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린라이브는 대형포털사이트를 운영하는 곳과 같은 계열사가 운영하는 곳으로, 포털사이트에도 그린라이브 페이지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 중 재생횟수가 높거나 화제성이 있는 영상은 종종 연예뉴스란 메인에까지 추천 동영상으로 뜨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에 뜨는 건 대부분 인기가 많은 아이돌그룹의 영상.
하지만 오늘은 웬일로 신인 아이돌그룹의 영상이 연예뉴스란 메인 추천동영상에 떴다.
[어스래빗 한율, 생일축하 감사의 백팩키드 춤 작렬!]
-님들, 썸네일에 뜬 춤은 04:32 <이 부분부터임ㅋㅋㅋ
-썸네일보고 들어왔습니다.
-백팩키드 춤이 머에요???
ㄴ최근에 외국의 어떤 애가 백팩메고 춘 춤이라 붙여진 이름이에욬ㅋㅋㅋㅋ
시작은 평화로웠다.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는 소품과 옷을 걸친 8명의 소년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생일축하 서포트에 놀라움과 감사를 표한 그들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으면서 팬들에게 소소한 근황을 전했다.
그러다,
[어떤 분이, 아무리 생일이라고 해도 이 야밤에 케이크를 먹는 걸 보니, 컴백이 멀었다고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구나… 하고 우시네요.]
[괜찮습니다!]
[이깟 칼로리! 당장 불태워 없어버리면 그만!]
야식에 대한 지적을 기다렸다는 듯, 얼굴만 동그랗게 나온 토끼 탈을 쓴 멤버가 핸드폰으로 신나고 빠르고 괴상한 음악을 재생시켰다. 당근 머리띠의 잘생긴 소년이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신속하게 치웠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화려한 미러볼이 현란하게 번쩍거렸다.
[에잇, 후!]
[칼로리를 태워라!]
[우와아아아!]
그리고 뜬금없이 시작된 광란의 막춤파티. 그 중심엔 새하얗고 기다란 토끼귀가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 서한율이 있었다.
쿵짝쿵짝. 두리둥두둥둥둥쿵쿵짝.
-앜ㅋㅋㅋㅋ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닠ㅋㅋㅋㅋ객귀에 나온 연기 잘한 애 맞구낰ㅋㅋㅋㅋ
-아니 저 춤 어떻게 추는 거얔ㅋㅋㅋㅋ
-한율아...8ㅂ8.......... (엄지척)
-이상하게 자꾸 춤 부분만 돌려보게 된닼ㅋㅋㅋㅋ 뭔가 짜릿햌ㅋㅋㅋㅋㅋㅋ
-심심해서 별 생각 없이 봤는데.... 시ㅂ졸귘ㅋㅋㅋㅋㅋㅋ
-저 체념한 듯 해탈한 듯한 생글거리는 미소 무엇
“…….”
언젠가부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으로 연예뉴스를 살피는 게 일과가 되었다. 오늘도 연예란을 살핀 한율은, 메인에 뜬 굉장히 낯이 익은 얼굴을 보곤 두 눈을 끔뻑거렸다.
‘대체 왜 이 영상이 메인에….’
핸드폰을 도로 툭 엎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나마 오늘 새벽, 자기 전에 짤막하게 했던 ‘새벽갬성뿜뿜 남친의 영상통화 컨셉’ 영상이 안 올라간 것만도 다행인가.
한율은 한숨을 내쉬곤 옆으로 돌아누우며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확인하는 바람에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했던 톡이 있었다. 발신인은 부윤방PD.
-[오늘 이윤영 씨 만났습니다. 다음 주에 오디션 보기로 했어요^^]
오동식 팀장의 말에 따르면 부윤방PD는 8월 31일자로 무공공 프로덕션에서 퇴사한다고 했다. 대본에 회사이름이 없었던 것도 그런 까닭. 그리고 그가 9월 1일부터 새롭게 둥지를 트는 곳은, 이사문PD가 있는 눈길 프로덕션.
『작은 프로덕션에 속한 신인감독은 투자자를 끌어 모으기는커녕 제대로 된 투자자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눈길 소속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 게 있다면… 눈길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제작전문이란 점…?』
한율은 부윤방에게 늦은 답장을 보냈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
우웅. 금세 답변이 왔다.
-[네^^]
“밥은 먹고 갈 거지?”
옆방에서 잠이 덜 깬 유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면서 먹을 것 같아요.”
조금 전부터 누군가가 나갈 준비를 하는 것 같더니, 차남석이 드라마 촬영스케줄을 나가려는 모양.
“남석 씨….”
맞은편 침대에서 길우성이 난간 바깥으로 손을 뻗어, 거실로 나온 차남석을 향해 흔들었다.
“돈 마아않히 벌어 와아.”
“그래.”
“그리고 올 때 찹쌀떡….”
“거울 봐. 그 안에 있다.”
“흑….”
차남석이 드라마 촬영 스케줄을 위해 결석을 하면서, 점심시간에 모이던 인원도 셋으로 줄었다. 박현우는 급식소에서 한율과 길우성을 발견하자마자 웃음부터 터뜨렸다.
“너네 어제 라방 완전 웃기더라.”
“음하하.”
“어제 대표님하고 얘기는 어떻게 됐어요?”
옆에 앉는 박현우의 식판엔 제육볶음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계란프라이도 두 장. 배식담당자의 편애가 엿보였다.
“전속계약으로 전환하기로 했어.”
“오오!”
“괜찮겠어요? 형이라면 반기는 배우 전문기획사가 많을 텐데.”
“내가 보기보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롭게 파악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 생각하니까 귀차니즘이 발동되더라. 그리고 연결만 해주는 에이전시가 아니라 이것저것 다 챙겨주는 매니지먼트 계약이라 바로 받아들였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낯가림보단 귀찮음이 이겼네.
‘하지만 정말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
박현우는 어떨지 몰라도 법정대리인이자 보호자는 이것저것 따졌을 것이다. 그리고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WB래빗에 계속 남아있기로 했을 터.
“빚 깎아준대요?”
“하하하. 넌 참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묻는 구나. 그런 건 나와의 친분단계가 두 단계 더 상승하면 알려주도록 하지.”
“네.”
딱히 이 이상 오를 것 같진 않지만.
“그런데 너희 곧 아스대 아냐? 연습은 잘하고 있어?”
“후후. 형님한테만 해드리는 말인데, 우리 팀 금메달 하나는 미리 따 놓은 당상이에요. 써한, 양궁천재임.”
“오올. 쏘는 족족 렌즈 깨는 거야? 그럼 치킨이나 피자먹는 거?”
“……?”
치킨? 피자?
한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박현우가 쯧쯧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예습 안 했구나? 아스대에서 양궁경기 할 때마다 MC가 그래. 과녁 정중앙에 있는 렌즈 깨는 사람 나오면, 출전한 아이돌 전부한테 치킨이나 피자 쏘겠다고.”
* * *
9월 5일 동도 트지 않은 새벽, 경기도의 한 실내종합운동장.
<2017 추석특집 아이돌스포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보이그룹 26팀, 걸그룹 30팀이 북적거리며 모였다.
음방 리허설에서 사용할 법한 커다란 이름표를 달고, 팀 별로 상의 색깔도 맞췄지만, 그들은 모두 똑같은 회사에서 나온 티셔츠와 트레이닝 집업 재킷, 신발, 레깅스나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스대 협찬으로 들어온 제품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아직 한참 신인인 어스래빗은 눈이 마주치는 곳마다 꾸벅거리면서 인사하곤, 관중석 한쪽에 자리한 이프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어스래빗 응원 슬로건이 물결쳤다.
“우리가 고마워!”
아스대는 출연자들의 부상 위험이 많은데다, 새벽부터 모여 하루 종일 촬영하고도 통편집, 악마의 편집이 되는 경우가 많아 아이돌 팬덤 측에서 꾸준히 폐지 청원을 올리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늘 시청률이 높게 나오는데다가, 인지도가 낮은 아이돌의 경우엔 음악방송 외에 대중에게 노출될 수 있는 기회의 장, 혹은 팬들과 가까이에서 소통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야말로 아이돌이나, 그 팬들에겐 애증의 프로그램.
“이기기보단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방향을 택하자.”
그러다 보니 저런 말을 하는 팀도 적잖았다.
행여 다른 팀보다 응원이 적어서 우리 가수가 풀이 죽으면 어떡하나, 학교나 회사까지 빠지고 와 준 팬들에게 감사의 뜻만 열심히 전달하자고.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강보배가 새삼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 아직도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아직도 안 믿겨져. 상반기결산이나 소리구름에 갔을 때보다 더 막, 엄청난 장소에 온 것 같아. 여기를 둘러봐도, 저기를 둘러봐도 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이야.”
“너도 TV에 나와요.”
“하지만 온더로즈 선배님들이랑 히아신스 선배님들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거 보니까 막….”
“쳐다보지 마. 이프림이 지켜보고 있다.”
“헉.”
정말 ‘아이돌’ 스포츠대회답게, 방송국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은 모두 나온 것 같았다. 음방에선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으나, 익히 잘 아는 얼굴들도.
한율은 멀리서 시선이 마주친 이해원에게 묵례했다. 이해원은 작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늘 새벽에 본 인터넷기사에 따르면, 이해원이 속한 MOHE는 지난 번 중국활동을 위해 출국한 이후, 중국과 그 인접 국가에서 활동하다가 이번 아스대 녹화를 위해 어젯밤에야 몇 달 만에 귀국했다고 했다. 그런 탓인지 이해원은 지난 번 <여름소풍>을 촬영했을 때보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밤에 귀국했으면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샵에 들렀다가 바로 이곳으로 왔을 테니.’
이처럼 해외 스케줄을 하다가 아스대 녹화를 위해 급히 귀국한 팀은 MOHE말고도 많았다. 아스대 출연을 거부할 경우, 나중에 MBS 측으로부터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 만했다.
“우성아아!”
그때 블블의 수재가 반가운 얼굴로 두 손을 번쩍 들며 다가왔다.
“수재 형님!”
짜악! 수재와 길우성이 손을 높이 들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한율아!”
민준도 한율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러곤 다짜고짜 정신 산만한 춤을 휙휙 추기 시작했다. 한율이 지난 주 라방에서 토끼잠옷을 입고 췄던 ‘백팩키드’ 춤이었다.
“…….”
한율은 처음으로 민준을 외면했다.
“으히히.”
민준이 장난이었다는 듯 웃으면서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선배님을 무시하면 안 되지!”
“…오늘따라 엄청 업되셨네요.”
아직 졸음을 쫓지 못해 비실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민준만 반짝반짝 빛나 보일 정도. 컴백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굉장히 피곤할 텐데 말이다.
민준이 활짝 웃었다.
“응,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 있었거든.”
“……?”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면서 외쳤다.
“개막식 공연 리허설 갈게요! 다들 팀별로 줄!”
민준이 어깨를 두드리며 떠났다.
“나중에 보자.”
오늘 진행될 경기는 70미터 육상과 양궁, 400미터 이어달리기, 농구 예선, 볼링 예선. 농구와 볼링은 앞의 세 경기가 끝난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진행될 예정이었으며, 준준결승부터는 12일에 이어서 녹화, 여자아이돌이 나오는 리듬체조 또한 12일로 잡혔다.
개막식이 끝나고 가장 먼저 남자 육상경기가 진행되기 전.
한율은 어스래빗이 앉을 지정 관중석으로 올라가려다 길우성에게 당부했다.
“넘어진다 싶으면 차라리 구르면서 낙법을 해. 덜 다치게.”
기껏 반지에 새긴 보호마법이, 달리다가 자빠져서 낭비되는 꼴은 보고 싶지가 않다.
“그랭.”
물어달라고 하면 물어주면 되겠지
육상경기 예선. 어스래빗 멤버들은 길우성이 레인 앞에 섰을 때 어스래빗 임시 응원봉 전원을 켜서 흔들었다.
“길우성! 길우성!”
인기가 많은 팀이 아닌 이상 응원 장면은 편집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바로 뒤에 앉은 이프림이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어 거기에 편승했다.
이건우가 우렁차게 외쳤다.
“막내야, 믿는다!”
길우성은 대답 대신 여기저기 손하트를 날리며 까불거렸다. 장내에 아스대 MC의 목소리가 크게 퍼졌다.
[3조 예선경기입니다. 1레인, 스카이러너 용맹. 2레인, 퍼스트라인 세이. 3레인, 어스래빗 우성. 4레인….]
호명이 끝난 후엔 MC들 간에 잡담을 빙자한 소개멘트가 오갔다.
[…참고로 용맹은 올해 설 특집 아스대 계주에 나와, 놀라운 역전승을 이끌었던 주자입니다. 이번 70미터 단거리 육상에서 다시 그때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3레인 어스래빗 우성 선수. 어스래빗이 올해 4월 데뷔했죠? 그리고 우성 선수가 3조에서도 가장 어려요. 열여덟 살인데, 팀에서도 막내지만 메인댄서를 맡을 정도로 춤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고 카메라도 가까이 오자, 길우성이 유연하면서도 파워풀한 짧은 댄스를 선보였다. 전광판에 그 모습이 크게 잡혔다.
차남석이 중얼거렸다.
“쟤 표정 왜 저러냐….”
[과연 달리기에서도 선배이자 형들을 제칠 수 있을지, 기대가 되네요.]
이윽고 MC들의 멘트가 끝났다.
[제자리에.]
선수들이 레인 앞에 준비 자세를 취했다.
5명을 담은 전광판. 길우성의 얼굴에서 장난기와 웃음기가 사라졌다.
[차려.]
…탕! 신호가 울리고 5명이 일제히 달렸다. 그들이 속한 팀과 팬덤이 경쟁하듯이 응원구호를 크게 외쳤다. 어스래빗 멤버들과 이프림 또한.
“길우성! 길우성!”
“—쟤 왜 저렇게 빨라?!”
[이게 웬일입니까! 토끼라 그런가요?!]
길우성이 놀라운 속도를 보여주며 1등으로 골인했다.
[제일 어린 신인이 선배들을 모두 제치고 1등을 했어요!]
[아직 연골이 싱싱할 때라, 역시…!]
그것도 모자라 2라운드에서도 다시 1등. 길우성은 최종 결승전까지 올라가, 어스래빗 아스대 출전 첫 경기에서 첫 메달을 가지고 돌아왔다. 멤버들은 길우성을 와락 끌어안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박가람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와…. 난 네가 그렇게 빠른지 오늘 처음 알았다.”
“훗.”
길우성이 잘난 척 이마에 손끝을 살짝 대더니, 고개를 높이 쳐들곤 이프림을 향해 방정맞게 두 팔을 흔들었다.
“이예에!”
은메달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꺄아악!”
“잘했어, 우성아아!”
“막내토끼 최고다!”
유난 떨기는.
한율은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관리를 하며 생각했다.
‘달리기가 빨라서 게이트가 열리고 5년이 지나도록 무사히 살아있었던 건가?’
이어서 여자 육상경기가 끝나고, 남자 양궁 단체전이 시작될 차례.
길우성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간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꼭 써야 되나….”
“응?”
거울 앞에서 코에 검은색 동그라미를 칠하고 수염을 그리던 길우성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단순히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를 들고 고민하던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다.”
잠시 후. 스태프의 부름에 따라 한율은 길우성과 함께 대기실을 나왔다.
[이어서, 어스래빗 막내 팀이 입장합니다. …아이구, 귀엽네요!]
커다란 전광판에 토끼 분장을 한 길우성과 새하얀 토끼 귀 머리띠를 한 한율의 모습이 비쳤다.
두 사람과 처음으로 맞붙을 팀은 공교롭게도, 블블.
“어스래빗은 이번이 첫 출전인데 벌써 메달 하나를 땄잖아요! 이번에도 자신 있나요?”
장내 리포터가 블블 멤버들과의 인터뷰에 이어서 한율과 길우성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길우성이 씨익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번엔 금메달을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요즘 10대들이 무서워요!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정말 잘 할 수 있을지! 한번 기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선이라 인터뷰 시간은 짧았다.
활은 한 사람당 5발씩. 길우성이 먼저 사로 앞에 섰다. 한율은 다른 양궁 참가자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길우성에게 외쳤다.
“집중해!”
“내 동생 홧팅!”
뒤에서도 크래의 미랑이 낭랑하게 외쳤다.
먼저 상대팀인 블블의 멤버가 활을 쐈다. 6점.
“…후.”
길우성은 육상에 나갔을 때처럼 이번에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차분하게 활을 들었다. 본인 입으론 타인에게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게 오글거린다고 했지만, 무언가에 집중할 땐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드는 모양이었다.
MC석에 앉은 전 양궁 국가대표가 떠들었다.
[우성 선수 자세 좋아요, 깨끗합니다.]
툭. 길우성이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8점!]
그러나 블블의 멤버가 이어서 10점을 맞히고, 길우성이 다시 8점을 맞혀서 동점. 이윽고 한율의 차례가 왔을 땐 고작 1점이 앞선 상황이었다.
“부탁한다, 써한.”
많은 아이돌과 팬들, 카메라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한율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길우성과 가볍게 손을 터치한 후 사로 앞에 섰다.
[자, 이번엔 한율이 먼저 쏩니다.]
[그런데 어스래빗 친구들은 전혀 윙크를 안 하네요?]
[원래 정확한 거리감을 위해선 양쪽 눈을 다 뜨는 게….]
한율은 장내에 울리는 여러 팬덤의 응원소리, MC들의 말소리를 주의에서 배제한 채 과녁을 노려보다가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퍽!
[…뭐죠? 뭔 소리야?]
[화면 왜 이래?!]
MC석의 MC들은 물론, 뒤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다른 아이돌들도 의아한 얼굴로 일어났다.
과녁 정중앙에 아주 작게 난 구멍. 그 안에 설치된 카메라 영상이 새카맣게 먹통이 되어 있었다.
장내에 흥분한 MC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어스래빗 한율! 첫 발부터 카메라 렌즈를 박살냈어요…!]
이때 한율은 속으로 아차 했다.
저 카메라 렌즈, 우리가 물어줘야 하나?
“서한율! 서한율!”
뒤에서 길우성이 요란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한율은 뒤늦게 담담하게 눈을 끔뻑거리는 전광판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곤 슬쩍 웃어 보였다. 머리띠에 달린 토끼 귀 끝이 살며시 흔들렸다.
꺄아악! 한율아아! 서한유울! 멀리서 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목에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큰소리였다.
스태프들이 황급히 깨진 카메라를 수습하고 새로운 카메라를 설치하는 동안, MC들은 여전히 호들갑을 떨었다.
[아냐, 우연일지도 몰라요.]
[아…! 미리 치킨 약속을 받아내는 거였는데, 벌써 렌즈가 깨졌으니!]
[좋아! 한율이가 앞으로 두 번 더 카메라 렌즈 박살내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있는 아이돌 전원에게 피자 쏘겠습니다.]
[에이, 두 번 더 깨라고요?]
[이건 사주기 싫다는 거 아닙니까?]
[한율아! 피자 괜찮지?]
한율은 MC석을 향해 손으로 OK사인을 보냈다.
‘물어달라고 하면 물어주면 되겠지.’
[OK! 앞으로 한율이가 렌즈 두 번 더 깨면, 여기 있는 아이돌 전원에게 제가 사비로 피자 쏘겠습니다!]
드디어 카메라가 교체되고, 놀란 눈으로 한율을 보던 블블의 멤버가 침착하게 시위를 당겼다.
[9점! 이어서 한율. 이번에도 기적을 보여줄 것인….]
한율은 MC의 말이 끝나기도 전, 활을 쏘았다.
퍽! 과녁 카메라가 또 먹통이 되었다.
—꺄아아악! 이프림의 환호 섞인 비명이 체육관 가득 울렸다. 와아아아! 아이돌들의 함성도.
[…뭐죠, 지금?]
[…아니, 잠시만요. 한율아? 서한율 씨? 새로 교체된 카메라 렌즈를 바로 또 박살내놓고 지금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 아니, 이보세요?]
[요즘 10대들 정말 무섭네요….]
한율은 MC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가까운 마이크에 한율의 목소리가 잡혔다.
“피자 잘 먹을게요!”
이어서 세 번째 렌즈를 박살내어 피자를 얻어먹겠다는 선언.
우와아아아! 조금 전 함성을 지른 아이돌들이 다시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심지어 상대팀인 블블 멤버들까지도 한율의 이름을 외쳤다.
서한율! 서한율!
잠시 후, 남자 양궁 단체전이 끝나고 개인전이 시작되기 전.
한율은 목에 금메달을 건 채, 양궁에 출전하는 다른 아이돌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피자를 먹었다.
* * *
<2017 추석특집 아이돌 스포츠대회>는 추석이 되기 한 달 전쯤 녹화가 진행되어, 방송이 나가기 전까진 대회 결과에 대한 스포가 절대금지였다. 팬이 스포를 하면 해당 팬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 그럼에도 경기 결과는 늘 알음알음 잘도 퍼졌다.
-달리기는 톢이가 토끼 했다던데
ㄴㅇㅇ
ㄴ쌍톢이
여기에 아이돌들 간에 누구랑 누가 친한지, 사이가 별로 안 좋은지, 남녀 아이돌 간에 미묘하게 흐르는 기류에 대해서도. 관중석의 위치가 높아, 아이돌의 표정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까닭이었다.
-울 톢이들이랑 블블 ㄹㅇ 친하더라구욥 블루액션 애들이랑두 간식 나눠먹고ㅎ 특히 민준이 한율이한테 통닭주는 거 보고 완전 빵 터짐ㅋㅋㅋㅋㅋ 지난 생일선물 대신이라곸ㅋㅋㅋ
-사자톢이가 예전에 아림에 있었다더니,. 원카운트 애들이랑 웃으면서 얘기 나누는데, 분위기 좋더라구요ㅎㅎ
-그런데 ㅋㄹ랑 ㄱㅅ소녀 사이 별루에요?? 바로 옆 지나가는데 아예 눈길도 안 주고 대화도 일절 없던데ㅋ
ㄴ두 그룹 사이 안 좋은 것 같다는 소문이 돌긴 했었어요 이유는 안 알려짐
“히잉…, 부럽당…….”
아스대를 보고 왔다는 어스래빗 팬들의 후기를 하나씩 보면서 이아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명색이 서한율, 차남석 1호 팬인데, 1호 팬 다운 활약이 점점 현실의 벽에 부딪혀 줄어들고 있었다.
이아름은 화면에 뜬 도시락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시락엔 어스래빗 멤버가 직접 쓴 쪽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밥을 맛있게 먹으면 최강의 지구토끼로 진화!!! 아자!!!]
“이건 누가 봐도 우성이 오빠가 쓴 거넹. 하…, 나도 오빠들이 사준 도시락 맛있게 먹을 자신 있는데….”
아스대가 열릴 때마다 아티스트 간에 벌어진다는 역조공 도시락경쟁. 가끔 다른 팬덤이 받은 도시락 가격이나 손편지 유무를 노골적으로 비교하며 실망하는 팬들도 있다곤 하지만, 이아름의 입장에선 배부른 투정이었다.
“하루 종일 삼각김밥 하나만 줘도 정말….”
중얼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후기를 클릭.
[제목: 애들 응원 갔다가 ㄹㅇ배터질 뻔ㅋㅋㅋ]
[경기내용은 스포하면 안 되니, 역조공이랑 간단한 목격썰만 품ㅋㅋ
새벽 5시에 체육관 도착해서 인원체크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 잡음. 가자마자 자주 봤던 지구톢이 매니저 분들이 뭔가를 턱하니 건넴. 토끼 그려진 핑크색 담욬ㅋㅋㅋ 그런뎈ㅋㅋㅋㅋ 좀 떨어진 곳에 크래 팬덤 있었는뎈ㅋㅋㅋㅋ 걔네한테도 핑크색 토끼 담요 지급됨ㅋㅋㅋㅋㅋ 그 중 어떤 남자애랑 눈 딱 마주쳤는데 나도 모르게 ㅈㄴ머쓱하게 웃고, 걔도 웃곸ㅋㅋㅋ
암튼 개막식 끝난 후엔 아침도시락이 왔는데..
원래는 우리끼리 애들 맛있는 거 사먹이려구 했는데, 팬매님이 준비하지 말라 그래서 혹시?? 했는데 역시나 진짜.. ㅋ... 얘네 우리 땜에 정산 1년 더 늦게 받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ㅠㅠ
아침 도시락은 오렌지랑 토마토까지 담긴 불고기..8ㅂ8..
점심땐 아x백 스테이크도시락..ㅋㅋㅋㅋ 그런데 중간에 남석이가 올라오더니...(하.. 실물레알갓존잘ㅠㅠㅠㅠ 목소리도 완전 대박.. 크으.. 이번생은당장죽어도여한이 없다 ㅇ<-< 아니 이 글은 마저 다 쓰곸ㅋㅋ)
암튼 남석이가 피자 라지사이즈 세 판을 내밈ㅋㅋㅋㅋ 아닠ㅋㅋㅋㅋ 우리가 진짜 배부르다고 하니까 ‘그럼 한 조각은 내가 먹을게요’하면서 내 바로 옆옆 자리에 앉아서 그냥 하나 먹는뎈ㅋㅋㅋㅋ 다른 분들도 걔 멍하니 쳐다보다가 하나씩 집어 들면서 먹고, 진짜 피자가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코로 들어가는 건지 현실 분간도 안 가곸ㅋㅋㅋㅋ 내가 이런데 남석이 바로 옆에 앉은 분은 또 어땠을까ㅠㅠㅋㅋㅋ
저녁에는 닭강정이랑 완전 휘황찬란한 샐러드의 향연ㅇㅇ..
자정 넘어갈 땐 야식으로 두부 스테이크...? 란 게 나옴ㅇㅂㅇ...]
이아름은 감탄을 흘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와…, 진짜 대박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두부 스테이크 야식은 한율이네 어머님이 보내주신 거라고..!!!!! 어쩐지 야식만은 크래 팬덤이랑 다른 게 나와서 조금 의아했는데.... 이 글을 보실 것 같진 않지만 정말 사랑합니다, 어머님!!!!! 한율이 낳아주신 것만도 진짜 넘넘 감사한데ㅠㅠㅠㅠㅠㅠㅠ
아, 그리고!!!!
나중에 본방사수 꼭 하는 거 추천!!!!
톢이 중 하나가 ㄹㅇ 경천동지의 기적을 보여줌!!!ㅋㅋㅋㅋㅋ
하.. 빨리 방송타서 다른 사람들 반응도 좀 보고 싶닼ㅋㅋㅋㅋㅋ]
연기 잘하네
“좋네요. 단체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게.”
아스대 1차 녹화를 마친 다음 날.
3층 회의실에서 재생되던 영상이 멈췄다. 다음 어스래빗 싱글앨범 곡의 안무가가 가져온 영상이었다. WB래빗 직원들과 어스래빗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감상을 말했다.
“하지만 이거 살리려면… 너희들 빡세게 연습해야겠다.”
“그런데 조금 전 사비 부분 있잖아요, 애들이 물결치듯 동작을 이어가는 부분에서, 손동작을….”
이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연습실로 자리를 옮겨 안무 숙지에 들어갔다. 안무가가 짜 온 안무 중 수정보완하면 좋을 만한 부분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의견을 내며.
“한 박자, 조금 빠른 엇박으로 딴, 딴! 들어갈 땐 빠르고 부드럽게!”
“여기 2분 10초, 이 부분은 각자 상체나 손, 표정을 자유롭게 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각자 성격 드러내듯이.”
안무레슨이 끝난 후엔 오동식 팀장이 새롭게 조정된 레슨 스케줄을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어스래빗은 다음 싱글앨범만이 아니라, 12월에 크리스탈 래빗과 함께 부를 크리스마스 프로젝트 싱글앨범도 준비해야 했다. 일명 ‘토끼돌’의 크리스마스 캐롤. 이 곡으로 뮤닷 <락뮤닷>의 크리스마스 특집방송 무대에 크래와 함께 서기로 하여, 현재 안무 의뢰에 들어간 상태라고.
길우성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상한 사극 어투로 말했다.
“레슨이 빡빡해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자정 전에는 끝나니 참으로 다행이로구나.”
한율도 자신의 레슨 스케줄을 확인했다. 크게 노래, 안무, 피아노. 그러나 학교를 다녀오는 평일엔 한두 시간씩만 해도 하루가 금세 갈 터. 다음 달부턴 드라마 촬영도 있어, 나중에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연습시간이 부족해질 터다.
‘혼자 뒤처지지 않으려면 주말은 자율연습으로 채워야겠네.’
그렇게 레슨과 연습으로 점철된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 9월 16일 토요일. 한율은 간만에 조유찬의 차를 탔다. 차는 중간에 박현우도 태웠다.
“하이, 태바다.”
“안녕하세요, 형.”
“야, 여기에선 너도 센스 있게 태산 형님이라고 불러줘야지.”
“극중에서 형이라고도 안 부르는데, 형님이라뇨.”
오늘은 tv Mu에서 <별☆일없는 집>의 제작진과 주조연 배우들이 모두 자리하는 첫 미팅 겸 1화 대본리딩이 있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WB래빗과 계약한 샵에 들러 가볍게 단장 받고 tv Mu로 향했다.
<별☆일없는 집> 대본리딩이 진행될 회의실 안에는 스태프와 배우들 말고도 연예전문 언론사에서 나온 카메라가 적잖았다. 그리고 오늘 진행될 대본리딩은 나중에 비하인드 영상으로 너튜브나 공식 홈페이지, SNS를 통해 공개될 예정.
“안녕하십니까! 태산 역을 맡은 박현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태바다 역을 맡은 서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율은 박현우와 함께 일일이 돌아다니며 인사했다. 개중엔 그들의 형 역할을 맡은 배우 이제설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박현우라고 합니다.”
“서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0대 남자배우들 중 인기로도 연기실력으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며, 휴식기 없이 소처럼 연기활동을 이어나가는데다가 최근엔 최정상 걸그룹, 온더로즈의 멤버 영아와 공개연애 중인 배우.
그에게 붙은 수식어는 많았지만, 한율은 실제로 그를 보자마자 짧은 감상을 떠올렸다.
‘연예인.’
잘생기고 신체 비율이 좋은 큰 키는 두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미소가 사람의 시선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발성도 시원시원하고 딕션 또한 좋았다.
이제설은 악수대신 박현우와 서한율을 차례대로 가볍게 안았다.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편하게 말 놓으세요, 선배님.”
“그럴까? 이제 내 동생들인데.”
마주보는 형식으로 길게 늘어진 회의 테이블엔 자리마다 PD와 작가, 주조연 배우들의 이름표와 음료가 비치되었다. 비중이 적은 단역들의 자리는 양쪽 벽에 나란히 붙은 의자.
한율은 ‘태바다 역/서한율’이라고 적힌 이름표가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런 공식적인 대본리딩 자리는 처음이었으나 딱히 복잡한 건 없었다. PD부터 시작해 배우들까지 자기소개를 하고, 어떠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이 드라마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열심히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시작되었다.
대본리딩은 첫 장부터 차근차근. 감독이 연기 구멍 하나 없는 드라마를 만들겠다더니, 정말로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만 모아놓았는지 단역들과 아역배우들조차 큰 실수 없이 자연스럽게 대사를 쳤다.
이윽고 이제설이 처음 등장하는 씬.
오랫동안 무명배우로 단역만 맡던 그가 처음으로 관객에게 작은 꽃다발을 받은 날, 그는 극단의 연출가로부터 청천 벽력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니…, 이유를 확실히 말해주세요, 선배님!”
“내가, 연출가인 내가 너 쓰기 싫다고 하잖아! 얼굴 반반한 것만 믿고 무대에 오르겠다는 그런 썩은 정신머리 달고 있는 놈, 기용 안 한다고!”
“오해십니다, 선배님! 제가 언제 제 외모만으로 무대에 오르겠다고…!”
“아아, 시끄럽고! 가! 괜히 물 흐리지 말고, 혼자 연기 연습이나 더 하고 와. …하~나, 계약만 아니었어도 저거 바로 잘라버리는 건데, 어디에서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게 굴러 와선.”
“…하. 하…….”
기가 찬 웃음, 그 뒤에 혼란과 섦이 담긴 긴 한숨. 그러다 짧게 숨을 들이켜면서 누군가를 돌아보았다. 실제로는 아무도 없는 허공이지만, 극중에선 그를 보면서 잘 됐다는 듯 비웃는 동료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 눈빛엔 이대로 내 꿈이 좌절되는 건 아닐까 하는 짙은 불안도 섞였다. 긴 무명 시간 동안 그의 자존감을 서서히 시커멓게 물들이던 체념의 그림자.
앉아서 진행하는 대본리딩이었지만, 이제설은 ‘태하늘’의 감정신호까지 구현하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한율은 이제설의 연기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잘하네.’
대본리딩에서도 이럴진대, 현장에선 과연 어떨까.
몇 씬이 지나, 이러저러한 사연 끝에 한 집에서 다시 만난 삼형제.
태산, 태바다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가 아닌 외조부모 손에서 자란 태하늘과, 5살이 되던 해에 부모의 이혼으로 갈라진 쌍둥이. 11년 만에 만난 삼형제는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그나마 장남인 ‘태하늘’이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
“바다 넌 미국에서 살았었지? 한국에 너무 오래간만에 와서 낯설진 않아?”
“저 2년 전에 들어왔는데요.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해서.”
“아… 하하, 내가 깜빡했다.”
“형은 나랑 쟤한테 전혀 관심이 없었나 봐요. 하긴, 동생이라고 해도 거의 남이었으니까. 연락도 한번 한 적 없고.”
“쟤? 야, 내가 형이거든? 너 진짜 나 전혀 기억 못—, 야! 사람이 말하는데 어디 가!”
리딩이 진행될수록 감독의 얼굴엔 서서히 만족스런 웃음이 피었다. 리딩이 끝난 후엔 작가와 제작진의 머릿속 이미지와, 대본을 토대로 배우들이 해석한 캐릭터에 대한 생각과 의견이 오고 갔다.
“…그리고 씬44의 교차로에서는 산이가 조금 더 당혹스러운 표현을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바다 학교 씬에서, 선생님은….”
그렇게 대본리딩은 시작한지 3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끝났다. PD와 작가, 주조연 배우들이 한곳에 모여 사진을 찍고, 주연들만 모여서 다시 또 기념사진을 찍고.
“이번엔 삼형제만 모일게요. 포즈는 자유롭게!”
차칵차칵.
그 다음은 주연인 이제설부터 인터뷰 영상촬영. 한율은 박현우 다음 순서였다.
“안녕하세요, <별☆일없는 집>에서 태바다 역을 맡게 된 서한율입니다. <별☆일없는 집>으로, 처음으로 장편 드라마에 도전을 하게 되었는데요, 정말 훌륭한 선배님들과 함께 촬영하는 것이니 누가 되지 않도록 끝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이 봐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VJ가 OK사인을 보냈다. 한율은 남은 스태프와 다른 배우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곤 회의실을 나섰다. 대본리딩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두르느라 아침을 걸렀더니 배가 고팠다.
‘오늘 회사 점심 메뉴가… 또 순두부였지. 밖에서 먹고 들어가자고 할까?’
“아.”
복도에서 박현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제설이 한율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안 갔나?
“마침 점심 같이 먹자고 얘기하던 참이었는데, 한율이 넌 어때?”
그들과 한 걸음 떨어져 서있던 조유찬은 괜찮다는 듯 조용히 웃고 있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미리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파악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네.”
이제설이 한율과 박현우에게 점심을 사주겠다며 데려간 곳은 테이블마다 나무 파티션이 세워진 소갈비찜 전문식당이었다.
“여기 갈비찜이 완전 예술이야. 형이 사는 거니까, 부담 없이 마음껏 먹어.”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박현우와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한율이 수저통에서 수저를 챙기는 동안, 박현우는 컵에다 물을 따랐다. 이제설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두 사람을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우리 부모님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셨잖아.”
“아? 네.”
난데없이 그가 꺼낸 이야기는 드라마 속 삼형제의 배경 설정.
“드라마가 중반까지 전개되고 나서야 형제들이 부모님 사고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지만, 정말 그제야 눈치 챈 걸까?”
“그건 아닐 것 같아요. 사람이 안 좋은 일을 겪으면 일단 부정부터 하잖아요. 그것도 연속으로 벌어진다면,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뭔가 이상하다. 이렇게.”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현우의 말에 동의를 표하곤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쌍둥이들 나이가 열여섯인데다가, 이제 막 만나서 서먹서먹한 형제들한테 그런 얘길 꺼낼 만한 성격들도 아니라서 그런 의혹과 의심이 덜 부각되는 것 같아요. 나중에야 이러저러한 일을 겪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슬며시 드러낸 거 아닐까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흐려져서?”
“네. 더 이상 경계하고 의심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비치는 거죠.”
“이러다 장남이 범인이거나 사고원흉이면 어떡하지.”
“설마요. 그러면 감독님이 말씀한 ‘추구하는 드라마의 방향’이랑 완전히 어그러질 텐데.”
음식이 나온 이후에도 이제설은 주로 드라마 설정과 전개에 따른 캐릭터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한율과 박현우의 견해를 듣길 원했다. 한율도 심심한 사적인 이야기보단 일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좋았기에, 부담 없이 생각을 말했다. 이는 박현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웅.
“…잠시만요.”
그리고 잠시 갈비를 뜯느라 대화가 소강되었을 때, 한율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부윤방PD의 톡이었다.
-[이윤영 씨 캐스팅 확정되었어요. 한율 씨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윤주 역으로^^ 아참, 천희 역으론 이희우 씨가 낙점되었습니다ㅎㅎ; 미리 말을 한다는 걸 깜빡해서; 그리고 내일이나 모레에 우리 영화 캐스팅 라인업 기사가 나갈 예정입니다ㅎㅎ]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
한율은 답장을 보낸 후, 부윤방의 톡을 복사해서 오동식 팀장에게 보냈다. 회사로도 연락이 갔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
옆에서 갈비를 뜯던 박현우가 물었다.
“무슨 연락?”
“다음에 들어갈 작품 감독님이요.”
“오오. 영화? 드라마?”
“영화요.”
“누구랑 찍는데?”
이제설도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한율은 그제야 공교로운 우연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설, 이희우, 이윤영. 죄다 이 씨였다.
“이희우 선배님이요.”
어차피 내일 발표될 거라고 하니, 언급 정돈 괜찮겠지.
“희우 선배님? 대박.”
“아….”
눈동자를 빠르게 낮게 굴리며 이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우 누나랑.”
“잘 아세요?”
“예전에 사귀었었어.”
“네?!”
박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되물었다. 이제설이 생글거리며 웃었다.
“드라마에서.”
“아아, 그 작품….”
“그때가 나랑 희우 누나가 스무 살, 스물 한 살이었는데, 그때도 누나가 연기를 정말 잘했었어. 지금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고.”
“희우 선배님도 선배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다시 두 분이 같이 연기하면 대박날 것 같은데. 그때도 케미 굉장히 좋았잖아요.”
“그러면 좋겠지만….”
이제설이 흐렸던 말을 이었다.
“희우 누나랑 내가 앞으로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일은 없을 거야.”
“네? 왜요?”
의아해하는 두 사람을 향해 그가 눈썹 끝을 내리며 웃었다.
“내가 누나한테 굉장히 큰 잘못을 저질렀거든.”
넌 앞으로 쑥쑥 크겠구나
“이제설 선배님 말이야.”
식당 앞에서 이제설과 헤어지고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박현우가 운을 뗐다.
“듣던 대로 사람을 빤히 관찰하는 게 습관인 것 같더라.”
“습관이 아닌 의도적 행위 아니었어요?”
한율과 박현우의 의견에 대해 들으면서도 이제설은 두 사람의 사소한 동작도 모두 눈에 담고 있었다. 요즘 10대 남학생들은 이런가, 관찰하듯이.
“그런가? 아무튼. 그런데 대체 희우 선배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딱히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난 건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은데. 같이 드라마 나올 때 워낙 잘 어울려서 실제로도 사귀는 사이 아니냐는 추측은 들어봤지만.”
“글쎄요.”
“…넌 정말.”
별 다른 표정 없이 어깨를 으쓱이는 한율을 보곤, 박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구나.”
“형도 회사로 갈 거예요?”
“어. 회사 연습실이 연습하기에 편해서. 하…, 그런데.”
“……?”
“나도 연애하고 싶다.”
엉뚱하게 튀는 대화 맥락에 한율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박현우가 제 손목을 툭툭 가리켰다.
“이제설 선배님 손목에 있던 팔찌 못 봤어? 그거, 영아 선배님이 직접 만든 커플 팔찌라고 기사도 났었는데.”
“아아. 그런데 형도 이제 아이돌 지망생 아니니까, 여자 친구 사귀어도 괜찮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박현우가 멀리 시선을 던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마음에 둔 사람이 나를 남자로 안 본다.”
그렇구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딱히 궁금하지도 않지만, 예의상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박현우가 곧바로 알아서 털어놓은 까닭에.
“너 혹시 미현이 누나한테 연락한 적 있냐? 누나가 요즘 내 톡을 읽고 한참 후에야 답장하는데, 나한테만 이러나 싶어서.”
“번호도 모르는데요. 길우성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아니, 절대 하지 마. 알면 또 시끄럽게 난리칠라.”
다음 날, 부윤방PD의 말대로 <고양이 난로>의 캐스팅 확정 기사가 떴다.
[서한율X이희우X이윤영, 영화 <고양이 난로> 캐스팅 확정]
[장르드라마의 대가라고 알려진 이사문PD가 속한 눈길 프로덕션이, 내년에 선보일 영화 <고양이 난로>에 서한율과 이희우, 신인배우 이윤영의 캐스팅을 확정했다.
<고양이 난로>는 신인영화감독인 부윤방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으로, 고양이를 싫어하는 고등학생 ‘윤우’가 어쩌다 돌보게 된 길고양이 ‘못난이’로 인해 기이한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윤우’ 역으론 드라마 <하울링>과 <객귀> 시리즈에서 짧지만 강렬한 연기력을 뽐낸 서한율이 캐스팅되었으며, ‘윤우’의 누나 ‘윤주’ 역으로는 서한율과 함께 <객귀, 해>에서 만났던 신인배우 이윤영이 낙점되었다.
이희우는 어느 날 갑자기 ‘못난이’의 주인이라고 우기며 나타난 ‘천희’ 역을 맡아….]
-아나 동물영화는 무조건 눈물 나서 못 본다고...ㅠㅠ...
-일단 배우들 연기력은 별 걱정 안 해도 될 듯ㅇㅇ
-아직 언제 상영될지는 안 나왔넹
ㄴ서한율 티비뮤 드라마 찍어야 해서,. 이 영화는 빨라도 겨울에나 크랭크인하지 않을까영
-서한율이랑 이희우 이젠 아예 대놓고 만나네ㅋㅋㅋ
ㄴ????
ㄴ작년 드라마 촬영하면서 딱 하루밖에 본 적 없는데 아직도 이상한 루머 시동거는 애가 있네ㅍㅅㅍ
-희우님 ㅇㅅㄹ빗 데뷔쇼케 이후 성덕 인증 가나요ㅋㅋㅋㅋㅋㅋ
-이희우 최근 고양이 키운다더니 이 영화 때문이었구나ㅎㅎ
ㄴ동물은 좀 사지 말고 입양하자 진짜
ㄴ응 유기동물보호센터에서 데려온 아이라고 함^^
-한율이 본가에서 실제로 고양이 두 마리 키우는데ㅎㅎ 츤츤거리는 캣대디 역 기대합니다!!!
-고양이 이름 다시 지어줘라 못난이가 뭐냐...ㅜㅜ 못생겨도 귀여운 게 고양인데..8ㅂ8
한율은 기사의 댓글까지 대충 훑었다.
‘가제였던 제목은 그대로 가져가기로 했나보네.’
“뭐 봐?”
철컥.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유호가 물었다.
“레시피?”
“인터넷기사요.”
“…….”
뒤에 앉은 박가람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너무 당당히 딴 짓한다고 밝히는 거 아냐?”
그들이 탄 차에는 여기저기 그라 영상 촬영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탑승한 인원은 한율, 유호, 박가람, 라이언.
오늘 찍는 건 앞으로 다가올 추석특집 에피소드.
“거짓말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율아, 레시피를 검색해서 사야 할 재료 정리 좀 해주렴.”
“그런데 호 형은 면허 언제 딴 거야?”
“고3 겨울방학 때 땄으니까… 3년은 넘었지?”
“지금까지 달린 주행거리는?”
“하하하하.”
유호가 교과서를 읽는 듯한 톤으로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박가람이 차창에 달라붙어 바깥을 향해 외쳤다.
“으아아, 살려주세요…!”
“걱정 마. 뒤에 초보운전 스티커 아직 안 뗐으니까, 천천히 달려도 다들 이해해 주실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리더!”
라이언이 뒷좌석에 놓여있던 곰 인형을 무릎에 앉히며 물었다.
“이 차는 누구 차야?”
“명의는 내 거지만 내 것 같진 않은 내 차야.”
“……?”
“뭔 소리죠.”
“평소엔 엄마가 타고 다니거든.”
“그럼 이 인형은?”
“그건 전에 팬 분한테 받은 거.”
“응.”
라이언은 곰 인형의 머리를 툭툭 누르듯 쓰다듬으면서 만지작거렸다. 한율은 그렇게 잠깐 오디오가 비었을 때 적절히 끼어들었다.
“송편 만드는 재료는 맵쌀가루, 소금, 설탕, 통깨, 꿀, 참기름. 맵쌀가루는 시중에 파는 것도 있지만, 방앗간에 맵쌀을 사가지고 가면 빻아주기도 한대요. 송편에 색 넣으려면 단호박 가루나 쑥 가루, 자색고구마? 이런 가루를 넣으면 되고.”
“그런 재료들은 지금 당장 구하려면 대체 어디로 가야되는 거야?”
“시장에 가면 있지 않을까요?”
“OK. 내비에 찍어줘.”
유호가 운전하는 차는 느릿느릿, 안전하게 목적지로 나아갔다.
“…….”
“…….”
정말 유호를 믿어도 괜찮을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쥐고 있던 박가람의 얼굴근육이 스륵 풀어졌다.
“운전대를 잡으면 난폭하게 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말 걸지 마, 집중 안 돼.”
“…….”
“노래 듣자. 심심해.”
“안 돼, 집중력 떨어져.”
꽈악.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핸들을 쥔 유호의 손등엔 핏줄이 불거져있었다.
한율은 차창 아래에 팔꿈치를 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11대. 느릿느릿 가는 이 차를 추월한 차량 숫자다. 심지어 조금 전 그들을 추월한 차량엔 초보운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박가람이 중얼거렸다.
“내가 당장 면허를 따도, 호 형보단 더 빨리 달릴 자신 있어.”
한율은 예전, 로건 워커의 몸으로 차를 운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동감했다.
“저도요.”
그렇게 시장에서 장을 보고 온 후엔 회사 구내식당에서 이건우, 차남석, 길우성, 강보배와 합류했다. 그들 넷은 다른 곳에서 전을 만들 온갖 재료를 사 온 참이었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 있는 조리대를 빌려서 송편과 전을 만드는 촬영을 시작했다.
“앗뜨!”
“기름 쓸 땐 조심히!”
지글지글 기름을 두른 팬에다 전을 굽는 다른 조를 보며, 박가람이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손으로는 별 모양 송편을 빚으면서.
“우리는 장을 보러 다녀온 과정도 안전, 조리과정도 안전하구나.”
“라이언은 나중에 예쁜 딸 낳겠다.”
“왜?”
“한국엔 송편 예쁘게 빚으면 나중에 예쁜 딸 낳는다는 속설이 있거든.”
“왜?”
라이언이 손 안에서 송편을 동글동글 빚으면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딸은 엄마가 예뻐야지.”
“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게? 엄마만이 아니라 아빠도 예뻐야지. 송편 모양으로 딸의 외모가 결정되면.”
박가람이 한율이 빚은 송편을 가리켰다.
“미래의 한율이 딸은, 얘 유전자를 완벽히 무시하는 외모를 갖고 태어난다고.”
“욕이야, 칭찬이야?”
“둘 다!”
“우리.”
잠자코 송편을 빚던 한율은 고개를 들어 웃었다.
“이대론 심심하니까 각자 송편 하나에 커피 원두나 와사비 넣는 거 어때요? 그리고 서로 고른 거 먹여주기.”
“히익…!”
라이언이 진지하게 타일렀다.
“음식 갖고 장난치면 못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