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427)

* * *

<뮤직뮤직> 마지막 무대 주인공은 이번 주 1위 후보에 오른 크리스탈 래빗이었다. 방송에는 사녹 영상이 나가지만, 크래는 생방송 무대도 사녹을 할 때처럼 라이브로 열심히 뛰었다.

1위 발표 엔딩 무대를 채우기 위해 아래에 모인 출연자들은 크래의 무대를 보지 않았다. 후배인 어스래빗도 마찬가지.

다른 보이그룹 쪽에서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 쪽으로 고개 들지 마, 욕먹어.”

크래의 의상이 전부 짧은 까닭이었다. 아무리 속옷이 보이지 않도록 핫팬츠나 치마 안에 속바지를 입고 있어도, 무대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건 남들에게 오해사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크래의 무대가 끝나자 출연자들은 잰걸음으로 무대로 올라갔다. 밑에서 두 번째 막내 그룹인 어스래빗은 당연히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반대쪽에서 올라와 나란히 서게 된 블루액션과 소리 없이 인사를 나눴다.

“상반기결산특집 생방송 <뮤직뮤직>! 오늘의 1위는…!”

프롬프터 옆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엔 현재 방송으로 송출되는 집계 영상이 떠있었다. 입술을 꼭 깨물며 간절한 표정을 짓는 라나의 얼굴과, 함께 1위 후보에 오른 보이그룹 ‘스카이러너’의 앨범 재킷 사진. 스카이러너는 한국에서의 활동이 끝나 현재 해외 스케줄 중이라 불참했다.

빠르게 올라가던 두 팀 아래의 숫자 중 하나가 멈췄다.

“축하합니다! <주제>, ‘크리스탈 래빗’!”

“꺄아아아악!”

“…흐아앙!”

크래의 숫자만 올라가는 순간, 크래 멤버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렸다. 어스래빗도 뒤에서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

사실 함께 1위 후보에 오른 스카이러너의 활동이 끝난 지 조금 된 데다가, 대형 팬덤을 지닌 히아신스가 막 컴백해서 치고 들어오기 직전에 집계된 거라 운이 좋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1위는 1위였다.

데뷔 4년 차, 어제 MBS의 <뮤직센터>에서는 아쉽게 1위를 놓쳐, 공중파 음방에서 1위를 한 건 이번이 6번째.

크래 멤버들은 울먹거리면서 한 명씩 1위 수상소감을 말했다. 가장 먼저 팬덤인 달나라주민, 멤버들의 가족, 좌기훈 대표, 회사 식구를 향한 감사의 인사가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우리 회사 후배 분들이랑 처음으로 같은 무대에 올라왔는데요, 흐윽.”

은영이 울음을 삼키며 뒤를 보았다. 가장 맨 뒤에 서있던 어스래빗 멤버들은 발뒤꿈치를 높이 들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자랑스러운, 흐윽, 선배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흐윽.”

수상소감이 다 끝난 후엔 MC들이 다시 한 번 축하와 엔딩 멘트를 쳤다. 1위를 한 크래의 노래 전주가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

“달주야, 사랑해!”

다른 가수들이 천천히 무대에서 퇴장하는 가운데, 어스래빗은 직속 후배의 특권으로 무대 앞쪽으로 가서 크래 멤버들에게 꾸벅꾸벅 축하 인사를 건넸다. 크래는 고맙다고 손을 흔들면서 앵콜 무대를 시작했다.

울음과 섞여 딕션은 엉망이었지만 음정과 박자는 딱딱 맞는, 기묘한 라이브였다.

“아까 선배님들 진짜 기뻐서 우는데, 보는 내가 다 울컥하더라.”

PD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박가람의 말에 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고생했던 시간을 잘 알잖아.”

“대표님 또 전체회식 선언하실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저번에 선배님들 1위 했을 때 우리한테 뭐 사주셨었지?”

“전복 삼계탕.”

“그런데 우리 대기실 돌아가면 카메라 켜져 있을까요?”

“아마 켜져 있지 않을까? 그러니 들어가면서 선배님들 1위에 대한 감상을 말하면….”

“에이, 그건 너무 작위적이다.”

크래의 대기실에서 촬영하고, 대기실에서도 연이어 촬영할 예정인 영상은 어스래빗이 일본 데뷔 후 그라에 올라갈 콘텐츠의 일부였다. 앞서 일본에서 데뷔하고 그곳에서도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둔 선배들에게 데뷔 축하 인사와 조언, 그리고 선물 안에 감춰진 미션을 받는 그런 내용.

크리스탈 래빗은 일본에 여성 팬들이 많았다. 그들이 크래의 남동생 격인 어스래빗의 팬을 겸할 가능성이 높아, 이런 기획이 나왔다고.

어쨌든 방송이 끝난 뒤 여유롭게 촬영하기 위해, 크래에게 받은 선물은 무엇인지 확인은커녕 아직 종이가방 입구를 봉한 테이프도 뜯지 않은 상태. 한율은 선물을 개봉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도 처음 <뮤직뮤직> 스케줄을 왔을 때 부친과 마주쳤던 통로 앞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부친이 아닌,

‘기자?’

예전에 한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앗싸일보 연예부기자가 벽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은 불편한 자세로 노트북에다 뭔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급하게 작성해야 하는 기사라도 있는 건가.

한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한율은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이겠거니 고개를 돌렸다.

* * *

[<뮤직뮤직>출근길, 팬들에게 역조공하는 어스래빗]

[오늘 24일 아침, 상반기결산특집 <뮤직뮤직> 라인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어스래빗이 출근길 중,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팬들에게 미리 준비한 선물을 전했다.

[팬들에게 선물과 윙크, 손하트를 날리는 어스래빗(사진=뉴스타스)]

[어스래빗이 팬에게 선물한 토끼가 그려진 만쥬(사진=익명을 부탁한 어스래빗 팬)]

선물은 지난 번 M/V 촬영을 위해 방문한 일본에서 사 온 것으로, 어스래빗이 팬들에게 역조공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중략).]

-받으신 분들 ㄹㅇ부럽... 먼지방에사는 이프림 울어욧ㅠㅠ..

-꼭 자기들 닮은 귀여운 토끼 그려진 만쥬ㅠㅠ.. 저거 아까워서 어떻게 먹냐

-나는 못 받았지만, 항상 덕질하는 보람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 울톢이들♡

-데뷔 두 달 차 맞니ㅜㅜ?? 버는 족족 이렇게 이프림한테 돌려주면 나중에 돈은 언제 벌고 언제 장가가8ㅂ8.. 그래, 장가는 나한테 와라 내가 열심히 벌어서 집 마련해 놓을게(๑✧◡✧๑)

‘부럽다….’

반창고가 감겨진 손끝이 스크롤을 천천히 내렸다. 기사 본문과 댓글 하나하나까지 전부 읽으며, 이해원은 천천히 얕은 한숨을 쉬었다.

가능성을 증명하고, 기대를 받고, 부응하며 다시 보답하고.

생각으론 쉬워 보이는 이 연쇄작용이, 나에겐 왜 이렇게 요원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서 부러운 걸지도.’

어스래빗처럼 팬들 앞에 거리낄 것 없이 떳떳하게 서서 환하게 웃을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해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돈이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팬들은 적선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돈이 없으면 무대에 서지 못하고, 무대에 서지 않는 아이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그때 사과패드 위에 떠있던 와이파이 표시가 빙글빙글 돌더니 사라졌다. 동시에 안인섭이 벌컥 문을 열며 들어왔다.

“씨발, 진짜로 인터넷 끊었어. 너 전화도 끊겼지?”

“…어. 아까부터 안 되더라.”

“미친 시발 것들, 우리가 소문냈냐고! 지들이 주둥아리 간수 못해놓고 우리한테 개지랄이야.”

그러면서 안인섭은 이해원과 같은 방을 쓰는 멤버의 물건을 멋대로 뒤졌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이해원은 못 본 척, 사과패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어스래빗 관련 기사를 보면 또 어스래빗에 대해 있는 말 없는 말 늘어놓으며 욕할 게 뻔하므로.

어스래빗뿐만이 아니라, 안인섭은 거의 모든 연예인에게 적대적이었다. 어려운 곳에 몇 억씩 기부하며 선행을 베풀었다는 기사를 봐도, 흠을 들추고 깎아내리고 비아냥거렸다.

예전엔 단순히 비웃는 정도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걸 보면 스트레스를 남 욕으로 푸는 것 같기도.

한참을 뒤지던 안인섭이 물었다.

“야, 이 새끼 담배 꿍쳐놓은 거 본 적 없냐?”

이해원이 가만히 고개를 흔들자 안인섭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방을 나갔다. 아니, 나가려다가 이해원을 돌아보았다.

“담배빵당한 덴 괜찮냐?”

이해원은 반창고를 붙인 손을 들었다.

“바로 연고 발랐어.”

“미친년이 진짜. 대가리에 똥만 찬 년 아니랄까봐 보이는 데에다가 흉터나 새기고, 시발.”

쾅. 안인섭이 방문을 닫으며 나갔다.

…하아. 이해원은 세 번째 한숨을 쉬었다.

* * *

6월 27일 화요일로 넘어가는 정각,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한 기사가 자정을 기해 올라왔다.

[[단독]<보컬리스트>김강원PD, 모 기획사로부터 향응접대?!]

[음악전문채널 뮤닷에서 연예기획사 소속 연습생들만이 나와 노래 경연을 펼치는 <보컬리스트> 시리즈를 기획하고 총괄한 김강원PD가, <보컬리스트 시즌3>를 기획하던 시기부터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A엔터 관계자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향응접대를 받았다는 내용의 초코톡이 입수되었다.

앗싸일보가 단독으로 입수한 초코톡 스샷 내용에 따르면…(중략).]

뮤닷은 발칵 뒤집혔다.

약속은 취소해

무대세트 정리가 한창인 <락뮤닷> 홀.

<락뮤닷>의 강정진PD는 포털사이트 실검에 오른 [보컬리스트 김강원PD], [보컬리스트 접대] 등과 연예뉴스란에 오른 기사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하…, 프로그램에 PD이름까지 다 까발렸네.”

-실력도 없는 애들이 본선에 올라간 거 봤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ㅋㅋㅋ

-역시 믿거 경연프로그램ㅋㅋ 조작 아니면 그림을 못 뽑쥬? 중요한 건 재미도 없었쥬?

-누가 시즌3 본선 진출자 명단 좀 올려봐라

ㄴ고동-블루액션 안세현,은강/WB래빗-어스래빗 차남석,서한율/콩콩-ACCOM 하승헌,이재/ 그 외 노래잘하는 아저씨들

ㄴ야이앀ㅋㅋ 아저씨들 너무하잖앜ㅋㅋㅋ

ㄴ앜콤은 아닐 걸? 얘네만 락뮤에서 데뷔할 때 특별 스테이지 안 꾸며줌ㅇㅇ

ㄴ락뮤랑 보컬PD 다른 사람임. 그리고 ㅎㅅㅎ 학폭루머 나왔을 때 그냥 안고 간 거 보면ㅋ

ㄴ진짜 루머였으니까 안고 간거짒아

ㄴ우리 한글은 한 글자에도 두 자릿수 욕을 감출 수 있는 위대한 언어다.

ㄴ콩콩은 몇 번이고 접대할 돈이 없어요... 애들 숙소에 에어컨도 없다는데...ㅜㅜ

네티즌 수사대가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전이라 그런지, 댓글란은 아직 접대를 한 기획사가 어느 곳인지 제대로 감을 못 잡은 상태. 하지만 김강원PD가 고동 엔터의 김지영 실장을 자주 만나고, 고동 엔터 소속 출연자들을 은근히 띄워주도록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스태프들 사이에서 떠돈 적이 있었다. 하물며,

-김강원??? 이 사람 최근 블루액션이 뮤닷에서 찍고 있는 프로그램 PD아님???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로군. 여기에 잘못하면….’

강PD는 고개를 들어 한쪽에 쌓인 세트를 보았다. 본래 MOHE가 오르기로 했으나, 바로 며칠 전 어스래빗으로 급히 교체된 특별 커버무대세트였다.

‘대체 윗선에서 누가 MOHE 기획사와 얽혔기에 PD와 시즌제 프로그램, 녹화 중인 프로그램까지 쌩으로 날리는 거지?’

이미 스폰을 받기 위해 소속 연습생과 아이돌을 동원해 지저분한 접대를 하는 연예기획사가, <보컬리스트>에 소속 연습생을 내보낸 적 있다는 찌라시가 도는 상태.

그 찌라시가 이번 김PD 접대 이슈에 씌워질 수도 있다.

‘앗싸 정도가 우리 쪽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이렇게 터뜨릴 리는 없으니…. 어쩌면, 애초부터 뒤집어씌우기 위해 이 기사를 먼저 낸 건지도 모른다.’

고동이 아이돌 성접대를 했다더라, 라는 소문이 돌아도 진실이 아니기에, ‘누군가 이번 기회에 고동을 완전히 음해하고자 아이돌 성접대라는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끼워넣었다’라고 덮어버리면 끝은 유야무야.

‘여기에 우리 측도 일개 PD의 일탈이다, 우린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라고 김PD를 냉큼 자른다면….’

물론 그 과정에서 고동 엔터나 블블 이미지에 치명적인 훼손이, 이후로 안티들의 끊임없는 의혹제기가 이어지고 블루액션은 내내 접대로 조작되어 뜬 아이돌이라는 꼬리표가 붙겠으나, 현재 간신히 3대 기획사를 따라잡을까 말까 하는 고동 엔터다. 블블의 계약기간도 1년 밖에 남지 않은 상황.

‘그러니 알 게 뭐냐며 날려버리는 거군. 자신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아이들이니.’

강PD는 미간을 구기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기획사의 영향력, 비싼 광고를 붙게 해주는 대형 팬덤의 아이돌에게 신경을 써주는 편애는 사업상 전략이다.

그러나 이번 스캔들의 배후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치부를 감추고자, 6년 동안 고생고생해서 해외공연을 성공적으로 할 정도로 성장한, 아무 잘못도 없는 보이그룹 하나의 이미지를 똥통에 처박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태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날고기는 아이돌에게 거들먹거리며 인사를 받아도, 자신은 한낱 월급쟁이 PD.

“PD님, 저기….”

조연출이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오늘 기획된 여름 인사 코너에 블블이 나오기로 했는데… 괜찮을까요?”

미간을 잔뜩 구긴 상태인 강PD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현장의 분위기. 스태프들도 조금 전에 뜬 기사를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려준 상태였다. 그들의 얼굴에 뜬 걱정이 절로 읽혔다.

오늘 우리 방송이 나갈 때 즈음, 접대 기획사가 고동으로 추려지고 블블과 블루액션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겠구나. 프로그램 톡창은 괜찮을까? 여론은?

“괜찮지 않으면 뭐요. 걔네가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마약했대요? 음주운전?”

오늘 <락뮤닷> 라인업에는 고동의 블블과 블루액션 둘 다 포함되어 있었다. 라인업은 최소 한 달 전부터 잡기 때문에, 이런 기사가 뜬 날 바로 그 두 그룹을 빼거나 분량을 축소한다면 접대했다는 엔터가 고동이라고 대놓고 알려주는 꼴이 된다.

“아뇨아뇨, 그건 아니지만….”

“오늘 큐시트는 한 치의 변경사항 없이 그대로 갑니다.”

강PD는 인상을 풀고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갔다.

‘무대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외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 * *

동도 트지 않은 새벽.

오래간만에 온 <락뮤닷> 대기실은 지난번처럼 칸막이로 나눠진 공용대기실이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같은 대기실을 사용하게 된 가수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난 후에야 ‘어스래빗’ 종이가 부착된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사녹을 준비할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대기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귀 기울여 들어보면 모두 오늘 새벽에 뜬 기사 얘기였다.

“우리도 용의선상에 오른 건가…?”

중얼거리듯 말한 길우성이 한율과 차남석을 바라보았다가 휙, 조유찬을 째려보았다. 멤버들이 마실 음료 박스를 막 구석에다가 놓던 조유찬이 의아한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왜?”

돗자리를 깔고 얇은 담요를 차곡차곡 쌓던 현장전이 말했다.

“우린 아냐.”

유호가 다른 멤버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고했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거 하나도 없으니까, 괜히 움찔거리지 말고 평소처럼 하자. 다른 사람들한테도.”

블블과 블루액션을 만나도 여상히 대하라는 뜻이었다.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OK.”

“옛서얼.”

“30분 후에 드라이리허설이니까 미리 몸 좀 풀어놔, 다치지 않게.”

잠시 후, 블루액션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며칠 전 KBC의 <뮤직뮤직>처럼 <락뮤닷>도 상반기결산특집방송이라 쟁쟁한 가수들이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하여 블루액션은 오늘도 막내.

같은 대기실을 사용하게 된 연차가 높은 이들부터 찾아가 인사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블루액션입니다! 오늘 방송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곧 블루액션이 어스래빗 칸막이를 두드리며 슬쩍 얼굴을 내비쳤다. 은색 돗자리 위에 두 다리를 일자로 벌리고 앉아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스트레칭 하던 길우성이 손을 들었다.

“어서옵쇼!”

그 손을 한율이 잡아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과 함께 똑바로 서서 예의바르게 서로 꾸벅.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드라이리허설. 어스래빗은 MOHE 대신 급하게 연습한 히아신스의 특별 커버무대 리허설부터 들어갔다. 리허설이 끝난 후엔 모니터링을 하면서 강PD와 스태프들에게 여러 가지 피드백을 받고, 재무대. 그리고 다시 피드백과 짧은 반성의 시간.

“그래도 나흘 만에 이 정도로 해주니 고맙네. 3분 쉬었다가 갑시다.”

“감사합니다!”

강PD가 준 3분의 휴식시간 동안, 유호와 강보배는 미니 선풍기를 들고 다니며 멤버들에게 시원한 바람을 쐬게 해주었다.

더와월 드라이리허설까지 마치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대기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대기실에 들어온 스태프는 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조용하다.”

블블이야 단독 대기실을 사용하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일도, 애초부터 그들의 등에다 대놓고 숙덕거릴 수 있는 사람도 얼마 없으니 괜찮겠지만, 데뷔한지 얼마 안 된 블루액션에겐 이 적막한 공기조차 따갑게 느껴질 것이다.

“한율아.”

“……?”

그리 넓지 않은 칸막이 공간 안에서 조유찬이 한율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준한테서 연락 온 거 없어?”

한율은 현장전에게 맡겨놓았던 핸드폰을 받아 잠금을 풀었다.

“네, 없어요.”

“으음….”

조유찬은 심각한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침 10시, 유호와 강보배를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먼저 꽃단장을 하고 무대로 향했다. 와 무대 둘 다 사녹을 딸 예정이지만, 무대는 사녹 방청 신청을 한 이프림의 입장 없이 진행되었다.

멋진 포즈와 나름 도도한 표정을 취하고 무대 세트 뒤에서 대기. 일요일에 녹음한 어스래빗 버전의 전주와 함께 세트 벽이 활짝 열리고, 멤버들은 저마다 여유로운 미소를 씩 지으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한율의 음색이 곧게 퍼졌다.

[구름 바이크를 타고 여름을 타고 놀아 Summer Bike, RUN!]

“40분 후에 사녹 갈게요.”

특별무대 녹화가 끝나자마자 아주 빠르게 마이크와 인이어 장비 제거. 어스래빗 멤버들은 거의 뛰다시피 대기실로 돌아가 의상을 갈아입고 헤어메이크업을 수정했다. 다른 가수들도 사녹을 준비하느라, 대기실 곳곳에서는 드라이어기 소리가 시끄럽게 윙윙 울렸다.

“나중에 생방 무대도 뛰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한시름 덜었다.”

“그러게.”

“방송에서는 아이허니 선배님들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것처럼 나온댔지?”

“어.”

방송에서는 또 다른 특별 커버무대를 준비한 ‘아이허니’의 무대에 바로 이어, 세트 벽을 열고 등장하는 것처럼 나올 예정이었다. 마법처럼 달라진 무대세트에서.

“편집의 힘. 으흐.”

“박가람 웃는 거 못생겼어.”

“너무해!”

다시 무대로 돌아갔을 땐 더와월에 맞게 세트가 바뀌어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3백 여 명의 이프림.

“또 와줘서 고마워요!”

“남석아, 머리 잘 어울려어!”

“감사합니다!”

“다람이 잘생겼다아!”

“고마워요! 나한텐 역시 이프림 뿐이야! 건우는 버려!”

“…?!”

멤버들은 이프림과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사녹 무대를 시작했다.

* * *

“진짜 김 실장님이 접대를 했었다고요? 이 김강원PD란 분한테?”

슬슬 사녹을 위해 이동해야 할 시간. 그러나 블랙블러드 멤버들은 누구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니저가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 사람 얼마 전에 블루액션 애들 데리고 프로그램 찍지 않았어요? 그건 어떻게 됐는데?”

“2화차까지 녹화는 다 끝냈는데…, 편성 자체가 엎어질 것 같아. 뮤닷에서 김PD를 완전히 잘라낼 거라고 하는 거 보면.”

“그럼 블루 애들은 어쩌라고요!”

분에 못이긴 수재가 벌떡 일어났다.

“걔네 이제야 막 데뷔했는데 처음부터 접대니 뭐니…!”

“솔직히 우리한텐 더러운 소문 붙어도 괜찮아요. 사실도 아니고, 충분히, 떳떳하게 이겨낼 자신 있으니까. 그런데, 블루 애들은 아니잖아요. 이제 걔네한텐 계속 그 꼬리표가 따라붙고 악플이 따라붙고 그럴 텐데…! 그 어린애들이 그걸 어떻게 감당해요….”

“얘들아, 일단 진정하고. 녹화부터 가자.”

매니저가 블블 멤버들을 달랬다.

“지금 회사 측에서 만약을 위해, 만반의 대응을 강구하는 중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 그래야 블루 애들도 덜 불안해해.”

“하…….”

그제야 블블 멤버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악질적인 소문이 돌든 무대에선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비난할 거리를 찾고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악플러들에게 조금이나마 꼬투리가 덜 잡힌다는 걸, 오랜 아이돌 생활을 하며 깨달았다.

“민준아.”

막 나가려는 민준을 매니저가 불러 세웠다.

“한율이랑 점심 먹기로 한 약속은 취소해. 네가 먼저 말해줘야 그쪽도 심적 부담이 덜할 거야.”

“아….”

비록 민준이 이번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해도, 소속사인 고동의 잘못으로 WB래빗 측도 덩달아 의심받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한율과 함께 점심을 먹는 등의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면, 괜히 이상한 루머만 더 생길 수 있다.

민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설은 아닌데?

-[내가 바쁜 일이 생겨서 오늘 점심은 같이 못 먹겟다. 다음에 보자, 미안ㅜㅜ]

[블블 민준선배 님이 너네보쌈 교환권을 보내셨습니다.]

“…….”

한율은 블블 민준의 연락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조금 전 복도에서 잠깐 마주쳤을 땐 별 일 없는 것처럼 씩 웃더니.

“왜? 민준한테서 연락 왔어?”

막 멤버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던 조유찬이 물었다.

“네, 다음에 보자고.”

“으응. 자, 한율이 네 도시락.”

민준이 약속을 취소할 거라 짐작한 것처럼, 조유찬은 한율에게도 도시락을 내밀었다. 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도시락을 받았다.

새벽에 뜬 기사는 다른 언론사가 고스란히 내용을 복붙하고, 여기에 몇 가지 사족을 첨가하면서 점점 살이 붙고 불이 붙었다.

[…한편, 김깅원PD는 최근 고동 엔터 소속 블루액션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연출을 맡고 있었다.]

댓글에서는 방송연예계에 아는 지인이 있다는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카더라 의혹까지.

-PD한테 2차 접대도 했다던데, 그 얘긴 쏙 빠졌네

ㄴ도랏????

ㄴ인기도 없는 프로그램 본선에 올리려고 ㅅ접대까지 한다고? 개소리ㅋㅋㅋ

-예선은 심사위원들이, 본선은 현장투표였는데 PD가 픽해서 편집 잘해줬다고 해도 본선에 쉽게 올라가는 게 가능함? 누가 분량 계산한 거 보니까 ㄱㄷ이 제일 분량 적은 팀보다 3분 더 많긴 했다만 그것뿐이던데

ㄴ그게 제일 큰 거죠ㅋ

ㄴ아니, 어차피 노래 경연인데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포장해준 건 아니자나요

ㄴ제일 처음 예선이 두 팀 붙여놓고 한 팀 무조건 떨어뜨리는 형식이었잖음. 심사로 나온 사람들도 PD가 누구누구 팀한테 점수 잘 주세욧 하면 그 말 듣지, 안 듣겠음? 뮤닷 PD가 하는 말인데?

ㄴㅈㄴ애매한게, ㄱㄷ이랑 처음 붙은 팀도 실력이 고만고만햇어서ㅋ

-어떤 배우 생파에서 누가 ㄱㄷ이 아이돌 ㅅ접대한다고 말한 거 이미 그 바닥에 소문 쫙 퍼진지 오래임. 증권가 찌라시에도 ㄱㄷ이라고 뜸.

ㄴPDF 캡쳐했습니다. 곧 허위사실 유포 명훼로 출석통지서 날아갈 겁니다.

ㄴ응 초성^^ㅗ

ㄴ응 초성만 언급해도 다들 어딘지 쉽게 유추할 수 있으면 못 피해^^ㅗ

ㄴ진짜면 실망인데ㅜㅜ

ㄴ근거 없는 추측과 루머는 폭력이나 다름없습니다.

-애들 쉴 새 없이 해외로 쳐굴리면서 부려먹는 것도 모자라 ㅅ1ㅂ 이딴 식으로 발목잡냐

-ㄱㄷ확실하다. 접대 받은 놈이 최근에 ㅂㄹㅇㅅ이랑 프로그램 찍고 있었다잖아

“난리 났네.”

인터넷 기사 댓글을 보며 차남석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더러운 소문까지….”

“더러운 소문?”

“그런 게 있어요.”

“하, 욕 나와.”

“왜?”

이건우가 목 뒤를 잡으면서 유호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WB래빗이 크래를 성접대 도구로 이용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댓글이 떠있었다.

유호의 얼굴이 험상궂어졌다.

“이런 ㅆ….”

함께 댓글을 본 강보배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팩트가 정리되지 않으면 이런 식의 헛소문이랑 음해가 끝도 없이 퍼질 것 같은데.”

“써한, 너에 대한 소설도 있어.”

“……?”

-ㅇㅅㄹㅂ의 ㅅㅎㅇ네 아파트 현재 시세 50억대. 거기에서 오래 살았단 거 보면 자가가 확실. 평소 걸치고 다니는 것만 봐도 나름 사는 집 자식인 거 ㅇㅅㄹㅂ팬들은 다 알 거임. 부모가 뭐하는 사람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얘 노래춤 일절 몰랐는데도 기획사 오디션 한 번에 붙음. 그리고 바로 ㅂㅋㄹㅅㅌ 출연 결정 남ㅋ 각 나오지 않음?

한율은 가만히 댓글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소설은 아닌데?”

“…엉?”

부모가 지내는 아파트가 자가에다가 현 시세로 50억대인 것도 맞고, 그 집에서 오래 산 것도 맞다. 노래와 춤을 일절 모르는 상태에서 WB래빗에 한 번에 입사한 것도 사실.

“아니, 뉘앙스를 봐. 꼭 네가 회사에 돈을 찔러서 오디션 합격하고, 보컬에도 나간 것처럼 생각하도록 써놨잖아.”

“어쩌라고.”

“당연히 불쾌해해야지! 그런 사실이 없는…. 설마, 써한 너 이 자식?!”

“…….”

“큰형! 써한이 눈으로 욕해!”

“어, 욕먹을 만했어.”

“친구 의심하지 마.”

유호에 이어 평소 밥시간 외엔 잠잠하던 라이언까지 정색하자, 길우성은 입을 벌린 채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장난이었는데….”

“그런 장난은 치는 거 아냐.”

박가람도 타박을 보탰다. 길우성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쭈그러들었다.

“네….”

“잠깐만.”

차남석이 이상한 얼굴로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서한율 데려온 거 길우성 너잖아.”

“맞아. 네가 연습실로 직접 데려와서 인사시켰잖아.”

“…어?”

길우성이 멍청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참, 그랬었지?”

“…….”

“세상에, 우리 팀에 토끼로 위장한 금붕어가 있었어!”

어스래빗 멤버들이 길우성의 멍청한 면을 놀리는 동안, 인터넷 댓글을 보며 날카로워지려던 분위기는 슬그머니 흐려졌다. 한율은 이들이 음해성 댓글과 악플에 예민해지지 않고자 일부러 신경을 돌리려한다는 걸 느꼈다.

조유찬이 짝짝 박수치며 주의를 끌었다.

“어스래빗 여러분, 전원 모바일데이터, 와이파이 끄세요. 퇴근해서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인터넷 사용금지입니다.”

“네에?”

“싫은데….”

“핸드폰 아예 반납할래?”

어스래빗 멤버들은 크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의 인터넷 연결을 끊었다.

잠시 후, <락뮤닷> 생방송.

방송은 큐시트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1위 발표 무대에 오를 때에도 블블 멤버들은 의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다만 어스래빗과 나란히 뒤쪽에 선 블루액션 쪽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억지로 웃곤 있지만, 두꺼운 무대 메이크업으로도 그들의 눈물 자국이나 붓기는 가려지지 않았다.

방송이 끝났을 때 즈음, 언제나 허위사실 유포와 악플러에게 바로바로 대처하던 WB래빗은 이번에도 언론사를 통해 공식입장을 내놨다.

[WB래빗, PD접대의혹 강력 부인 “허위사실 유포 및 악플러엔 법적 강경대응”]

-얘넨 취미가 법적대응인가 봄. 뭔 말만 나오면 고소한다고 사람 입을 아예 틀어막아ㅋ

ㄴ그니까 악플 달지 말라고ㅆ,ㅅH야

ㄴ너나 나한테 악플 달지 마라, 나 운다

ㄴ울어봐ㅋ

ㄴㅠㅠ

ㄴ와 이ㅅ키 운닼ㅋㅋ얔ㅋㅋ이놈울엌ㅋㅋㅋㅋㅋ

ㄴ방구석 백수 둘이서 머함ㅡㅡ?

-역시 떠비ㅋㅋ 하루도 안 지났는데 자기넨 아니라고 못 쾅 박아버리네

-떠비 대표가 이 바닥에서 융통성 없기로 소문이 자자함ㅋ 그런데 그냥 접대도 아니고 향응접대? 그랬다면 크래가 진작 더 떴지ㅋㅋㅋ

ㄴ그래도 애들은 아낌. 얼마 전에 뮤뮤에서 크래 1위하니까 사비로 연습생들한테까지 전체회식 쐈다고 함ㅇㅇ

ㄴ사비!!!!!!

ㄴ토끼 농장주 플렉스

ㄴ농장ㅋㅋㅋ줔ㅋㅋㅋㅋㅋㅋ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정황상 보컬PD에게 접대한 게 고동이라고 기정사실화되면서, 블루액션과 블블을 향한 악플이 늘었다. 내용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실망을 표하는 댓글은 양반 중의 양반. 일부 몰지각한 네티즌은 기사 어디에도 없던 ‘아이돌 성접대’ 루머까지 덧붙여 모욕적인 언사를 날리기도 했다. 이에 고동 엔터가 소속 아티스트를 향한 악플에 법적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자, 이번엔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애들은 몰랐으니 잘못이 없다고? 그 덕에 본선까지 올라서 CF찍고, 방송에도 더 나오면서 조금이라도 인지도 올려 이득 봤으니 공범이지ㅋ 아, 어느 엔터의 누구 얘기인지는 말 안했습니다^^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한다는 말은 없네?ㅋㅋㅋㅋ

-그냥 인정할 건 쿨하게 인정해요. 지금 아무 잘못 없는 다른 회사 애들까지 욕먹는 거 안 보이세요? 아, 주어는 없습니다.

-애색희들아 사업상 접대 모르냐?? 영업사원들이 계약 따내려고 술집가서 접대하는 것도, 보험설계사가 별다방 비싼 커피 사는 것도 죽을죄라고 하겠다?? 암튼 사회생활 1도 모르는 백수들ㅋㅋㅋ

ㄴ아조씨.. 다른 사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를 피디 꼬셔서 날름한 거잖아요ㅡㅡ

ㄴ애초에 접대 그딴 거 안 했어도 올라갈 수 있는 애들이었어요.

-#고동_인정해 #고동_사과해

늦은 시간, 어스래빗 숙소.

잠자리에 누운 한율은 모친이 보낸 고양이들 사진을 보기 위해 초코톡에 들어갔다가 블블 민준의 상태메시지를 보았다. 본가에서 키운다는 고양이 사진 프사는 여전했지만, 늘 ‘아자아자!’로 되어있던 상태 메시지가 바뀌어있었다.

[...]

점 세 개.

블블이 뜬 것도 다 접대 덕분 아니었냐는 억측까지 나오고 있는 터라, 정말 결백하다면 지금 상황에 충분히 상심할 법도 했다.

표면상 친한 후배로서, 뭐라고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해줘야 하나.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시간이 01:00으로 넘어가는 걸 보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하자.’

다음 날. 학교는 온통 어제의 기사 얘기로 소란스러웠다. 저들끼리 떠들던 몇몇 아이들은 한율과 길우성이 교실에 들어오는 걸 보곤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기도 했다.

“그 기사가 사실이면 쟤네도 피해자잖아. 아무리 최종 결과가 꽃토끼가 더 좋았다곤 해도.”

“그런데 분량을 조금 더 준 것 외엔 딱히 뭐 없는 것 같던데? 분량도 ‘시청률을 위해서 편집하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라고 하면 땡인 거 아냐.”

“막말로 PD가 비싼 밥 처먹고 입 닦았을 수도 있지.”

“아냐아냐. 나 아는 형이 뮤닷 다니는데, 보컬할 때 PD가 스태프들한테….”

잠시 후 점심시간, 늘 보던 얼굴들이 인적이 드문 벤치에 모였다. 후식으로 산 오렌지주스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던 박현우가 작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내가 전에 얘기한 거 있잖아. 아무래도 남석이 네 말대로, 다른 회사 얘기가 고동한테 덮어 씌워진 것 같아.”

한 배우의 생일파티에서, 아이돌 성접대에 뮤닷의 PD와 고동 엔터가 관련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던가.

“비슷한 시기에 아이돌… 그 접대랑, 김PD와 고동 간에 접대가 이뤄졌는데, 접대라는 단어가 겹쳐서 찌라시에 혼선이 빚어진 느낌? 아직 인터넷에선 소수만 언급하고 있긴 한데, 이미 그 소문 들은 배우들 사이에선 ‘아, 고동이었구나!’ 하고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것 같아.”

“친구는 괜찮대?”

박현우의 친구가 블루액션에 있었다.

박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그놈 알고 지낸지 6년짼데, 이번에 걔 우는 거 처음 들었다. 완전 서럽게 펑펑 우는데 진짜…, 하아. 아무튼 잡혔던 스케줄 다 취소되고, 회사에서 핸드폰이랑 사과패드, 노트북 등등. 인터넷 되는 거 다 압수할 거라더라. 아까 아침에 전화해보니까 진짜 압수됐는지 전원 꺼져있더라고.”

“어쩐지 은강이랑 세현이도 연락 안 되더라니.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자꾸 검색해서 악플을 보게 되니까 아예 외부랑 차단시켜버린 거네.”

“그럼 학교는요?”

“어차피 곧 방학이니까 결석하라 그랬대.”

하아. 차남석과 길우성이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이 바닥에 영업상 접대가 비일비재하다곤 해도, 다른 프로그램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랑 경쟁하는 프로그램 PD한테 자기네 잘 봐달라고 접대한 건 잘못한 게 맞죠. 하지만…, 블루 형들이 접대해 달라고 하진 않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특히 보컬에 나갔던 그 두 친구는 어쩌냐. 솔까 걔네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자기들 때문에 다른 멤버들까지 피해 본다는 생각이 막 들 거 아냐. 속이 말이 아닐 것 같은데.”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하면… 우웁. 상상만 해도 체할 것 같아.”

“블블 선배님들한테도 악플 많이 달리더라. 이런 식의 접대를 한두 번 했을 리가 없는데, 블루 데뷔하기 전엔 누구 때문에 했겠냐고.”

“…….”

커피를 마시면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한율은 핸드폰으로 초코톡 앱을 실행했다. 민준의 상태메시지는 점 세 개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껏 받은 게 많으니, 안부 정돈 묻는 게 좋겠지.’

한율은 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님. 저 다음 주에 일본 가는데, 도쿄와 삿포로, 오사카의 맛있는 식당과 메뉴 추천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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