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람들은 타인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지만, 정작 본인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아. 남들도 그렇다는 생각도 안 하고.”
길우성이 잘난 척 떠들었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일행을 신경 쓰고, 혼자 있을 땐 주변보단 폰을 보는 경우가 대다수지. 그래서! 우리 같은 애들도 마음껏 나다닐 수 있는 거지. 음.”
강보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가?”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타임스퀘어에 홍보 영상이 여러 번 올라가고, 빌보드 1위까지 찍은 대선배님도 한국에서 그냥 전철 타고 다녔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다더라. 그 일도 나중에야 긴가민가했던 사람이 몰래 찍은 사진을 올려서 드러난 거고.”
“하긴. 이쪽에 관심 없는 사람들 눈에는 잘생겼네, 이런 생각만 잠깐 스치고 말 것 같기도.”
“…….”
털컹털컹.
[이번 역은 강남역, 강남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토요일. 한율과 길우성, 차남석, 강보배.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멤버 네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약속장소에서 만난 박현우가 한 손을 들어 강보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네가 보배구나?”
“어… 안녕, 현우야.”
“뭘 같이 손들면서 받아주고 있냐,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저녁은 뭐 먹을 거야?”
“이 근처에 돼지고기 무한리필 집 있어.”
“가자.”
더 이상의 논의는 불필요. 다섯 명의 고등학생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돈은 한 사람당 4만원씩 한율에게 넘겼다. 현금 혹은 초코톡 계좌로.
길우성이 싱글거렸다.
“히힛. 곰순이가 친구들이랑 놀라고 용돈 보내줬지롱.”
“와. 비싼 등록금이랑 월세 내느라 허리가 휘는 대학생한테 돈 뜯는 연예인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돼지고기 무한리필 식당에서 실컷 고기를 구워먹고, 극장에 가선 팝콘과 음료를 샀다. 주말 저녁이라 극장에는 사람이 가득이었지만 그들을 알아보는 것 같은 사람은 있어도, 쫓아와서 잡는 사람은 없었다.
길우성이 양손에 팝콘과 음료를 들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의 문화생활인가요…! 크으.”
“그런데 우리 섬유탈취제 냄새 쩐다.”
“하하.”
찰칵! 그때 어디선가 카메라 앱 셔터소리가 들렸다. 한율을 제외한 이들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돌아보니 근처에 있는 한 커플이 다정하게 달라붙어서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후….”
길우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자의식과잉.”
“그렇다고 너무 방심하면 꼭 그런 모습을 누군가 보거나 기록으로 남길 테니 조심은 해야지.”
“서한율, 우리 몇 관이야?”
“6관이요. 10층.”
엘리베이터엔 사람들이 정원이 가득 찰 정도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밀착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다 조금만 닿아도 반사적으로 사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 차남석! 어?!”
그때 바로 옆에 선 여성이 차남석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는 것에 민망해하면서 사람들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아는 사이인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라는 얼굴로 그들을 주목.
딩동.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상영관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일행은 차남석을 알아본 사람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대외적인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즐거운 영화 관람되세요~. 죄송합니다~.”
꾸벅꾸벅. 그러곤 상영관을 향해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멀어지는 거리에서 ‘어스래빗?!’이란 놀란 목소리와 ‘객귀 진해!’, ‘삼투에 나오는 애도 있지 않았어?!’ 란 수군거림이 들렸다.
길우성이 툴툴거렸다.
“이게 다 잘생긴 남석 씨 때문이야.”
“…잘생겨서 미안하다.”
이프림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다행히 그 이상의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스며들어간다는 뜻을 지닌 <삼투(滲透)>는, 악령에게 서서히 침식당하여 미치거나, 살인을 저지르고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처음엔 저쪽 산중턱에 세워진 펜션…, 그 다음은 계곡에 있는 식당, 그 다음은 최 씨 할매…. 이렇게 점점 이 마을로 내려오고 있어, 그것이….]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이제 겨우 퇴원한 동생의 요양을 위해 찾은 마을. 오래 전에 작고한 외조부 소유의 집으로 온 주인공은, 오자마자 마을사람에게 듣게 된 섬뜩한 이야기에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박현우는 그 아픈 동생 역이었다.
“형은 작년에도 드라마에서 병약한 재벌 3세 역할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아픈 역이었네?”
영화가 끝나고, 그들은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나서야 느릿느릿 상영관을 나왔다.
“그때 비실거리던 놈이 이번엔 조금 기력을 되찾아서 산을 탄 거지.”
“현우 너 연기 진짜 잘하더라.”
강보배가 박현우를 보며 감탄했다.
“영화 속 너 보다가 지금 옆에 있는 너 보니까, 막 혼란스러워지려고 해.”
박현우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조속히 현실감각을 되찾길 바라네, 친구. 너희들은 어땠어?”
“뭐가?”
한율과 차남석을 번갈아보는 박현우의 눈에 미약한 기대가 서렸다.
“감상 말이야, 감상.”
“나쁘진 않던데? 그나저나 배우들 고생 많이 했겠더라. 특히 계곡 씬. 봄이라 물에 들어가기엔 상당히 추웠을 텐데.”
“…….”
박현우의 입 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한율도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괜찮았어요. 별로 무섭진 않았지만.”
“…후우. 됐다.”
박현우가 깊은 한숨을 쉬며 터벅터벅 걸었다.
“일 때문에 꽃만 달았지, 무뚝뚝한 놈들한테 뭘 바라겠냐, 내가.”
“이 싸람들이…?!”
길우성이 한율과 차남석을 타박했다.
“빨리 보배 형처럼 연기 쩔었다고 칭찬을 하란 말이야…!”
“야, 길우성.”
박현우가 정색하며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그런 말은 내가 못 듣게, 어? 이 눈치 없는 두 놈한테 슬쩍 말해야지 이렇게 아주 대놓고 찔러주면, 어? 내가 고맙지!”
“예에!”
짝! 차남석은 하이파이브를 하는 두 사람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멍하니 그들을 보는 강보배의 팔을 낚아채며.
“빨리 떨어져. 옮아.”
극장 건물을 나왔을 땐 8시 40분. 길었던 여름 해는 저물었지만 거리는 인공조명으로 환했다.
강보배가 맞은편 길가에 있는 한 가게를 가리켰다.
“잠깐 저기에 들러도 될까? 동생이 저기 캐릭 엄청 좋아하거든.”
그들이 자주 접속하는 포털사이트의 캐릭터 샵이었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곤 횡단보도로 향했다.
“너도 동생 있어?”
“응. 올해 중2.”
“무시무시한 나이네. 우리 집엔 아홉 살짜리 있다.”
“열 살 차? 귀엽겠….”
“안 귀여워.”
“어, 그래….”
“우리 누나도 안 귀여움.”
“인정. 미현이 누난 귀엽기보단 예쁘지.”
“—?!”
횡단보도 한가운데. 길우성이 덜컥 멈춰 서서 박현우를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뭐해. 길막하지 말고 빨리 와.”
길우성이 버럭 외쳤다.
“박현우 미쳤나봐!”
“뭐 인마?!”
한율은 차남석과 함께 그들을 뒤에 버려두고 먼저 샵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한 커뮤니티 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
[오늘 강남에서 남석보배한율우성 +잘생긴 애 봄ㅎㅎ]
[나 오늘 완전 놀람>제곧내라섴ㅋㅋㅋㅋ
아까 한 9시 될 때쯤? 강남에 있는 ㄹㅇ프렌즈랑 초코톡 매장 사이에서 친구들 기다리는데, 누가 횡단보도에서 미쳤나봐! 하고 소리 지르는 거임. 근데 뭔가 목소리가 낯익어서 쳐다봤는데 안경 쓴 우성이가!!!! ㅋㅋㅋ
그리고 앞에는 한율이랑 남석이 있었고 보배랑,.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암튼 잘생긴 애 한 명도 같이 있었는데 우성이가 그 잘생긴 애한테 ‘형 눈 고장 난 거 아냐?! 내 안경 줄까?’ 하고 안경 벗어서 건넴ㅋㅋㅋㅋ 보배가 위험하다면서 횡단보도 마저 건너라고 우성이 끌고가곸ㅋㅋㅋㅋ
근데 더 웃긴 건 한율이랑 남석이는 애들 그러든가 말든가 완전 초시크한 얼굴로 한 번 슥 보더니 걍 ㄹㅇ프렌즈샵 들어감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걔네가 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궁금해서 슬쩍 가봤는데, 거기 완전 거대한 곰 있잖음? 애들 거기 서서 이쁜 표정 장착하고 셀카찍고 있었음ㅋㅋㅋ 완전 기여워서 심장 떨어질 뻔ㅠㅠㅋㅋㅋㅋㅋ]
-님 눈 저한테 파시죠
-기억을 사겠습니다. 얼마죠? 얼마면 되??
-헐.. 방금 보배 SNS에 진짜로 곰탱이랑 찍은 셀카 올라옴ㄱㄱㄱ
-얘네 평범한 고딩인 거 티날 때마다 너무 조아ㅠㅠㅠㅠㅠㅠ
-지구톢들은 진짜 멤버들끼리 사이좋은 듯ㅎㅎㅎ 볼 때마다 항상 붙어댕겨ㅎㅎㅎ
-그 잘생긴 애 박현우라고, 떠비 연습생이자 아역배우일 거예요! 우성이가 영화 삼투 보고 왔다고 글 올렸는데, 박현우란 애가 그 삼투에 조연으로 나옴! 같이 영화본 모양이네요ㅎㅎ
ㄴ오오! 정보 감사욥!!
방학이다
“하나씩 설명해줄게.”
툭. 오 팀장이 서류뭉치에 또 하나의 대본을 올렸다.
“가장 왼쪽으로 빼둔 건 회사 입장에선 거절하고 싶지만, 한율이 네가 당사자이니 한번은 살펴보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모아둔 것. 두 번째는 영화, 세 번째는 TV드라마 라인. 네 번째는 웹드야. 편성이 아직 불분명한 것은 다섯 번째.”
대부분 조연급 역으로 제안이 온 대본 혹은 시나리오지만, 아직 영화나 드라마제작사 쪽에 프로필도 제대로 안 돌린 신인이 받기엔 과분한 기대와 양이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무공공의 부PD님이 보낸 대본은 없어요?”
몇 달 전 이건우의 학교에서 우연히 만난 부윤방PD. 그는 구상 중인 영화 대본이 완성되면 한율에게 보내도 되냐 물어봤었다.
오 팀장이 영화 대본 사이에서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어. 오늘 아침에야 퀵으로 온 거라 내용은 다 못 살폈어.”
“네.”
“그럼 느긋하게 보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따로 빼 놔. 확실히 제작이 결정될지, 촬영시기가 언제인지, 이미지 소비 문제 등등 그런 건 우리가 검토할 테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일단 편하게.”
“네.”
“그리고… 작년에 남석이랑 찍었던 보송화장품 광고, 그때 3개월 전속이었잖아. 계약이 끝나도 일정기간동안 다른 화장품광고는 금지조항 있었던 거, 기억해?”
“네. 6개월… 이었나?”
일반적인 전속모델계약서엔 ‘동종업계 광고출연금지’ 조항이 들어있다. 그 조항에 명시되는 기간은 전속모델계약기간 동안은 물론, 전속모델계약기간이 만료되어도 적게는 수개월부터 몇 년까지 천차만별.
화장품은 소비자들이 모델을 따라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고, 제품의 신뢰도 문제도 달려있어 보통 2년 정도로 명시해놓지만, 보송화장품은 6개월만 잡아놓았다. 모델을 오랫동안 잡아 리스크를 감수하라고 할 정도로 많은 계약금을 줄 여건이 안 되어서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사실.”
오 팀장이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
“그 기간이 끝나기 전부터 여러 곳에서 문의가 왔었거든. 계약기간 언제까지냐, 심지어는 위약금 물어줄 테니 지금 당장 우리랑 계약하자…하는 곳도 있었고. 신인이 벌써부터 상도덕을 어그러뜨리면 평판이 어떻게 되겠냐 그러면서 달래놓기는 했는데, 아무튼 이젠 화장품 광고도 검토할 수 있게 됐어. 벌써부터 제품 한번 직접 써보라고 보낸 곳도 있고.”
“저한테만 따로 얘기하시는 거 보면 팀이 아닌 개인으로 들어온 게 많나보네요.”
“아직 어스래빗 자체의 인지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어스래빗 전부를 기용하겠다는 회사도 있긴 했지만….”
오 팀장은 그 이상의 말을 아꼈다.
컨텍을 받았다고 얼씨구나 좋다! 하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갈 게 아니라, 이쪽도 신중해야 한다. 불합리한 조건을 내걸었거나, 그도 아니면 광고하는 제품이나 회사가 모델의 이미지를 되레 훼손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
“어쨌든 오늘은 그렇게만 알아두고 대본이랑 시나리오부터 훑어봐. 나중에 유찬 씨한테 화장품도 받고.”
“네.”
“마실 거라도 갖다 줄까?”
“괜찮아요.”
“그래.”
오 팀장이 가볍게 한율의 머리를 쓰다듬곤 회의실을 나갔다.
한율은 블리인드가 쳐진 창 너머로 일을 하는 회사 직원들과, 멀어지는 오 팀장의 모습을 보다가 다시 잔뜩 쌓인 서류더미로 시선을 옮겼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율은 일단 부윤방PD가 보낸 영화대본부터 펼쳤다. 큼지막하게 적힌 제목이 시선을 끌었다.
[고양이 난로(가제)]
고양이를 싫어하는 고등학생과, 뻔뻔하게 들이대는 길고양이. 어쩌다 그 고양이를 돌봐주게 되었다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이었다. 부윤방이 직접 말해준 구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뼈대.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배경설정이 어둡네.’
한율은 부윤방의 대본을 오른쪽 의자 위로 따로 빼두었다.
* * *
서한율에게 일거리를 잔뜩 떠넘긴 오동식 팀장은 후련한 얼굴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명절마다 진행된 MBS의 <추석특집 아이돌스포츠대회> 관련 자료를 모니터에 가득 띄워, 올해 MBS 측에서 보낸 자료와 비교하며 검토했다.
띠리링. 매니지B팀 전화가 울렸다.
“……?”
사내 회선이 아닌 외부 발신으로 걸려온 전화.
조유찬은 윤승우를 데리고 이건우의 스케줄에 동행해서 자리를 비웠고, 현장전은 기획홍보팀 직원과 이야기 중. 오 팀장은 직접 전화를 받았다.
“네, WB래빗…. 네? 아아….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네, 제가 팀장입니다.”
누군가와 참 많이 닮은 중저음 목소리.
외모도 닮았을까? 오 팀장은 속으로 가벼운 의문을 떠올리며 녹음 버튼을 눌렀다.
“아…, 네. 죄송하지만 그 건에 대해선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요,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계약서에 서명한 법정대리인 분께서 내역을 요청하시면 확인시켜 드릴 순 있어도, 정산금은 모두 아티스트 본인 소유의 계좌로 입금됩니다. …네, 이건 일반 미성년자의 임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멋대로 사업장에 자녀의 알바비를 직접 요구해서 가져갈 순 없어요. 법이 그럽니다. …잠시만요, 아버님. 이 말씀부터 드리는 걸 잊었네요. 지금 통화 다 녹음되고 있….”
—쾅!
“…깜짝이야.”
오 팀장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 굉음에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뚜—, 뚜—. 그러곤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살포시 내려놓았다. 달칵.
“흐음.”
오 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다시 자료 검토를 시작했다.
‘일단 라이언은 농구부문으로 빼고….’
* * *
월요일. 길우성이 교실 뒤쪽에서 어깨를 들썩거리고 팔을 흐느적거리며 해괴한 춤을 췄다.
“방학이다~, 방학이다아~.”
같은 반 동급생들이 킬킬 웃으며 그런 길우성의 모습을 촬영했다.
“야, 이거 영상 올려도 되냐?”
“아니 됩니다아~.”
“…….”
한율은 길우성을 없는 인간 취급하며 그 앞을 휑하니 지나쳤다.
“야, 써한! 같이….”
“서한율 아직 있어?!”
“……?”
다급히 복도를 달려온 누군가가 활짝 열린 교실 문을 잡으며 한율을 찾았다. 3학년을 나타내는 명찰 색깔.
한율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져 두리번거리는 3학년에게 손을 들었다.
“저 여기 있는데요.”
“아, 여기 있었구나. 혹시 지금 잠깐 시간 돼? 길진 않아. 한 10분?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무슨 얘기요?”
그는 주변 아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눈동자를 크게 굴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부탁…이 있어.”
“……?”
한율은 그와 함께 매점 앞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멀지 않은 다른 벤치 앞에선 길우성과 박현우가 너튜브에 나오는 코믹댄스를 따라 추며 놀았다. 벤치에 앉은 차남석은 그 둘이 뭔 짓을 하면서 놀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중.
곧 현장전이 데리러 올 예정이라, 그들은 모두 한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없어 보인다는 거 아는데, 나한텐 정말 절박한 문제거든. 그러니까….”
박현우와 같은 연극영화과 3학년인 그의 부탁은 다름이 아닌, 한율에게 들어온 대본 중 하나를 포기해달란 것이었다. 최근에 한 작품의 배역을 따낼 가능성이 높아져 기뻐하던 찰나에, 투자자가 ‘서한율 그 친구는 어때요? 상당히 괜찮던데.’라고 한마디 하자 제작사 쪽의 태도가 변했다며.
“대기업이 투자하는 작품이나 유명한 감독들도 다 너 눈여겨본다는 얘기 들었어. 그러니 넌 그 작품 아니어도 들어온 작품 엄청 많을 거 아냐. 불쌍한 놈 한번 도와준다 생각하고…, 정말 염치없지만 이렇게 부탁할게.”
당장 이 자리에서 대답까지 요구하면 역효과가 일어날 것 같았는지, 그는 한참동안 사정만 하곤 힘없이 자리를 떴다.
“뭐래?”
한율이 다가가자 박현우가 물었다. 한율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차남석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대본 하나 포기해 달란 거겠지. 맞지?”
어떻게 단번에 맞춘 거지. 들렸나?
그러나 한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장전이 형은 언제 온대요?”
“3분 후 도착. 슬슬 가면 될 것 같다.”
“형은 병원 갈 거죠?”
“어.”
네 사람은 어슬렁어슬렁 교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현우가 차남석에게 물었다.
“따라가도 되냐?”
“왜?”
“심심하니까.”
“다른 친구는 다 어디 두고. 블루액션의 그 친구는? 걔네도 비활동기일 텐데.”
박현우가 미간을 구기며 툭 내뱉었다.
“고동 존나 이상한 것 같아.”
“……?”
난데없는 고동을 향한 비난에, 그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박현우를 보았다. 그가 교문 앞에 멈춰 선 현장전의 차를 가리켰다.
“타서 얘기해줄게.”
현장전의 차는 어스래빗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지난번에 그 일 있었을 때 애들 폰 압수당했다 그랬잖아. 그런데 아직도 폰 안 돌려줬대. 데뷔 1년 혹은 공중파 음방 1위 찍으면 돌려주겠다고.”
“어쩐지 여전히 연락이 안 되더라니…. 그런데 폰 압수는 원래 신인한테 흔한 일이잖아. 조금 뒷북치는 감은 많아도.”
“맞아. 우리 반에 먼저 데뷔한 애들도 나랑 써한이 폰 마음껏 쓰는 거 보고 놀라더라. 회사가 제재 안 하냐고, 완전 쩐다고.”
그때 한율의 눈에 현장전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이는 게 보였다.
박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흔한 일인 거. 그런데 폰 압수도 모자라서, 숙소에 매니저가 들어와서 같이 살게 됐대.”
“히익….”
“매니저 세 명이 돌아가면서 감시하는 것처럼, 피방은커녕 숙소 앞 편의점 갈 때에도 일일이 허락받으라고 그랬다더라. 그래서 편의점에 좀 갔다 와도 되냐 그랬더니 다짜고짜, 너 돼지 새끼냐고 욕을 막!”
“심하네….”
한율은 블루액션 멤버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전부 호리호리하게 마른 그들의 모습을.
“그런데 형은 그 얘기 어떻게 들었어요? 폰 압수됐다며.”
“팬들이랑 소통하라고 와이파이로만 되는 사과패드 하나 쥐어줬대. 그걸로 나한테 DM으로 하소연하더라. 학교에서 친구 거 빌려서 연락하면 괜히 또 회사 귀에 들어갈까 그러진 못했다고.”
“그래도 세상이랑 완전히 단절된 건 아니….”
“7명이서 사과패드 하나.”
좀처럼 다른 사람 일에 흥분하는 법이 없던 차남석이 미간을 구겼다.
“미친 거 아냐?”
어스래빗 숙소 앞에서 한율과 길우성을 내려준 차는 차남석과 박현우를 그대로 태운 채 병원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아.”
숙소엔 아직 교복 차림을 한 라이언 혼자 거실에 앉아있었다. 온갖 천과 솜, 바느질 도구를 잔뜩 널려 놓은 채.
“왔어?”
“히익…. 이게 다 뭐야, 형?”
“정말 인형 만들려고요?”
“응.”
“대박. 그런데 만들 줄은 알아?”
라이언은 대답 대신 사과패드를 보여주었다. ‘개발로도 만들 수 있는 쉬운 인형 만들기 강좌’란 동영상이 떠있었다. 재료는 해당 강좌 사이트에서 패키지로 산 모양.
“보면서 해. 레슨이고, 연습.”
“라욘 형, 한다면 하는 싸나이였네.”
그러면서 길우성은 도안과 영상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라이언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찰칵.
한율은 잠깐 구경하다가 방으로 들어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왕연수가 오기로 한 건 7시니까 그 전까진 어제 못 본 대본을 훑고…. 혹시 모르니 방학숙제도 미리 다 해놓는 게 좋겠지.’
어스래빗은 비활동기에 들어갔지만, 공연활동만 안 할 뿐이지 스케줄엔 그라 콘텐츠 제작이나 레슨, 연습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가끔 팬들과 라방도 하고, SNS에 올릴 사진도 찍어야 한다.
‘그래도 상대적으론 한가할 테니, 자전거나 가져올까?’
그때 현관문 밖에서 쿵쿵 발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
“내가 돌아왔다!”
이건우와 조유찬이었다. 길우성이 두 손을 번쩍 들어 환영했다.
“오오! TV에 나오는 연예인이다!”
“왔어?”
“그래 왔…, 뭐하냐?”
“인형 만들어.”
“인형?”
쿵. 이건우의 캐리어를 내려놓은 조유찬이 왼쪽 방을 살폈다. 며칠 전의 정리로 깔끔해진 다른 멤버들의 침대완 달리, 라이언의 침대엔 여전히 인형이 가득 차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침대를 저렇게 만들고도 모자라서 직접 만들려고?”
“이언아. 형이 웬만하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갈수록 늘어나는 네 인형 때문에 우리 방에만 먼지가 가득 날려요.”
“아, 형들 그거 못 봤구나?”
“……?”
“뭘?”
의아해하는 두 사람에게 길우성이 설명했다. 인국공에서 잃어버린 인형을 선물해준 팬에게, 이번엔 라이언이 인형을 만들어서 선물해주기로 했다고.
이건우는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라이언의 곁에 앉았다.
“도안이 완전 다르지 않아? 이건 곰이잖아.”
“연습이야.”
“너 바느질은 해봤냐?”
“바느질이 머야?”
“…지금 네가 하는 거요.”
“아!”
그때 라이언이 널려놓은 것들을 유심히 보던 조유찬이 큰소리를 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다음 콘텐츠는 이걸로 하면 되겠다!”
“……?”
회사로 가져갈 숙제거리를 챙기고 나오던 한율도 조유찬을 바라보았다.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직접 만드는 역조공 선물!”
형은 서한율 말을 믿어?
“얘처럼 인형 만들어서 팬들한테 주자고요?”
“의미 있잖아. 아니면, 나중에 만든 걸 모아서 자선경매에 내놔도 되고.”
“하지만 돈 받을 만한 품질이 아니면 되레 욕먹을 것 같은데요.”
으음. 이건우가 잠시 고민하다가 의견을 보탰다.
“그럼 자선경매 같은 좋은 이벤트에 참가한 팬들 중, 추첨해서 나눠주는 상품으로 내놓으면 되지 않을까?”
“오오, 그거 괜찮다.”
“어차피 한동안은 방학에다가 비활동기라 바쁘지 않으니까, 한 사람당 최소 하나씩은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한율도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아이돌은 참 별 걸 다하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