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8월 18일 오후 5시 30분.
강보배와 라이언이 공동작업한 믹스테이프 [녘]이 너튜뷰와 글로벌 음악공유서비스인 SC에 올라가기 30분 전. 어스래빗 멤버들은 두 사람의 믹스테이프 발매 축하 라방을 하기 위해 3층의 영상실로 모였다. 평소 라방을 진행할 땐 2층 회의실을 주로 이용했었지만, 현재 그곳은 연습생들이 레슨을 받는 중이었다.
“영상실에선 라방하는 건 처음이네.”
“여기 은근히 좋은데? 단상 높이가 있어서, 카메라에 8명이 쉽게 다 들어와.”
“그건 뭐야?”
차남석이 한율이 들고 온 종이가방을 보며 물었다. 한율은 대답 대신 입가만 올린 채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준비됐지?”
“잠깐만, 나 물 좀 마시고.”
곧 유호를 제외한 멤버들이 두 줄로 놓은 의자에 착석했다.
앞줄 가운데 자리는 오늘의 주인공인 강보배와 라이언이 나란히 앉았다. 그들 뒤에 의자에다 방석을 세 개나 깔고 앉은 박가람은 색색의 펜으로 ‘트레리안 첫 믹스테이프 발매 축하!!!’라고 적은 스케치북을 펼친 채 품에 안았다.
단상 위 노트북으로 라이브방송 시작 버튼을 누른 유호가 재빨리 빈자리에 앉았다.
“하나, …둘,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와아아!”
8명이 다 모인 단체 라방은 일본에서 귀국하기 전 날 이후 오래간만이었기에, 톡창에는 그들을 반가워하는 인사가 빠르게 올라왔다. 멤버들도 핸드폰으로 이프림의 톡을 보며 인사 및 근황을 전하곤, 강보배와 라이언의 믹스테이프 발매를 축하했다.
“…그럼 이번 믹스테이프에 실린 곡들에 대한 소개나 해석은 이프림에게 맡긴다는?”
“네. 하지만 그리 심오하진 않아요. 정말 연습 삼아, 라이언이랑 노는 것처럼 만든 거거든요. 아직 많이 부족한 실력이기도 하고…, 하하. 쑥스럽네요.”
“우리 보배가 이렇게 겸손한 타입이 아닌데….”
“그런데 두 사람 혹시, 같이 작업하면서 의견이 충돌하거나 싸운 적은 없어? 왜, 사업도 친구랑은 동업하지 말라잖아.”
라방에서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에 대해선 미리 대충 정해뒀다. 라이언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발전을 위한 이견 추돌?”
“의견, 충돌.”
“응, 발전 위한 의…이견 충돌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야. 그래서 안 싸웠어.”
핸드폰으로 올라오는 톡을 확인하던 차남석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우성이 넌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눈치 보는 게, 화장실 급하냐고 물으시는데?”
“아앗? 아니에요, 화장실이 아니라….”
길우성이 한율을 흘끔거렸다.
“그건 언제 꺼내?”
우리 애들이 연기를 참 잘해요
다른 멤버들의 시선도 한율을 향했다. 정확히는 한율이 들고 있는 종이가방을 보았다.
“맞아, 아까부터 계속 들고 있어서 나도 궁금했는데.”
“혹시 보배랑 라욘한테 줄 선물?!”
“아아, 이건요.”
한율은 종이가방에서 새카만 박스를 꺼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로 다가갔다.
“이프림 분들에게 먼저 보여줄게요.”
상자 안, 새카만 벨벳 사이에 끼워진 8개의 반지가 그라 영상에 고스란히 나왔다. 톡창엔 반지를 본 이프림의 감탄과 즐거운 함성이 폭주했다.
뭐지? 뭔데? 톡 확인용으로 그라를 켠 핸드폰을 본 멤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길우성만 이상한 얼굴로 웃었다.
“흐흐.”
한율이 반지 하나를 꺼내 카메라에다 가까이 내밀었다.
“저와 우성이가 직접 공방에서 만든, 어스래빗 팀 반지입니다. 안쪽에 이렇게 각각 어스래빗이랑 멤버들 이니셜을 새겼어요.”
“직접 만들었다고?!”
“너희 둘이?!”
그라엔 한동안 뜻밖의 선물에 감동한 멤버들의 모습이 나갔다.
“우정반지는 왼손 검지래.”
길우성의 말에 바로 각자 이니셜이 새겨진 반지를 왼손 검지에다 끼웠다. 조금 헐렁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라방용 카메라까지 등지고, 반지를 낀 손을 한 데에 모아 사진도 찍었다.
“와…, 팀 반지는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고맙다, 막내들.”
멤버들이 한 명씩 한율과 길우성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헤집듯 쓰다듬거나 어깨와 등을 툭툭 두드렸다. 톡창에도 이프림의 감상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얘네 진짜 찐이다.. 진심 놀라고 감동했어8ㅂ8
-오래가자 얘들아ㅠㅠㅠㅠㅠ
-막내들 넘 기특한 거 아니냐!!!!! 헝허엉어어엉어엉
-저걸 직접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너무.. 아 왜 날 울리고 그래ㅜㅜ
-방금 우성이 반지 파랗게 반짝거리는 것 가탔는뎅 뭐에 반사됐낭ㅇㅇ?
-아 결혼도 못하는 나인데 엄마미소가 절로ㅎㅅㅎ
-넘 좋아서 입꼬리가 안 내려가ㅎㅎㅎㅎㅎㅎㅎ
-애들 좋아하는 거 보니까 괜히 나도 울컥한당ㅠ
-우성이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ㅎㅎ
개중엔 작은 의문이 섞인 톡도 있었으나, 해당 톡은 수많은 톡에 밀려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이건우가 반지 낀 손을 들어 조명에다가 비춰보며 말했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런 깜짝 선물을 받아버리면… 나중에 막내들 생일 땐 어떡하지?”
“형들이 거하게 쏴야지.”
한율은 살며시 웃으면서 단호히 말했다.
“저는 서프라이즈, 몰카 이런 거 안 좋아하니 참고해주세요.”
-한율이 벌써부터 못 박앜ㅋㅋㅋ
-그러고 보니 한율이 생일 얼마 안 남았구나ㅎㅎ
-작년엔 미국에서 쓸쓸히 혼자 생일맞이했었지..8ㅅ8 그랬었는데 이번엔 여덟 명이 함께!!!
-앞으로 12일 남았습니다, 여러분!!!
라방이 끝난 후엔 길우성이 공방에서 찍었던 사진을 기획홍보팀 직원이 넘겨받아, 어스래빗 공식 SNS에 반지 제작기로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엔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낀 8개의 손이 모인 사진.
[막내들이 직접 만든 어스래빗 팀 반지>_<)♡ #어스래빗포에버 #형들이잘할게 #트레리안_녘_많이들어주세요 #우성아방학숙제다했니]
바빠서 라방을 챙겨보지 못했던 팬들도 SNS를 보곤 크게 호응했다. 그러나 팬들 중 한 사람,
“…….”
길우성이 최애인 윤이슬은 마냥 웃지 못했다. 바로 며칠 전,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건 아닐까 하면서도 몹시도 궁금해 길우성의 SNS에 달았던 댓글.
-우성아 이거 네 얘기 아니지...? ㅜㅜ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해당 댓글을 지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길우성으로부터 답댓글이 달렸다.
ㄴ[Gil Useong]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 댓글을 본 순간, 윤이슬은 자신이 길우성의 아픈 상처를 헤집었음을 깨달았다. 한편으론 화가 나면서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혼란스러워졌다.
상대는 아무리 학폭 가해자라할지라도 일반인, 그것도 미성년자다. 여기에 피해자인 길우성이 가만히 있는데 팬이라고 들쑤신다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기에.
그래서 바로 링크가 담긴 해당 댓글을 삭제하고 새로운 댓글을 달았다.
-네 미소를 보면서 나도 웃어(♡ ὅ ◡ ὅ )ʃ♡ 앞으로 행복한 시간만 가득할 거야 우성아 사랑해(。’▽’。)♡♡♡♡♡♡♡♡♡
ㄴ[Gil Useong]❤*.(๓´͈ ˘ `͈๓).*❤
“…후.”
윤이슬은 다시금 욱하고 올라와 눈물샘을 자극하는 여러 감정을 추스르면서 어스래빗 팀 반지 사진을 보았다.
어릴 땐 또래 애들에게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고 혼자 쓸쓸히 중학생 시절을 보내다가, 고향을 떠나 서울의 고등학교 입학해서 기획사에서 만난 인연들. 그들과 함께 데뷔해서 팀 반지까지 직접 만들어서 낀 걸 보니 괜스레 눈물이 났다.
남들이 본다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이돌 일에 왜 네가 감정이입하고 오버냐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마음이 동하고 끌려서 팬이 된 걸 어쩌라고.
훌쩍. 윤이슬은 손끝으로 사진이 뜬 액정을 어루만지면서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정말 어스래빗 우정,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좋겠다….’
* *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한율은 오래간만에 아침 일찍 교복을 걸치고 가방을 맸다. 그 옆에선 길우성도 흐느적흐느적 느릿느릿 교복 단추를 채웠다.
“흐으아암….”
여기에 늘어지는 하품까지.
“그러게 숙제를 미리미리 해뒀으면 좋았잖아.”
길우성은 어젯밤 늦게까지 유호와 박가람의 도움을 받아서야 방학숙제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으흐.”
길우성은 히죽 웃으며 먼저 방을 나섰다.
오늘 개학하는 대한예고 학생들은 회사에 가서 아침을 먹은 후 매니저 윤승우의 차를 탔다.
회사 구내식당에서부터 대본을 보던 차남석은 차에 타서도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율도 핸드폰으로 찍은 CF콘티를 살피다가, <별☆일없는 집> 1화 대본을 꺼내 읽었다. 길우성도 너튜뷰로 유명한 댄서의 춤 영상을 보면서 조용히 들썩거렸다.
“태워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형!”
“들어가세요.”
학교에 도착한 후엔 괜히 눈을 마주치며 알은체하려는 학생들에게 가볍게 인사하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너 화장품 뭐 쓰냐?”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같은 반이자 가수 선배인 황성연이 한율에게 다가와 물었다.
“기초랑 비비크림 브랜드 다 알려주라.”
“왜 얘한테만 물어?”
길우성의 질문에 황성연이 뭘 그런 걸 묻냐는 당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야 서한율 피부가 너무 좋으니까….”
길우성이 활짝 웃었다.
“나 작년부터 얘랑 같은 거 쓰고 있어요.”
“…….”
“피부는 뭐다? 유전빨과 노치킨이다!”
“…에라이.”
황성연이 투덜거리면서 등을 돌렸다. 한율은 멀뚱히 서 있다가 길우성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엔 늘 모이던 멤버들이 다시 모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다른 때보다 진지했다.
“재능도 없으면서 뭘 자꾸 쳐!”
박현우가 한율을 타박하면서 옆을 가리켰다.
“집안 꼬락서니를 봐! 현실을 보라고, 이 철없는 새끼야!”
한율도 지지 않았다.
“남이야 철이 있든 없든, 훈계질 좀 그만하지? 누가 너더러 도와 달랬냐?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 될 거 아냐!”
“방해? 하!”
박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가 정색했다.
“그 말은 너 스스로 재능 없다고 인정한 거네! 그런 수상한 꼰대 도움 못 받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실토한 거잖아 지금!”
“하…. 말을 말자, 씨발.”
“뭐? 씨발? 너 지금 형한테 씨발이라고 그랬냐?”
“그래, 이 새끼야! 꼴랑 몇 분 먼저 태어났다고 형인 척하는 새끼한테 씨발이라 그랬다 왜!”
사방이 오픈된 벤치라, 지나가던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둘이 싸우는 건가? 쌍욕까지 쓰면서?!
길우성이 그들을 향해 손을 크게 교차시키며 휘저었다.
“연기연습중입니다~, 싸우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애들이 연기를 차암 잘해요오~.”
“아, 나 아까 ‘못 받으면 안 된다고’ 이 부분에서 발음 좀 뭉개진 듯.”
두 사람의 대본리딩을 구경하던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뭔가 음률도 느껴지더라. 노래 부르는 줄.”
한율은 대본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박현우에게 물었다. 조금 전까지 박현우에게 쌍욕까지 쓰면서 바락바락 대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쌍둥이 형 쪽, 동생한테 뭔가 강박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아무리 형제라도, 오랫동안 헤어져 살다가 만났는데 처음부터 너무 하나하나 감시하고 간섭하려 드는 게.”
“넌 아직 눈치 채면 안 돼. 의식하게 되잖아.”
“후반부에 밝혀질 뭔가가 있나 보네요.”
박현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아직 못 들었지만. 아, 그러고 보니 너 방학하던 날에 대본 하나 포기해달란 말 들었었잖아? 우리 학년 애한테.”
“네.”
“걔가 너 보면 고맙다고 전해달란다.”
“아….”
사실은 그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작품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거절한 거지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이 캐스팅됐나 보네요?”
“어. 외계어 같은 PC용어 줄줄 외우고 다니더라. 너도 피아노연습 잘 하고 있지?”
“하루에 한 시간씩은 꼭 하고 있어요.”
“다 끝났으면 내 것도 좀 도와주지?”
이어서 차남석의 대본리딩 연습상대. 진지하고 심각한 대사를 나누는 그들 옆에서, 길우성은 너튜뷰에다 이번 온더로즈의 신곡 무대영상을 띄워놓고 안무를 따라 추며 놀았다.
“Fly high, high, 사랑을 내려줘~.”
이틀 후. 한율은 ‘더순한화장품’ CF촬영이 진행될 경기도의 한 학교로 향했다. 아직 개학하지 않은 학교 교정엔 이미 엑스트라로 나올 학생 모델들이 모여 스태프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조유찬이 기가 막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9시까지 오라고 그래서 8시 20분에 왔는데, 쟤네는 대체 몇 시에 온 거야…?”
한율은 사람보단 건물을 보았다.
“학교가 예쁘네요.”
박가람과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쁘다.”
“잘 꾸몄네.”
본래는 이건우만 영상학과 전공자로서 CF촬영 현장을 보고 싶다며 동행하기로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차에 타고 보니 박가람이 조수석에 턱하니 앉아있었다.
그렇게 한율은 두 사람과 함께 촬영장에 왔다.
“안녕하십니까!”
새카만 밴이 등장했을 때부터 ‘왔구나’란 표정으로 쳐다보던 사람들을 향해, 한율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어스래빗의 서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보호자로 따라온 어스래빗의 건우!”
“가람입니다! 촬영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클라이언트 측, 더순한화장품에서 나온 사람들과 CF촬영을 맡게 된 프로덕션 감독과 스태프들 순으로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어이구, 가까이에서 보니까 진짜 피부에서 빛이 나네요.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계단 앞 교정에는 이프림이 서포트로 보낸 커피차가 막 개시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에 걸린 포토 현수막과 그 앞에 세워진 배너가 시선을 끌었다.
[♡한 피부하는 율♡]
[지구에 와줘서 고마워율☆이 쏩니다!]
“한율이 사진 대박 잘 나왔다.”
“나중에 시간나면 인증샷 찍자. 지금은 쉿.”
이건우는 당장 커피차를 향해 달려가려던 박가람을 잡았다. 한율이 감독과 진지하게 콘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까닭이었다.
“여기 이 대사 말인데요, 화장품은 마법이 아닌 과학이야. 콘티로 보면 톤과 표정이 부드러워 보이는데….”
“아, 디테일한 부분은 다른 모델이 오면 같이 맞춰보고 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감독이 흘끗 클라이언트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모델이랑 호흡이 붕 뜨면 안 돼서.”
“……?”
“은수 씨란 분이 연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한율 씨는 연기 잘하니까, 무슨 의미인지 알죠?”
그때 교정으로 고급승용차 한 대가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아직 앳돼 보이는 소녀로, 아림 엔터의 연습생이자 오늘 한율과 CF를 찍을 ‘진은수’였다.
진은수는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곤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가왔다. 표정은 두려움과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더순한화장품에서 나온 김 부장이 활짝 웃으면서 진은수를 반겼다.
“아니에요, 은수 씨.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왔는걸요. 더순한화장품의 김용철 부장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가장 먼저 김 부장과 악수와 인사를 나눈 진은수는 프로덕션 사람들을 거쳐서 한율에게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긴장을 어찌나 했는지, 인사를 나누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동공이 흔들리는 횟수도 느는 것 같았다.
“최은…, 아니, 진은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스래빗의 서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진은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뇨, 저희는 그냥 심심해서 따라 온….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가람입니당.”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이건우와 박가람에게까지 꾸벅꾸벅 인사하고 고개를 든 진은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괜찮을까.
한율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진은수를 바라보다가 조유찬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우황청심환 가진 거 있어요? 좀 필요해 보이는데.”
“한율이 네 개인 스케줄이라 깜빡하고 안 챙겼지….”
울지만 말아요
진은수는 화장품 모델로 발탁될 정도로 정말 피부가 하얗고 고왔다. 10대 청소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피부트러블 흔적도 하나 없었다. 그러나,
“뭘 해도 어색해 보이는데….”
한율이 클라이언트 측이 데려온 헤어메이크업 전문가들에게 단장을 받고 나왔을 때, 진은수의 리허설을 진행하는 스태프들 얼굴엔 짙은 먹구름이 껴있었다.
“은수 씨,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웃어봅시다. 치~즈.”
진은수가 웃었다.
…흐.
“…….”
“…….”
“아니, 지난번 카메라테스트 땐 잘만 하더니….”
“저 예쁜 얼굴로 어떻게 저런 미소가….”
피부가 아무리 좋다한들, 모자란 연기실력까지 커버해주진 못했다.
내내 리허설을 지켜봤던 조유찬이 속닥거렸다.
“오늘 촬영은 난항이 예상된다. 내일은 또 어떡하냐….”
내일은 스튜디오에서 화보촬영을 할 예정.
“건우 형이랑 가람이 형은 어디 갔어요?”
“본의 아니게 솔직한 감상을 얼굴에 드러내서 상처 줄까 무섭다고, 커피차 앞에서 셀카 찍으면서 놀고 있어.”
진은수를 데려온 아림 엔터 소속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도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안 좋은 건, 거듭 다시 해보자는 감독의 말을 듣는 진은수 본인.
“자, 릴렉스하고 다시….”
감독은 진은수의 눈에 물기가 아른거리는 걸 눈치 채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율을 발견했다.
“아! 은수 씨는 잠깐 쉴게요! 한율 씨, 첫 씬부터 원테이크로 가볼까요? 어떤 느낌인지 잡을 겸.”
“네.”
상대배우 없이, 배경전환 없이 쭉 이어가는 게 원맨쇼를 떠올리지만, 한율은 카메라 앞에 서서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콘티를 보며 스스로 해석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손에 없는 책을 읽다가, 누군가 저를 부른 소리를 들은 것처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왜?”
그 다음은 붓을 쥐고 캔버스에다 색을 칠하는 것처럼 손을 움직이다가, 쑥스럽게 웃으면서.
“왜 그렇게 봐?”
누군가의 작은 감탄이 들렸다.
“정말 연기 잘하는 사람은 단컷만 찍어도 티가 난다더니….”
“화장품은 마법이 아닌 과학이야. 그러니 피부를 위해 조금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과자는 잠깐 내려놓고.”
카메라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손짓.
“나랑 놀자.”
“—OK, 아주 좋아요!”
감독이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박수쳤다.
“이 느낌 그대로 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율은 예의바르게 꾸벅였다. 그러다 무심코 스친 시야, 두 손을 가슴 앞에 꼭 모아 쥐고 있던 진은수와 눈이 마주쳤다.
진은수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
왜 울어.
“첫 CF촬영이라 긴장을 너무 많이 했나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림 엔터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가 황급히 진은수를 데리고 임시 분장실로 향했다. 촬영 스태프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더순한화장품의 김 부장은 그럴 수 있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은 진은수가 나오지 않는 씬부터 시작되었다.
멀찍이서 놀던 이건우와 박가람도 다시 와서 촬영을 구경했다. 이건우는 조유찬과 나란히 서서 진지한 얼굴로 영상을 찍거나, 잠깐 쉴 때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을 지키며 스태프에게 촬영에 대해 질문했다.
“넌 정말 TV 체질이구나, 막내야. 카메라에 진짜 예쁘게 잘 잡히더라.”
박가람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으면서 한율을 칭찬했다.
“그런데 너도 표정연기 연습해?”
“당연히 하죠.”
“어디에서? 난 너 연습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보컬연습실에서 해요.”
“아. 보컬연습실에서 연기연습을 하는구나?”
단독 씬 촬영은 금방 OK를 받았으나, 엑스트라가 많이 나오는 씬에선 NG가 많이 나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한율은 내내 웃으면서 사람들을 대했고, 박가람과 이건우는 커피차에서 가져온 음료를 사람들에게 직접 돌리기도 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한율이 잘 부탁드립니다.”
진은수는 본인의 촬영 순서가 다가올 때 즈음 되어서야 다시 나왔다. 눈두덩이 붓지 않도록 바로 조치를 취했는지, 얼굴 상태는 괜찮았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 스스로 마음을 굳세게 다잡았는지 진은수가 씩씩하게 외쳤다.
감독이 허허 웃었다.
“괜찮습니다. 또 울지만 말아요.”
“네!”
그러나 실력 또한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진은수는 리허설을 5번이나 하고도 본 촬영에 들어가서도 10번이 넘는 NG를 냈다. 그러자 연기를 너무 잘하는 한율과 바로 비교되어 상대적으로 더 어색해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율은 연기력을 덜었다. 그랬더니 그림이 더 엉망이 되어, 다시 원점.
진은수가 한율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한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면서 달랬다.
“첫 촬영이라 부담도 많이 되고, 충분히 떨릴 수 있죠. 전 정말 괜찮으니까 조금 더 마음 편하게 가지고 다시 해요.”
시간이 더 지연되니, 울지만 말아주라.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는지, 진은수는 입을 꾹 다물곤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촬영이 지지부진해지자, 결국 더순한화장품의 김 부장이 결정을 내렸다.
“어색한 모습이 오히려 오글거리면서도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잖아요? 그리고 연기보단 모델들 피부를 보고 구매할 테니, 그냥 최선으로 갑시다!”
프로덕션 측 스태프들은 클라이언트와 진은수 측이 듣지 못하도록 소곤거렸다.
“이 CF는 두고두고 저 여학생 모델의 흑역사로 박제될 거야….”
한편 그 시각,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오 팀장님.”
기획홍보팀의 강순철 팀장이 매니지먼트 B팀을 찾아와 사과패드를 내밀었다.
“혹시 이 글 본 적 있어요? 사람들이 이거 우성이 얘기 아니냐고 떠드는데….”
“무슨 글이요?”
오동식 팀장은 의아한 얼굴로 사과패드를 받았다. 강 팀장이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레 말했다.
“제주 출신 남돌 중에 어릴 때 학폭 피해자였던 사람이 있다고요.”
“…….”
게시글을 훑은 오 팀장의 얼굴이 굳었다. 강 팀장이 한 부분을 가리켰다.
“글을 읽어보니까 여기에 나오는 누나 친구가 아무래도 미랑이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적잖이 달린 댓글란에선 이미 이야기의 주인공이 길우성이라고 결론이 난 상태였다. 그리 많지 않은 제주 출신 아이돌 중에서, 누나 친구 역시 아이돌이라는 단서나, 부모님이 식당을 하는 것까지 딱 들어맞는 건 현재 어스래빗의 길우성 뿐이라며.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여서 아직 이슈는 덜 된 것 같은데, SNS에 언급되는 시간 간격을 살펴보니 이대로 가다간 어느 순간 크게 터질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게 만약 사실이면… 회사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생각도 해야 하고.”
오 팀장은 그에게 사과패드를 돌려주었다.
“언론사에서 연락 오면 일단 피해자, 그것도 미성년자의 아픈 상처를 들추는 일이니 기사 작성은 자제해달라고 해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게시글 작성자에게 따로 연락가능한가요?”
“일단 쪽지는 보내놨어요.”
“네, 연락 오면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네. …아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강 팀장이 다시 오 팀장을 바라보았다.
“어스래빗 팬들에게서 어스래빗 팀 반지, 굿즈로 제작할 계획 없냐는 문의가 굉장히 많이 들어오는데, 어떡할까요? MD제작팀에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고.”
오 팀장은 고개를 돌렸다. MD제작팀장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오 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팀장은 그녀에게도 들릴 정도로 성량을 높여 대답했다.
“애들한테 물어보고 말씀드릴게요.”
“넵!”
오 팀장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 24분. 길우성의 학교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3시간 남짓 남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의자에 앉은 채 바퀴를 굴려 A팀으로 갔다. 드륵.
“유 팀장님, 미랑이 오늘 스케줄 오프죠? 어디랍니까?”
유 팀장은 검지를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3층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