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427)

* * *

MBS 내에 있는 한 편집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경고 종이가 부착된 그곳에선, 추석 때 내보낼 <2017 추석특집 아이돌스포츠대회> 편집이 진행 중이었다.

“하아암….”

편집을 맡은 아스대 조연출PD는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했다. 아스대 녹화시간은 40여 시간. 그러나 설치했던 카메라가 수십 대였기에, 그걸 동시에 돌려보며 다듬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그런데 다시 봐도 이건 대박이네.’

어스래빗의 한율이 연속으로 카메라 렌즈를 세 번 박살내는 장면.

당시 PD는 박살난 카메라 렌즈를 걱정하기보단, 좋아서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화제가 되고도 남을 장면이 뽑혔으므로.

여기에 MC가 센스 있게 외쳤다.

[아이, 그만 좀 박살내! MBS 살림 다 거덜 나겠어! 내 지갑도!]

결국 제작진은 심각하게 회의하는 척하곤, 한율이 활을 잡는 순서가 되면 과녁 뒤의 카메라를 부랴부랴 치우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리고 여봐란듯이 다시 과녁 정중앙에다 화살을 박아버린 서한율.

양궁 해설을 위해 왔던 전 국가대표인 전 감독은 양궁이 끝나자마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MC석에서 부랴부랴 내려가 서한율을 잡고 얘기를 나눴다. 그 장면도 찍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방송에 다 내보내면 대형기획사에서 살려도 너무 살려주는 거 아니냐 난리를 칠 테니…, 전 감독이 서한율을 찾는 장면은 본방 이후 너튜브에 풀고.’

우웅. 그때 진동으로 둔 핸드폰이 울렸다. 같은 예능국에 있는 동기PD의 전화. 조연출PD는 헤드셋을 벗고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야, 아스대 그림 하나 나왔다며? 축하한다.]

“어디 동굴 틀어박혀 있다가 왔냐. 그걸 이제야 들으셨어요?”

-[전 감독이 걔한테 가서 양궁 배울 생각 없냐고 물었다던데. 진짜야?]

그는 일시 정지된 화면의 서한율을 보면서 대답했다.

“어. 아스대에서 쓰는 활이 아마추어가 쓰는 것보다 약하고 과녁까지 거리도 짧잖아. 그래서 여기에서 아무리 잘 쏴도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한텐 한참을 못 미치거든? 그런데 감독이 보기엔 그걸 넘어섰나 봐. 정말 진지하게 애를 붙잡고 얘기하더라고.”

-[오오…. 걔 뭐 별 다른 소문은 없지? 학교 다닐 때 사고 좀 쳤다던가.]

“섭외하게?”

-[잠깐 특별출연 식으로 부탁 좀 하려고. 너희 쪽은 살릴 거 아냐?]

“당연히 살려야지. 국장님이랑 선배님도 그러라고 했고.”

-[좋았어. 그럼 수고해.]

통화를 끊은 조연출PD는 다시 헤드셋을 썼다. 그러곤 과녁을 노려보는 서한율의 얼굴을 여러 구도로 이어 붙이며 중얼거렸다.

“넌 앞으로 쑥쑥 크겠구나…. 아참.”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편집 작업을 이어나가던 그는, 다른 배경 카메라에 찍힌 아이돌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PD님이 블블이랑 히아신스는 되도록 연속으로 나오지 않게, 같이 찍힌 장면도 내보내지 말라고 했었지?’

한편 그 시각, WB래빗의 매니지먼트B팀.

오동식 팀장은 더순한화장품 측에서 보낸 CF 및 화보, 그리고 브랜드 팬미팅 관련한 이벤트 일정과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22일부터 너튜브와 SNS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광고를 띄우고…, 팬미팅 응모권은 기초화장품 세트에만 들어있고, 팬미팅은 10월 9일 한글날 단 하루. 사전예약구매자들한테 주는 특별사은품은….’

부스럭. 더순한화장품에서 퀵으로 보낸 굿즈 샘플은, 서한율의 포스터와 사진이 담긴 키링이었다. 인터넷으로만 주문받는 사전예약구매는 특별사은품을 옵션으로 지정할 수 있기에, 받고 싶은 사람만 받으니 쓸데없이 버려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포스터는 괜찮은데, 키링이 조금 부실해보이네요.”

막 사무실로 들어온 조유찬이 말했다. 기름진 전 냄새를 풍기며.

“그게 오늘 애들이 만든 거예요?”

“네. 하나 드셔보시겠어요? 생긴 건 엉망인데 맛은 괜찮아요.”

조유찬이 떡과 전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그릇에 함께 담긴 포크로 일단 전부터 먹은 오 팀장은 몇 번 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익었네요.”

“남석이랑 건우가 전을 잘 부치더라고요. …그런데 팀장님, 남석이가.”

다음으로 일부러 못생긴 송편을 골라 찍던 오 팀장은 의아한 눈으로 조유찬을 쳐다보았다. 조유찬이 의자를 끌어와 앉은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추석에 잠깐 집에 다녀와도 되냐고 묻던데. 괜찮을까요?”

“할아버지 댁이요?”

“네.”

오 팀장은 차남석의 드라마 촬영 스케줄을 모니터에 띄웠다. 추석 당일과 그 다음 날까진 오프였다.

“스케줄은 괜찮은데…, 보내도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지난번에 온 연락도 있고.”

“그래서 더 가고 싶나 봐요. 할아버지가 걱정이 돼서.”

“그래도 좀 불안한데….”

미간을 깊게 찡그리며 오 팀장은 송편을 입에 넣었다. 누가 빚은 건지는 몰라도 겉모양과 다르게 속이 알차서 맛있었다.

오 팀장은 송편을 우물거리며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툭툭 두드렸다.

‘그렇다고 명절에 회사 사람이 같이 갈 수도 없고. 어쩐다….’

네 친구니까 네가 잘 알겠지

우웅. 그때 오 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MBS 예능국 홍석주PD]

“네, 홍PD님! 오래간만입니다! …네,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10월 9일이요? 아… 죄송하지만 그날 4시부터 스케줄이 잡혀있어서요. …아니요, 광고모델로 참여해야 하는 이벤트 스케줄이라 조정은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섭외에요? PD가 직접?”

통화를 끊자마자 조유찬이 물었다.

“네. 자기들 프로에 한율이가 특별출연으로 잠깐 나와 줄 수 있냐고요. 출연자들 활쏘기 미션 문턱 역할로.”

“아….”

조유찬이 아쉽다는 탄식을 흘렸다. 최근 지상파 예능은 대형기획사소속, 혹은 인기가 많지 않은 이상 점점 뚫기가 힘들어지는 추세였으므로. 그것도 MBS의 홍석주PD가 있는 곳은 제법 시청률이 나오는 주말 저녁 예능.

“하지만 스케줄 날짜가 겹치니… 많이 아쉽네요.”

“메인PD에게 물어보고 연락 준다니 아직 상심하기는 이릅니다만, 안 되도 뭐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애들 촬영 다 끝났죠?”

“네. 지금 다들 메이크업 지우고 각자 연습에 들어갔을 겁니다.”

“네.”

오 팀장은 전과 떡을 하나씩 포크에 꽂아 한꺼번에 입에 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라이언이었다. 그 다음은 박가람, 마지막으로는 한율.

“팬미팅이라곤 하지만 팬 사인회에 가까워. 진행시간은 오후 4시부터 6시. 당일 현장에서 다시 5명 정도 추첨해서 한율이 너랑 폴라로이드 사진 촬영 이벤트도 진행할 예정이고.”

“진은수 씨도 같이 하는 거죠?”

오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 외의 설명을 이어나갔다. 드라마 촬영 스케줄에 대해서도.

“그리고….”

오 팀장이 디지털피아노가 놓인 보컬연습실 안을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여러 죄목으로 고소 진행했던 스토커, 기억하니?”

한율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스토커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객귀, 해> 지방촬영을 가기 전이었던가. 숙소 앞까지 찾아와 난리를 쳐서, 당시 주변으로 소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음마법을 쳤던 기억이 났다.

“네. 재판 결과가 나왔어요?”

“그래, 지난주에. 벌금형이 선고됐는데, 항소하지 않고 법원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더라. 그래서 이제 민사를 진행할까 하는데… 한율이 네 생각을 다시 묻고 싶어서.”

이는 안티들이 악의적으로 왜곡해 퍼뜨리기 딱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어려서 잘 모르고, 철없는 마음에 연락 한번 했다간 형사 고소에 민사소송까지 당한다, 나중에 숙소 앞을 지나도 스토킹으로 고소당한다고 선동하고, ‘자신을 좋아해주고 돈을 쓴 팬을 오히려 고소하는 아이돌’이라고 비아냥거릴 게 뻔하므로.

오 팀장은 그걸 걱정하는 듯했다.

“네, 진행해주세요. 기사로도 내주시면 더욱 좋구요.”

“그래도 괜찮겠어?”

“슬슬 그런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서요. 미리 경고도 줄 겸.”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최근에도 가끔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온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으니, 메시지나 톡으로.

-[한율이 핸드폰 맞아요?]

지난번 스토커처럼 집요하진 않아서 그냥 무시하곤 있지만.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부모님한테도 한번 여쭤보고, 부모님도 동의하시면 민사 진행하고 기사도 낼게.”

“네, 감사합니다.”

* * *

단체 안무연습이 끝난 뒤, 강보배가 연습실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아이고, 죽겠다….”

“보배 너도 나랑 같이 운동 다니자. 네 얼굴에 복근이 없으면 나중에 팬들이 배신감을 느낄지도 몰라.”

“내 얼굴이 어떤 얼굴인데…?”

“메이크업 받으면 좀 세보이잖아. 평소에도 무표정하게 입 다물면 시크해보이기도 하고.”

강보배가 반대쪽으로 몸을 굴리며 이건우를 등졌다.

“외모에 따른 편견은 거부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서 쭉쭉 스트레칭을 하던 박가람이 말했다.

“쟤 키 좀 큰 것 같지 않아?”

박가람의 시선 끝에 서있는 건 차남석. 막 캐비닛에다 안무연습용 신발을 집어넣던 차남석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나?”

“어, 너. 전에는 그 캐비닛에 붙은 스티커에 닿을락 말락 했었는데, 오늘 보니까 좀 넘은 것 같다?”

그런가? 하는 얼굴로 캐비닛과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거울을 돌아보던 차남석이 씨익 웃었다.

“남석이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한율이도 몇 달 사이에 키 좀 크지 않았어? 라이언도 처음 봤을 때보다.”

“한창 쑥쑥 클 좋은 나이이긴 하지. 내 성장판아, 듣고 있니? 일 좀 해!”

자신의 무릎을 붙잡고 외치는 박가람의 옆에서, 길우성이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이참에 한율이랑 둘이 신발 벗고 나란히 서 봐. 그럼 알겠지.”

멤버들의 시선이 모두 한율과 길우성을 향했다. 한율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안무연습용 신발을 휙휙 벗었다. 올해 봄,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했을 때 한율은 176.2cm, 길우성은 176.7cm로 길우성이 근소한 차이로 컸었다.

“둘이 발뒤꿈치 똑바로 붙이고.”

한율은 길우성과 반대로 붙어 섰다. 멤버들이 모두 일어나서 두 사람의 키를 확인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어?”

길우성의 머리에 일자로 편 손을 얹어서 한율의 키와 가늠하던 유호가 눈을 끔뻑거렸다.

“한율이가 더 큰데?”

“왓?!”

길우성이 기겁을 하면서 떨어졌다.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내가 봐도 한율이가 좀 더 컸어.”

“역전 당했네.”

“그럼 이번엔 라이언이랑 한율이.”

“이게 진짜일리 없어….”

충격 받은 얼굴로 쓰러진 길우성이 노래가사를 중얼거렸지만, 모두의 관심은 라이언과 한율에게 쏠려 있었다.

“비슷한데?”

“아냐, 라이언이 아주 미세하게 좀 더 큰 것 같아.”

“남석이 너도 서 봐. …오, 남석이가 더 크네. 너 이렇게 보니까 진짜 키 많이 컸다.”

“차남석 또 좋아한다.”

“님들….”

쓰러지다 못해 연습실 바닥에 대자로 발라당 누운 길우성이 힘없이 그들을 불렀다. 세상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뻗었다.

“내 생일선물은… 에어가 들어간 운동화로…, 써한보다 키가 좀 더 커보이게…….”

“뭐래.”

“…라고는 말했지만.”

박가람이 모자 위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갖고 싶은 게 있다니 준비를 안 할 수도 없고.”

“그런데 왜 저에요?”

길우성의 생일인 28일 하루 전. 한율은 학교수업이 끝나 회사로 오자마자 박가람에게 끌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박가람이 미리 부른 택시에 탑승.

“네 친구니까 네 친구 취향을 네가 가장 잘 알겠다는 마음에서?”

“…아아.”

“어쨌든 레슨 시작되기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해.”

“회사 오기 전에 미리 연락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박가람이 활짝 웃으며 당당히 대답했다.

“깜빡했어!”

“…….”

“우리 셀카나 찍을까? 막내 생일선물 사러 가는 길~.”

대답도 듣지 않고 카메라 앱을 실행시킨 핸드폰을 들기에, 한율은 얘가 정말 왜 이러나 쳐다보다가 화면 안으로 들어갔다.

찰칵.

“시크하게 웃는 서한율… 저장. 그런데 너 길우성 발사이즈 알아?”

“네, 280.”

처음 WB래빗에 들어간 날, 길우성에게 연습실에서 신을 신발을 빌렸을 때 알았다.

“어? 그 녀석 더 크면 안 되는데?”

“무슨 소리에요?”

“발이 크면 키도 큰다잖아.”

“그거 과학적 근거는 빈약한 속설이라던데요. 키 작은 걸로 어필한 어떤 가수 겸 MC도 발이 280이잖아요.”

“너는 몇인데?”

“저도 280 정도?”

박가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속설이었으면 좋겠다.”

“…….”

찰칵.

“두 살 위 형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서한율…, …앗, 내 핸드폰! 왜 지워!”

* * *

길우성의 생일파티는 지난 달 한율, 이번 달 초에 있었던 강보배의 생일 때처럼 당사자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나 무방비할 때를 노려 기습적으로 치러졌다.

새벽 6시. 박가람이 길우성이 자고 있는 2층 침대 위로 올라가 촛불 모양 전등을 켜고, 길우성의 이름을 흐느끼면서 불러 깨웠다. 맞은편 침대를 쓰는 한율은, 길우성이 멍하니 눈을 떴다가 ‘흐아악!’ 놀라 비명을 지르고 천장에 머리를 쿵 박는 모습을 촬영했다.

길우성이 어느새 자신의 배 위에 놓여있던 신발 상자를 발견하곤, 그걸 끌어안고 아프다 징징대는 모습도.

“으아니?! 아무리 재미를 위해서라지만, 어? 새벽에 팅팅 부은 못생긴 박가람 형을 들이밀어서 사람을 깨우고, 어? 민초케이크를 먹여? 이게 생일축하야? 생일형벌이지?!”

후룩. 구내식당에서 기가 찬 얼굴로 항의하던 길우성이 오늘 아침밥 메뉴로 나온 소고기미역국을 마셨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이건우가 큭큭거리며 길우성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막내야, 너 새벽부터 입 꼬리가 주체를 못하고 자꾸 실실 올라가는 거 다 보이거든?”

‘길우성’을 검색한 포털사이트에는 이프림이 길우성을 위해 준비한 생일 서포트 기사가 주르륵 떠있었다.

“흠, 흠!”

“라방은 몇 시에 할까? 우성이 너 오늘 누나 만나기로 했다며.”

“넵, 하지만 7시까지는 들어올 것 같습니닷. 그런데 오늘 라욘 형이랑 가람이 형, 남석 씨 드라마 카메오로 촬영가기로 하지 않았어?”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아주 잠깐만 나오는 거라, 많이 늦진 않을 거라고 들었어. 남석이는… 모르겠당.”

“남석이는 너무 늦는다 싶으면 연락주기로 했어.”

“그럼 10시쯤이 적당하지 않을까?”

“써한.”

“……?”

라방 관련 회의를 하는 멤버들을 두고 길우성이 한율을 조용히 불렀다.

“곰순이가, 괜찮으면 너도 저녁 같이 먹자고 물어보라던데. 콜?”

“왜 서한율만?”

바로 옆에 앉아 대화를 들은 박가람이 끼어들었다.

“내 몫은 내가 낼 테니 나도 데려가시게.”

“왜죠.”

“너랑 똑같이 생겼는지 궁금해서.”

한율이 대답했다.

“안경 벗으면 좀 닮았어요.”

“그 말 들으니 더 궁금해지는데…?”

“안 닮았거든?”

“현우 형도 데려오래?”

차남석은 오늘 하루 종일 드라마 촬영이라 안 될 테니.

길우성이 입가만 빙긋 올렸다.

“데려오라곤 했는데, 그 형은 눈 고치기 전까지 내가 중간에서 컷하려고.”

“그래.”

학교수업이 끝난 후 한율은 길우성, 박현우와 함께 길우성의 생일축하 전광판 광고가 게재된 지하철역 중 한곳을 찾았다.

길우성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프림의 서포트엔 예상보다 많은 금액이 모였다. 전철역 18곳 전광판 광고를 포함, 유기동물 보호센터에 천만 원 상당의 기부물품을, 학교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와 국내장애아동후원단체에도 각각 천만 원씩 기부되었다. 모두 길우성의 이름으로.

듣기로는 지난 번 길우성의 과거 학폭 피해사실이 드러났을 때, 아픈 과거를 딛고 밝은 얼굴로 무대에 서는 모습에 감명 받아 팬클럽에 가입한 사람이 은근히 많았다고.

“자, 내가 주는 생선.”

전광판 앞에서 인증샷을 찍은 후, 박현우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길우성에게 내밀었다. 굉장히 리얼하게 생겨서 징그러운 생선 슬리퍼였다.

“아주 고오맙소, 형님.”

“그래. 그리고 이따가 누나 만나 저녁 먹는다면서?”

길우성이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박현우를 쳐다보면서 한 걸음 떨어졌다.

“으아니,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미현이 누나한테 들어서 알았지. 하지만 슬프게도 난 학원 레슨시간이랑 겹쳐서….”

“예쓰!”

“…너 이리 와. 생일빵 좀 맞자.”

“형님은 눈 삔 거 고치기 전까진 우리 곰순이한테 접근금지요! 알겠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내 마음이지! 그리고 나 눈 안 삐었거든?!”

“…….”

차남석이 없으니 까부는 둘을 컨트롤할 사람도 없다.

한율은 말없이 그들의 유치한 싸움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다가오는 여학생들을 돌아보았다. 누가 봐도 길우성의 생일축하 전광판에 생일축하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도 붙이고, 인증샷을 찍기 위해 찾아온 팬들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제자리에서 동동 구르면서 서로의 팔을 때린다.

“헉, 진짜 한율이야…!”

“거 봐, 내가 닮았다고 했잖아, 어떡해…!”

한율은 그들에게 생긋 웃으면서 길우성과 박현우를 가리켰다.

“우성이 저기 있어요.”

“더 이상 다가오면 이 생선으로 때릴 줄 아쇼, 형님! 훠이! 훠이!”

“아이씨, 무기부터 쥐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상황이지. 팬들은 의아한 눈을 끔뻑거리다가 조용히 핸드폰을 들면서 한율을 바라보았다. 무언의 승낙요청.

한율은 마음껏 찍으라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사입니다

한 커뮤니티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 길우성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야기와, 여러 가지 어스래빗 짤이 올라오던 게시판에 눈에 띄는 새 글이 올라왔다.

[제목: 우성이 전광판 보러 갔다가 당사자랑 마주침!!!!]

[제곧내ㅎㅎ 인증샷은 아래↓

우리가 막 찾았을 때, 안경버전 우성이가 친한 형(?)인 배우 박현우랑 생선 슬리퍼로 대결?? 벌이고 있었음ㅋㅋㅋㅋ 아, 참고로 이 사진 한율이한테 허락받고 찍은 거ㅎㅎㅎ

(사진)

그리고 같이 사진 찍어도 되냐 했더니 애들이 흔쾌히 ok해줘서ㅠㅠㅠㅠ

(사진)

님들의 안구보호를 위해 나랑 내 친구 얼굴은 가려드림ㅋㅋㅋ]

-학교 갔다 오느라 애들 아무 것도 안 찍어 발랐을 텐데도 이 정도면.... 님 눈 저한테 파시죠(진지)

-저는 뇌를 사겠습니다. 해마만 살포시 꺼내갈게요.

-아!!!! 역 하나 차이로...(*꒦ິ⌓꒦ີ)

-아니 근데 저 생선 슬리퍼 뭐짘ㅋㅋㅋㅋ

ㄴ현우가 우성이 생선으로 준 생선이래요ㅎ

ㄴㅋㅋㅋㅋㅋㅋㅋㅋ

-(。◠‿◠。)

-아 기여웤ㅋㅋㅋㅋ 댄싱톢이 포획해서 맛있는 밥 먹여주고 싶다ㅎㅇㅎㅇ

ㄴ워워

-우성이 생일기념 RT이벤 진행 중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팔딱거리는 생선 슬리퍼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증샷에, 게시글을 본 팬들은 저마다 즐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님들, 혈압주의하고 46392번 게시글ㄱㄱ..

[46392][제목: 아까 잠깐 올라왔다 삭제된 글 스샷]

[제목: 진짜 작작 좀 해라]

[정말 참다참다 더는 아닌 것 같아서 글 쓴다.

나 ㄱㅇㅅ이랑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 같은 중학교까지 나왔다. 어릴 애들이 ㄱㅇㅅ괴롭힐 때 방관도 했었고 애들 재밌다고 웃을 때도 같이 웃기도 한 ㅈㄴ나쁜 ㅅㄲ다. 그래서 ㄱㅇㅅ 티비에 나왔을 때부터 각오했다. 예전 일 밝혀지고, 그때 따 주도한 애들로 같이 싸잡혀서 욕이란 욕은 다 처먹겠구나하고.

방관자도 가해자니까.

그런데 ㅅㅂ.. 이건 도가 지나쳐도 너무 한 거 아니냐??? 우리 다 ㄱㅇㅅ이랑 동갑이야 미성년자라고. 근데 사진 돌려보면서 ㅈㄴ까대는 거, 인신공격하는 건 선 넘은 거 아니냐고

어리고 멍청해서, 도와줬다간 내가 당하진 않을까 겁먹어서 한번 웃었던 애들까지 완전 악질적인 가해자로 찍혀서 지금 학교에서 다 따당하고, 어떤 애는 쟨 괴롭혀도 괜찮은 애라고 낙인 찍혀서 무섭다고 학교도 안 나온다.

니들 오빠만 소중하냐? 진짜 그래?

같은 팬이라고 감싸지 말고 진짜 작작 좀 해라, 니들 다 제2, 제3의 가해자이고 방관자야. 그리고 솔까 ㄱㅇㅅ이 왜 애초에 애들 표적이 됐는데ㅋ

예전에 강남 술집에서 일했던 여자가 순진한 시골남자 꼬셔서 애들 데리고 재혼했다는 소리 들으면, 어른들이 애들더러 같이 놀지 말라 그러지, 안 그러냐??? 니네들이라고 달랐을까???]

-마지막 문단은 가려주세요. 우리 애이기 이전에 다른 사람의 민감한 가정사입니다.

ㄴ네, 가렸습니다.

-ㅅ1발뭐낀놈이뭐한다더니..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서 싸질렀다가 빛삭할만하네

-우성이 이 글 보면 안 되는데ㅜㅜ...

-잘못했다, 욕먹을 거 각오했다면서 결국 피해자가 당할 만했다고 지들 행동 합리홬ㅋㅋㅋㅋ 역시 가해자 뇌수준쩌네ㅋㅋㅋㅋ

-욕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참는다

-여기엔 완전 중요한 게 빠져있음. 우리 혹은 악개가 그랬다는 증거가 없어

-열 받아도 우성이가 그때 일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가해자년놈들 찾아보고 싶은 거 애써 꾹 참고 있었는데ㅋㅋㅋ 머야 이거

-이ㅅ키가 ㅈㄴ악질적인 게,, 오늘 여기 글 올렸다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절대 모를 리가 없음. 인쓰는 끝까지 인쓰.

-괴롭히고 싶어서 한 명 집단으로 괴롭혔다가, 지들이 그런 표적이 되니까 여기 와서 빼에에엑

-게시글 삭제 부탁드립니다. 떠비 직원 여기 수시로 모니터링합니다. 우성이한테 이딴 글, 내용은 물론이고 존재도 안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지워진 가정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의 가정사를 불특정다수가 볼 수 있는 공간에서 지껄인 게 정말 괘씸하네요. 이거 사이버 명훼 공연성 조건 성립 아닌가

누군가의 게시글의 스샷이 첨부된 46392번 게시글은, 올라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금세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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