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427)

* * *

대형 포털사이트에 있는 어스래빗 팬카페는 그린라이브에 있는 공식팬클럽과는 별개지만, 이곳역시 WB래빗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었다. 어스래빗의 스케줄을 비롯해 앨범 발매, 팬 사인회, 사녹 방청 신청 등과 같은 공개정보를 올리고, 팬들의 자유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창구.

그곳에 한 게시글이 올라왔다.

[제목: 건우랑 한율이 안 친해요?]

[지톢 영상 정주행 쫙 하다가 느낀 건데, 건우랑 한율이가 같이 있는 건 별로 못 본 것 같아서요ㅇㅇ.. 그냥 제 착각이겟죠??]

-네, 글쓴이분의 착각이십니다. 애들 다 서로 친해요.

-울 지톢 오래 본 분들이라면 아실 텐데, 한율이가 원래 좀 무뚝뚝한 성격이에요ㅎ 팬들한테만 웃는다고ㅎㅎ 그래서 겉만 봐선 그닥 안 친해 보일 수 있겠지만, 원래 남자애들이 그렇지 않나요? ㅎㅎ

-정말 안 친했다면 같은 차도 안 타지 않을까요. 그라에서 건우 얘기할 때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언급한 것도 그렇고

-이런 글 ㄴㄴ함...

-멤버가 8명이나 되는데 같은 팀이라고 다 친하지는 않겠죠. 솔직히 사이가 나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팬카페에 올라온 게시글과 댓글을 살피던 조유찬은 앓는 소리를 내며 등을 의자에 기댔다. 그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어스래빗이 촬영한 영상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오늘 <락뮤닷> 대기실에 서한율과 이건우가 나란히 앉아있던 모습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둘의 조합이 참 그렇게 어색해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회사 사람들이야 서한율이 원래 살가운 성격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 그러려니 넘겨도, 제삼자의 눈은 다른 법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까딱 잘못 내딛어도 불화 의심.’

남돌은 걸그룹에 비해 서로 쌍욕하거나 때리는 등의 극단적인 모습이 포착되지 않는 한 그런 종류의 의심을 덜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의심은 팬들 간에 분열도 일으킨다.

조유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획홍보팀을 찾았다.

수요일, MBS K <로얄K뮤직> 대기실.

드라이리허설을 마치고 쉬고 있는 어스래빗 멤버들을 향해 조유찬이 발표했다.

“…그런 이유로, 다음 어스래빗 에피는 팬들에게 ‘안 친해 보이는 두 사람’씩 꼽아달라고 한 후, 그들을 팀으로 엮어 미션을 수행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처음 만나는 것 같지가 않다

“진실… 아니, 소문을 밝힐 때가 되었습니다, 형님.”

“그렇구나, 막내야. 드디어 이 날이 오고야 말았어.”

대기실 구석진 곳. 심각한 얼굴로 숙덕거리던 길우성과 박가람의 시선이 조용히 유호를 향했다. 둘은 결연한 눈으로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목격담도 준비됐겠지?”

“당연하죠, 형님. 차남석 씨를 통해 두 건이나 더 수집했습니다. 정말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내 눈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

“보려고도 안 하셨잖습니까, 형님. 절대 위 안 쳐다보던데.”

“사돈 남 말 하는 구나.”

“쟤네 뭐하냐?”

수상함을 감지한 이건우가 둘을 가리키자 다른 멤버들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두 사람 근처에 앉아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한율을 제외하고.

길우성과 박가람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콘텐츠 회의?”

“수상한데.”

“……?”

두 사람의 놀림 타깃이 되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유호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작곡 프로그램을 띄운 노트북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차남석이 한율 옆자리에 앉았다.

“그게 어제 받은 대본이야?”

얇은 대본을 팔랑팔랑 넘기며 보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SBC 단막극.”

“무슨 내용?”

“괴담?”

“재밌겠네.”

“형도 오디션 볼래요? 곧 공고도 뜬다고 하던데.”

“줘 봐.”

턱. 대본을 넘기자, 차남석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주란다고 진짜 주냐?”

“어차피 오디션 보러 가면 대본 나올 텐데요.”

“그 말이 아니…, 하아. 됐다.”

차남석이 한숨을 쉬며 도로 대본을 돌려주었다. 한율은 얘가 왜 이러나 멀뚱히 보다가 다시 대본을 펼쳤다.

SBC측에서는 어떤 배역 오디션을 보라고 콕 집지 않았지만, 받은 대본에서 한율이 맡기 적당한 배역은 딱 셋이었다. 하나는 주조연 급, 다른 둘도 조연급. 그래서 세 캐릭터의 대사 모두 유심히 읽었다. 그러고 눈을 감고 대본에 적혔던 대사를 읊어보는 중,

우웅.

“……?”

가까이에서 들리는 진동소리에 눈을 뜨자, 차남석이 자신의 핸드폰에 뜬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보며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거절 버튼을 누르고 해당 번호 수신차단.

“사생?”

본인명의 핸드폰이 아니라서 번호유출염려는 적다고 들은 것 같은데.

“…….”

차남석은 말없이 한율을 쳐다보다가, 인터넷기사 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블루액션, 거침없는 행보! 보컬 시리즈 PD와….]

“몰라. 난 원래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안 받으니까.”

“형! 순두부, 정말 콩으로 만들어?!”

그때 라이언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언이 조유찬을 보며 공식팬클럽 회원 전용 게시판을 띄운 핸드폰을 가리켰다.

“콩 싫다!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순두부가 콩으로 만들었대! 이프림이!”

“어…, 맞아.”

“오마가쉬….”

정말 충격 받은 얼굴로 라이언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차남석이 작은 목소리로 툭 뱉었다.

“멍청이.”

“그런데 형은 블루액션 기사 자주 보는 것 같네요.”

차남석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주변에서 하도 우리랑 라이벌이라고 떠드니까 신경 쓰이잖아. 아, 너 요즘도 민준 선배님하고 연락해? 어제 블블 한국 들어왔다는 기사 떴던데.”

한율은 말로 설명하기 귀찮아, 민준과의 톡창을 핸드폰에 띄워 보여주었다.

-[목요일 스케줄 비엇지? 형이 초밥 사줄게ㅎ 작년부터 한 약속을 지킬 참이니까 꼭 나와ㅎㅎ]

[죄송하지만 회를 싫어해서요. 다른 분과 맛있게 드세요. :)]

-[!]

-[치킨은 싫다 그랫지?]

[네.]

-[.....]

-[찜닭은 어때?]

[몇 시에 어디로 나갈까요?]

“…유찬이 형한텐 허락받았어?”

“오 팀장님에게 그대로 캡처해서 보여드렸더니 괜찮다고 하시던데요. 이참에 팬들 눈에 띄지 않게 사적인 개인시간 보내는 노하우라도 배워오라고. 아, 그리고.”

한율은 톡창을 더 아래로 내렸다.

민준이 시간과 장소를 고지한 톡 다음 줄.

-[친구 두 명 정도 더 데리고 와도 괜찮아!]

-[아]

-[여자애는 안 돼 사진 찍히면 위험해]

-[여자애가ㅜ]

“같이 가실래요?”

차남석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콜.”

* * *

다음 날. 하교하자마자 숙소에서 교복만 갈아입은 한율은 차남석, 길우성과 함께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길우성은 핸드폰을 붙들고 안절부절못했다.

“가람이 형이 그러는데, 호 형 아직도 어제 우리가 놀린 것 때문에 삐친 거 안 풀렸대. 어떡하지?”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이 멍ㅊ… 아니, 바보야.”

“이따 돌아올 때 호 형 좋아하는 거라도 살까? 호 형 뭐 좋아하지?”

욕을 하려다 순화시킨 차남석이 길우성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녹색사과.”

“아, 그거! 과일가게 들르면 되나?”

택시기사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 사과 7월이나 되어야 수확하는데?”

“아안돼에…! 그 다음은? 호 형이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작업실 미니 냉장고에다 냉동딸기 넣어뒀다가 당 떨어질 때마다 꺼내먹는다더라.”

“와, 우리한텐 살찌니까 당분 많은 과일은 먹지 말라더니! 기사님, 냉동딸기는 언제 나와요?”

“365일.”

“오오!”

“…….”

“야, 서한율.”

차남석이 사이에 앉은 길우성을 두고 물었다.

“이놈 데리고 나온 거 후회 안 되냐?”

“안 들 리가요.”

핸드폰으로 냉동딸기를 검색한 길우성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365일 나오는 것도 모자라 저렴하기까지 해! 냉동딸기, 너로 정했다!”

약속장소는 번화가 안쪽 골목에 위치한 찜닭 전문식당이었다. 이제 막 5시라 그런지 손님은 얼마 없었다.

“일행이 A룸으로 예약했다고 들었는데요.”

“아,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은 약간 호기심 섞인 눈으로 셋을 쳐다보다, 가벽 파티션으로 홀과 나눠진 안쪽의 개별실로 안내했다. 현란한 무늬 시트지가 부착된 유리문은, 일부러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사람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도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 중 하나가 블블의 민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어스래ㅂ….”

“야.”

“아, 여기 방송국 아니지, 참.”

근 한 달 동안 입에 달고 살았던 인사를 반사적으로 내뱉으려던 길우성이 황급히 말을 삼키자,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한 사람은 블블의 리더 수재, 다른 사람은 이름은 모르지만 왠지 낯익은 젊은 남자였다.

“괜찮아. 우리도 너희처럼 그랬을 때가 있었으니까.”

“진짜 반갑다. 드디어 실물로 만나는 구나.”

“만나서 반갑다, 후배들아.”

그들은 거리낌 없이 악수하듯 손을 잡은 후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했다. 수재가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란히 앉으면 꼭 면담하는 것 같으니까 섞어서 앉자. 그런데 나 왼손잡이라서 내 왼쪽에 앉는 사람은 불편할 거야.”

“그럼 형이 왼쪽 끝에 앉으면 돼.”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한율이 안쪽에 자리를 잡자 그 옆에 이름 모를 사람과 길우성, 맞은편에는 민준과 차남석, 수재가 앉았다.

민준이 물었다.

“학교 끝나고 바로 온 거야?”

“네, 교복만 갈아입고 왔어요. 선배님들은 어제 귀국하셨죠?”

“어. 와… 그런데.”

민준이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벗으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탈색과 염색을 거듭해서 그런지 머리카락이 퍽 부스스했다.

“톡이랑 TV로 자주 봐서 그런지 처음 만나는 것 같지가 않다. 완전 신기해.”

“저도요.”

수재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율과 차남석, 길우성을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런데 조금 당혹스럽지 않았어? 민준이가 보기랑 다르게 좀 많이 질척거리는 스타일이라.”

“취해서 새벽에 톡 보내셨을 때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당혹스럽진 않았어요.”

“으아아…!”

민준이 뒤로 상체를 돌리며 소심하게 몸부림쳤다. 민준의 일행은 질색하는 얼굴로 민준을 쳐다보았다.

“어우씨, 듣는 내가 다 쪽팔리네.”

“그래도 전화는 안 한 게 어디야. 너희들한테만 해주는 말인데, 쟤 취하면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다 전화한다? 새벽 세 시에 전화해서 밥 먹었냐고 물어봐.”

“선배님 그렇게 안 봤는데….”

“내가.”

귀가 발갛게 물든 민준이 꾸무럭거리며 정자세로 돌아왔다.

“첫 술을 잘못 배워서 그래. 너희는 나중에 성인돼서 처음 술 마실 때, 꼭 어른한테 먼저 배워. 절대 성인된 거 자축하는 의미로 친구들끼리 첫술 먹지 마. 안 그럼 나처럼 버릇 잘못 들인다.”

“네.”

오리지널 찜닭, 치즈찜닭, 해물찜닭을 비롯해 여러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울 때 즈음 오간 통성명 시간은 새삼 어색했다. 그리고 블블 멤버는 아니지만, 낯익은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배우 김재신이었다.

차남석은 처음부터 그가 누군지 알아차린 눈치였다.

“선배님도 예전에 수재 선배님이랑 스엔에 있으셨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찜닭을 해체하던 김재신이 놀란 눈으로 차남석을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혹시 자네, 내 팬인가?”

“예전에 대표님에게 들은 적 있어요. 대표님이 스엔에 계실 때 선배님도 거기 연습생이셨다고.”

수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랑 스엔에 있다가 같이 방출됐어.”

“형은 그게 자랑이야?”

“그 덕에 지금 블블에 있는 거니까 자랑이지?”

“예에!”

수재와 민준이 차남석의 머리 위에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막 찜닭에서 당면을 건지던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먼지 날려요, 선배님들.”

“죄송합니다.”

“저희야말로 죄송합니다. 써한이 말버릇이 조금 없어요.”

민준이 길우성에게 괜찮다는 듯 웃었다.

“음, 톡하면서 느꼈어. 그래도 괜찮아, 동생이니까.”

“톡으로 주정부린 게 쪽팔리고 미안해서 그러는 거 아니고?”

“김재신 씨, 잠깐 뒷문으로 따라 나올래?”

낯을 가리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할 공통 주제도 많아서 그런지 테이블에는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길우성은 블블의 리더이자 메인댄서인 수재에게 몇 집 앨범의 어떤 곡 안무가 인상 깊었다든지 이야기했고, 수재는 아주 가볍게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너희들 아직 어리니까 너무 관절에 무리 가는 안무에 힘 빡빡 주지 마. 연골의 소중함을 깨달을 땐 이미 한참 늦은 거거든.”

“참, 호는 잘 지내지? 걔 아직도 무서운 거 싫어해?”

유호가 스엔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던 게 7년 전. 좌기훈 대표를 따라 WB래빗으로 옮긴 게 5년 전이었으니, 수재와 김재신과도 안면이 있을 법 했다.

“아.”

길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요.”

“뭘?”

“냉동딸기요.”

“……?”

“딸기하니까 딸기 스무디 땡긴다.”

“혹시 선배님들도 로크뮤 조명 귀신 얘기 아세요?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던데.”

“아, 그 얘기.”

민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예전에 듣고 천장 유심히 살펴봤는데 내 눈엔 안 보이더라.”

“그런 건 왜 찾아 보냐?”

“궁금하잖아. 나 한 번도 귀신같은 거 본 적 없단 말이야. 너희는? 귀신 본 적 있어?”

한율과 차남석, 길우성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차남석이 슬그머니 먼저 시선을 내리며 젓가락을 움직이자, 수재가 눈치 챘다는 표정을 지었다.

“봤구나? 본 적 있구나?”

“…어릴 때 두 번 정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한 건은 귀신으로 착각한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다른 한 건은 확실히 귀신이었다는 거네? 언제? 어디에서 봤어?”

조용히 두 귀를 막는 김재신을 제외한 네 사람의 시선이 차남석을 향했다. 차남석은 한율까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너까지?’ 란 표정을 짓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열두 살이었을 땐데, 그때 제가 살던 집이 옆집과 나란히 붙어있었어요. 앞에는 마당이 있었고, 두 집 모두 밖에서 개를 키웠어요. 그런데 옛날 집이라 화장실이 밖에 있었거든요.”

“으어, 벌써 무서워.”

“어느 날 밤에 자다가 12시 조금 넘어서 깼거든요? 그리고 화장실을 가려고 나갔는데, 평소엔 내가 나오면 반갑게 나오던 개가 개집 안에 틀어박힌 채 안 나오더라구요. 꼭 뭐에 겁먹은 것처럼.”

툭. 수재는 아예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집중했다.

“그걸 보고 조금 이상했지만, 그래도 화장실을 갔죠? 그리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나도 모르게 옆집 마당을 봤는데.”

“봤는데?!”

그 순간이었다.

“서비스입니다!”

똑똑, 드륵.

식당 직원이 쟁반을 들고 찾아왔다. 차남석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직원을 향하자 그가 덜컥 멈췄다.

“혹시 블블….”

직원은 놀란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두 귀를 틀어막은 김재신과,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에 집중하던 다른 이들의 분위기를 감지하곤 쟁반을 황급히 내려놓았다.

“중요한 얘기 중이셨구나. 죄송합니다.”

그 순간 심각했던 아이돌들의 얼굴이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 띤 얼굴로 스르륵 바뀌었다.

“아니에요!”

“서비스 감사합니다!”

“네, 네….”

아이돌도 놀고 싶다

대화 주제는 귀신 얘기에서 자연스럽게,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생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비연예인 대부분에게는 남 일이나 다름없는 흥밋거리일 테지만, 같은 아이돌 후배에게 경험담과 조언을 건네는 민준과 수재의 얼굴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집요한 사람들은 가족관계까지 다 알아내거든. 아주 잠깐 TV에 나온 것만 보고도 어디에 사는 누군지 알아내기도 하고.”

“그러니 나중에 정산 받는다, 조금 넉넉하게 받았다 싶으면 바로 부모님 거처부터 보안이 잘 된 곳으로 옮기는 게 좋아. 부모님한테도 낯선 사람 접근은 무조건 경계해달라고 단단히 말씀드리고.”

“나 전에 진짜 깜짝 놀랐잖아.”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민준이 진저리나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떤 사람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우리 아버지한테 접근하더니, 나랑 클럽에서 만나서 몰래 연애하는 사인데 요즘 연락을 잘 안 받는다고 울더란다. 그러면서 전화 한 번만 해봐달라고.”

“미친….”

“우리 아버지야 워낙 내가 온갖 사생한테 당한 걸 아니까 바로 수상한 거 느끼고 자리 피하시긴 했는데… 와, 그 얘기 들으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정말 화나더라.”

“그런 식으로 경찰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지켜가면서 집착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돌아버리지.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엮이면 참지 말고 회사랑 부모님한테 말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는 생각으로 상담을 받아도 좋고. 혼자 끙끙 앓으면 그게 본인한테 더 안 좋아.”

“그러고 보니 선배님들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뭔데?”

길우성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움직였다.

“그…, 녹음실….”

“아!”

“경찰이 출동해서 잡아간 건 아는데, 그 후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요.”

“온갖 처방약 복용 중이라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저지른 거니 범죄의 고의성이 없다고 주장, 얼마 안 가서 풀려났어. 하지만 그 후에 정이 부모님 집 앞에 자꾸 나타나서 신고 당했다가, 우리가 형사고소, 민사까지 진행하겠다 그러니까 그 사람 부모님이 그제야 딸을 아예 외국으로 보내버렸다고 하더라.”

“징글징글하네요.”

“어쨌든 핸드폰도 웬만하면 본인명의 사용하지 말고. 많이 불편하겠지만….”

“…….”

“…….”

핸드폰 이야기에 길우성과 차남석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이 사생 때문에 새 핸드폰을 장만했다가 도로 본인 핸드폰을 쓰는 걸 아는 까닭.

“왜 그래?”

한율은 간략하게 자신에게 붙었던 사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근에 경찰조사를 받은 사생 측이 합의를 요청했지만, 그대로 법대로 가기로 했다고.

이야기를 들은 두 선배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잘했어.”

“팬심에 전화도 못하냐, 팬한테 너무 야박한 거 아니냐 하는 건 다 사생들 본인만족과 합리화를 위한 개소리니까 절대 흔들리지 마.”

“가끔 사생스토커에게 법적으로 강경 대응한다는 기사도 한 번씩 내줘야 경고도 되는데….”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판결나오면 그때 기사로 낼 계획이래요.”

“오, 진짜?”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너희 회사 괜찮은 것 같다. 이상한 데서 눈치 안 보고 바로바로 악플러나 허위사실 유포자들한테도 법적 대응하는 거 보면.”

길우성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깍지를 낀 채 씨익 웃었다.

“오시죠, 선배님.”

“그럴까? 우리 계약 끝나는 날짜가… 내년 몇 월이었지, 민준아?”

“리더란 사람이 벌써부터…. 블블 괜찮은 거냐, 민준아?”

“하하하하.”

대화주제는 곧 각 방송사의 음악방송 PD, 예능 프로 PD를 대할 때의 노하우 전수로 흘러갔다가 블블의 콘서트 썰로 이어졌다.

“특히나 유럽 쪽은 공연 문화가 달라서, 객석이 무대 바로 앞인 경우가 많거든. 안 그런 곳도 있지만 대부분 무대도 좁아서 낙상사고 조심해야 돼. 신나서 사람들한테 손 뻗었다가 순식간에 잡혀서 아래로 넘어갈 수도 있어.”

“정이가 그래서 큰일 날 뻔했지. 민준이가 순간적으로 정이 안 잡았으면…, 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찜닭 접시엔 어느새 야채와 당면 쪼가리만 남았다.

“그래도 거기 있을 때 묵었던 호텔 근처, 학센 진짜 맛있었는데.”

“맞아, 생맥주도 끝내주고. 나중에 해외투어 갈 때 말해. 내가 가서 맛있었던 곳 리스트 쫙 적어서 보내줄게.”

“그런 건 크리스탈 래빗이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나대지 마라, 고동.”

“아, 맞다.”

내내 예의바른 태도로 그들을 대하던 차남석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크래 선배님들 팬들이 우리가 선배님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우리 이프림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을 것 같아.”

“그렇긴 하겠다. 우리 회사는 아직 걸그룹이 없어서. 아, 밥 더 먹을래? 아니면 자리 옮길까?”

민준이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문 쪽을 살폈다. 유리문 시트지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뇨. 배도 부르고, 이제 그만 헤어지는 게….”

“밥만 먹고?!”

민준이 충격 받은 얼굴로 되물었다.

“모처럼 휴일인데, 맛있는 커피나 음료 사들고 노래방에라도 가서 배를 꺼뜨려야지!”

“노래방이요?”

어제 막 해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6년 차 가수 입에서 노래 부르며 놀자는 소리가 쉽게 나올 줄이야. 차남석과 길우성도 경이롭다는 얼굴로 민준을 쳐다보자, 김재신이 단호히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야? 요즘 애들이 좋아하지만, 이용요금이 비싸서 섣불리 가지 못한다는 VR게임방이지! 내가 쏜다!”

길우성의 눈이 커졌다.

“VR…?!”

“저희 내일 스케줄 있는데요, 선배님들.”

“한 시간만!”

VR이란 소리에 눈을 크게 뜬 길우성이 시계를 보더니 한율에게 말했다.

“오 팀장님도 8시까지 들어오면 된다고 하셨으니, 괜찮지 않을까? 괜찮지 않을까, 형?”

상대가 인기가 많은 동종업계 선배나 배우라서 더 친해지고 싶은 그런 게 아니라, VR게임이란 소리에 눈이 돌아간 학생의 얼굴이었다.

김재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8시면 넉넉하네! 가자!”

수재가 활짝 웃었다.

“응, 가게 앞에다 차 대고 있어.”

“네, 형님.”

“전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요.”

한율은 김재신과 함께 개별실을 나섰다. 휙. 통로 옆에 설치된 가벽 파티션 안쪽, 누군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게 눈에 잡혔다.

김재신이 한쪽을 가리켰다.

“화장실은 저쪽.”

“네, 감사합니다.”

한율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김재신이 밖으로 나가는 걸 본 후 카운터로 향했다.

“A실 계산할게요.”

“네, 91,000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한율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가벽 안쪽 테이블 자리를 살폈다.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성 셋이 고개를 최대한 숙인 채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옆에는 소위 ‘대포 카메라’라 불리는 카메라가 충분히 들어갈 법한 가방.

‘홈마? 사생? 기자?’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다시 개별실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막 김재신의 전화를 받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한율은 민준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세 명 따라붙었던데요.”

“두 명 아니고?”

“…괜찮은 거예요?”

“걱정 마, 재신이가 따돌리기 선수거든.”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에 익숙해지다 못해 긍정적인 여유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딱히 배우고 싶진 않은 자세였다.

한율은 그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민준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계산은 제가 했으니 바로 나가시면 돼요.”

민준이 놀라 돌아보았다.

“—뭐?!”

옆에서 수재가 기겁을 하며 민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야, 목소리 너무 크잖아…!”

잠시 후.

“아…, 벌써 목격담 올라왔어.”

수재가 SNS에 뜬 글을 읽었다.

“누가 식당에서 큰소리를 내서 돌아봤는데 블블 민준이랑 수재가! 요즘 뜨는 신인 어스래빗 멤버들까지! 완전 놀랐어요, 눈호강 개이득….”

“내가 바로 가게 앞에 차 안 대고, 한율이가 먼저 계산하지 않았으면 빼박 어물쩍거리다가 그 자리에서 붙잡혔을 거 아냐.”

“으음, 하지만 한율이가 계산했다는 소리를 안 했다면 그렇게 놀라서 소리도 안 질렀을 거라고.”

“저거저거 맛있게 잘 얻어먹어 놓고 후배한테 책임 전가하는 거 보소.”

“블블 민준 인성.”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떠들면서도 김재신은 좁은 골목 안을 유려하게 빠져나오고, 뒤의 차가 계속 행선이 겹친다 싶으면 교묘하게 차선을 바꿔 따돌렸다. 굉장히 숙련된 운전솜씨로.

“그런데요, 선배님들. 우리야 그렇다 쳐도…, 블루액션 멤버들이 보면 많이 서운해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걔네한텐 수시로 밥 사 먹이거든.”

“그래도 너희 팀장이 지랄… 아니, 광질하지 않겠냐?”

김재신의 물음에 수재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6년 차야. 휴일에 만나는 사람들까지 회사에 일일이 보고하고 허락받을 나이는 한참 지났다고. 무서울 게 없도다.”

“이게 바로 우리 팀 리더란다, 후배들아.”

* * *

한율은 한 번도 VR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뇌를 속이는 가짜 감각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후.’

까마득한 지상이 내려다보이는 고층의 유리바닥. 한율은 유리바닥이 깨지고 제 몸이 떨어지는 순간, 전신을 짜릿하게 울리는 감각을 느끼곤 속으로 한숨 쉬었다. 저도 모르게 마나로 몸을 감쌀 뻔했다.

VR게임을 처음 해 보는 건 길우성과 차남석, 민준과 수재도 마찬가지라, 그들은 처음엔 신기해하다가 이내 적응하여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저들끼리 신나게 총싸움을 즐겼다.

“수재 형, 12방향! 아니, 조금 더 왼쪽이요!”

“우성아 날 쏘면 어떡하냐! 우리 같은 팀이야…!”

“이때다! 저쪽 팀이 삽질을 할 때—, 흐억?!”

“원샷원킬러 대체 누구냐? 완전 보이는 족족 사살하는 수준인데, 이거? …우리 중에 군필자가 있었나?”

“무슨 헛소리세요, 님아.”

함께 놀면 더 빨리 친해진다고, 그들은 게임방 내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게임에 대해 떠들다가, 그들을 알아보며 다가온 사람들과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주었다.

“너희 숙소에 컴 있어?”

“아뇨.”

“아쉽다. 있으면 같이 FPS나 하는 건데.”

“하나 장만하는 게 좋을 텐데. 팬 분들이랑 게임도 같이 하려면.”

“그런 것도 해요? 팬 분들이랑?”

“응. 그리고 팬 분들이라고 해도 승부의 세계에선 인정사정없어. 막 달리고 있는데 물폭탄 던지고 바나나 투척한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전투 민족?”

“슬슬 가야할 시간이니까 사진이나 한 장 찍자.”

놀다보니 어느새 7시 20분. 민준이 높이 든 핸드폰 화면에 테이블에 둘러앉은 여섯 명이 모두 담겼다. 그리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비즈니스용 미소 장착.

찰칵.

“그럼 남석, 나중에 심심하면 톡해.”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저녁 잘 먹었어, 한율아. 다음엔 진짜 내가 살게.”

“음식 모바일쿠폰만 그만 보내시면 됩니다, 선배님.”

“수재 선배님, 오늘 온갖 노하우 전수 감사합니다.”

“그래. 관절 조심하고, 다음에 시간되면 또 보자.”

“다들 내일 방송 잘해.”

그들은 어스래빗 멤버 세 명을 WB래빗 회사 건물 앞까지 데려다준 후 떠났다.

멀어지는 차를 보며 차남석이 심호흡을 한 뒤 가볍게 숨을 뱉었다.

“후…. 정말 소문대로네. …서한율, 고맙다.”

“뭐가요?”

차남석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네 덕에 좋은 인맥이 늘어난 것 같아서.”

“아앗!”

“……?”

소리를 지르며 멈춘 길우성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편의점과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편의점에도 냉동딸기 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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