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인 10월 4일 추석. MBS 채널에서 지난 달 녹화한 <2017 추석특집 아이돌 스포츠대회> 1부가 2시간에 걸쳐 방송되었다.
한율은 오늘 방송된 1부에 자신이 나간 양궁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본방을 챙기진 않았다. 정확히는 ‘아, 오늘 방송하지?’ 잠깐 떠올리기는 했으나, 안무연습을 하는 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연습을 멈추고 핸드폰을 확인해서야 기억해냈다.
모친으로부터 들어온 톡.
-[우리 아들 양궁 왜 이렇게 잘해? 양궁 선수했어도 엄청 잘했을 것 같아^^]
-[그런데... 카메라 렌즈 깬 거 변상 안 해줘도 괜찮대? 너희 아빠가 청구서 안 날아왔냐고 물으시는데^^;]
한율은 변상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는 답변을 보냈다.
삑, 철컹. 그때 누군가 연습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내 여기 있을 줄 알았지!”
박가람이었다.
“어? 아스대도 안 보고! 단톡방도 안 보고!”
“아, 맞다.”
바닥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던 길우성도 그제야 떠올린 눈치였다.
“어휴!”
박가람이 호들갑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포털사이트 실검 1위에 서한율 이름 올라갔었다고! 조금 전 2위로 떨어지긴 했지만, 우리 팀 이름은 14위고.”
“헐, 대박. 진짜?”
길우성이 음악이 흘러나오던 핸드폰을 집었다. 한율도 인터넷을 확인했다. 정말로 자신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검에 올라가 있었다. 비슷한 다른 검색어도.
[아스대양궁 한율], [양궁 렌즈], [아스대 토끼]
…아스대 토끼는 뭐지.
연예뉴스란 메인에도 양궁 동영상 클립이 올라가 있었다. 당시에 썼던 새하얀 토끼 귀 머리띠가 시선을 끈다.
[전 국대도 감탄한 양궁천재 아이돌 등장!]
[예선1차부터 3연속 렌즈깨기 실화?!]
[어스래빗 한율, X10을 벗어나지 않는 신궁]
-ㅋㅋㅋㅋㅋ진짜 얘 처음 쏘자마자 렌즈 박살내는 거 보고 막 사과 먹던 우리 가족들 그대로 티비로 시선고정. 두 번째 렌즈 박살내는 거 보곤 아예 상체를 티비로 돌림ㅋㅋㅋㅋ 세 번째 연속 깼을 땐 다 같이 환호성지름ㅋㅋㅋㅋㅋㅋㅋㅋ
-(대충 많이 놀랐다는 댓글)
-신인이라 한가해서 양궁만 배우러 다녔나ㅋ
ㄴ딱 2주. 그것도 주말에만 한두 시간씩 배웠다함ㅇㅇ
-쟤 실외로도 데려가서 테스트시켜보자
-비하인드 영상 보니까 양궁 국대였던 감독이 얘 붙잡고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던뎈ㅋㅋㅋㅋㅋㅋ
-다시 봐도 쩐다ㄷㄷㄷ
-율이 진짜 멋지고 이쁘다ㅠㅠ
-블블이 작년 은메달이었는데 그걸 1차 예선에서 다 이겨버리고
-렌즈 좀 그만 꺀ㅋㅋㅋㅋㅋㅋ 하더니 진짜 쟤 순서만 오면 카메라렌즈를 아예 치워버림ㅋㅋㅋㅋ
ㄴ그리고 보란 듯이 렌즈 구멍자리에 화살을 푹
-전에 무슨 음악시상식이었나; 거기에서 오락실 총 쏘는 게임 엄청 잘하던 남돌 있었는데ㅋ 걔가 얘 아니었나?
ㄴ맞아요ㅎㅎ 8월에 있었던 소리구름어워즈 게임존ㅋㅋㅋ
-활 잘 쏘는 것도 잘 쏘는 건데... 무슨 남자애 피부가 이렇게 좋냐.. (거울보고 자괴감)
“댓글 수 장난 아니네. 와… 이래서 사람이 뜨기 위해선 TV에 나와야 하는 거구나….”
“우리 뮤비랑 동영상 조회수도 덩달아 막 오르고 있어. 봐봐. 그리고 너튜브에 올라간 아스대 영상에도 외국인들이 서한율에 대해서 어쩌고저쩌고.”
“양궁 협회는 뭐하냐, 저런 훌륭한 인재 빨리 안 데려가고….”
길우성과 박가람이 서로 머리를 맞댄 채 인터넷 반응에 집중했다. 한율은 어느새 땀이 식은 걸 느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정적인 이슈가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지.
“나 먼저 간다.”
“…어? 야, 같이 가.”
한편 그 시각, 3층의 대표실.
좌기훈 대표는 너튜브를 비롯해서 커뮤니티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 어스래빗 공식 SNS나 서한율의 개인 SNS,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온갖 인터넷 기사를 모니터에 가득 띄운 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리스탈 래빗과 어스래빗이 아스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는 보고는 이미 지난달에 받았지만, 이렇게 직접 영상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비록 크래 영상과 기사 댓글란을 보면 속이 쓰리지만 말이다.
[크래 은영, 아름다운 자태로 리듬체조 은메달 획득!]
-대체 이딴 걸 왜함 아스대 폐지 좀
-누가 보면 올림픽인 줄? 재롱잔치 수준에 감격하는 척 난리치는 거 보는 내가 다 민망하더라ㅋ
-가수가 춤노래 연습은 안 하고 몸매 자랑이나 하고 앉았네
ㄴ실제로 보면 완전 삐쩍 말라서 징그러움
-은영이 너무 이쁘다^^
-남자를 위한 공개 팬서비스임? 참 힘들게 산다ㅉ 이러니 ㅇㅇ같다는 소리나 듣지
하나를 제외하곤 베댓이 온통 비아냥거림이었다. 이건 비단 크래에게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온더로즈나 히아신스처럼 팬덤이 크지 않은 걸그룹 기사 반응이 대부분 이랬다.
반면 보이그룹 관련 기사 베댓은,
-우리 찬형이 우쭈쭈 실패해서 속상해떠요>ㅅ<
-못해도 괜찮아 얼굴이 금메달이니까
-짜란다 짜란다 짜란다♡
-해외 스케줄 다녀오느라 애들 얼굴 퀭한 거 봐ㅠㅠ
-내가 왜 명절에 분칠한 수컷들 재롱잔치나 봐야 되는 거냐
ㄴ방구석 열폭러 씨는 거울이나 보세요^^
-하... 잘생겼다 진짜
‘이 온도 차는 대체….’
한숨을 푹 내쉰 좌 대표는 인터넷쇼핑몰에 접속했다.
어쨌든 소속 가수가 실검 1위를 찍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상위권에 계속 머무르고 있으며, 연예뉴스란 베스트에도 올라갔다.
‘애들한테 홍삼을 사주자!’
그렇게 홍삼을 잔뜩 장바구니에 넣고 개인카드로 결제하려 할 때였다. 핸드폰에서 크리스탈 래빗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앗싸일보 김 부장]
습관적 선행을 한다는 연예인들도 질색을 한다는,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은 앗싸일보 연예부, 그것도 부장의 전화라.
신인이 실검 1위를 찍었다는 것에 대한 축하 전화는 아닌 것 같아, 좌 대표는 잠시 경계의 눈초리로 핸드폰에 뜬 이름을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좌기훈입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부장님도 추석 잘 보내셨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처음엔 안부인사와 실검 등판 축하인사.
김 부장은 곧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간단히 확인 차 연락드렸습니다. 대표님께서도 물론 알고 계셨죠? 앞으로 WB래빗의 대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인물의 가족 이야기니까.]
김 부장이 대뜸 꺼내는 이야기에 좌 대표는 적잖이 놀랐지만, 일단 넉살 좋게 응수했다. 앗싸일보의 김 부장이 속에 능구렁이 10마리를 품은 인물이란 걸 환히 알기에.
“어이쿠, 깜~짝 놀랐네요! 우리 회사가 애들 볼 때 느그 부모님 뭐하시노? 이렇게 묻질 않아서, 저도 차암~ 놀랐습니다!”
-[하하하하! 네, 정말 모르셨던 것 같네요. 몇 번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것 같던데 말이죠.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집에서 자랐고….]
“그래도 이건 압니다, 김 부장님. 다른 사람의 가족은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거.”
-[하하, 누가 보면 바로 기사로 내기 위해 연락드렸다고 오해하겠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확인 차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 자기 아들을 이 바닥으로 보내면서 본인이 드러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까요? 어느 정도 각오는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궁예의 관심법을 익히지 않아 모르겠네요. …아!”
-[왜 그러세요, 대표님? 뭔가 생각나신 거라도?]
“연휴가 끝날 때까지 배송이 안 된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어이쿠, 직접 매장에 가서 우리 애들한테 먹일 홍삼을 사야겠어요! 아… 문 닫기 전에 얼른 가야 하는데. 그럼 전 이만 바빠서, 전화 먼저 끊겠습니다!”
뚝.
“후우!”
좌 대표는 짧고 세게 숨을 내뱉곤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3초가 지나도 다시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대신, 짤막한 톡이 왔다.
-[:)]
“…아무튼 속을 모르겠단 말이지.”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조금 전 잠깐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인터넷 쇼핑몰 창을 닫고, 포털사이트 검색창에다 이름 석 자를 쳤다.
[최은희]
* * *
쿵. 아침 일찍 숙소로 돌아온 차남석이 현관 앞에다 큰 박스를 내려놓았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박스를 들여다본 이건우가 탄성을 질렀다.
“으와…,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에요, 고구마지.”
“아니, 그러니까 웬 고구마?”
“고구마?!”
박가람이 거실로 튀어 나갔다.
“호박고구마?!”
“할아버지가 가져가라 그래서요. 다 같이 나눠먹으라고.”
“오오! 마침 고구마 주문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사하단 말씀 꼭 전해드려!”
“네.”
막 회사로 가려고 나왔던 한율은 평소와 다름없는 차남석의 얼굴을 보곤 박스로 시선을 내렸다. 박스 안에는 한눈에 봐도 품질이 좋은 큰 사이즈의 고구마가 가득이었다.
“들고 오느라 무겁지 않았어요?”
“작은아버지가 바로 앞까지 태워다 주셨어.”
이건우가 고구마 하나를 꺼내 돌려보았다.
“자, 박가람이. 우리는 앞으로 이 고구마를 먹으면서 다이어트에 돌입하는 것이다. 저녁은 밥 대신 이 고구마 하나로….”
“아니다, 이 악마얏! 고구마는 주식이 아니라 간식이닷!”
“그런데 이거 따뜻한 곳에 둬야 안 썩지 않아?”
“호 형 작업실에 두자.”
“…왜 내 작업실에?”
“일주일도 안 가서 다 먹을 것 같긴 한데.”
어느새 좁은 거실이 멤버들로 북적였다. 어디에서 본 건 있는지, 어디선가 신문지를 가져와서 그 위에다 고구마를 놓고 돌돌 말았다. 정작 고구마를 가져온 차남석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구워먹든 삶아먹든 알아서들 해요.”
“같이 나가요.”
한율은 차남석과 먼저 숙소를 나왔다.
“어제 실검에 오른 거 축하한다.”
“감사. 형은 어제 괜찮았어요?”
차남석은 덤덤한 얼굴로 끄덕였다.
“어. 할아버지가 오지 말라 그랬는데 왜 왔냐고 잔소리를 엄청 하시긴 했지만. 그리고 아버지랑 친척들 앞에서 못 박았어. 내 앞으로 달린 빚이 억대니까, 최소 5년은 콩고물도 기대하지 말라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아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회계내역을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대형 기획사 연습생의 경우 1년 트레이닝 비용이 대략 1억 정도다. 차남석은 3년이 넘도록 연습생 생활을 했으니, 쌓인 빚이 최소 2억은 훌쩍 넘을 터.
“그리고 내가 회사랑 계약할 때 보호자로 어머니가 도장을 찍었거든?”
“그럼 회사로 빚이나 정산관련 서류를 요청해서 볼 수 있는 것도.”
“어머니만 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어머니랑 아버지가 이혼한 지 한참 됐고, 서로 연락도 전혀 안 하거든.”
차남석이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
그래도 안 가요
“그래도 형네 아버지가 부자관계란 거 증명하는 서류만 가져오면 확인가능하지 않아요? 형이 미성년자인 동안은.”
“그러려면 직접 찾아와야 하는데, 고작 내역 확인하려고 그런 수고까지 할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소속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실추시켜 손해 입히는 행위를 하면 법적 대응을 하고도 남을 회사라고 겁도 좀 줬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치곤 알아서 잘 처신하고 왔다며.
* * *
거대한 모니터 두 대만 환하게 밝혀진 어둑한 방.
세계 각국의 영화와 미드, 영드 포스터로 도배가 된 그 방 안에서 한 남자가 영어로 중얼거렸다.
“찾아볼수록 다재다능한 친구네.”
그가 보는 영상은 대한민국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가수들이 나와 이런 저런 스포츠경기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마추어 경기보다 훨씬 완화된 규정에다가 다들 실력도 고만고만하여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그가 친구로부터 추천 받은 소년은 사람의 독보적인 양궁 실력으로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탁. 과녁 정중앙을 정확히 맞추고 살포시 웃는 소년의 모습에서 일시정지. 남자는 다른 창을 띄웠다. ‘어스래빗’이라는 깜찍한 이름을 지닌 보이밴드의 영상 콘텐츠가 모인 채널. 그 중 <깡충깡충 영어극장> 하나를 클릭하자 유창한 영어가 들렸다.
‘눈을 감고 들으면 텍사스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여.’
여기에 <하울링> 1화와 <객귀, 해>라는 드라마에서 보여준 뛰어난 연기실력까지.
‘비주얼도 깨끗하고…. 느낌이 팍 오는데?’
그는 즉시 ‘한율’이 소속된 회사를 검색했다.
‘WB RABBIT…? 사장이 토끼를 굉장히 사랑하나?’
접속한 홈페이지에서 소속 아티스트로 어스래빗과 한율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홈페이지에 나온 회사 메일주소를 클릭했다.
타닥타닥. 그의 손이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잠시 후,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신인개발팀.
연휴였지만 추석이었던 어제를 제외하곤 나오는 연습생들이 많아, 신인개발팀장 강무기 또한 점검 차 출근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PC를 켜곤 새로 온 메일을 확인했다.
당분간 새 연습생을 뽑지 않는다고 오디션 페이지의 지원 버튼 자체를 비활성화 시켰지만, 그럼에도 아래에 적힌 메일주소를 통해 프로필을 보내는 아이들이 간혹 있었다.
‘…뭐지? 이건 메일주소 도메인이 회사 이름 같은데… bdastudio? 매니지팀이나 기획홍보팀으로 갈 게 잘못 온 건가?’
그는 의아해하며 클릭했다. 그러곤 메일 본문을 보곤 씩 입가를 올렸다. 온통 알아먹기 힘든 영어였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낯익은 이름 철자가 보였다.
‘Han…yul? 한율? 서한율?’
강 팀장은 메일 본문을 복사해, 포털사이트의 번역서비스에 갖다 붙였다. 엉망진창인 문법.
“……!”
그러나 강 팀장은 놀라 벌떡 일어나 오동식 팀장을 찾았다. 오 팀장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네, 그럼 바로 확인하고 늦어도 10시까진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수고하십시오. …음? 강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잠깐 제 자리에 와서 메일 하나 좀 봐주십쇼.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메일을 보냈는데….”
미국? 막 MBS 예능국의 홍석주 PD와 통화를 마친 오 팀장은 의아한 얼굴로 강 팀장의 자리로 향했다. 그러곤 엉망으로 번역된 글에 미간을 찡그렸다가 영어로 된 메일 원문을 읽었다.
“…안녕하십니까, 미국 LA의 캐스팅 디렉터 협회 소속이자, LA에 위치한 드라마제작사 B. DA 스튜디오의 캐스팅 디렉터 마이클 브라운입니다. 2018년 2월 중순부터 2주간 촬영예정인 의….”
메일을 읽는 오 팀장의 눈동자와 말소리가 빨라졌다.
“파일럿 에피소드에 출연할 영어가 능숙한 동양인 청소년 배우를 찾던 중, 귀사에 소속된 보이밴드 ‘어스래빗’의 ‘한율’을 보고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어스래빗이 데뷔 후 해외에서 러브콜이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 K-POP 공연 참여의사여부에 대한 문의였지, 해외 드라마제작사에서 이렇게 한 명을 콕 집어 프로필과 PR영상을 요청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오 팀장은 일단 해당 메일을 프린트했다.
“강 팀장님, 이 메일 저한테 그대로 보내주세요. 누가 그럴싸하게 장난치는 것일지도 모르니 진위확인부터 해야겠어요.”
“네.”
겉으로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오 팀장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영어가 유창한 멤버는 해외 활동에 있어 큰 도움이 된다. 서한율의 경우엔 연기까지 잘하니, 언젠가 가수가 아닌 배우로서 해외 진출을 할 가능성도 높다 생각하긴 했었다. 그러나…,
‘아직은 일러.’
어스래빗은 이제 막 앨범 하나를 겨우 낸 신인이었다.
김칫국을 마시는 걸지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 장편 드라마나 시리즈에 꾸준히 나오는 역으로 캐스팅이 되면, 이제 한창 날개를 펼치려던 어스래빗 완전체 활동에 긴 공백이 생겨버리고 만다. 그리되면 팬덤에도 큰 균열이 생긴다.
‘이를 어쩐다….’
* * *
긴 황금연휴의 끝 10월 9일.
한율은 아침 일찍 샵의 의자에 앉았다. 원래 오늘 잡힌 스케줄은 오후 4시의 더순한화장품 브랜드 팬미팅 하나였으나, 새로운 오전 일정이 추가된 까닭이었다.
토요일 저녁마다 방송되는 MBS의 간판 예능 <신나는 친구들>.
웬일로 스케줄에 동행한 오동식 팀장이 설명했다.
“신친 멤버들 중에는 지난 번 <목톡톡>에서 만난 유기원 씨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간단히 신친 멤버들, 그리고 게스트랑 활쏘기 미션 상대만 해주면 되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게스트는 누구에요?”
“온더로즈 영아랑 SE, 배우 송길윤, 장미연. 다들 얼굴은 알지?”
“핸드폰 좀 볼게요.”
“여기.”
샵 직원들이 헤어메이크업을 해주는 동안, 한율은 시선만 낮게 깐 채 핸드폰으로 검색한 정보를 훑었다.
배우 송길윤과 장미연은 오늘 녹화되는 <신나는 친구들>이 방송될 때 즈음 개봉되는 영화 홍보 차 나오는 듯했다. 반면에 온더로즈는 현재도, 방송이 될 때에도 비활동기.
‘심심해서 나오는 건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걸그룹 멤버들이니, 시청률로 먹고사는 방송국에서야 늘 두 팔 벌려 환영할 터다. 아직 대중의 인지도가 적은 작은 기획사 소속 아이돌은 꿈도 못 꿀 일.
‘나도 아스대에서 큰 화젯거리를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특별출연 제안은 들어오지 않았겠지.’
듣기로는 MBS측 PD가 먼저 회사로 연락해서 특별출연 제안을 했을 때, 녹화 일정과 스케줄이 겹치자 ‘힘들면 말고’ 식으로 물러났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 전, 아스대가 방송되고 실검 1위를 찍자 다시 연락해서 특별출연하는 미션 시간대를 앞으로 당겨줄 테니 나오라고 했다던가.
“미리 말했듯이.”
메이크업을 다 마친 후엔 샵에 마련된 탈의실로 들어갔다. 큼지막한 종이가방 여러 개를 들고 온 스타일리스트가 푸른 빛깔의 옷을 꺼냈다.
“복장은 한복이야.”
철릭이었다. 여기에 붉은색 전립과 광다회, 조금 조잡하게 만들어진 동개와 투박한 목화까지.
“융복이네요?”
“어? 아네?”
“병부랑 환도도 세트여야 하지 않아요?”
“그건 안 내주더라.”
철릭이 굉장히 길어, 한율은 검은색 진은 그대로 입고, 티셔츠 위에다 저고리를 입고 철릭을 걸쳤다. 펑퍼짐한 허리엔 커다란 붉은색 천과 광다회를 두르고, 소매도 스타일리스트가 검은색 띠로 둘둘 감아 묶어서 정리해주었다.
“와, 한율이 멋진데?”
상투 가발에 전립까지 쓰고 나오니 오 팀장이 감탄해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한율은 알아서 포즈를 취했다.
찰칵! 찰칵!
“나중에 셀카도 찍었다가, 방송 나가면 그때 SNS에 올리는 게 좋겠다. 팬 분들이 굉장히 좋아하겠어.”
“네.”
오 팀장의 말대로 한율은 촬영장으로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셀카를 찍었다. 대외적인 미소를 장착하고 한 컷, 정말 그 시대의 무관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한 컷. 그러나 후자는 이목구비가 곱상하고 앳된 탓인지 썩 마음에 드는 분위기가 나오지 않았다.
한율이 찍은 셀카를 확인한 오 팀장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두 번째 사진 정말 잘 나왔는데? 어릴 때부터 엄한 집에서 자란 엘리트 무관 같아.”
“…그래요?”
내 눈이랑 반대네.
“한율아.”
오 팀장이 핸드폰을 돌려주며 물었다.
“넌 연기로 어디까지 가고 싶어?”
“네?”
“가수로 무대에 서는 게 좋아, 연기하는 게 좋아?”
맥락 없이 들어오는 질문. 유치원에 다닐 때 유독 귀찮게 따라다니던 어떤 꼬마의 ‘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가 불현듯이 떠오른다.
“뭐가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로 따지자면 무대하는 게 조금 더?”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헤매던 안무동작이 매끄럽게 잘 되고, 미흡하다 느껴지던 노래가 머릿속에 그려진 것 이상으로 잘 나올 때, 그간 노력한 연습의 결과는 또렷한 성취감으로 다가온다.
한율은 그런 걸 느끼는 순간이 좋았다.
“그렇구나.”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 오 팀장의 옆얼굴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비쳤다.
“그럼 직접적으로 물어볼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네.”
“미국에서 러브콜이 오면 어떡할 거야? 그것도 한 회 출연료가 억대인 장편 드라마, 혹은 시리즈 드라마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오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안 가요.”
“왜? 아주 좋은 기회잖아. 한국보다 굉장히 큰 무대인데다가 명실상부 최고의 제작진과 배우,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대작의 구성원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그래도 안 가요.”
앞으로 4년.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서한율’의 인생을 살며 쉬기로 했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건 길우성이었다.
장편이나 시리즈 드라마라면 분명 촬영하는 데에 몇 달이 걸릴 텐데, 고작 한두 달 정도면 몰라도 그 이상 길우성을 방치하는 건 불안하다. 아무리 반지에 보호마법을 걸어두었다곤 해도.
“팀이랑 같이 움직이는 거면 모를까.”
“…음, 감동해야 할 대사인 것 같은데, 실은 귀찮아서 가기 싫다는 속마음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구나, 한율아.”
“티 났어요?”
“많이. 아무튼 잘 알았어.”
그리고 오 팀장은 한율에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직접 보여주었다. 미국의 한 캐스팅 디렉터가 보낸 이메일로.
“그래도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그땐 망설이지 말고 말해. 알았지?”
“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차는 <신나는 친구들> 활쏘기 미션이 진행될 장소에 도착했다. 부지가 굉장히 넓은 한식 전문식당 뒷마당. 그곳엔 각각 5미터, 20미터 거리에 과녁이 세워져 있었다. 20미터 과녁은 일반 과녁이었지만, 5미터짜리 과녁은 돌림판처럼 색다른 줄 몇 개가 더 그어져 있었다.
[한 명만 통과], [신궁과 점수 바꾸기].
한율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에게 자신이 할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들었다.
“출연자들 도착 20분 전에 미리 알려줄 테니 그때까진 차에 편히 있어요.”
한율은 차 안에서 내일부터 촬영할 <별☆일없는 집> 대본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2시간.
한율은 차에서 내려 가슴과 팔 보호대를 착용하고 사로 앞에 섰다. 곧 <신나는 친구들> 메인PD를 비롯한 주요 제작진들이 도착하고, 출연자들과 게스트들 중 절반인 5명이 떠들썩하게 입장했다.
“어? 누가 있는데?”
“이번 미션은 활쏘기야?”
“아니, 잠깐만. 저 분, 복식은 조선시댄데 무기는 양궁이야…!”
20미터 과녁 사로 앞에 선 한율은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를 들어보니 <목톡톡>에서 만난 유기원과 신친 멤버 둘, 게스트로 온 온더로즈의 영아와 배우 장미연인 듯했다.
PD가 신친 멤버들과 게스트들에게 미션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여러분의 점심이 걸린 이번 미션은, 앞에 서있는 신궁 무관보다 더 높은 점수를 얻거나, 돌림판에 있는 ‘점수 바꾸기’를 하여서 이기면 성공, 다함께 이곳의 12첩 밥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명만 통과’는 맞춘 사람이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지만, 혼자만 먹는 걸 선택할시 그 사람의 점수는 팀 점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열 번, 제한시간은 30분입니다.”
출연자들이 떠들었다.
“저 분 엄청 활 잘 쏘실 것 같은데….”
“에이, 그래도 과녁 거리 차이가 있는데 우리가 이기겠지.”
“설마 프로양궁선수는 아니겠지?”
“기회가 열 번이면 한 사람당 두 발씩 쏘면 되겠다.”
첫 도전자는 온더로즈의 영아였다. 가슴과 팔 보호대를 착용한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사로 앞에 섰다. 그러곤 한율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듯 기울였다.
“…어?!”
아이돌로서 대선배인 영아가 놀란 소리를 내며 저를 쳐다봤지만, 한율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에 설치된 과녁에 시선을 고정,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기 전까진 돌아보지 말라는 제작진의 당부가 있던 까닭이었다.
“영아 씨 왜요? 아는 사람이에요?”
“선수야? 프로선수?”
영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출연자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히 방송경험이 적잖은 아이돌이 아닌 듯, 그녀는 바로 한율의 이름을 내뱉는 대신 양념부터 쳤다.
“어떡해요…? 우리 팀, 밥 못 먹을지도 몰라요….”
왜 거절했어?
첫 발에서 한율은 10점 정중앙, 영아는 8점을 맞췄다. 그 다음도 10점, 영아도 10점.
“오오, 승산 있어!”
영아가 물러나고 신친 멤버가 두 번째 주자로 섰다. 그도 한율의 얼굴을 살폈으나 알아보진 못했다.
“누구세요?”
“…….”
10점, 7점, 10점, 0점.
“신궁은 신궁이네. 계속 10점이야.”
“아니, 우리는 과녁까지 5미터밖에 안 되는데, 1점도 못 맞춰?!”
두 번째 주자가 출연자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퇴장, 세 번째 주자로 배우 장미연이 나섰다. 그녀 역시 한율의 얼굴을 살폈다.
“어머!”
“왜왜왜! 아는 사람이에요?”
그녀가 출연자들을 돌아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예쁘고 잘생겼어요! 어려!”
“그럼… 아이돌 아냐?”
“영아 씨가 알아봤으면 아이돌이네!”
“어, 잠깐만…. 나 누군지 알 것 같은데? 그 친구 맞죠, 영아 씨? 얼마 전에 실검에 올랐던 그 친구!”
유기원이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떠들었다. 스태프가 한율에게 신호를 보냈다. 곧 돌아볼 차례라고.
등 뒤에서 유기원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한율아! 한율이 맞지?”
그제야 한율은 무뚝뚝하게 다물었던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출연자들을 돌아보았다. 카메라에 그 모습이 클로즈업되며 담겼다.
한율은 활을 쥔 채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의 한율입니다.”
과연 방송엔 몇 분이나 나갈까.
준비하는 데에 1시간, 기다리는 데엔 2시간, 정작 촬영한 건 40여 분 정도. 팀 당 미션 제한시간은 30분이었지만, 이는 식사시간까지 포함된 거라 출연자들이 서두른 까닭이었다. 경쟁하는 다른 팀보다 앞서 무언가를 성공해야 하는 게임 중이기도 하고.
그런 탓에 앞서 인사했을 때에도 인터뷰는커녕 한 사람씩 짧게 악수만 나누고 끝이었다.
“다음에 또 봐!”
“기회 되면 게스트로 나와, 잘해줄게.”
다만, 유기원이 팀장으로 있는 팀이 식당을 먼저 떠날 때였다. 영아가 급히 한율에게 오더니, 가볍게 말아 쥔 두 주먹을 올리며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내일 드라마 촬영 잘해요! 홧팅!”
한율은 그녀가 배우 이제설과 연인사이란 사실을 상기했다.
“네, 제설 선배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영아가 장난스럽게 소리 내어 웃었다.
“오빠한테는 한율 씨가 나 밥 굶겼다고 고자질 안 할게요.”
“감사합니다.”
출연자들을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어수선한 촬영제작진들에게도 인사를 마친 뒤, 한율은 차에 올랐다. 답답했던 전립과 상투 가발부터 벗어, 머리카락을 탈탈 털고 손으로 대충 빗질했다.
“수고했어. 점심 먹고 샵에 갈까? 먹고 싶은 거 있어?”
“한식 아무거나요.”
“쭈꾸미 좋아해?”
“연체동물이랑 매운 거 빼고요.”
오 팀장과 매니저 윤승우와 함께 점심을 먹은 후엔 샵에 가서 양치와 세면, 머리까지 새로 감아 거울 앞에 앉았다.
“하아아암….”
그때 누군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다가오더니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샵의 주 고객층이 대부분 연예인인지라 한율은 일단 거울로 상대를 확인했다. 거울을 통해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TV드라마에 곧잘 얼굴을 비추던 배우였다.
“왜 혼자야? 다른 친구들은?”
“개인 스케줄로 나와서요.”
“아아.”
“승권 씨, 아메리카노 드릴까요?”
“네, 시럽 좀 많이 넣어서.”
위이이잉. 직원이 드라이어기를 켜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종료. 한율은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뜨뜻한 바람과 능숙한 손길을 느끼면서 그제야 떠올렸다.
‘윤승권이었지.’
현재 차에서 대기 중인 매니저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배우. 그는 지난 번, 천재해커 소년 역으로 대본이 들어왔지만 거절했던 코믹액션 수사물 <불러만 BAR>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불러만 BAR>도 <별☆일없는 집>과 마찬가지로 10월에 촬영을 시작, 1월 방영예정이었다. 그러나 OSN과 tv Mu가 같은 대기업 아래에 있는 계열사라 방송시간은 겹치지 않을 터다.
“왜 거절했어?”
“네?”
드라이어기가 멈추자 들어오는 질문.
윤승권이 거울을 통해 한율을 보면서 물었다.
“우리 드라마 왜 거절했냐고. 이제설이 없어서?”
샵 직원들이 다 듣고 있는데도 거침없이 묻는다. 생글생글 웃는 입가와 달리 상대방을 관찰하며 값을 매기는 눈빛으로. 둔한 사람은 눈치 채기 힘든 조소가 엿보인다.
한율은 못 느낀 척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PC용어가 너무 어려워서요. 제가 맡기엔 너무 벅찬 캐릭터더라고요.”
“에이, 겸손은. 후배님이 연기 잘하는 거 이미 이 바닥에 소문이 자자한데. 그나저나, 내년에 희우랑 같이 영화 찍는다면서?”
“이희우 선배님이요?”
“선배는 무슨…. 평소처럼 누나라고 불러도 돼. 다 알아.”
평소처럼? 누나?
남이 들으면 한율과 이희우가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고 충분히 오해할 법한 말이었다.
“연락 한번 나눠본 적 없는 분께 누나라뇨.”
“어? 안 친해? 예전에 기사도 났었잖아. 희우가 너희 콘서트에도 갔었다고.”
“기회가 되면 그때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아아…, 안 친하구나? 그런데 왜 걔가 네가 하는 작품에 같이 나가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을까?”
한율은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거울에 비친 윤승권을 보았다. 윤승권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몰랐어? 내 친한 후배가 희우랑 같은 샵에 다니는데, 네가 <객귀>에 나간다는 얘기를 듣곤 자기도 나가고 싶다고, 너랑 같이 연기하고 싶다고 매니저한테 떼썼다던데? 그런데 임PD님이 싹둑! 너님 너무 고렙이라 안 됨! 이라고 퇴짜 놨다는 이야기. 그 덕에 그… 누구지? 너랑 같이 연기한 귀신.”
“이윤영 선배님이요?”
“그래, 맞아. 이윤영이 무사히 거기에 나가서 시청자들한테 얼굴 도장 찍을 수 있었던 거지. 귀신 얼굴 도장이었지만? 하하. 만약에 희우가 그때 걔 역할 뺏었어봐. 너랑 같이 <고양이 난로> 캐스팅 라인업에 이름 올릴 수 있었겠어?”
한율은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본인 얘기도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참 잘도 떠든다고. 오래 말을 섞기 싫은 타입이었다.
“그런데 윤영 씨 분장 지우면 어때? 예뻐?”
“어머, 승권 씨.”
샵의 디자이너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아이돌한테 이성에 대한 질문은 곤란하죠.”
“아, 맞다! 내가 실수했네. 미안!”
“아닙니다, 선배님.”
“음… 아무튼, 내일 이제설 만나면 안부인사 좀 대신 전해주고.”
“네, 그럴게요.”
그 후 윤승권은 자신의 머리를 만져주는 샵 직원에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간밤에 모 배우가 술에 취해 저지른 주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떤 가게 앞에 세워진 춤추는 풍선을 끌어안고, 하루 종일 여기에서 혼자 춤추면 안 춥냐고, 불쌍하다고 펑펑 울었다며.
궁금하지도 않고 썩 재밌지도 않은 이야기가 자꾸 귓가에 박히니 시끄럽다. 한율은 그의 주둥이를 바늘로 꿰매버리고 싶다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삭삭. 부드러운 브러시가 눈가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