로 옮겼다는 것도 유호를 통해 소문처럼 휙 날아왔을 뿐.

“그럼 쉬세요.”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얼추 인사가 끝나자 ACCOM은 어스래빗 다음 선배인 블루액션을 찾아 이동했다. 어스래빗 멤버들도 다시 칸막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말 돌고 돌아 만난다는 바닥이라더니.”

“그러게.”

그날 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는 오늘 데뷔한 ACCOM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다. 기사는 미래가 기대된다는 호평 일색이었고, 소소하게 달린 댓글 반응 역시 나쁘지 않았다. 작년 <보컬리스트 시즌3> 준우승 팀의 멤버인 하승헌과 이재가 속해있는 만큼 보컬이 탄탄하다며. 하지만 한 번 붙었던 불미스러운 꼬리표는 이번에도 따라붙었다.

-ㅎㅅㅎ학폭루머 어떻게 됨??

ㄴ그거 허언증 환자가 적은 허위사실이라고ㅡㅡ.. 아직도 그걸 끄집어내는 사람이 있네

ㄴ그때 ㅅㅎㅇ 인성 논란 일었을 때 바로 허위사실유포하면 ㅇㅅㅈ먹인다고 강경하게 나왔던 WB래빗 반만 했었어도 이런 얘기 또 안 나왔을 텐데ㅉㅉ

여기에 똑같이 <보컬리스트 시즌3>에 출연한 걸 넘어 준우승까지 했던 멤버들이 속해있는데, 왜 어스래빗과 블루액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스페셜 무대 같은 좋은 기회를 안 주냐는 지적도 나왔다.

-승헌이 학폭 그거 루머라고 밝혀져서 그때도 좋게 넘어가고, 락뮤닷에도 내보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앜콤만 차별함? 어이없네 뮤닷ㅅㅂ

-우승했던 팀의 강병준 솔로 데뷔 나왔을 때도 스페셜 무대로 꾸며줘 놓고, 준우승은 건너뛰고 3, 5등한 애들한테만ㅋ

ㄴ그놈의 보컬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ㅋ 그리고 보컬 얘기를 왜 락뮤닷와서 따짐??

ㄴ솔까 차별은 당연한 거 아님?? 보컬 끝나고 데뷔에 걸린 시간은 비슷했는데, 꽃토끼는 아이돌 연습생 왜 하냐 소리들을 정도로 연기실력 인정받았잖아ㅇㅇ 준우승 팀은 ‘그때’ 준우승으로 노래실력 우위라는 거 증명한 거 말고 더 나은 게 머가 있음? 그 정도 노래만 잘하는 애들은 널리고 널려있는 게 그 바닥임ㅇㅇ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기부터가 차이나잖아.

ㄴ그렇게 치면 ㅂㄹㅇㅅ은 뭐 있는데요

ㄴ걔네한텐 블블이 있지

ㄴㅇㅅㄹㅂ한텐 크래가 있고

ㄴ와 스블ㅜ 선배 없고 빽없으면 어디 뭐 서러워서 살겠나

-다 떠나서 ㅇㅋ은 회사가 푸쉬를 제대로 안 한 거. ㅇㅅㄹㅂ이랑 ㅂㄹㅇㅅ봐라. 데뷔 리얼리티니 쇼케니 그라 콘텐츠, 화보 등등 뮤비까지 돈처바른 티가 나잖냐. 그런데(이하생략).

-ㅂㄹㅇㅅ 짜증나.

* * *

4월 30일. 어스래빗은 데뷔곡 활동을 종료하고, 5월 2일 후속곡을 들고 뮤닷으로 출근했다.

드라이리허설을 마치고 모니터링을 하면서 유호가 말했다.

“한율아, 표정 더 상큼하게. 와 여기는 뭐지? 이 아름다운 세상은 뭐지? 란 기대가 조금 덜한 것 같아.”

“…네.”

“그나저나 우리 이프림 많이 놀라겠다. 여태까지 후속곡이 <월흔>인 줄 아실 텐데.”

“지금쯤이면 사녹 방청 오신 분들, 응원법 받고 혼란스러워하고 계시지 않을까?”

“아냐, 그래도 몇몇 감 좋으신 분들은 예전부터 후속곡 월흔 아니고 더와월 아니냐 하시긴 했어. 우리 프로필이나 앨범 재킷에 ‘누가 봐도 더와월!’이라고 주장하는 버전이 있었으니까.”

“비즈니스에 임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냉정히 마주하게 된 뜻 깊은 날이었지.”

“그때 촬영 소품으로 썼던 거대 토끼인형, 그거 영상실에 있더라.”

“히익.”

는 과는 달리 굉장히 밝고 시원시원한 노래로, 멤버들은 남친룩 스타일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헤어메이크업도 노래에 따라 얼굴이 더 화사하게 보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사녹 시간이 되어 세트가 꾸며진 스테이지로 나가니, 과는 180도 달라진 멤버들의 모습을 본 팬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얘들아, 예쁘다악!”

“지구꽃토끼이!!”

“으히히.”

팬들의 격한 환호성에 신이 난 길우성과 박가람이 덩실덩실, 들썩들썩 막춤을 추자 객석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여러분 이따가 6시에 M/V 공개되니까, 많이많이 봐주세요!”

“네에!!”

카메라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어스래빗의 프로필 티저 영상에도 나왔던 경쾌하고 밝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대형 중심에 서로 등을 맞대고 서있던 한율과 차남석이 정확한 타이밍에 카메라를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발끝마다 별 닮은 이슬이 번져]

[푹신하고 단단한 세상이 넓어져가 the sky above the clouds]

잠시 후. <락뮤닷> 생방송이 시작되고 어스래빗의 사전녹화 영상이 나가자, <락뮤닷> 톡창은 어스래빗 팬들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어스래빗 애들 진심 다 예쁘다

-엄마랑 같이 티비보는데, 우리 엄마가 저런 애들은 다 어디에서 주워오는 거냐고 물어보심ㅋㅋㅋ

-꽃을 단 토끼 단체 버전!!!

-지구꽃토끼라 불러다오>_<

-워.. 부담스러...

-중간에 잘생긴 애 누구?

-이거였어!!!!! 블리칭도 섹시하고 멋지고 좋았지만 이거였다고8ㅂ8!!!

-응그래봤자 듣보^^

-응너보단 인생성공^^

-남돌은 군대나 가라

-어쩐지 후속곡 뭐냐고 물어볼 때마다 애들이 은근슬쩍 대답 피하더라닠ㅋㅋㅋㅋ 깜짝 놀래켜주려고ㅎㅎ

-여자는 언제 나와요?

-와.. 생각해보니 얘네 이제야 첫 번째 앨범인데 뮤비를 세 개나 찍은 거네? 셋 다 퀼리티 괜찮던데

-떠비 진심 칼 갈아서 내보낸 듯ㅇㅇ

-아직 고딩인 애들한테 군대나 가라니 이게 뭔 개소리야

-이놈들이구나!!! 우리 크래가 뼈 빠지게 번 돈을 쪽쪽 다 빨아먹는 게!!!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 게시판이나 어스래빗 팬카페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월흔(月痕)>도 좋지만, 대중성을 고려하면 더 밝고 신나는 가 적절하니 옳은 선택이었다고.

그러나 후속곡을 잘 골랐다며 팬들도 신나하는 어스래빗 쪽과는 다르게, 일주일 차이로 데뷔한 블루액션 쪽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이번 큐시트 순서는 블루액션이 어스래빗보다 앞이었기에, 그들은 대기실에 앉아 핸드폰으로 <락뮤닷>을 보고 있었다.

“어스래빗 이번 후속곡 반응 좋네. 팬들 더 붙겠다.”

“아…, 이러면 팀장님이 우리한테만 더 뭐라 하는데…….”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무대의상 자세히 봤는데, 다 괜찮은 거 입혔더라. 반지나 귀걸이도 멤버마다 스타일 맞춰 신경 써준 거 티나고.”

은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팬들한테도 벌써 역조공 장난 아니라던데. 매니저나 경호원들도, 팬들한테 반말 안 쓰고 화도 잘 안 낸대.”

“우리한테만 어스래빗 이기라고 하면 뭐 하냐고. 회사가 팬 관리를 잘 해줘야….”

“쉿.”

칸막이 바깥을 살피던 안세현이 황급히 멤버들에게 일렀다.

“매니저 형 온다.”

“그럼 나중에 술 한 잔 해요.”

“네, 수고하세요.”

조유찬은 블루액션의 매니저와 웃으면서 떨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자, 조유찬의 웃는 낯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곧 무대를 마친 어스래빗 멤버들과 현장전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현장전이 조유찬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선배님?”

“네? 별 일 없었는데요.”

한율도 의아한 눈으로 조유찬을 보았다. 웬만해선 인상을 쓰지 않던 조유찬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멤버들을 보며 웃는다.

“너희들 무대 잘했어. 방청객들 반응도 나쁘지 않더라.”

“선배님 중간에 자리 비우셨잖아요.”

“…….”

“형 너무한 거 아니에요?!”

박가람이 충격 받은 얼굴로 조유찬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담당가수 후속곡 첫 무대 도중에 자리를 뜰 수가 있어…?”

“내가 뜨고 싶어서 뜬 게 아니야. 블루액션 매니저가—, …아니다, 아무 것도. 그나저나 우성이 너 눈 괜찮아? 초반에 왼쪽 눈 조금 이상하게 깜빡거리던데.”

“잠깐 렌즈에 뭐가 붙어서요. 뒤로 돌았을 때 세게 한 번 질끈 감았더니 괜찮아짐.”

“그럼 다행이고.”

조유찬은 웬만하면 담당 아티스트가 일하는 걸 곁에서 끝까지 지켜보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어스래빗이 무대를 할 때 블루액션의 매니저가 방해한 모양. 그것도 대기실에 먼저 와 있는 걸 보면 타의로 끌려왔을 터.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게 이해되었다.

“아, 너희들 영어연극인가 하잖아. 강 팀장님이 말씀하시길, 첫 화는 너희 사연으로 나가는 게 어떨까 하시더라. 그러니 쉴 때 폰 같은데다 미리 적어둬.”

“네에.”

1위 발표시간까지 앞으로 30여 분. 이동하고 대기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20분 정도가 비었다. 멤버들은 핸드폰부터 찾았다. 그리고 조금 전 6시에 공개된 M/V를 보았다.

“화려하게 잘 나왔다.”

“뮤비랑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몇 명 보이는데?”

“너님이요.”

“으으, 건우 형 상큼한 척 미소 짓는 거 봐.”

“‘으으’…?”

“…으으우와아.”

한율도 너튜브에 올라온 M/V 풀버젼을 본 후 아래 댓글을 살폈다. 댓글란에는 외국인의 댓글도 심심찮게 보였다.

가볍게 액정을 터치하며 휙휙 넘기는데, 길우성의 이름 석 자가 적힌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길우성 성공했네ㅋㅋ

“우성, 이거 너 아는 사람이야?”

그 댓글을 본 건 한율만이 아니었다. 강보배가 길우성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묻자, 길우성은 멀뚱히 계정이름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날 아는 척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겠죠, 뭐. 신경 쓰지 마세요.”

* * *

띠링. 그린라이브 앱 알림이 떴다.

그린라이브는 어스래빗 채널 하나만 팔로우했던 후드소녀, 이아름은 울상을 지었다. 이제 막 중간고사 공부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건만.

“흐이잉…, 이제 막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이러지 마요, 오빠드을…, 응?”

그러다 눈을 끔뻑끔뻑.

업로드 된 영상 콘텐츠 제목이 이상했다.

[어스래빗-깡충깡충 영어극장 #01]

영어극장? 이아름은 닫아놓은 방문을 확인하곤 이어폰을 꽂은 후에야 알림메시지를 눌렀다. 어스래빗 라방에 자주 나오는 배경이 떴다. 블라인드가 쳐진 창과 연한 녹색에 나이테 무늬가 새겨진 긴 회의용 테이블.

[Hopping Hopping! an English play]라고 크게 적힌 화이트보드를 뒤에 세운 채, 한율과 라이언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해맑게 인사했다.

영어로.

[우리 이프림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어스래빗의 라이언!]

[서한율입니다. 반갑습니다.]

미드에서나 들었을 법한 빠르고 자연스러운 발음. 그러나 인사와 자기소개에 불과했기에 이아름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영상 하단에 한글 자막도 나왔고.

“오빠들, 하이.”

그러나,

[이거 밤 9시에 나가는 거 맞나요? 우리 이프림 여러분들, 갑자기, 예고도 없이 영상 업로드 알림이 떠서 놀라셨을 텐데요.]

“…어? 어어…?”

[깡충깡충 영어극장…이 아니라 화이트보드엔 연극이라고 썼네요. 아무튼 이 코너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짧게 각색하여 영어로 들려드리는 시간입니다. 보이는 라디오라고 생각하시면 편하겠네요. 이프림 여러분이 우리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 접수도 받으니, 자세한 사항은 그라 게시판을 참조해주세요.]

“…….”

이아름은 서한율의 입에서 빠르게 흘러나오는 영어를 듣는 순간 머리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영어듣기 평가를 볼 때처럼 누군가 목 뒤를 턱하고 쳐서 뇌를 정지시키는 기분.

이런 기분을 느낀 게 비단 이아름 만은 아닌지, 톡창도 혼란스러워졌다.

-세상에...

-우리 톢이 영어 왜 이렇게 잘해...?

-라이언이야 원래 미국인이니 그렇다 쳐도.. 한율인 작년에 드라마찍으면서 외국 처음 나간거라 들었는데

-ㅇㅂㅇ...(머엉)

-살다살다 내새끼들한테 영어강의를 듣게 될 줄이야

-영포자 이프림은 웁니다ㅠㅠ..

-잠깐만욬ㅋㅋㅋ 한율이 사투리 쓰는데?? ㅋㅋㅋㅋㅋ

라이언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어눌하게 한국말을 구사하면서 수시로 ‘내가 잘 말하고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속사포로 영어를 뱉는 그 모습은 똑똑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스래빗은 한국을 넘어 지구정복의 꿈을 갖고 있지만, 지구정복을 하려면 우선 영어공부부터 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잖아요.]

-지구토끼가 지구정복토끼 준말이였어?!

-ㅋㅋㅋㅋㅋ

-자막 감사합니다ㅠㅠㅋㅋㅋ

[그래서 미국 태생인 저와, 한국 태생이지만 멋진 카우보이처럼 텍사스사투리를 구사하는 한율.]

라이언이 웃으면서 한율을 지칭하자, 한율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텍사스사투맄ㅋㅋㅋㅋ

-어디서 배운거니 한율앜ㅋㅋㅋㅋ

-외국인이 부산사투리 쓰는 거랑 같은 맥락이잖아이겈ㅋㅋㅋㅋ

-아니 잠깐만ㅋㅋㅋㅋ 사투리 쓰는 한율이<< 상상이 안 가는뎈ㅋㅋㅋ

[그리고 이 자리엔 없지만 어릴 적에 영국에서 살다 온 호 형을 제외하면 멤버들이 영어를 너어무 못해요. 그래서 첫 화는 우리 둘이, 그 다음부터는 영어 못하는 멤버를 끼워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교육방송이 아니죠?]

[응. 그럼 첫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구토끼 중 한 명입니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놓인 대본을 들었다.

사그락. 종이를 집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누나 역할은 내가 할까?]

[내가 할게요.]

-사이좋아보인다ㅎㅎ

-얘넨 정말 두루두루 다 사이가 좋은 듯ㅎㅎ

저들끼리 나누는 소소한 대화도 모두 영어. 멍해진 이아름의 눈에 두 사람의 모습과 자막이 함께 담겼다.

한율과 라이언이 미리 준비되었던 배역 이름표를 왼쪽 가슴 위에 붙였다. 토끼 얼굴 모양을 한 커다란 이름표에는 ‘누나’, ‘주인공’이 적혀 있었다.

[이거 제목부터 스포 같은데요.]

[식스센스급 반전은 아니니까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한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언이 카메라를 한 번 쳐다본 후 대본으로 시선을 내렸다.

[제목, 강아지 간식은 맛있었습니다.]

-?!?!

-아닠ㅋㅋㅋㅋㅋ

-제목 뭐얔ㅋㅋ 훅 들어와서 빵 터졌넼ㅋㅋㅋ

[때는 바야흐로 11년 전.]

한율이 한 손에 대본을 든 채 라이언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야, 동생. 너 한 번만 더 내 방에 있는 거 멋대로 훔쳐 먹었단 봐, 그땐 진짜 삐리리해버린다.]

일부러 여자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이런 잔소리를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라이언이 입을 삐죽거렸다.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까불곤 있지만 연기가 어색해서 더 우스웠다.

[해보든가? 해보든가?]

-누나?

-멤버 중에 누나 있는 사람 누구였죠?

-애들 프로필에 가족사항 안 적혀 있어서 모르겠지만 일단 우성이!

-한율인 외동이랬어요ㅎ

-왠지 강아지 간식 먹었다니까 느낌상 가람이같은뎈ㅋㅋㅋ

-ㅋㅋㅋㅋㅋ

[좋아, 누나는 학원 갔고. …어?!]

퉁. 그때 한율이 테이블 아래에서 비스킷이 가득 찬 투명한 통을 꺼내 올렸다. 상표는 파란색 테이프로 가려놓았다.

-소품까지ㅋㅋㅋㅋ

-어? 저거

-우리 집 개한테 주는 간식이랑 똑같ㅇㅏ

[와, 이래서 자기 방에 오지 말란 거였네! 혼자 다 먹으려고!]

라이언이 신난 얼굴로 비스킷 통을 열었다.

-안 됔ㅋㅋㅋ

-먹지 마!!!

라이언이 비스킷을 한 움큼 쥐었다. 그리고 몸을 휙 돌리며 먹는 시늉. 화이트보드 아래에 놓인 봉투에 슬쩍 담아놓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ㅋㅋㅋㅋ

라이언이 다시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씹어 삼키는 척 우물우물. …하.

[뭐야, 이 고구마 비스킷! 완전 맛있어!]

-라욘ㅋㅋㅋ 미안한데 발연기 작렬ㅋㅋㅋㅋ

-어색함 그 자쳌ㅋㅋㅋ

-이러지 마 얘들아ㅠㅠㅋㅋㅋ

그 순간, 한율이 두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퉁탕퉁탕 때리며 발소리 흉내를 내었다. 라이언이 당황한 얼굴로 비스킷 통 뚜껑을 황급히 닫았다.

[야!]

그러나 한율과 시선이 마주치자 덜컥 놀라 굳었다.

[그거 강아지 간식이야, 이 바보야!]

[……?!]

-놀라는 연기도 어색햌ㅋㅋㅋ

-아 귀여웤ㅋㅋㅋㅋ

[먹을 게 없어서 개밥까지 훔쳐 먹냐?!]

[…오마갓.]

한율이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라이언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시선이 스르륵 부드러운 미소 띤 눈웃음으로 바뀌었다.

[네, 첫 번째 사연이었습니다.]

-잉? 이렇게 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이 얘기엔 다른 여담이 있는데, ‘욕실에 새 샴푸가 있어서 썼는데, 개 샴푸였어요.’, ‘그런데 향이 정말 좋았어요.’라고.]

-누구야 대쳌ㅋㅋㅋㅋㅋㅋㅋ

라이언도 대본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대체 누구 이야기일까? 우리 멤버들 중에 누나있는 사람 누가 있지?]

[우성이랑 건우 형이요. 하지만 우성이는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그랬으니, 건우 형 같네요. 간식이야 친한 동네 개한테 주려고 살 순 있어도, 보통 샴푸까지 사진 않잖아요.]

-으아니 이렇게?! ㅋㅋㅋㅋㅋ

-한율이 잔인햌ㅋㅋㅋ 아무렇지 않게 까버렼ㅋㅋㅋ

[응, 그러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개 간식을 사람 먹는 과자로 오해할 수가 있을까요? 냄새를 맡아보면 정말 고구마 쿠키처럼 그럴싸하기는 한데… 여기 도그푸드라고 명시도 되어있고.]

[이건 모르겠는데.]

한율이 개 전용 고구마 비스킷 하나를 들어 냄새를 맡자, 라이언도 따라 비스킷 하나를 들어 냄새를 맡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개 사료 중에서도 맛있는 거 있어서 조금은 이해 돼.]

[네?]

-머???

-????????

[어릴 때 한 번 궁금해서 먹어봤는데, 조금 텁텁한 시리얼 같았어. 그래서 우유에 타 먹어 보면 괜찮을까 했는데]

-아 잠깐만 라이언

-라이언...8ㅂ8...

-라욘아?!

[먹기 직전에 아빠한테 들켜서 많이 혼났어.]

[배고팠어요?]

[응.]

-한율이 왜 그럼이해됨 이라는 얼굴로 끄덕거리는 건뎈ㅋㅋㅋ

-ㅋㅋㅋㅋ

한율이 라이언 손에 든 비스킷을 뺏었다. 통 안에 도로 넣어 뚜껑을 단단히 닫으며 일렀다.

[그래도 이건 먹으면 안 돼요.]

[응.]

두 사람이 다시 정면의 카메라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자,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볼까요?]

“…….”

툭.

“뭐하냐?”

“—깜짝이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이아름은, 이어폰이 빠짐과 동시에 들리는 동생의 목소리에 펄쩍 뛰었다.

“놀랐잖아!”

“뭐 하냐고.”

동생이 뚱한 얼굴로 이아름의 핸드폰을 흘깃하며 물었다. 이아름은 동생이 또 부모님에게 공부 안 한다고 고자질할까, 냉큼 이어폰을 동생의 귀에다 꽂았다.

“영어공부 한다, 왜!”

“거짓말하지….”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동생의 눈이 커졌다.

“허얼, 진짜네. 난 또 연예인 영상 보는 줄.”

“알았으면 얼른 나가, 나 공부해야 돼!”

이아름은 동생에게 꽂은 이어폰을 회수하며 동생을 방 밖으로 쫓아냈다. 문 밖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누나 진짜 영어 공부해!”

“웬일이래니?”

“휴우….”

이아름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어느새 영상은 두 번째 이야기가 끝나, 한율과 라이언이 ‘씨유어게인’을 외치고 있었다.

에휴. 이아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오빠들도 해외로 돈 벌러 가는 구나…. 지구정복이라니…….”

둘이 안 친해요?

작년에 데뷔한 아이돌그룹은 52팀. 이들 중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체되었다가 재데뷔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이렇게 적잖은 팀, 여기에 솔로로 데뷔하는 가수들까지 더해지다 보니 데뷔한지 4주 밖에 되지 않은 어스래빗에게도 벌써 후배 가수들이 여럿 생겼다.

오늘도 한 팀 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너무 달라붙어 민망한 상의에다, 안의 속바지가 다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 여섯 명이 나란히 서서 인사했다.

“오늘 데뷔하게 된 에스더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멤버들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그걸 또 티내면 실례가 될 것 같아 허둥거리면서 화답했다.

“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스래빗입니다.”

에스더즈는 도와주는 매니저 없이 멤버들끼리 앨범을 품에 잔뜩 안은 채 인사를 다니고 있었다. 에스더즈 리더가 다른 멤버가 들고 있던 앨범 중 8장을 분리하더니,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판촉 상품처럼 하나씩 나눠주었다.

꾸벅꾸벅.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데뷔 축하드립니다!”

그러면서 서로 손이 직접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들이 인사오기 전, 오늘 <락뮤닷>에서 새로 만나 앨범을 교환하게 될 가수들에 대해 들었던 유호는, 미리 여섯 장의 앨범을 담아 준비했던 종이 가방을 에스더즈의 리더에게 건넸다.

“이건 저희 앨범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홧팅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에스더즈는 정말 부담스러울 정도로 인사를 여러 번 한 후에야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바로 옆 칸막이 안에 있는 블루액션에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스래빗 멤버들은 칸막이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박가람이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부터 저렇게 높은 굽 신고 오래 걸어 다니면 나중에 허리가 고생인데….”

“그러게. 인사 다닐 땐 조금 편하게 신어도 다들 이해….”

“안 해줘.”

차남석이 강보배의 말을 중간에 뚝 끊었다. 유호도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크래 선배님들 막 데뷔했을 때, 은영 선배님이 발목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라 혼자 낮은 굽을 신었었거든. 그런데 그때 신인 주제에 어디에서 혼자 아픈 걸 생색 내냐고 뭐라 그랬다더라. 아파도 인사할 땐 성의를 보여야 신인이지, 어쩌고저쩌고.”

“으으, 누가요?”

“한 두 명이 아니었대.”

“그런데 호 형이 은영 ‘선배님’이라 그러니까 이상하다.”

강보배가 바깥으로 안 새어나갈 법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업실에서 만나면 서로 야야 거리더니.”

“3년 내내 같은 반 친구였으니까 그렇지.”

유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에스더즈의 앨범을 개봉했다.

“선배라는 호칭은 본인한테만 안 쓰면 돼.”

박가람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호 형 마음 이해 돼. 선배이기 전에 내 친군데.”

“언제는 여사친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더니?”

“걘 여자가 아니야, 이 전장을 함께 헤쳐 나가는 동료지!”

“…뭔 소리여.”

한율은 돗자리 구석에 앉아 핸드폰과 연결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어폰에서 일본어로 가이드 녹음이 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느덧 후속곡 활동 2주차. 앞으로 6일, 일요일 음악방송 스케줄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어스래빗의 데뷔 앨범 활동도 종료될 예정이었다. 이후엔 일본에서 발매할 데뷔 싱글 앨범 준비.

“와, 이 분 정말 할 일 없으셨나보다.”

털썩. 이건우가 한율의 옆에 방석을 놓고 앉았다. 그러곤 한율의 눈앞에다가 핸드폰을 보여주며 웃었다.

“이거 보이냐, 막내야?”

[어스래빗 건우, 과거 강아지 간식을 맛있게 먹은 사연]

[5월 8일,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에서 새 코너 ‘깡충깡충 영어연극’이 첫 선을 보였다. 첫 화 진행을 맡은 한율과 라이언은 첫 번째 사연으로 같은 어스래빗 멤버인 건우의 어릴 적 이야기를 유창한 영어로 소개했다. 건우는 어린 시절….]

“그라에서 사소하게 뱉은 말이 기사화되는 건 대형 기획사 애들뿐인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개 간식을 먹은 내 이야기가 기사로 뜰 줄은 몰랐다. 하하하.”

“잘 됐네요. 이해된다, 나도 그런 적 있다는 공감 댓글도 많고, 일부러 형이 누군지 찾아보는 사람도 보이고.”

“…하하하하.”

한율은 다시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일본어 버전으로 적힌 가사를 훑으며 노래 숙지.

“하….”

건조하기 그지없는 한율의 반응에, 이건우는 어색하게 웃던 입을 머쓱하게 닫고선 너튜브 앱을 실행했다.

“써한.”

<락뮤닷>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회사. 휴게실에서 메이크업을 지우면서 길우성이 물었다.

“넌 건우 형이랑 있으면 무슨 얘기해?”

“딱히?”

일요일 음방을 마쳐야 사실상 이번 앨범 활동 종료지만, 팬들은 오늘 <락뮤닷> 막방 수고했다며 어스래빗에게 특별 제작한 단체 티셔츠를 선물했다. 지구처럼 푸른색으로 물든 토끼 면상이 프린팅된 티셔츠 뒷면엔, 멤버 별로 각기 다른 문구가 적혀있었다.

“아까 대기실에서 너랑 형 나란히 앉아있는 거 엄청….”

길우성은 팬들에게 인증하기 위해 걸치고 왔던 티셔츠를 벗은 후에야 말을 이었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댄싱머신 우성>

“어색하더라.”

이건우는 잠시 사무실에 들렀다 온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람쥐인가 토끼인가 다람… 아니, 가람>

“그런 거 조금 있지. 정확히 말하자면… 건우 형이 은근 한율이 어려워하는 느낌?”

“둘이 접점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보기보다 순해요 물지 않아요 보배>

“예전에 건우 형 잠깐 데뷔조에서 나가게 됐을 때, 네가 이참에 이비인후과 가서 치료나 받으라고 했던 말 아직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더라. 쟤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지? 이러면서.”

<어디를 봐도 존잘인데 목소리도 미친 남석>

클렌징 티슈로 얼굴을 살살 문지르던 유호가 웃었다.

<집집마다 놔드리고 싶은 따숩리더 유호>

“건우가 보기보다 마음이 여려서 그래, 너무 그러지 마. 아, 라이언. 이거 아까 네 팬이 경호원 형 통해서 전해달라고 한 선물.”

“……?”

얼굴이 클렌징크림 범벅이 된 라이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유호를 쳐다보았다. 유호가 웃으면서 라이언의 캐비닛에다 직접 선물을 넣어주었다.

“감사.”

<한국에 와줘서 고마워 먹방요정 라이언>

한율은 그런가 하면서 마저 메이크업을 지운 후 티셔츠를 벗었다. 티셔츠 뒷면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소오름돋는 연기천재 한율>

삑삑삑삑. 덜컹.

그때 이건우가 휴게실로 들어오며 한율에게 말했다.

“서한율, 나중에 잠깐 시간되면 사무실 올라오라던데?”

“네, 알겠어요.”

이건우가 본인 캐비닛 앞에 섰다.

<ㄱr끔 눈물을 흘리는 상남자 건우>

유호가 이건우에게 물었다.

“너 전에 그거 연락 왔대?”

“어, 미팅 한 번 하자고.”

“잘 됐으면 좋겠다.”

“땡큐.”

깨끗하게 씻어 머리카락까지 꼼꼼히 말린 후에야 한율은 느긋하게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오동식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밤 10시가 가까운 시간인데도 그는 퇴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쪽으로.”

한율은 그의 책상 아래에 나란히 놓인 빈 피로회복제 병들을 일별한 후, 그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피곤할 테니까 요점만 간단히 말해줄게. 아이돌이 애들이랑 같이 요리하고, 그 요리해서 만든 도시락으로 소풍가는 컨셉이야. 요리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될 예정.”

“무난하네요. 애들은 누구예요?”

덜컹. 그제야 자리에 착석하며 오 팀장이 한율에게 바인더 하나를 내밀었다.

“학교가 폐교 위기에 몰릴 정도로 아이들 수가 적은 지역 있잖아. 그런 곳에 사는 아이들.”

“이동 시간이 만만치 않겠네요.”

“다음 주 토일. 아니면 3주 후 토일. 장소는 아직 미정, MC를 맡을 요리 전문 선생님 빼면 함께 가는 출연진도 아직 미정.”

“하지만 저 요리 못하는데요.”

오 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칼질 잘 하잖아.”

“써는 것만 잘 썰지, 다른 건 하나도 몰라요.”

“음, 그래도 괜찮을 거야. 그것만으로도 주목받을 테니까. 네가 OK하면 바로 제작진이랑 미팅 일정 잡을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몰린 지역이라면 높은 확률로 도심과 멀리 떨어진 곳일 터. 그리고 늦어도 다음 달 초 촬영이니 시기도 적절하다. 일본 데뷔가 7월로 잡혀있으므로.

“네, 잡아주세요.”

“시원시원해서 좋다. 자세한 건 거기 다 들어있으니까 시간될 때 한 번 보고. 그리고… 전에 SBC 갔다가 임미숙PD님 만난 적 있었지?”

“네.”

“원래 그 PD님이 아이돌 기용하는 거 정말 안 좋아한다고 알려진 분인데, 단막극 생각 있으면 오디션 보러 오라고 하더라. 여름에 방영될 조금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 중이라고.”

“저한테만요?”

“남석이는 너무 잘생겨서 시청자들이 귀신이나 사건이 아닌, 걔 얼굴에만 집중할 거 같다고 우려하시더라고. 아직 남석이가 한율이 너처럼 외모 잊게 할 정도의 몰입은 보여주기 힘들잖아. 아, 이건 남석이가 스스로 직접 한 말이니, 남석이한테 가서 오 팀장이 너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라, 라고 고자질하진 말고.”

“네.”

“그리고….”

뭐가 더 있나?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오 팀장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요즘엔 사생한테 연락 안 오지?”

“아.”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사생의 연락이 뜸하긴 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가 온 게 지난 주.

“경찰 조사 받았나 보네요?”

“음, 한율이 네가 수차례 불쾌감을 표시하고 거부감을 밝혔는데도 공포심을 유발하는 내용의 전화나 메시지를 반복해서 보냈잖아. 정보통신망법 제44조, 사이버 스토킹 범죄로 정확히 걸린 거지. 하지만 안티로 돌변하겠다는 내용은 두루뭉술해서 협박으로 보기 어렵다고 그러더라.”

오 팀장은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사건이 이대로 법원으로 넘어가서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건 무서운지, 사생이 오늘 변호사 선임해서 합의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어. 너희 부모님께 연락드렸더니 합의는 절대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시고. 한율이 네 생각은 어때?”

고민할 게 뭐 있나.

“보내버리죠.”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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