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427)

* * *

“흐그그극….”

길우성이 요란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제대로 눈도 뜨지 않은 채 실실 웃으면서 중얼.

“오늘은 개천절…, 단군 할부지 감사함다….”

9월 30일 토요일부터 시작해 일요일, 임시공휴일, 개천절, 추석과 대체휴일, 9일 한글날까지 열흘간의 긴 연휴. 비록 어스래빗은 싱글앨범 녹음이 며칠 남지 않아 마음껏 푹 쉴 순 없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잘 수 있었다.

막 잠에서 깬 한율도 누운 상태로 기지개를 켜곤 핸드폰을 확인했다. 8시 10분.

한율은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율아. 이제 일어났어?]

“…네. 오늘 몇 시에 내려가세요?”

-[이제 슬슬 출발하려고. 애들 밥은 자동급식기에 넉넉하게 채워뒀으니까, 저녁에 시간되면 와서 화장실만 청소해주면 될 것 같아.]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우리 아들도 밥 잘 챙겨먹고! 오늘도 홧팅!]

“네.”

아직 잠긴 목소리로 통화를 마친 후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레슨은 없는 날이었고 회사의 그 누구도 강요하진 않았지만, 어스래빗 멤버들은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9시가 되자 약속이나 한 듯 어슬렁어슬렁 연습실로 모였다.

각자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후엔 본격적으로 안무연습 시작.

“보배야, 0.3초 더 빨리 오른 발끝!”

“쿵쿵, 따다닥! 허상 아닌 실상, 할 때 표정연기 집중!”

“…이제 연속으로 첫 곡부터 간다!”

2시간 동안의 단체 안무연습은 지난 앨범 수록곡부터 시작해, 다음 싱글앨범 타이틀곡 <있어> 까지 한 번에 쭉 잇고 나서야 끝났다.

그들은 바닥에 앉아 각자 타월로 대충 땀을 닦았다.

“너희들 오늘이랑 내일 어떡할 거야? 추석.”

“난 이따가 밤에 사촌 형이 태우러 오기로 함.”

“예전에 히아신스 선배님 사인 받아오라던? 네가 무슨 아이돌이냐 군대나 가라고 했던 그 형?”

“아니, 그놈 말고 그놈 위의 형. 아무튼 돌아오는 건 내일 저녁쯤?”

박가람에 이어 강보배가 대답했다.

“나랑 라이언은 내일 믹스테이프 작업 도와준 쌤 집에 놀러가기로 했어.”

“나는 이따가 3시 출발. 할머니가 나 엄청 보고 싶다고 하셔서. 형은?”

이건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호가 대답했다.

“난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에 가려고. 어차피 큰집이 서울이라. 너희 셋은? 우성이 넌 제주 안 내려가?”

“번거로우니까 오지 말래요. 하하하. 누나는 내려갔는데.”

“버림받았구만.”

“아니얏!”

“전 오늘은 촬영, 고향엔 내일 갔다가 모레에 오려고요.”

한율은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전 오늘 밤에 잠깐.”

길우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잠깐? 부모님이랑 큰집 안 가?”

“벌써 내려가셨어. 난 고양이들 상태 보러…, 왜 그렇게 봐.”

이쪽을 쳐다보는 길우성의 눈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났다.

“그럼 집에 가서 자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리 하루뿐이라고 해도, 사람이 없는 집에 고양이들만 두기엔 불안하잖아.”

표정을 보아하니 벌써 고양이들과 실컷 놀다가 잠드는 상상을 마친 모양. 한율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길 기대하는 게 환히 보였다.

“…너도 갈래?”

“예쓰예쓰예쓰!”

“그럼 추석특집 라방은 5일 저녁이나 밤?”

의견을 묻는 유호의 시선이 모두를 살폈다. 멤버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차남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요. 1시까지 촬영장에 가야해서.”

“그래, 수고해.”

차남석이 연습실을 나갔다. 멤버들은 차남석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조용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남석이 촬영장에 누가 갈래?”

* * *

헤어메이크업은 드라마 촬영장에서 받을 예정이라, 차남석은 휴게실에서 씻고 기초만 바른 후에 지하를 나왔다.

1층 로비 구석에는 팬들이 아티스트에게 보낸 선물이 쌓여 있었다. 대다수의 택배사가 휴무에 들어간 연휴 기간이었지만, 퀵으로 보내거나 직접 와서 맡기거나 한 물건들.

“아, 남석아.”

도착한 선물을 받는 사람별로 분류하던 윤승우가 차남석을 불렀다.

“오 팀장님이 잠깐 사무실에 들르래. 할 얘기 있다고.”

“네.”

평일과 공휴일의 경계가 흐릿한 바닥이라, 평소엔 공휴일이라도 사무실엔 늘 출근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은 썰렁했다. 추석 전날이기도 하고 어스래빗과 크리스탈래빗, 두 그룹이 비활동기인 까닭이었다.

커피머신 앞에 서있던 오 팀장이 반색했다.

“왔어? 커피 마실래?”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 팀장은 사무실 내에 있는 회의실을 가리키며 웃었다.

“저기 들어가 있어. 이것만 내리고 금방 갈게.”

“네.”

이윽고 차남석은 회의실에서 그가 부른 용건을 들었다.

바로 내일, 조부 댁으로 가면 지금껏 피했던 아버지와 마주쳐 트러블이 생길 가능성이 높으니 되도록 가지 않는 게 좋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너희 아버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남석이 너일 테지만, 그래도 회사 입장에선 그래. 너희 아버지 전화를 받아본 내 개인적인 생각도 그렇고.”

“괜찮습니다.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남석이 네 부모님을 나쁘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남석이 너도 최근에 대두되는 여러 연예인들 빚투 문제 봤잖아. 자꾸 네 정산에 대해 물으시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사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같이 가주고 싶을 정도야.”

“그건 제가 죄송하고 부담스러워서 곤란한데요.”

“하…. 정말 꼭 가야겠니?”

차남석은 덤덤히 대답했다.

“아버지한텐 안 간다고 못 박았지만, 그래도 제가 올 거라 믿고 할아버지 댁으로 올 거예요. 할아버지를 걱정할 걸 잘 아니까.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또 할아버지한테 난리칠 거 뻔하고.”

“그래도 너 혼자 보내기 불안한데….”

“저 열아홉 살이에요, 팀장님. 어린애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후…….”

오 팀장은 이마를 두 손으로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남석아. 혹시 멤버들한테 너희 집에 대해 말한 적 있어?”

“서한율한테만요. 간단히.”

서한율…. 오 팀장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래빗에선 막내라인으로 열여덟 살이지만, 이상하게 애 답지 않고 어른스러워 은근히 믿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혼자 스케줄을 보내도 별 문제없이 알아서 척척 소화하고 돌아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 입도 무겁고 말이다.

“그래….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안다니 다행이다.”

완전히 혼자 끙끙 앓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뉘앙스. 차남석은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얼굴로 입가를 올렸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오 팀장에게 고개를 꾸벅인 차남석은 먼저 회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천천히 한숨을 쉬면서 걸음을 옮겼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 사람이라면 일부러 내 화를 돋우고, 그걸 몰래 찍어 협박하고도 남겠지.’

그렇다고 안 가자니 조부에게 어떤 식으로 난리를 쳐댈지 환히 보였다. 여기에 벌써부터 유산상속은 어떻고, 논밭과 선산, 집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댈 친척들까지.

‘내가 가야 돼. 꼭.’

재차 결심하며 차남석은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우웅.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조부가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내일 오지 마라.]

“……하.”

마치 자신의 생각을 환히 들여다본 것 같은 메시지.

당신의 손자를 걱정하는 마음에 보낸 메시지란 걸, 누가 모를까.

차남석은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기 위해 벽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왜 울어요?”

흠칫. 분명히 아무도 없었던 복도에서 갑자기 다가온 목소리에, 차남석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언제 온 걸까.

서한율이 의아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차남석은 황급히 손등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서한율에게 가정사에 대해 간단히 말한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하게 떠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냐, 아무 것도. 그럼 수고해.”

“네, 형도 수고해요.”

한율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오 팀장이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한율이 네가 당첨이야? 그런데 왜 혼자 와?”

“라이언도 뽑혔는데, 잠깐 화장실 들렀다가 온대요.”

“그렇구나. 그럼 설명은 라이언이 오면 그때 할게.”

“네. 그런데 남석이 형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던데.”

“걱정돼?”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딱히.”

“같은 팀인데 너무한 거 아니니.”

“남석이 형이 은근히 욱하는 기질이 있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잖아요. 알아서 잘하겠죠.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 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비즈니스 관계인 회사랑은 다르게, 한율이 너랑은 친한 형 동생 사이잖아. 남석이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나한테는 몰라도, 한율이 너한텐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미 한번 물어봤는데.

그러나 오 팀장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가벼운 일은 아닐 터.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넌 그냥 너였잖아

차남석이 출연하는 드라마는 대학병원이 배경인 의학 드라마로, 그는 의식불명이 된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매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고등학생 역할이었다. 촬영장은 실제 한 대학병원의 별관.

오후 5시 경. 한율은 라이언과 함께 평소 타고 다니던 검은색 밴이 아닌, 평범한 승용차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

“별관은 이제 막 지어져서 아직 사용되지 않는 곳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네.”

“커피랑 음료는 사장님이 하실 테니까 안전하게 전달만 하고, 뜨거운 음료엔 데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 칼은 절대 손대지 말고….”

조유찬의 잔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라이언이 미간을 구겼다.

“길어.”

“…그래.”

별관은 안으론 본관과 연결되어 있지만, 외부로는 바리케이드로 일반인의 통행을 막았다. 별관 부지 안엔 촬영제작진과 관계자, 혹은 배우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그들은 아직 개시준비 중인 커피차에만 눈길을 한번 던질 뿐, 입구에서 허락을 받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량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럼 내릴게요.”

한율은 라이언과 함께 검은색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쓰고 차에서 내렸다.

다음 앨범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드라마 촬영 스케줄을 소화하는 차남석을 응원하기 위해, 깜짝 이벤트로 기획된 몰래카메라. 드라마 제작사측에도 미리 양해를 구해놓았다.

“인증샷부터 찍을까요?”

“응.”

이프림이 보낸 커피차 위에는 [우주최강꿀보이스탑재존잘☆차남석☆] 문구와 사진이 들어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당근 머리띠를 한 차남석이 컵을 들고 있는 포토 배너.

한율과 라이언은 현수막이 나오도록 한 컷, 배너 옆에서도 한 컷 찍은 후, 커피차 사장으로부터 앞치마를 받아 걸쳤다. 새카만 앞치마에는 큼지막한 새하얀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알바님’

사장이 말했다.

“이제 오픈해도 될 것 같아요.”

“네.”

한율은 앞에 놓인 미니이젤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젤에 세워진 칠판의 ‘준비 중’이라는 문구를 지우개로 지우고, 준비된 색색의 분필로 ‘OPEN’ 글자를 크게 적었다.

차 위로 올라가 개수대에서 손을 씻은 후 준비된 장갑을 끼는 등의 모습은 모두 차 내부, 외부에 설치된 카메라에 잡혔다. 커피차를 비롯해 주변광경이 모두 잡힐 법한 곳엔, 카메라가 설치된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지판.

라이언이 너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스태프와 관계자들을 향해 외쳤다.

“방송국 사람들! 와서 커피랑 샌드위치 머거요! 꽁짜! It's free!”

“오, 이제야 열었나 보네.”

몇몇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며 커피차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뭐 드릴까요?”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전 아이스 초코라떼.”

“샌드위치랑 유자차 부탁드릴게요.”

사람들은 한율이나 라이언의 얼굴이 아닌, 메뉴판을 보고 말을 한 뒤 다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사장이 음료를 준비하는 동안 한율은 차남석의 사진이 인쇄된 컵홀더를 컵에다 끼워서 세팅했다. 샌드위치는 미리 만들어져 포장된 걸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렸다.

“먼저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음료를 받을 때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컵에 고정. 바로 옆에서 라이언이 대신 음료나 샌드위치를 받아 전달했지만, 사람들은 감사의 인사만 던지곤 휭하니 자리를 옮겼다.

라이언이 한율을 보며 말했다.

“주는 사람, 누군지 관심 없어.”

“우리도 식당이나 카페가면 그렇잖아요.”

하물며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눈만 드러낸 상태니, 평소 자주 보거나 아는 사이가 아닌 이상 단번에 알아보긴 힘들 것이다. 라이언이 지난번 이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하긴 했지만, 고작 몇 시간만 촬영했을 정도로 아주 잠깐이었으니.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곤, 사장이 샘플로 만든 음료와 샌드위치를 들고 홍보에 나섰다.

“어스래빗 차남~석, 잘 부탁드림다.”

‘…제작사 쪽과 회사에서 정말 아예 언질을 안했나?’

한율과 라이언이 도착한 지 3시간. 차남석은 밖으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연이라 내내 촬영하는 것도 아닐 텐데.

한율은 밤하늘의 별 대신 깜빡이는 위성 불빛을 눈에 담았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길우성이 톡을 보냈다.

-[실패함?? 왜 소식이 없냐]

딱히 답변을 보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 한율은 길우성의 톡을 무시하며 조유찬이 타고 있는 차를 돌아보았다. 슬슬 차남석과 함께 있는 현장전에게라도 신호를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우웅.

이심전심. 조유찬이 톡을 보냈다.

-[장전 씨한테 최대한 자연스럽게 데리고 나오라고 문자 보냈어.]

“저기…, 시럽 넣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다섯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카푸치노 한 잔도.”

그때 조금 전에도 와서 커피를 잔뜩 받아갔던 스태프가 다가와 주문했다. 나이는 젊어 보이는데 기운이 없어 보이고 기미가 턱밑까지 내려온 걸로 봐선, 스태프들 중 서열이 가장 낮아 이리저리 부려 먹히는 사람인 듯했다.

“네, 금방 준비해드릴게요.”

“네….”

멍하니 대답한 그는 그 상태로 멍 때렸다.

미리 컵홀더를 끼운 컵을 세팅하던 한율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바로 쓰러질 것 같아서.

“차남석 씨는 잘하고 있어요?”

“…네? 누구요? 아…, 이 커피차 주인. 네, 신인인데 열심히 하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어어?”

“……?!”

말을 하던 스태프가 눈을 까뒤집으며 휘청거렸다. 다행히 바로 옆에 있던 라이언이 그가 완전히 쓰러지기 전 머리를 덥석 안았다.

“아저씨?!”

“뭐야, 쓰러진 거야?!”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다른 사람들이 놀라 달려왔다. 한율도 차에서 내려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떻게 된 거에요?”

라이언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서여, 말하다가 갑자기 힘 빠졌어.”

“병원 데리고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구급차!”

“여기가 병원인데요.”

그러나 누구도 쓰러진 사람을 업어서 바로 옆 건물의 응급실로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쓰러진 남자가 한눈에 봐도 80kg은 넘어 보이는 거구인 까닭이었다.

그때 라이언이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업혀!”

의식을 잃은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 말이었지만,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전달되었다.

“괜찮겠어요?”

“나 힘 세요.”

“끙-차.”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쓰러진 남자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라이언의 등에다 얹으려 할 때였다. 급히 차에서 내린 조유찬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안 돼, 허리 다쳐…!”

여기에 마침 밖으로 나온 차남석.

“유찬이 형? …라이언?”

깜짝 이벤트이자 몰래카메라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 허무하게 실패했다.

“촬영은 언제 끝나요?”

“모르겠어.”

쓰러진 스태프는 다른 스태프가 업고 응급실로 향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한율은 차남석, 라이언과 함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따뜻한 유자차를 마셨다.

커피차 알바생들이 실은 아이돌이었단 사실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그러나 카메라가 돌고 있어서 그런지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다.

“원래 드라마 촬영은 연기하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한참 길잖아.”

차남석도 카메라가 있는 까닭에 무작정 대기시킨다는 말을 돌려서 했다. 유자차를 짧게 호록호록 마시던 라이언이 의아하게 물었다.

“남석, 무시당해?”

“그럴 리가 있어? 다들 엄청 잘해주셔.”

눈치 좀 챙겨라, 인마. 차남석이 그런 의미를 담은 시선을 던졌으나, 라이언은 정말 눈치를 못 챈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인지 이번엔 미간을 구겼다.

“잘해준다? 빨리 끝내서 집에 가! 하는 게 잘해주는 거지.”

“…그래, 라이언 너 오늘 잘했다. 이제 그만하고 가라.”

“응.”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로 향했다.

“…….”

정말로 가는 라이언을 어이없는 얼굴로 보던 차남석이 한율을 쳐다보았다. 한율은 소리 내어 웃었다. 라이언 나름의 그림을 뽑기 위한 행동이었다. 차남석도 도중에 눈치를 챘는지, 카메라에 자연스럽게 잡히도록 픽 웃음을 터뜨리며 라이언을 따라갔다.

“야, 가란다고 진짜 가냐?”

“갈 거야, 배고파.”

한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벤치만 덩그러니 비추는 카메라엔 세 사람의 목소리만 잡혔다.

“샌드위치 먹어요.”

“나 불고기 먹고 싶어.”

“그러면서 왜 나 쳐다봐? 나 돈 없어. 대신 이거 줄게.”

“이게 뭔데?”

“여기 병원 구내식당 식권.”

“…운영시간 지났자나!”

“남석아! 촬영!”

그때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현장전이 외쳤다.

“네! …이거 대신 정리 좀.”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 둘 다 와줘서 고맙다.”

“응.”

차남석이 별관으로 들어갔다. 다급히 고정시켰던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찍은 조유찬은, 카메라 방향을 한율과 라이언에게로 돌렸다. 한율은 차남석이 맡긴 컵을 살며시 흔들며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이렇게 아쉽게도, 몰카는 실패했습니다.”

“식권은 어떡해?”

“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중에 형이 먹어야 할 밥인데.”

“쟤 오늘 집에 들어오기는 해?”

“글쎄요.”

두 사람은 커피차에서 마셨던 컵을 정리하고 앞치마를 반납했다. 그리고 그제야 다가오는 사람들의 사인 혹은 사진 요청 들어주었다.

마무리는 차에 타기 전.

“언젠가 남석이 형을 정말, 깜짝! 놀라게 하는 몰래카메라 겸 이벤터가 성공하길 바라면서.”

“이프림, 메리 추석~.”

두 사람을 찍던 카메라는 차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내려갔다. 1초, 2초, 3초… 드륵. 한율은 다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라이언도.

막 카메라 전원을 끈 조유찬이 두 사람에게 일렀다.

“위에 장전 씨 있을 거야. 난 차에 설치한 카메라 떼고 있을 테니까 장전 씨 먼저 찾고, 감독님이랑 스태프 분들, 마주치는 배우 분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 잘하고 와. 라이언은 전에 와봐서 잘 알지?”

“네.”

촬영은 3층에서 진행 중이었다. 올라가자마자 복도를 가득 채운 스태프들이 보였다. 그 너머에서 화가 잔뜩 난 차남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나오라고…!”

이어서 중년남성의 목소리.

“큰소리 좀 내지 마라, 네 엄마 꿈에서도 놀랄라! 그리고 이러면 다른 사람들도 욕해! 자식이 공공장소에서 떠들면 다 엄마가 교육을 잘못….”

“그걸 걱정하는 사람이…!”

욱하고 소리를 지르려던 차남석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시간상 올라오자마자 바로 촬영에 들어갔을 텐데도, 차남석은 극에 완전히 몰입하여 눈이 충혈된 상태였다.

“보험사 연락을 받고 나서야 나타나? 어?!”

“또, 또 소리 지른다. 진짜 누구 아들 아니랄까봐 목청도 좋아.”

“…하.”

다시금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는 차남석의 모습. 카메라에 잡히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감독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다. 다른 스태프들도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율은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잘하고 있다. 지난 번 자신이 한 조언대로 거울 앞에서 거듭 연습했는지, 드러나는 감정과 눈빛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하지만.’

어머니가 입원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보험금 문제로 설렁설렁 나타난 한심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윽박지르는 차남석의 연기는, 평소 자신의 연기 스타일과 퍽 닮아 있었다.

직접 겪었던 비슷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끌어낸 감정 연기.

‘그것도 이 정도의 몰입이면….’

한율은 지난 번, 차남석이 연예인 부모의 빚투 사건을 언급하며 꺼낸 이야기를 떠올렸다.

『난 그런 기사 볼 때마다 나중에 내 이름도 그런 기사에 오르내리진 않을까…, 그게 무섭다.』

차남석의 이름을 인터넷에다 치면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뜬다. 일본에서 데뷔 프로모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기사까지. 이 바닥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데뷔하자마자 적잖은 돈을 벌었겠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겉면.

‘그러고 보니 내일 고향에 간다고 했었지.’

오늘 낮에 사무실 앞 복도에서 혼자 눈물을 삼켰던 것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런’ 부모와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는 날 아닌가?

잠시 후, 차남석의 촬영이 끝났다.

“왜 아직도 안 갔어?”

드라마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별관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차남석이 물었다. 라이언이 담담히 대답했다.

“연기 구경 재밌어서.”

“배고프다면서 끝까지 잘도 봤네.”

“너 말고 아저씨 연기. 넌 그냥 너였잖아.”

“…….”

라이언을 쳐다보는 차남석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라이언이 미간을 구기며 한 걸음 떨어졌다.

“뭘 봐. 시비야?”

아스대 토끼

“…하.”

차남석이 대놓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아마 이 둘은 몇 년이 지나도 삐거덕거리지 않을까. 한율은 그리 생각하며 차남석에게 물었다.

“형은 내일 할아버지 댁에 가는 거죠? 어디에요?”

“남양주. 왜?”

“가도 괜찮겠어요?”

주어는 뺐지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안 될 게 뭐 있냐.”

“형 연습시간 부족하잖아요.”

“…….”

차남석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내가 조금 전 서한율이 던진 질문의 의미를 잘못 읽었던 건가? 대충 그런 표정.

“그리고 내일 갔다가 모레 온다면서요. 남양주면 비교적 가까우니까 나중에 여유가 생길 때 가도….”

“안 돼.”

차남석이 고개를 돌리면서 단호히 말했다.

“내일 꼭 가야 돼. …설에 안 가기도 했고.”

차남석은 데뷔를 위해 오랫동안 연습생으로 지냈다. 월평에서 늘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연습도 열심히 했고, 책임감도 강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녹음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가뜩이나 드라마 촬영으로 본인의 연습량이 부족한 걸 잘 알면서도 명절이라고 이 귀한 시간을 그냥 보낸다?

“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에 일이 있는 게 확실하다고.

“그런데 형.”

“또 뭐.”

“형한테 무슨 일 생기면 우리 전체한테 영향 오는 거 잘 알죠?”

“…….”

차남석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어리둥절한 얼굴로 덩달아 멈춘 라이언에게 손짓했다.

“넌 먼저 차에 들어가.”

“명령하지 마.”

툴툴거리며 대답한 라이언이 혼자 차로 향했다.

“저놈은 진짜….”

차남석은 멀어지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혹시 팀장님한테 무슨 말 들었어?”

“아니요. 전에 형이 그랬잖아요. 부모님이랑 사이 안 좋다고. 그런데도 가족과 친척이 다 모이는 날을 골라 꼭 가야겠다고 하는 거 보니, 좀 걱정이 돼서요. 정말, 가도 괜찮겠어요?”

차남석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괜찮은데 할아버지가 걱정이 돼서 그래. 그리고 팀에 피해가는 일 없도록 언행도 조심할 거고.”

한율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형은 믿죠. 하지만 형도 믿지 못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는 자리잖아요. 그러니 길우성이라도 데려가서 몸빵으로 써요. 워낙 뻔뻔해서 남의 집안사람들 다 모이는 자리라도 거리낌 없이 낄 걸요?”

큭. 차남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넌 대체 걜 어떻게 보는 거냐?”

본래 내가 있던 세상을 망가뜨린 단초 제공자이자 말초엘 같은 놈.

한율은 속내를 감추며 말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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