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427)

* * *

“오늘은 스케줄 없어?”

10월 12일. 한율은 아주 오랜만에 교복을 입고 멤버들과 함께 회사 구내식당으로 왔다. 아침 메뉴는 소고기 미역국. 미역국을 집중적으로 퍼먹던 라이언이 문득 의아한 얼굴로 한율에게 물었다.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밤에 촬영가요.”

“힘들겠다. 멀잖아.”

“내일은 어떡해?”

길우성이 물었다.

“내일이 녹음일인데, 괜찮겠냐?”

“내일은 오프야. 어차피 녹음도 저녁에 하니까 괜찮겠지.”

“15일은 부산 아뮤 페스티벌 잡혔고…. 와, 너 진짜 빡세겠다. 안무연습은 언제 하냐?”

14, 15일에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아뮤직페스티벌>.

이름만 아시아지, K-POP 아이돌이 라인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행사엔 어스래빗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17일은 앨범재킷촬영, 21일에는 <있어> M/V 촬영.

“안무연습은 대기시간에 틈틈이 하고 있어.”

한율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길우성이 싹 안면을 바꿨다.

“신곡 안무 유출 안 되게 조심하고. 알았어, 써한?”

“…….”

길우성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다이어리 앱을 실행하더니 소리 내며 적었다.

“오늘의 일기…. 아주 오래간만에 친구로부터 한심하다는 시선을 받아보았다…. 키읔, 키읔, 키읔.”

이놈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걸까.

한율은 길우성을 무시하고 라이언에게 말했다.

“어쨌든 오늘 라방엔 참여하지 못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형.”

오늘은 라이언의 생일이었다.

라이언이 생긋 웃었다.

“괜차나. 나중에 맛있는 거 사오면 돼.”

“아, 촬영장 근처에 유명한 마카롱 가게가 있다고 들었—.”

유호가 끼어들었다.

“안 돼, 살 쪄.”

“운동하면 괜차나.”

“이언이가 결국.”

이건우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먹기 위해 운동하는 경지에 다다르고 말았어….”

라이언의 생일축하 이벤트는 라이언의 하교에 맞춰 진행되었다. 교문을 나서는 라이언을 검은색 밴으로 납치, 커다란 곰돌이 인형을 선물로 안기고 그대로 뷔페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특별히 주문한 생일 케이크를 라이언의 앞에다 놓았다.

“히히….”

케이크에 꽂혀있던 촛불을 끈 라이언이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그러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영어로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생일파티 주인공이 된 거 오늘이 처음이야.]

강보배와 박가람이 동시에 고개를 기울였다.

“응? 뭐라고 했어, 라이언?”

“…….”

“…….”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듣지 못한 멤버들 가운데, 한율과 유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라이언의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하던 유호는 카메라 속 라이언이 아닌, 그 너머의 라이언에게 직접 말했다.

[내년 오늘도 라이언 네가 주인공이 될 거야. 그때도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줄게.]

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그제야 대충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아차렸는지, 차남석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작게 한숨 쉬는 모습이 보였다.

식사가 끝난 후엔 이프림이 생일 축하 전광판 광고를 걸어준 전철역 중, 비교적 유동인구가 적은 곳으로 가서 단체로 인증샷을 찍었다.

“그럼 촬영 수고해.”

“올 때 맛있는 거 안 사와도 괜차나. 나 이제 운동 3시간.”

“네. 생일 축하해요, 형.”

한율은 멤버들과 찢어져, 따로 마중을 나온 조유찬의 차에 올랐다. 촬영장까지는 대략 한 시간 거리. 그러나 도로에 차가 많을 시간대라 더 오래 걸릴 터였다.

한율은 좌석을 살짝 젖혀 편히 몸을 묻다시피 하곤 핸드폰을 꺼냈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엔, 며칠 전 온더로즈의 영아가 <별☆일없는 집> 촬영장에 이제설을 응원하는 커피차를 보냈다는 기사가 메인에 떠있었다.

[온더로즈 영아♡배우 이제설, 연애전선 이상無!]

이프림이 준비한 라이언의 생일 축하 서포트 기사도.

[어스래빗 라이언, 팬들의 사랑이 가득 담긴 생일 축하 서포트!]

-1012만원 기부ㄷㄷㄷ

-얘네 데뷔한 지 얼마 안 됐고, 그닥 인기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어째 생일 이벤 규모가 매번 어마무시한 거 보면 완전 신기함ㅇㅇ

ㄴ이번에 일본 팬들이 많이 보태주었대요^^

-우리 사자톢!!!!! 생일 축하한다!!!!!!!!!!!

-이런 애도 있었구나... 8명인가 9명이라서 누가누군지 헷갈린다

ㄴ님은 절대 이인삼각 경기 나가선 안 됨.

ㄴ???

ㄴ파트너가 너님 존재감 잊고 전력질주 함.

ㄴㅅ...ㅂ...... 너어는 진짜.....ㅠ

-난 라이언이라기에 그 초코톡 곰 말하는 건 줄 아랐는데.. 잘생겼네..

ㄴ그거 갈기 없는 수사자임. 곰 아님.

ㄴ?!?!?!

-라욘아 생일 축하해♡♡♡♡♡♡♡♡ 항상 행복하자(๑˙╰╯˙๑)♡♡♡♡♡♡♡♡♡♡

-어? 우리 집 조명이 왜 여기에 걸려있지? 윽... 눈부셔...ㅠ

-사랑해 라이언

-얘 검머외 아님ㅡㅡ???

ㄴ외국인이란 걸 알 정도로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셔서 감사함당ㅎㅎ

-Happy birthday, Ryan.

* * *

<별☆일없는 집> 방영은 1월로 잡혀있었다. 앞으로 3개월이 남아 촬영은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나, 현장은 전혀 느긋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드라마 제작사 측이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촬영일정을 타이트하게 잡은 까닭이었다.

통상적으로 드라마 제작비 중 70%는 작가와 배우들이 가져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별☆일없는 집>에서 몸값이 높은 배우가 이제설 한 명뿐이니 괜찮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그것까지 계산하여 총제작비가 적게 나온 모양이었다.

여기에 자정을 넘기며 일해도 추가수당 따위 없는, ‘열정 페이’를 당연시하는 업계분위기까지.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계약서조차 쓰지 않은 비정규직이거나 프리랜서 혹은 턴키 계약으로 온 사람들이라, 네가 그만둬도 대신 와서 일할 사람이 많다는 인식도 만연하여 정말 사람의 피를 말리는 근무환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촬영장에 도착했을 땐 완전히 캄캄해진 밤이었다. 한율은 삼형제의 집 대문으로 들어갔다가, 세트로 설치된 낡은 벤치에 앉아 기절하듯 잠든 사람을 발견했다. 조명팀 스태프였다.

“저기요?”

어깨를 잡아 살며시 흔들고 나서야 조명팀 스태프가 눈을 떴다. 파르르 열리는 눈꺼풀 아래로 흰 자만 덩그러니 나왔다가, 돌아갔던 눈동자가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어…, 어어….”

비몽사몽 상태로 깨어난 그는 잠시 ‘누구…? 여기는 어디…?’ 라는 시선으로 멍하니 있다가 앞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깜빡 잠들었네요.”

“날이 차서 여기에서 주무시면 몸에 안 좋아요. 따뜻한 차라도 갖다드릴까요?”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왔어요, 한율 씨?”

그때 집안에서 조연출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나왔다. 그가 반 이상 풀린 눈을 끔뻑거리면서 큐시트를 들었다.

“그런데 어쩌죠…. 한율 씨 촬영하려면 2시간은 더 대기해야 할 것 같은데. 오디오 장비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수리 중이거든요. 그리고 스태프 하나가 벌써 도망… 아니, 음. 아무튼, 편히 쉬고 있어요.”

대한민국의 드라마 촬영제작진의 일주일 평균 근무시간은 120시간. 하루에 24시간을 훌쩍 넘는 걸 모자라 30시간 내내 촬영할 때도 있다고 들었다. 앞서 <객귀, 해>를 찍었을 때에도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스태프들을 보기는 했으나, 이곳 스태프들의 몰골은 그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조유찬이 슬며시 다가와 한율에게 속닥거렸다.

“이분들 지금 두 시간 겨우 자고 23시간 내내 촬영 중이래. 그러니 사람이 든 장비 옆 지날 때 특히 조심해. 알았지?”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한율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네, 선배님.”

새벽 1시. 감독이 ‘오늘 촬영 끝!’을 외쳤다.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고 기뻐하며 찜질방에 가서 잘 사람, 서울로 돌아갈 사람을 추리는 스태프들의 대화를 배경으로 이제설이 물었다.

“아이돌도 술 자주 마셔?”

“미성년자라 잘 모르겠습니다, 선배님.”

“같은 팀에 성인 있잖아.”

한율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목이 상하고 컨디션도 망가진다고 거의 안 마셔요.”

“너희 팀 인기 많던데. 그럼 친구들이 술자리 같은 데에 자주 부르지 않아?”

한율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친구나 지인을 만나 술을 마시고 들어왔던 건 유호와 이건우 뿐이었다. 그러나 유호의 경우는 데뷔조 당시 한 번뿐이었고, 이건우도 취할 정도로 마시고 들어온 적은 없었다.

애초에 휴일에도 거의 회사 연습실이나 작업실에만 붙어있고.

“별로? 그리고 저희가 아직 신인이라 지켜야 할 규칙이 많거든요. 스케줄이나 회사에서 연습할 때 외엔 밤 아홉시 이후로 외출도 금지고.”

“아홉시? 그렇게 일찍?”

“네.”

“아… 그러면 나가도 2차는커녕 저녁만 먹고 헤어지겠구나. 완전히 이른 저녁에 만나는 게 아닌 이상. 그럼.”

이제설이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 팀 선배 그룹도 그래? 크리스탈 래빗도?”

“반은요. 작년까진 크래 선배님들도 통금이 밤 아홉시였지만, 지금은 비활동 기간에 한해 통금이 사라졌다고 들었어요.”

이는 크래 공카에도 나온 정보였다. 크래의 채아가 SNS에다가 ‘처음으로 해가 저문 시간에 친구들과 홍대에서 만났다!! 우왕!!! 밤인데 환해!!!’라고 스스로 알리기도 했고.

“술은… 선배님들도 자주 마시는 것 같진 않아요.”

“그렇구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제설의 표정에서 미약한 근심이 읽혔다.

혹시 여자 친구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건가?

“하지만 다른 기획사는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응, 대답해줘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고, 토요일에 보자.”

“네. 들어가세요, 선배님.”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

차에 탑승하자마자 곯아떨어진 박현우 옆에서 한율도 잠깐 눈을 붙일 준비를 했다. 준비물은 예전에 선물로 받은 목베개. 그러나 자기 전에 핸드폰으로 그라 앱을 실행시켜, 몇 시간 전에 멤버들이 했던 라방을 보았다.

팬들이 종종 콘텐츠에 함께 나오지 않은 멤버를 향해, 그거 보았냐고 확인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것에서도 찾는 멤버간의 유대감이나 의리. 하물며 라이언의 생일 축하기념 라방이었으니 더욱 챙겨봐야 한다.

-미쿡에선 사자가 어흥이 아니라 로어와 롸아ㅇㅏ의 어디쯤이구낰ㅋㅋ

-ROAR

-율이는 드라마 촬영갔나부다ㅜ 없네ㅠ

라방 톡창엔 한율처럼 뒤늦게 라방 영상을 보는 팬들의 톡이 소소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같은 장면을 보는 게 아니라서 싱크는 제각각.

[왜 헬쑥? 핼쑥해졌냐면, 오늘 밥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세 시간 운동했어요. 살찌면 안 돼.]

라방 총 시간은 23분. 팬이 선물해준 사자 잠옷에다가 머리띠까지 한 라이언이 팬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장면을 볼 때였다.

영어로 된 톡이 올라왔다.

-[나 무서워, 라이언... 나도 한국에 가면 안 돼?]

-[나 잊어버린 건 아니지? :'(]

“……?”

마치 라이언을 잘 아는 사람이 쓴 듯한 내용.

미국 성조기 아이콘이 붙은 ‘Teddy’의 톡은 다른 팬들의 톡에 밀려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영어로 톡을 썼다.

-[이 영상은 라이브가 아니라서 라이언은 톡을 못 봐요.]

테디가 곧 짤막한 반응을 보였다.

-Ah

이후 테디는 더 이상 톡창에 등장하지 않았고, 한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라방을 끝까지 본 후 짧은 잠을 청했다.

* * *

13일은 드라마 촬영스케줄이 오프였으나, 학교에 다녀왔다가 연습, 그리고 녹음을 진행했다. 녹음이 끝난 후에는 새벽 1시까지 그동안 모자랐던 안무연습에 매진. 14일엔 또 아침부터 드라마 촬영이라, 새벽부터 일어나 다시 주요 촬영지인 인천으로 향했다.

15일은 <2017 아시아 뮤직페스티벌> 무대에 오르기 위해 새벽 3시 기상. 차에 타자마자 잠깐 눈을 붙였다 떠보니 어느새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

“으어억….”

페스티벌이 열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어스래빗 멤버들은 기지개를 켜며 장시간 굳었던 몸을 풀었다.

“아이고고.”

뚜둑.

“방금 뚜둑 소리 누구냐.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얘들아, 이거 하나씩 먹자.”

조유찬이 멤버들에게 홍삼 스틱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얼마 전 좌기훈 대표가 사비로 사준 것이었다.

그들은 홍삼 스틱을 입에 하나씩 물고 차에서 내렸다. 한율은 나중에 먹으려고 주머니에 넣었다.

“어우, 굉장히 맛있어서 잠이 확 깨네.”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홍삼을 먹던 라이언이 길우성을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게 맛있어?!”

“반어법입니다, 형님.”

“그런데 오는 길에 보니까 버스킹하는 분들 많더라. 구경 가고 싶어.”

“리허설 끝내고 잠깐 나오면….”

“응, 안 돼.”

강보배와 박가람의 바람을 유호가 단호히 잘랐다.

“여러 사람들한테 민폐야.”

“네….”

“다 끝난 후에는?”

“그땐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안 돼. 위험해.”

“그래도 기껏 부산까지 왔는데….”

부산엔 지난 번 1st EP앨범 발매기념 팬 사인회를 하기 위해 왔었으나, 그때에도 다음 날이 월요일이라 팬 사인회만 하고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하룻밤 묵었던 성인 멤버들도 아침 일찍 시장에만 들러 그라 콘텐츠만 촬영하고 올라왔고.

“그러고 보니, 우리 원래 여름에 그라에 내보낼 여행 콘텐츠 찍기로 하지 않았어? 봄에 하려고 했는데 그때 남석이 형이랑 보배 형이 나간 프로랑 겹친다고 여름으로 미뤘었잖아.”

“가을이 되고나서야 떠올리는 게냐, 그런 게냐.”

“우리 최소한… 내년 1월 중순까지는 시간 안 되지 않아?”

“안 되겠어. 생각났을 때 미리 구체적인 플랜을 짭시다.”

어스래빗은 오늘 공연 두 번째 순서라, 곧장 리허설을 위해 야외무대로 향했다. 그곳엔 먼저 온 걸그룹과 보이그룹이 한 팀씩 있었다.

걸그룹은 첫 번째로 무대에 오를 ‘에스더즈’였다. 어스래빗보다 데뷔가 한 달 늦은 후배. 그들은 편하게 입어도 되는 리허설인데도 가볍게 메이크업을 하고 안에 속바지를 입은 짧은 치마나 핫팬츠 차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에스더즈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6명의 소녀가 일제히 어스래빗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스래빗도 씩씩하게 화답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입니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보이그룹은 한율이 <여름소풍>을 함께 찍었던 ‘효운’이 소속된 풀썸.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다, 한율아.”

“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단체인사를 하고나서 한율은 효운과 안부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6월에 봤었나?”

“네. 선배님 아스대엔 왜 안 나오셨어요? 선배님만 안 보이던데.”

“아… 나 그때 좀 아팠었거든. 혹시 대상포진이라고 들어봤니?”

“그러고 보니 살도 많이 빠지셨네요.”

“음. 그러니 넌 절대 굶으면서 살 빼지 마. 면역력 떨어지고 벌써부터 탈모까지 오려고 난리다.”

20대 초반의 나이. 그리고 데뷔 2년 차에 벌써.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안타깝다는 눈으론 보지 말아주라.”

한율은 조금 전 안 먹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홍삼 스틱을 꺼냈다.

“이거라도 드세요.”

“어, 고마워….”

오늘 공연 무대에 오르는 건 어스래빗을 포함해 열 팀. 이 중 대만과 일본, 필리핀에서 온 세 팀을 제외한 라인업은 에스더즈, 풀썸, 아이허니, 원카운트, 온더로즈, 김우재였다.

무대 세팅이 모두 끝나자 가장 먼저 에스더즈가 올라갔다. 어스래빗은 리허설 조끼를 걸치고 무대 옆에서 대기. 그 동안 다른 팀이 도착해, 멀리에서 고개를 꾸벅거리며 인사했다.

“어?”

아이허니가 도착했을 때였다. 이건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배님 왜 목발 짚으셨지?”

그러나 음악소리가 굉장히 커, 그 말소리는 바로 옆에 있던 한율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리허설은 한 번만 하고 끝. 멤버들은 진행요원 안내에 따라 다시 무대 앞이 아닌, 백스테이지 쪽 통로를 따라 대기실로 이동했다.

“써한 넌 어젯밤에 열심히 복습하는 것 같더라니, 여전히 안 까먹고 잘하더라?”

“어젯밤이 아니라 오늘 새벽이었지.”

어제 촬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가 자정 무렵이었다. 한율은 숙소가 아닌 회사로 들어가, 오늘 무대에서 할 안무를 연습했다. 새벽 2시까지. 그 후 한 시간 겨우 자고 차에 탔다.

“밥 먹고 조금이라도 자. 한율이 너 많이 피곤해 보인다.”

“네.”

어스래빗이 사용할 대기실은 풀썸과 공동으로 배정되었다. 대기실의 반을 뚝 자른 것처럼 각 팀의 무대의상과 짐이 양쪽 끝에 가지런하게 정돈되었다. 어스래빗은 입구 쪽.

테이블에다 도시락과 음료를 세팅하던 현장전이 손짓했다.

“다들 수고했어. 앉아서 아침 먹어.”

“우우와앙…, 부산의 별미라는 돼지국밥이 아니넹.”

“가람이 저녁은 그걸로 시켜줄까?”

“왜 점심은 건너뛰는 거죠.”

“이게 점심이니까?”

“히이익…!”

입으로는 오두방정을 떨었지만, 박가람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다른 멤버들도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났어도 자신들은 차에서 잠이라도 잤지, 매니저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전대를 잡았다. 오늘 행사가 끝나면 다시 5시간 넘게 운전해야 하고. 아무리 도중에 다른 매니저와 교대를 한다곤 해도 한번에 2, 3시간씩 운전을 하는 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도시락을 먹으면서 박가람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면허를 따야겠어.”

“올해는 말까지 바쁘니까, 1월이나 2월 즈음에 따.”

“그러고 보니 여행 플랜 짠다며. 어디로 갈 건데? 다들 가고 싶은 데 있어?”

길우성이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하와이!”

“우리 회사 가난해. 안 돼.”

“…….”

오 팀장을 비롯한 매니저들이 일제히 이건우를 쳐다봤지만, 이건우는 그들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의견을 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우리 돈으로 가는 거다, 란 전제를 깔고 생각해봐.”

라이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편의점?”

“…하와이에서 갑자기 편의점이라니. 너무 동 떨어져서 오히려 정색할 뻔했다.”

“그러면 돈 문제 생각하지 말고, 일단 가고 싶은데 말해보자. 당장은 가기 힘들어도 언젠가 3년, 4년이 지나면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한율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그럼 전 유럽일주요.”

“서한율 스케일 무엇.”

4년 후 게이트가 열리면 유럽의 오래되고 아름답다고 정평이 난 건축물이나 유적 대부분이 파괴될 예정이므로, 미리 가서 봐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집트나 인도의 타지마할도 괜찮아요.”

“이집트 한 표! 나 피라미드 직접 보고 싶어. 미이라도!”

눈을 반짝거리며 말하는 강보배와 대조적으로 유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난 싫어.”

“호 형 어릴 때 영화 <미이라> 보고 기절할 뻔 했대.”

“그거 딱히 무서운 장면 없지 않아?”

“난 아이슬란드 가고 싶어. 거기 오로라가 엄청 예쁘게 보인대.”

“호 형은 아이슬란드…. 나는 그랜드캐니언 가고 싶은데. 너희 셋은?”

라이언이 먼저 대답했다.

“난 아무데나 갠차나.”

“페루 마추픽추.”

“나는.”

도시락을 먹으면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차남석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바이칼 호수 구경.”

길우성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시 손을 들었다.

“님들, 우리 현실감각을 되찾읍시다. 내년에 갈 곳부터 정하죠. 한 사람당 경비 25만 원 선으로.”

도시락을 먹으며 떠들썩하게 회의를 하는 어스래빗을 보며, 대기실로 들어온 풀썸 멤버들 중 두 사람이 작게 소곤거렸다.

“쟤네 분위기 엄청 좋다. 신기하네.”

“그러게. 카메라도 없는데.”

“그나저나 좀 그렇다.”

“뭐가?”

풀썸 멤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활짝 열린 문 쪽을 흘긋하곤 작게 중얼거렸다.

“원카운트, 단독 대기실 받았더라. …우리보다 데뷔가 늦었는데도.”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래.”

효운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이나 WB래빗 스태프들에게 들리지 않을까, 속닥속닥.

“원카운트 애들 중에 완벽한 비즈니스 관계가 있어서, 그거 드러나면 안 된다고 아림 쪽에서 특별히 부탁했다고 하더라. 방금 원카 매니저가 우리 매니저 형한테 미안한 얼굴로 말하는 거 들었어.”

적당히 좀 해

원카운트 대기실에 7명의 원카운트 멤버들이 들어왔다.

찬형은 매니저들이 한곳에다 모아놓은 멤버들의 개인 짐에서 자신의 가방을 찾았다. 그리고 빈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대본을 꺼냈다. 다른 멤버들도 각자 빈자리에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할 일을 했다. 여행 이야기로 떠들썩한 어느 대기실과 비교하면 차분한 분위기였다.

풀썩. 원카운트 리더가 찬형 옆에 앉았다.

“오늘은 라이언한테 놀러 안 가?”

“대본봐야 한다고 미리 말했어요.”

“핑계는. 그거 촬영 일정도 아직 안 나왔다며.”

“형 저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리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주위를 한번 살핀 후 찬형에게 물었다.

“너 혹시 락뮤에서 무슨 얘기 들은 거 없어? 우리 회사랑 고동 관련해서.”

“…그건 왜요?”

“왜긴. 우리 대표님이 고동 대표한테 약점 잡힌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렇지. 사실 완전 이상하잖아. 나랑 너 나갈 예능에 갑자기 블루액션 멤버 둘이 끼게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연말무대에 우리 회사 선배님 커버무대를 걔네가 한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리고 우리 6개월 치 스케줄 몽땅 넘겨줬다는 이상한 말도 돌아. 진짜 뭐 들은 거 없어?”

찬형은 입을 꾹 다물고 대본으로 시선을 내렸다. 리더가 고개를 기울이며 찬형의 표정을 살피더니 팔을 잡았다.

“있구나? 있지?”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머뭇거리던 찬형은 목소리를 낮췄다.

“맹이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맹이? 아, 용맹?”

또 다른 대형기획사인 스엔 엔터 소속 보이그룹 ‘스카이러너’의 멤버. 용맹은 찬형과 뮤닷 <락뮤닷>의 공동 MC였다.

“라움 선배님이랑 블블의 티스트 선배님이랑 사귀는 거 사실이냐고.”

“—미친 거 아냐?!”

리더의 놀란 목소리에, 대기실에 있던 원카운트 멤버들은 물론 스태프와 매니저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을 향했다. 리더는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고 손을 들었다.

“큰소리, 쏘리쏘리.”

“…확인 안 된 거니까 어디 가서 말하지 마요. 알죠? 알려지면 우리 회사 주가만 떨어지는 거.”

“당연하지. 그런데… 블블 중 누군가가 연애 중이란 건 듣긴 했는데… 와, 라움 누나 그렇게 안 봤는데….”

리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목소리를 잔뜩 죽인 채 화냈다.

“아니, 제정신이냐고. 지금 한창 온더 잡을까 말까하는 중요한 시기에 대체 뭐하는 거야?”

“형도 여친 있잖아요.”

“야, 여돌이랑 남돌이 같냐? 전에 감소 멤버… 누구였지? 아무튼 스포츠선수랑 스캔들 터졌을 때 댓글 안 봤어? 몸매 얘기, 쎅드립, 남자 완전 부럽다 등등등. 성희롱은 기본이고 같은 팀 멤버들까지 싸잡아서 깎아 내렸잖아. 반면에 남돌은 스캔들 터진 멤버한테만 배신감 느낀다 여론, 연애가 범죄도 아닌데 왜 그러냐 하면서 옹호해주는 여론이 부딪칠 뿐이고. 그리고 내 여친은 일반인이거든? 알지? 상대가 일반인이면 조금 더 순하게 받아들여주는 거.”

“…….”

“아무튼 이게 진짜면 약점 맞네. …아니, 진짜니까 블루를 끼워 넣는 거겠지? 지금 알려지면 우리 쪽 타격이 더 크니까? …그렇게 외로우면.”

풀썩. 리더가 소파에 몸을 묻으면서 중얼거렸다.

“차라리 영아처럼 이미지 좋은 배우나 만나지, 왜 하필 같은 돌이냐고.”

“하!”

그때 무대의상과 소품을 살피던 한 멤버의 기가 찬 목소리가 시선을 끌었다.

“누나 혹시 쟤 악개에요? 왜 자꾸 쟤한테만 예쁜 걸 몰아주지?”

“아이고…, 저놈 또 시작이네.”

끙차. 리더가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스타일리스트가 항의하는 멤버에게 손사래를 쳤다.

“기혁아, 그게 아니라 오늘 네 의상이랑 신발이 이거랑 더 잘 어울려서….”

“누나, 우연도 세 번 반복되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고의인 거 아시죠? 지난번에 분명히 내가 말하지 않았어요? 은근슬쩍 편애하는 거 다 티 나니까 적당히 하시라고?”

리더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기혁. 너나 적당히 좀 해. 왜 자꾸 은지 누나한테만 딴죽을 거냐? 팀장님이 OK해서 정해진 걸.”

“…하아.”

그제야 기혁이 고개를 돌리며 소파로 가 앉았다. 리더는 머쓱하게 서있는 스타일리스트에게 괜찮다는 듯 웃은 후 기혁의 옆에 앉았다.

“왜 또 그렇게 곤두섰냐. 찬형이한테 더 어울리는 걸 붙여줘야 쟤도 살고 우리도 살고 그러는 건데.”

“그 순서를 한번쯤이라도 바꾸면 어디가 덧나요, 형?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진짜….”

그 모습을 보던 찬형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괜히 대본을 팔랑팔랑 넘겼다.

‘지금도 저런데, 자리를 비우면 더 엄청나게 씹어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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