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427)

* * *

클라이언트 측의 아량으로 적당한 타협점을 찾은 CF촬영은 오후 5시가 되었을 무렵 끝났다.

“CF촬영 현장을 가까이에서, 그것도 제삼자의 눈으로 생생히 지켜본 건 정말 좋은 경험이었는데.”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 이건우가 피곤한 눈을 손등으로 살며시 누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엔 저래서 어떻게 이 험난한 연예계 활동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다 되더라.”

“음, 그 애한텐 조금 미안한 감상인데.”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난 정말 그렇게까지 연기 못하는 사람 생전 처음 봤어. 아림에서도 분명 연기레슨을 단단히 시키고 내보냈을 텐데.”

“그러게. 돌아가서 사람들한테 혼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아, 내일은 스튜디오에서 화보 촬영한댔지?”

“네.”

이건우가 한율의 어깨를 툭툭 감싸듯 두드렸다.

“수고해라.”

“내일은 안 따라오려고요?”

이건우가 생글생글 웃었다.

“음, 화보촬영이잖아. CF영상이 아니라.”

박가람도 한율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수고해, 모델님! 나도 내일은 내 본업에 충실해서 노래연습이나 해야겠다!”

둘 다 거듭되는 NG와 재촬영을 지켜보느라 퍽 질린 모양이었다.

“아, 이프림한테 커피차 서포트 고마웠다는 SNS 올려야지!”

“네.”

한율은 핸드폰으로 SNS에 들어갔다.

“……?”

“…이게 무슨 소리야?”

촬영장에서 핸드폰을 카메라 용도로만 사용했던 이건우와 박가람도, SNS에 오늘 찍은 사진을 올리러 들어갔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우성이한테 뭔 일 있나?”

“그러게? 왜 갑자기 잘 위로해주고 다독여달라는 말이 달렸지? 이프림들 왜 울어? 가해자는 또 뭔 말이야?”

며칠 전에 올렸던 게시글에 의아한 내용을 담은 댓글들이 새로이 달려있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한율은 곧바로 길우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으로 설정된 크리스탈 래빗의 발랄한 노래가 흘러나오다 뚝 끊겼다.

-[써한! 올 때 메로나!]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들리는 활기찬 목소리.

한율과 이건우, 박가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멀쩡한데?

우웅. 이건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크게 뜬 이름은 [유 리더].

“어, 형. …어? 알았어.”

짧은 통화를 끝낸 이건우가 한율과 박가람에게 말했다.

“호 형인데, 도착하면 곧바로 연습실로 오래.”

“무슨 일이지? 형은 들은 거 있어요?”

박가람이 소리 높여 운전 중인 조유찬에게 물었다. 조유찬이 룸미러로 그들과 시선을 짧게 마주쳤다.

“아니? 왜? 뭔 일 있대?”

“나도 몰라서 물어본 건뎅.”

잠시 후 회사에 도착. 세 사람은 회사 앞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종류 별로 사고 들어갔다.

어스래빗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B연습실엔 멤버가 모두 모여 있었다. 바닥에 각자의 방석을 원형으로 깔고 앉아서. 여기에 오동식 팀장까지.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뭐야, 대체 무슨 일인데요.”

부스럭. 박가람이 황급히 냉장고에다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투를 처박았다. 라이언과 강보배도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는지 어리둥절해보였지만, 유호와 차남석의 낯빛은 어두웠다.

길우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들었다.

“수고들 하셨습니당.”

“방석은 너희들 것도 깔아놨으니 편히 앉아. 우성아, 정말 괜찮겠어?”

오 팀장의 물음에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넵.”

“그럼 조용히 얘기들 나눠요. 울지만 말고.”

오 팀장이 퇴장했다.

삐빅. 문이 자동으로 잠기고, 연습실에는 어스래빗 멤버들만 남았다.

“엣헴.”

길우성이 헛기침을 하더니 멤버들을 그윽한 시선으로 돌아보며 사극 톤으로 운을 뗐다.

“괜히 나 때문에 다들 맛있는 저녁도 못 먹고 이리 급히 모이게 되어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소. 그리고 내 언젠가 나의 슬픈 과거를 털어놓아야 하는 날이 오리라 예에전부터 각오하긴 했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오니 어떻게 서사를 풀어야 좋을지 정말 많은 고민도 들고 그런데, 그럼에도 일이 닥쳤으니 어쩔 수 없구려. 간단히 말하자면, 나의 아픈 과거가 이슈가 될 듯하여 이렇게 동고동락하는 멤버 여러분들을 한자리에 모시긴 했는데 이것 참… 대뜸 말하자니 현재 나의 한없이 밝고 쾌활한 이미지만 알고 있는 그대들에게 충격을 줄까 저어되고, 또 배도 고파 말할 기력도 딸리니….”

두서없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길우성의 이야기 요지는 이거였다.

초등학생 시절 내내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다.

중학생 시절은 고독한 늑대처럼 내가 모두를 따돌렸다.

그 과거를 아는 자가 괴롭힘 가해자들의 뻔뻔한 최근 행태에 대해 고발하는 게시글을 올렸다.

나와 회사의 요청으로 원문은 삭제되었으나, 누군가 캡처본을 여기저기 뿌리는 바람에 이슈로 번질 조짐이 보인다.

“원문엔 피해자가 누군지 정확히 명시되어있지 않았으나, 네티즌수사대가 몇 개의 단서만으로 정답을 콕 맞히는 바람에 말이오, 이것 참 당혹스럽게 되었소이다.”

“…….”

피해 당사자 본인의 감정이입을 철저히 파괴하는 어투와 넉살에, 멤버들도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당혹스런 얼굴이 되었다.

진중한 모습이 1분을 못 가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박가람이었다.

“가자.”

“어디를?”

“그 쌍것들 조지러.”

박가람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뚝뚝 꺾었다.

“먼저 비행기 티켓부터 끊고…, 씨발 내 이것들을 당장!”

조용히 말하던 박가람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쿵쾅! —덥석! 욱하여 뛰쳐나가려는 박가람을 이건우가 잡았다.

“워워!”

“이 개같은 새끼들이, 뭐?! 피해자 집엘 찾아와서 뭘 어쨌다고?! 와-나, 이런 핵폐기물만도 못한…!”

굉장히 화가 나 욕설을 내뱉는 박가람에게선, 장난을 곧잘 치며 웃던 평소의 가벼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람아, 진정하자. 가람아?”

한율은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길우성이 과거에 대인관계로 문제가 있었다는 건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 미랑과의 인연에 대해 설명할 때 지나가듯 언급하기도 했었고.

『애들한테 괴롭힘 당하고 찌질하게 울고 있던 날, 네가 찌질하게 찌그러지는 게 저것들이 원하는 것이다, 저 못돼 처먹은 것들이 원하는 대로 할 거냐면서 정신 차리라고 사랑의 매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준 동네 누나, 은인 중의 은인.』

그러나 상세한 내막을 알게 되자 솔직히 조금 놀랐다.

일시적인 괴롭힘이 아닌, 장기간 지속된 괴롭힘과 따돌림을 견디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겪은 일이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말이다.

‘뻔뻔함만큼이나 보통 멘탈이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니, 단순히 멘탈이 강한 건 아닌가.’

길우성은 진지한 모습을 내비치는 걸 스스로 못 견뎌한다. 이건 어릴 적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처로 인한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옆에서 차남석이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는 캡쳐본엔 [뭘 해도 툭하면 비웃고, 무시하고, 쌍욕하고, 시비 걸고, 흉보고]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다시 또 누군가, 어쩌면 친구, 친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자신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비웃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나도 솔직히, 하….”

강보배가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애들한테 멍청하다고 놀림 받고 따돌림 당한 적 있었거든. 정말 잠깐 동안이긴 했어도 나도 그때 다시 생각하면 울컥하고 그런데…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라니…. 대체 어떻게 견뎠어? 많이 힘들었을 거 아냐.”

“그럴 때마다.”

길우성이 입가를 올린 채 아련한 시선을 저 멀리 던졌다.

“춤을 추며 마음을 달랬지요.”

“…….”

“아아, 이렇게 나의 뛰어난 춤 실력의 연유가 밝혀지….”

“이런 말하긴 좀 그런데.”

씩씩거리는 박가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자리에 앉힌 이건우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정말 피해자한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건 참 편협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삼킨 뒷말이 무슨 내용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성.”

라이언이 길우성의 팔을 잡으며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멘탈 선생님 소개해줄까?”

“어….”

라이언뿐만이 아니라, 한율을 제외한 멤버들 모두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시선으로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길우성이 거짓웃음범벅이던 가면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게 싫었습니다….”

내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던 유호가 길우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잘못 아니니까 때문이란 말 쓰지 마.”

“넵….”

“기죽지도 말고.”

“…흐.”

“이프림이.”

사과패드로 SNS와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을 살피며 차남석이 말했다.

“우리 SNS에다 단 댓글들을 보면 분명 이 바닥 커뮤에도 파다하게 퍼졌을 거야. 그럼 기사로 뜨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니…, 길우성.”

“넹?”

“너 그 새끼들 용서 안 했지? 앞으로도 그럴 거고.”

“어….”

“아니면.”

탁. 길우성이 대답을 망설이면서 눈치를 살피자 차남석이 가운데에다가 사과패드를 내려놓았다. 다시 해당 캡처본을 큼직막하게 띄워서.

“네가 잘 될 것 같고, 본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대놓고 뭐라 하지 않을 거란 이 개소리대로 해줄 거야?”

차남석의 어조는 길우성의 의사를 확인하기보다는, 당연히 용서하지 않아야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남석아. 화나는 건 충분히 이해하는데, 그렇게 몰아붙이듯 말하진 말자.”

“아니요, 형. 길우성이 피해자이긴 하지만, 지금은 우리 팀 멤버잖아요. 그래서 우리끼리 먼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을지 의논하라고 이렇게 모인 거고.”

유호를 향했던 차남석의 시선이 다시 길우성을 향했다.

“그리고 난 절대 네가 이 새끼들을 용서한다는 사소한 신호조차 줘선 안 된다고 생각해. 물론 ‘이놈들에게 천벌이 떨어지길 기다립니다!’라고 말하라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이미지? 집단 괴롭힘 가해자새끼들을 용서하는 이미지 따위 가져서 뭐할 건데. 아니, 그 전에. 피해자가 이미지를 챙겨야 한다는 것도 웃기지 않아? 네가 뭘 잘못했다고?”

“…….”

길우성의 얼굴에 그나마 미약하게 남았던 웃음기도 사라졌다.

한율은 깊은 생각에 잠긴 길우성을 흘끗하곤 차남석의 사과패드를 집었다. 게시글 댓글엔 길우성이 다녔던 초등학교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이거 ㄱㅇㅅ 얘기 맞음. 제주도 ㄷㅈ초등학교 여기 다녔던 아는 애가 한 학년 아래에 이런 일 있었다고 말해줌ㅇㅇ 당한 애 누나있었고, 그 누나 친구가 ㅋㄹㅅㅌㄹㅂ의 ㅁㄹ이라고.

이미 이 이슈를 모른 척 무시하고 덮기엔 한참 늦었다. 그러니 그들이 생각해야 할 건, 내놓을 입장의 구체적인 방향.

“확실한 건.”

멤버들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팬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이 가해자들의 신상을 추적하고 악플을 다는 등의 무차별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하긴, 이 글을 처음에 쓴 사람처럼 옆에서 본 사람도 한 둘이 아닐 테니.”

“솔직히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잖아. 고작 6년? 5년?”

“2년이지. 중학생 때도 혼자 다녔다고 했으니.”

“어쩌면 벌써 그쪽 동네에선 가해자들 실명이 거론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엉뚱한 사람에게 화살이 날아갈 수도 있지. 그리고… 가해자들도 아직 미성년자잖아. 그러니 자칫하면 오히려 피해자인 우성이를 비난하는 사람도 나올 거야. 이런 식으로 복수하냐, 너무 과한 거 아니냐면서.”

“심하면, 피해자가 벼슬이냐라는 말까지 나올 수도 있지.”

“으으…,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난 절대 용서 못 한다! 라고 외치면, 어? 사람들이 걔네 찾아가서 악플달고 모욕하는 거 간접적으로 부추기는 거냐고 지랄할 거고! 그렇다고 용서한다 그러는 건 우성이한텐 또 다른 강요고 폭력이잖아!”

“워워, 가람 씨, 워워.”

“사실…, 나.”

길우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게시글 알고 있었어.”

“무슨 소리야?”

길우성은 미간을 구기고 눈썹 끝을 내린, 여기에 입가는 올린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번 주에 어떤 팬이 알려줘서 봤거든. 그런데 그냥 모른 척 했어.”

“…….”

“분명히 가만히 두면 언제고 이렇게 이슈로 번질 거란 거 충분히 짐작했는데…, 음.”

길우성이 멋쩍게 웃었다.

“남석이 형 말처럼 ‘알려져서 혼 좀 나봐라!’ 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었거든.”

“우성아….”

한 번의 머뭇거림. 그리고 큰 심호흡.

“…후우.”

길우성이 또렷한 시선으로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난 한 번도 그 애들과 ‘용서’란 단어를 같이 떠올려 본 적 없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솔직히 내가 당한 것의 두 배, 그 이상의 고통을 받았으면 좋겠거든.”

“…….”

“하지만 난 지금 어스래빗의 일원이잖아. 그러니 나는 내 일로 인해서 팀이 피해를 안 입었으면 좋겠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싶어.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고, 미래니까. …아흐윽, 간만에 진지한 말 하려니 손발이!”

한율은 눈썹을 찡그렸다.

진중한 모습이 1분을 못 가네.

그리고 또 다른 감상.

이들 중 아무도, 왜 길우성이 괴롭힘과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하긴, 초등학생이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할 만한 이유가 뭐가 있겠냐마는.’

“그러면.”

유호가 멤버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자.”

그날 밤 9시.

어스래빗 팬카페와 각종 SNS, 커뮤니티에서 한창 어스래빗 팬들이 과거 학폭을 당한 아이돌이 있고, 피해자가 길우성으로 추정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노할 때 즈음이었다.

어스래빗 공식 SNS와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공홈에 공지가 올라왔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게시글 관련하여 말씀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WB래빗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최근 여러 커뮤니티와 카페에 빠른 속도로 퍼져 언급되는 민감한 이슈에 대해 공식입장을 드립니다.

당사는 해당 게시글에서 피해자로 거론되는 인물이 소속 아티스트가 아니냐는 문의를 받고 본인에게 확인을 요청, 일부 사실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아티스트가 당시 일에 대한 언급을 힘들어하여, 당사는 게시글이 올라온 각종 커뮤니티와 카페에 게시글 삭제를 요청하고 있으며, 팬 분들께도 해당 일과 관련된 언급을 자제해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또한 게시글에서 가해자로 언급되는 이들의 신상은 모두 허위이며, 아직 어린 미성년자들이므로 과도한 신상추적과 비난 또한 자제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부디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소속 아티스트에 대한 악의적인 허위사실 유포 및 악플엔 강경하게 법적 대응할 예정이오니…(중략).]

-언급하기도 힘들다면... 결국 사실이란 소리네...?

-ㅁ1친...와... 욕나와...ㅠㅠ..... 울톢이들 계정에다가 욕쓰면 안 되는데.. 우성아...ㅜㅜ...

-그런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우리 앞에선 그렇게 해맑게 웃고.. 아니.. 아 나 정말 눈물나오는데...

-나도 당해봐서 아는데 정말 평생 가는 기억임... 자다가도 그때 생각만 나면 아직도 겁도 나고 눈물 나는데 그런데... 그걸 어떻게 견뎠어 우성아...ㅜㅜ...

드륵.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실히 알려주지 않는 ‘일부’란 단어 선택, 그러나 허위사실 유포엔 법적대응….”

인터넷 언론사 앗싸일보의 연예부 사무실.

김 기자는 마우스 휠을 내리며 WB래빗의 공식입장과 댓글을 두루 훑으며 중얼거렸다.

“가해자들을 공격해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지 말아달란 소리는 하지만, 과거를 묻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은 일절 없고….”

김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챙겼네.”

“…뭘 챙겨요?”

옆에서 다 죽어가던 면상의 후배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바로 오늘, 모 연예인에 대해 허위사실유포 명훼 혐의로 경찰서 출석통지를 받은 후배였다.

“더 큰 이슈로 번지기 전에 가해자들을 찾아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못 박았으니, 추후 가해자들에게 벌어질 몇몇 네티즌들의 공격은 남의 일인거지. 그리고 위에 아티스트가 언급을 힘들어한다, 이 문장은 동정심 유발 문구고.”

“으음…, 과거 학폭 가해자로 밝혀져 퇴출된 아이돌은 많이 봤어도, 학폭 피해자였던 사람이 방긋방긋 웃는 아이돌이 되었다는 건 그 자체로 여러 메시지를 주니까요. 응원도 하고 싶어지고.”

“기특하고 대견하잖아. …그나저나.”

김 기자는 동시에 띄웠던 여러 창을 하나씩 내렸다. 그중에는 어스래빗의 길우성이 가장 잘 나온 재킷 사진도 있었다.

이윽고 화면엔 두 남녀가 찍힌 사진만 남았다.

김 기자가 펜 끝으로 모니터를 툭툭 가리켰다.

“이건 아직 좀 약하겠지?”

사진에는 보이그룹 블랙블러드의 민준과 배우 이희우가 찍혀 있었다. 함께 찍힌 장소는 동물병원. 그것도 환한 대낮에 동물병원에서 만나 새끼 고양이의 진료만 보곤 병원 앞에서 헤어진 터라, 연인들의 밀회로 보기엔 많이 이상했다. 민준이 이희우의 차에다 고양이 용품을 대신 실어주는 장면이 찍히긴 했지만 말이다.

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순히 아는 누나동생사이 같네요.”

“찍을 때는 분명히 민준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는데…, 이희우는 아니었단 말이지.”

“뭐, 그래도 팩트 여부가 중요한가요. 까보면 팩트인지 아닌지 절로 밝혀질 텐데. 지금까지 찍은 사진도 많잖아요.”

김 기자는 달력을 보았다.

2주 후, 블블의 싱글 앨범 발매가 잡혀 있었다.

“으음….”

“지난 번 고동 찾아갔을 때 만났던 팀장이 그랬잖아요. 아무래도 내년에 블블 재계약은 힘들 것 같다고. 그래서 그 지저분한 찌라시도 적극적으로 안 잡았던 거 아니에요? 고하시죠. 요즘 광고문의 떨어졌다고 위에서 지랄하던데.”

“그럴까?”

김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으로 고동 엔터 대표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요즘 이 바닥이 좀 조용하긴 했지?”

괜히 촬영시간 늘려서 뭐해

자정이 넘은 시각.

길우성은 유호의 말대로 자기 전, 팬에게 선물 받은 토끼인형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윙크하는 인형처럼 드러난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거린 얼굴이었다.

[싸랑하는 이프림! 나의 윙크를 받아랏!!! #굳나잇 #내일도홧팅 #아국어숙제깜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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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란에는 팬들이 여러 가지 말 대신 하트를 잔뜩 올렸다. 팬카페에서 팬들 간에 아픈 과거를 상기시키는 말은 자제하자는 논의가 오갔다더니, 하트로 통일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가끔 눈치 없이 장문의 조언이나 응원글을 쓴 사람도 있었지만, 길우성은 SNS에 달리는 팬들의 댓글을 보면서 실실 웃었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서도 길우성과 관련된 기사는 여전히 하나도 없었다. 이는 WB래빗이 연예기자들에게 해당 이슈와 관련된 기사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한 덕분이었다. 대신 나중에 좋은 기사거리를 던져주어야겠으나, 이 또한 회사가 알아서 할 일.

한율은 오늘도 평화로운 연예뉴스란을 살피다가 핸드폰을 엎어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오늘따라 유달리 길게 느껴진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더순한화장품 광고 화보촬영이 진행될 스튜디오.

“안녕하십니까, 진은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은수는 어제보다 훨씬 씩씩한 모습으로 나타나 큰소리로 인사했다. 촬영에 임하는 모습 또한 어제보다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동작이 다 뻣뻣하고 표정도 어색하고…, 은수 씨는 잠깐 쉬고! 한율 씨 단독촬영부터 갈게요!”

오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어제 CF를 촬영한 프로덕션이 아닌, 이곳 화보촬영전문 스튜디오 사람들이었다. 더순한 측에서도 김 부장의 부하직원 한 명만 나와 멀찍이서 구경했다.

스튜디오 스태프들이 신랄하게 진은수를 깠다.

“애가 지 얼굴을 활용 전혀 못하네. 본판만 예쁘면 뭐해, 표정연기연습 안하나?”

“쟤 신인이죠? 데뷔 안 했지, 아직?”

“뭐로 뽑힌 거야? 기본적인 카메라테스트도 안하고 뽑았나?”

“어제 CF찍을 때도 저렇게 엉망이었나? 난감하네….”

진은수의 귀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으나, 그들 근처에 있던 아림 엔터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아림 엔터가 3대 기획사라곤 해도 이 업계의 모두가 떠받들어주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평소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국내 모델과 탑배우들의 화보를 찍는 콧대 높은 곳임에야.

“…….”

조유찬은 가만히만 있어도 반은 간다는 말을 떠올리며, 얌전히 입을 일자로 다문 채 한율의 촬영을 보았다. 한율의 광고 화보촬영 영상을 찍기 위해 동행한 기획홍보팀 직원도 묵묵히 카메라 속 한율만 쳐다보았다.

“한율 씨 고개 왼쪽 사선으로 20도 정도 들어볼까? 옳지.”

차칵차칵차칵차칵.

“천생 연예인 페이스네. 이번엔 너무 깊겐 말고 사색에 살짝 잠긴 눈빛, …오옳지, 예쁘다! 이번엔 제품 들고 자연스럽게 한번 웃어볼까? 아이구, 잘한다!”

차칵차칵차칵차칵.

진은수를 찍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독의 호응. 스태프들도 한율의 촬영은 군말 없이 지켜보며 서포트했다.

“이번엔 서비스 컷 가볼까? 꽃토끼~.”

…생긋.

한율은 오래간만에 받은 꽃토끼 요청에 0.5초 정도 멈칫했다가, 두 손을 토끼 귀처럼 머리 위로 올리곤 미소 지었다.

차칵차칵!

스태프들의 점심시간 겸 모델들의 휴식시간.

감독 및 스태프들이 클라이언트 측에서 마련한 화려한 한식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 동안, 한율은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랬다.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은 진은수는 풀만 가득한 샐러드를 염소처럼 우물거렸다. 모두 사진에 조금이라도 부하게 찍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WB래빗의 기획홍보팀 직원이 카메라를 들고 다가왔다.

“한율아, 짧게 멘트 따자.”

“네.”

조유찬이 큐 사인을 내렸다. 한율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어스래빗의 한율입니다. 오늘은 더순한화장품의 광고! 화보촬영을 하러 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랑 같은 10대 분들의 기초화장품 광고라 메이크업은 거의 안했는데….”

한율은 카메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떨어졌다.

“꼭 민낯 같아서 조금 민망하네요.”

와…. 이쪽을 쳐다보는 진은수의 감탄이 작게 들렸다.

“그나저나 사진에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찍히고 싶어 점심 대신 커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배가 너무 고프네요. 그래도 열심히 일을 하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만큼 더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겠죠? 그럼 나머지 촬영도, 홧팅하겠습니다.”

생글생글 웃음과 함께 작게 손을 흔들며 마무리.

“OK, 잘했어. 그럼 편히 쉬고 있어.”

직원이 카메라를 끄고 조유찬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졌다. 그러자 한율의 촬영을 경이롭게 쳐다보던 진은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기요, 선배님….”

“네?”

“하나 질문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점심을 먹는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를 재빨리 살핀 진은수가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카메라랑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에서 긴장하지 않는 비결 같은 게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음….”

한율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솔직히 말해주었다.

“한 번에 잘하자, 라는 생각을 합니다.”

“…네?”

갸웃. 진은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한 번에 잘할 수 없어서 묻는 건데, 라는 표정.

한율은 웃으면서 부언했다.

“괜히 촬영시간 늘려서 뭐해요. 추가근무수당이 주어지는 일도 아닌데.”

그제야 진은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반응을 보였다.

“……!”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 * *

광고 화보촬영을 별일 없이 마친 다음 날.

쉬는 시간을 이용해 교사들에게 받은 과제를 빠르게 해치우던 중. 길우성이 한율의 옆자리에 슥 다가와 앉더니 핸드폰을 내밀었다.

“네 기사 떴당.”

핸드폰엔 ‘한율 광고’로 검색해서 나온 기사 몇 개가 떠있었다.

[어스래빗 한율, 더순한화장품 광고 스틸컷 공개!]

[한율, 무결점피부 자랑하며 광고촬영]

[아림 엔터 진은수, 한율과 함께 꿀피부 자랑]

길우성이 그 중 하나를 누르자 바로 어제 촬영했던 화보 사진이 크게 떴다. 내용은 더순한화장품 광고 모델이 된 어스래빗의 한율 어쩌고저쩌고.

크게 이슈가 될 법한 기사는 아니라 그런지 댓글은 소소했다.

-(설명)고운 피부의 비결은 유전과 노치킨이라던 친구의 기초화장품 광고이다.

-같이 찍힌 여자애 누구???

ㄴ난독이냐. 다 써져 있잖아. 아림 엔터 연습생이자 히아신스 호수 동생ㅇㅇ

-피부 진짜 좋긴 하다... 완전 부럽..ㅠㅠ

-서한율 가까이에서 실제로 본 적 있는데.. 와.. 나 길거리에서 가게 거울에 비친 내 얼굴보고 거울 박살낼 뻔함ㅋ

-여자애 예쁘네

-어스래빗 단체광고는 안 찍나요..ㅠㅠ..... 브랜드 팬미팅이나 미니콘서트나... 흑... 애들 얼굴 박힌 제품 나오면 막 사줄 자신 있는데..8ㅅ8

“이거 광고는 언제 나와?”

“이르면 다음 달.”

“행사도 해? 왜, 올리브땡 가면 연예인 사진 붙은 제품 같은 거 있잖아. 얼마 이상 사면 굿즈도 주고. 많이 비쌀라나?”

“구체적인 이벤트 내용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가격은 지금이랑 별 차이 없을 걸? 그런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

길우성이 웃으면서 복도 쪽을 가리켰다.

“네 팬인 후배들이 물어봐 달래서.”

복도로 난 창을 보자, 그곳에 서있던 두 명의 여학생이 아주 날랜 동작으로 몸을 낮추며 숨었다.

“그럼 이 멋진 전달자님은 답변을 전해주러 가네.”

길우성이 몸짓에 리듬을 실어 총총 교실을 나갔다. 황성연이 다가와 한율에게 조용히 물었다.

“쟤 나중에 학폭예방 홍보대사 되는 거 아니냐?”

피해자가 길우성으로 지목된 학폭 피해 아이돌 게시글은 WB래빗의 대처로 빠르게 하나 둘 사라졌지만, 이 학교엔 데뷔를 앞둔 연습생과 이미 데뷔한 이들이 많았다.

분명 쉬쉬거리며 소문이 퍼지는 기류와 시선이 길우성에게도 느껴졌을 터. 그러나 길우성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촐싹거렸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날 밤, 평소와 다름없이 레슨과 자율연습을 하고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온 어스래빗 멤버들은 TV부터 켰다. 이건우가 게스트로 나간 낚시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내내 라이언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연신 이건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낚시의 재미여부부터 시작해, 낚싯대를 비롯한 여러 용품에 대해서까지. 그러다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왜 다 비싸?”

“잘 찾아보면 저렴한 것도 많고, 배 낚시하는 곳엔 기본도구 대여해주는 곳도 많아. 나중에 시간나면 같이 가볼래?”

“응, 정산 받으면. 지금은 돈 없어.”

“…방금 그 말로 기약이 3년 뒤로 휙 미뤄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구나, 이언아.”

방송에선 이건우와 함께 출연한 다른 게스트가 2시간 만에 처음으로 생선을 낚곤 좋아하는 모습이 나왔다. 한율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낚시방송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

‘저게 그렇게 재밌나?’

그리고 바다에서 막 낚은 생선을 회 떠서 먹는 장면에선 미간을 구겼다.

풀썩. 바닥에 앉아서 보던 박가람이 쿠션을 가져와 베고 누웠다.

“그러고 보니 올해 여름은 바다 한번 못 가보고 끝났네….”

“그 대신 지난달에 오싹한 곳 갔다 왔잖아요.”

“차남석, 넌 거기 안 들어가 봐서 그런 말이 쉽게 나오는 거야. 다음에 일본가면 꼭 들어갔다 와.”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 팬들도 남석이 네가 무서워하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못 봤다고, 많이 아쉽다고 그랬었어.”

“거짓말하지 마요.”

“어, 미안.”

“호 형 잔다.”

길우성은 소파에 앉은 채 잠이 든 유호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찰칵.

“우리 다 들어가게 한 장 찍자. 본방 인증샷.”

“TV에 건우 형 나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찍는 건 어때?”

“이건우 편집 많이 됐을 거야. 그러니 괜한데 신경 쏟지 말고 그냥 찍자.”

“…야, 박가람이.”

찰칵, 찰칵.

길우성이 찍은 사진은 방송이 끝난 시간에 맞춰 어스래빗 공식 SNS에 올라갔다. 사진에는 소파에서 기절하듯 잠든 유호를 포함해 8명의 멤버가 모두 들어가 있었다. 마침 이건우가 나온 TV화면까지.

TV에 나온 큼지막한 자막이 시선을 끌었다.

[이게 육지토끼의 힘이다! 바다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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