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427)

* * *

케이블 요리전문 채널 예능 프로그램 <여름소풍>과 SBC 기획단막극 드라마, <객귀(客鬼)>의 촬영 날짜가 확정되었다. <여름소풍>은 6월 3일과 4일, <객귀>는 바로 다음 날인 5일부터.

“뭐야? 숙소가 평소보다 엄청! 더! 눈부시게! 깨끗해졌는데?”

6월 2일.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숙소가 평소보다 깨끗해져 있었다. 여러 명이 쓰느라 너덜너덜해졌던 욕실화도 새 걸로 교체되었고, 움푹 꺼졌던 소파 자리는 커다란 토끼인형과 쿠션으로 교묘히 가렸다. 창문도 깨끗하게 닦였으며 커튼도 여름용으로 싹 바뀌어서 숙소가 전체적으로 밝아진 느낌이었다.

“내일 숙소에서 짐 챙기는 모습도 촬영할 거라 그러더니.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오오, 어쩐지.”

차남석이 소파에 앉아 토끼인형 머리 위에 손을 턱 얹었다.

“우리 다 회사에 있을 때겠네.”

“시간 미리 알려줄 테니 잠깐이라도 찍히고 싶은 사람은 숙소에 있어도 된대요. 너무 많으면 좀 그렇고, 한 두 명 정도.”

“후…, 그렇다면.”

길우성이 거들먹거리는 얼굴로 두 팔을 벌렸다.

“우리 팀의 자랑스러운 막내이자, 써한 너의 친구인 내가 적격이겠구나.”

“리액션 좋은 가람이 형을 데려다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면 조금 유순하게 보배나.”

“이따 만나면 말해봐야겠네요.”

“…저기요, 두 분. 제 말도 좀 들어주시겠어요?”

삑삑삑삑, 철컹.

그때 조유찬이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숙소로 들어왔다.

“아직도 교복 안 갈아입었어?”

“형, 우리 들어온 지 1분도 안 됐는데여.”

“누나 엄청 빨리 왔네요.”

“아까 전화 받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어.”

한율은 두 사람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행거로 손을 뻗어 크게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제 옷이에요.”

“꺼내서 봐도 돼?”

“네.”

스타일리스트는 조명을 환하게 켠 후에 한율의 옷을 진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구경 온 차남석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일 얘 사복 입고 촬영해요? 협찬 안 받고?”

협찬이 안 들어왔을 리가 없을 텐데, 라는 표정.

한율이 대답했다.

“여름옷은 빌려 입기 싫지 않아요? 특히나 살에 직접 닿는 건.”

“그렇긴… 하지. 아무리 드라이클리닝 한다고 해도.”

“그리고 기본적으로 요리하는 프로그램이고, 장이랑 쇼핑도 봐야하는데 괜히 빌려 입었다가 문제 생기면 사야 되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내 옷을 입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예쁜 게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고….”

옷을 뒤적거리던 스타일리스트의 낯빛이 우울해졌다.

“왜 죄다 비싼 것 밖에 없는 거죠.”

“그냥 협찬 받는 게 낫지 않겠냐, 써한?”

“가격 신경 쓰지 말고 골라주세요, 누나.”

“고등학생이 40만 원짜리 셔츠 입고 빨간색 양념 튀는 요리라도 하면 시청자부터가 화낼걸. …아, 이게 그나마 덜 부담스럽겠다.”

스타일리스트는 20여 분 동안 옷과 가방, 신발, 팔찌와 시계까지 골라준 후 조유찬과 함께 숙소에서 퇴장했다. 이 말을 남기고.

“피어싱을 좀 사야할 것 같아.”

다음 날 아침. 한율은 스타일리스트가 지정해준 옷과 아이템을 모두 장착하고 숙소를 나섰다. 조유찬의 차를 타고 샵에 들렀다가, 마트에 들렀다가, <여름소풍> 오프닝장소 근처로 이동.

기다리고 있던 조연출이 간단히 설명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저기… 보이지? 새카만 대문에 베이지색 벽돌집. 중간부터 카메라에 잡힐 테니까 혼잣말도 좀 해주고, 하지만 카메라 응시는 피하고. 본인 분량은 본인이 챙기는 거예요.”

“네.”

“에코백 예쁜 거 가져왔네. 자, 출발.”

에코백은 오늘 아침 스타일리스트가 빌려준 개인 물건이었다. 한율은 고개를 꾸벅인 뒤 걸음을 옮겼다.

삐빅, 칙. 뒤에서 무전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율이 보낼게요.”

오프닝장소는 한적한 주택가 외곽에 위치한 소셜다이닝룸.

덤덤히 걷던 한율은 조연출이 카메라가 있다고 알려준 지점부터, 서울에 이런 곳이 있어나? 라는 신기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여긴가?”

조심스레 대문을 열자 소박하게 꾸며진 정원과 굽이진 돌계단이 보였다. 한율은 에코백에 담긴 물건들을 한 번 살핀 후 조심스레 계단을 밟았다. 언덕의 경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두고, 위만 평평하게 다지고 토대를 쌓아 건물을 지은 듯했다.

계단을 반쯤 오르자 정원 외곽을 가득 메운 스태프들, 테라스에 놓인 야외테이블 앞에 선 출연자들이 보였다.

“그래서 저는 요리하기 전에, 일단 선생님 레시피부터 너튜브에 검색한 후에….”

MC이자 메인 셰프를 맡게 된 요리사 원백두에게 떠들던 여성 출연자, 배우 최가을이 한율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기획 당시에는 원백두와 아이돌로만 구상하려 했으나, 그러면 MC의 피로감이 크지 않겠냐는 지적이 나와서, 매 화마다 중간다리 역할을 해줄 나이대의 사람을 한 명 넣기로 했다고.

“어?”

“안녕하세요!”

한율은 밝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원백두도 한율을 돌아보았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한율은 계단을 다 올라 두어 걸음 더 앞으로 간 후, 에코백을 잠깐 테라스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젠 자면서도 할 것 같은 익숙한 손구호와 인사.

“어스, 래빗!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한율입니다!”

“와아아, 아이도올!”

“허허허.”

최가을은 박수를 치면서 환영했고, 원백두는 신기해하면서도 꼭 손자를 보는 것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요리사 원백두입니다. 반가워요.”

“저는 배우를 하고 있는, 최가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율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예의바른 태도로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최가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까 어떻게 한 거예요? 손 이렇게?”

“네. 어스, 지구의 둥근 모양을 만든 다음, 래빗, 하면서 토끼 귀가 달릴 법한 위치에서 검지랑 중지를 모아서 까딱.”

“엄청 귀엽네요. 어스, 래빗!”

“…….”

옆에서 원백두도 조용히 훔쳐보더니 어설프게 따라했다. 까딱, …까딱. 그러다 한율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팀 이름이 토끼예요? 토끼처럼 예쁘게 생겨서?”

“하하, 아뇨. 회사 대표님이 토끼를 무척 좋아하셔서요.”

“회사 이름도 땡땡래빗이죠?”

“네.”

그들은 자연스럽게 널찍한 야외 테이블에 자리했다. 한율은 잠깐 놔두었던 에코백을 또 다른 장바구니 옆에 옮겨놓고 착석했다. 차양이 길게 드리워져 있어 햇볕에 닿진 앉았다.

최가을이 한율을 새삼 쳐다보며 웃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다. 선생님, 제가 바로 며칠 전에 한 드라마를 정주행 했거든요. 그런데, TV에 나왔던 사람이 바로 여기에, 조금 더 자란 모습으로 있는 게 지금 너무 신기해요.”

똑같은 말을 반복사용하면서.

원백두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걸 이제야 봤어요? 난 1월 달에 본방 사수했는데? 드라마 잘 봤어요, 한율 씨.”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율 씨는 요리 잘해요?”

한율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칼질만 잘해요.”

이후 도착한 다른 출연자 두 명은 한율과 안면이 있는 아이돌이었다. 한 명은 풀썸의 리더 효운.

“와, 한율 씨 반가워요! …하하, 제 동생이 한율 씨 팬이거든요. 그래서 전에 동생이 산 앨범 들고, 어스래빗 분들 대기실에 찾아가서 사인을 부탁드린 적이 있어요.”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오랜만이야, 한율아.”

MOHE의 이해원이었다.

여름소풍

<여름소풍>의 메인 테마는 요리와 힐링.

한율이 찍는 건 3회 차 녹화지만, 내일 밤이 첫 방송이라 예습은 못했다. 그러나 대충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미리 설명을 들었다.

녹화 첫 날은 소풍 도시락 준비단계로, 출연자들은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음식을 한 가지씩 골라 각자 재료를 사온다. 그리고 원백두에게 여러 가지 조언과 가르침을 받으면서 연습 삼아 만들어보고, 완성한 요리를 시식하면서 내일 만나게 될 아이들의 소개영상을 함께 본다.

둘째 날에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전날에 배웠던 대로 아이들과 함께 도시락을 싼 후, 함께 소풍을 가서 즐겁게 놀아주면 한 편 녹화 끝.

오프닝장소이자 요리연습 장소는 본래 소셜다이닝 대여 장소로 쓰이던 곳이라, 1층은 온갖 주방용품이 잘 갖춰진 널찍한 다이닝룸이었다.

한율은 조리대 한 곳에 자리 잡아, 이곳에 오기 전에 사 온 재료들을 에코백에서 꺼냈다. 당근, 대파, 피망, 버섯, 햄, 계란.

한율이 꺼내는 재료를 유심히 보던 원백두가 허허 웃었다.

“어이쿠, 햄이랑 계란 빼면 애들 대부분이 싫어하는 것들을 집어오셨네. 뭐 만들기로 했어요?”

“오므라이스요.”

“그럼 이거 정말 칼로 잘게 다져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믹서에 대충 갈아버리면 나중에 볶을 때 다 뭉개지고 금방 다 타버려서 맛도 버리거든요. 하지만 칼로 하려면….”

한율이 칼질을 잘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했지만, 원백두는 행여 칼을 쓰다 손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걱정은 5분도 안 되어 사라졌다.

“우와….”

조용히 촬영하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낮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탁탁탁탁! 망설임이 전혀 없는 한율의 신속한 칼질에 재료가 일정한 크기로 잘게 썰려나갔다. 아직도 재료를 어떻게 다듬어야 좋을지 헤매던 효운과 이해원도 홀린 것처럼 한율의 조리대로 다가왔다.

최가을이 모두를 대변해 물었다.

“왜 이렇게 칼질을 잘해요? 혹시 장래희망이 요리사였어요?”

잘게 다져진 재료를 볼에다 넣으며 한율은 입가를 올렸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왔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실력이 는 것 같아요.”

모친이 나중에 이 방송을 본다면 아마 ‘아닌데…, 처음 칼든 거 봤을 때부터 나보다 잘하던데….’라고 하겠지만, 뭐 어떤가.

“어째 경력이 오래된 나보다 훨씬 잘하는 것 같은데.”

원백두도 신기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어릴 적부터 요리에 관심 있었어요?”

“관심보다는… 그냥 제 손에 의해서 깔끔하고 일정하게 썰린 걸 보면 조금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정리정돈된 거 좋아하나 보다. 그쵸?”

“네, 그런 편이에요.”

“그런데 아이돌은 대부분 숙소 생활하죠? 다들 숙소에서 요리해요?”

원백두가 자연스럽게 효운과 이해원을 대화에 끌어들였다. 이해원이 효운을 바라보며 먼저 대답을 양보했다.

“가끔 멤버 중 한 명이 하기는 하는데, 이것저것 준비나 뒷정리, 그릇도 없어서 거의 사먹어요.”

“저희도요. 배달음식이나 식당가서.”

이해원이 이어서 대답하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숙소에선 요리 안 하고, 그냥 회사 구내식당가서 먹어요.”

“회사에 구내식당이 있어?”

한율의 현란한 칼질이 끝나자 출연진들도 슬슬 각자 할 일로 돌아갔다. 오프닝 인사를 했을 때 편히 말을 놓기로 한 효운이 김밥용 햄을 하나씩 뜯으며 놀란 얼굴로 물어보았다.

“네. 회사가 처음 생길 때는 없었는데, 크리스탈 래빗 선배님들이 열심히 벌어서 만들어주셨대요.”

“우와.”

“대단하다. 선생님, 크리스탈 래빗 아세요? 핑- 돌아 꽂힌 월식처럼 내 시선도 핑- 너에게 꽂혀.”

“허허. 소금 간은 조금 싱겁게 하세요. 애들이 먹을 거니까.”

“네!”

출연자들은 서로를 도와주면서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눴다. 원백두는 두루두루 살피다가 조언을 해주고, 조리방법도 이유를 곁들어가면서 설명했다.

한율은 이해원이 양상추를 한 장씩 집어 느릿느릿 써는 걸 보고 대신 칼을 잡았다. 퍼석퍼석. 여러 겹으로 쌓인 양상추가 시원하게 썰렸다.

“손 조심해, 손.”

작년, <보컬리스트 시즌3>에 함께 출연했을 때 한율과 이해원은 인사 외에 특별히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러나 JZ엔터를 그만두고 나가려는 이해원을 고은훤이 말리면서 다퉜을 때, 높은 확률로 한율과 차남석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었을 터.

그래서 그런지 한율을 보는 이해원의 눈은 조심스러웠다.

본인이 옮겨간 회사가, MOHE란 팀이 어떤 돈과 커넥션을 배경에 두고 데뷔하고 활동하는지 한율이라면 잘 알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기색이 엿보였다.

“썰기 전에 깨끗하게 씻었으니까 채에 넣고 물기만 빼면 될 것 같아요.”

“고마워.”

그러나 한율이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하자, 그는 살며시 웃으며 썰린 양상추가 가득 담긴 그릇을 받았다. 그때 한율의 눈에 이해원의 손목 안쪽에 새겨진 작은 흉터가 들어왔다.

“……?”

마치 담뱃불로 지져진 듯한 크기의 검붉은 자국.

흉터는 금세 치렁거리는 팔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이닝룸에서의 촬영은 1시가 조금 지나 끝났다. 이번엔 아이들이 갖고 싶다고 한 선물을 준비하러 갈 시간.

내일 함께 녹화하게 될 아이들은 적게는 8살부터 많게는 11살까지 모두 10명으로, 출연자들은 한 사람당 아이 두 명의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선물 준비비용은 당연히 프로그램 측 지불이지만, 방송에선 마치 출연자가 사비를 들여 산 것처럼 나갈 거라고.

PD는 이 말을 덧붙였다.

“따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더 준비하셔도 괜찮습니다. 굳이 비싼 거 아니더라도, 그림이 예쁘게 나올 법한 거요.”

한율은 <여름소풍>측으로부터 셀캠 장비를 받고 스태프와 함께 조유찬의 차에 탑승했다.

방송에서는 몇 초 안 나갈 분량이지만, 그럼에도 선물을 고르며 ‘예서랑 동성이가 좋아했으면 좋겠네요.’ 라고 기대어린 얼굴로 멘트도 쳤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시대가 변한 걸 체감할 수 있다더니….”

<여름소풍> 스태프가 밤에 숙소로 찾아가겠다며 돌아간 뒤, 조유찬은 차에 WB래빗 식구만 남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초등학생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위가 핸드폰이라는 뉴스보고 놀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핸드폰은 완전히 생활필수품이고 사과패드나 밈텐도, 드론…. 와아.”

한율은 조금 전에 산 드론 박스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카메라나 폭탄을 싣고 날기엔 힘들어 보이지만, 어린아이들이라면 충분히 좋아할 법한 장난감이었다.

원래 세상, 아주 어릴 적.

그도 처음 마나를 이용해 나무를 이리저리 날렸을 때 퍽 신났었다. 그 나무에다 막 둥지를 짓고 있던 새 한 쌍에게 공격받기 전까진.

“짐 싸는 거 촬영할 땐 누가 같이 나오기로 했어?”

“보배 형이요. 그런데요, 형.”

“어?”

“선물 고르는 모습을 찍었는데, 굳이 숙소에서 짐 싸는 것까지 찍는 이유가 뭐예요?”

“서비스지.”

조유찬이 한율을 한 번 보곤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아이돌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일부러 챙겨보는 사람들은, 그 아이돌의 숙소도 궁금해 하기 마련이거든. 특히나 이프림은 더더욱. 자기들이 보낸 선물이 카메라에 0.2초만 찍혀도 바로 알아보고 엄청 좋아하실 걸?”

어스래빗의 숙소 내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된 건, 예전에 박가람이 고등학교 졸업을 맞이해 셀캠을 찍었을 때 그때 아주 잠깐뿐이었다. 어스래빗이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이었으니, 눈썰미가 좋은 이프림은 2월의 숙소와 현재의 숙소를 비교하기도 할 터.

“하지만 숙소에선 절대 라방하지 말라면서요.”

“녹화는 편집이 가능하지만 라방은 그게 안 되잖아. 나가선 안 되는 것까지 나갈 수 있고. 멤버가 숙소에서 라방 켠 거 모르고 속옷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찍힌 아이돌 얘기, 들은 적 없어?”

“아.”

“그리고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도 있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렇겠네요.”

“내일 따로 챙겨갈 거 생각해둔 건 있어? 너희 앨범? 아니면 크래 앨범?”

따로 챙겨갈 거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 종류가 가격도 그렇고 무난하기는 하겠지만….

한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형, 잠깐 집에 들러도 괜찮을까요?”

차남석에게 오늘 이해원과 함께 녹화했단 말을 전한 건, 숙소에서 ‘내일 소풍 너무 기대되네요.’ 라며 짐을 싸는 촬영을 끝내고 다시 회사로 갔을 때였다.

지난 번 데뷔 쇼케이스 때처럼, 일본의 데뷔 쇼케에서도 <월흔>의 도입부를 함께 부르기로 하여 피아노가 있는 보컬연습실에서 연습 중.

차남석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안인섭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네.”

* * *

다음 날, 한율은 아침 일찍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어제 만난 출연진들과 합류, 함께 포항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소형 비행기라 가운데 통로를 사이에 두고 좌석이 세 개씩 붙어있었다.

한율은 효운, 이해원과 나란히 앉았다.

“모해는 컴백 언제 해? 일정 잡혔어?”

비행기 이륙 직전, 안내에 따라 핸드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의 전원이 모두 꺼졌을 때 효운이 물었다.

“중국에서 잠깐 활동하다가 국내 컴백은 10월? 그때쯤에 할 것 같아요.”

“중국하니까 예전에 우리 팀 처음 중국 갔을 때 일 생각난다. 거기가 땅이 워낙 넓어서 지역마다 발음은 물론이고 문장자체가 다른 곳도 많잖아. 심하면 같은 중국 사람들끼리도 말이 잘 안 통한다고 할 정도로.”

“그렇죠.”

효운이 슬며시 주변을 살피더니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가 갔을 때 처음 북경에서 만난 통역사 분이랑 같이 조금 먼 지방으로 이동했었거든. 그런데, 팬미팅을 진행하려니까 말이 잘 안 통한다고 통역사 분이 영어를 쓰는 거야. 그러다 결국엔 다 같이 손짓발짓…, 하하.”

다시 생각해도 우스운지 효운이 작게 웃더니 조언을 날렸다.

“중국 내에서도 먼 거리를 이동할 땐, 해당 지역 출신의 통역사를 따로 고용하는 게 좋아.”

“하하하….”

“어스래빗은? 해외 활동 계획 있어?”

이미 어스래빗이 일본 데뷔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지고 있던 터라, 한율은 순순히 대답했다.

“다음 달에 일본 가요.”

“…….”

효운이 웃는 얼굴 모양새 그대로 굳었다. 이해원이 물었다.

“풀썸도 다음 달에 일본?”

“어…, 하하. 중후반쯤?”

“그럼 별로 안 겹치겠네요. 저희는 초에 넘어가거든요.”

“그렇구나.”

그제야 효운의 굳었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쉰다.

“순간 철렁거렸다.”

카메라가 돌지 않는 타이밍에 진행된 소소한 잡담은, 비행기가 활주로를 내달리며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여름소풍> 촬영 장소는 포항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준비된 차를 타고 도착한 초등학교는 정말 아담하고 알록달록해서, 멀리서 봤을 땐 꼭 장난감 모형 같았다.

녹음이 우거진 숲 특유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와, 공기 좋다.”

“시소랑 그네, 미끄럼틀까지 다 작아. 귀엽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스태프들과 이동하면서도, 출연진들은 주변 경치에 대한 감상을 태연히 말했다. 한율도 보탰다.

“바람도 선선해서 기분 좋네요.”

“난 옛날에 그런 로망 있었는데.”

앞서 걷던 최가을이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저렇게 높은 나무들이 자라서 자연 그늘이 만들어진 시골길을,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달리는 거야. 그러다가 적당한 곳에 벤치가 짠! 하고 나타나면 준비했던 도시락이나 차를 마시고, 이렇게 좋은 공기마시면서 독서도 하고.”

“그러다 모기에 물려요.”

“아, 선생니임!”

“뱀이 나올지도.”

“그리고 모기 잡다가 돌아보면, 책 위에 사마귀가 이러고 있는 거죠.”

효운이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 같은 사마귀 흉내를 내자, 최가을은 너까지 그럴 거냐면서 작게 투덜거리다가 웃었다.

아이들은 1, 2학년 담임을 맡은 교사와 함께 한 교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MC이자 메인 셰프인 원백두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능숙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안녕하세요오!”

“저희는 여러분들이랑 같이, 맛있는 도시락을 싸고 함께 소풍을 가려고 온 <여름소풍>이에요!”

“와아아!”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 심통이 났을 법도 한데, 아이들은 환한 얼굴과 큰 목소리로 그들을 반겼다. 출연자들이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할 때에도 와아! 하면서 박수를 쳤고, 본인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에도 열심히 박수쳤다.

한 마디 말만 해도 꺄아아 반응하던 팬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호감과 순수한 에너지가 넘쳐났다.

한율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속으로 한숨 쉬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겠구나.

왜 이렇게 알짱거려

[객귀(客鬼), 해]

한율은 몇 번이나 본 대본 첫 장을 넘겼다.

[[객귀(客鬼)]

1.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혼령.

2. 떠돌아다니는 귀신.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 가만히 성난 바다를 노려보던 한 노인이 불현듯이 꺼내는 말로 시작되었다.

[만약 내가 바다에서 죽으면, 그땐 절대 내 시신을 집안에 들이지 마시게. 좋지 않은 것들이 주렁주렁 달라붙어 올 테니, 절대.]

한겨울, 뱃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굿판이 벌어진다.

무속인은 그 노인으로, 고사상은 풍족하지 않았지만 그는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땀으로 몸이 흠뻑 젖을 때까지 굿을 멈추지 않았다. 배에서 하는 배연신굿과 달리, 바다를 향해 깎인 절벽 위에서.

시끄러운 징과 장구소리와 함께 그 모습이 멀어지고, 화면은 띄엄띄엄 떨어진 낡은 초가집과 초라한 배들이 정박한 섬의 전체모습을 담는다.

수십 년의 세월. 초가집은 무너지고 흙길은 하얀색 콘크리트로 덮였다. 초라했던 배는 단단한 어선이 되었으며, 바다에는 새하얗게 칠이 된 여객선이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움직였다.

수평선과 맑은 하늘, 해, 다시 하늘이 비치는 창.

창밖의 하늘이 어둡게 물들며 밤의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한율 씨, 리허설 들어갈게요.”

“네.”

한율은 대본을 덮어 조유찬에게 넘겼다.

바로 어제 <여름소풍>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직후, 한율은 자신이 주인공 ‘윤진해’ 역을 맡게 된 <객귀, 해> 에피소드의 최종대본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은 첫 촬영일.

씬 배경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자 임미숙PD는 하늘이 도왔다며 기뻐했다.

“리허설이니 큰 부담 갖지 말고.”

“네.”

한율은 일반 가정집처럼 꾸며진 집안에서 편한 티셔츠와 다소 긴 반바지를 입은 채 맨발로 걸었다. 방 역시 평범한 고등학생의 방처럼 꾸며졌다. 침대의 베개와 시트, 이불에서는 새 제품 냄새가 났지만, 사용한 흔적이 있는 것처럼 잔뜩 구겨 놨다.

첫 씬은 주인공인 진해가 비오는 이른 저녁, 악몽을 꾸다가 깨는 장면.

한율은 거리낌 없이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댄 채 고개를 도리도리 치면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왼쪽으로 누웠다가, 오른쪽으로 누웠다가 다리도 마음껏 올렸다가… 동작을 뚝 멈추고 스륵 눈을 감았다.

한율의 준비가 끝난 듯하자 임PD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액션.”

마치 그 단어가 마법의 주문인 것처럼, 한율은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흐윽…….”

진해가 꾸는 악몽과 닮은 기억을 연기의 밑바닥에 깐다.

거센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던 날.

그는 몇 날 며칠 식사와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 탈진에 가까운 상태로, 무너진 다리의 잔해를 밟아 이동하고 있었다. 마력과 마나의 흐름에 예민한 거대한 마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순수한 체력으로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급류는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꾸룩꾸룩. 거북한 소리가 귀를 압박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던 마물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와 그의 다리를 낚아채 더욱 아래로 끌어당겼다. 귀까지 찢어진 입에서 길고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마물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죽음을 등에 진 마물이 점점 그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직접 살갗에 닿지 않았는데도 지느러미 달린 앞발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져 진저리가 쳐졌다. 보충되지 않는 숨은 그대로 바닥을 드러내어 스스로 목을 졸랐다.

‘커헉.’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얼마나 많은 생명의 피와 찌꺼기가 섞였는지, 물이 역하여 도로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살기 위해선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이 빌어먹을 마물을 떼어내야 하는데, 다시 그 모습을 보며 죽음을 떠올릴까 저어되어 수면의 빛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리에 붙은 그것을 떼어내고자 있는 힘껏 발을 움직이던 그 순간,

“허억—…!”

부릅뜬 눈이 크게 떨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어디일까.

“하…, 하아…….”

물속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자마자 부족했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느새 제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가슴팍으로 내려 진정시켰다.

“하…….”

안도의 한숨. 그러나 정말 물속에서 사투를 벌인 것처럼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흐리멍덩해진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며 한율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흠칫.

그 순간, 나른하게 아래로 내려가던 눈꺼풀이 굳었다.

흐렸던 초점이 또렷해지고, 이불을 쥐고 있던 한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심코 스친 시야 속, 낯선 형체가 있었다.

한율의 눈동자가 조금씩 그곳을 향했다.

반쯤 열린 채 작게 흔들리는 문.

그 위.

“……!”

한율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문에 옆으로 매달려 있었다. 새카맣게 움푹 팬 눈으로 한율을 쳐다보며 기형적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까득, 까드득.

한율은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몸서리쳤다.

‘진해’를 바다 아래로 끌고 가려했던 그 귀신이었다.

“—컷.”

임PD가 만족스런 얼굴로 리허설을 끊었다.

“역시 대본리딩 때보다는 박진감 넘치네. 바로 본 촬영 들어갈 수 있겠어요?”

…후. 한율은 짧게 숨을 토하면서 눈을 깜빡였다. 한율의 눈에 서렸던 공포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율은 임PD에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분장팀 스태프가 분무기를 들고 한율에게 다가왔다.

칙칙. 식은땀 연출을 위해 아주 가볍게 분사한 뒤 부채로 살살 말렸다. 아무리 끔찍한 악몽을 꾼 연출이라 해도 너무 땀을 과도하게 흘리면 ‘아픈 건가?’라는 의문을 줄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곧 본 촬영 시작.

한율은 문에 매달렸던 귀신과 집안 곳곳에서 여러 씬을 다각도로 반복 촬영했다. 놀라고, 비명을 지르고, 어쩔 때는 애원하고 울면서.

그렇게 첫 날 촬영은 새벽 4시가 넘어가서야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율은 PD와 스태프들, 배우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했다. 귀신 배역을 맡은 배우, 이윤영에게도.

“수고하셨습니다. 팔이랑 어깨 괜찮으세요? 와이어 이거 엄청 아프다던데.”

“네, 괜찮아요.”

섬뜩한 몰골로 분장한 이윤영은 수줍게 미소 지으며 꾸벅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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