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만에 돌아온 숙소는 깔끔하게 청소가 된 상태였다. 오자마자 자신의 침대에 엎어진 박가람이 바동거렸다.
“이불 뽀송뽀송해…! 이모 사랑해요!”
거실에서 유호가 멤버들에게 일렀다.
“다들 쉬고 싶겠지만 캐리어부터 정리하자. 곧 매니저 형들이 우리가 일본에서 받은 선물 전부 가지고 올 거야. 공간부터 확보해 놔야지.”
“이제 슬슬 집으로 보낼 물건도 추려야겠어. 이대로 가다간 잠잘 공간까지 없어질듯.”
이건우의 말 그대로였다.
예전에 강제로 받은 인형 하나, 그리고 첫 팬 사인회에서만 선물을 받았던 한율의 침대에도 여러 물건이 쌓였는데, 다른 멤버들의 침대 상태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옷이나 가방, 액세서리, 신발을 선물하는 팬들도 많아, 행거와 신발장 역시 포화 상태.
“이참에 겨울옷도 같이 정리하자. 부피가 너무 커.”
숙소에 때 아닌 정리 대란이 벌어졌다.
차남석이 돌아온 건, 일본 활동 내내 채워진 선물박스가 그렇잖아도 좁은 거실 면적을 모두 차지했을 때였다.
“이게 다 뭐야….”
“병원에선 뭐래?”
차남석은 소파 팔걸이를 잡아 그 위로 기어 올라갔다. 누군가의 박스를 옆으로 치우곤 조심히 내리는 왼발엔 발목 보호대가 채워져 있었다.
“일주일 반깁스해보고,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오래요.”
“아앗! 누가 내 선물박스에다가 ‘한율이한테 전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쪽지랑 같이 선물 넣었어!”
“하하하. 뭘 새삼 처음 겪는 일처럼 그러시나.”
“그럼 남석이 넌 일단 앉아서 쉬고 있어. 내 거 정리 끝나면 네 물건 정리하는 거 도와줄게.”
“아뇨, 일상 생활하는 데엔 지장 없는 정도라 괜찮아요.”
한율도 행거에 걸린 겨울옷이나 두꺼운 양말을 따로 뺀 후, 정리해서 비워둔 캐리어에다 담았다. 일본에서 산 선물도 안에 넣고, 그걸 들고 현관으로 직진.
“어디 가?”
“잠깐 집에 갔다 오려고요.”
“매니저 형들한텐 말했어?”
“네, 아까 톡으로. 택시도 불렀어요.”
“어, 조심히 갔다 와.”
택시는 5분 후 도착이지만, 먼지가 풀풀 날리는 숙소에 더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다녀오면 이 난장판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겠지.
현관문을 닫자 바로 길우성의 외침이 들렸다.
“써한, 이 자식! 혼자만 정리 끝났다고 지만 쏙 빠져나갔어!”
간만에 돌아간 집은 여전했다. 모친은 언제나처럼 퍽 반겨주면서 손으로 한율의 키를 가늠했다.
“우리 아들, 안 본 사이에 키가 좀 큰 것 같은데?”
와옹, 와옹. 고양이 두 마리는 정신 사납게 뛰어 다니면서 경계하는 척하다가, 한율이 별 반응을 안 보이자 스스로 낚싯대 장난감을 물어와 놀아달라고 보챘다.
한율은 모친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지고 온 옷들과 물건을 정리했다.
“그렇잖아도 너희 아빠가 말하더라. 승익 씨가 한율이 너 보고 아는 척 인사하려다가 말았다고.”
“기회 되시면 그때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좀 전해주세요. 괜히 방송국 분이랑 아는 사이란 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그랬다고.”
“그래. 참, 이거 얼마 전에 산 건데….”
저녁. 한율은 다시 캐리어를 들고 어스래빗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안은 대충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멤버들이 각자 집으로 보내기 위해 한쪽에 쌓아둔 박스를 제외하곤.
소파에 편히 누워서 TV를 보던 차남석이 한율을 반겼다.
“왔냐? 저녁은?”
“먹고 왔어요. 다들 어디 갔어요?”
숙소엔 차남석과 라이언, 박가람. 셋뿐이었다.
“호 형이랑 보배는 회사, 건우 형이랑 길우성은 저녁약속 있다고 나갔어.”
길우성이 저녁약속? 그런 걸 잡을 만한 친구나 지인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나마 길우성과 자주 연락하는 블블의 수재도 지금 해외 스케줄 중이고.
한율의 의문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자, 차남석이 덧붙였다.
“누나가 불렀대.”
“아아.”
길우성의 누나인 길미현이 서울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자취방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던가.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캐리어를 열었다. 가장 먼저 모친이 새로 담근 레몬생강청을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 활짝 열린 캐리어 안을 본 차남석이 황당한 얼굴로 웃었다.
“집에 물건 비우러 간 거 아니었어?”
“그러게요.”
캐리어에는 모친이 한율에게 주기 위해 산 새 옷과 신발, 액세서리나 잡화 등등이 새로이 채워졌다.
눈으로 그것들을 구경하던 차남석의 웃음기가 쓴 미소로 변했다.
“부모님이랑 사이좋아서 좋겠다.”
“형네는 사이 안 좋아요?”
차남석이 고개를 들어 조용한 두 방을 살폈다. 라이언은 침대를 가득 채운 인형을 잔뜩 끌어안은 채, 박가람은 대자로 뻗어 입을 헤 벌린 채 침까지 흘리며 잠든 상태였다.
“너 혹시 얼마 전에 인터넷에 뜬 기사 봤냐? 부모가 배우인 자식 이름 팔아서 여기저기에서 돈 빌려 쓰곤 갚지 않아서, 피해자들이 그 배우 회사로 직접 연락하고 언론에다가도 뿌린 사건. 그런데 알고 보니 배우는 부모와 연 끊은 지 오래된 상태였고.”
“네, 봤어요.”
“난 그런 기사 볼 때마다.”
차남석은 연예계의 생태에 대해선 빠삭하여 설명을 잘해주기는 하지만, 정작 본인의 사적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은 너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는지 덤덤히 속마음을 꺼냈다.
“나중에 내 이름도 그런 기사에 오르내리진 않을까…, 그게 무섭다.”
예전에 <보컬리스트 시즌3> 때문에 하루 종일 붙어있었을 때 자연스레 알게 된 건, 차남석이 조부와 함께 살았었고 또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가족도 그가 유일하다는 사실이었다.
“형이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를 무조건 거절하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어. 대표님이나 매니저 형들이 내 사정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아직까지 별 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인기가 더 많아지면 혹시 모르잖아.”
“형도 걱정이 많겠네요.”
“괜찮아, 계속 떠올리진 않거든. 어쨌든, 우리 멤버 중에서도 한 명은 내 상황을 알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너한테 떠들어봤다.”
“네.”
차남석은 가벼운 잡담이라도 나누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TV로 시선을 옮겼다. 한율도 캐리어를 방으로 가져가 옷가지를 정리했다.
* * *
“왜 혼자 와?”
길미현이 오래간만에 실물로 보는 동생을 향해 미간을 찡그렸다.
“남석이는? 현우는? 한율이는?”
길우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남석이 형은 발목 부상으로 휴식, 현우 형은 선약, 써한은 집.”
“아…. 같이 사진 찍고 친구들한테 자랑하려고 그랬는데…, 동생 놈이 도움이 안 돼….”
“나도 도움 되는 누나를 갖고 싶…, 아팟!”
동생의 옆구리를 퍽하고 친 길미현이 으르렁거렸다.
“이게 어릴 때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놀아줬더니.”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지, 음.”
“…….”
“뭐. 왜. 왜 그렇게 봐.”
길미현이 심각하고 진지한 눈으로 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널 좋아하는 팬을 만나면 묻고 싶다. 대체 너의 어떤 면을 보고 좋아하는 건지. …병맛 취향인가?”
“내 팬 욕하지 마! 누나라도 안 참아!”
“3초 안에 메뉴 말한다, 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거리를 벌렸던 길우성이 곧바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삼겹살 사쥬떼요, 누나.”
두 사람은 인근의 삼겹살 맛집을 검색,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서로의 대학생활이나 최근 일본 공연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잡담을 나누며 식당에 도착.
“너 혹시….”
“응?”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릴 때, 잠시 머뭇거리던 길미현이 길우성에게 물었다.
“너랑 같이 초중학교 다닌 애들한테서 연락 온 적 없어?”
길우성은 미간을 구겼다.
“그건 왜?”
“얼마 전에 어떤 애들이 우리 식당에 왔었대. 너랑 어릴 때 친구였다고.”
하. 길우성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미친.”
“너랑 반 갈려서 멀어졌었는데, 데뷔한 거 보니까 정말 잘됐다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 어쩌고저쩌고. 엄마랑 아빠는 그런가보다 하고 서비스로 고기 더 줬단다.”
길우성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속에서 울컥 솟구치는 화를 꿀꺽 삼켰다.
“아오….”
“그래서 내가 엄마랑 아빠한테 말했어. 백퍼, 네가 유명해진다 싶으니까 괜히 알짱거리면서 뭐 하나 트집 잡아 협박하거나, 너 팔아서 관심 받고 싶어 하는 관종 양아치들이니 조심하라고.”
“…그래서? 엄빠가 뭐래?”
“뭐라고 하시긴. TV에서 연예인 가족한테 공갈협박해서 돈 뜯는 사기범들 뉴스 본 적 있다고, 조심하겠다고 하시더라.”
직원이 와서 테이블에 반찬을 올렸다. 테이블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치이익.
길우성은 불판에 고기까지 올려준 직원이 퇴장하고 나서야 구겼던 미간을 폈다.
“알았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번 생각해볼게.”
* * *
길우성이 숙소로 돌아온 건 한율이 한창 씻을 때였다. 욕실에서 나와 보니, 발코니에 둔 허브 화분 앞에 길우성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킁킁, 이상한 소리를 내며.
“뭐 하냐?”
“허브 향에 사람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냄새 맡는 중.”
“왜. 누나랑 싸웠냐?”
딱히 궁금하진 않지만, 주요감시대상 1호라서 일단 물어보았다.
“누나랑은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돼. 그리고 이거.”
길우성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어놓은 일본 돈을 내밀었다. 만 칠천 엔. 좌기훈 대표가 멤버들에게 용돈으로 쓰라고 준 2만 엔 중 남은 돈인 듯했다.
“현재 환율로 해서 깎아줘. 그럼 이제 얼마 남은 거지?”
잠깐 생각에 잠긴 한율이 남은 액수를 대답하자, 길우성은 다시 허브에 코를 바짝 갖다 대며 꿍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동물병원, 과잉진료를 한 것 같단 말이지….”
킁킁.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 꼬치꼬치 캐묻고 싶진 않아, 한율은 몸을 돌렸다. 그때 길우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하다, 써한.”
“뭐가?”
“다 갚으려면 한참 먼 것 같아서.”
“뭘 새삼스레. 이자는 됐으니까 죽기 전에나 갚아.”
“…엉.”
킁킁.
“고맙당.”
킁킁.
“…….”
길우성은 그 뒤로 말없이 허브 냄새만 맡았다.
한율은 청승맞게 쭈그려 앉아서 허브 냄새나 맡는 길우성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고운 피부의 비결은
다음 날 월요일 아침.
다른 멤버들이 학교나 회사로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때, 한율은 느긋하게 청소기를 돌렸다. 그리고 모두 나간 후에야 여유롭게 씻었다. <목톡톡> 녹화는 12시. 샵은 10시에 가기로 한 까닭이었다.
“요 며칠 항상 멤버들이랑 북적거리면서 다녔었는데, 이렇게 셋이서만 움직이니까 조금 허전하지 않아?”
샵에서 나온 후, <목톡톡> 대본을 살피던 한율은 차 안을 둘러보았다. 차엔 한율과 조유찬, 경호원. 딱 셋뿐이었다. 원래 스타일리스트도 있어야 하지만, 그녀는 한율이 입을 옷과 착용할 액세서리, 신발과 가방을 미리 골라준 후 크래의 채아와 먼저 출발했다.
“조용해서 좋은데요?”
“하하.”
KBC별관 앞에는 슬로건을 든 팬들이 그늘에 모여 있었다. 적게는 중학생, 많게는 2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사람까지. 개중엔 자주 보던 한율의 홈마도 비장한 얼굴로 서있었다.
“한율아아!”
차 번호판을 보고 알아차린 걸까. 팬들이 그늘 밖으로 나오며 슬로건을 흔들었다. [잘생겼다♡서한율♡], [천연기념꿀성대☆율톢☆], [신이보낸우주최강톢이서한율], [연기천재율] 등등.
한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오늘 너무 덥지 않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아!”
“일본 활동 수고했어요, 오빠!”
“사진 찍어도 돼요?”
조유찬에게 미리 3분 정도는 팬서비스를 해도 괜찮다 허락을 받은 참. 한율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고, 팬들이 내미는 핸드폰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잠시 후, 한율은 팬들이 건네준 편지를 잔뜩 들고 별관 복도를 걸었다. 조유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처럼 거친 팬들이 없어서 다행이다….”
오늘 <목톡톡>에 함께 출연하는 게스트는 최근에 개봉한 공포영화 <삼투>의 주연 진바름, 예전에 <하울링>에서 만난 적이 있는 중견배우 석명희, 함께 <객귀, 해>를 찍은 이윤영이었다. 여기에 스페셜 MC로 크리스탈 래빗의 채아.
“바름 씨가 현우랑 같이 공포영화 찍은 주연배우지? 혹시 현우한테 연락해봤어?”
“아니요. 저 현우 형 번호도 몰라요.”
“잉? 너희 같은 학교잖아. 우성이 말로는 매일 점심도 같이 먹는다고 들었는데…, 작년에 제주도도 같이 갔었고.”
“그렇긴 한데, 현우 형이랑은 딱히 따로 연락할 일이 없어서요.”
서로 연락처를 물은 적도 없다.
조유찬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아무래도 너나 현우나 둘 다 연기를 잘하니까, 나도 모르게 너희 둘이 친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PD와 제작진들에게 우선 인사를 다녀온 후, 한율은 자신이 쓸 대기실을 찾았다.
[<목톡톡> 게스트 대기실 - 진바름, 서한율]
대기실에는 이미 배우 진바름이 와 있었다.
진바름은 데뷔한지 올해 10년 차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작품 중 그나마 성적이 좋았던 건3년 전에 조연으로 나간 KBC의 일일연속극 하나.
이번 영화 <삼투>는 생각보다 볼만하다는 평이 많기는 하지만, 주연보단 조연— 박현우가 더 연기를 잘했다는 댓글이 종종 보이는 상황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서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외적인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갖춰 깍듯하게 인사. 소파에 앉아 대본을 보던 진바름이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십니까. 배우 진바름이라고 합니다.”
한율은 그의 매니저로 추정되는 사람을 향해서도 인사했다.
얼추 서로 인사가 끝난 후엔 빈 소파자리에 앉아서 조금 전 팬들에게 받은 편지를 가방 안에 갈무리했다. 진바름이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뭔가 말을 걸어야 하나, 뭐라고 말해야 하나 쭈뼛쭈뼛.
“선배님 아침은 드셨어요?”
“네! 한…율 씨는요?”
“저도 먹고 왔어요.”
한율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잠깐 MC분들이랑 다른 게스트 분들께 인사 좀 다녀올게요.”
“네, 그러세요.”
<목톡톡>의 MC는 두 명이었다. 한 사람은 개그맨 출신으로 현재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국민MC 유기원, 다른 한 사람 또한 안 나오는 채널이 없다는 아나운서 출신 MC 정태현. 두 사람은 굉장히 친근한 태도로 한율을 반겨주었다. 그리고 말도 굉장히 많아, 한율은 두 사람에게 10분 정도 잡혀 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여자 게스트들이 있는 대기실.
[<목톡톡> 게스트&스페셜MC 대기실 - 석명희, 이윤영, 채아]
똑똑.
“네, 들어오세요!”
곧 녹화시간이라 그런지 세 사람은 모두 스튜디오로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서한율입니다! 오늘 녹화 잘 부탁드립니다!”
저승사자로 분장한 채아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한율은 채아에게 한 번 웃어보이곤, 가장 먼저 석명희에게 다가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네, 오랜만이에요. 작년에 미국에서 보고… 벌써 1년 가까이 됐나?”
“네.”
석명희는 <하울링>에서 주인공의 이모 역을 맡아, 한율과는 극중에서 접점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 촬영장에 인사를 하러갔을 때나, 배우들이 묵었던 호텔에서 오며가며 마주쳤었다.
“어머, 그래서 내 기억보다 더 훤칠해진 거구나. 얼굴도 더 고와지고.”
“감사합니다.”
“아직도 춤 춰요?”
한율이 촬영장 뒤쪽에서 댄스연습을 했던 게 인상 깊게 남았던 모양. 석명희가 당시 한율이 연습했던 춤의 한 동작을 손짓만으로 어설프게 구현하며 물었고, 한율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거의 매일 추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다시 채아와 시선을 마주치자, 채아는 꽃게처럼 산만하게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춤을 추다가 한 손을 들었다.
“후배님, 안녕!”
언젠가 유호가 채아를 두고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 팀에 가람이가 있다면, 크래엔 채아가 있지.』
“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네이옙!”
마지막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사람은 이윤영.
<객귀, 해> 촬영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용건으로 회사를 통해 연락하려 했는지에 대해선 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이윤영의 새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도 있었기에,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선배님?”
“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윤영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곧바로 입을 다물곤 미소만 살포시 지었다.
* * *
<목톡톡> 스튜디오 세트장은 납량특집에 걸맞게 온갖 해괴한 소품으로 꾸며졌다. 저승사자 분장을 한 스페셜 MC 채아를 비롯해 다른 두 MC도 귀신과 좀비분장을 하고 나왔다.
조명이 어두컴컴해졌다.
달칵.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새하얀 소복을 입은 MC 유기원이 턱 밑에서 시퍼런 색이 나는 랜턴을 켰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성에다 바이브를 넣었다.
“금요일까지 하루….”
달칵. 또 다른 MC 정태현의 위에서 붉은 조명이 켜졌다. 그어어 앓는 소리를 내며 그가 온몸을 삐거덕거렸다.
“주말을 향한 톡톡 튀는 갈, 망….”
마지막으로 채아가 백색 랜턴을 턱 밑에 갖다 댄 채 무표정한 얼굴로 입만 크게 벌렸다.
“목-톡-톡-, 목-톡-톡-.”
“저승사자에게 이름이 세 번 불리기 전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조명이 환해졌다. 우스꽝스럽게 등장한 MC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목톡톡>의 MC 유기원!”
“MC 정태현!”
“납량특집을 맞이해 스페셜 MC로 온 크리스탈 래빗의 채아입니다!”
와아아. 그들이 카메라를 향해 인사하는 타이밍에 맞춰, 한율은 다른 게스트들과 함께 박수쳤다.
그렇게 <목톡톡> 녹화가 시작되었다.
토크쇼 대본은 게스트와 사전미팅을 진행했을 때 나온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작가들이 질문이나 대답, 토크 흐름을 대략 정리해준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자잘한 실수는 MC들이 재치 있게 받아쳐주고 띄워주어서 녹화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좋았다.
그러나 시청률을 뽑기 위해선 시청자의 흥미를 끌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그림이 될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한다. 그래서 한 화 녹화엔 기본 5시간은 걸린다고.
“공포물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를 할 때 꼭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죠? 공포물을 찍다보면 실제로 귀신을 보거나, 아니면 불가사의한 일을 겪는 일들이 종종 있다고 하던데.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떻습니까?”
KBC의 유명한 납량특집 드라마, 전설 시리즈에서 구미호 역으로 데뷔했던 석명희가 첫 번째로 대답했다.
“저는 무서운 드라마가 아니라, 정말 밝은 드라마 현장에서 이상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요.”
“오, 어떤 일이요?”
납량특집이라 대본의 절반도 으스스한 이야기 위주로 채워졌다. 한율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집중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감탄사를 내며 리액션을 쉬지 않았다. 잠시 그 모습을 힐끗거리며 보던 유기원이 난데없이 한율을 가리켰다.
“어…, 그런데 말씀 중에 죄송한데, 한율 씨.”
“네.”
“아까부터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가는데, 피부가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아니, 진짜. 카메라로 클로즈업해도 전혀 흠 잡을 곳이 없을 거예요. 관리 어떻게 해요?”
MC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메라 한 대가 한율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잡았다. 정태현도 부럽다는 시선으로 보면서 물었다.
“한 달에 피부 관리하는 데에 얼마 쏟아 붓습니까? 솔직하게.”
“쏟아 붓다뇨, 말을 해도 거 참.”
“아니, 저도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궁금해가지고, 진짜 묻고 싶었어요.”
“저도요.”
석명희가 손을 들었다.
“작년에 타 방송국 드라마 찍으면서 처음 봤을 때, ‘와…, 피부가 정말 좋네, 한창 여드름 날 나이 아닌가?’ 하고 볼 때마다 생각했었거든요. 비결 있으면 좀 가르쳐 주세요. 우리 아들한테도 써먹게.”
토크쇼 녹화를 하다보면 왕왕 순서가 뒤바뀌거나 없던 내용이 불쑥 튀어나온다더니.
한율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특별한 비결은 없고, 유전입니다.”
“……!”
“아, 이런!”
정태현이 어딘가를 향해 항의하듯 외쳤다.
“엄마!”
“아버지 쪽이 더 강한 것 같아요.”
“…아빠!”
한율은 소리 내서 웃다가 마저 대답했다.
“농담이고, 아마 식습관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인스턴트 음식이나 군것질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거든요. 저도 기름지고 매운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아, 맞아. 제작진 분들한테 들어보니 한율 씨가 치킨도 지금까지 딱 한 번 밖에 안 먹어봤다고…, 맞아요?”
“말도 안 돼!”
채아가 경악해하며 한율을 쳐다보았다. 한율은 이번에도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는데, 최근에 두 번으로 늘었어요. 팬 분들이 정말 맛있다고 추천해주신 곳에서 한 번 더 먹어봤거든요.”
“세상에….”
“아니, 잠깐. 지금 우리 프로그램 시청하시면서 야식으로 치킨 뜯던 시청자 분들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하실 것 같은데…, 그럼 지금까지 치킨을 안 먹었던 게, 입맛에 안 맞아서 그랬던 거예요? 기름진 게 싫어서?”
“네.”
“그럼 두 번째 치킨은요? 팬 분들이 추천해주신 곳에서 시킨 건 어땠어요?”
한율은 일부러 2초 정도 생글생글 웃다가 대답했다.
어차피 녹화시간도 길겠다, 재미없으면 제작진이 알아서 편집하겠지.
“맛있었어요.”
“이렇게 대답에 뜸을 들인다는 건, 그래도 치킨은 별로라는….”
“믿기지가 않네요.”
채아가 감탄한 얼굴로 끄덕이며 결론지었다.
“고운 피부의 비결은, 치킨을 멀리한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네요.”
“바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저요?”
“치킨 좋아하세요?”
“그거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 싫어하는 분도 계시지만 저는 좋아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대답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넘어가고, 그러다 문득 어떤 이야기를 하다 말았는지 누군가가 떠올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그럼 이번엔 바름 씨가 겪은 무서운 이야기, 어떤 게 있어요? <삼투>찍으면서 조금 기이한 일을 겪었다고 하던데.”
“네, 이건 저만 겪은 건 아닌데…. 함께 영화를 찍은 배우들 중에 아역배우 출신인 ‘박현우’란 친구가 있어요.”
“네, 알아요.”
“연기 잘하는 친구죠.”
한율은 미소에 농도를 더하면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편집되지만 않는다면 자막과 함께 박현우의 사진이 뜨겠구나, 생각하며.
괜찮나 모르겠네
“그 친구랑 제가 길이 없는 산속에서 수상한 사람의 뒤를 쫓아가는 씬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신없이 상대 배우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현우가 뒤에서 저를 막 부르는 거예요. 캐릭터 이름이 아니라 진짜 제 이름으로, ‘바름이 형! 바름이 형!’하고.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딱 돌아봤는데.”
조명이 점차 어둑해지면서 모두의 신경도 진바름에게 집중되었다.
“촬영 스태프가 전부 당황한 얼굴로 절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현우가, ‘형 혼자 대체 어디 가는 거예요?!’ 라고 외치는데…, 바로 그 옆에 내가 쫓아가던 배우 분이 있었—.”
그 순간이었다.
시커먼 무언가가 날아와 스튜디오 중심에 떨어졌다.
툭.
“—꺄아아악!”
“우와아악!”
“으아악!”
사람들이 폭탄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질겁하며 뒤쪽으로 몸을 웅크리거나 뒤틀었다.
딱 한 사람,
“…….”
한율만이 태연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떨어진 걸 손으로 주웠다. 그리고 제작진을 쳐다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영화 제목이 <삼투>라서 상투 가발을 던지신 거예요?”
정오에 시작된 <목톡톡> 녹화는 오후 6시가 될 무렵 끝났다. 스튜디오에 ‘수고하셨습니다!’ 란 말이 수차례 울렸다. 배우 석명희는 한율에게 기회가 되면 함께 연기하자는 인사를 하곤 먼저 스튜디오를 떠났다. 그 다음은 늘 바쁜 MC들에 이어, 진바름이.
한율은 이윤영과도 인사를 나눴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네, 한율 씨도 수고하셨….”
이윤영의 매니저가 휘적휘적 스튜디오를 나갔다. 이윤영은 당황한 얼굴로 그쪽을 보더니, 한율에게 마저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곤 매니저의 뒤를 급히 따라 나갔다.
조용히 다가온 채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쟤 괜찮나 모르겠네.”
“……?”
채아가 새카만 갓을 벗으며 걸음을 옮겼다. 스튜디오를 정리하는 스태프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 꾸벅꾸벅. 한율도 따라 꾸벅거리면서 스튜디오를 나갔다.
대기실로 가는 복도. 주변을 지나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채아가 조금 전에 한 말을 이었다.
“아까 잠깐 대기실에 같이 있었을 때 봤는데, 매니저가 많이 이상하더라구.”
“뭐가요?”
“나야 연기를 할 일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명희 쌤은 대배우잖아. 그런데 명희 쌤 매니저가 친해지려고 말을 거는데 완전 건성건성 대답하더라? 이상하잖아.”
“이상하네요.”
연예계 매니저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정보와 인맥이다.
특히 배우 쪽은 더더욱.
정말 인지도가 높은 명품배우가 아닌 이상, 배우는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따기 위해 부지런히 여기저기에다 프로필을 돌리고 오디션을 봐야한다. 그러나 좋은 작품의 주연 자리는 기획 단계부터 내정된 경우가 많으며, 다른 배역 또한 인맥으로 꽂히는 경우가 적잖은 게 현실.
그리고 석명희는 KBC 공채 출신의 중견배우로, 이쪽 방면의 인맥이 탄탄하다. 그런데 좋게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건성으로 대하다니. 그것도 신인배우의 매니저가.
“나도 얘기 좀 나눠보니까 정상적인 매니저론 보이지 않더라.”
크리스탈 래빗의 매니저 김인정이 조유찬에게 말했다.
“꼭 어디에서 싸움 박질하던 건달을 감시로 붙인 것 같은 느낌? 아까 봤지? 자기 배우 전혀 안 챙기는 거.”
채아가 쓰는 대기실 앞에 도착했다. 채아가 한율과 조유찬에게 ‘다음에 봅세!’ 하며 먼저 대기실로 들어갔다. 철컥. 옷을 갈아입을 모양인지 안에서 문이 잠겼다.
김인정은 대기실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불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더 열 받는 게, 나한테 슬쩍 다가와서 뭐라고 물어본 줄 알아?”
대기실 안이나 주변에 퍼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한율이 듣는 건 상관없는 듯했다.
“걸그룹 애들이랑 다니면 좋은 기회 많겠네요? 이런 애들 좀 헤프지 않나?”
“—씨발, 미친 새끼가 처돌았…, 아.”
저도 모르게 욱하여 쌍욕을 내뱉던 조유찬이 황급히 한율의 눈치를 살폈다. 김인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정말 애들한테 수작질하려는 별의별 놈을 다 겪어봤는데, 생전 처음 보는 매니저란 놈이 그딴 말 지껄이는 건 처음이라 완전 벙찌더라. 한편으론 그 이윤영 씨? 좀 걱정도 되고. 별이날다가 원래 양아치가 차린 회사였나?”
“하아…. 아니, 알아보니까 임숙정 선생님 조카가 거기 대표더라.”
임숙정은 한율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연기경력이 50년이 넘는 원로배우.
“미쳤네…. 그럼 배우를 어떻게 관리해야하는지 뻔히 잘 알 텐데, 왜 그딴 놈을 스무 살 밖에 안 된 신인한테 붙였을까? 대표한테 미운털 박혔나? 아니면 버릇들이기?”
“으음….”
미운털과 버릇들이기. 짐작 가는 바가 있어도 너무 있었다.
앓는 소리를 내는 조유찬과 한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튼 다신 만나고 싶진 않더라. 만날 일도 거의 없겠지만.”
“그래. 그런 놈 상대하느라 수고했다. 그럼 우린 먼저 갈게.”
“그래. 한율아, 오늘 수고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조유찬은 경호원에게 곧 나간다는 전화를 한 통 하곤 한율에게 말했다.
“한율이 너 오늘이 지상파 첫 토크쇼 예능이었는데도 잘하더라. 내가 보기엔 분량도 잘 나올 것 같아. 수고했어, 한율아.”
조금 전까지 들은 이윤영에 대해 얘기할 법도 하건만, 조유찬은 녹화에 대해서만 말했다. 일부러 입에 담지 않는 듯하여, 한율도 적당히 대답했다.
“네, 형도 수고하셨어요.”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 보니, 침대 사다리 앞에는 아침에만 해도 없었던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박스 안에는 일본에 있었던 동안 회사를 통해 도착한 팬레터가 가득이었다.
“우리 회사 분들이 정말 꼼꼼한 것 같아.”
침대에 편한 자세로 널브러져 핸드폰으로 웹툰을 보던 박가람이 말했다.
“편지도 다 도착한 날짜별로 정리해서 주고.”
“그러게요.”
한율은 박스를 통째로 자신의 침대 위에 올려놓곤 메이크업부터 지웠다. 그리고 샤워까지 하고 나서야 침대로 올라가 편지를 하나씩 읽었다. 편지를 자주 보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의 것도 있고, 열심히 한글로 적은 외국인의 것도 있고.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다, 한율은 편지를 자주 보내 이름이 낯익은 한 팬의 편지를 읽었다.
[…내일 수술 받는 건 무섭지만, 오빠가 웃는 사진을 보면서 위안을 받아요ㅎㅎ 꼭 잘 받구 건강해져서 또 오빠한테 편지쓸게요>_<히히♡ 나 잊어버리면 안 돼욥! ..어? 되욥? 돼욥? 모르겠당ㅎ]
편지를 쓴 날짜는 6월 29일.
한율은 날짜별로 분류된 편지들 중에서 같은 이름으로 또 온 게 없는지 뒤적거렸다.
‘홍유리…, 홍유리….’
오늘 도착한 편지까지 모두 훑어봤지만 없었다.
이 ‘홍유리’라는 팬이 지금까지 편지로 보낸 내용은 시시콜콜한 학교생활이나 친구들 이야기가 주였다. 몸이 아프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런 수술 이야기 이후 편지가 뚝 끊기다니.
“…….”
“왜 그래? 안 좋은 내용이라도 적혀 있어?”
건너편 침대로 올라가던 길우성이 물었다.
한율은 내용물을 봉투 안에 갈무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 것도.”
그리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날 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는 27일 방영예정인 <목톡톡> 납량특집 예고 기사가 올라왔다. 스페셜 MC인 채아를 비롯해 게스트로 나온 석명희, 진바름, 이윤영, 서한율의 사진과 함께.
-객귀해 쥔공은 귀신 맨 얼굴 보는 거 이번이 처음 아니냐ㅋ
ㄴ바보냐 촬영할 때 봤겠지
-삼투 별로 안 무섭던데.. 갠적으론 객귀해가 훨 무서웠음ㅇㅇ 까득까드득
-3초 안에 눈물 뚝뚝 연기를 선보였다고?! 꼭 봐야겠다ㅎㅇㅎㅇ
ㄴㅂㅌ다.
ㄴ근데 얘 원래 배우 아니고 가수아님ㅍㅅㅍ???
ㄴ서한율 직업:가수겸배우 혹은 배우겸가수 혹은 내남편겸남친
ㄴ??? 마지막 좀 이상한데
-석명희는 아직도 예쁘네.. 초딩 때 구미호로 봤을 때 그때도 엄청 예쁘다 생각했었는데
-인간비타민 채아가 나오니 꼭 봐야겠다^^
-호두귀신 예쁘게 생겼네요ㅎ
ㄴ호두귀신ㅋㅋㅋㅋ
다음 날. 한율은 7월 들어서 처음으로 등교했다.
교사들은 한율을 교무실로 불러 그간 한율이 못 받았던 수업자료와 과제를 잔뜩 떠넘겼다. 돌아가는 길엔 연영과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교사에게 잠깐 불려가, 어디에서 연기를 배웠는지 솔직히, 자신에게만 슬쩍 알려줄 수 있냐는 말을 듣기도.
“바름이 형 어땠어? 네가 봤을 땐 녹화 잘 한 것 같아?”
점심시간 급식소. 오랜만에 본 박현우는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을 반쯤 가린 모습이었다.
“형 꼭 삽살개 같네요.”
“…….”
“한 살 위 형한테 개 같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써한의 패기.”
박현우는 말없이 한율을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핀을 꺼내, 앞머리를 올려서 집었다.
“됐냐?”
“영화 촬영할 때 이상한 일 겪었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아, 바름이 형 혼자 쫓아간 거?”
“네.”
“어, 하마터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 바로 앞이 거의 직각으로 깎인 가파른 곳이었거든. 그리 높진 않았지만 가지가 날카롭게 뻗친 나무랑 암석이 많은 그런 곳.”
“뭐여, 뭔 얘기여.”
길우성이 의아한 얼굴로 박현우와 한율을 번갈아 보았다. 차남석이 물었다.
“혹시 촬영할 때 겪었다던 이상한 일? 개봉하면 알려준다던?”
“어. 하지만 바름이 형이 방송에서 했다니까, 나중에 방송으로 봐.”
“형 영화도 보러 가야할 텐데…. 이번 주 토요일 저녁, 다들 어떠십니까?”
“영화라…. 극장에 가서?”
“당연하죠. 공포랑 액션은 무조건 극장! 아, 형은 다리 때문에 힘들까?”
차남석은 고개를 저었다.
“쿵쾅거리면서 뛰지만 않으면 괜찮아. 토요일이면 많이 나아진 상태일 거고.”
“그래. 여차하면 우성이가 남석이 업으면 되니까 괜찮겠지.”
“왜죠. 왜 나죠.”
“여기에서 네가 제일 어리고 팔팔하니까?”
“…써한, 이럴 땐 뭐라고 반박해야 되는 거냐?”
“몰라.”
“그 전에, 누가 업힌댔냐?”
어스래빗은 당분간 단체 활동은 오프였다. 그리고 주말은 6시 이후론 레슨이 없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여유롭게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난 괜찮아.”
“나도 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한율이 대표로 예매를 진행했다.
차남석은 본인 명의 핸드폰이 아니라서 바로 결제가 힘들고, 길우성은 티켓 4장 금액을 한꺼번에 감당할 만큼의 돈이 계좌에 없었으며, 박현우도 자신의 계좌가 텅 비었다고 밝힌 까닭이었다.
“피방이랑 올리브땡에서 거하게 탕진을 했지 뭐냐. 그래도 토요일엔 용돈 땡기고 와서 줄게. …야, 그런데 너 번호 뭐냐?”
그렇게 한율은 자연스럽게 박현우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길우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형은 시사회하면서 보지 않았어? 또 보려고?”
“시사회 때는 반쯤 남의 눈치 보느라 제대로 못 봤거든.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봐야 느껴지는 또 다른 문제도 있는 법이고.”
“몇 시 걸로 예매할까요?”
“7시 15분 거. 저녁 먹고 보러 가면 딱이겠다.”
우웅. 예매를 마치자마자 곧 문자메시지로 예매번호가 날아왔다.
우웅. 조유찬으로부터도 톡이 왔다.
-[[꽃을든곰탱]고객님께서 주문하신 ‘당일배송 꽃을든곰탱 A선물세트’가 ‘홍유리(본인)’님에게 배달 완료되었습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왔다ㅇㅇ]
“뭐야? 웬 선물세트?”
옆에서 한율의 핸드폰을 함께 들여다보던 박현우가 물었다.
“여친?”
“그럴 리가요. 팬이에요. 아픈 것 같아서 선물을 좀 보냈는데… 지금 막 받은 것 같네요.”
“팬한테 선물을 보냈다고?”
한율은 간단히 설명했다. 자주 편지를 보내던 팬이 수술을 잘 받겠다는 편지를 보낸 뒤 거의 20여 일 동안 소식이 없어, 오 팀장에게 의견을 구한 후에 선물을 한번 보내봤다고.
“보낸 사람 주소나 연락처는 회사랑 유찬이 형 번호로 하고.”
“으음. 그런데 이 시간에 본인이 수령했다는 건….”
길우성이 퍽 진지한 얼굴로 추리했다.
“지금 집에 있다는 소리네? 하지만 아직 다른 학교도 방학하기 전일 텐데….”
“왜. 유치원생 아니면 연하인 척하는 대학생, 혹은 백수일 수도 있지.”
“그렇군!”
한율은 눈썹 끝을 내리며 정답을 알려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야.”
“그렇군!”
“그래도 본인이 직접 받았다면 상태가 많이 호전된 모양이네.”
차남석이 다행이란 얼굴로 말하자 박현우도 이어서 말했다.
“음, 어린애들은 좀 안 아팠으면 좋겠다.”
“그 말은… 어른은 아파도 된다는 겁니까, 박현우 씨?!”
“넌 좀 아파도 될 것 같다, 아우야.”
“언제는 제일 어리고 팔팔하다더니!”
完그래서 마음껏 나다닐 수 있는 거지
금요일이 되자 이건우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숙소를 나갔다. 게스트로 나가기로 한 낚시예능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서. 고향 집에 들러서 낚시장비를 챙기고, 충남 보령의 오천항으로 갈 예정이라고.
“민물낚시랑 바다낚시는 천지차이 아닌가? 괜찮을까?”
어스래빗 전용연습실.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재생되던 음악이 멈췄다.
“어릴 때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바다낚시도 해봤대. 뱃멀미도 안 한다니 괜찮겠지.”
연습실에는 한율과 길우성, 박가람, 유호까지 넷뿐이었다.
차남석은 다음 주 한 웹드라마의 OST 곡 녹음을 하기로 하여 보컬연습실에, 강보배와 라이언은 3층의 작업실 중 한곳에 틀어박혔다. 함께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자세한 설명은 들은 바 없었다.
“그런데 너희는 내일 영화 보러 간다며?”
유호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너희야말로 괜찮겠어?”
“영화?”
30분 째 바닥에서 뒹굴뒹굴 너튜브를 보던 박가람이 반응했다.
“무슨 영화 보러 가? 누구랑? 너희 둘만?”
“공포영화 <삼투>라고, 현우 형이 조연으로 나왔대서 내일 남석 씨랑 현우 형이랑, 나랑 써한이랑 같이 가서 보기로 함요.”
유호와 박가람이 동시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또 그런 걸….”
“또 공포냐….”
“흐흐.”
유호가 위쪽을 가리켰다.
“보배도 데려가지 그래? 그런 거 엄청 좋아하잖아.”
“맞아, 보배 외롭겠당. 서울로 오자마자 데뷔조되고 연습만 하느라 학교친구도 잘 못 사귀었는지, 애가 휴일에도 늘 회사랑 숙소에만 있는 거 보면…, 어흑.”
한율은 핸드폰을 집었다. 예약한 시간대의 좌석을 확인해보니, 그들이 예약한 좌석 옆자리 하나가 비어있었다.
“현우 형한테 먼저 물어봐야겠네요.”
“아, 맞다.”
그제야 유호와 박가람이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안 친하지?”
“친해질 시간도 없었죠. 레슨은커녕 연습도 같이 한 적이 없는데.”
“난 두 사람이 얘기 나누는 것도 한 번도 본 적 없음.”
“아냐, 그럼 됐어. 내가 괜히 오지랖을….”
“이미 톡으로 물어봤는데요.”
우웅.
-[걔가 공포물을 좋아한다고???]
-[그럼 완전 환영ㅇㅇ]
-[근데 좌석 있을까?]
“괜찮다고 하네요.”
강보배에게 연락하자 강보배도 바로 OK답장을 보냈다. 한율은 예약한 좌석 바로 옆자리를 추가 예약했다.
철퍼덕. 박가람이 몸을 반대쪽으로 뒤집더니 애처로운 표정으로 한율과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라이언은…?”
“…….”
“너희들 라이언 따 시키면 안 돼, 인마…. 으흑.”
한율은 지난 주 그라에 올라간 에피 영상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라이언이 귀신의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묵음처리로 가득 채워진 오디오를.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강보배에게 톡했다.
[형, 라이언한테도 내일 공포영화 보러 가지 않겠냐 물어봐주세요.]
3초 만에 날아온 답변.
-[싫대;]
“그나저나 라욘 형이 인국공에서 잃어버린 인형, 통 소식이 없네영.”
“라이언한테 그거 선물해준 일본 팬이 괜찮다고, 하나 더 만들어서 보내주겠다고 댓글 달았더라. 그리고 라이언의 답변.”
박가람이 자신의 핸드폰에 라이언의 SNS를 띄웠다. 일본어로 적힌 댓글 아래에 라이언도 일본어로 답댓을 달았다.
ㄴごめんさい.. 今度は俺が作ってあげるよ..ㅠㅠ
길우성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뭐라고 쓴겨…. 라욘 형이 일본어를 이렇게 잘했었나?”
“오 팀장님이 대신 적어줬겠지. 미안해요, 이번엔 내가 만들어서 줄게요.”
“잉? 라욘 형이 만들어서 준다고? 뭐지, 이 신박한 발상은?”
“얘 설마 작업실에서 인형 만들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작업실이 그런 작업을 하라고 만들어진 작업실이 아닐 텐데.”
유호가 쭉쭉 스트레칭을 하다가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10분만 더 하고 들어가자. 벌써 자정이다. 박가람 너도 일어나.”
“흐헝헝.”
잡담을 나누며 쉬는 동안 어느새 땀이 식었다. 한율도 일어나 몸을 가볍게 풀었다.
연습실은 다시 음악소리와 구호, 발을 구르는 소리로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