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427)

* * *

“설마….”

이희우의 집 소파에 편히 앉아 TV를 보던 배우 장미연이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TV에선 연예전문기자들이 <별☆일없는 집> 사고를 두고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의혹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희우야, 희우야. 고의로 넘어지는 척 세트를 쓰러뜨렸을 가능성도 있어서 경찰이 조사 중이래…! 진짤까?”

이희우는 소파 앞에 요가매트를 펼쳐놓고 스트레칭을 하던 중이었다. 상체를 숙이며 앞으로 곧게 편 발끝을 손으로 가볍게 잡았다. 굉장히 유연했다.

“조명팀 스태프가 사고 장면을 똑똑히 봤다고 했잖아. 목격자 진술이랑 고의성 여부도 조사하고 있을 테니 곧 사실이 밝혀지겠지.”

“아니, 그러니까 정말로 고의면?”

“쓰러진 무대세트에 날카로운 장식이 달린 시계탑 모형이 있었잖아. 이제설이 그것 때문에 이마가 찢어진 거고. 고의였다면 충분히 살인미수까지 볼 수 있겠지. 그 세트가 사람 위로 쓰러지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야아오옹. 새끼 고양이가 이희우의 다리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무섭다…. 진짜면 어떡하지?”

“언니는 참 겉모습만 보면 긍정의 끝판왕일 것 같은데, 정작 생각하는 걸 보면.”

“중증의 인간불신.”

“잘 아네.”

“그런데 희우야.”

“어.”

와아옹. 이희우는 계속 다리 근처를 알짱거리는 고양이를 들어서 소파 위에 툭 올려놓았다. 이번엔 오른쪽 다리를 접곤 왼쪽 다리는 넓게 벌렸다.

“제설이 병문안 안 가도 돼?”

“미쳤어? 내가 거길 왜 가.”

“왜? 예전에 사이좋았었잖아. 제설이 여자 친구한테 오해 살까봐 그래?”

“아.”

이번엔 상체를 왼쪽 다리 방향으로 굽히려던 이희우는 도로 몸을 곧게 세웠다.

“언니는 모르는 구나?”

“뭘?”

“아냐. 그냥 모르는 대로 살아.”

“뭔데에! 둘이 사귀기라도 했었어? 그런데 제설이가 바람피우고 술버릇도 나쁘고 아무튼 개쓰레기여서 상종도 안 하는 거야?”

“와….”

이희우가 기가 막힌 얼굴로 장미연을 쳐다보다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언니 진짜 중증의 인간불신, 인정. 아니, 어떻게 술 한번 같이 마셔본 적 없는 사람을 두고 그렇게까지 상상할 수가 있지?”

장미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예전 남친이 그랬거든.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히 스윗 그 자체였는데… 이하생략. 참고로, 사람들은 아직도 걔가 진짜 착하고 개념 있는 줄 알아. 기부 많이 한다고.”

“아…. 인간불신 걸릴 만하네. 미안.”

“그러니까 너도 말해줘. 제설이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이희우는 덤덤한 얼굴로 툭 내뱉듯 말했다.

“사귀었었어. 예전에.”

“어? 진짜?”

놀라 되묻는 장미연을 보면서 이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럼 왜 헤어진 건지 물어봐도 돼?”

“아니.”

이희우는 멈췄던 스트레칭을 다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존나 빡치거든. 그러니까 이유는 묻지 마.”

벌써부터 안쓰럽다

“병실에 들어가서 선배님 보자마자.”

VIP병동 전용 엘리베이터에 둘만 탔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박현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복귀는 힘들겠구나, 직감하긴 했지만….”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조금 전, 이제설은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미안해. 너희들의 큰형이 되고 싶었는데, 힘들 것 같다.』

“제설 선배님 대신에 올 만한 배우가 누가 있을까?”

“글쎄요. 배우에 대해선 형이 더 잘 알잖아요.”

“내 말은, 제설 선배님처럼 만족스럽게 호흡이 맞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거야. 20대 중반 내지 후반…, 여기에 또 우리랑 형제라는 설정 이미지가 너무 떨어져도 안 되고, 이해관계자들의 마음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박현우는 심각한 얼굴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 그 형은 연기는 잘하는데 주연을 맡기엔 페이스가….”

“제작사가 알아서 데려오지 않을까요?”

“이참에 투자자가 투자금 회수 운운하면서 지들이랑 관계된 발연기를 주연으로 내밀 수도 있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그렇다고 형의 의견을 받아줄 것 같진 않은데요.”

“넌 참 아무렇지 않게 팩트로 사람을 때리는 구나.”

조유찬의 차에 오른 후 이제설이 한 말을 그에게 전달했다. 조유찬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문제로 심각하게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하더라.”

“누가 거론되고 있는지도 들었어요, 형?”

“일단… 전에 현우 너랑 <삼투> 찍었던 진바름 씨.”

“어? 그 형도 요즘 드라마 찍고 있어서 힘들 텐데?”

“오지원 씨.”

“아…, 지원 선배님은 아무리 봐도 페이스가 액면가랑 딱 맞아서 좀 그런데…”

조유찬이 시동을 걸면서 말을 이었다.

“강명… 일? 강명인? 아무튼 처음 듣는 이름도 나왔어. 연극배우인 것 같아.”

“강명일은 <객귀> 여섯 번째 에피소드 주인공 역 맡았던 배우 분 이름이요.”

“아, 종방연에 불참했던? 아무튼 그 이름이랑….”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막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량을 피해 조심히 운전하면서 조유찬이 말을 이었다.

“스타믹스의 지헌.”

“…그 분 연기 잘해?”

난데없이 아이돌의 이름이 나와서 그럴까. 박현우가 3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한율에게 물었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전에 기사 댓글 보니까 평타는 치는 것 같긴 하던데.”

* * *

[어스래빗 한율, 쌍둥이 형과 함께 이제설 병문안]

[18일 오후, 어스래빗의 한율이 드라마 <별☆일없는 집>에서 자신의 쌍둥이 형 역을 맡은 배우 박현우와 함께 이제설이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사진=앗싸일보)

두 사람은 이후 사고로 다친 스태프들이 입원한 병원에도 찾아가…(중략).

한편, 오늘 오후 이제설의 하차를 공식발표한 <별☆일없는 집> 제작사 GT픽처스 측은 현재 ‘태하늘’ 역을 맡을 대체 배우를 찾고 있다.]

-기사 제목 보고 진짜 쌍둥이형제 있는 줄 아랏네=ㅅ=....쳇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갔나부당 둘 다 교복ㅎ

-중간에 형이 바뀌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아... 이제설이 저 둘이랑 꽃미남 삼형제 딱이었는데....ㅜㅜㅜㅜㅜㅜ

-한율이랑 현우 이 드라마에 강력 추천한 게 이제설이라던데 정작 이제설이 나가뮤ㅠㅠㅠㅠ

ㄴㅠㅠㅠㅠ

ㄴ형아 어디 가8ㅂ8!!!!!

-이제설 회복 기다렸다가 찍으면 안 되는 거??

ㄴ이제설 2월부터 크랭크인 예정 영화 있고, 서한율도 그때 즈음에 다른 영화 촬영 들어가야 해서 힘들듯요ㅋ 여기에 본업도 해야 하고

ㄴ본업??? 얘 원래 배우 아님???

ㄴ제목이랑 내용에 어스래빗이라고 적혀잇자나영 가수임ㅇㅇ

-우리 율톢 많이 상심하겠다ㅜㅜ..

핸드폰 액정을 위아래로 슥슥 밀던 JE가 픽 웃었다.

“참 별 걸 다 기사로 써주네.”

옆에서 함께 기사를 보던 스타믹스 멤버가 동감을 표했다.

“앗싸가 이상하게 떠비에 우호적이더라? 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앗싸만 그런 건 아니지. 락뮤 PD도 떠비 애들 예뻐하잖아. 전에 상반기결산 때 갑자기 난 특별무대 땜빵 자리, 어스래빗한테 준 거 보면 모르냐?”

“그러고 보니 뮤뮤 PD도 걔네 데뷔할 때부터 계속 단독 대기실만 줬다고 하던데. 맞아?”

JE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스래빗이 데뷔하기 전부터 KBC <뮤직뮤직>의 MC를 맡고 있었다.

“어. 그런데 어스래빗한테 단독 대기실 내준 거, PD 뜻 아니야.”

“그럼?”

JE는 그들 밖에 없는 연습실인데도, 입을 꾹 다문 채 검지로 위를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같은 팀 멤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윗선?”

“어. PD가 나한테 조용히 묻더라고. 어스래빗에 혹시 고위층 자식 있다는 소문 들은 적 있냐고.”

“PD도 단독 내달란 지시를 받긴 했는데, 그 이유를 제대로 못 들었다는 건… 뭔가 진짜 빽이 있다는 소린데?”

“락뮤PD도 그래서 걔네 예뻐하나?”

“그 얘기 들으니까 좀 찝찝하다. 전에 소라에서 대기실 같이 썼을 땐 애들 다 괜찮아 보였는데…. 괜찮겠어, 형?”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멤버가 잠자코 있던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스타믹스에서 JE와 함께 인지도가 가장 높은 지헌이었다.

“형, 별일 있는 드라마에 나갈 수도 있다며.”

지헌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갈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나갈 거야.”

“그래, 넌 뭘 당연한 걸 말하고 있냐? 우리 회사가 tv Mu랑 같은 FJ그룹 계열사 아랜데.”

“발표는 내일 아침에 날 거야. 이미 대본도 도착했고.”

“오오!”

“가면 서한율 걔 좀 잘 살펴봐.”

“걔는 왜?”

JE가 미간을 구기면서 기사로 시선을 내렸다. 기사엔 병원 주차장을 걷는 서한율의 사진이 나와 있었다.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겉으론 생글생글 웃어도 은근히 눈빛이 싸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그러더라고.”

다른 멤버들이 ‘그런가?’ 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JE가 스읍, 공기를 마시는 소리를 내면서 주의를 끌었다.

“왜 그래. 다들 나 촉 겁나 좋은 거 알잖아.”

“…그래. 너무 좋아서 우리 회사 붙박이 귀신도 자주….”

“아, 그 얘긴 하지 말라고!”

* * *

사고로 <별☆일없는 집>에서 하차한 이제설 대신 스타믹스의 지헌이 ‘태하늘’ 역이 되었다는 소식은 19일 아침, 인터넷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난 아직도 지헌이 4, 5년 전에 나온 학교 배경 드라마에서 국어책 발연기하던 모습이 생생한데; 괜찮겠냐;;;

ㄴ그땐 좀 부족했지만, 지금은 연기실력 많이 늘었어요!!

-이제설 있을 땐 괜찮겠네 싶었는데... 아이돌 셋이 주연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확 깬다ㅋ

ㄴ현우 아이돌 아닌데요.

ㄴ서한율은 아이돌 맞지만 얘는 연기력 까면 안 되지;

-유지헌 축하해!!!!!!!!!

-지헌이 주연된 거 축하할 일은 맞는데.. 로맨스 있을 것 같아서 완죤 불안하다...

-작가 로맨스 넣지 마라 진짜ㅡㅡ

-남주 바뀌었으니 여주도 바꿔주세요.

-드라마 급 확 낮아졌네ㅋㅋㅋㅋㅋ

ㄴ네 신용등급만 할까

-얜 뭔 듣본가 했더니 소속사가 tv Mu랑 같은 FJ계열샄ㅋㅋㅋㅋ 이제설 다쳐서 하차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꽂아버리네ㅋ 양심 어디?

-연기 잘하는 20대 남자배우가 그렇게 없어요? 대학로만 가면 널리고 널린 게 연기 잘하는 배우들인데 왜 하필 아이돌;;

댓글 반응이 좋지 않은 기사는 금세 메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언론사의 비슷한 기사가 등판.

스타믹스의 팬 혹은 기획사 직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기대된다는 댓글이나 응원 댓글을 잔뜩 달아두면, 그 뒤로 일반 네티즌들이 와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댓글 여론이 부정적으로 뒤집히면 다시 기사 교체.

한율은 수십 분마다 한 번씩 메인에서 교체되는 기사를 보면서 생각했다.

다들 참 부지런도 하지.

그래도 같은 드라마를 찍는 배우 입장으로선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배우가 와서 다행이었다.

현재 만으로 나흘 꼬박 촬영이 멈춘 상황.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감독도 경질되었고, 이제설이 나왔던 부분은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한다. 그러니 오늘 당장 촬영을 재개해야 나중에 생방송 수준으로 갈리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 터.

“유지헌…, 유지헌이라….”

등교하는 차 안엔 간만에 차남석도 탑승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바닥의 여러 정보와 소문을 친절히 읊어주었던 그였기에, 한율은 이번에도 정보가 나올 차례인가 하면서 차남석을 쳐다봤다.

“왜요? 뭐 문제 있어요?”

“딱히 문제될 건 없는데.”

차남석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대답했다.

“좀 불쌍해서.”

“……?”

“너, 상대가 연기 못하든 말든 네 연기에만 집중하잖아. 알아서 따라오란 식으로.”

“그렇죠?”

본래 세상, 목숨을 걸고 연기했을 땐 말 그대로 타인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기에 남과 호흡을 맞출 일이 전혀 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배우들도 대부분 연기를 잘해서 굳이 의식해 맞춰줄 필요가 없었고.

그리고 최근 더순한화장품 CF와 화보를 찍으면서 딱딱하게 얼어있는 진은수를 이끌어주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때 한율은 깨달았다. 나 혼자 연기를 잘하는 것과, 상대방을 비슷한 호흡으로 리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박현우도 아직 상대를 편하게 리드하고 배려해주는 건 서투르거든. 그러니 어떻게 되겠냐. 너랑 박현우. 둘 중 한명이랑만 상대해도 바로 연기력으로 밀리는 거 티 나고, 본인도 절절히 느끼게 될 텐데. 격한 감정 씬이면 상대하는 동안 절로 감화되고 휩쓸려서 묻어갈 수라도 있지, 평범하면서도 세심한 표현이 교차되는 씬이면….”

쯧쯧. 차남석이 정말 안 됐다는 듯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부터 안쓰럽다.”

스타믹스의 지헌과 만난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는 ‘태하늘’ 역으로 교체 투입된다는 기사가 나온 바로 어제부터이제설이 찍었던 씬을 처음부터 새로 찍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새롭게 별일 감독을 맡게 된 용인주 감독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삼형제의 집. 한율과 박현우는 새로 온 감독과 먼저 인사를 나눈 후에야 지헌과도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태하늘’ 역을 맡게 된 유지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현우라고 합니다.”

“영화 <삼투> 정말 인상 깊게 봤어요. 연기를 무척 잘하시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지헌의 나이는 26세. 그러나 배우로 치면 박현우가 지헌보다 훨씬 선배였다. 그래서 그런지 지헌을 대하는 박현우의 태도는 상당히 여유로웠으나, 반대로 7살이나 어린 선배를 보는 지헌의 미소는 어색했다.

한율도 지헌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어스래빗의 한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스태프 분들이 준비하는 동안 간단히 리딩하면서 동선도 맞출까요?”

박현우의 제안에 지헌이 선뜻 응했다.

“네, 그래요.”

지헌은 앞서 촬영된 영상을 보고 예습했는지, 이제설이 했던 것처럼 대사나 동작 타이밍을 곧잘 찾아 적절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캐릭터에 대한 연구를 하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몰입은 얕았다. 아직은 이제설이 연기했던 태하늘의 그림자 같은 느낌.

“미안해요. 조금 전에 대사 들어가는 게 좀 늦었죠?”

본인 스스로도 점점 그걸 느끼는지, 뒤로 갈수록 자잘한 실수가 많아졌다. 당혹스러워하며 사과하는 그에게 박현우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 지금 그 감정 딱 좋은 것 같아요. ‘내가 얘들 형이기는 해도 다짜고짜 편히 다루기엔 어색하고… 아, 어떡하지…. 어렵네….’ 이런 느낌이.”

“아… 하하.”

놀리는 건가? 돌려 까는 건가?

한율은 의아한 눈으로 박현우를 살폈다. 생글생글 웃는 낯짝에선 별 다른 악의가 엿보이지 않았다. 그냥 순수하게 현재 느낀 바를 솔직히 말하며 조언했을 뿐이었다.

지헌도 한율처럼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으나,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해볼게요.”

작품에 투입되는 과정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다행히 연기에 대한 욕심과 자존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표정이나 태도에서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진지함이 느껴졌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먼저 대사 칠게요.”

지헌을 바라보는 한율의 눈에 비소가 깃들었다.

“솔직히, 형도 11년 동안 나 몰라라 외면한 동생들 보호자 노릇하려니 미칠 노릇이잖아요. 안 그래요?”

이제 와서 친한 척 하지 말라는 경계심과 벽을 단단히 세우고, 그의 두 눈을 직시하며 웃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자마자 달라진 주변 사람들의 눈빛. 그 안에 깃든 무시와 경멸은 아직 어렸던 ‘태바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건, 그보다 더 오래인 11년 전부터 자신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살아왔던 형.

“그러니까 신경 안 쓰이게 얌전히 지내겠다고요. 형은 보호자 란에 사인이나 해주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

지헌의 눈이 당혹스럽게 흔들렸다. 이는 대본에도 나온 표정묘사. 그가 대사를 치려고 입을 열었다. 이번엔 타이밍이 맞았다.

“지헌 씨.”

그러나 그 순간, 어느새 그들 곁으로 온 용 감독이 끼어들었다.

“여기에선 당혹스러워하되, 동생한테 쫄… 아니, 위축되면 안 되죠.”

“…죄송합니다.”

툭. 박현우가 한율의 팔을 가볍게 치며 속닥거렸다.

“야. 살살해, 살살.”

그런 말은 하지 마

데뷔곡 이 막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고 가 제목 그대로 넓어진 세상을 향한 설렘이라면, 이번 어스래빗 싱글앨범 타이틀곡인 <있어>는 패기 넘치는 신인의 포효를 담고 있었다.

내 노력과 실력을 고작 신인이란 이유로 무시하지 말라는, 한 마디로 센 척하는 이야기였다.

“퍼포먼스 리허설 갈게요!”

사방에 도심의 불빛은커녕 민가도 없는 황폐한 잿빛 공터. 주저앉은 휘어진 트러스(Truss)와 조명이 나뒹구는 망가진 무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뮤비 촬영 준비를 마친 어스래빗 멤버들은 그 무너진 무대 세트 앞에 대형을 갖췄다.

“표정 연기 집중! 음악 주세요!”

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한율은 무표정한 표정을 짓다가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좋아, 그대로 차가운 표정 유지하다가 미소!”

한율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추워.’

현재 시각 밤 10시 3분. 기온은 9도였다.

망가진 무대 앞 퍼포먼스 촬영, 무대에 주저앉은 구조물 사이를 걸어가거나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씬 등, 해당 세트를 활용하는 씬을 4시간 넘게 촬영한 후엔 다른 실내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헤어를 수정, 의상이나 소품도 모두 바꿔 퍼포먼스를 촬영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엔 너무 닳아서 더 이상 신지 못하는 운동화를 들고 인적이 없는 거리를 신나게 달렸다. 오두막집처럼 따뜻한 느낌을 주는 작은 공방에서 아크릴 물감으로 신발을 꾸미면서 장난도 치고.

데뷔를 위해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시간의 증거.

각양각색의 개성 넘치는 기념품이 된 8켤레의 신발이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나란히 놓였다.

그 외에도 야외 촬영을 진행하고, 다시 실내 세트장으로 돌아와 개인 컷을 촬영.

어느새 또 해가 저물었다.

“총 4분 17초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현재 22시간 연속 촬영 중입니다. 흐흐.”

“흐흐흐.”

강보배가 카메라에 대고 바보 같이 웃자, 박가람이 옆으로 슬쩍 끼어들어 같이 웃었다.

“왜 따라 웃어요, 형.”

“이거 내 트레이드마크 웃음이에요, 보배 씨. 흐흐.”

“그나저나 오늘이 호 형 생일인데, 오늘이 네 시간도 안 남았어요.”

“괜찮습니다.”

박가람이 단독 촬영 중인 유호를 살폈다. 유호는 아름답게 일렁거리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초를 뒤로 한 채 삭막하게 만들어진 외길을 걷고 있었다. 바로 옆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카메라도 함께 이동했다.

“리더는 다른 멤버가 다음 장소로 먼저 이동한 줄 알지만, 실은….”

박가람이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대며 속닥거렸다.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지는 머리와 희미하게 메이크업을 한 곱상한 얼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손에 낀 여러 디자인의 투박한 반지와 팔찌, 귀에도 눈에 띄는 피어싱을 한 한율의 모습이 가게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물들어 반짝거렸다.

한율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도 길을 걷다 말고 대놓고 쳐다볼 정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어우씨.”

“……?”

라이언과 함께 빵집에 들어갔던 길우성이 나오다가 놀란 소리를 냈다.

“누가 봐도 ‘나 연예인이다!’ 라고 광고하는 사람이 있어서 깜짝 놀랐네.”

“넌 꼭 동네 양아치 같다.”

“나처럼 잘생긴 양아치가 어디 있냐?”

길우성은 이번 활동을 위해 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본래 한 쌍이었던 피어싱도 두 쌍 반으로 늘렸다. 복장도 다분히 허세 섞인 힙한 패션. 손에 낀 반지도 많고, 손등에는 아직 지우지 않은 흉터 분장과 타투 스티커가 선명했다.

뮤비 촬영 도중에 나온 거라 꼴이 참 튀었다.

한율은 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대신 셀캠을 꺼냈다.

“양심이 있다면 잘생겼다는 수식어는 빼자.”

“왜 그래. 내 눈엔 내가 우리 팀에서 두 번째로 잘생겼거든?”

라이언이 케이크상자를 소중히 품에 안으며 물었다.

“첫 번째는 누군데?”

“남석 씨?”

“…….”

“형, 카메라 돌아가고 있어요.”

순간 미간을 구겼던 라이언이 활짝 웃으면서 한율이 든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차남석 인정.”

“와. 라욘 형, 와.”

길우성이 감탄을 흘리며 라이언을 향해 박수쳤다. 짝짝짝.

나중에 팬들이 이 영상을 본다면 왜 길우성이 저러나 조금 의아할 수 있겠지만, 뭐 어떤가.

‘많이 나아졌네.’

그때 문득 한율의 머릿속을 스치는 또 다른 단상.

‘만약 내가 WB래빗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의 자리엔 정민솔이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어스래빗의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다를 지도 모른다.

높은 확률로, 본래 시간대의 길우성이 속했었을 팀.

“써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한율은 그들과 함께 찍히도록 캠을 돌린 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솔직히 대답했다.

“만약에 내가 우리 팀에 없었다면 지금 어스래빗은 어떤 모습….”

찰싹! 난데없이 길우성이 한율의 팔을 때리며 더 이상의 말을 막았다. 그러곤 두 눈을 부라리며 이를 악문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른 믈은 흐는 그 으냐.”

라이언이 한율의 반대편 팔을 덥석 잡았다.

“맞아, 그런 말 하지 마. 생각도 하지 마.”

한율이 없는 어스래빗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진심이 담긴 얼굴로. 한율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가를 올렸다.

“네, 형.”

세 사람은 근처 대로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밴에 올라탔다. 밴 안에선 이건우가 열심히 풍선을 불고 있었다.

이건우가 헥헥거리면서 엄살을 피웠다.

“하…. 중간에 잠깐 잠 안 잤으면 풍선 불다가 기절할 뻔했다.”

“미안해요, 형. 저 때문에.”

“아냐아냐,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냐. 사고가 난 게 네 잘못도 아닌데.”

본래 M/V 촬영은 이틀로 잡아 찍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번 <있어> M/V는 야외 촬영도 많고 배경도 다양해, 금요일 아침부터 토요일까지 여유롭기 찍기로 했었다. 밤에는 잠도 제대로 자고.

하지만 <별☆일없는 집> 사고로 인해 원래 오프 예정이었던 어제 급히 촬영이 잡히면서, M/V의 단체 씬 촬영이 모두 미뤄졌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프로덕션 측이 다른 일정이 있어, 자연스럽게 밤을 꼬박 새면서 촬영하게 된 것.

“그리고 한율이 너도 일하자마자 바로 와서 뮤비 찍느라 엄청 피곤할 거 아냐.”

“그래, 써한. 정 미안하면 나중에 출연료 받은 걸로 맛있는 거나 사줘. 예를 들면 알리오… 알랄리?”

“알리오 올리오?”

“어, 그거. 맛있더라.”

한율은 캠을 적당한 위치에 내려놓고 색종이와 매직을 들었다. 라이언은 케이크를 조수석에다 놔둔 후 맨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우성이 너 알리오 올리오 먹어봤어? 언제?”

“저 이딸리아 빠스~따 먹는 남자에요, 형님.”

“지난 번 우성이 생일 때 우성이네 누나가 사줬어요.”

“아아, 우성이랑 닮았다던 그 누나?”

과하게 발음을 굴리며 거들먹거리던 길우성이 정색했다.

“안 닮았습니다.”

“형도 누나랑 닮았어요?”

이번엔 이건우가 정색했다.

“안 닮았어. 한율이 넌 외동이지?”

“네.”

“좋겠다. 어릴 때 편했겠다.”

“라욘 형, 형도 외동이야?”

이건우가 분 풍선에다가 리본을 묶으며 라이언이 대답했다.

“응, 혼자야.”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우리는 가족 얘기는 잘 안 했던 것 같아.”

“할 시간이 없었죠, 형님. 매일 연습하고, 레슨 받고, 학교 갔다 오고, 나머지 시간은 피곤해서 뻗어서 자느라 바빴잖아.”

“하긴. 그런데 우성이 넌 왜 아까부터 멀뚱멀뚱 보기만 하고 아무 것도 안 하냐?”

그들은 모두 유호의 깜짝 생일파트를 위해 차 안을 꾸미고 있었다.

길우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팀의 귀여운 막내는 편히 쉬어도 괜찮잖아?”

“한율아, 귀여운 막내 좀 잘 잡고 있어봐. 내가 분 풍선의 공기압을 시험해봐야겠다.”

10월 22일로 넘어가는 자정.

알록달록한 풍선과 리본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차 안에서 유호의 생일파티 라방이 끝난 직후, 어스래빗 채널에는 11초짜리 앨범재킷 티저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착착착 빠르게 흐르는 8명의 개인 컷.

마지막으로 단체 컷이 나오며, 묵직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사운드와 함께 거친 필체로 문구가 새겨졌다.

[있어]

[2017. 11. 07.]

-드디어!!!! 드디어어어!!!!!

-톢이들 컴백한다아아아아아

-지구톢 말고 별톢으로 바꾸자 우주의 별☆톢

-미친 거 아냐???? 어떻게 몇 달 사이에 애들 미모가 단체로 3단계 이상 훌쩍 업그레이드 될 수 있지???? 좀 천천히 올라가도 돼, 애드라8ㅂ8

-전부 심장폭행죄로 고소할 테다

-평소 허술했던 리더톢의 섹시한 모습이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두근거리면서도 아 이건 무엇

-라방에선 그렇게 세상 착하고 순한데 ON 스위치만 켜지면 너무 폭력적으로 돌변함... 크흑... 심장에 나쁜 아이들이야...

-(,,•﹏•,,)♡

-얘네 그만 사랑하고 싶은데 방법 아는 사람...? 아 그런 거 없다구요? 네.. (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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