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427)

* * *

“물럿거라, 귀신아! 슉슉!”

새벽 5시 10분.

숙소로 들어가자, 거실에서 혼자 이상한 코미디영화를 보고 있던 박가람이 기다렸다는 듯 한율 앞에서 알짱거렸다.

“없나? 안 달고 왔나?”

“…….”

뭐하는 거지.

감정 소모가 많은 씬을 밤샘으로 촬영을 한 터라 피곤하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가만히 박가람을 쳐다보자, 박가람이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음, 없군!”

“안 자고 뭐해요?”

박가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찍 일어난 건뎅?”

박가람은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푸석푸석해진 피부에 눈이 퀭한 상태였다.

“그래요.”

거짓말인 게 뻔히 보였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옆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자 박가람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러곤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율이 메이크업을 지우는 모습을 보았다.

“할 말 있어요?”

“아닌뎅. 없는뎅.”

메이크업을 대충 지운 후 씻을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 이번에도 박가람은 한율의 뒤를 졸졸 쫓아 나오며 방문을 닫더니,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봤다. 거실은 물론 부엌 조명까지 환하게 켠 채.

한율은 쟤가 왜 저러나 잠시 쳐다보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한율이 씻고 나오자 박가람은 기다렸다는 듯 TV와 전등을 모두 끄고 다시 한율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형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한율이 너 무서운 거 촬영하고 왔잖아. 그러니까 네가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봐 이 형이 지켜주는 거야. 고맙게 생각해.”

“그 반대 아니고요?”

무심코 솔직한 감상으로 되물었더니 박가람이 움찔 거렸다.

“…티 나?”

“…….”

뭐라고 반응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한율은 못 들은 척 기초화장품을 발랐다. 박가람도 아무 말 없이 침대에 앉아 있다가, 한율이 불을 끄고 2층으로 올라가고 나서야 자리에 누웠다.

조유찬의 전화를 받고 깼을 땐 9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학교나 회사에 가고 없어, 숙소엔 한율 혼자뿐이었다. 한율은 가볍게 샤워한 후 캐리어를 꺼내 짐을 쌌다.

오늘은 오후까지 서울에서 촬영한 후 진주로 이동, 그곳에서 하룻밤 자고난 뒤 주요 촬영지인 섬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것도 챙겨갈까?’

한율은 냉장고에서 모친이 만들어준 레몬생강청을 꺼냈다. 예전에 후드소녀가 선물해준 수제청은 차남석과 다 나눠먹은 지 오래.

‘넉넉잡아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으니.’

하지만 덜어서 담을 만한 병이 없었다.

조유찬이 데리러 오는 건 30분 후. 한율은 지갑과 핸드폰만 챙기고 신발을 신었다. 그러고 문손잡이를 잡기 직전,

“……?”

한율은 도로 신발을 벗고 발코니로 향했다. 창을 열자 바로 이 건물 아래에서 익숙한 마나의 기운이 잡혔다.

‘이건 분명.’

지난 번 반복해서 전화와 메시지를 보냈던 사생에게 자신이 직접 심어놓았던 추적마법의 기운.

일부러 찾아갈 수고를 덜어주어서 고맙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드라마 촬영 스케줄이 빼곡하게 짜여있을 때 오다니.

‘팬이라 지껄이며 제멋대로 굴던 인간이 새삼 사과하러 왔을 리는 만무하고.’

이럴 때 트러블에 얽히면 자칫 일정 자체가 어그러진다.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며 조유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숙소 밑에 지난 번 사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알짱거리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어떡하기는 뭘 어떡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형 금방 사람들이랑 간다!]

그리고 3분도 지나지 않아 아래가 시끄러워졌다. 한 여성이 악을 쓰는 소리가 쩌렁쩌렁 올라왔다. 아주 대성통곡을 하며 울부짖는다.

“사과하러 왔다고! 한율아, 미안해! 누나가 잘못했어, 한율아아…!”

그러나 조유찬의 화난 목소리가 더 컸다. 그도 괜히 온갖 군상을 만난다는 아이돌매니저를 4년째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 지금 이거 몰카로 찍으면서 나중에 피코질하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경찰 선생님, 여기요! 세상에, 형사사건 가해자가 피해자 사는 곳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경우가 어디 있대요?!”

“뭐?! 가해자?! 다 들었죠? 야! 이렇게 길에서 다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하는 거 명예훼손이야!”

“그래, 사실적시 명훼 걸어 봐, 어디!”

경찰들은 형사사건 가해자와 피해자 소리를 들은 까닭인지 황급히 그녀를 달랬다.

“이렇게 소리 지르면 아가씨가 불리해져요. 일단 진정하시고….”

“나 그냥 사과하러 온 거라고! 한율아아!”

“남의 집 귀한 자식 이름 적당히 불러! 그리고, 우리 애 지금 집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달칵달칵. 한율은 소파에 앉아 따뜻한 레몬생강차를 티스푼으로 저으며 리모컨을 쿡쿡 눌렀다.

소란은 홈쇼핑의 더덕구이 판매 채널에서 멈췄을 때 비슷하게 가라앉았다.

삑삑삑삑, 덜컹.

“후우….”

지친 한숨을 뱉으며 조유찬이 들어왔다. 그러곤 TV에 나오는 맛깔스런 붉은 더덕구이를 보더니 힘없이 웃었다.

“저걸 보니 더덕구이에 소주가 땡기는 구나.”

“수고하셨어요, 형.”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뭘. 나중에 주변에서 민원이나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한율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마침 근처 건물에 사람들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괜찮을 거예요.”

* * *

“으어어, 오늘도 보람차게 하루를 보냈드아.”

자정이 넘은 시간. 서한율을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이 숙소로 돌아왔다.

“어?”

방으로 들어간 박가람이 우뚝 멈췄다.

“한율이 화장품이랑 폰 충전기 다 어디 갔어…?”

화장품을 나란히 세워놓은 서랍장 위가 듬성듬성 빈 걸 보며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길우성이 아아 하며 대답했다.

“써한, 드라마 촬영하러 지방 내려갔잖아요. 그래서 챙겨간 거겠죠.”

“지방?! 어디! 언제까지!”

“남해에 있는 섬이라고 하던데?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 걸릴 거니까 나한테 화분 물 제때 주라고….”

“아안돼에…!”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박가람이 풀썩, 침대 위로 상체를 엎드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불에 막힌 박가람의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내 인간부저억….”

“……?”

“방금 가람이 형 뭐라 그런 거야?”

잘 듣지 못한 강보배가 묻자 길우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못 들었는뎅.”

그 순간, 박가람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그 방법이 있었어!”

“……?”

다음 날 아침.

“……?!”

잠에서 깬 강보배는 방을 나가려다, 무심코 박가람의 침대를 보곤 작은 충격을 받았다.

색색 곤히 잠든 박가람의 머리맡.

거기엔, 서한율의 포토카드가 염주와 나란히 놓여있었다.

공포 드라마 촬영 중입니다

이희우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막 페디큐어를 바른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전화 상대방을 향해 말했다.

“그럼 그 대본, 완성되면 나한테도 보내줘. 출연료는 친구 DC해서 기름 값만 받을게.”

-[어? 미안하지만 네가 할 만한 캐릭터는 넣을 계획이 없….]

“넣어.”

-[…….]

부윤방이 기막혀하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이희우는 가만히 승낙의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 밖에 빨래 넌 거 잊어버렸다! 끊을게!]

뚝.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말하든가, 나쁜시키.”

이희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음습한 날씨였다. 하지만 공포 장르를 찍기엔 정말 알맞은 날씨.

‘지금쯤이면 한창 재밌게 촬영 중이겠네.’

이희우는 빙글 몸을 돌려 저 혼자 떠들던 TV 채널을 돌렸다.

나 무서운 얘기 좋아한다, 출연료는 교통비 정도만 줘도 괜찮으니 출연하고 싶다. …라는 뜻을 매니저를 통해 SBC의 임미숙PD에게 전달했지만, 돌아온 건 돌려까기 거절.

『희우 씨처럼 연기실력이 출중한 미모의 배우 분이 나와 주신다면야 정말 감사하죠. 하지만 괜찮겠어요? 스토리가 부실한 공포 드라마에서라도 연기하고 싶은 절박한 신인들과 다르게, 부르는 곳도 많은 희우 씨가 ‘굳이’ 우리 단막극에 출연하고 싶다고 해서 출연한다면…, 여러 뒷말이 나올 텐데요.』

한율이도 눈독 들이는 곳 많고, 걔 절박하지도 않거든? 방송국 앞세워서 냉큼 낚아채놓고 뭔 소리야.

이희우는 목 끝까지 차올랐던 반박을 꾹 내리눌렀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연기 잘하는 사람이랑 연기하고 싶다아, 재밌는 거어….”

그렇게 한숨 섞인 푸념을 내뱉으며 리모컨을 연타하던 그때였다. 핸드폰에서 벨소리로 설정해둔 어스래빗의 가 흘러나왔다.

함께 <수의형사> 주연을 맡았던 오지원의 전화.

“하이, 지원쓰.”

-[또 오빠라고 안 부르지.]

“나 친오빠한테도 오빠라고 안 부르는데?”

-[그럼 어떻게 하면 불러줄 건데?]

“연기대상타면 생각해볼게.”

-[…희우 너 얼마 전에 승권 씨 생일파티 갔었어? 강남에 있는 클럽에서 열었다던데.]

이희우는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나 걔 존나 싫어해. 씹변태새끼야 그거.”

-[어, 그래….]

“그런데 왜?”

-[아니, 내 친구가 거기 갔다가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무슨 얘기?”

-[최근에 데뷔한 남자 아이돌그룹 중에 좀 더러운 스폰 받으면서 뜨는 애들이 있는데, 그게 <보컬리스트>라는 프로그램에도 나왔었던 애들이라고….]

이희우가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 한율이랑 남석이 의심하는 거야?!”

-[아냐아냐아냐아냐! 걔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뚝.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지껄이고 있어.

화가 나서 전화를 끊자, 곧바로 오지원에게서 메시지가 연달아 날아왔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ㅠㅠ..]

-[고동 엔터의 높은 사람도 거기에 관련된 것 같다는 말을 들어서 그래.]

-[너 요즘 블블의 민준이란 애랑 친해졌다며. 오빠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ㅜㅜ]

-[그쪽 바닥도 보기랑은 다르게 굉장히 더럽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 * *

부슬부슬 비가 쏟아지는 항구. 한율은 극 중에서 어머니 역할을 맡은 중견 배우 강덕심과 함께 대사를 가볍게 맞춰본 후 촬영에 들어갔다.

하얀 셔츠에 새카만 넥타이를 한 정장 차림. 여기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 학생용 구두를 신고, 양손에는 음료수 박스와 과일상자를 들었다.

“꼭 가야 돼? 아빠가 살아생전에 절대 안 가려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엄마아!”

짜증 섞인 얼굴로 어머니를 부르는 한율의 표정에선, 정말 아버지의 살아생전 행동의 이유를 고려하는 게 아닌, 실은 귀찮아 죽겠다는 속마음이 엿보였다.

섬에 들어가면 와이파이도 잘 안 켜질 것 같고, 게임도 못할 것 같은데. 그리고 친척이라고 해도 온통 모르는 사람들만 있을 텐데 어색해서 어떡하나.

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철없는, 그런 모습.

캐리어를 끌고 앞서 걷던 강덕심이 돌아보았다. 그러곤 성큼성큼 와서 한율의 팔을 때렸다.

“너희 할아버지 돌아가셨다잖아! …그 섬 절반이 너희 할아버지 땅이라는데, 가서 절이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너한테 뭐 좀 떨어질 거 아냐!”

욕심 가득한 어머니의 말에, 한율은 쪽팔려 죽겠다는 얼굴로 황급히 주변을 살피곤 말대답했다.

“서울 사는 사람이 이런 촌구석 아래에 있는 섬 가져서 뭐…, 아, 아파! 그만 때려!”

“그만 징징거리고 따라 와! …어휴, 하나밖에 없는 아들새끼가 아주 웬수야, 웬수. 맨날 뺀질뺀질거리면서 피방갈 생각이나 하고. 빨리 와! 배 시간 늦어!”

“아, 엄마아….”

한율은 정말 가기 싫다는 얼굴로 늘어지듯 걷다가, 강덕심이 째려보아서야 바로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빠 돌아가셨을 때 그 섬사람들 아무도 안 왔는데, 뭐 하러 가냐고, 진짜.”

섬은 ‘윤진해’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고향이자, 많은 친척들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진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처음으로 섬에 발을 디뎠다.

배에서 먼저 내린 한율은 바닥에다가 음료수와 과일박스, 캐리어까지 내려놓은 뒤, 강덕심에게 우산을 씌워주면서 한 손으론 그녀를 안전하게 선착장 위로 이끌었다.

“무슨 놈의 비가 징글징글하게도 내리네. 그래도 배가 떠서 다행이다. 안 늦게 와서.”

“엄마, 여기 와이파이 터질까?”

“쓰읍.”

듬직하게 어머니를 챙기다가도 아직 철부지인 면모를 보이는 아들과 기가 센 어머니. 정말 모자지간 같은 두 사람 앞으로 상복을 입은 노인이 다가왔다.

“네가 기주 아들이구나. 나는 네 작은할아비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작은아버님.”

종조부는 어색하게 인사하는 두 모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착하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장례에도 다 오고.”

그러곤 따라오라는 듯 먼저 걸었다. 두 다리의 길이가 안 맞는 것 같은 어색한 걸음걸이. 한율은 그의 오른발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유심히 주목했다.

유산 때문에 찾아온 게 달갑지 않아 까칠하게 구는 건가, 눈치를 살피던 강덕심이 한율이 들고 있던 우산을 대신 들고 캐리어를 잡았다.

“가자.”

“어….”

한율도 황급히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챙겼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걷던 그때, 한율은 크게 놀라며 우뚝 멈췄다.

“왜?”

“어….”

분명히 오른쪽 방파제 아래에 누가 서있었던 것 같은데, 눈을 한 번 깜빡였더니 사라졌다.

한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무 것도.”

실제로 방파제 아래엔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귀신 배역이 내내 서있었지만, 한율은 ‘잘못 봤나?’ 찝찝한 얼굴로 재차 살피곤 걸음을 옮겼다.

“컷. 구도 바꿔서 다시 갈게요.”

같은 씬을 반복 촬영하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이 조금씩 강해져, 선착장 씬을 끝내고 이동할 즈음엔 한쪽 어깨가 완전히 젖었다.

“춥겠다, 얼른 가자.”

촬영용 소품인 음료수 박스와 과일 박스, 캐리어는 스태프들이 차에 실었다. 조유찬이 다가와 한율에게 겉옷을 둘러주고 우산을 씌워주었다. 다른 매니저들도 각자의 배우를 챙겼다.

이윤영에게도 매니저인 친구가 내려가, 그녀가 무사히 방파제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위에서 의상팀 스태프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옷 더러워지지 않게 조심해요!”

그 소리를 들은 강덕심이 불쾌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너무하네. 내내 비 맞으면서 고생한 애한테.”

“선생님.”

그녀의 매니저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강덕심은 깊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임미숙PD는 카메라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고, 그건 촬영 장비를 차에다 옮겨 싣는 다른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자, 가자.”

조유찬도 아무 것도 못 들은 것처럼 한율의 등을 토닥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아주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것이, 이쪽도 스태프의 태도를 지적할 만한 위치는 아니라서 참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자 조유찬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방송국 놈들 갑질은 알아줘야 해.”

“…….”

‘방송국 놈’을 부친으로 둔 한율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 * *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병원 장례식장을 경험했던 진해는, 고인의 시신을 집안에 두고 치르는 이곳 장례에 크게 놀랐다. 최근엔 TV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에.

처음 보는 낯선 친척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베로 만든 완장까지 찬 진해는 나중에 염습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소리에 바짝 얼었다.

“고등학생이면 다 컸네.”

그러나 뻣뻣하고 어색한 얼굴로 빈소 앞에 앉은 진해의 마음을 더 어지럽히는 건, 마당의 평상에 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였다.

“소형이 엄마가 반 미쳐서 바다에 뛰어들려는 걸 장 씨가 간신히 말렸다며?”

“시체라도 빨리 찾아야 섬이 조용해질 텐데….”

“사흘이나 지났으면 이미 죽어도 진작 죽었지.”

그 얘기를 듣자 떠오르는 건, 조금 전 방파제 아래에 있었던 하얀 형체. 착각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저기….”

진해는 조심스럽게 종조부에게 물었다.

“누가 없어졌어요…?”

종조부는 진해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넌 알 거 없다. 궁금해 하지도 말고, 괜히 집 밖에 나가 어슬렁거리지도 마라. 미친년한테 잡히기 싫으면.”

미친년이라니. 맥락상 지금 ‘소형’이란 딸을 잃어 찾아 헤매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너무 심한 말 아닌가.

그러나 따질 만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아직 종조부란 사람과도 어색하여 진해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그리고 그것보다, 몇 시간이고 내내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진해는 종조부의 눈치를 보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다행히 종조부는 진해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핸드폰에는 와이파이 잘 잡혔다.

“그, 뭐냐.”

“네?”

소리를 끄고 조심스레 게임을 하는데, 종조부가 말을 걸었다.

“너희 또래 애들 귀에다 꽂는 거.”

“이어폰이요?”

“그래. 여기서는 절대 그거 귀에 꽂고 다니지 마라.”

왜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종조부는 제 할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을 짚으며 몸을 일으킨 그는 퉁, 퉁. 오른발을 크게 구르며 마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평상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들 옆에 끼었다.

“바다에 빠져죽든, 죽어서 바다에 던져졌든, 억울하면 그 한 좀 풀어달라고 언제고 떠오르게 돼 있어.”

펄럭펄럭. 비를 막기 위해 바지랑대와 기둥에다 묶어 고정한 천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바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섞여 더운 기분 나쁜 바람이었다.

진해는 섬뜩한 이야기에 진저리를 치면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핸드폰 게임에는 새빨갛고 강렬한 글씨가 연신 떠오르고 있었다.

[Kill! Kill!]

밤. 진해는 상갓집과 조금 떨어진 종조부의 집으로 가서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진해는 아주 오래 전 시집을 간 종조부의 딸, 진해에겐 종고모가 되는 사람이 예전에 썼던 방에서 자기로 했다. 어머니는 바로 옆방에서 종조모와.

가장 먼저 핸드폰부터 충전시키며 진해는 누렇게 뜬 벽지와, 문 바로 위에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부적을 보았다.

“진짜 옛날 집이네….”

후웅! 덜컹덜컹! 강한 바람이 불어와 창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본 진해는 낮은 목소리로 궁시렁거렸다.

“어우씨, 깜짝이야.”

촤악. 그러곤 곱게 접혀 묶여 있던 커튼을 쳤다.

“어?”

커튼 아래에 인위적으로 덧댄 긴 끈 여러 개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창문 아래엔 그 끈을 돌돌 감아 고정시키기 좋아 보이는 구부러진 못까지 여러 개 박혔다.

마치, 창문 아래를 완전히 덮어버릴 수 있도록 만든 장치처럼 보인다.

“외풍이 심한가?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데….”

덜컹덜컹!

잠시 고민하던 진해는 시끄럽게 흔들리는 창문 소리를 듣곤, 커튼에 달린 끈을 못마다 다 돌돌 감아 묶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가 진해의 등을 훑었다.

“진해야.”

“왁, 깜짝이야! …아, 할머니.”

대체 언제 왔는지, 활짝 열린 문 앞에 침구를 든 종조모가 서있었다. 종조모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이부자리는 바로 이 문 옆에 깔고, 머리는 오른쪽 벽. 절대 창 옆에선 자지 마라.”

“왜, 왜요…?”

종조모가 대답했다.

“바다귀신이 잡아간다.”

기특하네요

“사실 조금 걱정 했었는데.”

“무슨 걱정이요?”

스태프들이 다음 씬 촬영준비를 하는 시간은 배우들에겐 잠깐의 휴식시간.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며 쉬는 서한율을 보며, 카메라감독이 PD에게 말했다.

“가끔 감정 밑바닥을 긁어 드러내는 극단적인 연기만 잘하는 사람들 있잖습니까.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이나 경험, 사고가 일치하는 캐릭터 연기만 잘하는 유형. ‘눈길’에 있는 친구가, 저 친구 연기 잘한다는 소리를 했을 땐 그런 게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아, 감독님은 오디션 볼 때 안 계셨죠?”

“컷 소리 날 때마다 애가 배역의 가면을 싹 벗는 거 볼 때마다 얼마나 소름 돋는지 모릅니다. 꼭 이제설 처음 봤을 때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도.”

임PD가 웃으며 물었다.

“NG를 거의 안 내줘서 참 고맙죠?”

카메라감독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기도 잘하고 촬영에도 협조를 잘해줘서 기특하네요.”

팔랑. 한율은 따뜻한 레몬생강차를 마시면서 대본을 넘겼다.

한율이 찍을 다음 씬은 해무가 짙게 깔린 새벽거리가 배경이라, 리허설 시간을 감안하면 2시간 남짓 기다려야 했다. 이 2시간도 다른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전제 하에 나온 계산이라 그보다 더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조유찬이 다가와 물었다.

“잠깐이라도 숙소에 가서 눈 좀 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

“난 괜찮으니, 형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나 네 매니저야. 환한 대낮이면 몰라도, 이런 시간에 미성년자인 너만 두고 나 혼자 가서 편히 자빠져 자라고?”

한율은 대본을 덮었다.

“그럼 숙소에 가기 전에 잠깐 촬영 좀 보고가도 돼요?”

조유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을 비롯한 남자 배우들이 묵기로 한 숙소는 섬의 유일한 슈퍼에서 덤으로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다. 이번 촬영은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집에서 진행될 참.

“와….”

그곳엔 메인 귀신 배역을 맡은 이윤영 외에, 미리 특수 분장을 받고 대기 중이던 또 다른 배우가 있었다. 극 중에서는 끝에 가서야 반전과 함께 정체를 드러내는 숨은 주연.

촬영 장비를 세팅하는 스태프들 사이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를 본 조유찬이 감탄했다.

“나중에 CG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진짜 저 분 팔 같다.”

촬영은 모든 준비가 끝나고도 이런저런 회의와 의견조율을 거쳐 20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그러나 3분도 지나지 않아 돌연 섬 위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중단되었다.

“누가 가서 저 개 입 좀 틀어막아!”

“막내! 안 뛰어가고 뭐 해!”

젊은 스태프 한 명이 핸드폰 조명을 켠 채 섬의 좁은 길을 달렸다. 월월월! 그 동안에도 개는 힘차게 짖어댔다. 그 옆집에서 키우는 개도 합세했다.

개들의 합창에 스태프들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24시간 내내 일하느라 신경이 잔뜩 예민해진 탓이었다.

“요즘은 오디오에 잡혀도 특정 소리만 골라 깨끗하게 지울 수 있기는 하지만…, 당장 현장에선 몰입이고 뭐고 다 깨지니.”

완성된 영상은 편집과 음향효과로 긴장감 넘치게 나올지 몰라도, 배우에게 있어 촬영과정은 대부분 반복된 연기와 기다림.

한율은 촬영이 재개되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조유찬과 함께 자리를 떴다.

한 시간 겨우 잔 후엔 해무가 짙게 깔린 길에 서서 바다에서 어기적어기적 나오는 귀신을 목격하는 씬을 촬영했다. 비가 그치고 해가 뜰 무렵엔 다시 옷을 갈아입고, 극 중 종조부의 집으로 장소를 옮겨 촬영 시작.

* * *

조부의 장례를 위해 찾아온 섬, 이틀째.

창문 옆에서 자면 바다귀신에게 잡혀간다는 종조모의 섬뜩한 이야기를 듣고 잠을 설치다 간신히 잠들었던 진해는, 얼른 일어나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비몽사몽 잠에서 깼다.

“……?”

그러다 커튼 아래로 치렁거리며 내려온 긴 끈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어제 자기 전에 전부 단단히 감아 묶었던 것 같은데.

어머니가 보챘다.

“윤진해, 뭐 해! 빨리 나와서 세수하고 옷 갈아입어!”

진해는 목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오늘은 고인에게 수의를 입히는 날이었다.

진해는 영정사진이 아닌, 처음으로 조부의 얼굴을 직접 보았다. 어른들은 선뜻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진해에게 습을 도우라 강요하는 대신,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라고 일렀다.

염습이 끝나갈 무렵, 돌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리 소형이 여기 있지?! 다 알고 왔어!”

“이 여자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내 딸 내놔, 이 잡아 쳐 죽일 바다귀신 새끼들아!”

“잡아, 잡아!”

진해는 놀란 다른 어른들과 함께 빈소를 나왔다. 산발된 머리 사이로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여성이 악을 썼다.

“여기 살던 영감이 우리 소형이 데려간 거 다 알고 있어! 우리 소형이 내놔아…!”

“아이고, 댁 딸을 왜 죽은 사람 집에서 찾아!”

당혹스러워하는 친척들 대신, 평상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잡아 말렸다. 대문 밖, 담 너머 멀리 끌려 나가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소릴 질렀다.

“귀신이랑 붙어먹었으니 그리 뒈진 거 아냐…!”

소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성이 끌려간 반대 방향에서 한 남자가 황급히 달려오더니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어요, 큰일! 민박집에 머물던 아이 하나가…!”

그 순간이었다.

쿵.

진해는 갑자기 들린 굉음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

사람들이 모두 나온 빈소 안. 대렴을 마친 주검만 놓인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 듯했다.

쿵. 다시 한 번 더.

진해는 어깨를 떨며 주변의 다른 어른들을 살폈다. 어른들은 그 소리를 못 들었는지, 마당으로 들어와 떠드는 남자에게 집중하며 그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쿵.

진해는 다시 놀라며 조금씩, 빈소로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문.

주검의 머리맡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아…….”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새카맣게 움푹 팬 하얀 원피스의 여자가.

까드득, 까득.

기형적으로 꺾이는 고개 아래로 구정물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며, 주검을 감싼 이불을 천천히 적신다.

“아아악……!”

털썩. 진해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놀라 왜 그러냐며 다가오는 어른들. 그러나 진해는 당장 대답하지 못했다. 진해의 시선은 주검을 넘어 조금씩 자신에게 기어오는 귀신에게 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벌벌 떠는 진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 어…….”

그때 종조부의 얼굴이 진해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정신 차려!”

“…흐윽—.”

“나 봐라.”

종조부가 진해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홀리지만 않으면 잡것이 너한테 들러붙을 일도, 널 끌고 갈 일도 없다. 이 할아비 말, 알아듣겠냐?”

“흐윽, 흡…….”

진해는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끅끅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퉁. 종조부의 오른발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빈소 쪽을 향했다. 진해는 손등으로 눈을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붉게 충혈된 진해의 눈에 다시 빈소 안이 비쳤다.

조금 전 조부의 머리맡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더러운 액체로 물들었던 주검을 싼 이불 역시 깨끗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