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와옹.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소파 위로 올라왔다. 서한율의 개인 SNS에도 종종 등장했던 ‘퓨마’였다. 어찌나 사교성이 좋은지, 퓨마는 거리낌 없이 좌기훈 대표의 무릎을 앞발로 꾹꾹 누르다가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
자신의 방석이 된 인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버리든 말든.
냐옹. 여기에 한 마리 더. ‘호랑이’는 좌 대표의 몸에 기댄 채 누웠다. 어둑한 색 슈트에 눈에 띄는 노란색 털이 잔뜩 붙었다.
“어머, 죄송해요. 애들을 먼저 다른 곳에 두는 건데….”
차를 타고 가지고 오던 여성이 급히 쟁반을 티 테이블에 놓고, 퓨마부터 그에게서 떼어냈다. 퓨마의 입에서 항의성 짙은 울음이 길게 나왔다. 와오옹.
좌 대표는 허허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머님. 고양이가 이렇게 가까이 온 건 처음이라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원래 고양이, 음, 좋아해서 괜찮습니다.”
“당신은 보기만 하고 뭐했어요?”
“커흠.”
다른 소파에 앉아있던 서석진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좌 대표는 찻잔을 들었다.
“차 잘 마시겠습니다.”
“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는 소파에 나란히 앉은 중년 부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닮았는데 왜 그동안 전혀 눈치를 못 챘을까.’
서한율의 연습생 계약서와 전속 계약서의 보호자란 모두 ‘최은희’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흔한 이름인데다, 그녀를 둘러쌌던 이슈가 너무 오래되기도 하여 당장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이렇게 직접 만나보니 정말 서한율과 판박이였다.
‘이 사람이 ‘그 일’ 이후 오랜 연인사이였던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게 현 KBC의 시사교양국장일 줄이야.’
불쑥. 서석진이 좌 대표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
“제 아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대표님?”
“아, 아닙니다! 정말 한율이랑 많이 닮으셨구나 해서… 하하.”
“우리 아들이니 당연하죠. 이제 제 유전자가 힘을 발휘해, 키도 쑥쑥 자랄 예정입니다.”
“하하.”
팔불출처럼 으쓱거리며 말한 서석진이 제 몫의 차를 들었다. 그의 아내이자 서한율의 모친인 최은희도 찻잔을 들었다.
좌 대표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운을 뗐다.
“원래… 소중한 아드님을 맡겨주신 두 분을 진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지난번에 대표님께서 어스래빗 보호자들 식사자리를 마련하셨을 때 빠진 건 저희였는걸요.”
“그래도 아스대 때 팬들이 먹을 야식 도시락도 챙겨주셨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걸요. 그런데 한율이는 잘하고 있나요?”
“네! 굉장히 잘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MBS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별출연해달란 연락이 와서 그 스케줄을 뛰고 있는 걸요. 한율이가 아스대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던 당시 시청률이 펄쩍 뛰어서, 그쪽 예능국 PD가 한율이 잠깐이라도 섭외해야지 뭐하냐…, 고…….”
신나게 말하던 좌 대표가 뒷말을 흐린 건, 망연해지는 서석진의 표정 때문이었다.
“네, 시청률이 펄쩍 뛰었죠. MBS의 시청률이. 하하하하, 동 시간에 제가 신경 써서 살핀 다큐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말이죠. 하하하, 아들한테 졌어요. 하하하하.”
“…하하.”
그렇게 대화는 한참동안 서한율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그리고 찻잔의 차가 바닥을 보일 때 즈음, 좌 대표는 앞서 전화로 간단히 말했던 용건을 꺼냈다.
며칠 전 앗싸일보 연예부장이 전화로 떠들었던 내용을.
“…본인 입으론 당장 기사를 낼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겠단 말이겠네요.”
“네. 하지만 아버님께서 방송국 국장이란 사실이 알려져도, 아버님이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주거나 청탁한 사실이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껏 안 알려진 게 신기할 정도거든요. 한율이야 워낙 입이 무거우니 그렇다 쳐도, 여기 아파트에 살면서 오며가며 본 분들이 적잖았을 텐데.”
“그건 아마… 제가 항상 바빠서 한율이랑 같이 다닌 시간이 적어 그럴 겁니다.”
“저도.”
달그락. 최은희가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 아파트 내 모임 같은 자리에 전혀 나가지 않아 이웃과 거의 교류가 없었거든요.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부모 참관 행사가 있을 때에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늘 동생이나 올케한테 부탁했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요.”
“아니에요. 그리고… 언젠가 제 일이 다시 재조명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한율이가 기획사에 들어가겠다고 이야기하기 전부터. 다만 제가 걱정되는 건….”
짧은 심호흡.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괜히 한율이가 피해를 입진 않을까 하는 거예요.”
“그렇진 않을 거야, 여보.”
서석진이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우리 아들 잘 알잖아. 굉장히 어른스럽고 생각도 깊다는 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제도 모르고 선을 넘는 사람들이 나타나도, 우리 아들이 어디 엄마 탓할 아들이야? 선을 넘는 사람의 다리를 걷어차 버리지?”
“여보….”
결혼한 지 3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금슬이 참 좋네.
좌 대표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부부를 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한율이는 왜 그렇게 무뚝뚝한 거지…?’
지난번에 만났던 서한율의 외숙인 최은후도 굉장히 넉살 좋은 성격이었건만.
“그럼 한율이도.”
좌 대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다정한 부부 밑에서 어떻게 그렇게 무뚝뚝하고 단호박 성격을 지닌 아들이 태어났냐는 질문은 아니었다.
“어머님 일을 알고 있는 거죠?”
서한율의 부모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기하네
오후 3시 45분. 한율은 브랜드 팬미팅이 열릴 종합쇼핑몰에 도착했다. 팬미팅 진행요원과 함께 마중을 나온 더순한화장품 기획팀 직원이 말했다.
“두 분 다 오셨으니 조금 일찍 시작할까요? 벌써부터 당첨된 2백 분이 길게 줄서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오 팀장이 물었다.
“성비는 어떻게 돼요?”
“여성분이 좀 더 많죠? 막 한율 씨 이름 적힌 머리띠하고 오신 분들이 종종 보였어요. 은수 씨 포스터 든 남자 분들도 조금?”
“줄은 따로따로죠?”
“아니요. 왼쪽에 은수 씨, 옆으로 한율 씨. 이렇게 이동해서 두 분 모두에게 사인을 받을 수 있도록 돌리려고요.”
그래도 괜찮을까.
어스래빗도 팬미팅을 진행할 때 나란히 앉아 팬들을 맞이했었다. 그때에도 보란 듯이 몇몇 멤버를 고의로 무시하며 휭 지나쳐 무안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건만.
‘아니, 그것보다.’
한율은 CF를 촬영할 당시의 진은수를 떠올렸다. 수많은 사람들과 카메라가 저를 주목하자 동작과 미소가 어색하게 삐걱거리던 모습을. 그나마 화보를 찍을 때는 덜하긴 했지만… 오늘은 무려 2백 명이 우글거리는 팬미팅 자리.
“은수 씨는 어쩌고 있어요? 많이 긴장한 것 같지 않았어요?”
“글쎄요…. 관리실로 안내한 후론 들여다보질 않아서. 그래도 매니저 분이 있으니까 괜찮겠죠. 그리고 또 히아신스의 호수 동생이잖아요? 잘 하겠죠.”
언니가 잘나가는 아이돌이란 건 상관없을 텐데.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은수 씨가 괜찮다고 하면 바로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진은수는 관리실에서 파티션으로 분리된 휴게실에 앉아있었다. 다 식은 커피를 앞에 두고 혼자 멍하니 있다가, 한율이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선배님은요?”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네.
“저도 잘 지냈어요. 이제 슬슬 시간도 다 돼 가는데, 조금 일찍 시작하는 건 어떠세요?”
진은수의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은수를 바라보았다.
“넵, 저도 괜찮아요.”
씩씩하게 대답한 진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율은 그녀가 먼저 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주었다. 진은수의 왼팔과 왼발이 함께 나갔다. 삐걱삐걱.
“…….”
정정,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
속으로 한숨을 쉰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스친 시야 속에서 휴지통 안에 든 우황청심환 포장지를 본 것 같았다.
‘설마 도중에 공황발작을 일으키진 않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팬미팅이 시작되자 진은수는 내내 미소를 띤 얼굴로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고, 대화도 나눴다. 몇몇 철없는 아이들이 그녀를 대놓고 무시해 휭 지나쳐도 바보같이 계속 웃었다.
“언니 피부 너무 좋아요…! 정말 언니도 이 화장품 써요?”
“네, 제가 평소에 운동 같은 거 하면 땀을 많이 흘리는데, 그 다음에 바로 씻으면 막 건조해지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급한 마음에 막 바르면 제대로 흡수가 안 되는 느낌이었는데, 이건 보들보들하고 순하게 싹 스며드는 것 같아서… 어?”
“네?”
“아, 써요.”
“네….”
질문과 약간 엇나간 대답을 하기는 해도 큰 실수 없이, 잘.
“오빠. 오빠 덕에 제 별명이 피부천사가 되었어요.”
“무슨 뜻이에요?”
팬미팅 주최 측에서 사인을 받으라고 마련해준 포토엽서. 거기에다 사인을 요청한 팬의 이름을 적어주던 한율은 고개를 들었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4, 5학년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애가 이마에 손가락을 얹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 오빠 팬미팅에 오려고 3년 동안 모은 세뱃돈을 봉인 해제시켜, 당첨될 때까지 사고 또 사고. 여분으로 놔둔 한 세트를 제외하고 나머진 오빠의 매력에 빠져 새롭게 팬이 되었다는 친구들에게 하사하였더니….”
말투나 몸짓이 길우성과 박가람을 반씩 섞어 놓은 것 같다.
“부모님한텐 안 혼났어요?”
“후후…, 그러니 오빠가 기운을 좀 주세요, 쓰러지겠엉….”
그러면서 두 손을 장난스럽게 슥 내민다. 한율은 원하는 대로 손을 가볍게 잡아주고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보람이 홧팅! 힘내요!”
“5초만 더….”
“하하.”
잠시 후엔 진은수에게 ‘누나 예뻐요!’ 라고 굵직한 목소리로 말한 남학생이 한율 앞에 서서 엽서를 내밀었다.
“사인 좀. 동생이 님 사인 안 받아오면 컴 털어버린대요.”
“동생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개나리요.”
“네?”
“개나리. 진짜 이름이 개나리니까 그렇게 적어주세요. 개나리야, 안녕? 하고.”
찰칵찰칵. 팬미팅 현장으로 취재 온 어느 기자의 카메라가 시끄럽게 셔터 소리를 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팬미팅은 현장에서 다시 추첨된 사람들과 폴라로이드 즉석사진을 함께 찍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한율이 앉았던 자리 뒤에는 팬들이 준 선물이 상자에 가득 쌓였다.
평소 선물을 받지 않던 한율이 그나마 선물을 받는 이벤트라 그런지, 아주 작정을 하고 서너 개씩 들고 온 팬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오 팀장이 한율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선물 모두 정리하고 갈 테니까, 관리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한율은 팬레터만 따로 둔 박스만 안고, 경호원, 진은수와 진은수의 매니저. 이 셋과 함께 관리실로 이동했다. 팬미팅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팬들에게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전에도 왔던 관리실 내 휴게실.
“선배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얼굴 근육이 웃는 낯으로 굳어버린 건 아닐까. 인사를 하는 진은수의 입 꼬리가 가늘게 부들부들 떨렸다. 의자에 앉는 동작에도 힘이 전혀 실리지 않아 털썩 소리가 크게 났다.
진은수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에요….”
“…네.”
한율은 0. 5초 늦게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이랑 좀 닮았네.’
눈꼬리가 살짝 쳐진 커다란 눈으로 멍해있는 모습이 본래 세상, 부대에서 병사들이 잠깐 돌봐주었던 작은 마물을 떠올리게 한다. 건강한 나무의 수액을 주식으로 삼고, 겉은 멀쩡해도 속이 병든 나무를 기가 막히게 판별하여 소소하게 쓸모가 있던 마물.
‘하지만 거센 태풍이 몰아친 날, 배를 채우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가 비바람과 함께 빙글빙글 휘날려 어디론가 사라졌지.’
『꺄아아앙…!』
아련한 울음소리를 남기고 말이다.
“WB래빗은.”
진은수의 매니저가 한율에게 말을 걸었다.
“더 이상 남연 안 뽑죠? 올해에 어스래빗이 나왔으니.”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 아, 혹시 이사문PD님과는 연락하면서 지내세요? 하울링 감독님이요.”
“명절에만 안부인사 드리는 정도에요.”
작년 추석, 사실 한율은 이사문PD에게 안부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조유찬이 명절마다 업계 관계자들과 동료들에게 안부 인사를 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여, 간만에 <하울링> 1화 대본을 펼쳤다. 앞장에 감독을 비롯한 주요 스태프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재된 까닭이었다.
그렇게 명절마다 걸었던 전화통화 내용은 늘 비슷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서한율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명절은 잘 쇠고 있어요?』
『네. 감독님은요? 아픈 덴 없으시죠?』
-『저는 팔팔합니다. 한율 씨도 항상 몸 건강하게 잘 챙기세요. 조만간 기회가 되면 봐요.』
『네. 들어가세요, 감독님.』
끝.
작품이나 연기활동 관련한 이야기는 일체 오간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서로 안부만 묻는 통화.
진은수의 매니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시구나….”
그때 휴게실로 더순한화장품 측 직원이 들어왔다.
“오늘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회식장소로는 한율 씨 매니저 분들 오면 그때 이동할게요.”
“네.”
기어이 회식을 하는 구나.
사실 WB래빗이나 아림 엔터는 오늘 팬미팅 일정이 끝나면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만 하곤 찢어지길 바랐다. 모델이 둘 다 아이돌, 아이돌 연습생인 까닭이었다. 특히 아림 엔터에서 더 곤란한 기색을 슬며시 내비쳤을 것이다. 이성과 조금이라도 얽히면 남돌보다는 여돌이 악플러들의 공격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하지만 클라이언트에겐 씨알도 안 먹힌 모양이었다.
더순한화장품 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장님도 그쪽으로 오실 거예요.”
CF를 촬영할 때 진은수에게 유독 칭찬세례를 퍼부으며 응원하고, 삐걱삐걱 어색하기 그지없던 동작과 미소도 괜찮다고 웃어넘기던 아저씨.
‘회식자리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그러나 한율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오늘 한율의 스케줄에 동행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오동식 팀장이란 것.
오 팀장은 회식이 시작되고 정확히 50분이 경과되자, 막 술에 취해서 자신의 지난 성과를 거창하게 늘어놓으려던 김 부장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배우 이제설이 나왔던 화제작을 언급하며 감상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 여기에서 또 한율의 드라마 이야기로 전환하여….
“그 중요한 촬영이 바로 내일부터라고요? 진작 얘기를 하셨어야지! 하마터면 우리 모델 얼굴 팅팅 붓게 만들어서 내보낼 뻔했네!”
언젠가 김 부장이 남들에게 ‘내가 먼저 가라고 했어! 드라마 촬영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럼 얼른 가야지 뭐하냐고 배려를 해주었지!’ 라고 떠들 수 있도록.
더순한화장품 측이 적잖은 계약금을 주고 한율과 계약을 한 이유도, 한율이 피부가 좋다는 점도 있지만 앞으로 드라마와 영화 등 각종 무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간접홍보를 톡톡히 해줄 거란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식이랍시고 바로 내일 드라마 촬영을 나갈 사람을 오래 붙잡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도 피부상태가 중요한 화장품 전속모델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정말 수고하셨고,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한율은 회식 한 시간 만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님.”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는 진은수의 눈이 ‘나만 이 아저씨들 수다지옥에 두고 가지 마요, 선배님….’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한율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에 또 봐요.”
* * *
[어스래빗 한율, 더순한화장품 브랜드 팬미팅 진행]
[9일, 서울의 D종합쇼핑몰에서 더순한화장품 전속모델인 어스래빗의 한율이 팬미팅을 진행했다.
(사진=앗싸일보)
공동모델인 아림 엔터테인먼트의 진은수와 함께 진행한 이번 팬미팅은, 더순한화장품 기초화장품 구입 시 주어지는 응모권으로 당첨된 3백 명을 대상으로…(중략).
한편, 한율은 내년 1월 tv Mu에서 방영예정인 드라마 <별☆일없는 집>에서 이제설의 동생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오늘도 율톢은 열일중
-오늘 낮에 저기 갔다가 실제로 봤는데, 피부 진짜 좋긴 좋았음ㅇㅇ 화떡에다가 뽀샵질한 게 아니엇음ㄹㅇ
-오빠놈이 당첨돼서 한율이 사인도 같이 받아와라 부탁했는데ㅋ 대체 오빠놈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한율이가 ‘개나리 빛깔처럼 고운 동생 분에게♡’라고 적어줬더라
ㄴㅋㅋㅋㅋㅋㅋㅋ
ㄴ오빠 표정예상도->(ᗒᗣᗕ)윀
ㄴ똥구니? 엄빠 앞에서 컴 한번 탈탈 털려볼래?^^
-누가 율이한테 고양이귀 머리띠 줬어ㅡㅡ 확 뽀뽀해버릴라
-다른 톢이들도 보고 싶다..8ㅅ8...
-나 정말 궁금한 거 있는데 얘 개인 활동수익도 1/n임?
ㄴㄴㄴ개인 활동은 개인이 먹음ㅇㅇ
-어??? 나 오늘 아침에 얘 샵에서 나오는 거 봤을 때 조선시대 무관처럼 파란색 한복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 뭔 이벤 하나보다 했는데 아니네??? 멀쩡한 옷 입고 있네?
ㄴ잉? 한복이여???
ㄴ무관??? 무관이여??? 무관??????!!!!!!!!!!
“앞으로 인기가 더 많아지겠지?”
“네? 누구요?”
<별☆일없는 집>의 주요배경 중 하나가 될 삼형제의 집. 촬영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소파에 편히 앉아 핸드폰으로 기사를 훑던 이제설이 말했다.
“한율이 말이야.”
아아. 박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한율은 다른 곳에서 짧은 씬을 찍고 오느라 아직 도착 전이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다재다능하기도 하고, 외모도 나쁘지 않고, 팬들한테도 잘하고.”
“영어도 엄청 잘하더라.”
“그게 좀 신기한 게, 얘기 들어보니까 해외에 나간 게 작년이 처음인데도 완전 원어민 수준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텍사스 사투리. 만약 부모님이 조기교육이라고 집에서 영어만 쓰도록 했어도 굳이 사투리로 가르칠 것 같진 않은데 말이죠.”
“신기하네.”
“신기하죠.”
“연기 배운 지도 얼마 안 됐다면서?”
“네. 작년에 우리 회사 들어오고 나서야 배우기 시작했다더라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발음이랑 발성도 좋았고, 관찰력이나 이해력도 좋은 것 같고, 무엇보다도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없는 게 큰 장점으로 작용되는 것 같아요. 완전히 무대 체질?”
“아니면.”
이제설이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이번이 인생 2회 차일지도 모르지.”
운동하면 괜찮아
<별☆일없는 집>의 ‘태바다’는 5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다. 늘 함께 붙어있던 쌍둥이 형제와도, 어머니와도 떨어져 한동안은 조부모의 집에서 지냈다.
7살.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재혼을 했고, 사업도 나름 잘 풀리는 듯했다.
초반에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태바다도, 바로 이웃에 사는 또래 친구 ‘제시’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제시를 따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큰 재능은 없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기에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릴 때까진.
“…미안한데, 네 나이에 그 정도 치는 애들은 콩쿠르에 널리고 널렸어. 네가 내밀어야 할 건 너에게 투자해달라는 제안이 아니라, 돈이야.”
14살.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가세가 기울었다. 계모는 아버지와 이혼하며 떠났고, 태바다는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어려워지자 당장 피아노 개인레슨은커녕 학원비도 마련하기 힘들어져, 태바다는 학교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쳤다.
언젠가 제시와 콩쿠르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중3이 되자 초조함은 더욱 커졌다.
“정말 피아노로 진학을 하고 싶으면 부모님한테 말씀드려서 개인 레슨을 받아. 그게 힘들면… 앞으로도 힘들 거야.”
그런 절박한 마음에 찾아간 학원.
쾅. 태바다는 바로 눈앞에서 닫힌 문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이성적으론 씨알도 안 먹힐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는데, 왜 헛된 희망을 품었던 걸까.
이젠 비단 약속 때문이 아니었다.
약속을 핑계로 매달렸던 목표의 좌절. ‘나’를 위주로 돌아가던 좁은 세상의 방향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는 두려움.
‘놓으면 되는데…, 놓지 못하겠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마음에 울컥 화가 난다.
“하….”
태바다가 된 한율은 깊은 숨을 토해내곤 고개를 들어 눈물을 삼켰다. 그때 울리는 핸드폰.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걸려온 전화라, 무시하려다가 뒤늦게 받는다.
“누구세요? ……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 소식.
눈가에 새로운 눈물이 고여 뚝 떨어졌다.
“…컷. 앵글 바꿔서 다시 갈게요!”
감독의 사인이 내려지자마자 분장팀 스태프가 달려와 눈물이 번진 메이크업을 수정해주었다. 그렇게 같은 씬을 반복 촬영한 후엔 삼형제가 앞으로 함께 살아갈 집에서 만나는 씬 촬영을 위해 이동했다.
본래 극중 시간 흐름상 병원 장례식장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촬영에 섭외된 장소 스케줄에 맞춰야 하는 까닭에 해당 씬 촬영은 뒤로 미뤄졌다.
사실 한율은 <별☆일없는 집> 촬영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이미 드라마는 삼형제의 과거, 아역들이 나오거나 부모의 사고 씬 촬영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설과 박현우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도.
높은 언덕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인천의 한 주택가. 외조부모가 돌아가시고 태하늘 혼자 살았던 집으로, 드라마 촬영을 위해 본래 비어있던 집을 빌려 세트장으로 꾸민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박현우가 웃으며 한율을 반겼다.
“왔냐, 2회 차?”
“……?”
2회 차? 의아한 눈으로 박현우를 쳐다보는 한율에게 이제설이 다가왔다.
“왔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응. 어제 무척 바빴던 것 같던데, 컨디션은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설이 한율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웃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23-2, 리허설부터 갈게요!”
장면은 지난 번 대본 리딩자리에서도 했던 내용이었다. 앉아서 대사만 쳤던 때와 달리 극중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표현해야 함에도, 촬영은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연기 잘하는 사람들만 데려다 놓으니 엄청 순조롭네.”
“그러게요.”
이는 드라마대본이 후반부까지 나온 덕도 컸다. 캐릭터에 대한 단서가 많으면 많을수록 배우는 캐릭터를 더 많이 연구하고 감정을 이해하여 몰입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아직’은 멀쩡한 스태프들.
촬영 큐시트에도 나왔듯이, 촬영은 이제설이 포함된 씬부터 진행되었다.
“이제부턴 제설 씨 단독 촬영이니까, 한율 씨는 가서 점심 먹고 와요.”
“네.”
주택 대문 밖 골목에선 박현우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박현우가 한율에게 손짓했다.
“서한율, 저기 봐봐.”
골목에 주차된 밥차 옆, 이제설의 사진이 걸린 커피차가 세워져 있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스태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온더로즈의 영아가 보낸 듯했다.
“부럽지 않냐?”
“내일은 이프림이 보내준대요.”
“…….”
박현우가 말없이 한율을 쳐다보다가 입가를 올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냥 참을게, 아이돌아.”
“그런데 조금 전에 말한 2회 차는 무슨 뜻이에요?”
“너님이 너무 다재다능한데다가 애늙은이 같아서 혹시 인생 2회 차 아니냐 얘기가 나왔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불렀어요.”
이번엔 한율이 입을 다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