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427)

* * *

밤 9시. 지난주처럼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에는 <깡충깡충 영어극장>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두 번째로 나온 멤버는 유호와 차남석, 박가람.

유호는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다가, 차남석과 박가람의 발음만 교정해주었다.

[여러분, 물은 워러가 아니라 워터.]

[미국에선 워러라고 하지 않아요?]

[미안, 난 영국에서 이렇게 배웠어. r을 고집하지 말고 t를 챙겨줘.]

-호얔ㅋㅋㅋ

-ㅇㅂㅇ<박다람 표정

[그리고 A는 ai.]

-아니 잠깐만ㅋㅋㅋ 이거 멤버들 영어 공부도 겸한다고 들었는데 한율이랑 라이언은 미국식이잖아욬ㅋㅋ

-한율인 또 미국에서 텍사스 사투리ㅎㅎㅎ

-한 팀 안에서도 통일되지 않는 혼돈의 영어ㅋㅋㅋ

-호 오빠 표정은 왜 저렇게 인자한 건데욬ㅋㅋㅋ

그 순간, 영상이 잠깐 회색으로 물든 채 멈추더니 커다란 자막이 나왔다.

[※맏형은 가끔 이상한 고집을 부립니다.]

[r이든 t든 틀리지 않았습니다. WB래빗은 각국의 발음 모두 존중합니다.]

-ㅋㅋㅋㅋㅋㅋ

* * *

방과 후 그린라이브에 올릴 몇 건의 영상 촬영을 제외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다시 커리큘럼이 조정된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고, 자정이 지나면 숙소로 돌아가 잠들고.

토요일 주말 아침. 오늘은 유호 핸드폰의 시끄러운 사이렌 알람도 잠잠했다. 회사에서 이번 주말은 편히 쉬라고 한 까닭. <동갑끼리> 프로그램 촬영이 잡힌 차남석과 강보배는 제외하고 말이다.

한율이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새벽에 조용히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왜 벌써 일어나…?”

8시. 한율이 일어나 씻을 준비를 하자 2층 침대 위에서 길우성이 웅얼거리듯 물었다. 눈을 뜬 건지 안 뜬 건지 분간하기 힘든 몰골이었다.

“오디션.”

“아…, 수고가 많다….”

덥석.

“……?”

침대 1층에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자던 박가람이 난데없이 한율의 옷을 잡았다. 그러곤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올 때 짜장떡볶이….”

한율은 말없이 박가람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박가람이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마저 중얼거렸다.

“호두과자….”

거실로 나가보니 거실 소파엔 웬일로 이건우가 일찍 일어나 TV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금방이라도 외출할 것 같은 멀끔한 모습으로.

“일찍 일어났네요?”

“어, 굳모닝.”

씻고 나온 후에도 이건우는 여전히 TV를 보고 있었다. 옆에 외출할 때 챙기고 나갈 법한 가방만 새로 생겼다.

한율은 방에서 적당히 단정해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은 후, 가방에다 대본과 지갑을 쑤셔 넣었다.

우웅.

-[준비 다 했어? 지금 숙소 앞으로 갈 테니까 슬슬 나와.]

“네.”

“나오래?”

언제 왔는지 문가에서 이건우가 물었다. 조금 전 소파 옆에 두었던 가방을 메고, 한 손엔 핸드폰을 끼운 짐벌까지 들고 서서.

“네.”

“응, 가자.”

아무래도 오늘은 이건우에게 <친해지길 바라> 미션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박가람이 뒤집어썼던 이불을 내리며 이번엔 이건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리가 멀어 닿진 않았다.

“올 때 짜장뜨억볶이이…….”

“네가 직접 나가 사먹어, 인마.”

바들바들 떨면서 쭉 뻗었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흐으윽….”

임미숙PD가 한율에게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통보한 시간은 11시로 아직 2시간 넘게 남았지만, 일찍 출발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침으로 뭐 먹고 싶어?”

조유찬이 모는 차 안에는 관찰용 카메라가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었다. 가장 뒷좌석에는 시커먼 옷을 입고 그림자로 둔갑하다시피 한 프로덕션 스태프가.

“에그 베네틱트에 아메리카노요.”

“건우 넌?”

이건우가 카메라에다 대고 또박또박, 착한 얼굴로 말했다.

“뼈다귀감자탕이 먹고 싶지만, 동생에게 양보하겠습니다.”

그러곤 기대어린 시선으로 한율을 돌아보았다.

대체 미션으로 어떤 제시어를 받은 걸까.

“고마워요, 형. 왜 같이 가주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은 제가 살게요.”

“아니야, 형인 내가….”

또박또박 말을 잇던 이건우의 입이 멈췄다. 그가 상체를 숙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주고 싶지만 가난하다.”

“괜찮아요. 예전에 어머니가 멤버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용돈을 많이 보내주셨거든요.”

“얼마?”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목소리.

한율이 대답하자, 그림자처럼 뒷좌석 구석에 있던 프로덕션 스태프가 바로 의견을 내놓았다.

“이 장면을 편집할 때 한율의 대답은 삐 처리하고, 놀라 입을 벌리는 건우의 얼굴에서 정지, 아래로 [크리스탈 래빗 싱글앨범 발매예정!]이라는 광고 문구를 띄우면 재밌겠네요. 가능하다면 그 유명한 시트콤 OST도 삽입하구요.”

중국집에서 안 파는 건 확실해

가볍게 아침을 먹은 후 SBC제작센터에 도착.

그린라이브 영상 촬영이나 프로덕션 스태프의 출입까지 허락받은 건 아니라서, 그에겐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이건우는 짐벌을 잠시 접어두고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올 때 보니까 너 대본 아예 안 보더라. 연습 안 해도 되냐?”

“미리 충분히 해서 괜찮아요.”

이건우가 씨익 웃었다.

“오, 믿음직스러운데?”

“형, 지금 카메라 안 돌아가고 있잖아요.”

“그렇지?”

“제시어 뭐예요?”

“에이, 그걸 말해주면 다 티가 나서 들키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이건우는, 데스크 직원에게 임시출입증을 받는 조유찬의 눈치를 살피더니 재빨리 속닥거렸다.

“형 멋있….”

“……?”

그 순간 조유찬이 그들을 돌아보았고, 이건우는 아무 짓도 안했다는 듯 구부렸던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러나 ‘혹시 들킨 건 아닐까’ 조마조마해하는 낯빛까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는 동작조차 어색하여, 거짓말에 영 익숙지 않은 게 티가 났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다 들키겠네요. 묻지 않을게요, 형.”

“어….”

오디션이 진행되는 곳 앞 복도에는 다른 지원자들과 그들의 동행인이 의자나 앉거나 서서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한율과 이건우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순간 두 사람, 특히 한율을 보며 놀라거나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서한율 아냐…?”

“하…, 배역 하나는 확실히 줄었네.”

굉장히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며 펼친 대본을 뚫어져라 보았다.

한율은 잘 모르고 있지만, 사실 최근 연기를 배우는 한율 또래의 배우지망생들에게 한율은 유명 인사였다.

<하울링> 1화가 방영된 이후, 몇몇 언론에선 현실감 넘치는 몰입력을 지닌 씬 스틸러가 나타났다고 극찬했다. 연기학원에서도 한율의 연기 장면을 그 또래의 배우지망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연기를 했을 때가 얘가 처어어음으로 연기를 배운지 고작 5개월? 그것 밖에 안 됐을 때란다.』

좋은 자극제이자 교재로. 17살이란 어린나이에 그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가 몇 없는 까닭이었다.

『분명히 직접 경험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이만한 몰입력을 보여준다는 건, 캐릭터와 장면에 대해 연구를 굉장히 깊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손 떨림, 어깨 근육, 팔의 움직임 등등. 어디를 어떻게 부딪쳐서 다치면 신체가 어떤 고통을 느끼고 반응하는지, 아주 세밀하게. 이건 누가 봐도 사고를 당한 은호 그 자체잖아요. …여러분, 이 영상 보기 전에 제가 틀어줬던 ‘꽃을 단 토끼’ 무대 기억나세요? 생각나세요, 여러분? 얘랑, 얘가, 동일인물이래. 여기에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노래 부르던 애가 고작 며칠 만에, 얘로 변한 거라고.』

여기에 한율이 <하울링> 오디션을 봤을 때 현장에 있었던 눈길 스태프들과 배우지망생들의 입소문까지.

『서한율 연기 진짜 장난 아니야.』

『난 <하울링>보다 걔 오디션 봤을 때가 더 소름이었는데? 제발 눈길에서 그 오디션 영상 좀 풀어줬으면 좋겠다. 한 번 더 보게』

그 수차례 돌려본 교재영상 속 인물이 예의 바르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같은 아이돌그룹 멤버와 함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사람들은 어설프게 웃으며 화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오디션이 열리는 회의실 문에는 [오디션] 세 글자만 달랑 적힌 종이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 문이 드륵 열렸다. 막 오디션을 본 지원자가 인사를 하며 나왔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

“다음은…, 어?”

안쪽 문 옆에 선 방송국 스태프가 복도를 내다보며 그 다음 지원자를 부르려다, 한율 일행을 발견하곤 반색했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11시 안 됐는데.”

“네, 안녕하십니까.”

조유찬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한율과 이건우는 꾸벅.

“안녕하십니까.”

“잠깐만요.”

손을 내저은 스태프가 안쪽에다가 대고 알렸다.

“임PD님, 한율이 왔는데요.”

“그래요?”

스태프는 다시 복도 쪽으로 고개를 뺐다. 문까지 활짝 열며.

“들어오세요, 배우 분만. 소지품은 대본만 빼고 일행 분에게 맡기시고.”

그 순간 한율은 제게 박히는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오자마자 들어가서 좋겠다, 부럽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

대충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들. 한율은 태연히 무시하며 가방에서 대본을 꺼냈다.

“가방 좀 맡길게요.”

“응, 잘 봐.”

“홧팅.”

* * *

임미숙PD가 한율에게 물었다.

“한율 씨는 귀신같은 거 직접 본 적 있어요? 가위 눌리거나 꿈에서 말고, 실제로. 아니면 목소리라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건 본 적 있어요.”

저주받아 죽은 육신에서 빠져나와 겁이 많은 병사들을 패닉에 빠뜨리던 사령. 조금은 다르지만, 마법으로 조종당하는 시체도 곧잘 보았다. 특히나 부패되기 시작한 시체는 살아있는 생명에게 아주 치명적인 온갖 독을 두른 병기나 다름없어, 아군의 안전을 위해선 멀찍이서 불을 날려 태워 죽이는 게 상책이었다.

“그럼 무서운 건요? 공포영화나 신기한TV에 나오는 괴담 재연, 이런 건 자주 봐요?”

“굳이 일부러 찾아서 보진 않는데, 얼마 전에 극장에서 한 작품을 봤어요.”

“제목이 뭔데요?”

한율이 작품 이름을 말하자, 임PD 옆에 있던 조연출이 한 마디 했다.

“와, 그거 진짜 무섭던데.”

“본인이 생각할 때, 본인은 겁 많은 것 같아요?”

“아뇨.”

“그 영화 안 무서웠어요?”

그때 함께 본 유호는 초반부터 멀쩡한 팝콘을 바닥에 뿌리고 두 귀를 막고 부들부들 떨다가 막판에 콜라까지 쏟았다.

“큰 효과음과 같이 갑자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에 놀라는 게 무서움을 느끼는 거라면….”

“아뇨, 그런 거 말고요. 어둡거나 비오는 밤의 학교, 폐병원, 원혼이 나타난다는 고스트스팟, 무덤 등등. 이런 것에서 연상되는 공포감이요.”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까마득해진 과거, 어릴 적부터 마나를 느끼던 그에게 밤은 밤 특유의 정취가 섞인 마나의 시간이었다. 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시신이나 귀신? 신뢰를 앞세워 경계심을 우그러뜨린 뒤 등에다 칼을 꽂는 인간이 더 무섭다.

‘4년 후 세상에선 내가 그런 인간이 될 테지만.’

“전혀요.”

“좋네요. 대본을 다 읽었다면 알겠지만 배경이 섬에 있는 옛날 집이라서요. 이야기 특성상 촬영도 대부분 밤에 진행될 거고. 그래도, 공포에 떠는 연기는 가능하죠?”

“네.”

임미숙PD가 씨익 웃으며 대본을 펼쳤다.

“그럼 확인해보도록 할까요?”

10분 후.

한율은 들어갔을 때처럼 덤덤한 얼굴로 나왔다. 별 걱정 없는 얼굴로 서있던 조유찬과 달리, 조금 초조한 얼굴을 하던 이건우가 한 걸음에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 잘 될 것 같아?”

복도에 있던 사람들도 조심스레 한율을 훔쳐보았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맡겨두었던 가방을 받았다.

“글쎄요. 형, 그런데 짜장떡볶이는 어디에서 팔아요?”

“중국집에서 안 파는 건 확실해. 가람이한테 사다주게?”

“네. …먼저 갈게요, 수고하세요.”

한율은 다른 사람들에게 조용히 인사한 후 발길을 돌렸다. 조유찬과 이건우도 그들에게 묵례 후 함께 이동했다.

“다른 멤버들한테도 먹고 싶은 거 있나 물어봐야겠네요.”

그러나 한율이 나오며 닫힌 회의실 문은 한참이 지나도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다음 사람을 안 부르지…?”

3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그제야 기다리던 사람들 얼굴에 하나 둘 씁쓸함이 스쳤다.

‘서한율 연기를 보고 급히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거구나.’

* * *

한율에게 드라마 오디션 결과가 전달된 건, 멤버들이 숙소 식탁에다가 짜장떡볶이를 비롯해 온갖 음식을 널려놓았을 때였다.

“한율아, 너 오디션 합—, …히익!”

신난 얼굴로 숙소에 들어왔던 조유찬의 눈이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을 보고 휘둥그레졌다. 막 음식의 포장지를 뜯던 멤버들은 덜컥 굳었다.

“아무리 이번 주말은 편히 쉬라고 했어도 그렇지…, 짜장떡볶이에 피자, 초밥에 보쌈, 호두과자…는 후식이야?!”

“하하하하….”

“가뜩이나 요즘 살이 오른 몇몇 사람이 보여도 스트레스 받을까봐 입 꾹 다물어주고 있었는데…, 너희들! 아무리 하루라도 이렇게 먹으면 그 살 누가 빼느라 고생하는지 몰라?!”

“형, 잠깐 진정하고 우리 말 좀 들어주세요. 이건….”

“유호, 넌 맏형이자 리더가 되어선 말리기는커녕—!”

그러나 조유찬이 전혀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보이자, 유호도 제 할 말을 마저 했다.

“한율이 어머니가 사주신 거예요.”

“같이 먹…, 응? 한율이 어머니? 아…, 너희들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용돈 받았다 그랬지.”

그제야 조유찬도 슬슬 진정했다. 여전히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엔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죄다 살찌는 음식들뿐이잖아.”

“그래서 저랑 건우는 조금 이따가 운동 가려구요. 트레이너 쌤한테 좋은 헬스장 추천도 받았고.”

“으음….”

그래도 조유찬이 못마땅해 하자 유호가 선뜻 덧붙였다.

“가람이도 끌고 갈게요.”

“OK, 좋아!”

“—뭬요?!”

‘살이 오른 몇몇 사람’이라는 소리에 스스로 찔려 슬금슬금 라이언 뒤로 숨으려던 박가람이 튀어나와 경악했지만, 조유찬은 걱정을 덜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한율에게 말했다.

“한율이 넌 별 다른 약속 없으면 한 두 시간 쉰 후에 사무실로 와.”

“네.”

“우성, 라이언 너희들도 이거 먹고 나서 운동하는 거 잊지 말고.”

“네에.”

“옙.”

조유찬이 나가자 멤버들은 크고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쉰 후 다시 포장지 제거 작업에 돌입했다. 박가람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투덜거렸다.

“나 운동 안 할 건뒈? 안 할 건뒈?”

“형, 잠깐 나 좀 봐봐.”

길우성의 부름에 박가람이 투덜거리던 얼굴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찰칵.

“……?!”

길우성은 곧바로 찍은 사진을 박가람에게 보여주었다.

낮까지 잠을 푹 잔데다가 아직 씻지 않아 머리도 엉망, 거기에 두 뺨을 실룩거리고 있어 평소보다 부은 얼굴이 적나라하게 찍혔다.

박가람이 입을 쩌억 벌리며 길우성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뭐야, 이—!”

이건우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눈 게슴츠레한 프레리독은!”

“푸핫!”

막 초밥 도시락 포장지를 뜯던 유호가 웃음을 터뜨리자, 안에 든 초밥이 일제히 춤을 췄다.

눈이 게슴츠레한 프레리독. 지금의 박가람과 너무 잘 어울리는 비유인 탓에, 한율도 저도 모르게 낮고 짧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게슴츠레하다는 말을 잘 못 알아들은 라이언만 의아한 얼굴로 나무젓가락을 뚝 뗐다.

“왜 웃어?”

유호가 잔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큭큭…, 아냐, 아무 것도. 밥 먹자.”

“응.”

점심을 먹고 난 뒤 한율은 회사 사무실로 갔다가, 3분 만에 다시 조유찬의 차를 탔다. 조유찬이 집까지 태워다주며 설명하겠다고 해서.

“옛날 <전설의 고향>처럼 공포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50분짜리 단막극이니까 촬영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야. 늦어도 6월 초엔 촬영에 들어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임PD님이 우리 사정을 잘 봐주시는 것 같아. 다 한율이 네 연기실력이 뛰어난 덕분인 것 같아 괜히 내가 뿌듯하고, 흐. 그럼 이제 슬슬 다른 대본도 살펴볼 거지?”

“재밌으면서도 활동에 영향이 가지 않는 선이라면요. 아, 무공공의 부PD님도 대본 보내주시겠다고 했어요. 혼자 기획 중인 독립영화가 있다고.”

“전에 건우 다니는 학교에 갔다가 만났다고 했었지? 으음….”

조유찬이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공은 마음에 안 들지만 부PD면 뭐…. 그런데 내일은 뭐 할 거야? 그냥 집에서 편히 푹 쉴 거야?”

한율은 핸드폰으로 내일 날씨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미세먼지 수치 보통 예상. 강수확률은 20%.

“아뇨, 간만에 등산 좀 가려구요.”

“어디로?”

“지리산이요.”

“으아…. 그럼 오늘 출발하겠네?”

“네. 비행기타고 가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오르려고요.”

조유찬이 고개를 흔들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흘렸다.

“다치지 않게 조심히 갔다 와. 스트레칭 꼬박꼬박 잘하고, 피부 타지 않게 조심하고.”

“네.”

조용히 운전하던 조유찬이 뒤늦게 덧붙였다.

“가서 사진 찍는 것도 잊지 말고. 잘 나온 건 SNS에 올리자.”

“네.”

다음 날, 한율은 조유찬의 말대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셀카를 여러 장 찍었다.

어떤 중년 등산객은 가볍게 놀러 나온 듯한 복장을 입고 셀카를 찍는 한율을 한참동안 신기하게 쳐다보더니, 아직 어려 보이는데 혼자 왔냐 물어보면서 대신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천왕봉 비석과 함께 찰칵.

등산객이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뉘 집 아들인지 곱상하게도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칼질만 잘해요

한율은 지리산에서 찍은 사진을 조유찬에게 보냈다. 곧 조유찬이 SNS에 올릴 사진을 골라주었다.

[지리산 천왕봉 인증샷. 그곳에서 만난 고마우신 등산객 분이 찍어주셨어요. 바람이 시원했어요. :) #지리산천왕봉]

[지리산 법계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절이래요. 신기! :D #지리산천왕봉법계사]

-한율아... 난 네가 신기해...(ˊ•͈ ꇴ •͈ˋ)

-한율이 등산 찐취미 인정..!!!

-혼자 간 거야? 대단하다 우리 산톢이ㅠㅠㅋㅋㅋ

-[BBM-Jun]부럽...

-한율인 사생스톸커 걱정 필요없겠닼ㅋㅋㅋ 산 앞에서 알아서 다 떨어져 나갈테닠ㅋㅋㅋ

-썬크림 많이 안 바른 것 같은데 울 톢이 피부 진짜 좋다.. 어떻게 등산을 다녀왔는데도 피부가 애긔애긔해..♡

-옷만 보면 뒷산은커녕 가볍게 산책 간 것 같은데 지리산 스웩

-혼자 산에 가서 화보 찍고 오는 아이돌이 있다?!

-지리산 여기 우리 집 바로 뒷산인데..! 그치만 푸르고 아름다운 하늘빛과 천사 같은 네가 구분되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그..8ㅂ8..

-오빠사랑해요(。’▽’。)♡ 저도 얼른 건강해져서 언젠가 오빠랑 같이 등산가고 싶어요!ㅎㅎ

* * *

5월 26일 금요일 밤 9시.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에 새 에피소드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멤버들의 화사한 프로필 샷이 빠르게 지나간 짧은 오프닝 직후 새카매진 영상. 타닥탁. 불티 튀는 소리가 나며 중앙에 따뜻한 색감이 피어오르더니, 이내 모닥불이 되어 주변에 둘러앉은 8명의 소년 캐릭터를 환히 밝혔다.

어스래빗 데뷔 앨범 [Breaching] 소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었다.

…틱. 모닥불에서 불티 튀는 소리가 뚝 멈췄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영상도 흑백으로 멈추고 짧은 정적.

불티 튀는 소리와 닮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타닥타닥.

[얘들은 여기에서도 따로 앉았네?]

띵. 흑백 영상에서 서한율과 이건우 캐릭터가 컬러로 돌아왔다.

띵. 이번엔 라이언과 길우성 캐릭터.

띵. 강보배와 차남석.

그 위로 큼지막한 하얀 글씨.

[회사 측이 알고서 위치를 정한 건 아닙니다.]

두둥. 어스래빗 팬카페에서 진행된 [사실은 다 친하지만! 겉만 봐선 안 친해 보이는 멤버 두 사람을 꼽아주세요!] 투표 결과 스크린 샷.

[1위 건우&한율]

[2위 라이언&우성]

[3위 보배&남석]

여섯 명의 이름이 둥둥둥둥 긴장감 넘치는 효과음과 함께 확대되다가 휙 새카맣게 덮였다. 다리다리둥둥당둥두두둥둥당다당당 다소 현란하면서 정신없는 BGM과 함께 이번 에피소드 타이틀이 떴다.

에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톡창에는 웃음 의성어가 가득 올라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였구나!!! ㅋㅋㅋㅋㅋㅋ

-브금 왤케 활발햌ㅋㅋ

-이거 어떤 분이 한율이랑 건우 안 친하냐고 사소하게 물은 데서 시작됐다에 얘네 포카 열 장 겁니닼ㅋㅋㅋ

-떠비 행동력 보소

-ㅋㅋㅋㅋㄱㅋㅋㅋㅋㅋ

이프림이 즐거워하며 <친해지길 바라> 영상을 보는 동안, 어스래빗 멤버들은 다함께 2층 회의실에서 일본어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 후엔 자정까지 레슨과 연습.

<친해지길 바라> 에피소드를 확인한 건 숙소의 침대에 누운 뒤였다. 건너편 2층 침대에서 길우성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뭐야. 써한이랑 건우 형, 우리 버스킹하는 거 보고도 못 본 척 도망친 거였어?! 시킬까봐? 와, 이거 제보 안 들어왔으면 까맣게 모를 뻔 했잖아?”

“핫도그 맛있었겠다.”

“종류도 다양하고, 은근히 양 많고 맛있더라구요.”

“헉, 나도 먹고 싶어! 우리 내일 여기 갈까?”

“님, 우리 내일 아침 9시부터 레슨이랑 연습 있음요.”

에피소드는 한율과 이건우, 길우성과 라이언, 차남석과 강보배 시점으로 자유자재로 뛰었는데, 엑기스만 쏙쏙 골라 스피디하게 편집되었다.

“나 이때 왜 건우 형이 난데없이 오락실가자고 했는지 몰랐는데, 멋있다는 소리 한 번 듣고 싶어서 펀치머신 난타한 거였구나.”

“바보 같다.”

옆방에서 이건우가 말했다.

“다 들린다, 박가람.”

“이프림도 이 장면 나갈 때쯤에 건우 형 안쓰럽다고 도배를 해놨네. 이 와중에 써한의 영혼 없는 리액션, ‘형 멋있어요.’ 짝짝짝.”

“적선하듯이, 크큭.”

“다 들린다고, 박가람 인마.”

“그래도 보배랑 남석이는 3위라고 미션 제일 간단하네. 둘이 재밌게 노세요. …그렇다고 진짜 둘이 피방가서 노는 건 뭐냐.”

“평범하게 하라 그랬어, PD님이.”

한율은 영상을 보면서도 아직도 올라오는 이프림의 톡을 보았다.

-버스킹하는 것도 그렇고 외모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피방이나 오락실가는 거 보고 아직 애들은 애들이구나 느껴지네요ㅎㅎ

-남석이랑 보배 다른 교복 입었지만 헤드셋 쓰고 겜하는 거 보니 진짜 아이돌 아니고 피방에서 흔히 보이는 고딩의 뒷모습ㅋㅋ

-한율이가 건우한테 장난치는 거 보니 안 친한 거 아니네요ㅎㅎㅎ

-어스래빗은 진짜 형들이 동생들 먹잇감임ㅋㅋㅋ

-애들이 다 착해서 동생들한테 져주는 거 같아요ㅎㅎ

-아니 그런데 대체 한율이 어머니 얼마를 보내셨기에 건우 표정잌ㅋㅋㅋ

-커쥬~어 마이거얼

-어스래빗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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