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427)

* * *

[블블, 어스래빗과 훈훈한 만남?!]

[지난 5월 11일, 블랙블러드 리더 수재의 개인 SNS에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시계방향으로 블블의 민준, 수재, 배우 김재신, 어스래빗 우성, 남석, 한율. (사진=블블 수재의 개인 SNS)]

사진에는 민준과 수재의 절친이라 알려진 배우 김재신을 포함, 최근 핫한 신인으로 주목받는 어스래빗의 남석, 한율, 우성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연남동의 한 식당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VR게임방으로 가서 신나고 건전한 여가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요즘 기자님들 기사쓰기 참 쉽죠?

-개인 SNS에 올라온 걸 그대로 복붙해서 문장 조금 고치는 게 취재냐?!

-신나고 건전한ㅋㅋㅋㅋ

-데뷔 6년차 최고 26살, 데뷔 1년차 최소 18살. 같이 찜닭 먹고 VR게임방에서 신나고 건전하게...ㅋㅋㅋㅋㅋ귀엽네

-????? 왜 블루액션은 없죠ㅠ 블루액션도 좀 챙겨줘요...

ㄴ퍼랭이들한텐 평소에 맛있는 거 많이 사준다고 그라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너 블루 팬 아니지?

-그 내용은 빠졌네. 저녁 한율이가 샀다고 함. 9만 원 정도 나왔다는 현장 증언 피셜.

ㄴ?!!

ㄴ잉ㅋㅋ

ㄴ막내 플렉스ㅋㅋㅋㅋ

-그 내용도 빠짐. VR겜방비는 전부 김재신이 쐈다고 함. 운전도 김재신이ㅇㅇ

ㄴ블블 뭐얔ㅋㅋ 제일 잘 벌면서 얻어먹기만 한 거냐?!ㅋㅋㅋ

ㄴㅋㅋㅋㅋㅋㅋㅋ

-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근데 얘들 다 민낯인데도 외모가 얄짤없네ㅎㅎ

-이 조합 찬성이요.

휙휙. 화려하게 네일아트가 된 손이 핸드폰 액정을 슥슥 어루만졌다. 다리를 꼬아 삐딱한 자세로 앉은 이희우가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섭섭하네. 지들끼리만 만나서 놀고.”

친해지길 바라

“얘가 큰일 날 소리하네. 희우 네가 이 자리에 끼면 바로 스캔들 터지지.”

이희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꽂은 빨대를 입에 물었다. 한 모금 쭉 마신 후, 빨대로 얼음을 휘저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 이미 민준이랑 번호 교환했는데?”

“…뭐?”

“서로 동물팡 하트 주고받는 사이야.”

“미쳤—.”

“그것보다 한율이 다시 연기할 것 같다며. 누구 작품 들어갈 거래?”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려던 매니저는 주위를 살폈다. 샵 직원이 이희우의 머리카락에 영양분을 듬뿍 먹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가오고 있었다.

“여름 방영예정인 SBC 단막극 시리즈라더라. 무슨 에피인지는 모르겠고.”

“감독은?”

“임미숙PD님.”

“외주 안 주고 직접? 오, 괜찮겠네. 나도 할래!”

“…….”

매니저는 말없이 이희우 손에 들린 커피를 가져갔다. 샵 직원이 이희우의 목에다 커트 보를 둘렀다.

이희우가 거울에 비친 매니저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지, 방금 언니가 날 존나 재수 없다는 눈으로 본 것 같은데.”

“그쪽에다가 연락해서 가능한지 알아볼게. 한율이랑 같이 연기하고 싶은 거 맞지?”

말을 돌리는 방법으로 긍정. 하지만 이희우는 불쾌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부탁해.”

“네네.”

매니저는 이희우의 커피를 거울 앞 테이블에 올린 후 샵을 나갔다. 이희우는 생글생글 웃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재밌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

한편 그 시각, KBC의 <뮤직뮤직> 어스래빗 대기실.

한율은 수차례 읽은 대본을 툭 덮었다.

‘아무리 봐도 재미가 없어.’

그때 화장실에 갔던 이건우, 박가람, 강보배, 라이언이 돌아왔다. 박가람이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더니 다른 멤버들에게 말했다.

“우리, 단독 대기실 받은 거 가지고 소문 도나 봐.”

“무슨 소문이요?”

“우리 회사랑 여기 PD님이랑 사이가 굉장히 좋다는 소문.”

조유찬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인이 막방하는 날까지 단독 대기실을 배정 받아서 쓰고 있으니 그런 소문이 돌 법도 하지만, 우리도 이유를 알고 싶은데 말이지.”

“정작 PD님도 우리 볼 때마다 표정 조금 이상하지 않나?”

“혹시 우리 중에 국회의원이나 장관 아들이라도 있었던 건가?!”

“…….”

한율은 무심한 얼굴로 대본을 가방 안에 넣었다.

지난 번, 부친에게 연락해서 혹시 <뮤직뮤직>에서 어스래빗이 단독 대기실을 쓸 수 있도록 손을 썼냐 물었을 때, 부친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며칠 후, 부친의 전화.

『알아보니, 예능국장 그 친구가 널 알아보고 어스래빗에게 단독 대기실을 배정해주라고 했다더구나. 기억나지? 한율이 네가 초등학교 졸업했을 때 우리 집 놀러 와서 조금 촌스러운 패딩 선물해준 삼촌. 아무튼 예전에도 너희처럼 멤버 수가 많은 그룹에게 기획사가 어디든 종종 독실을 주었다고 하니 크게 문제되진 않을 거라 하던데…. 어떻게, 내가 그 친구를 찾아가서 확—.』

그러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단독 대기실을 제외하곤 크게 차별대우하는 건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친구에게 따지는 초코톡 내용을 스샷으로 저장해놨으니, 나중에 말 나오면 그걸 공개하면 된다!』

뭐, 나중에 문제되면 알아서 하겠지.

한율은 작게 한숨 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는 동안 박가람은 길우성을 붙잡아 취조하고 있었다.

“혹시 네가 제주도에 삼만 평 땅과 고오급 펜션 여러 채를 소유한 부잣집의 도련님?!”

“하하. 이번에 우리 집 식당 건물주가 바뀌었는데, 월세 올려 받겠다 그랬대여. 꼬우면 나가라고.”

와락!

“형이 미안하다! 사랑한다! 힘내라!”

“말로만?”

“아이스크림 먹을래? 이번에 베스트31에서 민초 이벤….”

길우성이 기겁을 하며 박가람을 밀어냈다.

“민초라니! 상종 못할 사람이었어!”

“민초가 어때서!”

“치약에 초콜릿 섞은 걸 어떻게 먹어요?!”

“치약이 민트 맛이 많은 거지, 민트가 치약은 아니야!”

“이렇게 박길장꾸단이 파국을 맞는 건가.”

이건우의 말에 유호가 반색했다.

“조용해지고 좋겠네.”

“한율아, 팬카페에서 진행 중인 투표 상황 봤어?”

강보배가 한율 옆자리에 앉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아뇨.”

“팬들 눈에는 이렇게 보이나봐.”

[사실은 다 친하지만! 겉만 봐선 안 친해 보이는 멤버 두 사람을 꼽아주세요!]

[현재 득표 순위.

1. 건우&한율

2. 라이언&우성

3. 보배&남석….]

정작 사이가 안 좋은 차남석과 라이언 팀은 상위권에 없었다. 아무래도 지난 번 ‘취미 즐기기’ 그린라이브 방송 때,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전혀 티내지 않고 함께 다녀서 그런 듯.

“한율이 네가 봐도…, 나랑 남석이랑 안 친해 보여?”

“같이 있을 때가 적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숙소에서 쓰는 방도 다르고 학교도 다르고, 팀에서도 주로 맡는 파트도 다르며, 휴식시간에도 각자 유호의 작업실이나 보컬연습실로 찢어진다. 대화를 나눌 만한 공통관심사도 적은 듯하고.

“그래도 다음 주에 같이 <동갑끼리>라는 프로그램 촬영가잖아요. 그라에 올라갈 에피도 찍고 그 프로그램도 방영되면 오해가 줄지 않을까요?”

강보배가 결연한 얼굴로 다짐했다.

“음, 그때 이프림의 오해를 풀어야겠다.”

5월 14일 일요일. 어스래빗은 SBC의 를 끝으로 이번 앨범 활동을 종료했다. 막방 기념으로 그들은 대기실에서 깜짝 라방을 진행했다. 예전에 팬 사인회를 열었을 때 팬들에게 선물 받았던 특이한 머리띠를 하나씩 쓴 채.

한율은 후드소녀가 선물해준, 당근을 든 토끼인형 머리띠를 쓰고 첫 인사를 했다.

“우리 사랑하는 이프림 여러분들 덕분에, 저희 첫 데뷔 앨범 [Breaching]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율이 머리띠 커엽ㅋㅋㅋ

-감사는 무슨 우리가 더 고맙지ㅠㅠ

-너희들 모두 데뷔해줘서 고마워♡

유호가 이어 말했다.

“그래도, 다음 앨범을 준비하는 동안 여러…가지? 모습을 또 선보일 테니까요, 기대 많이 해주세요!”

-여러 가지?!

-뭐야 뭔데 뭐할 건데??

슬그머니 작은 떡밥을 투척한 이후엔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이번 앨범 활동을 하면서 느낀 소감을 말했다. 방송할 때의 소소한 에피소드도 함께.

“활동도 중반 정도 지나니까, 매니저 형이 이젠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어도 된다 그래서 정말 마음껏 먹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일주일 동안 식비가…, 얼마 나왔다고 했지?”

“150만원.”

-히익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식탐토끼냐고ㅠㅠㅋㅋㅋ

“그런데 이것도 적게 나온 거예요. 가끔 써한… 아니, 한율이가 아는 선배님한테 선물 받은 모바일쿠폰으로 아이스크림이나 보쌈을 주문해서.”

“실명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거야?”

-민준이라고 왜 말을 못햌ㅋㅋㅋ

-민준이요?? 블블 민준?

-아ㅎㅎ 둘이 친하지?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생글생글 웃었다.

“민준 선배님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다른 멤버들도 카메라를 향해 꾸벅였다.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송 보실까? 워낙 바쁘시니까 못 보실 것 같은데.”

“나중에 제가 따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아, 지금 팬카페에서 하는 투표요? 그게 떡밥이랑 관련된 거냐고요? 그럴 수도 있고~.”

유호가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차남석이 웃으면서 넘겨받았다.

“아닐 수도 있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건우 씨랑 한율 씨. 이번 투표에서 두 분이 1위를 달리고 있던데.”

한율과 이건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얘네 이번에도 완전히 따로 떨어져 앉았엌ㅋㅋ

-멀다

-마음의 거리야?ㅋㅋㅋ

이건우가 황급히 카메라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저희가 둘만 있으면 딱히 나눌 대화가 없어서 조금 어색하기는 한데, 안 친한 건 아니에요.”

-어색한 게 안 친한 거잖아 건우얔ㅋㅋㅋ

-무슨 소리얔ㅋㅋㅋ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이프림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한율이가 카메라나 이프림 여러분한테는 잘 웃잖아요? 그런데 우리들끼리 있으면 어엄청 무뚝뚝해요.”

“남석이도 그렇고.”

“그래서 얘네 둘이 나란히 앉아있으면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어요.”

“그럼 남석이랑 건우도 어색해요? 라고 이프림 한 분이 물어보시는데요?”

“네, 쟤랑도 조금 어색해요. 4년을 봐왔는데, 둘이 같이 있으면 무슨 얘기를 나눠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건우 자폭ㅋㅋㅋㅋㅋ

-건우한테 왜들 그랰ㅋㅋㅋ

-건우야ㅜㅜ..

-형아 좀 챙겨줘ㅠㅠㅋㅋㅋ

“그런데 정말 친한 사람들끼리는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편한 거랬어요.”

“저도 건우 형이랑 같이 있는 거 편한데요?”

차남석에 이어 한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이건우가 아 하며 되물었다.

“나 혼자만 어색하다 느낀 거였구나?”

한율과 차남석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ㅋㅋㅋㅋ

-건우얔ㅋㅋㅋㅋ

-건우 은근 소심캐ㅋㅋ

막방 기념 라방은 한 시간 정도 진행한 후에야 끝났다. 멤버들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흐아아아, 진짜 끝났다아…!”

“이제 잠은 제시간에 잘 수 있는 건가요?”

“와…, 뭔가 기분 이상하다. 내일부터는 새벽부터 일어나지도 않고, 무대도 안 뛴다는 게.”

“그러게.”

짝짝. 조유찬이 박수를 치며 주의를 끌었다.

“뭐 잊은 건 없는지 잘 챙기고. 이따 차 탈 때는 건우랑 한율이, 우성이랑 라이언 같이 타. 전달사항 있으니까.”

“네.”

* * *

데뷔 앨범 활동이 종료된 바로 다음 날, 월요일.

학교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데,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스래빗 그린라이브 영상제작을 맡은 업체 카메라맨과 PD가 한율과 길우성에게 각각 미션 봉투와 짐벌에 끼운 촬영용 핸드폰을 전달했다.

봉투에는 이번 그린라이브에 올라갈 영상 제목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친해지길 바라.>

예전에 방영했던 유명한 예능에서, 사이가 어색한 두 MC가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기획되었던 걸 연상시킨다.

“감사합니다.”

한율은 예의바르게 인사한 후, 카메라가 옆으로 바짝 붙어서야 천천히 내용물을 꺼냈다.

[전화나 메시지 보내지 않고 건우 찾기]

[건우에게 ‘안 어색하다’, ‘편하다’ 말 듣기]

“지금부터 바로 시작이에요?”

“네, 그리고 미션 내용은 클리어할 때까지 상대방한테 비밀이에요.”

옆에서 마찬가지로 미션 봉투를 받은 길우성은 카메라가 제게 오자 렌즈에 대고 미션지를 펼쳤다.

“라이언과 노래나 댄스버스킹을 해서, 관객에게 호흡 잘 맞는다는 칭찬받기입니다. 단, 우리 곡은 금지.”

“저는 기다렸다가 회사에서 만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싱거우니 지금 바로 건우 형이 다니는 학교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성.”

“엉?”

“나 먼저 갈게, 이따가 보자.”

한율은 길우성에게 웃으며 손을 흔든 후 이동했다.

한율이 카메라나 팬들 앞에서‘만’ 태도가 살가워진다는 것에 익숙해진 길우성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엉.”

택시를 타고 이건우가 다니는 대학에 도착한 한율은 카메라부터 켰다. 학교 측에다가는 이미 회사가 촬영허가를 받은 상황. 한율은 대학 입구에 세워진 캠퍼스 맵으로 학과건물 위치를 찾았다.

“건우 형이 다니는 예대 건물이….”

교복을 입고 핸드폰을 끼운 짐벌을 들고 다니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어디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란 표정으로 유심히 쳐다보기도.

한율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촬영을 진행했다.

“그런데 지금 시간에 아직 형이 학교에 있을까 모르겠네요. 제가 항상 5시쯤에 회사에 가는데 그때마다 형이 있었거든요. 아, 저긴가 보다. 안녕하세요!”

예대 건물을 찾은 한율은 그곳에서 나오는 두 명의 여학생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으로 입부터 가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뭐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네? 네.”

“혹시 영상학과 오늘 강의 다 끝났을까요?”

“네, 방금 끝났어요.”

대답해주면서도 여학생들은 어지러운 시선으로 한율을 살폈다.

누구지? 왠지 낯이 익은데? 누구지?

“혹시 영상학과 학생 분이세요?”

“네.”

“그럼 3학년의 이건우….”

그 순간 한 여학생이 ‘꺄아’와 ‘아아’ 그 사이의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어스래빗! 맞죠?!”

한율은 두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은 후, 이건우가 도서관에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카메라에 대고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이 실용무용과가 아닌 영상학과란 사실을 알았을 때도 조금 놀랐었는데, 앨범 활동이 끝난 바로 다음 날부터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 중이라니… 놀라움의 연속이네요, 여러분.”

그 순간이었다.

“어어?!”

그때 누군가의 놀란 목소리가 한율의 주의를 끌었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던 한 남자가 한율을 보고 놀랍고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한율 씨!”

무공공 프로덕션의 부윤방PD였다.

각국의 발음 모두 존중합니다

“어…, 지금 무슨 촬영 중인 거예요?”

반갑게 달려온 부윤방은 뒤늦게 한율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곤 뒷걸음질 쳤다.

“그린라이브에 올릴 영상 촬영 중이었어요. 안녕하세요, 부PD님.”

“네, 안녕하세… 어, 저 편집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실은 어스래빗 팬 분들에게 아직 낯짝을 들이댈 용기가 안 나서…. 하하.”

“네.”

한율은 아예 녹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작년, 웹툰 원작의 웹드라마 <가미난무> 캐스팅 소란이 일었을 때 무공공도 적잖이 욕을 먹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몇 달 전, 주인공 역을 맡은 스타믹스의 지헌이 촬영 도중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자 몇몇 어스래빗 팬들이 ‘그때 한율이 픽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깨진 간장 종지!’라고 비꼬는 댓글을 달았다고.

“그런데 여기에서 무슨 영상을 촬영 중인 거예요? 혹시… 나중에 다니고 싶은 학교 탐사?!”

이곳 졸업생이었던 걸까. 부윤방의 눈에 미약한 기대가 서렸다.

“아뇨, 같은 팀 멤버인 형 찾아왔어요. 여기 영상학과에 다니거든요.”

“그럼 제 후배네요! 유 대표도… 아니, 그 사람은 치우고. 아무튼 더 반갑네요. 아, 그리고 한율 씨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

부윤방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하울링 1화 잘 봤어요. 정말 멋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PD님 지금 바쁘세요?”

“아뇨, 그리 급하진 않은데….”

한율은 저 멀리 보이는 도서관 건물을 가리켰다. 이곳 도서관은 외부인 출입금지 장소. 하지만 졸업생이라면 출입이 가능하지 않을까?

“저기에서 사람을 좀 찾아야 하는데, 바쁘지 않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부윤방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한율은 그와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부윤방은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술술 털어놓았다.

“지난달에 겨우 <가미난무> 촬영 끝내고 최근에 혼자, 따로 독립영화를 구상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 친한 교수님에게 조언도 구하고, 또 현장실습을 해보고 싶다는 후배들이 있다 그래서 겸사겸사 온 참이에요.”

‘혼자’, ‘따로’를 특히 강조하며 한율의 눈치를 보는 태도에서 다시 미약한 기대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작년 무공공 측이 한율의 캐스팅 불합격 사실을 직접 연락이 아닌, 기사로 먼저 접하게 한 전적이 있어 섣불리 제안하는 게 염치없다 느껴지는 모양.

한율은 예의상 물었다.

“그러시구나. 무슨 내용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럼요! 원래 고양이를 싫어하는 주인공이, 어쩌다보니 한 길냥이를 돌봐주게 되었다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이에요.”

“고양이를 데리고 촬영이라…. 힘들겠네요.”

동물을 데리고 하는 연기는 여러모로 까다롭다. 기본적으로 말이 안 통하므로. 그리고 까딱했다가는 동물학대로 이뤄진 촬영이라는 소리도 나올 터.

“네. 하지만 최근 알게 된 수의사 분이 기꺼이 도와주겠다 하셔서 이참에 도전해보려고 해요. 한율 씨는 고양이 어때요?”

“귀엽죠. 집에 두 마리 있어요.”

“집사 동지였네요. 하하!”

한율은 잠시 생각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많은가?

“그래서 말인데, 저기….”

부윤방은 도서관에 다다르고 나서야 조금 전부터 꺼내고 싶어 눈치보던 용건을 내밀었다.

“한율 씨만 괜찮다면 나중에 대본을 보내도 될까요?”

대본을 받는 것 자체가 수락의 의미는 아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밌으면 좋겠네요.”

“하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잠시 후, 부윤방에게는 ‘도움을 준 사람1’로 모자이크 처리하겠다 약속한 후 촬영을 재개. 한율은 그의 도움으로 도서관 앞에서 이건우와 만날 수 있었다.

[전화나 메시지 보내지 않고 건우 찾기] 미션 클리어.

한율과 이건우는 멀어지는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도서관에서 공부 중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단 자리를 옮겼다. 이제 한율에게 남은 미션은 [건우에게 ‘안 어색하다’, ‘편하다’ 말 듣기].

‘어떤 맥락에서 이 말을 끌어내주길 원하는지 감은 오지만, 정말 꼭 그래야할 필요는 없겠지.’

“죄송해요, 형. 전화랑 메시지는 사용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이건우도 <친해지길 바라> 에피소드 촬영이 곧 진행될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아, 그게 미션이었구나.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말을 걸기에 난, 나한테도 형님 팬이 있었나? 하고 순간 놀랐다.”

“아쉬우신가요?”

“약간?”

“자, 그럼 이프림 여러분에게 인사해주세요.”

한율은 카메라 렌즈 방향을 이건우에게로 돌렸다. 스케줄을 뛸 때와는 다르게, 조금 부스스하게 내려온 머리카락에 동그란 안경을 쓴 이건우가 카메라에 대고 인사했다.

“이프림, 안녕! 평범한 대학생 버전 건우입니다!”

한율도 옆에 끼어들어 손을 흔들었다.

“평범한 고등학생 버전 한율입니다. 평범한 대학생 건우 씨, 도서관에서는 뭘 하고 계셨습니까?”

“그동안 밀린 과제 폭탄을 하나씩 해체하여 정리 중이었습니다.”

“아, 그럼 내가 방해를….”

“아니야, 슬슬 배고파져서 그만하고 나오려던 참이었어. 한율이 너도 배고프지? 뭐 좀 먹으러 갈까?”

“네.”

“뭐 먹을까? 한율이 넌 뭐 먹고 싶어? 형이 사줄게.”

제 딴엔 촬영 중이고 하니 노력하는 것 같긴 한데, 평소엔 쓰지 않던 살가운 말투를, 특히나 팬도 아닌 동성에게 구사하려니 어색해 죽으려는 게 느껴진다. 살짝 구부린 손가락 관절에 힘이 바짝 들어간 게 보인다.

“형, 평소대로 편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색한 게 너무 티나는데.”

“무…, 슨 소리야! 편한데? 완전 편한데? 안 어색한데?”

[건우에게 ‘안 어색하다’, ‘편하다’ 말 듣기] 클리어.

한율은 다행이다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럼 스테이크 먹고 싶은데, 괜찮죠?”

“……!”

아직 정산 받으려면 한참 먼 가난한 대학생은 그 자리에서 덜컥 굳었다.

“농담이에요, 형.”

“하…, 하하하. 그런 농담은 하는 거 아니야.”

“우성이랑 라이언 댄버할 것 같던데, 한 번 연락해보고 괜찮으면 합류할까요?”

둘이 넷이 되는 것만으로도 더 편해질 것 같은지, 이건우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자.”

길우성과 라이언은 한강공원의 버스킹 스팟에 있었다.

아무리 짧은 버스킹이라 해도 불특정다수가 모이고 미션 성공여부도 체크해야 하다 보니, 그곳엔 프로덕션 스태프들과 매니저 현장전도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율과 이건우가 도착했을 땐 한창 공연이 진행되던 중으로, 계단식 의자에 앉은 수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날 보고 미쳐!]

세고 강렬하고 섹시한, 걸그룹 노래의 커버 안무를 추는 길우성과 라이언의 모습이 잡힐 정도로 가까워지자 이건우는 더 이상의 접근을 거부했다.

“저 노랫소리 듣고 설마 우리 애들은 아니겠지 했는데….”

“잘 추네요.”

“그래서 더 가까이 가기가 싫다….”

연습생 시절, 남자연습생이라고 늘 보이그룹 커버 안무나 파워풀한 댄스만 배웠던 건 아니었다. 그 당시 유행한 인기곡에 퍼포먼스까지 멋있으면 무조건 배웠다. 그게 걸그룹 노래든 아니든.

사람들은 길우성과 라이언이 단순히 주목받기 위해 걸그룹 노래를 선택해 어설프게 따라 추거나 과장된 표정이나 몸짓을 만드는 게 아닌, 정말 원곡 가수처럼 완벽에 가까운 커버 안무를 구사하는 데에 더 열광하고 있었다.

이건우는 파워풀하다가도 유연한 동작을 선보이는 둘을 보며 속마음을 내뱉었다.

“눈에 띄면 우리도 시킬 것 같잖아. 쟤네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건데….”

아.

한율은 건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저 멀리 세워진 푸드트럭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핫도그나 하나씩 사먹고 있을까요?”

“좋은 생각이다.”

두 사람은 황급히 버스킹 장소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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