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소리구름어워즈의 레드카펫 입장 순서는 음방처럼 신인이거나 인지도가 낮은 팀들이 대개 앞이었다. 아직 시청자들의 수가 적은 시간. 그러나 음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시상식은 신인의 경우엔 어느 정도의 가능성도 엿보이지 않으면 초대조차 받기 힘든 자리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일찍 입장했어도 어스래빗 멤버들은 기꺼이 레드카펫을 밟고, 포토 존에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차칵차칵차칵.
“멋진 포즈 취해주세요!”
사전에 연습한 단체 포즈를 여러 번 취한 후엔, 레드카펫 MC들과 짤막한 인터뷰. 준비한 소감을 읊는 건 이건우와 라이언이 맡았다. 한 사람은 한국어로, 한 사람은 영어로.
레드카펫 등장부터 인터뷰까지 할애된 시간은 3분 남짓. 짧은 시간이었으나, 어스래빗 멤버들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시간 내내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무대 근처에 마련된 지정석에 앉은 후엔 지루함과의 싸움이었다.
무대 준비를 위해서면 모를까, 덥다고, 불편하다고 이미 앉은 선배들을 두고 자리를 뜨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핸드폰도 모두 레드카펫 입장 전에 매니저들에게 맡긴 터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하품하는 것도 주의해. 요즘 카메라 성능 굉장히 좋은 거 알지?”
일반 관객의 촬영은 절대금지. 들키는 순간 보안요원에 의해 퇴장조치가 되지만, 숙련된 아이돌 홈마의 촬영 스킬을 절대 우습게 봐선 안 된다.
“요즘은 폰에 달린 카메라도 굉장히 성능이 좋지.”
“그런데 날씨 조금 불안하지 않아?”
박가람이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이었다.
“꼭 비 올 것 같은데….”
“그런 말 하지 마.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은 홀스입니다.”
“라떼이즈홀스.”
“C는 말이 돼?”
“…뭐하냐?”
“아무말놀이.”
“…….”
그렇게 2시간. 무대 뒤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던 레드카펫 라이브 영상이 돌연 꺼지더니 카메라 테스트 문구가 나왔다. 현장의 카메라 시점으로 전환. 무대, 양사이드, 객석, 가수들 지정석 좌측, 중앙, 우측.
거대한 전광판에는 어스래빗 멤버들의 모습도 잠깐 비쳤다.
“오! 우리다!”
“쬐끄매서 놓칠 뻔했지만 박가람이까지 보였어!”
“이건우, 나와. 싸우자.”
“안 돼, 형. 건우 형 요즘 헬스 다니면서 벌크 업 하잖아. 형은 한 방에 날아갈 거야….”
다시 레드카펫 라이브 영상.
레드카펫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팀은 걸그룹 온더로즈였다. 앞에 앉은 보이그룹 멤버들이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온더 선배님들 진짜 예쁘지 않냐?”
“인정.”
온더로즈까지 입장을 끝내자 화면은 현재 MBS K로 송출되는 영상으로 전환되었다. 화면 우측 상단에 박힌 프로그램명이 시선을 끌었다.
[2017 소리구름어워즈 11:28]
숫자는 방송시작까지 남은 시간.
스태프가 달려와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고했다.
“어스래빗 분들은 두 번째 무대 시작할 때 이동할게요.”
사전에 몇 번이고 고지 받은 내용이었지만, 멤버들은 힘차게 ‘네!’하고 대답했다.
10여 분 후, 어두워진 무대 위로 첫 번째 공연 주자인 원카운트가 올라갔다. 객석을 가득 채운 몇 천 명의 함성. 그리고 그 함성보다 더 큰 음악소리. 원카운트의 무대가 끝나자 휘황찬란한 폭죽 여러 개가 하늘에서 터졌다.
펑! 퍼퍼펑!
그 순간이었다.
…툭.
“……?”
별 다른 생각 없이 하늘에서 터지는 화려한 불꽃을 보던 한율은 눈가를 찡그렸다.
‘비?’
투둑, 툭.
<2017 소리구름어워즈> 시작에 맞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얘도 못하는 게 있네
어스래빗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의상을 갈아입고 마이크와 인이어를 착용하고 나왔을 땐 무대바닥이 젖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진행 스태프들은 이대로 괜찮겠냐, 잠깐 중단해서 우비를 지급해야하는 거 아니냐, 가수들은 어떡하냐 숙덕거리다 어스래빗에게 무대 위로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바닥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멤버들은 조명이 꺼진 어둑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정말 바닥이 젖어서 미끄러웠다. 오디오에 잡힐까, 멤버들은 입모양으로 서로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환한 조명이 비치는 MC석에선 MC들이 조금 전 신인상을 받은 원카운트에 대해 떠들었다. 그들을 적시는 보슬비가 조명을 받아 부옇게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끝나려면 앞으로 3시간 남짓.’
아무리 가느다란 비라도 오래 맞으면 건강을 해치기 마련이다. 하물며 시간이 금보다 비싼 정상급 아이돌의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등을 맞대고 선 차남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에 힘 줘. 미끄러지면 다친다.”
“네.”
무대 위 조명에 불이 들어오기 직전, 한율은 익숙하게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전주가 흘러나오며 무대가 환해졌다. 한율은 차남석과 번갈아가며 노래를 시작했다. 수천 명이 만들어낸 형형색색의 물결을 향해.
[발끝마다 별 닮은 이슬이 번져]
[푹신하고 단단한 세상이 넓어져가]
[the sky above the clouds]
차가운 빗방울은 전신을 천천히 적셔가고 무대바닥은 점점 더 미끄러워졌다. 그러나 어스래빗 멤버들은 꿋꿋하게 무대를 이어갔다.
곡 후반부.
멤버들이 한율을 중심으로 대형을 이루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 순간,
“……?!”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던 한율의 눈에 길우성이 빗물에 미끄러져 휘청거리는 게 잡혔다.
안 돼.
—덥석!
한율은 길우성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타닥! 다행히 순발력이 좋아, 길우성은 금세 중심을 잡으며 아무렇지 않게 안무를 이어나갔다. 한율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가볍게 잡은 채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고음을 내질렀다.
[Ah-, Ah—…!]
대형 전광판에 깨끗하게 고음을 뽑아내는 한율의 얼굴이 크게 잡혔다. 작은 흠 하나 없는 촉촉하고 하얀 고운 피부와, 젖어서 달라붙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소리구름어워즈가 생중계되는 너튜브 실시간 채팅창엔 어스래빗 팬들이 폭주해 날뛰기 시작했다.
-신인상을 바로 앞에서 놓쳤지만 우리는 굳세다!!! 덤벼!!!!!!!!!!!!!!!
-율톢 피부 무슨 일이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깨꼬닥
-공연 도중 화장품 광고를 찍는 아이돌이 있다?!!
-(시체)
-막내톢이들 완전 프로아니냐며ㅠㅠㅠㅠㅠㅠㅠㅠ
-데뷔 반년도 안 된 신인 맞냐ㅜㅜ 당황하는 기색이 1도 없네ㅠㅠㅠㅠ
그들의 채팅 곳곳에는 외국어로 된 질문도 심심찮게 섞였다.
쟤 대체 누구냐고.
* * *
무대가 끝나고 인이어와 마이크를 모두 제거하자마자, 어스래빗 멤버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대기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정말 한 명도 안 넘어져서 다행이다. 한율아, 나이스 캐치.”
“와, 나 아까 우성이 넘어지는 줄 알고 심장 떨어질 뻔.”
“고맙다, 써한.”
길우성이 감격한 표정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다.”
“…….”
조금 전 그 순간, 한율의 머릿속엔 길우성이 잘못될 경우 벌어질 수만 가지의 부정적인 가정이 스쳤다. 그렇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잡았다.
그래서인지 멍청하게 웃는 길우성의 면상을 보자 슬며시 짜증이 일었다.
“실실 웃지 말고 다음부턴 조심해. 그땐 머리 깨져도 책임 못 지니까.”
조금 날이 선 한율의 대답에, 길우성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쭈그러졌다.
“네에….”
“우성이 혼났다.”
“이렇게 길우성의 서열이 가장 아래란 게 증명되었군.”
“그나저나 아까 정말…, 안 넘어지려고 다리에 힘 빡 주다보니까 나중엔 허벅지 터질 것 같더라. 지금도 뻐근해.”
“더와월 아니고 브리칭이었으면 두 명 이상은 백퍼 넘어졌을 걸.”
다시 무대 앞 지정석으로 돌아왔을 땐 담요가 한 장씩 지급되어, 어스래빗도 다른 가수들처럼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의자에 앉았다.
비는 다행히 10여 분 정도 지나자 그쳤지만, 가수들은 한동안 담요를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이거 엄청 보들보들 거린다. 기분 좋아.”
“태그가 붙어있는 거 보면 어디 가서 급히 사왔나 보다.”
밤 9시 40분 경. 예정된 10분 더 늦은 시간, 소리구름어워즈가 끝났다. 대상을 받은 건 걸그룹 온더로즈.
어스래빗은 카메라가 잘 잡히지 않는 무대 가장 뒤쪽에 서서, 온더로즈 멤버 전원이 수상 소감을 말하고 MC들이 클로징 멘트를 칠 때까지 쉴 새 없이 집중을 하고, 박수를 치다 내려갔다.
대기실로 돌아온 뒤, 옷을 갈아입으면서 유호가 멤버들에게 말했다.
“우리 절대 느린 거 아냐.”
“뭐가?”
“굉장히 빠른 거니까 실망하지 말라고.”
“아아.”
차남석이 슥 웃었다.
“아무도 느리다고, 상 못 받았다고 실망 안 해요. 후보에 올라간 것도 과분한 건데요.”
다른 멤버들도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호는 말없이 씩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는 스타믹스 멤버들의 대화가 들렸다.
“그런데 블루액션은 오늘 안 나왔네? 걔네도 신인상 후보에 있지 않았나?”
“성적을 토대로 후보에만 올린 거지, 초대도 안했다더라. 아직 그 이슈가 사람들 머릿속에서 사라지기엔 이르기도 하고.”
“그래도 블블 선배님들 나온 거 보면….”
블블의 이야기를 꺼낸 스타믹스의 멤버가 어스래빗 쪽을 흘끔거렸다. 어스래빗과 블블이 친하다고 알려진 까닭인 듯했다. 실제로 낮에 민준이 놀러오기도 했었고.
“소리구름 측이랑 얘기 잘 된 것 같던데, 뭐.”
잠시 후. 어스래빗 멤버들을 태운 차는 대형 팬덤을 거느린 팀들이 먼저 떠나길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하아암….”
함께 차를 탄 박가람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 그 옆에 앉은 길우성도 따라 입을 쩍 벌렸다. 차남석은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져 잠잠. 한율은 모친과 초코톡으로 대화를 나눴다.
-[우리 아들이지만 오늘 정말 예쁘게 잘 나오더라^^]
모친은 한율의 얼굴이 크게 나온 이미지를 보냈다. 인터넷 뉴스에 뜬 이미지를 복사했는지, 이미지엔 연예전문 인터넷 언론사의 로고가 작게 새겨져 있었다.
-[너희 이모랑 한림이도 방송 봤는지, 율이 너 화장품 뭐 쓰냐고 물어봐 달래ㅎㅎ]
한림은 사촌누나의 이름이었다. 서한림. 얼굴을 보면 인사 정도만 나눌 뿐 딱히 친하진 않지만, 방송을 보고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일부러 연락해서 물어볼 정도면.
한율이 브랜드 명을 적어서 보내자 모친은 오늘 정말 수고했다면서 용돈을 보냈다.
“…어? 라욘 형이랑 보배 형 왜 회사 앞에서 내리지?”
어느덧 WB래빗 앞. 앞서 가던 다른 차에서 라이언과 강보배가 내리는 걸 보며 길우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저 두 사람 진짜 수상하지 않아? 자율 연습시간에도 항상 같이 붙어있고. 혹시… 비밀리에 따로 앨범 준비 중인가?”
“돈 벌어오면 좋지. 혹시 알아?”
박가람이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초코파이라도 사줄지?”
라이언과 강보배의 수상한 회동의 이유는 바로 다음 날, 오후 6시를 기해 밝혀졌다.
그린라이브의 어스래빗 채널. 아주 짧은 티저 영상 하나가 덩그러니 올라왔다.
쿵-, 둥-.
[Treasure&Ryan]
영상엔 영어로 직역한 보배 이름과 라이언의 이름이 떴다.
[2017. 08. 18. PM 18:00]
날짜와 시간.
마지막으로,
[Mixtape - 녘]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믹스테이프 타이틀이 공개되었다.
* * *
저녁을 먹기 위해 막 구내식당에 들어서던 길우성은 그라에 뜬 티저를 보곤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와…, 둘이 작업실에 짱박혀서 작업하던 게 이거였구나. 갑자기 듣지도 못했던 티저가 올라와서 깜짝 놀랐네.”
한율도 5초 남짓한 티저를 보았다. 정말 두 사람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 같기는 했으나, 유닛으로 믹스테이프를 준비 중이었을 줄은.
마침 구내식당으로 강보배와 라이언이 들어왔다. 길우성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에게 달려갔다.
“거 너무한 거 아니요?! 어떻게 한 팀인데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지?!”
“속이다니. 그냥 말을 안 한 것뿐이야.”
“그게 그거지!”
“하하.”
한율은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라이언이 미국 힙합음악에 대해 잘 알잖아. 그래서 처음엔 라이언한테 의견을 구하면서 가볍게 연습삼아 만들었는데, 랩 쌤이 한번 들어보시더니 믹스테이프로 만들어 내놓는 건 어떻겠냐 그러시더라고.”
“대표님도 가사에 욕만 안 쓰면 OK랬어.”
길우성이 부담스럽게 크게 뜬 눈을 끔뻑거렸다.
“멋지다…. 진짜 래퍼 같아.”
“그러지 마. 다른 래퍼들이 들으면 욕해.”
“형 가짜 래퍼였어?”
“아니, 그 씬의 실력자 분들을 말하는 거지.”
겸손하게 말하곤 있지만 강보배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본래 아이돌 지망생이 아닌, 랩을 좋아하여 혼자 독학으로 비트를 만들고 랩을 얹으며 놀던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쪽 씬의 신랄한 비평도 각오하고 있는 중이야.”
“에이, 막귀가 아닌 이상 형 실력이 안 느껴질까. 라욘 형도 영어 랩할 때 얼마나 영어가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데.”
“…히.”
“그래도 만약에 그래봤자 아이돌이니 뭐니 무시하는 말 나오면, 그딴 말은 그냥 걸러. 지금 우리나라 탑에 있는 대선배님도 예전에 언더에 있을 땐 그렇게 잘한다, 천재다 하더니, 아이돌 데뷔한다니까 어제까지 칭찬하던 실력을 후려치고, 폄하하고, 인신공격까지….”
길우성이 손을 파닥파닥 흔들며 유난을 떨었다.
“어휴, 그런 못난이들 말은 들을 필요가 없엉.”
강보배와 라이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몇 곡 녹음했어요?”
“세 곡.”
“녹음만?”
“하나는 나랑 라이언이 찍힌 영상을 편집해서 뮤비 비슷하게 만드는 중이야. 다음 주에 너튜브로 동시 공개되니까 그때 봐 줘.”
“홍보도 해줘, 하뉼.”
“네.”
그날 밤 9시. 그라의 어스래빗 채널엔 새 에피소드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시작은 쓸쓸한 BGM과 한 장의 흑백사진이었다.
[누가 이 인형을 못 보셨나요….]
지난 달, 라이언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잃어버린 키링의 인형.
아련하게 흐릿해지던 사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라이언의 흑백 사진으로 치환되었다.
[라이언은 슬펐답니다.]
[팬의 선물을 잃어버리다니….]
라이언이 잃어버린 키링을 선물해주었던 일본인 팬과 나눈 대화 스샷. 한국어로 번역한 자막도 곁들어졌다.
괜찮다고, 다시 만들어주겠다는 팬에게 오히려 이번엔 자신이 만들어서 선물로 주겠다는 라이언의 대답.
[그래서]
끼익.
[직접 만들기 위해 왔습니다!]
차가 멈추는 소리와 함께 간판이 모자이크 처리된 한 건물.
[인형!]
둥둥둥둥.
[공!!! 방!!!]
쿵! 묵직한 효과음과 함께 토끼인형 9개의 그림자가 떴다.
슥슥. 그 아래로 이번 에피소드 제목이 적혔다.
[자신과 닮은 토끼인형을 만들어보아요☆]
에피소드를 보던 팬들의 톡이 빠르게 올라갔다.
-오오오오
-진짜 만들었ㅋㅋㅋㅋㅋㅋㅋ
-나 가질래 나나나나나나
-얼마니 얼마면 돼 얼마면 가질 수 있는 거야8ㅂ8!!!!!!!!!!!
-근데 왜 9개지??
-사자톢이 두 개 만들었나부당
사라락. 영상이 환해졌다. 인형을 만들 온갖 재료가 널려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어스래빗 멤버들의 모습. 그들은 바늘과 실, 천을 신기한 얼굴로 만지작거렸다.
이건우가 멤버들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바느질 좀 하시는 분?]
[…….]
대답 없이 서로 멀뚱멀뚱. 유호는 말없이 가방에서 반창고와 소독약, 연고, 탈지면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건우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나 뿐인가….]
-?????
-건우가 바느질을 한다고????
-건우 취미 콩나물 다듬기 아니엇나 이 외모와의 괴리감 무엇
멤버들은 인형 만들기 강사와 인사를 나눈 후, 기본 도안부터 그렸다. 각자 인형에게 입힐 옷이나 소품도 디자인하고 인형이 될 형형색색의 천과 부재료를 집었다.
[형 이 반짝이는 뭐예요?]
[뭐야, 이거 어디에서 가져온 거야?]
[이 안에 있었어.]
라이언의 손엔 크리스마스트리에나 걸 법한 작은 모루수술이 쥐어졌다.
[토끼 목도리야.]
-떡밥인가?
-떡밥이다!!!!
-클쓰마쓰에 풀 거란 떡밥인가?!
[이걸로 하면 목도리가 아니라 트로트 선생님들이 목에 거는, 그….]
[왜? 예쁘자나.]
[…아.]
도안 따라 그린 천을 반으로 접어 시침핀으로 고정하던 서한율이 손을 움찔 떨었다.
[찔렸어?]
[살짝이요.]
[조심해야지.]
차남석이 반창고에 연고를 살짝 묻히곤 서한율의 손가락에다 감아주었다.
-사이 조으다ㅎ
-동생을 챙기는 형아의 모습(▰˘◡˘▰)
잠시 후.
[아.]
박음질을 할 때에도 서한율은 몇 번이고 정전기에 놀란 것처럼 움찔거리면서 손을 뗐다.
-어째 가만 보니...
지켜보던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수군거렸다.
-율이 바느질 진짜 못하는 것 같..
-율톢도 못하는 게 있었구나....ㅇㅂㅇ
-한율이도 못하는 게 있었어?!!!
-한율인 못하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서한율은..바느질을..못한다..ㅇㅇ..(메모 끄적)
내구도 1이라 차마
그린라이브 어스래빗 채널에 ‘자신과 닮은 토끼인형을 만들어보아요☆’ 에피소드가 업로드 되고 한 시간 후. 어스래빗 공식 SNS엔 각기 다른 옷과 소품을 장착한 토끼인형 단체사진이 올라왔다.
토끼인형은 에피소드 영상 초반에 뜬 그림자보다 하나 적은 8개.
[(설명)어스래빗 멤버들이 처음으로 직접 만든 인형이다. 건우가 만든 걸 제외하곤 바느질 선이 삐뚤빼뚤 엉망이다. (내구도 1~2, 희귀도 10.)]
-내구도1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자톢이 만든 인형 완전 트롯톢같아서 정감가고 귀엽네요♡♡♡♡♡
-토끼인형스탈=제작멤스탈 싱크로율 320%
-호 천사톢이양>ㅅ<??? 그러나 순백 이미지 빼박!!
-얼마면 돼!! 얼마면 널 가질 수 있니?!!!(*,,ÒㅅÓ,,)و내 지갑을 가져가!!!
-사자톢이 두 번째로 만든 건 원래 선물 드리기로 한 분께 가서 비공개인가보네영 엄청 궁금하당..
ㄴ그 분 라욘한테 받은 선물 SNS로 인증하셨어요!!! 주소링크<클릭
-18일 공개되는 트레리안 ✧녘✧ 완죤기대중⋆ ೄ*✲゚*。✧
에피소드가 올라온 다음 날 아침.
눈뜨자마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길우성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프림이 인형 언제 파냐고 자꾸 물어본다. 흐….”
그 아래층 침대에서 강보배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구도 1이라 차마 돈 받고 팔 순….”
2주 전 멤버들이 만든 인형은 모두 어스래빗 전용 연습실 선반에 나란히 놓였다. 언젠가 이벤트 추첨선물로 나갈 예정이라, 때 타지 말라고 투명한 포장지로 돌돌 감아서.
한율도 어제 올라간 에피소드 반응을 대충 훑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으로 들어갔다.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제설, tv Mu 1월 방영예정 <별☆일없는 집> 캐스팅 확정!]
[배우 이제설이 tv Mu에서 1월 방영예정인 <별☆일없는 집>의 주연으로 확정되었다.
<별☆일없는 집>은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졌던 삼형제가 15년 만에 다시 한 집에 모여 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가족성장드라마로, 이제설은 극중에서 무명 연극배우이자 장남인 ‘태하늘’ 역을 맡는다.
(사진=파도 엔터테인먼트)
그의 동생 역은 SBC <객귀, 해>에서 연기력으로 크게 호평 받은 어스래빗의 한율, 최근 <삼투>에서 열연한 데뷔 13년차 배우 박현우가 캐스팅 확정되었는데, 이는 평소 그들의 연기를 눈여겨본 이제설이 감독에게 강력 추천하여…(중략).
(왼쪽부터 한율, 박현우. 사진=WB래빗 엔터테인먼트)
한편 이제설은 온더로즈 영아와 공개연애를….]
-뭐냐 이 캐스팅은ㄷㄷㄷ;;
-개차반 스토리도 연기력이랑 외모로 다 캐리할 수준ㅋㅋㅋ
-오른쪽 삼투에 나온 애 맞음? 영화로 봤을 땐 실제로도 아픈 앤 줄 알았는데ㅋ;;
-현우야 이제 빛 좀 보자ㅠㅠ!!!!
-대체 부모가 어떻게 생겨야 저런 애들을 줄줄이 낳는 거냐
-WB래빗 은근히 잘나가네
-부모 역 누가 맡을지가 더 궁금하다ㅋㅋㅋㅋㅋ
한율은 눈을 끔뻑거렸다.
‘이제설이 강력추천?’
감독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는데.
가벼운 의문. 그러나 한율은 금세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할 일이 많았다.
평온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 멤버들은 간만에 3층에 있는 대회의실로 올라갔다. 회의실에는 좌기훈 대표를 위시하여 A&R팀, 기획홍보팀, 매니지먼트 B팀, 여기에 댄스트레이너와 처음 보는 사람도 몇 명 자리하고 있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꾸벅꾸벅 인사를 하곤 빈자리에 착석했다. 그러곤 긴장된 얼굴로 챙겨온 노트나 사과패드, 노트북을 꾹 잡았다.
오늘 이들이 모인 목적은 바로, 어스래빗 다음 앨범 컨셉회의.
보통 아이돌은 일명 ‘자체제작돌’이 아닌 이상 컨셉회의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어스래빗 또한 데뷔 앨범 컨셉회의엔 참석하지 못했었으나, 이번엔 좌 대표가 멤버들의 의견도 듣고 싶다며 그들을 불렀다.
“후우….”
유호가 긴장된 얼굴로 숨을 골랐다. 그는 지난 번 데뷔 앨범에 본인이 만든 곡을 싣고 싶다며 작업에 몰두했었지만, 결국 낙점되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도 꾸준히 곡을 작업 중이라고.
짝. 사람들이 다 모이자 좌 대표가 박수로 주의를 끌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번 어스래빗 앨범은 싱글로 가려 합니다. 컴백 예상 시기는 11월 중순. 국내에서 2주 활동, 그 다음은 일본. 그 다음은.”
화이트보드에는 큼지막한 11월, 12월 달력이 걸려있었다. 좌 대표가 레이저 포인터로 12월 중순을 빙빙 가리키며 웃었다.
“WB래빗 토끼돌의 크리스마스기념 곡 발표. 참 바쁘겠죠? 그리고 오늘은 11월 중순에 내놓을 싱글앨범 컨셉회의를 시작할 건데…. 회의 시작에 앞서, 우리 어스래빗 여러분의 의견부터 들어볼까 합니다.”
지난 주, 오 팀장으로부터 다음 앨범에서 시도하고 싶은 컨셉이나 바라는 점들을 미리 생각해서 정리해두라는 숙제를 받았다.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적어오기는 했으나, 막상 발표하자니 부끄러움이 몰려오는지 누구도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허황되고 엉뚱한 의견이라도 아주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 이런 거 하고 싶다!”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이던 박가람이 손을 위로 쭉 뻗었다.
“오, 가람이. 편하게 앉아서 얘기해.”
“네. …크흠.”
박가람이 무언가가 지저분하게 잔뜩 적어놓은 노트를 펼쳤다.
“저희 데뷔 앨범이 세계관을 담고 있잖아요. 달을 향해 달리는 섬이었던 고래가 브리칭을 하고, 원래 있던 세계가 뒤집혀서 어스에 착지. 그리고 넓어진 세상을 그리는 더와월로 시작.”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팬 분들이 그러더라구요. 브리칭도 멋있었지만, 더와월처럼 우리 나이 대에 맞는 청량 컨셉이 더 이어지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우리 나이가 마냥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터지는 것처럼 행복하진 않잖아요. 내 자아와 가치관이 정립되기 이전에 또 다른 미성숙한 자아를 지닌 또래 친구들과 부딪치고 상처받는, 학교와 친구가 세상의 전부인 나이.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이번 앨범 컨셉은, ‘타인에 의한 첫 상처’입니다.”
“첫 상처라….”
사람들이 노트나 사과패드에다 박가람의 의견을 적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섰는데, 처음의 즐거웠던 감정이 나와 다른 타인과 부딪치면서 조금씩 깎이는 거죠. 어? 이 갈등의 원인이 나였나? 내 말과 행동이 잘못된 거였나? 내가 세상에 대해 미리 알고, 거기에 나를 맞추는 게 올바른 거였나? 그럼 ‘나’는? …그러다 결국엔 실망과 혼란에 지쳐서, 같은 섬을 타고 온 친구들에게로 돌아갈까, 나 혼자만이라도 섬에 돌아갈까? 하고 갈등하는 거죠.”
“여기에서 세상은 타인을 말하는 건가요?”
“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릴 땐….”
가장 먼저 박가람이 진지하게 설명을 시작하고 청중도 유심히 귀 기울여 듣자, 다른 멤버들도 하나 둘 각자 생각한 의견을 꺼냈다.
한율도 생각한 컨셉을 꺼내놓았다.
“제가 하고 싶은 이번 컨셉은 가람이 형이 생각한 것과 조금 비슷한데…, 저는 갈등보다는 충돌입니다.”
“충돌? 파이트?”
A&R팀의 진장현 팀장이 두 주먹을 맞부딪히는 제스처를 취하며 물었다.
“네. 섬에서 내리기 전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기는 했지만, 노래나 춤이나 오롯이 나의 연습과 노력의 결실이었잖아요. 그런데 막상 발을 디딘 세상은 그게 아니었죠.”
“거기에서 이해와 가치관이 충돌?”
“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컨셉이, ‘어? 내가 이상한 건가?’ 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거라면.”
박가람이 한율을 보며 물었다.
“한율이 네가 생각하는 건 ‘너희 이상해! 여기 이상해!’ 라고 외치는 거네?”
“네. 타인의 노력과 결실에 멋대로 편승하고도 떳떳한 사람들의 행태에 실망하고 화내는 거죠.”
“올바르네.”
“초등학생 때 우리 반 반장 생각난다. 매일 애들한테 ‘그러면 안 돼! 착한 말, 바른 말 써! 너희가 잘못한 거야!’ 라고 타이르다가 오히려 싸움만 하고 다니던 애 있었는데.”
“써한, 이거 혹시 네 얘기야?”
“난 애들하고 한 번도 싸운 적 없어.”
어스래빗 멤버들의 의견발표가 끝나자 다른 부서도 의견을 내놓았다.
“아직 데뷔 1년 차잖아요. 그러니 멤버들 중 몇 명이 말한 실망과 혼란, 충돌은 내년이나 내후년에 고조되는 갈등처럼 펑 터뜨려도 늦진 않을 것 같습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아직 대중은 여러분의 노래를 한 곡 겨우 알까말까 하거든요.”
“아.”
“우리야 늘 듣고, 어스래빗의 세계관에 대해 생각하니까 머릿속에선 이미 지구 반 바퀴를 돌았죠. 하지만 대중들은 아닙니다. 갑작스런 변화로 느껴질 거예요. 뜰 때까지 여러 컨셉을 시도하는 팀도 있긴 하지만, 제가 보기엔 어스래빗은 조금 느리게, 차근차근히 각인을 시켜도 충분히 먹힐 팀 같거든요. 그러니 팬들의 반응이 좋았던 더와월의 연장선으로 가되,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에 맞춰서….”
컨셉회의는 아티스트와 스태프 구분할 것 없이 긴 논의를 통해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갔다. 곡의 서사와 분위기를 정하고, 안무와 M/V, 아티스트의 스타일링에 대해서까지.
중간의 10분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회의는 장장 4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오 팀장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떠나보낸 후, 화이트보드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슥슥. 오 팀장이 컨셉회의로 결정된 사항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깨끗하게 지웠다. 그리고 새로운 주제를 적었다.
[2017 추석특집 아이돌스포츠대회]
[육상(1)/이어달리기(4)/양궁(2)/농구(3)/볼링(2)]
이건우가 테이블에 두 팔꿈치를 세우고 깍지를 꼈다. 거기에 턱을 괴며 심각한 얼굴로 중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 농구! basketball!”
시작도 전에 라이언이 손을 들고 외쳤다. 오 팀장이 말없이 라이언을 슥 돌아보더니 화이트보드에다 적었다.
[농구 - 라이언]
“어? 지금 바로 하고 싶은 거 말해도 되는 거예요? 그럼 난 볼링이요!”
“그 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양궁과 볼링, 농구는 서로 중복 참가 불가능입니다. 본선이 동시에 열릴 예정이거든요. 그리고 양궁 같은 경우엔 따로 잠깐이나마 교육을 받아야 하고, 팀전과 개인전 둘 다 갑니다. 농구는 팀과 팀이 맞붙는 대결이라 예선을 며칠에 걸쳐 진행할 예정이고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신중히 생각해주세요.”
한율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양궁 나가고 싶은데요.”
“OK. 한 명 더.”
“양궁 한번 배워보고 싶긴 한데, 잘할 자신이 없다.”
“이건 차분한 사람이 잘하지 않….”
“저요!”
“나!”
유호가 ‘차분한 사람’을 운운하기 무섭게 박가람과 길우성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지원했다.
유호는 두 사람을 못 본 척, 차남석에게 물었다.
“남석이 넌 양궁 어때?”
“우우! 리더 나쁘다!”
“리더가 멤버 무시한다! 우우!”
멤버들의 참가종목 결정은 5분도 안 되어 신속히 끝났다.
[육상 - 길우성]
[이어달리기 - 유호, 이건우, 박가람, 강보배]
[양궁 - 서한율, 길우성]
[농구 - 라이언, 이건우, 유호]
[볼링 - 차남석, 강보배]
“그럼 이대로 MBS 측에 전달하겠습니다. 한율이랑 우성이는 예선 전 주말에 양궁 배우러 가자.”
“넵!”
“네.”
“그리고 내일이 광복절이잖아요.”
오 팀장이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리며 멤버들에게 일렀다.
“광복절을 기념해 SNS에 좋은 글귀나 사진을 올리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저나 유찬 씨에게 먼저 검토받길 바랍니다.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네엡.”
“자, 그럼 모두 맛있는 저녁 드시고, 남은 하루도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해산. …아, 한율인 잠깐 2층 사무실로.”
한율은 오 팀장과 함께 2층 사무실로 내려갔다. 매니지B팀 자리에 앉아있던 조유찬이 기다렸다는 듯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다음 주에 촬영할 화장품 CF 최종콘티가 도착했사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봐도 되죠?”
“그럼요.”
한율은 내용물을 꺼냈다.
한율에게 들어온 화장품 광고모델 제안 중, WB래빗과 한율이 고심 끝에 고른 곳은 오래된 제약회사에서 만든 화장품 브랜드, ‘더순한화장품’이었다.
콘티 첫 장엔 공동모델로 발탁된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학생/서한율(어스래빗),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여학생/진은수, 아림 엔터테인먼트]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으면 좋을 텐데
“아림?”
10대 학생들이 쓰기 좋은, 굉장히 순한 화장품이란 점을 내세우고자 여학생 모델도 함께 기용한다고 듣긴 했다. 한율에게 제안했을 땐 신중히 물색 중이었다고. 그러나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아림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이 분도 가수예요?”
“아니, 아직 연습생. 그런데 듣기론 히아신스의 호수 여동생이라고 하더라. 나이는 한율이 너보다 한 살 아래.”
“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 연습생이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 CF를 찍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한율과 차남석이 그랬던 것처럼.
대충 훑어본 40초짜리 풀 버전 콘티는 무난하게 유치했다.
“가져가서 편히 봐. 외부로만 유출 안 되게 조심하고.”
“네, 저녁 맛있게 드세요.”
“그래, 한율이 너도.”
다음 날, 공휴일인 광복절.
평일의 공휴일은 레슨이 전혀 없는 쉬는 날이었지만, 어스래빗 숙소는 아침부터 외출준비를 하는 멤버들로 인해 어수선했다.
가장 먼저 유호가 라이언과 강보배를 데리고 나갔다. 광복절을 기념해 뜻 깊은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곤, 함께 서울 역사박물관과 효창공원을 다녀올 거라고.
차남석은 곧 촬영에 들어갈 드라마의 배우들과 대본 리딩연습을 위해 외출, 이건우는 박가람과 라방에서 할 태극기 보관함 만들기 재료를 사러 나갔다.
그렇게 숙소엔 한율과 길우성만 남았다.
“써한. 우리 도서관이란 곳에 한번 가볼래?”
아직 잔뜩 남은 방학 숙제를 든 채 길우성이 물었다. 덜그럭. 한율은 조금 전까지 돌리던 청소기를 정리했다.
“나 갈 데 있어.”
“써한 너마저?! 이런 인싸같으니!”
“…….”
“어디 가는데?”
한율은 잠시 길우성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금속공예 공방. 너도 갈래?”
“금속…, 공방…?!”
놀란 목소리를 낸 길우성이 들고 있던 숙제거리를 소파에다 내팽개쳤다. 털퍼덕.
“갈래!”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이 미치지 않을 때 길우성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그에 대해서도 대비해둬야 한다고.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방임하고 싶은 마음도 들어, 미루고 미뤘었다.
그러나 며칠 전, 비가 내려 젖은 무대에서 미끄러질 뻔한 길우성을 잡고나자 더 이상 미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뜬 얼굴로 씻을 준비를 하며 길우성이 물었다.
“그런데 공방엔 뭐 만들러 가? 검? 칼 만드는 거야?”
“…무기를 왜 만들어. 팀 반지 하나 만들어볼까 하고.”
“그렇게 안 봤는데….”
길우성이 입을 쩌억 벌리며 두 번째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 팀에 애정이 있긴 있었구나?!”
“…….”
“그런데 반지면 손가락 사이즈 알아야하지 않아?”
“대충 비슷하겠지.”
“하긴. 커플링도 아닌데 헐렁거리면서 빠지지만 않으면 되겠지, 뭐. 와, 그런데 만드는 거 재밌겠다. 기계로 기이이잉 하는 거 맞지?”
“그럴 걸?”
한율은 대충 맞장구쳐주면서 생각했다.
너만 잘 지니고 다니면 된다고.
출발하기 전, 예약했던 공방에 연락해 한 명 더 데려가도 되냐 물었더니 다행히 OK란 대답이 돌아왔다.
도착한 공방엔 금속 냄새보단 커피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손님은 우정반지를 만들러 온 집단과, 커플링을 만들기 위해 찾아온 커플까지 7명. 손님들과 강사 및 직원은 뭔가 낯이 익다는 의혹이 담긴 눈길로 한율과 길우성을 연신 쳐다보았으나, 누군지 확실히 알아차린 눈치는 아니었다.
“오늘 반지 만들기 코스를 신청하고 찾아와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일단 어떤 반지를 만들 건지, 각자 원하는 디자인을 고른 후에….”
반지 제작과정과 안전에 관한 주의사항을 들은 후엔 강사의 도움을 받으며 시작.
혼자 왔다면 길우성에게 줄 것만 직접 만들고 나머진 공방에다 의뢰하려 했으나, 손에 익으면 작업 속도가 빨라질 것 같아서 길우성과 8개를 모두 직접 제작하기로 했다.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말이다.
찰칵, 찰칵.
작업 도중 틈틈이 사진을 찍으며 길우성이 물었다.
“이거 나중에 SNS로 올리자.”
“어.”
“그런데 대박 재밌다. 생각보다 공정이 복잡하지도 않고, 완전 신기.”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작업했다.
그렇게 한참. 광택 작업까지 끝낸 후 조각에 들어가기 전, 한율은 주변을 빠르게 살핀 후 아주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
스륵. 반지를 향해 내리깐 두 눈동자와, 반지를 어루만지는 손끝에 희미한 푸른빛이 일렁거리다 사라졌다.
한율은 태연히 길우성에게 물었다.
“각인 문구는 뭐로 하는 게 좋을까?”
“영어로 어스래빗, 다음에 이니셜을 새기는 게 무난하지 않을까?”
길우성은 바로 옆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듯했다. 대신 주변에서 조용히 작업하던 다른 손님들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어스래빗?!”
“거 봐, 내가 아이돌 같다고 그랬잖아…!”
한율은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각인은 공방 직원이 안전하게 대신 새겨주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8개의 반지제작은 다음 수업시간까지 이어져 끝났다. 이것도 길우성의 손이 생각보다 빠른 덕이었다. 한율과 길우성은 함께 수업을 받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의바르게 인사한 후 공방을 나섰다.
“세상에, 내 나이 18살에 반지란 걸 껴보게 될 줄이야…!”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길우성은 길을 걸으면서도 연신 왼손 검지에 낀 반지를 신기하게 살피며 만지작거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이상한 얼굴로 중얼.
“그것도 팀의 우정반지….”
한율은 길우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길우성이 옆에서 휙 떨어지며 왼손을 감췄다.
“왜?! 싫어!”
“금요일에 보배 형이랑 라이언 믹스테이프 나오잖아. 그때 기념 라방할 때 꺼낼 거야.”
“그럼 그냥 손에서만 빼고 가지고 있어도….”
“잃어버릴까 불안해서 그런다. 그리고 한꺼번에 8개를 다 꺼내는 게 보기도 좋잖아.”
“…으으.”
못미덥기 그지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하자, 길우성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손가락에 꼈던 반지를 뺐다.
“…자.”
한율은 반지를 케이스 안에다 고이 넣었다.
마력은 불어넣었으니, 이제 보호마법을 이중삼중으로 각인하는 작업만 남았다.
“난 집에 잠깐 들렀다가 갈 테니까, 길우성 넌 딴 길로 새지 말고 곧장 숙소로 들어가서 숙제해.”
“네엥….”
서한율과 헤어진 후, 길우성은 서한율의 말대로 숙소가 있는 동네 방향 버스를 탔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차창 밖을 멍하니 보는 길우성의 눈엔, 도로를 천천히 달리는 차와 거리마다 게양된 태극기의 물결, 그 사이로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러나 머릿속엔 조금 전 공방에서 반지를 만든 일과 기계음이 재생되었다.
“…흐.”
다시 떠올리자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팬을 만났을 때처럼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했다.
‘팀의 우정 반지….’
아이돌그룹은 비즈니스로 뭉친 집단이라,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두루 사이가 좋은 팀은 드물다. 방송국에서 마주친 팀들도 그랬다. 방송에선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챙겨주었던 사람들도, 대기실에서는 멀리 떨어져서 무시하거나 심지어 쌍욕으로 서로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어스래빗은 있는 그대로였다. 차남석과 라이언의 사이가 데면데면하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서로에게 날을 세웠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 가물가물할 정도.
“히힛….”
“……?”
길우성이 무심코 웃음을 흘리자 옆에 앉은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나 길우성은 실실 웃으면서 핸드폰으로 SNS에 들어갔다. 반지는 금요일에 할 라방에서 꺼내기로 해서 그 전까진 이프림에게도 자랑해선 안 되지만, 그냥 이프림이 보고 싶었다.
그러다 길우성은 최근 자신의 SNS 게시글에 새로이 달린 댓글을 보았다.
-우성아 이거 네 얘기 아니지...? ㅜㅜ
“……?”
자주 댓글을 달아주던 이프림의 이름. 길우성은 의아한 얼굴로 댓글에 적힌 링크를 눌렀다. 한 커뮤니티의 게시글이 떴다.
[제목: 학폭가해자였던 아이돌이 과거 세탁하는 건 흔하지만]
“……!”
게시글 제목이,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길우성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마침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노래가 놀란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후우….’
길우성은 속으로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눈을 떴다. 그러곤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좀 어이없어서 쓰는 글.
누군지 콕 집어서 말하긴 그렇고, 제주 출신 남돌 있음.
얘가 초딩 때 좀 심하게 괴롭힘 당했었음. 애ㅅㅋ들이 ㅈㄴ영악한 게, 때리면 바로 티난다고.. 얘가 뭘 해도 툭하면 비웃고, 무시하고, 쌍욕하고, 시비 걸고, 흉보고... 실내화나 가방 숨기는 것도 일상이었음.
왜 괴롭힘 당했는지는 묻지 마. 얘 잘못 1도 없었으니까.
그나마 중학교 올라가니까 그래도 대가리 컸다고 초딩 때처럼 괴롭히진 않았는데.. 내 생각엔 얘 누나랑 누나 친구가 ㅈㄴ예쁘고 인기 많아지니까 덜해진 것 같기도 함. (완전히 쎈 힌트, 누나 친구도 현재 아이돌)
암튼 그때가 되어서야 다가가는 애들이 생겼는데, 솔까 초딩 때 그렇게 자기 괴롭히던 년놈들이 실실 웃으면서 다가오면 누가 좋아함? 역겹지ㅋ 이번엔 걔가 사람들이랑 거리를 둠. 통수를 한두 번 맞아봤어야지ㅋ
방관도 가해자다? ㅇㅋ인정. 그런데 나도 초딩 땐 그런 애들 무서웠음.. 그래서 티비에 얘 나오는 거 보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유료팬클럽도 가입함...ㅋ...;; 암튼 각설하고, 최근에 ㅈㄴ어이 털리는 소문 들음.
어릴 때 얘 따시키고 괴롭힌 것들이 얘 부모님이 하는 식당 찾아가서 친구라고 씨부리고 서비스 받아 처먹었다고ㅋㅋㅋㅋ
진짜 살다살다 학폭 가해자였던 쓰레기가 과거 세탁하고 아이돌로 나오는 건 봤어도, 피해자였던 아이돌 집에 가해자들이 찾아가서 친구였다고 구라치는 건 완전 ㅂㅅ관종ㅅㅋ들아님??? 양심 진짜 어디 갔는지ㅋ
그러면서 걔 잘 될 것 같으니, 본인 이미지 생각하면 나중에라도 대놓고 뭐라 하진 않을 거라곸ㅋㅋㅋ 피해자 배제하고 지들끼리 용서받고 화해한 것처럼 ㄹㅇ북 치고 장구 치고 ㅈㄹ옆차기 시전 중ㅅㅂㅋㅋㅋㅋㅋㅋ 와나 진짜 그 얘기 듣고 ㅈㄴ역겨워서 토나올 뻔ㅋ]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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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 들었던 즐거운 기분은 곤두박질친 지 오래였다.
길우성은 평화로운 거리를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