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427)

* * *

정오가 되어서야 주어진 식사시간 겸 휴식시간. 제작진 측이 마련한 임시 식당은 섬의 마을회관이었다.

“한율이 너 연기 진짜 실감나더라.”

함께 마을회관으로 가는 길, 조유찬이 조금 전 따로 멀리서 찍은 영상을 돌려보며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찍으면서 나도 모르게 ‘진짜 뭐 있는 거 아냐?!’ 싶었다니까. 아직도 네가 뭔가에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모습이 잘 상상 안 가는데, 막상 보면 정말 실감나서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아, 책 좀 읽어야겠다. 어휘력 딸려.”

“…….”

“아, 우성이가 톡 보낸 것 같더라.”

조유찬이 한율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지문으로 잠긴 걸 열었더니 길우성이 보낸 톡이 떴다.

무슨 연락인가 함께 들여다본 조유찬이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사진은…?”

까치집이 된 누군가의 머리맡에 한율의 포토카드가 염주와 나란히 놓인 사진이 떠있었다.

-[너 가람이 형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네 사진보고 부적이라고 하던데.]

-[효험은 플라스틱 효과 같다고 구시렁대긴 했지만ㅋ]

한율은 미간을 구겼다.

대체 무슨 부적. 그리고 플라스틱이 아니라 플라시보효과겠지.

“애들이 너 무서운 드라마 찍고 있다니까 장난치나보다.”

한율은 며칠 전, 자신을 기다리다 졸졸 쫓아다녔던 박가람을 떠올리며 짧게 한숨 쉬었다.

“장난은 아닐 거예요.”

점심을 먹고 난 후엔 다른 씬 촬영을 구경했다.

진짜 민박집이 아닌, 극 중에서 나오는 민박집에 묵던 대학생 셋 중 한 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종조부의 말에 따라 ‘진해’가 어머니와 함께 종조부의 집에 처박혀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사라진 대학생을 찾아 섬 곳곳을 수색했다. 스태프들도 정신없이 뛰었다. 지미집 전용 레일을 깔아서 찍고, 이동차 카메라도 움직이고, 배우들은 합을 맞춰 진지하게 연기하고.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멀찍이서 구경하는데, 스태프가 넌지시 다가와 말했다.

“한율 씨, 슬슬 가서 준비해주세요.”

“네.”

한율은 다시 ‘진해’의 종조부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극 중 어머니 역을 맡은 강덕심이 와 있었는데, 그녀는 귀신 역할을 맡은 신인배우 이윤영을 달래고 있었다.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내 귀신 분장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던 이윤영의 시커먼 눈두덩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강덕심이 이윤영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팔을 토닥거렸다.

“원망에 설움까지 일일이 마음에 담다보면, 나중엔 정말 중요한 걸 담을 자리가 없게 돼. 그러니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일단 가서 자. 이러다 윤영 씨 쓰러지면 나중엔 자괴감이랑 후회 밖에 남지 않아.”

“하지만 왜 한 번에 제대로 못하냐고…, 그러니까 더 연습하지 않으면…….”

“사람이 잠을 제대로 못 자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야. 이대로라면 더 안 된다니까?”

“어떻게 그래요, 선배님…. 다들 촬영하고 있는데 신인이 되어가지고…….”

“하…, 대체 누가! 신인이면 30시간 내내 깨어있으면서 촬영장 지켜야 한다는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모르겠는데.”

훌쩍훌쩍. 그들 옆에서는 이윤영의 친구이자 매니저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 상갓집에서의 연기는 퍽 괜찮았는데, 그 사이 누가 또 구박이라도 한 모양.

“한율 씨.”

분장팀 스태프가 한율에게 손짓했다. 한율은 반사적으로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기어들어가는 이윤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희우 선배님이 탐냈던 역을 줬으면 알아서 잘하라고, 조연출님이…, 흡.”

“아니, 걔는 작년에도 귀신 연기 해놓고 왜 또….”

강덕심은 브라운관에선 생소하지만, 실제론 연기경력이 25년이 넘는 베테랑 연극배우였다. 이희우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잘 아는지, 그녀는 말을 하다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훌쩍.”

잠시 후. 한율이 먼저 방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을 때 강덕심이 들어왔다. 조금 전 한율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걸 그들도 눈치 채고 있었기에, 한율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윤영 선배님은 숙소로 가셨어요?”

강덕심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한율의 맞은편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매니저한테 두 사람 숙소로 데려가라고 부탁하고 왔어. 이젠 알아서들 추슬러야지.”

“네.”

“한율이 넌?”

강덕심이 한율을 바라보며 물었다.

“힘들지 않아? 어제도 새벽 3시부터 나와서 리허설하고 촬영하고. 오늘 새벽에도 잠 제대로 못 자고 내내 촬영했잖아.”

“저는 괜찮아요. 10분 쪽잠을 자도 바로 깊게 잠들 수 있도록 몸에 버릇을 들였거든요.”

본래 세상, 마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들인 버릇이었다. 현재의 삶에선 음악방송 대기실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강덕심이 신기한 얼굴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제설이 같은 애가 여기 또 있었네.”

“이제설 선배님이요?”

이제설은 <하울링>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로, 코미디부터 진지한 첩보 액션물까지 다양한 장르를 종횡무진 섭렵하는 젊은 연기파 배우였다. 그러나 소처럼 이 작품, 저 작품 쉴 새 없이 연기를 하다 보니 종종 단기간에 겹치는 캐릭터를 할 때가 있어, 이미지 소비가 심하다는 평을 듣기도.

“걔도 그러더라고. 잠들기 위해 뒤척거리는 시간이 아까우니, 최소한의 수면시간으로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빨리, 깊게 잠드는 법을 익혔다나 뭐라나.”

왜 그렇게 봐

진해는 밤이 되어 종조부의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아침에 본 귀신에 대한 충격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전 날엔 일일이 묶었던 커튼의 끈에 대한 것도 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덜컹덜컹.

‘…시끄러워.’

겨우 잠이 들 무렵, 진해는 시끄러운 창문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바람이 또 세게 부는 걸까.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창을 보는 순간,

“……?!”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키는 진해의 등이 문과 부딪쳤다. 쿵!

그러자 커튼 아래로 들어와 바닥을 더듬던 커다란 손이 쑤욱 빠져나갔다.

“어, 엄마…….”

진해는 벽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새카만 털이 뻣뻣하게 난 커다란 손은 보통 인간의 것이라 보기엔 굉장히 크고 기괴했으며, 아침에 본 귀신처럼 지저분한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쾅. 진해는 다급히 문을 열어 어머니가 있을 옆방을 살폈다.

“……!”

옆방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떠오르는 종조모의 경고.

『바다귀신이 잡아간다.』

진해는 패닉에 빠졌다.

* * *

그날 밤 촬영은 다른 씬보다 체력소모가 심했다.

‘진해’가 된 한율은 와이파이는커녕 기지국표시조차 없어진 핸드폰을 든 채 캄캄한 밤길을 달리며 외쳤다.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엄마…!!”

긴박한 느낌을 주기 위해 여러 구도와 각도로 찍어야하다 보니, 한율은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달렸다.

모니터 속 한율을 살피는 임미숙PD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주인공인 윤진해는 아직 17살 밖에 안 된 고등학생이었다. 또래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나도 알 거 다 아는 나이다! 다 컸다!’ 라고 허세를 부려도, 아직 어머니 앞에선 어리광쟁이 아들. 하물며 작년에 아버지가 작고하여 현재 그에게 남은 가족은 어머니뿐이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낯선 친척들만 있는 섬.

조부의 빈소에서 목격한 끔찍한 귀신과, 섬에서 연달아 발생하는 실종사건, 조금 전엔 커튼 아래로 불쑥 들어온 괴이한 손까지.

처음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로 벌벌 떨던 그의 얼굴이, 이젠 어머니까지 잃을지도 모른다는 더 큰 두려움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어머니를 찾아야하는데, 자꾸만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율은 제멋대로 나오려는 눈물이 방해된다는 것처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이젠 조금만 만져도 쓰릴 것처럼 부었지만, 그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닦아내며 어머니를 찾아 헤맸다.

‘대본에는 [울먹거리며 어머니를 찾는다] 라고만 적힌 지문을, 저렇게.’

말 그대로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배우였다.

모니터링 중엔 모니터에 뜬 자신의 모습을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차분히 관찰하다가 의견을 내놓기까지.

“이 장면 다시 찍는 게 좋지 않을까요? 조금 전 가로등 아래를 지났는데, ELS(Extreme Long Shot)나 360도 샷엔 아무 것도 없던 좌측에서 불빛이 날아와 눈에 반사된 것처럼 보여서요.”

“조명팀 사과하세요.”

“하하하….”

이러다가도 ‘액션’ 소리에 다시 무서운 속도로 역할에 몰입하는 한율을 보며, 임PD는 입가를 올렸다.

‘부모가 누군지는 몰라도 올바르게 잘 키운 게 천만다행이네. 이런 연기실력으로 사람에게 사기 치려고 작정하면, 누구든 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겠어.’

한율의 매니저인 조유찬은 자신이 맡은 ‘아이돌’의 연기 실력을 잘 알고 있는지, 일일이 감탄하기보다는 팔불출 같은 미소를 지으며 따로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작 단막극 주인공만 맡기엔 아깝긴 하지만, 몇 년 정도 지나면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오겠지.’

아이돌은 팬덤 장사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들의 팬덤을 이루고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주는 건 10대와 20대가 대다수. 아무리 대형 아이돌그룹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팬덤은 자연스레 약해지고, 새로이 자라난 어린아이들 대부분은 자기 또래 아이돌에게 시선을 돌리기 마련이다.

이런 시한부 직업이나 다름없으니 아이돌은 늘 미래가 불안할 수밖에 없고, 활동하면서도 미래를 위한 다른 길을 모색한다.

연기도 그 길 중 하나.

‘하지만 인지도와 인맥 빨로 넘어와도 연기만 잘하면 누가 뭐라 그러겠냐 만은.’

아이돌을 기용하는 걸 싫어한다고 소문난 임PD도, 사실은 처음엔 연기만 잘하면 아이돌 출신이든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디션을 보고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 족족 떨어뜨리다보면 어찌된 일인지 대부분 아이돌 출신이었고, 그렇게 ‘SBC의 임미숙PD는 아이돌 기용하는 거 싫어한다더라.’라는 소문이 났다.

‘무대에서야 애교를 부리든 인싸 댄스를 추든, 연기하는 곳에선 저렇게 연기만 잘하면 되는 걸.’

임PD는 모니터 속 한율이 지친 내색을 최대한 억누르는 걸 알아차리곤, 소형 확성기를 들었다. 한 시간 가까이 계속 뛰면서 쉽지 않은 감정연기까지 내내 선보였으니 지칠 만도 했다.

‘저런데도 힘들다 엄살 한 번 안 부리고.’

정말 카메라감독 말처럼 기특한 연기자가 아닐 수 없었다.

“오케이, 컷. 30분 휴식하고 다음 장소 이동할게요.”

조유찬이 한율에게 다가와 보온병을 내밀었다.

“한율아, 여기 차 좀 마셔. 목 아프겠다.”

“고마워요, 형.”

조유찬은 등에 지고 있던 가방에서 은색 돗자리와 방석, 휴대용 티슈를 꺼냈다.

“편히 앉아. 땀도 좀 닦아야겠다.”

“땀은 저희가 닦아드릴게요.”

언제 왔는지 분장팀 스태프가 끼어들었다. 스태프는 메이크업이 지워지지 않도록 한율의 눈물과 땀을 조심스레 닦아준 후 곧바로 떠났다.

한율은 여러 겹으로 접은 은색 돗자리 위에 방석을 놓고 앉아 편히 다리를 뻗었다. 조유찬이 이번엔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한율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촤아아. 멀지 않은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한율은 차가운 밤바람을 만끽하면서 따뜻한 레몬생강차를 마셨다. 역시 차를 챙겨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덜어서 담을 만한 병이 없어, 통째로 캐리어에 넣고 오느라 조금 무겁긴 했지만 말이다.

“아니, 왜 길바닥에 앉아서 쉬고 있어요.”

조연출이 웃으며 다가왔다.

“30분 충분히 기니까, 저기 들어가서 편히 쉬다가 연락하면 다음 촬영장소로 와요. 누워서 잠깐 TV 보고 있어도 되고.”

조연출이 가리킨 곳은 촬영장소 중 하나로 쓰이는 집.

조유찬이 놀라 되물었다.

“그래도 돼요?”

조연출이 어깨를 으쓱였다.

“휴식시간에 주연배우를 노상에다 방치하는 정신 나간 방송국 놈이 어디 있어요. 아직 촬영할 게 한참 많이 남았는데 몸 상하면 어쩌려고.”

“하하…, 감사합니다.”

꾸벅거리는 조유찬의 얼굴에 한 가지 의문이 스치는 듯했다. 이윤영은 30시간 내내 촬영장에 세워놓고도 그렇게 구박하더니.

집에 들어온 후 조유찬이 툴툴거렸다.

“한눈에 봐도 ‘될 놈’으로 보이는 사람만 차별대우하나보다. 에라이, 간세 같은 놈.”

“…….”

집은 방송국 측이 드라마 촬영을 위해 실제로 주민이 살던 곳을 빌린 곳이었다. 중요한 개인물품은 다 챙겨갔겠으나, 그럼에도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어 편히 눕지는 못했다. 대신 눈과 귀가 심심하지 않도록 TV를 켠 후, 오랫동안 달리느라 지친 다리와 발을 주물렀다.

“가만 있어보자…,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조유찬은 케이블 채널을 훑다가 리모컨을 내렸다.

화요일에 방송되었던 뮤닷의 <락뮤닷> 재방송. 마침 다음 주 컴백예정인 크리스탈 래빗의 티저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하하…, 같은 회산데 이렇게 방송으로 보니까 참 낯설다. 그렇지?”

“이번 싱글 앨범은 지금까지 나온 것과는 컨셉이 다르네요.”

잠깐 봤지만 메이크업은 강렬해지고 의상은 노출도가 올라갔다. 짧게 흘러나온 노래도 평소 불렀던 발랄한 사랑 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 훈계 전에 넌 회개 좀 해, 주제파악.]

“막내인 미랑이도 성인이 됐겠다, 그 기념으로 한 번은 섹시컨셉에 도전하고 싶다 그랬대.”

“본인 의사?”

“어. …에휴.”

조유찬이 한숨을 내쉬더니 혀를 찼다.

“스무 살이라고 해도 아직 한참 어린 나이인데, 애들은 스무 살만 되면 완전 성인이 된 것처럼 으스댄다니까. 쯧쯧.”

“형 몇 살이었죠?”

“스물여덟입니다.”

“…….”

“왜 그래, 왜 그렇게 봐.”

잠깐의 휴식시간 후. 한율은 극 중의 상갓집으로 향했다.

“액션.”

상갓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 한율. 그러나 상갓집은 텅 비어있었다. 마당에도, 빈소 앞에도.

“하아, 하아….”

사람을 찾는 한율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일부러 살짝 열어놓은 빈소의 문. 그 문 틈사이로 마루로 길게 새어나오는 촛불 빛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끔찍한 몰골의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나 어머니가 귀신에게 잡혀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한율은 거칠어진 숨과 울음을 목구멍 너머로 꾹 삼키고, 대신 용기 내어 불렀다.

“엄마…, 거기 있어…?”

조심히, 그곳을 향해 한 걸음씩 움직였다.

“엄마…?”

재차 불러봤지만 그림자는 미동 없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중에 TV로 방영된다면 시청자들이 톡창에다가 ‘가지 마!!!!’라고 도배할 법한 장면이었다.

드드득. 마루 위로 올라가는 한율의 발밑에서 낡은 널이 불쾌한 소리를 냈다. 열린 문 틈 사이. 빈소에 우두커니 선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머니와 비슷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소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한율은 제 입을 틀어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어머니는 소복을 챙긴 적도 없거니와, 이 시간에 갑자기 저런 걸 입고 여기에 서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에.

그 순간, 우두커니 선 여자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찾아 왔어?”

까득, 까드득.

그녀가 한율을 돌아보았다. 눈이 있어야 할 새카맣게 팬 구멍에서 구정물처럼 탁한 액체가 울컥울컥 흘러내린다.

“아, 으아아……!”

한율이 도망치려 하자 그녀가 튀어나와 한율을 잡아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쿵! 그러곤 발버둥치는 한율의 몸을 우악스럽게 잡아 돌려 저를 보게 한다.

공포로 질린 한율의 눈을 보며, 귀신 배역을 맡은 이윤영이 입을 헤 벌린 채 웃다가 고개를 좌우로 뚝뚝 꺾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엄마 찾으러 왔는데.”

한율의 어깨를 꽉 움켜잡는 그녀의 손은 가녀리고 하얬다.

“컷! 모니터링 할게요.”

“괘, 괜찮으세요?”

‘컷’ 소리가 나자, 소름끼치는 모양새로 웃던 이윤영이 안절부절못하며 한율의 위에서 비켰다. 한율은 태연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괜찮아요.”

그리고 PD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모니터링을 하고, 자잘한 동작이나 호흡의 합을 가볍게 맞춰본 후 재촬영에 들어갔다.

상대방이 아닌 카메라와도 호흡을 맞추며 연기를 하고 난 이후엔 이윤영이 아닌, 극 중 ‘소형 엄마’ 역을 맡은 ‘진송아’와 합을 맞췄다. 이쪽도 강덕심과 비슷하게 주로 연극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베테랑 배우라 그런지, NG는 거의 나지 않았다.

“연기는 배운지 얼마나 됐어?”

다음 씬 촬영을 위해 스태프들이 장비를 옮기는 동안, 한율은 진송아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았다.

소복에 산발로 풀어헤친 머리, 의도적으로 충혈되게 만든 눈에다가 이마에선 피까지 흘러내리는 분장을 한 상태였지만, 진송아의 표정은 푸근했다.

“엄청 잘하던데.”

“감사합니다.”

그녀는 한곳에서 쭈뼛거리고 서있던 이윤영도 손짓으로 불렀다.

“이렇게 셋이서 사진 한 장 찍을까?”

“제가 찍어드릴게요!”

조유찬이 냉큼 달려와 핸드폰을 들었다.

한율은 극 중의 두 모녀지간 사이에 앉아 아이돌스러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진송아는 여전히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렌즈를 응시했고, 이윤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브이 자를 그린 양손을 들었다.

찰칵!

조연출이 조유찬에게 다가가 일렀다.

“나중에 사진 올리게 되면 방송 이후로 부탁드릴게요.”

“네, 물론이죠.”

이어진 촬영은 사라졌던 대학생의 시신이 떠오른 방파제 근처에서 진해가 종조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를 찾는 씬이었다.

“액션.”

파도에 떠밀려오는 시신을 발견한 마을사람들이 바다로 들어가 시신을 건져내고 있을 때, 한율은 스태프의 신호에 맞춰 정신없이 도망치듯 달렸다. 그러다 방파제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발견하곤 우뚝 멈췄다.

“하아, 하아…….”

그들 사이에 그토록 찾던 어머니가 보였다.

한율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들렀던 불만 켜진 빈 집들.

드디어 비현실적인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눈물로 번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어머니의 모습을 담으려 하는 한율의 눈에 비친 건, 사람들이 막 시신을 끌어내는 물가에 우두커니 선 그 귀신이었다.

먼 거리임에도, 저를 쳐다보며 고개를 꺾는 귀신의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까득, 까드득.

아이돌의 본분은 잊지 않았습니다

촬영은 주연배우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시간과 돈 절약을 우선으로 두고 진행된다.

남해의 항구, 섬, 서울에서 다시 섬으로 장소가 바뀌며 전개되는 <객귀, 해>의 첫 촬영을 서울 배경 씬부터 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섬으로 온 지 나흘째 이른 아침.

한율은 ‘윤진해’의 어머니 역을 맡은 강덕심을 선착장까지 배웅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님.”

“그래. 남은 촬영 잘하고,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

강덕심은 며칠 동안 자신의 아들이었던 한율을 다정하게 안아준 후 배에 올랐다.

사라졌던 대학생의 시신이 발견된 그날 밤.

‘윤진해’는 자신이 밀쳐 이마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소형 엄마’가 상갓집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걸 알고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차마 겁이 나 누구에게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고, 바로 다음 날 조부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어머니를 졸라 마지막 배에 올랐다.

그러나 서울의 집으로 돌아온 뒤, 진해는 악몽과 귀신에게 끊임없이 시달린다. 결국 진해는 자신이 밀쳤던 여성이 잘못되어 그 딸인 귀신이 들러붙었다는 생각에, 이번엔 홀로 섬을 찾는다.

“여객선터미널이랑 배를 타고 들어오는 씬 촬영을 마지막으로 뺀 걸 제외하면, 이제 스토리 전개랑 촬영순서가 일치하네? 감정 잡기 좋겠다.”

조유찬과 함께 돌아가며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읍. 조유찬이 두 손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으그극. 오늘은 스태프들도 전부 1시까지 푹 쉰 후에 촬영을 진행한다고 했으니, 다시 숙소에 가서 한숨 자자.”

몇날며칠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야간과 야외촬영을 지켜봐서 그런지, 조유찬의 눈가는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보다 퀭했다. 그러나 배우 측은 촬영이 없으면 쉬기라도 하지, 스태프들은 촬영준비까지 하느라 더욱 혹사당하던 중이었다.

“형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난 산책 좀 하다가 들어갈게요.”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짜고 비릿한 바다 특유의 냄새와 섬의 중앙과 북쪽을 채운 수풀의 냄새가 뒤섞인, 그야말로 자연의 바람이었다.

조유찬은 주위를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율이 너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길을 잃을 정도로 큰 섬도 아니고, 아침인데다 날씨도 맑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적하니 괜찮다고 판단한 듯.

“하지만 너무 오래는 안 돼. 2시간 지나도 안 오면 찾으러 나올 거야. 뭔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네.”

“SNS에 올릴 셀카도 좀 찍고.”

“…네.”

“예쁘게.”

“…….”

한율은 조유찬을 보내고 난 뒤 반대방향으로 느긋하게 산책했다.

극 중에선 심상치 않은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 음습한 섬이었지만, 실제로는 공기가 맑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찰칵. 한율은 등대가 있는 방파제에서 등대가 보이도록 셀카를 찍었다.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윙크하는 사진도 한 장.

한율은 사진을 조유찬에게 보냈다가, 자신의 SNS로 들어갔다.

[여기 어디게요? ㅎㅎ :D #힌트는없음]

-율이 미소 보고 싶고 그리워서 막 울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이렇게 딱!!! 사진도 올려주고 진짜!!!! 엉어어엉어ㅜㅜ 사랑한다 진짜

-힌트는없음ㅋㅋㅋㅋ 하뉼이 진짜 은근 쏘쿨해ㅎㅎ

-오늘도 이쁘다 우리 산톢이 바다톢이8ㅅ8

-웬 천사가 예쁜 등대 앞에 내려앉았엉

-드라마 촬영 홧팅

-우리 연예인 쌩얼이 이 정도다 짜식들아!!!!! 덤벼!!!!!! (혼자광분버럭

섬을 한 바퀴 빙 돌아 숙소인 민박집이 있는 슈퍼 앞으로 돌아왔다. 슈퍼 앞에 놓인 평상엔 이젠 낯익은 스태프 몇 명이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배우 분 일찍 일어나셨네. 어디 갔다 와요?”

“산책 좀 다녀왔어요.”

“오늘 새벽까지 그렇게 촬영하고도, 체력도 좋아.”

“뭐 좀 드실래요? 커피?”

“괜찮아요. 나중에 더 대박나면 그때 비싼 거 사주시면 됩니다.”

“네.”

한율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슈퍼로 들어갔다. 작은 섬에 하나 밖에 없는 슈퍼였지만, 계산대에는 모바일카드결제가 가능한 최신식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율은 조유찬이 즐겨 마시는 커피와, 자신이 마실 오렌지주스를 골랐다. 그때 밖에서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윤영과 매니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뭐 좀 드실래요?”

이윤영은 며칠 만에 귀신 분장을 지운 민낯이었지만, 얼굴 곳곳엔 울긋불긋한 피부트러블이 올라와 있었다.

“아뇨아뇨, 괜찮아요. …한율 씨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대본 리딩 때 처음 만난 후로 열흘 가까이 지났지만, 이윤영은 여전히 한율을 어색하게 대했다. ‘액션’ 소리만 나오면 섬뜩한 연기를 가감 없이 보여도 실제로는 퍽 낯가리는 성격인 듯했다.

한율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강덕심 선배님 배웅도 하고, 산책도 하고 싶어서요.”

“그러시구나. 하하….”

먼저 계산한 한율은 밖으로 나올 때 다시 예의바르게 꾸벅 인사했다.

“그럼 이따 뵐게요.”

오후.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머리에 떡이 지고 꾀죄죄했던 스태프들이 간만에 멀끔해진 모습으로 모였다. 숙소에서 잠깐 다시 수면을 취했던 한율도 깨끗하게 씻고, 조금 수척해진 낯으로 보이는 메이크업을 받은 후 촬영장소로 향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후, 마지막으로 대본을 검토하고 리허설에 들어갔다.

“여자귀신이라고…?”

저 좀 살려달라고 찾아온 한율을 향해 종조부 역을 맡은 배우가 당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남자가 아니라?”

“네…. 그, 딸을 잃어버렸다고 찾아왔던 아주머니…. 그때 사라졌던 대학생 형 시체 찾았던 그날 밤에, 제가 그 아주머니를 할아버지 빈소에서 봤어요. 처음엔 아침에 봤던 그 귀신인 줄 알고 힘껏 밀쳤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그 아주머니여서….”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종조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퉁. 오른발을 세게 구르면서 그가 황급히 안방을 나가자, 겁에 질린 채 말을 잇던 한율도 덩달아 그를 따라나섰다.

“컷! 이대로 본 촬영 갈게요.”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섬에서 가파르고 좁은 오르막길을 올라 ‘소형’의 집으로 향하는 씬도, 폐인이나 다름없이 넋을 놓은 ‘소형 엄마’를 만나는 씬도.

* * *

“제가 잘못 했어요, 아주머니….”

진해는 소형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빌었다.

딸을 잃어 제정신이 아닌 그녀를 밀쳤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녀를 두고 도망쳤고, 나중엔 어떻게 됐는지 찾기는커녕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섬을 빠져나갔다. 그래서 소형이 자신에게 들러붙어 벌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며,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소형 엄마는 물끄러미 진해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마에 난 상처엔 반들반들한 딱지가 앉아있었다.

“소형아, 엄마한테 안 오고 뭐 해…. 엄마 찾으러 와야지…, 소형아…….”

“흐윽, 흡….”

그 모습을 착잡하게 지켜보던 종조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잃어버린 딸의 이름을 하염없이 부르는 그녀의 집을 허락 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진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를 말렸다.

“작은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어떤 망할 놈이 밖에서 죽은 시체를 본래 살던 이 집 가까이에다 옮긴 게 틀림없어. 그렇게 객귀가 사람의 영역으로 들어온 거고, 사람을 통해 너한테 옮겨 붙은 거다!”

그러나 집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소형의 방은 오늘 아침까지 주인이 썼던 것처럼 이불이 흐트러져있고, 책상도 조금 전까지 앉아서 공부를 한 것처럼 책과 노트가 어질러져 있었지만 그 위로 얕은 먼지가 내려앉았다.

진해는 환하게 웃는 모녀의 사진이 끼워진 액자를 보곤 눈물을 훔치다, 무언가를 발견하곤 어깨를 흠칫 떨었다.

책상 앞, 창을 가린 커튼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진해는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책상 아래를 살폈다.

“……!”

종조부의 집 창문 아래에 박힌 것과 같은 종류의 구부러진 못 여러 개가 뽑힌 채 나뒹굴고 있었다. 치렁치렁 내려온 커튼의 끈은 누군가 강제로 뜯어놓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진해는 당장 그 사실을 종조부에게 알렸으나, 그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소형이 시체를 찾는 게 급선무다.”

밤. 결국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진해는 다시 종조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묵었던 종고모의 방 구석에 앉았다. 창문은 커튼의 끈을 못마다 단단히 감아놓았다.

집안의 불이 모두 꺼지고 옆방에선 종조부 내외가 잠들었다. 진해는 조용히 일어나, 현관 옆에 놓여 있었던 낫을 들고 왔다. 그리고 문 옆에 이불을 감고 웅크리고 앉아 커튼을 친 창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후우….”

진해는 작게 숨을 고르면서 핸드폰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덜컹덜컹!

“……!”

별안간 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바람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집안의 다른 곳은 잠잠했다.

덜컹덜컹! 마치 누군가 억지로 열려고 흔들어대는 것만 같다.

진해는 핸드폰 대신 옆에 둔 낫을 두 손으로 꽉 잡아 창을 노려보았다.

우웅, 우웅!

덜컹덜컹!

핸드폰 진동소리와 창이 흔들리는 소리가 공간 가득 번지며 울렸다.

“흐읍, 흡….”

저러다 창이 박살나는 건 아닐까, 귀신이나 괴물이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잔뜩 긴장한 채 두려운 눈물을 삼키던 그때,

…쿵.

창문 밖에서 굉음이 났다.

조부의 빈소에서 귀신을 목격하기 전에 들었던 것과 흡사한 소리가.

“…….”

그 소리를 끝으로 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핸드폰 진동소리도 멎었다.

[부재중전화 1건 -엄마]

그러나 진해의 눈은 더한 공포로 물들어갔다.

투둑, …투둑.

커튼의 끈을 칭칭 감은 못들이 일제히 흔들리더니 천천히 벽에서 밀려나오고 있었다. 소형의 방 창문 아래에 떨어진 못들처럼.

“아…, 안 돼…….”

툭. 못 하나가 덜렁거리며 빠졌다.

…툭. 두 개째.

부릅뜬 채 얼어붙은 진해의 눈. 못이 빠져 살랑거리는 커튼 아래로 스윽 들어오는 커다란 손이 비쳤다.

“—허억!”

그 순간, 진해는 크게 숨을 몰아쉬며 악몽에서 깼다.

어두운 방.

“하아…, 하아…….”

옆에는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부재중전화 표시가 뜬 핸드폰과 녹이 슨 낫이 놓여 있었다. 창문 아래에 박힌 못들은 하나도 떨어진 것 없이 멀쩡했고, 커튼 아래로 내려오던 괴이한 손도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꿈이었던 걸까.

진해는 떨리는 가슴팍을 꾹 누르면서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쳤다.

‘엄마….’

진해는 핸드폰에 뜬 ‘엄마’란 이름을 보고 훌쩍거렸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차라리 엄마한테 다 말할걸, 걱정 끼치기 싫다고 입을 다물지 말고, 아주머니를 다치게 하고, 그 벌로 귀신이 쫓아다니며 괴롭힌다고 솔직히 다 말할 걸.

그렇게 잔뜩 후회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였다.

쿵.

“……?!”

진해는 반사적으로 훌쩍거리던 제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쿵. …퉁. …퉁. 옆방에서 현관으로, 종조부가 한쪽 발을 세게 구르며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끼익, 쿵.

00시 13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난 것도 모자라, 불도 전혀 켜지 않고 어디를 가시는 걸까.

…훌쩍. 한참을 망설이던 진해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스레 방을 나와 아직 종조모가 있을 옆방을 살폈다. 종조모는 곤히 잠든 상태였다. 그녀의 옆에는 물병과 컵, 빈 약봉지가 놓인 쟁반이 있었다.

진해는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끼기익, 덜컹. 현관문의 이음새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촤아아. 멀지 않은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고요한 밤의 정경. 저 멀리 바삐 걸음을 옮기는 종조부의 모습이 보였다.

환하게 켜진 가로등 불빛 아래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다 멀어지고, 그 뒤론 어슴푸레한 윤곽만 잡혔다.

그가 바삐 걷는 길은, 낮에 진해도 걸었던 곳이었다.

진해는 그 길 끝에 있는 집을 보았다.

소형의 집.

‘이 시간에 왜 저길…?’

진해는 홀린 듯이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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