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427)

* * *

8월 29일 점심시간. 박현우가 매점에서 사준 딸기우유를 두 손으로 꼭 감싼 채 길우성이 눈을 반짝거렸다.

“후후.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구먼?”

박현우가 길우성의 표정을 따라하며 웃었다.

“후후. 징그럽구먼?”

“아, 형님!”

앨범 컨셉회의가 열린지 2주하고도 하루. 오늘은 그동안 A&R팀이 고르고 골라 선정한 후보 곡을 듣는 날이었다.

“좋은 곡들 많았으면 좋겠다.”

“호 형 것도 후보에 올랐을까?”

“있지 않을까? 노래 부르는 사람에 대해 잘 알수록, 곡 작업할 때에도 머릿속에 여러 이미지랑 방향이 잘 떠오른다고 하더라. 전에 내놨던 곡들도 괜찮았잖아.”

“그러고 보면.”

길우성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우리 팀엔 능력자가 참 많은 것 같아. 춤신춤왕인 나를 비롯해서 다들 열심히 정진….”

한율은 길우성을 무시하며 차남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 곧 촬영 들어가죠?”

“어. 바로 모레, 31일부터.”

“이번엔 카메오 필요 없대요?”

차남석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은?”

“주 배경이 병원이니까, 애들 단체로 식중독 걸려서 응급실 실려 간 걸로 나가면 되겠다.”

“나 무시하지 마요, 이 싸람들아. 그리고 식중독 걸린 연기는 싫엇.”

“그나저나 서한율, 너 내일 생일이잖아. 뭐 받고 싶은 거 있냐?”

받고 싶은 거라.

한율은 마시던 커피를 살며시 빙빙 돌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길우성과 박현우도 멀뚱히 한율을 쳐다보았다.

“자전거 LED전조등? 원래 있던 게 고장 났거든요.”

정산 받으려면 한참 먼 신인의 주머니 사정을 감안하면, 그리 비싼 물건도 아니다.

차남석이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기각. 밤에 라이딩 나가려고?”

“그거 말곤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요.”

“그럼 알아서 준비할게.”

“네.”

그 날 밤.

다음 싱글앨범에 실을 후보 곡을 듣고 예비곡까지 선정하는 데에 2시간. 그 다음은 노래연습과 안무연습을 마친 한율은 휴게실에서 씻고 나온 뒤 다시 빈 보컬연습실을 찾았다.

디지털피아노 앞에 앉아 전용헤드셋을 쓰고, 사과패드에 클래식 악보를 띄워 피아노연습을 시작했다. 10월 달부터 촬영예정인 <별☆일없는 집>에서 연기하게 된 캐릭터가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학생인 까닭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연습에 집중했을까.

-딩. 쉴 새 없이 건반을 두드리던 한율은 문득 손가락을 멈추곤 옆을 돌아보았다.

“……?”

“……!”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고 보컬연습실로 들어오던 박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멈췄다. 그가 든 케이크에 꽂힌 초들이 아롱거리며 빛났다.

카메라를 들고 박가람의 뒤를 조용히 따라 들어오던 이건우가 탄식했다.

“아….”

보컬연습실이 좁은 탓에 다 들어오지 못한 멤버들이 안을 기웃거리며 떠들었다.

“뭐야, 벌써 들킨 거야?”

“거 봐, 내가 써한은 바로 알아차릴 거라 그랬잖아. 눈치 100단이라고.”

“싱겁네.”

“한율아, 생일 축하한다!”

그제야 한율은 헤드셋을 벗었다. 빠르게 확인한 시간은 어느새 자정, 8월 30일.

‘서한율’의 생일이었다.

아침이 되어야 뭔가를 해도 하겠구나 짐작은 했지만, 바로 자정에 맞춰서 준비할 줄이야.

박가람이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에라, 모르겠다. 노래 시이작!”

“생일 축하합니다아~.”

“아니, 잠깐. 여기에서 이러면 너무 시끄럽잖아요.”

“생일 축하합니다악!”

말렸더니 오히려 더 악을 쓴다.

“…….”

할 수 없이 한율은 입을 다물곤, 가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음정과 화음이 엉망인 멤버들의 생일축하노래를 경청했다.

카메라가 돌고 있었다.

멤버들 또한 카메라만 없었다면 이런 낯간지러운 이벤트는 건너뛰고, 케이크와 선물만 턱하니 내밀었을 것이다.

“자, 부세욧!”

드디어 엉망진창인 노래가 끝났다.

한율은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짓다가 촛불을 껐다. …후.

보컬연습실은 너무나 좁아, 그들은 B연습실로 자리를 옮겼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연습실 벽에는 정말 크게 나온 한율의 포스터와, 반짝거리는 각양각색의 풍선이 붙어 있었다. 그들이 빙 둘러앉은 자리를 찍는 또 다른 카메라까지.

“우리가 어스래빗으로 데뷔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멤버의 생일입니다. 이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며, 선물 증정식이 있겠습니다.”

유호가 대표로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을 들었다.

“멤버들이 조금씩 모아서 준비했어.”

“감사합니다. 지금 풀어 봐도 되죠?”

“그럼!”

한율은 선물이 든 박스의 리본을 풀었다. 부스럭. 부착된 투명테이프를 뜯어 포장지를 벗긴 후 상자를 개봉. 그 안엔 다양한 디자인의 토끼캐릭터 티셔츠 여러 장이 들어 있었다.

“안무 연습할 때 편히 입으라고 준비했어. 막 입고 자주 빨기 좋은 거야.”

디자인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참 실용적인 선물이었다. 한율은 거울을 보며 티셔츠를 몸에다 대보았다.

“선물 감사합니다. 잘 입을게요.”

“그리고 하나 더.”

“또 있어요?”

라이언이 캐비닛에서 또 다른 납작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엔 보들보들한 재질의 새하얀 잠옷이 들어 있었다.

“아, 마침 환절기라 새 잠옷이 필요….”

웃으면서 잠옷을 꺼내던 한율의 표정이 흐려졌다.

잠옷 후드에 긴 토끼 귀 한 쌍이 달려있었다.

박가람과 길우성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어깨를 들썩거리며 합창했다.

“착용, 인증샷은, 당연하겠죠?”

“…….”

“서한율 씨, 카메라 돌고 있습니다. 이 영상을 보실 이프림들에게 미소~.”

알아서 준비하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한율은 직업정신을 최대한 발휘해, 이건우가 들이대는 카메라에 대고 웃었다.

…씨익.

몇 시간 후 아침.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에 한율의 기사가 올라왔다.

[어스래빗 한율, 팬들의 생일축하 서포트로 대세신예 입증!]

[오늘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한 어스래빗의 한율이 팬들에게 사랑이 담긴 여러 축하선물을 받았다.

어스래빗의 팬클럽 ‘이프림’은 한율의 생일을 기념해 서울시내 지하철 18개역 전광판에 생일축하광고를 게재했으며, 한율의 이름으로 취약계층의 난치병 어린이를 돕는 ㅇㅇ재단에 2300만원의 기부금을, ㅇㅇ유기동물보호센터엔 고양이사료 830kg과 고양이 화장실모래 830kg을 전달했다.

또한 작년 한율의 생일을 기념하여 ㅇㅇ복지재단에 830만원을 기부했던 한율의 개인 팬은 이번에도 ㅇㅇ복지재단에 830만원을…(중략).

한편 한율은 오늘 새벽, 멤버들에게 선물 받은 잠옷을 걸친 인증샷을 개인 SNS에 올리며 생일축하에 대한 감사인사를 전했다.

[멤버들에게 선물 받은 토끼잠옷을 입은 어스래빗의 한율(사진=한율의 SNS)]

한율은 최근 더순한화장품의 광고모델로 발탁되어 CF를 찍었으며, 내년 1월 tv Mu에서 방영예정인 <별☆일없는 집>에서 이제설의 동생 역을 맡아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요즘엔 기부로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 띄운다지만ㅋ.. 벌써부터 스케일 보소ㄷㄷ;;;

-정말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한율이 본가에서 고양이 키우니까 고양이 사료랑 모래 기부하셨나보다ㅎㅎ

-흐뭇하게 웃다가 막짤보고 심장이!!! 크흑....

-정말 그 연예인에 그 팬들^^ 다들 마음씨가 곱네요

ㄴ훗(。•ㅅ-)✧

-한율아 싸랑한다!!!! 생일 축하한다!!!!!!!!

-세상사람들!! 우리 애기 미모 좀 보고가요;ㅂ;)/!!!!!!!!!!!!

-엄마 오늘 밤엔 좀 늦을 거예요.. 열여덟 개 역을 순회하면서 한율이 전광판이랑 사진찍어야되거든..

ㄴ그랭ㅇㅇ

-토낀데 왜 고양이만 챙겨

회사 옮겨?

“…후우.”

이윤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눈에 ‘무공공 프로덕션’이라 적힌 간판이 비쳤다. 그러나 그녀는 무공공 프로덕션이 있는 건물 앞을 그대로 지나쳤다.

“아, 여, 여깁니다.”

무공공 프로덕션과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페.

파티션이 설치된 자리 안쪽에서 더벅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가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이윤영은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이윤영이라고 합니다.”

“부윤방PD입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악수를 나누곤 자리에 앉았다. 이내 부윤방이 다시 일어났다.

“뭐 드시겠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시게 했으니 제가 사겠습니다.”

“아, 아니요! 제가 알아서…, 아니, 그…, 죄송합니다.”

“하하, 아니에요.”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부윤방은 이윤영에게 받은 프로필파일을 살폈다. 굉장히 예쁘게 나온 프로필사진이 인쇄된 아트지엔 이름, 생년월일, 키/몸무게,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의 이력이 세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블블 뮤비에 출연한 적도 있으시네요?”

“네, 고등학생 때… 한 4초? 5초 정도?”

“와…, 뮤비에 원석들이 많이 나온다더니.”

이윤영은 쑥스럽게 웃었다. 부윤방은 이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제 한율 씨에게 연락 받고나서, 윤영 씨가 나온 단편영화 <옥토버>를 봤어요. 사실 전 윤영 씨를 본 게 <객귀>가 처음이라 이미지가 잘 안 잡혔었거든요.”

“네….”

이윤영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윤방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보며 슥 웃었다.

“제가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그러곤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내밀었다.

[고양이 난로(가제)]

“감상평은 이걸로 대신 할게요.”

“……!”

“윤영 씨에게 오디션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본을 읽어주시겠어요?”

보통 오디션을 보러오라며 보내는 짧은 지정대본이 아닌, 온전한 통대본이었다.

이윤영은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꾹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네…!”

특히 영화대본 같은 경우엔 스포 방지를 위해 주연, 혹은 미리 양해를 구해야하는 씬을 찍는 경우가 아니고선 결말까지 나온 온전한 대본을 건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신인에게 건넨다는 건, 그만큼 기대와 믿음을 갖고 있다는 의미.

한 마디로, 당신이 꼭 이 작품에 출연했으면 좋겠다는 에두른 표현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사실 부윤방은 SBC 드라마제작국에서 떠도는 소문을 그쪽에 몸담은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윤영이 <객귀>의 조연출과 스태프 몇 명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 같다고. 그것도 본인의 잘못이 아닌, 갑질에 저항하는 낌새를 보였단 이유로.

‘속이 알량한 못난이들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이 바닥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외모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만으론 성공하기가 힘들다. 그런 사람이 차고 넘치는 까닭이었다. 특히 신인의 경우, 업계 관계자들에게 안 좋은 평판이 퍼지기 시작하면 그날로 모든 가능성이 막혀버리기도 한다. 아주 쉽게.

부윤방은 애써 눈물을 참는 이윤영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아, 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한율 씨 말고 이미 내정된 배우가 한 명 더 있는데.”

훌쩍. 결국 슬그머니 비집고 새어나온 울음을 삼킨 이윤영이 고개를 들었다.

“참고하시라고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배우가 성격이 좀 지랄맞아서….”

“네…?”

우우웅. 마침 카운터에서 받아온 진동벨이 울렸다.

부윤방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배우 이희우 씨도 출연하기로 했어요.”

이희우. 20대 여성배우들 중에서 연기로나 미모로나, 미래가 굉장히 유망하다고 인정받는데다가 인지도까지 높은 이름 석 자에, 이윤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 * *

“내가 최적의 동선을 짜왔다.”

학교수업이 모두 끝나고 매니저를 기다리는 중, 길우성이 서울 지하철노선도를 펼쳤다. 교사에게 부탁해서 프린트한 것인지, 이면지엔 1학년 1학기 연극영화과 현장실습 안내서가 인쇄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학교 근처에 있는 역을 시작으로….”

“열여덟 곳을 모두 돌자고?”

차남석이 미간을 구기며 끼어들었다.

“분명히 팬들도 올 텐데. 그러다 일반인들 통행 혼잡 빚어지면 얘만 욕먹어, 이 멍청….”

길우성이 노선도를 접으며 찌그러졌다.

“우성이 시무룩….”

“멍청이란 말 취소할 테니까 귀여운 척하지 마라. 밖이라 참는다.”

한율은 길우성의 손에서 노선도를 빼냈다. 노선도엔 길우성이 전광판 광고가 실린 역을 모두 표시해놨다.

“전부 가는 건 힘들고, 두 군데만 가서 인증샷 찍을까 하는데. 같이 가실 분?”

“저요!”

“나.”

“두 군데면 뭐.”

잠시 후. 한율은 유동인구가 적당하고, 중간에 내리기 쉬운 역 두 곳을 골라 자신의 생일축하 광고가 게재된 전광판 앞에 섰다. 전광판에는 팬들이 생일축하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한율은 차남석이 가진 포스트잇을 빌려 몇 줄 끄적거려 붙였다.

[사랑합니다, 이프림!!! 정말 감사해요!!! :) -한율]

마지막으로 인증샷. 그러는 동안 전광판 순례를 온 팬들과 마주치기도 하여, 함께 사진을 찍고 사인도 해주었다.

“생일 축하해, 한율아! 오늘 꼭 맛있는 거 먹어!”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행히 상대를 배려해줄 줄 아는 팬들이라 오랫동안 잡히진 않았다. 손을 흔들며 작별한 그들은 지하철역을 나왔다. 근처엔 미리 차를 이동시킨 현장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좀 신기하긴 하다. 예전엔 지하철 전광판에 여기저기 사진 걸리는 연예인들 보면, 정말 나랑은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었거든? 팬들이 돈을 모아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으로 기부하는 그런 것도. 그런데 그런 선물을 받는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다니.”

길우성이 키득거렸다.

“나 현우 형이 남석 씨 생일에 지금 한 말 똑같이 한다에 5백 원 건다.”

“왜 네 생일은 건너뛰고?”

“같은 팀이라도 인기 차이가 있잖습니까, 형님.”

“그러고 보니 그런 거 있겠다. 팀 안에서도 인지도에 따라 받는 선물이나 팬들의 호응 크기가 다르면 좀 서운하지 않아? 특히 이 둘이랑 같이 다니다보면.”

어스래빗 내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멤버 1, 2위가 차남석과 한율이었다.

길우성은 고개를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원래 이 바닥이 인기 순이잖아요. 그리고 데뷔하기 전부터 병풍 취급 자주 당해서 괜찮습니당.”

“그래, 그렇게 꿋꿋해야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형님도 곧 이쪽으로 오실 거면서.”

“아니, 나는.”

“……?”

무심코 대답하려다 입을 다무는 박현우의 모습에, 차남석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만 두게?”

“으음….”

박현우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뭐, 어차피 결정한 거니까 너희들한테 먼저 말할게. 나 아이돌 데뷔는 포기하려고.”

“왜?!”

길우성이 안타까운 얼굴로 되물었다. 반면 차남석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작년, 데뷔조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박현우는 자신의 탈락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자신은 뭐 하나 특출한 게 없으니 예상했었다고. 그리고 앞으로 어떡할 것인지에 대해 연기를 병행하면서 생각해보겠다고 했었다.

한율은 일말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박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 굳히셨네요.”

박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대로 가다간 이도저도 안 되겠다 싶더라고. 어릴 때는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와, 내가 정말 잘했나 보다!’ 했었는데 요즘은 내 연기를 모니터링하면 여기저기 허점이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보컬이나 안무 허점을 캐치했을 때보다 더 열 받는 걸 자각했더니, 저절로 결심이 서던데?”

“그래도 연습생으로 있었던 시간이 얼만데… 안 아까워, 형?”

“별로? 배우한테 가장 중요한 건 경험이거든. 그리고 남이 억지로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내 선택으로 그 시간들을 보낸 거니까 후회는 없어.”

“크으, 멋지다! 진정 쿨한 싸나이!”

“내가 좀?”

여기에서 문득 드는 궁금증.

“그럼 형, 회사랑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연습생 계약을 맺었던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 연습생 계약은 자연스레 종료된다. 그러나 아이돌이 아닌 배우로 전향하기로 결심했다면, 지금 있는 WB래빗이 아니라 배우 전문기획사로 옮기는 게 여러모로 더 나을 터.

“그래서!”

박현우가 어느새 보이는 WB래빗 건물을 가리켰다.

“오늘 대표님과 면담 약속이 잡혔습니다.”

회사 앞에 도착했을 땐 박현우만 차에서 내렸다.

회사로 들어가는 박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길우성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현우 형 회사 옮기는 걸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우리 회사엔 배우를 집중적으로 매니지할 수 있는 인원이 따로 없잖아. 그쪽 네트워크도 이제 막 알아가는 단계고.”

“…….”

운전을 하는 현장전의 어깨가 살며시 쳐졌다.

“이런 경우엔 연습생 때 쌓인 빚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빚이라곤 해도 투자 개념이라, 데뷔를 해야 비로소 수익에서 훈련활동직접비를 공제하는 거거든. 그래서 데뷔하고 몇 년이 지나 순익분기점을 넘지 못해 망해도, 회사에서 아티스트한테 따로 청구 못하는 거고.”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장난치는 양아치사기꾼들이나 돈 내놓으라고 하지.”

“그렇지. 그런데 박현우의 경우엔 원래 배우였던 터라… 잘 모르겠다. 박현우 계약조항이 나랑 같은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이 바닥이 케바케가 많잖아. 앞으로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 쿨하게 놓아주는 곳도 있고, 조금 심한 소속사면 계약 끝나는 날까지 안 놔주다가 이것저것 물고 늘어져서 계약 위반했다고 손배금이나 위약금 청구소송을 하기도 하고.”

“대표님 성격상 후자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네요.”

“그럼 난 대표님이 허허 쓸쓸하게 웃으면서 ‘그럼 이번 드라마 끝날 때까지만 있을래…?’라고 말한다에 한 표. 드라마 출연 계약을 우리 회사 통해서 했잖아.”

“그럴 수도 있겠다.”

운전 중인 현장전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써한. 조금 이따가 네 생일 기념 라방하잖아.”

“어.”

끼익. 바로 근처라 금세 숙소 앞에 도착. 세 사람은 현장전에게 고맙다고 말하곤 차에서 내렸다.

“우리 이프림 대부분이.”

길우성이 그라 어스래빗 채널의 팬클럽 전용 게시판을 핸드폰에 띄워 내밀었다.

“네가 우리한테 선물 받은 잠옷을 입고 나와 주길 강력히 희망하신다.”

“…….”

[생일 축하 감사인사로 한율에게 바라는 것! 투표결과]

[1위 - 멤버들에게 선물 받은 잠옷입고 라방!!!

2위 - 잠옷 받고, 단체 막춤대환장파티 가즈아!!!!

3위 - 자기 전 새벽갬성뿜뿜 남친의 영상통화 컨셉..♡]

“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굉장히 큰돈을 모아 널리 그 사랑을 퍼뜨린 이프림에게 은혜 갚아야지, 한율아. 세 가지 다 가는 게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

한율은 나오려던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구내식당에서 만난 멤버들끼리 라방 관련 회의 중. 오늘 새벽에 촬영한 영상은 짧고 간단하게 편집되어 라방이 시작되기 10분 전에 올라갈 거라고 했다.

후룩. 라이언이 소리 내어 국을 퍼먹었다.

“…하. 소고기 미억국 맛있어.”

“미억국 아니고 미역국.”

“잠옷은 가져왔지?”

길우성이 비장한 얼굴로 대신 대답했다.

“잊은 척하고 안 챙기려는 거, 제가 대신 챙겨서 가져왔습니다, 리더.”

“잘했어, 우성아.”

“우리도 단체로 귀여운 거 걸치는 게 어떨까? 요즘 우리가 비활동기라 팬 분들도 많이 심심해하시는 것 같고.”

“어, 그럼 나 숙소에 잠깐 갔다 와야겠다.”

“…….”

한율은 묵묵히 밥만 먹었다.

역시 첫 단추를 잘못 꿴 탓일까.

‘‘꽃을 단 토끼’로 귀여운 척, 예쁜 척 실실 웃은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우웅. 그때 조유찬으로부터 톡이 들어왔다.

-[부모님이 선물 보내셨다^^]

점심시간에 모친과 부친으로부터 번갈아가며 전화가 왔었다. 그때 모친이 회사로 선물을 보내주겠다더니 그게 온 모양. 부친은 계좌로 생일축하 용돈을 보내주었고.

[퇴근할 때 찾아갈게요.]

-[ㅇㅇ]

잠시 후, 밤 8시 50분. 아직도 한율의 포스터나 알록달록한 풍선이 붙어있는 연습실.

지금까지 팬들에게 받은 머리띠나 부담스럽게 귀여운 옷을 걸친 어스래빗 멤버들이 모였다. 한율도 티셔츠 위에다가 토끼잠옷을 다시 겹쳐 입었다.

“이거 써야 돼.”

라이언이 한율의 머리에다 후드를 뒤집어씌워주었다. 축 늘어진 토끼 귀도 가지런히 정돈. 앞머리도 슥슥 만져주었다.

“음, 됐다.”

“…….”

한율은 속으로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연기한다 생각하자.’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아이돌 이야기에 아○대가 빠지면 섭섭하죠

“아, 새벽에 찍은 영상 떴다.”

유호가 그라 영상이 재생되는 사과패드를 거치대에 세웠다.

영상은 오늘 아침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 올라온 인터넷 기사 캡처와, 그라 영상제작 프로덕션 스태프들이 지하철 18곳을 모두 돌아다니며 찍은 한율의 생일 축하광고 전광판으로 시작되었다.

강보배가 감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 이프림 진짜 대단하다. 대부분 학생이라서 금전적인 여유가 별로 없을 텐데.”

“나 지나가다가 들었는데.”

유호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미국에 사는 어떤 팬 분이, 이번 한율이 생일이벤트에 써달라면서… 만 달러 정도 보내셨대.”

히익. 굉장히 큰 액수에 멤버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2년에 걸쳐 얘 이름으로 기부한 개인 팬도 놀라운데.”

“여기에 우리 홈마 분들도 굉장히 많이 보태셨다고 들었어.”

“대단하다….”

“그래도 한율이 같은 경우는.”

유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로 열심히 활동하고, 또 잘해서 그만큼 사랑을 받는 거니까 나중에 자기 생일이 왔을 때….”

“알아, 알아! 노력도 안하고 시기랑 질투부터 하는 못난 놈, 여기 아무도 없어!”

“있으면 딱밤 열 대.”

“받고, 서한율 일일 매니저. 어때?”

“그거 좋다.”

멤버들이 저를 두고 떠들고 있었지만, 정작 한율은 영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 한 마디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을 동경하면서 거금을 턱턱 내놓는 사람. 본래 세상에도 그런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받는 입장이 될 줄은 몰랐다.

황족이나 귀족의 후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니.

“나중에요.”

“응?”

“내가 널 위해 거금을 썼으니 따로 만나 달라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있어.”

차남석이 대답했다.

“그런 경우 은근히 많아. 하지만 응하는 순간 어떻게 될 지는 일일이 설명 안 해도 알지? 그리고 그런 건 대표님이 칼 같이 자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나저나 형, 당근 붙은 머리띠에다가 공룡잠옷 입고 진지하게 말하는 거 보니 웃기네요.”

“…야. 넌 뭐 다른 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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