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띠링.
“어? 애들 사진 올렸다.”
“봐봐.”
길미현의 아담한 원룸 자취방.
어스래빗 SNS에 새로 올라온 글을 확인한 길미현이 미랑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편히 침대에 널브러져있던 미랑이 핸드폰에 뜬 사진을 보곤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와…, 얘넨 이 와중에도 아무것도 안 먹네. 우린 밤중에 TV 같이 보면 꼭 먹을 것부터 챙기는데.”
“시간이 몇 신데.”
딸칵. 길미현이 작은 상 위에 놓인 캔맥주를 땄다.
“그러게.”
미랑이 키득거렸다.
“시간이 몇 신데 우리는 피맥을 하고 있을까? 친구야.”
“난 하루 종일 굶었으니까 먹어도 돼.”
“그러니까 굶지 말라고. 너 그러다 나중에 진짜 먹는 족족 살찌는 체질로 변한다? 알바를 때려치우고 운동을 해. 등록금은 내가 20년 상환으로 빌려준다니까?”
“그 얘긴 안 하기로 하지 않았니, 친구야? 친구끼린 돈 거래하는 거 아니야. 사람이란 게 아주 영악해서, 한번 호의를 받기 시작하면 욕심이랑 이기심만 자라나서 나중엔 엄청 뻔뻔해진다고.”
“칫…. 융통성 없는 길미현.”
”그것보다, 넌 정말 괜찮아?”
“뭐가?”
미랑이 몸을 뒹굴 굴렀다. 그러곤 길미현이 보는 앞에서 길미현의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구경했다. 순 고양이 사진뿐이었다.
“어떤 멍청한 애들이 너랑 우성이랑 사귄다고 헛소리하던데. 어릴 때 도와줬으니 첫사랑일 거다, 그래서 좋아하는 누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열심히 춤을 추고, 같은 회사까지 쫓아 들어가 어쩌고저쩌고. 아주 장황하게 소설을 써놨더라.”
“푸핫!”
미랑이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야, 그 소리 들으면 우성이가 더 학을 떼고 질색하지 않겠냐? 그리고 나도, 침착하고 차분하고 공과 사가 확실하고 주관이 뚜렷하고 믿음직한! 그런 연상이 취향이라고! 최소 세 살, 최대 다섯 살 연상! 그리고 같은 아이돌은 거절한다!”
“까다롭네. 그런데 우리 비슷한 나이 대에 그런 사람이 있긴 해? 입 다물고 조용하다고 다 침착하고 차분한 건 아니잖아.”
미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지…. 아, 내가 이 얘기 했던가? 가람이가 그러는데, 우성이 연습생 때 레슨이나 월평에서 어떤 애랑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져가지곤, 잘 쳐다보지도 못했었대.”
“허얼. 누구? 어떤 애? 지금은?”
“누군지는 확실히 말 안 해주더라.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도.”
“진전이 없었구만. 으휴, 겁보.”
“그리고 이제 막 데뷔했는데 연애하면 안 되지. 남돌은 최소 입대 전까진 혼자여야 팬들이 조금 봐줄까 말까하는데.”
“최소가 군대냐…. 그래도 다들 할 건 다 하지 않아?”
미랑은 엎드린 채 자신의 캔맥주를 들었다.
“그렇지?”
한 모금 홀짝.
“괜히 이 바닥이 동물의 왕국이라 불리는 게 아니긴 하지.”
금메달은 우리 거다
“아….”
길미현은 그제야 미랑까지 일반화시켰다는 걸 깨닫곤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미안.”
“미안할 게 뭐있어, 사실인데. 그래도 난 항상 언니들이랑 붙어 다녀서 괜찮아. 매니저 오빠들도 낌새가 이상한 놈들은 앞에서 다 쳐내거든. 하지만…, 으.”
“왜? 왜 그래?”
미랑은 맥주를 침대 아래로 내려놓으며 두 다리를 바동거렸다.
“몰라, 학교에서 이상한 놈들이 자꾸 껄떡거려. 완전 짜증나….”
“일반인? 동종업계?”
“둘 다. 아, 개강 안 했으면 좋겠다…. 그 놈들 면상보기 싫어…. 대놓고 싫은 티냈다간 또 욕하기 좋아하는 것들만 헛소리 싸지를 거 뻔하고….”
“네가 고생이 많다.”
길미현은 친구를 토닥거려주곤 맥주를 쭉 들이켰다. 미랑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길미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집적거리는 남자 없냐?”
“이 미모에 없겠냐?”
“크으. 아, 나 얼마 전에 음방 자판기 옆에서 꼭 붙어있는 커플 봤는데 완전 대박이었다?”
“왜?”
길미현은 예전에 미랑으로부터 아이돌들이 방송국, 특히나 음악 프로그램 대기실과 복도에서 짧게나마 데이트한다는 걸 들었던 터라, 새삼 ‘커플’이란 말엔 놀라지 않았다.
“누군지 딱 보기 전에, 애기야~ 하면서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낯익은 거야. 그래서 슬쩍 봤더니!”
둘 밖에 없는 집안이었지만, 미랑은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췄다.
“애기라고 불린 사람은 히아신스.”
“히익.”
굉장히 인기가 많은 걸그룹 이름이 나오자 길미현은 입을 벌리며 놀란 소리를 냈다.
“상대는?”
속닥속닥.
“블블.”
* * *
토요일 아침. 한율은 길우성과 함께 현장전의 차를 타고 경기도의 한 실내 양궁아카데미로 향했다. 원래는 아스대 예선이 있기 바로 전 주말에만 잠깐 배우기로 했으나, 좌기훈 대표가 그래선 되겠냐며 한 주 더 앞서 이틀 예약을 더 잡은 까닭이었다.
“히익…, 수강료가 이렇게 비싸?”
실내양궁장 입구엔 수강료가 상세히 적힌 배너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는 코치들 이력을 보자마자 바로 납득. 모두 국가대표 출신이었다.
“하긴… 장비도 비쌀 테니….”
그때 기다리고 있던 코치가 나왔다. 한율과 길우성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양궁장 안에는 온갖 양궁 용품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판매용도 있고, 레슨 대여용도 있고.
본래 세상에서 활을 배운 적이 있기는 하나, 현재 지구에서 사용하는 양궁 장비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한율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것들을 살폈다.
‘살상력은 어느 정도일까.’
“아스대 선수들이 사용할 건 여기, 올림픽에서도 선수들이 사용하는 리커브 보우인데 이것보단 훨씬 장력이 약한 게 지급될 거예요.”
“그럼 이게 실제 시합용 활이에요?”
“아뇨, 올림픽에서 쓰는 건 여기 스코프를 장착한….”
장비와 도구 설명, 안전수칙을 모두 숙지한 후엔 가볍게 스트레칭. 팔 보호대와 가슴 보호대를 착용한 후엔 기본자세를 배웠다.
“음? 처음 배우는 거 맞죠?”
한율의 자세를 교정해주던 코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한율은 태연히 웃었다.
“어릴 때 한 영화에서 주인공이 활 쏘는 장면을 감명 깊게 봤었거든요. 그때 얼추 따라하면서 놀았었어요.”
“센스가 상당히 좋네. 각이 나오는데? 이 친구도… 음, 금방 익히겠네요. 춤추는 친구들이라 그런지 근육도 뻣뻣하지 않고.”
“히힛, 감사합니다.”
고무줄을 이용한 자세와 동작연습 후엔 실제로 리커브 보우를 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 코치가 교정해주는 대로 활을 장전하고, 시위를 당기며 아주 가까운 5미터 너머의 과녁을 노려보았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릴리스.”
퍽. 당겼던 시위를 놓자마자 들리는 타격감.
“오.”
지켜보던 현장전이 감탄을 흘렸다.
“둘 다 10점.”
그러나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본래 세상에서 만졌던 활과는 여러 요소가 다른데다가, 너무 오래간만이라 감이 떨어졌다. 굉장히 가까웠는데도 정중앙을 못 맞추다니.
그렇게 열 발의 화살을 모두 날린 후엔 과녁에 박힌 화살을 직접 뺐다. 그 다음은 10미터 과녁 사로로 이동.
길우성이 긴장한 목소리로 냈다.
“갑자기 확 멀어졌는데….”
“…….”
“스탠스.”
자세를 잡고 섰다. 코치가 조용히 지시했다.
“노킹, 후킹, 셋업, 드로잉. 손 턱 밑에 붙이면서 앵커, 풀 드로우… 자세 좋아요.”
다시 활을 장전하고 들어,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릴리스.”
퍽.
“…팔로 스로우.”
2, 3초간 자세를 유지하다가 조용히 활을 내렸다.
“와….”
동시에 과녁을 향해 활을 쏘았던 길우성을 비롯해, 코치와 현장전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현장전은 급히 핸드폰을 들고 동영상 녹화 버튼을 눌렀다.
“…흠.”
한율은 과녁 정중앙에 꽂힌 화살을 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감이 돌아오는 듯했다.
한율과 길우성은 다시 화살을 장전하고, 아홉 번을 더 반복했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코치가 흥분한 얼굴로 다가와 제안했다. 이곳에서 쏠 수 있는 최대 거리인 20미터 한번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잠시 후,
“자네 혹시.”
코치가 한율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양궁 진지하게 배워볼 생각 없나?”
한율이 쏜 화살은 모두 10점 정중앙과 그 근처에 빽빽이 꽂혀 있었다.
길우성과 현장전은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했다.
“예쓰! 양궁 금메달은 우리 거다!”
양궁을 본격적으로 배워보라는 코치들의 회유를 받으며 다음 날도 한율과 길우성은 양궁을 연습했다. 길우성도 평소 까불대는 행동거지와 달리 무언가에 한번 집중하면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력이 좋아, 입을 다물고 활을 잡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명중률도 조금씩 올라갔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 돌아온 월요일.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
“어.”
“괜찮은 배우 분들 만나면 친분도 좀 쌓고.”
“네.”
평소라면 학교에서 숙소로 오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회사로 갔겠으나, 한율은 길우성과 차남석만 보내곤 숙소 욕실에서 가볍게 씻었다.
“옷은 편한 거 아무거나 입어도 되죠?”
옷을 입기 전 조유찬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아니아니아니, 20분 후에 스타일리스트 갈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종방연 장소 앞에 팬들이랑 기자들이 진치고 사진 찍거든.]
“네.”
한율은 통화를 끊곤 일단 편한 옷을 입었다.
위이잉. …삐릭. 젖은 머리칼을 드라이어기로 말리는데, 드라이어기 소음 사이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시야로 강보배가 불쑥 들어왔다.
“오늘 스케줄 있어?”
한율은 드라이어기 전원을 껐다.
“스케줄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지난번에 촬영한 드라마 종방연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와서요.”
“아, 객귀?”
“네.”
“와, 그러면 객귀 에피 주인공들 다 만나는 거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은 나오지 않을까 해요.”
“그럼.”
강보배가 설레는 얼굴로 핸드폰으로 뭔가를 검색했다.
“이 분도 나오실까?”
강보배가 핸드폰에 띄워 보여준 사진은 <객귀> 에피소드 2화에 나온 배우였다.
종방연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은 후 <객귀> 에피소드와 주연배우들에 대해 모두 검색했던 터라, 한율은 금세 그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현미나, 27세. 어릴 때 출연한 사극에서 훌륭한 연기를 선보여 천재 아역배우라고 극찬 받았으나, 11살 즈음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럽다며 외국으로 떠났다. 그러다 3년 전에 돌아와 한 독립영화에 출연하며 다시 배우로 활동 중.
“글쎄요, 가봐야 알 것 같은데. 팬이에요?”
강보배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응! 이 분 어릴 때 나온 사극 세 번 이상 정주행하면서 보고 또 봤을 정도로. 그리고 이 분 열 살 때였나? 그때 찍었던 공포영화도 진짜…! 아, 혹시 만나면 사인 받아줄 수 있어? 힘들까? 혼날까?”
“혼나진 않겠지만, 노력은 해볼게요.”
“진짜? 받아와주면 내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네.”
강보배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제야 메고 있던 가방을 벗었다.
잠시 후, 한율은 조유찬의 차를 타고 <객귀> 종방연이 열릴 여의도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가면 혼자 차에서 내릴 거야. 사람들한테 인사하고, 요청받는 표정연기나 포즈 서너 번? 그 정도만 취해준 후에 들어가. 자리는 안에서 알아서 정해줄 테니까 앉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한테 예의바르게….”
가는 내내 조유찬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잔소리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도착한 식당 앞. 입구로 들어가는 길 양쪽엔 벨트차단봉이 둘러져 있었다. 그 안에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들고 모인 사람들이 한율이 탄 새카만 밴의 등장에 술렁거렸다.
“생각보다 많이 오셨네요.”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객귀>에 은근히 골수팬이 많은 연극배우 분들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리고 너도 있잖아. 자, 내려. 인사 예쁘게 하고.”
“네.”
“…한율아악!”
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리는 누군가의 부름. 한율은 소리가 들린 그쪽을 포함해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차칵차칵차칵. 셔터소리가 우레처럼 시끄럽게 고막을 때렸다. 그 소음을 뚫고 기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크게 외쳤다.
“진해가 엄마한테 떼쓰는 표정 지어주세요!”
한율은 한번 씩 웃고는 곧바로 ‘윤진해’가 되어 엄마에게 떼쓰는 표정연기를 보여주었다. 꺄악! 이프림으로 추정되는 몇몇 소녀들의 즐거운 비명이 중첩되어 들렸다.
그렇게 요청받은 포즈나 표정을 몇 번 취한 후에야 여기저기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종방연 시작은 6시. 아직 20분가량 남았으나 굉장히 넓은 식당 안은 배우와 방송국 스태프들로 가득 찼다. 배우를 따라온 매니저들을 위한 자리도 한쪽에 마련되었다.
먼저 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돌아다닌 한율은 이후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도 꼬박꼬박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종방연엔 이윤영도 참석했다. 그녀는 지난 번 <목톡톡> 녹화 때 봤을 때보다 조금 야윈 것 같았지만, 형식적으로 안부를 물었다.
“네, 저는 잘 지냈어요. 한율 씨는요? 지난번에 소리구름 콘서트에 나와 공연하시는 거 봤는데…, 그때 비가 왔잖아요….”
“좀 미끄러웠지만 넘어지지 않고 버텼습니다. 감기에도 안 걸렸고요.”
“다행이네요.”
“이윤영 님 자리 안내해드릴게요.”
<객귀, 해>를 촬영할 땐 한 번도 본 적 없던 앳된 나이의 스태프가 끼어들었다. 아마도 그 이후 고용된 아르바이트생이거나 계약직인 모양. 한율과 이윤영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마무리했다.
오후 6시 정각. 임미숙PD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피커마이크를 잡았다.
“드디어 어제, 지상파 방송사 통틀어 간만에 선보인 납량특집 드라마, <객귀> 시리즈의 마지막화가 방영되었습니다.”
그녀는 <객귀> 시리즈에 출연했던 모든 주연배우의 이름을 부르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기획 단계부터 시작해 촬영 중 겪었던 일들, 그에 대한 감상과 종영 소감도 줄줄이 읊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객귀> 시리즈 중에서 자체 최고시청률 1, 2위를 찍은 두 분에게 치하의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현미나 님, 서한율 님.”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도 현미나가 일어났다.
“박수.”
짝짝짝! 한율은 겸손하게 보이도록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방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현미나도 비슷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임PD가 두 사람에게 장난스런 어조로 물었다.
“두 분, 다음 열연도 우리 SBC에서 보여주실 거죠?”
현미나가 임PD를 향해 소리 높여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예약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꾸벅. 하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한율도 따라 임PD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PD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임PD는 충격 받은 표정을 과장되게 짓다가 이마에 손을 얹고 비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두 손을 위로 뻗으며 외쳤다.
“맛있게 드십시오!”
한율은 그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배우가 기다렸다는 듯 달궈진 불판에다 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테이블 분위기는 딱히 어색하지 않았다. 새파란 신인이 아니고서야 서로 한번 이상은 오며가며 마주친 사이가 많은 까닭이었다. 워낙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사람들이라 일부러 사교성이 좋은 척 떠드는 이들도 있을 테고.
“그러고 보니 오늘 명일이가 안 나왔네?”
“부산에서 공연 중이라 오기 힘들 것 같다고 연락 왔어요.”
“그래도 드라마 제작진들 다 있는 자린데, 얼굴 한번 비추는 게 나중을 위해서 좋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한율은 배우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사이다가 가득 담긴 컵을 만지작거렸다. 간만에 탄산음료를 앞에 두니 갈등이 일었다. 당분이 잔뜩 뜬 이 음료를 마실 것이냐, 안 마실 것이냐.
매니저가 아니라
마시고 싶긴 하지만, 한번 입에 대면 계속 마시게 될 터.
“우리 전도유망한 배우 분, 고기 맛있게 먹어요.”
중년배우가 어느새 알맞게 익은 고기를 한율의 접시에다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율은 사이다를 내려놓곤 젓가락을 들었다.
“그나저나 우리 딸이 오늘 진해 만나는 거냐고, 만나면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아오라 그랬는데.”
“정말요? 당연히 해드려야죠.”
<객귀>는 에피소드마다 등장배우들이 모두 다른 까닭에, 종방연은 배우들의 만남의 장도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막 데뷔한 신인들은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돌아다니면서 얼굴 도장을 찍기 바빴다.
“안녕하십니까, 다섯 번째 에피소드 주인공 역을 맡은 신인배우 김우헌입니다.”
“오, 앉아요, 앉아. 술 드릴까? 사이다? 콜라?”
“뭐든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나 한율은 움직일 생각 없이 고기만 뒤적거렸다.
조금 전에 인사 다 했으면 됐지.
‘그러고 보니, 저 분한테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한율은 임PD와 웃으며 이야기 중인 현미나를 바라보았다. 꼭 강보배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가만히만 있자니 지루하긴 했다.
그때 선배배우의 잔에다 소주를 따른 김우헌이 한율을 살폈다.
“저기, 한율 씨도 한 잔….”
“……?”
“아니,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한율이 고등학생이에요, 우헌 씨!”
“앗, 죄송합니다! 어쩐지 너무 어려보이시더라…, 하하….”
이렇게 어수선한 배우들의 테이블과 달리, 매니저들이 모인 테이블은 조용한 편이었다. 모든 배우들이 매니저가 있거나, 있어도 동행한 건 아니라서 수도 적었다. 그나마 조유찬은 아이돌에게 관심이 많은 다른 매니저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다.
“그럼 크래 멤버들이랑 서로 어떻게 불러요?”
“저는 그냥 이름 부르고, 걔네는 오빠라고 부….”
“진짜 부럽네요! 정말 부럽습니다!”
“…하하.”
“그럼 유찬 씨는 가수 케어랑 연기 케어 둘 다 번갈아가면서 하는 거잖아요. 어느 쪽 일을 할 때가 그나마 편해요?”
다른 매니저가 끼어들었다.
“그야 연기할 때겠죠. 예전에 음악방송 공개홀 근처 지나가다가 봤는데, 아주 팬들이 몰려들어서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있더라고.”
“하하하. 패는 게 아니라 가드를 뚫으려고 한 거예요. 조금이라도 아티스트랑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하하하.”
“웃음소리에 영혼이 없는데요, 유찬 씨.”
조유찬은 멋쩍게 웃곤 슬쩍 누군가를 살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과 달리, 이윤영의 매니저는 다른 배우 매니저들과 친목을 쌓으려 노력은커녕 고기만 쌈 싸먹느라 바빴다. 우걱우걱.
‘정말 배우 매니저치곤 이상한 사람이네.’
그때였다.
챙그랑! 무언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조유찬은 벌떡 일어나 그곳으로 튀어갔다.
“한율아, 괜찮아?!”
한율이 서있는 바로 근처에서 컵이 깨진 까닭이었다.
막 현미나에게 사인을 받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실수로 컵을 떨어뜨린 배우가 굉장히 당황해하며 깨진 파편으로 손을 뻗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말렸다.
“손 다쳐요!”
깨진 컵 파편은 곧 직원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와서 정리했다. 그 사이 조유찬은 한율에게 파편이 튀지 않았는지, 그 옆에 쭈그려 앉아 바지와 신발을 살피며 물수건으로 툭툭 치듯 닦았다.
“신발 벗어봐. 안에 작은 조각이라도 들어가 있으면 큰일 나.”
“괜찮다니까요, 형.”
“빨리 벗어.”
결국 한율은 조유찬의 성화에 못 이겨 빈자리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양말과 신발 안이 멀쩡한 걸 확인해서야 조유찬이 안심한 얼굴로 씩 웃었다.
“음, 괜찮네.”
“정말 죄송합니다….”
컵을 깬 배우가 안절부절못하며 재차 사과했다. 그제야 한 사람을 더욱 머쓱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은 조유찬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뇨. 저야말로 유난을 떨어서 죄송합니다.”
다른 배우가 허허 웃었다.
“매니저 분이 엄청 세심하시네.”
현미나도 웃으면서 한율에게 말했다.
“매니저가 아니라 꼭 팔불출 형 같네요.”
“네, 평소에도 과보호랑 잔소리가 좀 심해요.”
“…한율아?!”
“촬영할 때도 내내 한율 씨 옆에 딱 붙어서 챙겼었죠.”
언제 왔는지 조연출이 넉살좋게 끼어들었다. 술을 적잖이 마시고 밖에서 담배까지 피우고 왔는지, 썩 좋지 않은 냄새가 짙게 풍겼다.
“그리고 볼 때마다 참 궁금했던 게, 저 분 가방엔 대체 뭐가 들었을까? 아니, 볼 때마다 가방에서 텀블러랑 차가 든 유리병, 티스푼이랑 담요, 생수, 핫팩…. 아무튼 별의 별게 다 나오더라니까요?”
“탐나는 인잰데? 매니저 분 혹시 투잡 뛸 생각 없으신가?”
“하하….”
퍼지는 웃음소리가 마치 좋은 분위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율은 조연출이 오자마자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현미나의 입가를 보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걱정스럽게 힐끗거리거나 소심하게 웃던 이윤영도, 슬며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애꿎은 도토리묵만 젓가락으로 쪼갰다.
‘어째 얘는 계속 혼자 있네.’
한율은 식당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예전에 이윤영의 전 매니저와 다퉜다던 의상팀 스태프가 보였다. 그녀는 다른 스태프들과 소리 높여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다름 사람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기죽어있는 이윤영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에 동원되는 스태프들은 수십 명. 여기에 배우와 매니저, 관계자들까지 더하면 적잖은 인원이 된다. 그리고 <객귀, 해>는 시리즈 초반에 촬영된 것이라, 이윤영과 이윤영의 전 매니저, 의상팀 스태프가 얽힌 일은 그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지고도 남았을 터.
‘방송국 스태프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도록 말하진 않았을 테니…, 그래서 거리를 두는 건가?’
촬영 당시 이윤영에게 호의적이었던 강덕심과 진송아는 종방연에 나오지 않았다. 조역 격이라 초대를 받지 못한 건지, 일이 있어서 불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임PD도 어느새 한 중견배우들이 모인 테이블에 가서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나누는 중이고.
“그럼 한율아, 난 차에 가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조유찬의 목소리가 한율의 주의를 끌었다.
“벌써요?”
“사실은 아까부터 배가 너무 불러서 말이야.”
회사 관계자가 오래 있기엔 눈치 보이는 자리라 그런지, 다른 매니저들도 슬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윤영의 매니저도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러나 배우들은 아직 자리를 뜨기엔 이른 분위기.
“심심하지 않겠어요?”
“괜찮아, 이번에 OTT서비스 월정액 끊었거든. 그럼 과식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탄산도 적당히 마셔.”
“네.”
조유찬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한 후 식당을 나갔다. 한율도 현미나의 사인을 받은 노트를 들고 본래 있던 테이블로 돌아가려 했다.
“그럼….”
“사인만 받고 그냥 가게요?”
현미나가 한율을 잡았다.
“여기 앉아요. 어차피 원래 있던 자린 다른 사람이 앉았는데.”
현미나의 말처럼 한율이 처음에 앉았던 자리는 어느새 다른 배우가 앉아 그곳의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율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 옆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 주인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자, 여기 새 젓가락.”
“미나 씨는 술 안 드세요?”
아직도 안 갔는지, 조연출이 그들 맞은편에 앉은 배우들 사이에 끼어 앉아 술병을 들었다. 현미나가 웃으면서 사이다를 들었다.
“이따가 운전해야 해서요.”
“에이, 대리 부르면 되죠. 그러지 말고 한 잔 드세요.”
“저 아까 임PD님 술도 거절했는데요?”
딱 선을 긋는 현미나의 어조. 조연출의 눈가와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아….”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굳은 얼굴로 탄식을 흘리자, 테이블엔 순식간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
조금 전까지 웃으면서 말했던 다른 배우도 당혹스럽게 눈동자만 굴렸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방송국 사람에게 찍히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율은 그러거나 말거나.
딩동. 직원 호출 벨을 눌렀다.
“사장님, 여기 사이다 한 병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새 컵이랑 접시도요.”
“네!”
한율은 사인 받은 노트를 가방에다 갈무리하고 대신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태연하게 현미나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게 선배님 팬이라고 한 저희 멤버에요.”
“…어머, 잘생겼다아~.”
“선배님 나온 사극을 세 번이나 정주행하고, 공포영화도 굉장히 감명 깊게 봤대요. 이 형이 공포영화 정말 좋아하거든요.”
“이 분은 몇 살이에요?”
툭. 조연출이 입을 다물고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는 한율과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현미나를 흘기더니 조용히 떠났다.
“열아홉이요.”
현미나도 조연출의 못마땅한 시선을 느낀 것 같았으나, 능청스럽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흑, 넘 어리다….”
한율은 슥 웃곤 핸드폰을 도로 가방에 넣었다. 그때 조연출과 현미나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다른 배우가 테이블에 찾아와 현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님, 고기 많이 드셨어요?”
직원도 와서 사이다와 새 컵,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한율은 새 컵에다가 사이다를 따른 후 그걸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옆 테이블에선 젊은 남자배우 두 명이 이윤영의 맞은편에 앉아 술을 권하고 있었다.
“올해 스무 살 아니에요? 술 못하시나?”
“아… 하긴, 하는데….”
이윤영이 방송국 스태프들, 그리고 배우들과 겉도는 걸 알고 일부러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게 눈에 환히 보였다.
풀석.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이윤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
이윤영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이 테이블은 왜 이렇게 고기가 남아요? 불판도 좀 탄 것 같은데.”
두 남자배우가 눈치 없이 끼어든다며 한율에게 힐난 섞인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한율은 이번에도 모른 척, 직원 호출 벨을 눌렀다.
“사장님, 여기 불판 좀 갈아주세요.”
“네!”
“…윤영 씨, 자, 한 잔 드세요!”
“아, 네, 선배님….”
“윤영 선배님이 선배 아니었어요?”
“어…, 네? 그런가?”
평소라면 이런 오지랖은 부리지 않겠지만, 술에 취한 장정들이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여성에게 집적거리는 모습은 본래 세상, 과거에 있었던 굉장히 불쾌했던 기억을 건드린다.
한율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여기 선배님이 2015년 3월 데뷔, 윤영 선배님은 그보다 두 달 앞선 1월 데뷔.”
“아아….”
“…하하, 그런가? 그럼 선배님, 술 한 잔 받으….”
딩동.
“사장님, 여기 콜라도 한 병 더 부탁드릴게요!”
“…….”
“네엡!”
“선배님은 다음 작품 언제 들어가세요?”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이어서 대화를 유도. 이윤영은 한율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다는 걸 눈치 챘는지, 얼굴에 드러나려는 고마운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여기저기 오디션 열심히 보고 있어요. 한율 씨는 곧 이제설 선배님이랑 같이 드라마 찍으신다면서요?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선배님도 연기 엄청 잘하시니까 곧 좋은 역이 들어올 거예요. 아, 혹시 독립영화 관심 있으세요?”
“있죠! 엄청 많이…!”
“제가 아는 감독님이 독립영화 하나를 기획 중이신데….”
한율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대화에 소외된 두 남자배우는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한율을 쳐다보았지만 자리는 뜨지 않았다. 한율의 입에서 어떤 정보가 흘러나올지 궁금한지, 오히려 입을 다물곤 슬쩍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대본을 보니까 선배님이 하면 괜찮을 것 같은 역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께 연락드려서 내정된 분이 없으면 선배님을 추천 드리고 싶은데….”
이윤영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주시면 저야 당연히 감사하죠…! 안 되도 괜찮으니까, 제 이름 한번 언급해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요?”
다른 배우와 이야기가 끝났는지, 현미나가 의자를 끌고 와 테이블에 합류했다.
아무리 공백 기간이 길었다곤 하나, 데뷔 연차가 오래된 선배다. 그제야 두 남자배우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저흰 잠깐 다른 분들께 인사를….”
“맛있게 드십시오, 선배님.”
“네, 두 분도 맛있게 드세요.”
한율이 현미나에게 독립영화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고 말하자, 현미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영화 좋죠. 윤영 씨는 무슨 영화 찍었었어요?”
재빨리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친 이윤영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옥토버’란 단편영화에 조연으로 나간 적 있습니다, 선배님.”
우웅. 한율은 이윤영과 현미나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으며 가방 속 핸드폰을 꺼냈다. 블블 민준으로부터 톡이 왔다.
-[머해???]
한율아 생일 축하한다
-[샵샵 머글래??]
[샤브샤브요?]
-[너 곧 생일이람서ㅎ 우리 곧 싱글 나와서 따로 만나는 건 힘들 것 같고]
-[쿠폰이라도 보내주려고ㅎ 아님 딴 거 먹고 싶은 거 잇어??]
[선배님 다음 주 아스대 예선 나오시죠?]
-[ㅇㅇ]
[그때 봬요. :)]
-[...ㅇㅇ..]
한편 그 시각, WB래빗 엔터테인먼트 A&R팀 사무실.
최대한 더 많이, 아직 아무도 발굴하지 못한 좋은 곡이 어딘가에 숨어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곡을 찾아듣던 A&R팀장 진장현은 책상에다 머리를 쿵 박았다.
스륵. 그의 두 팔이 책상 아래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한 시간만 잤다가 리스트 정리하자.’
그러곤 그대로 잠들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스엔 엔터에 소속된 프로듀서 친구의 전화였다.
“오냐, 받았다….”
-[왜 다 죽어가?]
“죽어가고 있으니 죽어가고 있는 것뿐인데 왜 죽어가냐 물으신다면….”
-[아림 난리 났다.]
오래된 친구라 그런지 시시한 말장난은 단칼에 잘라버린다. 진장현은 의아한 얼굴로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왜? 애들 뭐 사고 쳤대? 히아? 원?”
-[너 요새 고동이랑 블블 사이 틀어진 거 알지?]
“언제 사이가 좋은 적이 있었어? 신인 때부터 완전히 갈구면서 소처럼 일 시켰잖아. 초반엔 양아치 같은 놈들 붙여놔서 애들 정신교육이랍시고 때리기도 하고. 이제 계약기간도 얼마 안 남았겠다, 애들도 다 인기 많아졌겠다, 벼르고 벼르던 날이….”
-[블블 전원 재계약 힘들 것 같아지니까, 고동 대표가 블블 완전히 버리기도 작정했나봐. 그것도 흠집 잔뜩 내서.]
고동 엔터 대표가 원래 양아치 출신이란 건 이 바닥에 쉬쉬하며 도는 소문이었다. 예전에 그가 프로듀서로 활동할 적엔 순진한 작곡가들을 속여 곡을 빼앗았다는 소문도 돈 적이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그런데 대체 무슨 흠집을 낸다는 거야? 애들 다 착하잖아.”
진장현은 예전, 좌기훈 대표와 함께 스엔에 있을 때 가끔 봤던 수재를 떠올렸다. 당시엔 연습생이었으나 현재는 블블의 어엿한 리더인 그는, 어렸을 때도 참 반듯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꼬투리 잡으려고 작정하면 뭐 한둘은 안 나오겠어? 언플 좀 세게 때려 박아서 애들 이미지 개차반 만들고, 나중에 아, 이건 좀 부풀려진 거다, 오해였다고 슬쩍 물러나면… 어후씨. 입 아프다.]
“그런데 아림이 난리가 났다며. 대체 고동이 블블 흠집 내는 거랑 아림이 뭔…, 설마?!”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낸 진장현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파티션 너머의 직원은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지 조용했다.
-[그래, 그 설마. 연애.]
“와…. 바쁜 와중에도 참 부지런하네. 역시 젊음이 좋긴 좋아.”
-[원래는 앗싸일보 김 기자란 놈이 민준이랑 배우 이희우 둘이 엮으려고 먼저 고동에 연락했었대.]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조합….”
진장현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통화 상대방은 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고동 대표가 오히려 히아신스랑 얽힌 스캔들을 툭 던져줬단다. 와…, 난 정말 소름이 돋는 게, 고동 대표가 애들한테 사람 붙였었나 봐. 둘이 차타고 천문대 놀러가는 걸 찍었다더라.]
“미친. 그렇잖아도 사생들 때문에 고생하는 애들한테 뭔 짓이야.”
-[그 사생들 중에 고동 대표가 고용한 언더커버가 있다는 말이.]
“…….”
진장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대표가 소속 아티스트의 뒤를 밟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재계약 협박거리 잡으려 한 거야? 아니면 계약위반사항 찾아낼 증거수집?”
-[그건 나야 모르지. 그 멤버한테 협박했다가 안 먹혀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 있다가 나중에 뒤통수 세게 때리려고 준비 중이었던 건지.]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슬프게도, 이 업계에선 종종 벌어지는 추잡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히아신스 정도면 아무 때나 막 터뜨릴 수 없잖아. 나중에 높은 곳에서 연락 오면 연막탄용으로 딱이니까. 그래서 김 기자란 놈이 일단 확인 차 아림에다 연락해서 떠봤나봐. 그러니까 아림에선 난리가 난 거지. 그런데 더 웃긴 건 뭔지 아냐? 아림 대표가 고동 대표한테 직접 전화했는데.]
“했는데?”
-[고동 대표가 오히려 딜을 제안한 것 같더래.]
“딜?”
-[어. 통화 끊자마자 아림 대표가 한참동안 완전 심각한 얼굴로 있다가, 히아신스랑 원카운트 앞으로 잡힌 6개월 치 스케줄 뽑아서 가져와 보라고 했단다. 이게 딜이 오고간 게 아니면 뭐겠어. 참 버라이어티하지 않냐? 난 정말 살다살다 그렇게 비열하고 악….]
“악독한.”
-[…독한.]
“찌찌뽕.”
-[야 이 유치한 놈아.]
욕은 들었지만 그래도 심란한 이야기를 들었더니 잠이 싹 달아났다. 통화를 끊은 진장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이 일은 우리 대표님에게도 알려드려야….’
그러다 모니터에 뜬 후보 곡 파일 리스트를 보곤 도로 앉았다.
‘아니지.’
바로 내일이 어스래빗 다음 싱글 앨범에 수록될 후보 곡을 멤버들에게 들려주는 날이었다.
‘다른 기획사 스캔들보단 우리 애들 곡이 더 중요하니까 일단 이것부터 마무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