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427)

* * *

어스래빗이 일본에서 활동할 곡은 .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뎌 기대에 가득 찬 가사처럼, 전체적으로 밝게 꾸며진 세트장에서 M/V를 촬영했었다. 그러나 일본 버전은 가사를 일본어로 그대로 번역하되 ‘학교’를 새로운 세상에 비유, M/V 촬영장도 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멤버들 외의 출연자들도 나올 예정.

폐교된 뒤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으로 쓰이는 학교 건물.

어스래빗 멤버들은 따로 마련된 분장실에서 헤어메이크업을 받았다. 멤버들을 꽃단장시켜주는 건 국내에서 활동할 때에도 그들을 맡았던 샵의 스태프들. 이젠 어느 정도 친해지고 익숙해져서, 잡담도 곧잘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누나들은 어제 맛있는 거 먹었어요?”

“우리 다 얼굴 팅팅 부은 거 봐. 일본에 왔으니 대표 음식은 먹어봐야 하지 않겠냐 그래서 오코노미야끼에 맥주에, 나중엔 타코야끼 사먹고. 새벽엔 편의점에 가서 푸딩 싹쓸이했어.”

“나도 푸딩 먹고 싶다.”

헤어메이크업을 마친 유호는 자신이 입을 의상을 들고 감회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진짜 교복은 아니지만, 교복 정말 간만에 입어본다.”

“4년 만?”

“졸업할 때 입었으니 정확히는 3년 만.”

벌써 의상까지 다 갈아입은 한율은 M/V 콘티를 다시 한 번 더 살폈다.

더와월 일본 버전 M/V는 막 학교로 전학 온 여학생 시점이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교실과 농구코트, 음악실과 과학실, 옥상 등. 학교 곳곳에서 그녀의 주위를 맴돌면서 마치 함께 가사의 화자인 것처럼 연기하며 노래를 부른다. 스킨십 씬은 일절 없었다.

『유치하기도 하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전개이기는 하지만, 이런 순정만화 같은 전개가 아직도 잘 먹히거든요. 그리고 다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런 풋풋한 걸 많이 촬영해둬야죠.』

길우성과 박가람이 유호를 놀렸다.

“스물 셋에 고등학생인 척 하는 유호 씨.”

“만으로 해도 20대인데 교복입고 어린 척하는 유호 씨.”

유호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건우를 돌아보았다.

“동생들 교육 똑바로 안 시킬래?”

“저 아저씨는 왜 갑자기 나한테 화살을 돌리고 난리야.”

“아저씨 아니거든?!”

분장을 마치고 나온 후에는 사람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느라 다소 정신이 없었다.

M/V에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은 물론이고, 어스래빗이 일본 활동을 할 때 도와줄 현지 회사 관계자들, 한국에서 날아온 M/V 제작 프로덕션의 감독과 스태프들, 현지에서 고용된 스태프들까지.

“리허설부터 갈게요.”

감독이 말하자, 대기 중이던 통역사가 소형 확성기를 들고 일본어로 말했다.

촬영은 점심시간에 잠깐 쉰 걸 제외하곤 부지런히 진행되었다. 멤버들은 본인 분량이 끝나면 다른 멤버들의 촬영을 구경하거나, SNS나 그라에 올릴 짤막한 영상이나 셀카도 찍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배우들이 나오는 씬 촬영을 먼저 끝낸 후엔 멤버들의 퍼포먼스 촬영이 이어졌다.

더와월은 데뷔하기 전부터 수백 번을 춘 안무인데다, 일본어 버전 노래도 꾸준히 연습한 상태. 어스래빗 멤버들은 큰 실수 없이 농구 코트나 교실, 옥상에서 퍼포먼스 촬영을 끝냈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라이언이 바닥에 쭈그려 앉으며 중얼거렸다.

“배고프다….”

“일어나세요, 용사여. 오늘 저녁은 먹방이라는 오 팀장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뭐 먹는데?”

박가람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초밥이라 합니다.”

“쵸밥?!”

“…….”

한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단순한 먹방이 아니었다. 먹방을 위해 가게의 상호와 주소가 적힌 쪽지만 들고 찾아가는 여정부터가 시작이었다. 그것도 M/V를 찍느라 헤어메이크업을 한 상태로, 옷만 갈아입고.

『해외활동을 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를 즐기는 모습도 보여야 어필이 되겠죠? 오버하지 않게, 공짜 여행을 와서 기분 좋은 관광객처럼 우와. …알았죠?』

꽃단장을 하고 카메라까지 대동한 채 몰려다녀서 그런지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그들을 향해 쏠렸다. 거기에 오 팀장의 말대로 거리나 지나치는 가게를 보며 우와우와 하고 있으니.

한율은 슬그머니 걷는 속도를 늦춰 멤버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거리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지금쯤이면 20대 중반이겠지.’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지금 일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국적이 일본이란 것과 각성능력 외엔 아는 바가 거의 없으므로.

‘지니고 있던 각성능력은, 마력 차단.’

얼핏 들으면 마법사로서 굉장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인 것 같지만, 물리적인 공격 앞에선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마법이 발달한 세계에선 전략적으로 잘만 사용하면 굉장히 유용한 능력.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각성능력이 같은 지구인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굉장히 두려워했다. 군으로 징집되면 그가 거둬서 돌보던 고아들의 생계가 막막해진다며.

비슷한 이유로 그는 살려달라고 빌었다.

지금껏 잊고 있을 정도로 미약하고 짧은 후회가 감회처럼 떠오른다.

‘그때 살려줬어야 했나.’

절대 군인이 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목숨을 거뒀다. 그때 실수로 놓친 한 아이. 그 아이는 나중에 더 큰 학살자가 되어 돌아왔다. ‘복수’를 외치며, 다 쓰러져가는 성에 숨어 지내던 병약한 공녀를 끌어내 몹쓸 짓을 저지르고, 양민들과 함께 기름을 뿌린 성 안에 가둬놓고 불을 질렀다.

‘아니, 아이들도 포로로 잡을 것이 아니라 확실히 죽였어야….’

불쑥.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한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길우성이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써한?”

게이트가 열리는 날까지 평범하게 ‘서한율’의 삶을 살겠다 결심하고 평정을 덧발라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악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하.”

한율은 짧은 한숨으로 사고를 전환시켰다. 앞서 가던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한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호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한율아 왜? 컨디션 안 좋아?”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가를 올렸다.

“아뇨. 그냥… 초밥 집에 다른 메뉴가 있을까 걱정돼서요.”

“아, 맞다.”

차남석이 물었다.

“너 회 싫어하지?”

“도착하면 근처에 다른 가게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나 일본 오면 그거 먹고 싶었는데. 샤브샤브.”

“예약은 초밥 집으로 되어 있잖아.”

“나 돈 가져왔어.”

“후…, 샤브샤브라. 걱정 마, 써한. 외롭지 않게 내가 같이 가서 먹어줄게.”

“나도 고기.”

“…….”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초밥 팀과 샤브샤브 팀으로 나뉘었다.

한율은 오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구하는 유호나, 다른 시시한 잡담을 나누는 멤버들을 바라보다가 저를 찍는 카메라를 의식했다. 그리고 그쪽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근처에 맛있는 샤브샤브 식당이 있으면 좋겠네요.”

* * *

쾅! 방문이 세게 닫혔다. 그러나 안에서 빽 지르는 소리는 거실까지 또렷하게 새어나왔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아니라고! 으아아, 환장하겠네, 진짜!”

민준은 그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파에 풀썩 널브러지면서 리모컨을 들었다. 다른 멤버가 들어간 방에서도 전화 상대방을 향해 부정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엄마, 그런 거 다 헛소문이라니까? 우리 회사 그런 짓 안하고, 엄마 아들도 그런 짓 안 해! 아들 못 믿어?”

“미친놈아, 내가 그딴 짓거리로 돈 벌 거였으면 진작 억대 계약금 받고 갔지, 너는 내가 사리분별 못하는 호구로 보이냐? …야 이 생퀴야! 호구는 호구라도 그런 더러운 짓은 안 해!”

우리 멤버들이 아무 스케줄 없이 숙소에 일주일 넘게 처박히는 게 몇 년 만이더라. 민준은 가만히 과거의 기억을 헤집다가 제 머리도 헤집었다. 이딴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닌데.

“흐으아아….”

염색과 탈색을 반복한 탓에 개털이 된 머리카락은 헤집은 상태 그대로 시들시들해졌다.

그래도 다행히 미국에 계신 부모님은 이번에 회사와 관련돼서 도는 지저분한 찌라시를 접하지 못했는지 잠잠했다. 교우관계가 협소하여 그런지 다른 멤버들처럼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며칠 전에 딱 한 사람, 배우 이희우를 제외하고.

민준은 당시 이희우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민준아, 너희 회사 성접대로 일 따낸다는 소문 돌더라? 진짜야?』

앞뒤 자르고 거침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에, 민준은 10초 정도 굳어 있다가 끼긱끼긱 멈춰버린 뇌를 작동시켰다.

『어, 어……, 어…?』

『어버버하지 말고. …했어?』

『—그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누나!』

그 순간 이희우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은근슬쩍 말 놓는다 너? 그리고 누나 아니고 선배님이라고 부르랬지? 이게 아주 귀엽다 봐주니까 점점 선 넘어?』

어쨌든 그 후 별다른 일 없이 잠잠하기에 이희우가 헛소문을 들었나 보다 생각했다.

온더로즈의 영아와 배우 이제설의 열애설이 터지기 전까진.

두 사람의 열애 기사를 작성한 건 평소 고동과 친분이 있던 기자였다. 비슷하게, 다른 멤버들도 지인을 통해 고동과 관련된 더러운 찌라시를 접했다.

‘성접대니 뭐니 그런 건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블루액션 중엔 미성년자도 섞여 있어 절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난 거지?’

대표에게 확인을 요구하자, 대표 역시 소문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만약을 위해 당분간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해서, 곧 있을 상반기결산 특집방송이 있기 전까진 숙소에 처박혀서 쉬라고.

“애기야 나 못 믿어?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나 알잖아. 응?”

정신 산만하게 거실을 돌아다니며 통화하던 멤버가 안절부절못하며 상대방을 달랜다.

“울지 말고, 뚝. …아니, 전화를 뚝 끊으라는 소리가 아니었는데.”

“…….”

상반기결산 특집은 라인업이 화려하지

어스래빗은 M/V 촬영을 마친 바로 다음 날 귀국했다.

입국 게이트로 향하면서 핸드폰을 보던 길우성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영아 선배님이랑 이제설 선배님 공식으로 연애사실 인정했구나.”

“월요일에 뜬 공식입장 기사를 이제야 봤냐.”

“일본에선 요금 폭탄 맞을까봐 모바일데이터 자체를 끊었었거든.”

“로밍 서비스 신청 안 했어? 와이파이도 있었는데.”

“그런 복잡한 건 모릅니다.”

“…좀 알아둬. 이제 자주 나갈 텐데.”

입국 게이트를 나왔을 땐 어스래빗 슬로건을 든 팬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 사이엔 일본에서도 보았던 홈마도 끼어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건지 미스터리지만, 멤버들은 그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 시간 후,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 포토뉴스가 올라왔다.

[[사진]주목받는 신인 어스래빗, 입국 공항패션]

[21일 아침, 일본에서 M/V 촬영을 마친 어스래빗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우리 톢이들 사복도 단정하고 이쁘게 잘 입지

-리더톢이 기럭지랑 핏 보소

-건우 안경 ㅎㅇㅎㅇ///

-역시 남자는 흰 티에 새카만 진이 진리지

-팬은 아닌데, 얘넨 정말 전체적으로 범생이 삘나서 좋은 것 같음

ㄴ팬은 아닌데=팬인데

-가람이 가방에 거대 당근 그림ㅋㅋㅋㅋ

ㄴ저거 팬이 직접 마카쥬해서 선물한 거래요ㅎㅎ

-한율이 신발 어디 건지 아시는 분?

ㄴ발땡티땡 작년 출시 모델, 가격은 한화 약 70만원ㅇㅇ

연예뉴스란 기사 순위는 여전히 온더로즈 영아의 열애 관련 기사가 절반을 차지하고, ‘영아♡, 이제설’ 관련 기사도 많았으나 어스래빗에겐 남의 일이었다. 귀국한 게 평일 오전이라 멤버들은 숙소에 들렀다가 등교, 하교 후에는 회사에서 무대연습에 열중했다.

이번 주 토요일 KBC <뮤직뮤직>, 다음 주 화요일엔 뮤닷 <락뮤닷>의 상반기결산 특집방송에 어스래빗도 나가기로 한 까닭이었다. <뮤직뮤직>에선 데뷔곡인 을, <락뮤닷>에선 무대를 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일본 데뷔쇼케 무대 연습과 일본어 레슨까지 받고선 자정이 되어서야 퇴근했다. 다음 날인 목요일엔 일본발매 앨범에 들어갈 포카나 MD상품에 인쇄될 사진 촬영을 진행.

금요일 아침.

에에에엥! 옆방에서 울리는 사이렌 알람소리를 듣고 기상한 박가람이 까치집이 된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후…, 평범한 대학생과 연예인의 삶을 번갈아 살려니 피곤하구만.”

“그래도 대학생은 곧 방학이잖아요.”

“힘내라, 고딩.”

“어어…?”

눈을 반만 뜨고 핸드폰부터 만지작거리던 길우성이 침대 아래로 팔을 늘어뜨렸다.

“크래 선배님들 오늘 <뮤직센터> 1위 후보.”

“와.”

“그럼 선배님들의 1위를 기원하며.”

박가람이 핸드폰으로 음악 스트리밍 앱을 실행해 크리스탈 래빗의 이번 신곡을 틀었다.

[흠이 있어 욕해? NO! 욕(辱)심(心) 있어 욕해 Admit it!]

“가사가 흥겹구먼.”

“달나라주민 의견은 분분하지만요. 너희 갑자기 왜 그러냐, 중2병 왔냐, 이러지 마 얘들아….”

“그래도 이번에 걸크 컨셉으로 여팬이 조금 늘었대.”

“좋은 소식이네요.”

삑삑삑삑, 덜컹!

예고 없이 조유찬이 들이닥쳤다.

“어스래빗 기상! 긴급사태다!”

“……?”

잠이 덜 깬 멤버들이 거실에 모여 앉았다. 조유찬이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락뮤닷>에서 다음 주 상반기결산 특집방송 때, MOHE 대신 특별 커버 스테이지를 꾸며줄 수 있냐는 연락이 들어왔어.”

“MOHE 대신이요? 왜?”

“커버 스테이지?”

“잘은 모르겠는데 MOHE 쪽에서 갑자기 출연하기 곤란한 사정이 생긴 것 같아. 하지만 이미 MOHE가 준비하던 무대에 맞춰 세트 제작이 들어간 상태라 지금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라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 쪽으로 연락이 온 거예요?”

멤버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다른 신인 그룹 다 놔두고?”

“어.”

“오오.”

특별 커버 스테이지로 꾸며질 만한 곡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유명한 곡일 터. 그런 곡의 커버무대를 한다는 건 새로이 주목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물며 데뷔한지 얼마 안 된 새파란 신인임에야.

“그리고 오 팀장님이 콜을 외쳤어. 우리 애들이라면 어떤 무대든 소화할 수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라고.”

그러나 기대와 기회를 받았다는 기쁨도 잠시. 멤버들의 표정은 이내 복잡해졌다.

한율이 손을 들어 말했다.

“화요일까지 나흘인데요.”

그리고 내일은 KBC <뮤직뮤직> 출연 예정.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긴급사태라는 거야.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게, 안무 쌤이 말하시길 너희가 배웠던 곡이라고 하더라.”

“무슨 곡인데요?”

“히아신스의 .”

으으음. 멤버들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작년 여름, 초대박이 났던 걸그룹 노래의 커버무대라니.

이건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장도 해야 합니까?”

“아니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미 MOHE가 부르려고 어레인지한 버전이랑 녹음을 받았거든. 그걸 가이드로 삼고 진행하면 될 것 같아. 그리고 히아신스나 MOHE가 멤버가 6명이잖아? 그러니 우리도 6명만. 안무 동선이나 파트 분배를 신경 쓰기엔 시간이 촉박하니까. 하지만… 고음 파트 문제가 있으니 한율이 넌 꼭 참여해줬으면 좋겠다.”

“네.”

“아, 학교 늦을 것 같으니까 회의는 회사에서 밥 먹으면서 진행하자. 다들 세수!”

잠시 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구내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으면서 회의를 진행했다. 우선 커버 무대에 나갈 멤버들은 유호와 강보배를 제외한 6인.

“나 좀 살려주라. 과제까지 포함해서 작업할 게 너무 많이 밀렸어.”

“저는 그 곡 자체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MOHE가 녹음한 곡을 함께 들었다. 강보배가 주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랩은 딕션이 엉망이네…. 박자도 겨우 맞추고.”

“쉿.”

녹음은 바로 모레인 일요일에 진행하기로 하여, 멤버들은 파트 분배를 마치자마자 밥을 마저 먹은 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다음 날 새벽, KBC <뮤직뮤직> 출근길.

상반기결산 특집방송은 상반기 시즌에 좋은 성적을 거둔, 달리 말하자면 인기가 많은 가수들의 잔치였다. 그래서 그런지 출근길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어스래빗이 막 도착했을 땐 앞에서 누군가의 차가 출근길을 통과, 그대로 공개홀 건물 앞까지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블블! 블블!”

그 소리를 들은 조유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쟤네 왜 이렇게 빨리 왔지? 리허설이 일찍 잡혔나?”

간만의 음악방송 출연. 어스래빗은 다른 그룹의 슬로건을 잔뜩 든 사람들에게도 예의바르게 꾸벅꾸벅 인사하며 출근길을 걸었다. 좋은 자리는 대형 팬덤에게 밀렸는지, 이프림은 어중간한 위치에 뭉쳐있었다.

이프림 중 한 명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토끼야아!”

이건우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이프리임!”

박가람과 길우성이 방정맞게 튀어나갔다.

“보고 싶었어어!”

안전을 위해 설치된 펜스를 사이에 두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팬들과 인사를 나눴다. 다음 주자가 올 새라 셀카도 후다닥 찍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고 온 종이가방을 팬들에게 넘겼다.

“이따가 같이 나눠먹어요.”

“우왕, 이거 뭐야아?”

“해외 갔다가 이프림 주려고 사온 거?”

“고마워! 사랑해!”

팬이 윙크를 찡긋 하며 손하트를 날리자, 멤버들도 따라 윙크와 손하트를 날렸다. 찰칵, 찰칵. 그 모습은 여러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 * *

“오늘 대기실은 무대랑 한참 멀구나.”

“그래도 단독 대기실이라 좋다. 왜 우리한테 계속 단독 대기실을 주는 건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

대기실에 도착한 멤버들은 중앙에 놓인 테이블을 한쪽으로 옮겨 치웠다. 그리고 유호와 강보배를 제외한 6인은 소심한 동작으로 안무 연습을 시작했다. 타 방송사에서 할 무대를 연습하는 것이므로, 음악 볼륨은 최대한 작게 해서.

지켜보던 조유찬이 시간을 가늠하다 말했다.

“그만하고 리허설 준비하자.”

꾸벅꾸벅 졸던 유호와 강보배가 합세. 어스래빗 멤버들은 을 가볍게 맞춰본 후 리허설 조끼를 걸쳤다.

“후배님들!”

무대로 가기 위해 한참을 걷는데, 복도를 혼자 서성거리던 크리스탈 래빗의 채아가 어스래빗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1위 후보 축하드립니다!”

“으익, 아, 창피해….”

“그게 왜 창피하세요, 선배님.”

데뷔는 늦지만 채아보다 한 살 많고 연습생 기간도 긴 유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마땅히 축하받아야 할 일인데.”

채아는 배시시 웃다가 유호의 팔을 때렸다.

“그 말 듣는 것 자체가 쑥스럽다고!”

퍽!

“아아얏….”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사내폭력의 현장이군요.”

누가 보진 않았을까, 황급히 주변을 살핀 조유찬이 채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채아 너 혼자 나와서 뭐해? 리허설은 끝났어?”

“유찬 오빠 오랜만이넹. 리허설은 나아중이요. 그럼 수고하세욥, 후배님들!”

“넵!”

“이따 뵙겠습니다, 선배님!”

왜 혼자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은 피한 채, 채아가 대기실로 쏙 들어갔다. 조유찬이 수상쩍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직 사녹 시간도 아닌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고데기로 펴서 나오다니…, 엄청 수상한데.”

드라이리허설, 짧은 연습과 수면, 꽃단장, 사녹까지 마친 어스래빗 멤버들은 오늘 처음 만나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가기 위해 앨범을 잔뜩 챙겼다. 찾아가는 순서는 데뷔 연차.

상반기결산 특집방송이라 라인업이 화려하다 보니, 어스래빗은 오늘 출연자들 중 밑에서 두 번째였다. 제일 아래는 블루액션.

“이 기분은 마치 설에 세배를 위해 어른들을 한 분씩 찾아뵙는 것 같은 기분.”

“세배와 세뱃돈 대신 앨범이 오고가는 자리구나.”

“그나저나 오늘 히아신스 선배님들도 나오던데. 우리가 커버무대하는 거 알고 계시려나?”

“알고 있지 않을까?”

오늘 출연자들 중 데뷔 연차가 가장 오래된 이는 중년의 트로트 가수였다. 그는 어스래빗이 인사를 하러 가자, 퍽 반갑게 맞아주면서 한 사람당 용돈을 만 원씩 쥐어주었다.

“세배는 안 했지만 세뱃돈 같은 용돈이 들어왔다…!”

“으히히.”

다음 선배의 대기실을 찾아 이동 중. 얼떨떨해하면서도 좋아하는 멤버들을 향해 조유찬이 손을 내밀었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나한테 맡겨.”

“설마다 엄마가 나한테 했던 말이 여기에서도 나왔다!”

블블은 대기실 순회 3번째 순서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대기실에 찾아가자, 블블의 리더 수재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러곤 멤버들에게 손짓해 일렬로 서곤 손구호와 함께 외쳤다.

“검게 타오르는!”

“열정의 피!”

“안녕하십니까, 블랙블러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후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어스래빗과 블블은 서로에 대해 감탄 섞은 인사를 주고받으며 앨범을 교환했다. 블블의 리더 수재는 어스래빗 리더 유호의 손을 세게 콱 잡으며 악수했다.

“오랜만이다, 호야. 진짜 반갑다.”

“저도 반갑습니다, 선배님.”

“선배님이라니, 예전처럼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민준은 한율과 차남석, 길우성을 돌아보며 웃었다.

“우리 저번 달 11일에 만났었던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한 달이 훌쩍 지났네.”

“그러게요.”

“남석이 너 재신이가 자꾸 오디션 보라고 꼬드긴다면서? 넘어가지마, 걔 작품 보는 눈 별로야.”

“하하…. 그 말 그대로 재신 선배님한테 전해드려도 될까요?”

“응, 꼭 좀 전해줘.”

음방 대기실에서 가수들끼리 인사를 나눌 땐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입구에서 짧게 인사와 앨범만 주고받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신인인 어스래빗은 다음 선배에게도 인사를 가야하는 상황. 블블 멤버들은 보내기 아쉽다는 얼굴로 문 밖까지 배웅했다.

민준이 한율의 등을 토닥거렸다.

“다음엔 진짜 내가 밥 살 테니까, 시간되면 연락해. 꼭.”

“네.”

“아니다. 다음 주 <락뮤닷>에서도 볼 테니까 그때 사녹 끝나고 같이 점심 먹을까?”

촉박하게 준비 중인 커버 무대도 사녹으로 나갈 터. 사녹이 끝나면 한참 동안 시간이 남아도니 괜찮지 않을까.

“네.”

“아….”

“……?”

그 순간 조유찬이 뭐라 말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안 되는 거였나?

별일이야 있을까

한율이 돌아보자, 조유찬은 어설프게 웃으며 괜찮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제야 고동과 관련된 소문이 떠올랐다. 별 관심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만약을 위해 거리를 두라고 하고 싶을 법했다.

그러나 민준은 아주 짧게 지나간 어색한 기류를 읽지 못한 듯 환하게 웃었다. 고데기로 얼마나 머리카락을 괴롭혔는지, 지난번엔 개털 같던 그의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면서 부드럽게 스르륵 움직였다.

“응, 그럼 먹고 싶은 메뉴 미리 생각해둬.”

하지만 뭐 별일이야 있을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님. 나중에 무대에서 뵙겠습니다.”

크리스탈 래빗 대기실을 찾았을 때, 크래는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1위 후보가 된 걸 축하한다는 인사와, 오늘 무대 열심히 하라는 훈훈한 이야기가 오갔다.

같은 회사 선후배들이 같은 방송국에, 그것도 같은 음악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사실에 감격한 얼굴로 채아가 말을 쏟아냈다.

“우리 회사 지하층이 전부 남자연습생 분들 공간이잖아. 그런데 지하 입구 앞을 지나다보면 항상, 자정이 넘든 새벽이든 꼭 누가 연습하고 있더라고.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소리 들을 때마다 막 전율이 쫙 퍼지는 거야. 와, 우리 다음 후배는 진짜 장난 아니겠다.”

“맞아. 그리고 우리 연습실이 3층에 있잖아. 그런데 이 분들 데뷔조 딱 됐을 때부터 항상 같은 시간만 되면 창문 아래서 목소리가 막 들려. 아, 우리 후배 분들 퇴근하는 구나!”

은영이 딱, 손가락을 맞부딪치면서 말을 이었다.

“새벽 1시가 지났구나!”

이렇게 크래가 어스래빗을 열심히 띄워주는 이유는, 바로 그들 곁에 카메라가 도는 까닭이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칭찬에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선배님들도 매일 새벽 1시가 넘을 때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계셨다!”

“크으!”

“역시 눈치가 빠르셔!”

“그런데 우리 후배님들, 혹시 우리 이번 신곡 안무 알아요?”

“죄송합니다, 이번 곡은 아직 숙지가 덜 됐어요.”

언제 예능에 섭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섭외가 된다면 필시 같은 회사 선배인 크래의 안무를 시킬 게 뻔했다. 그래서 회사에선 어스래빗 멤버들도 크래의 곡 안무를 어느 정도 출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이번엔 일본 데뷔 준비로 바빠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저 압니다!”

자발적으로 안무를 따서 연습한 길우성을 제외하고.

“남 훈계 전에 넌 회개 좀 해, 주제, 파-악.”

“오오오.”

킬링포인트를 완벽히 따라 추는 길우성을 보며 크래 멤버들이 환호성과 함께 박수쳤다. 길우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으하하.”

미랑이 씨익 웃었다.

“이렇게 우리 안무를 잘 하는데, 다른 곳에서 히아신스 분들의 커버 무대를 하신다고…?”

“…억.”

“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후배님들?”

“죄송함다, 선배님들. 저희도 먹고 살려니 어쩔 수가 없네요.”

박가람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라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섭섭하지만.”

그러곤 소파에 놓여있던 큼지막한 종이가방 여러 개를 내밀었다.

“힘내시라는 의미로 이걸 드리겠습니다.”

“이게 뭔데요?”

“어스래빗 분들도 곧 일본에서 데뷔하고 활동하시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특별히 준비한 선물입니다.”

“지금 꺼내서 봐도 될까요?”

한율이 천진한 얼굴로 묻자 크래 멤버들이 일제히 고개를 흔들며 손사래 쳤다.

“아뇨아뇨아뇨아뇨!”

“대기실에 돌아가서, 개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 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선물이 든 종이가방을 하나씩 품에 안고 크래의 대기실을 나왔다.

“후우.”

크래의 대기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내내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던 강보배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박가람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강보배의 어깨를 감싸듯 두드렸다.

“그래, 아직 면역이 덜 돼서 떨릴 수 있어. 음, 그래서, 자네의 이상형은 어떤 사람인가?”

“귀엽고 밝고 긍정적인…, 그런데 이거 대답해야 돼?”

“벌써 반은 대답했구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