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빗소리가 크게 울리는 교무실.
‘태바다’의 담임 역을 맡은 배우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너도 여기 학생이니까 피아노 쓸 수 있어. 그런데 모든 것엔 우선순위란 게 있잖아. 너 우리 학교 합창부가 얼마나 좋은 성적 거두고 있는지 아니? 그런데 네 그… 콩쿠르? 그거 연습해야 한다고 합창부 애들이랑 다퉜다며.”
“그래서 제가 창고에서 썩고 있는 피아노라도 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선생님.”
툭. 담임이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보란 듯이 책상에다 던지듯 떨어뜨렸다.
“넌 미국에서도 살다 온 애가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니? 왜 이렇게 이해력이 딸리는 척해?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방음 문제 생각 안 하니? 애들이 시끄럽다고 하잖아, 자습할 때 방해된다고.”
“그런 얘기…!”
태바다는 욱해서 받아치려다가 급히 삼키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평소에 저 아니꼽게 보는 놈들이 하는 말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네 태도가 이러니까 아니꼽게 보는 거 아냐! 그렇잖아도 신경 쓸 거 많아서 피곤한데 너까지 이럴래?!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태바다. 너 지금 중3이야. 그런데 상이라곤 어릴 때 외국에서 받아본 몇 개 제외하고, 최근에 받은 거 있어?”
“…….”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현실적으로. 응? 너 영어 잘하잖아. 그러니 피아노는 나중에 취미로 치고… 야, 태바다! 선생님이 말하는데 어디 가!”
드륵, 쾅!
자존심을 긁고 후벼 파는 담임의 말에 울컥 화가 나, 태바다는 바로 몸을 돌려 교무실을 나갔다.
“어? 태바….”
“…….”
그러다 마침 유인물을 잔뜩 들고 교무실로 오던 태산과 마주쳤다. 태바다는 얼굴에 드러난 상처받은 감정을 짜증으로 덮으며 태산의 옆을 지나쳤다.
타악! 세게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충격에, 태산이 들고 있던 유인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야이씨…! …하, 나 진짜 저놈….”
태산은 구시렁거리면서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바닥에 흩어진 유인물을 한 장씩 모으다, 교무실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돈이 없으면 예술은 근처도 못 간다는 걸 모를 나이도 아닐 텐데. 김 선생님이 고생 많으시네요.”
“애가 멍청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고집이 세가지곤… 영어토론대회의 영 자도 못 꺼내겠어요.”
태산은 그들이 누구에 대해 말하는지 바로 눈치 채곤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쓸쓸히 걸어가는 태바다의 뒷모습이 보였다.
“…….”
꾸깃. 유인물을 줍던 태산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컷, OK. 다음 장소로 이동할게요!”
감독의 말에 ‘태산’이었던 박현우가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마저 흩어진 유인물을 주웠다. 소품 팀 스태프들이 달려와 함께 주워주었다. 저 멀리 갔던 한율도 빙글 몸을 돌려서 돌아왔다.
조연출이 감독에게 말했다.
“비바람이 너무 센데요, 감독님. 이대로 다음 씬 촬영가도 괜찮을까요?”
“오히려 더 좋죠. 그림이 더 극적으로 잘 나올 테니까.”
“그래도….”
쏴아아아. 휘이잉.
한율은 시끄럽게 덜컹거리는 창가로 다가갔다.
“……?”
“한율아, 뭘 그렇게 봐?”
모니터링용 영상을 따로 찍던 조유찬이 다가와 물었다.
“저 사람, 오늘도 왔네요.”
저 멀리 교문 사이로 노란색 우비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세트를 쓰러뜨린 스태프 A씨의 동생 B씨. 어제처럼 커다란 팻말을 든 그는, 거센 비바람에 휘청거리다가 다시 우뚝 중심을 잡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아….”
조유찬은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다가 황급히 스태프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한율의 어깨를 잡으며 자연스레 몸을 돌렸다.
“뭐 좀 마실래? 오늘은 깜빡하고 레몬생강차 안 챙겼잖아.”
“히비스커스 차요.”
“히비… 뭐?”
“전에 지헌 선배님이 주신 거 마셔봤는데 괜찮더라고요. 아니면 무난하게 유자차.”
“그래.”
“카드는 제 걸로. 형이 먹고 싶다고 한 마카롱도 잔뜩 사도 괜찮아요.”
“…그래.”
안 걸릴 자신 있어
이후 찍을 씬은, 담임에게 시끄럽다거나 방해된다고 항의했던 학생들과 시비가 붙은 후 홧김에 나가려는 태바다를 태산이 쫓아가는 장면이었다. 태산이 교정까지 나와 말리지만 결국 태바다는 가버리고, 태산은 태바다의 가방에서 떨어진 무언가를 줍는다.
쏴아아아.
현관 앞. 밖은 굵은 비가 사선으로 쫙쫙 쏟아지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태풍 수준인데요?”
“그래도 안전하게 안에서 찍을 거니까 괜찮겠지.”
“다른 분들은 잠시 휴식.”
용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은 설렁설렁 움직였다. 배경이 바뀌면 콘티로 나왔던 동작 및 카메라 앵글을 새로 짜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린다.
“휴….”
조유찬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이다.”
“형 아직도 안 갔어요?”
“가려고 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오잖아. 그래서 너희들 비 맞으면서 촬영할까 걱정돼서 못 갔지.”
“…….”
그러나 안도하는 조유찬과 달리, 박현우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현우야?”
“형, 감독님들의 ‘안전하게’는 장비의 안전을 뜻하는 거지, 배우는 아니야.”
“…아.”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들이 비를 맞는 장면은 실제 비오는 날에 촬영하는 일이 드물다. 장비 손상 문제도 있고, 영상도 깨끗하게 안 찍히기 때문. 그래서 배우들 머리 위로 살수차로 비를 뿌리고, 장비는 모두 물이 튀지 않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 및 각도를 맞춘다.
가벼운 비라면 방수장비를 갖추면 되지만 이렇게 비바람이 거세면, 특히 조명의 경우엔 아무리 절연장갑을 끼고 위에 파라솔을 씌워도 위험하다.
“너희만 현관 밖으로?”
박현우가 한율을 가리켰다.
“노노, 얘만. 남은 수업을 당당히 째고 뛰쳐나가는 건데.”
“나 잠깐 감독님이랑 얘기 좀….”
“스탑.”
당장 용 감독에게 가려던 조유찬을 박현우가 붙잡았다. 멀뚱히 듣고 있던 한율도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형. 내 생각에도 태바다가 비를 맞으면서 가는 모습을 영상에 담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여러 가지 감정도 더 잘 부각될 테고.”
“그래도 오늘 얼마나 추운데…!”
“한 번에 끝내면 되니까 괜찮아요. 담요도 있고, 갈아입을 옷도 있고, 드라이어기도 있고.”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조유찬이 빠르게 주위를 살피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곧 컴백인 거 잊었어?”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안 걸릴 자신 있거든요.”
“감기가 자신감에 따라 걸리고 안 걸리는 줄 알아?”
“한율 씨, 현우 씨. 잠깐 이리로.”
용 감독이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한율은 정말 괜찮다고 조유찬의 팔을 두드린 후 감독에게 향했다.
“하아….”
뒤에서 속상해하는 조유찬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한율과 박현우는 용 감독과 카메라 감독이 급하게 새로 그리는 콘티를 보면서 설명을 들었다.
“최대한 지금 날씨를 살리고 싶거든. 그래서 조명이 조금 어두울 거야. 그러니 몸 각도는… 한 이 정도?”
“네.”
“그리고 팔을 한번 잡고, 뿌리치고, 다시 잡고, 돌아서면서 마주볼 때, 두 사람의 그림자도 역동적으로 비치게끔 앵글을….”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엔 박현우와 수차례 동작의 합을 맞췄다. 리허설은 한율이 비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뛰쳐나가기 직전까지만 수차례 반복. 그러고 나서야 본 촬영에 들어갔다.
“…야, 태바다!”
한율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순식간에 온몸이 차갑게 젖어 들어갔으나, ‘태바다’의 감정도,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시끄러운 빗소리를 뚫고 컷 소리가 들릴 때까지.
“OK, 컷!”
“빨리 들어와, 빨리!”
우산을 든 조유찬이 담요를 품에 안은 채 달려왔다. 다시 현관으로 돌아온 후엔 담요를 두른 채 조금 전 찍힌 영상을 확인.
용 감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했는데 한 번에 잘 나온 것 같아 다행이네요. 한율이 넌 빨리 가서 닦고 옷 갈아입어. 감기 걸리겠다.”
“네.”
“다음 장소로 이동합시다!”
오늘 한율이 학교에서 찍어야 할 씬은 끝났지만, 다른 배우들의 촬영이 남았다.
한율은 조유찬과 함께 임시 분장실로 사용하는 교실로 들어갔다. 의상팀 스태프들이 수건을 건네주었다. 조유찬도 가방에서 옷을 꺼냈다.
“예비 옷을 챙기고 다니길 잘했지.”
수건을 머리에 얹고 조유찬이 건네는 옷을 받으려던 한율은 멈칫했다.
“이거….”
기모로 된 녹색 티셔츠에 WB래빗 마스코트인 아수라 토끼 면상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뒷면에는 아예 ‘WB RABBIT' 로고가 크게 적혔다.
“우리 회사 티셔츠야. 대표님이 타이밍 봐서 너희들한테도 나눠주라고 했는데 오늘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네. 속옷도 줄까?”
“…아니요, 속옷은 괜찮아요.”
“갈아입고 있어. 난 차에 가서 네 후드집업 챙겨올게.”
“네.”
한율은 앞으로 예비 옷도 자신이 따로 챙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구석진 곳에 설치된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위이이잉. 옷을 갈아입은 후엔 드라이어기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그 옆에선 의상팀 스태프들도 젖은 교복을 드라이어기로 말리는 중. 오후 야외 촬영에서도 저 교복을 걸쳐야 하고, 또 젖을 게 뻔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교복 안쪽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말렸다.
“자, 이거.”
조유찬이 돌아와 한율의 재킷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형.”
“그럼 난 카페에 가서 따뜻한 거 사가지고 올게.”
“네.”
한율은 WB래빗 티셔츠에 편한 진, 그 위에 두터운 플리스 후드집업 재킷을 걸치고 어슬렁어슬렁 촬영이 진행 중인 교실로 향했다. 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돌아, 주변을 한번 살피곤 따뜻한 마나를 전신에 돌렸다.
사아아. 순식간에 한기가 가시고 몸이 따뜻해졌다.
“NG, 다시.”
현재 촬영 중인 씬은, 태산에게 호감을 가진 여학생이 아이들이 태바다에 대해 떠드는 내용을 들려주는 장면이었다.
여학생은 오디션으로 뽑힌 신인배우 양은지. 이후 태산과 썸 비슷한 것을 타는 조연으로, 대본 리딩을 하는 자리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말하는 게 너무 조급해요, 은지 씨.”
“죄송합니다.”
신인이지만 NG를 적당히 내는 무난한 연기실력.
한율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촬영을 구경하며 생각했다. 전 감독이 배우들은 잘 뽑은 것 같다고.
“수고하셨습니다! 이동 준비할게요!”
이윽고 오늘 학교에서 찍기로 한 촬영이 모두 끝났다. 태산과 같은 반 학생 역할을 맡은 단역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 중 몇 명은 한율에게 다가왔다. 선망, 혹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감과 호기심이 담긴 눈을 반짝거리며.
“오늘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태바다’와는 다른 반 학생들인 까닭에, 평소 그리 마주칠 일이 없던 이들이었다. 한율도 예의바르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저기… 혹시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단역들은 본인의 촬영이 끝나면 여러 이유로 곧바로 퇴장해야 한다. 대기 중일 때에도 주조연 배우들과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어, 섣불리 다가오기도 힘들고.
그러나 지금은 학교에서의 촬영이 모두 끝나 철수 중인데다가, 한율이 혼자 한가하게 어슬렁거리자 기회다 싶은 모양이었다. 늘 옆에 붙어있던 매니저도 안 보이고.
“사진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브이~.”
그렇게 한율이 단역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 할 때였다. 스윽. 박현우가 소리 없이 다가와 옆에 붙어 섰다.
찰칵.
단역들이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사진 감사합니다, 먼저 가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왜 멋대로 끼고 그래요, 형.”
박현우도 그들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곤 한율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한율의 재킷을 만지작거리며 딴 말.
“이거 엄청 따뜻해 보인다. 촉감도 보들보들하고.”
“추워요?”
“춥다고 하면 벗어주게?”
“그럴 리가.”
“유찬이 형 어디 갔어?”
“카페 간다고 나갔는데… 많이 늦네요.”
한율은 핸드폰을 꺼내 조유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조유찬이 받았다.
-[다 끝났어? 10분 후면 도착할 것 같아.]
10분? 카페가 학교와 200미터 거리 이내에 있는 걸로 아는데.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잠시 후, 조유찬은 따뜻한 차가 아닌 우산 세 개를 들고 등장했다. 그는 주차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며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카페에서 차를 사가지고 오는데, 그 시위하던 친구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거야. 팻말도 떨어뜨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신호등에 기댄 게 꼭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근처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왔어.”
차에는 차갑게 식은 커피와 히비스커스 차, 그리고 미니 마카롱 한 세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했어요, 형.”
“형은 나중에 복 받을 거야.”
“하하…. 그나저나 차가 다 식어서 어떡하냐.”
“괜찮아요.”
조유찬은 시동을 걸자마자 히터를 켰다. 박현우는 차에 둔 자신의 재킷을 걸치곤 마카롱을 하나 집어먹었다. 그러곤 또 한율의 재킷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얼마 주고 샀어?”
“어머니가 보내주신 거라 가격은 잘.”
“내가 장담하는데. …아오, 달아.”
박현우는 마카롱의 맛에 감격을 한 번 표한 뒤 말을 이었다.
“지금쯤 단역 애들, 버스 안에서 네 옷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수군거리고 있을 거다.”
“왜요?”
“지금까지야 가수로 활동할 때나 드라마 촬영할 땐 협찬이거나 의상팀 옷이겠거니 했겠지만, 춥다고 편히 걸친 지금 이 옷은 아무리 봐도 네 옷이잖아.”
조유찬이 차를 천천히 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팬들은 이미 한율이 너희 집이 어느 정도 부유하다고 짐작하고 있지만, 또래 배우 친구들한테는 좀 다르게 느껴지겠지.”
“그럼 걸치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거 아무리 비싸도 백만 원은 안 될 텐데.”
작년 <보컬리스트 시즌3> 인터뷰 영상을 촬영할 당시,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으니 비싼 트레이닝복을 걸치지 말란 얘기를 들었었다. 미국에서도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이 해외에서 고가의 옷을 쇼핑하면 말이 나올 수 있다고 말렸었고.
그러나 조유찬은 그때와 달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럴 필요까진 없어. 데뷔하기 전이었던 작년이랑은 다르니까. 아까 말했듯이 팬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다만…, 나보다 잘난 사람이 부유하기까지 하면 시기심에 트집 잡는 못난이들이 많잖아.”
“특히 방구석 열폭러들이 그렇지. 가만, 너 작년에 비슷한 일 겪지 않았냐?”
“무슨 일이요?”
“너랑 차남석 보컬 한창 찍을 때, 너희 회사가 비싼 홍삼 뿌릴 때 우리 회산 가난해서 그런 거 못 나눠줬다, 그래서 너한테 무시 받은 것 같다 어쩌고저쩌고.”
“아아.”
안인섭이 썼던 ‘ㅅㅎㅇ 인성’ 폭로 게시글. 그로부터 벌써 1년하고도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러고 보니 슬슬 돌아올 때 아닌가?’
한율은 생각이 난 김에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다. 마침 연예뉴스란 메인에 MOHE 기사가 떠있었다.
[MOHE, 中 활동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 국내 컴백은]
[오늘 29일, MOHE가 중국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중국어 버전의 데뷔 앨범…(중략).
MOHE는 다음 달인 11월 7일 미니앨범을 발매하며 컴백할 예정이다.]
-건강하게 잘 돌아와 줘서 넘 고마운데 바로 또 컴백 준비.. 팬 입장으로선 행복하지만 그래두 걱정된다 그래두 고맙고 그래두 걱정, 고맙, 걱정8ㅂ8
-인서비 눈웃음에 치여 사망
-♡♡♡♡♡해원♡♡♡♡♡
-누가 공항에 멋지고 섹시한 아기 늑대들 풀어놨어ㅡㅡ
“…….”
한율은 더 이상 댓글을 보기가 힘들어져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차남석이 봤다면 ‘얘네 팬들은 단체로 눈이 삔 게 틀림없어!’라고 화낼 법한 내용들이었다.
‘우리랑 컴백 날짜가 같네.’
그 말인즉슨 마땅히 후배로서 대기실로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한다는 뜻.
‘언젠가 방송국에서 마주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뭐, 별 일은 없겠지.’
작년에 안인섭이 자신을 두고 한심한 글을 작성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얽힌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말이다.
우웅.
“……?”
그때 맞팔이 된 누군가로부터 DM이 날아왔다. <부산 아시아뮤직 페스티벌>에서 같은 대기실을 쓰면서 조금 더 친해진 풀썸의 효운이었다.
-[나 방금 해원이한테서 DM받았는데 내용이 좀 이상해. 너희 컴백할 때 해코지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전해달라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해원이가 너랑 맞팔은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DM도 내가 읽으니 바로 삭제하고, 나중에 걱정돼도 SNS론 물어보지 말라고, 미안하다 그러고, 폰은 압수됐다 그러고ㅜㅜ]
-[둘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나 완전 걱정된다ㅜㅜ]
컴백 대박나세요
어스래빗 컴백 일주일 전.
10월 31일 뮤닷 <락뮤닷>을 시작으로, <로얄K뮤직>, <뮤직센터>, <뮤직뮤직>, 에 어스래빗 컴백 스테이지를 예고하는 짧은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린라이브 채널과 너튜브를 통해 이번 어스래빗 신곡 <있어> M/V 티저도 공개되었다.
-애들 미모 미쳤다ㅜㅜㅜㅜㅜㅜ
-잠깐만 들어도 완전♡크으♡
-벌써부터 이러면 안 돼!!!! 나중엔 내 심장더러 어떻게 감당하라고!!!!!!!
-차남석 나랑 같은 종족이 맞기는 한가...? 어떻게 저 미모가 인간일 수 있어....??
-박다람이 사랑한다!!!!!!! (오타아님)
-신이 우리나라를 편애한다는 살아있는 증거.
-애들 드라마 촬영이나 학교 갔다 온 다음에 밤새도록 촬영했다고 하던데.. 진짜 고생한 만큼 잘 나와서 다행이다ㅠㅠ
-컴백 쇼케이스 따로 안 하나 봐요ㅜㅜ... 슬프다..
-처음 컴백하는 락뮤닷에서 지구톢이 미니 팬미팅 예정입니다!!!! 사녹 방청을 향해 돌격!!!!!!!!!!!!!!!!!!
그 전날인 30일엔 유호와 박가람이 13일에 방영될 <아이돌 장학퀴즈쇼> 프로그램 녹화를 마쳤고, 11월 2일엔 신인 아이돌의 경우 어느 정도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그룹만 나갈 수 있다는 MBS K <주말아이돌> 녹화를 진행했다.
11월 4일 자 <주말아이돌> 방송이 끝난 직후엔 다음 주인 11일에 방영될 어스래빗 편 예고가 나왔다.
“보배 미니 왕관 쓰고 예고 멘트 치는 거 왜 이리 어색하냐.”
“흐….”
WB래빗 녹음실. <있어> 일본어 버전 녹음을 위해 모인 어스래빗 멤버들은 소파에 앉아 <주말아이돌> 예고 영상을 보며 잡담을 나눴다.
“그런데 너희 공홈에 올라온 우리 스케줄 봤어?”
“응. 중간이 빼곡하더라.”
“하지만 우리는 잊어선 안 돼. 공홈 스케줄엔 일본 스케줄이 기재되지 않았단 사실을.”
“하하하하.”
멤버들은 웃기만 할 뿐 불평하지 않았다. 신인의 스케줄이 빽빽하다는 건, 그만큼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가 높다는 뜻이므로.
“그나저나 우리 컴백 날짜에 MOHE도 컴백하던데.”
“뮤비 티저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중국 사극 세트장에서 찍었다더니, 배경 진짜 멋있어.”
“그런데 그거 이미 말 좀 나오는 것 같던데? 왜 옛날 중국 건물 세트에서 한복 입고 찍었냐고.”
“얘들아.”
장비 앞에 앉아있던 유호가 빙글 의자를 돌리며 멤버들을 보았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나 집중하자.”
“네, 작곡가님.”
<있어>는 유호가 A&R팀의 장재천 작곡가 겸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한 곡이었다. 곧 장재천과 엔지니어가 녹음실로 들어왔다.
“슬슬 시작해볼까요? 다들 목 상태 괜찮죠?”
“넵.”
“먼저 녹음 끝난 사람은 나가도 됩니다. 방해되니까.”
“하하하….”
농담 같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멤버들은 어설프게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에도 녹음을 하면서 장재천이 작업을 할 때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지난번이랑 다르게 뭔가 많이 허전한 것 같지 않아?”
한율은 멤버들 중 5번째로 녹음을 끝내고 연습실로 내려왔다. 먼저 와 있던 길우성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한율은 자신의 캐비닛을 다가가며 대답했다.
“지난번엔 데뷔 쇼케 때 나갈 영상을 많이 찍었었지만, 이번엔 그런 게 없잖아.”
“아아! 맞다! …왜?”
몸을 유연하게 풀던 차남석이 자세를 바로하면서 말했다.
“컴백 쇼케를 따로 안 하니까 그렇지.”
“왜?”
“달랑 한두 곡 가지고 컴백 쇼케이스 하는 신인 봤냐?”
“왜 안 되는데?”
“…….”
차남석은 잠시 말없이 웃으면서 길우성을 바라보다가 다가갔다.
퍽.
길우성이 과장되게 엄살을 부리며 철퍼덕 쓰러졌다.
“으아아! 사내폭력이다!”
“형, 잠깐 이리로.”
“……?”
길우성의 엉덩이를 가볍게 걷어찼던 차남석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캐비닛 앞에서 연습용 옷과 신발로 갈아 신은 한율은 차남석에게 며칠 전, 효운이 보낸 DM을 보여주었다.
지난 며칠 동안은 서로 스케줄이 엇갈리기도 했고, 잊어버리기도 했다가 조금 전 MOHE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차남석은 DM을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DM을 삭제했다면 SNS ID랑 비번까지 회사나 멤버들이랑 공유하고 있다는 소리네. 아무튼 이해원이 이렇게 제3자를 거쳐서 알려줄 정도면 조심해야겠다.”
“어떻게요?”
“일단 호 형이랑 팀장님한테 말해야지. 컴백 날짜가 같으면 최소 일주일은 동선이 계속 겹칠 테니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11월 7일 새벽 3시.
아주 오래간만에 일찍 기상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양치와 세수만 하곤 어슬렁어슬렁 숙소를 나왔다. 문이 활짝 열린 두 대의 밴 옆에는 영상프로덕션 스태프들이 카메라를 들고 서있었다.
멤버들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한 채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곤 차에 탑승했다. 유호가 카메라 앞에 서서 멘트를 쳤다.
“오늘 드디어, 지난 데뷔 앨범 활동 종료일 5월 14일 이후 오래간만에 무대에서 이프림을 만나러 갑니다. 굉장히 설렙니다.”
박가람이 끼어들었다.
“형, 눈은 뜨고 말해야지.”
한율은 차에 타려다가 유호에게 손을 뻗었다. 슥슥. 뻗친 리더의 머리를 막내가 손으로 정돈해주는 의도된 연출.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차에 탔다. 유호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밥은 따뜻한 국물요리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라이언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순두부찌개 먹고 싶어.”
“나는 설렁탕.”
“호 형, 빨리 타요. 찬바람 들어와.”
“응.”
차 안에도 컴백 비하인드 영상촬영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사전요구가 있었기에, 한율은 정말로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뒷좌석에 앉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허밍을 하던 차남석도 이내 조용해졌고, 유호와 길우성도 다시 잠들었는지 차 안은 고요했다.
수면 아래로 의식을 가라앉히던 중, 조유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메라 의식하지 말라고 했더니…. 진짜 자니, 얘들아…?
차는 뮤닷 <락뮤닷> 스튜디오 건물 입구 바로 앞에서 멈췄다.
차칵차칵!
비몽사몽인 상태로 차에서 내리던 어스래빗 멤버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셔터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일렬로 서서 기자들에게 인사했다. 손구호도 잊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차칵차칵차칵. 화답으로 돌아오는 건 더 시끄러운 셔터소리와 불빛. 기자들 사이엔 활동할 때 자주 봤었던 홈마도 몇 끼어있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2초 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그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라 영상촬영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따라왔다.
“여긴 출근길이 따로 없어서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는데….”
“하하하하.”
“…응? 이거 뭐지?”
환하게 불이 켜진 백색 복도를 걷던 중, 강보배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복도 벽에 처음 보는 프로그램 포스터가 여러 장 부착되어 있었다.
“숨은 보석 찾기 프로젝트, 아이돌 서바이벌 …?”
다른 멤버들도 의아한 얼굴로 포스터 앞에 모였다.
“참가자격은 아이돌 데뷔를 꿈꾸는 연습생, 재데뷔를 꿈꾸는 잊힌 아이돌…. 보컬리스트 시리즈랑 비슷한 건가?”
“보컬리스트는 단순히 경합을 벌이는 거였지만, 이 프로그램 목적은 서바이벌로 뽑힌 애들을 데리고 프로젝트 그룹을 만드는 것 같아요.”
“오오. 뮤닷이 하는 거면 자본이 빵빵하게 들어가겠는데?”
“참가신청은 이번 달부터 받고 녹화는 3월부터 예정. 아직 한참 멀었네. 그런데 왜 이 포스터가 여기에 붙어있지?”
멤버들은 다시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음방에 출연하는 아이돌들더러, 저 프로에 참가할 만한 지인들에게 연락하라고 붙여놓은 거 아닐까요?”
한율의 추측성 발언에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다. 다들 아는 연습생 한 둘 이상은 있을 테니까.”
“당장 우리 회사 연습생들도 있고.”
길우성이 한율과 차남석을 보며 말했다.
“현우 형한테 한번 나가보라 그러자.”
“걘 안 돼. 이쪽 완전히 접은 뒤로 드라마랑 영화 스케줄 줄줄이 잡아놨더라.”
“아깝.”
“그런데 조금 궁금하긴 하다.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은 어떤 트레이닝을 받고, 어느 정도 수준인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거잖아.”
대기실은 지난번처럼 넓은 공간에 칸막이로 구역이 나뉜 곳이었다. 들어가기 전, 한율은 문 옆에 부착된 팀 이름을 확인했다.
[강단밴드/MOHE/어스래빗/V12]
옆에 나란히 선 차남석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첫날부터….”
대기실에는 데뷔한 지 2주 밖에 안 된 신인 보이그룹 V12만 와 있었다. 그들은 어스래빗 멤버들이 대기실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칸막이 안에서 우르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12명이나 되는 소년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기실에 쩌렁 울렸다.
“크게 자라는 열 두 명의 승리의 아이들!”
“V12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앞서 회사 측에서 그린라이브에 올라갈 영상콘텐츠를 촬영 중이라고 양해를 구했는지, 그들은 어스래빗 곁에 붙은 카메라에 전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긴장한 얼굴로 흘끔거리면서 의식하기 바빴다.
어스래빗도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반가워요!”
한 사람씩 일일이 악수를 나눈 후에는 서로 앨범을 교환했다. V12 멤버 중 한 명이 한율에게 앨범을 건네주며 말을 걸었다.
“선배님, 저기 혹시… <하울링>에서 같이 촬영했던 김주원이라고 기억하세요?”
한율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히 기억하죠.”
<하울링> 1화를 함께 촬영했던 아역배우. 비중은 단역에 가까웠지만, 미국으로 가기 전에 함께 대본 리딩을 했었다. 주인공의 아역시절을 맡았던 윤상진과는 친구사이.
한율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V12 멤버의 표정이 환해졌다.
“저희 형입니다.”
“아, 그래요? 주원이 형은 잘 지내요?”
“네, 이번에 OSN 드라마 찍고 있습니다. 그… 배우 윤승권 선배님 나오는 드라마요.”
“아….”
한율은 일부러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다가 눈썹 끝을 내리며 웃었다.
“제가 찍는 드라마 라이벌이네요. 시간대는 다르게 편성되겠지만?”
“하하.”
옆에서는 다른 V12 멤버가 차남석에게 앨범을 건네며 호들갑을 떨었다.
“선배님 어떻게… 어떻게 쌩얼인데, 그리고 새벽인데 이렇게 잘생길 수가 있어요?!”
“감사합니다.”
한 멤버는 라이언을 붙잡고 영어로 떠들었다. 지난 번 강보배와 함께 ‘트레리안’으로 낸 믹스테이프 수록곡 중 <서녘>이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였다.
참 넉살도 좋고 붙임성도 좋은 후배들이었다.
얼추 인사를 마치고 배정된 칸막이 구역 안으로 들어간 어스래빗 멤버들은, V12에게 받은 앨범을 살피거나 개인 가방에 넣었다.
“열 두 분이 한 팀이면, 와…. 여덟 명도 정신없는데.”
“저 분들 나중에 해외 콘서트 가게 되면 짐 장난 아니겠다.”
“20분 후에 드라이리허설이니까 이것부터 마셔.”
매니저들이 돌아다니면서 한율을 제외한 멤버들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나눠주었다. 한율은 숙소에서 미리 텀블러에다가 탄 레몬생강차를 마셨다.
현장전이 핸드폰으로 메모 준비를 하며 멤버들을 향해 물었다.
“아침은 뭐 먹을래?”
라이언이 손을 들었다.
“순두부찌개.”
“찌개는 안 돼. 나트륨 많이 들었어.”
“…….”
“아니 왜 우리 먹방요정 기를 죽이고 그래욧?!”
적당히 부담되지 않는 선으로 아침 메뉴를 정한 후엔 리허설 조끼를 걸쳤다. 그러고 막 대기실을 나왔을 때였다.
“어? 안녕하세요!”
막 대기실로 걸어오던 한 무리의 사람들. MOHE의 리더가 큰 소리로 인사해,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도 이쪽을 향했다.
유호가 세상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컴백 축하드립니다!”
“컴백 대박나세요!”
다른 7명의 멤버들도 아주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살갑게 인사했다. 카메라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MOHE 멤버들도 당황한 기색 없이 살갑게 웃으며 화답했다.
“어스래빗 분들도 컴백 축하합니다!”
“우리 같이 활동 열심히 해요!”
“홧팅!”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 팀이 아주 친하다고 착각이 들 정도로, 정말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인트로와 본무대 사녹까지 마친 어스래빗은 대기실에 잠깐 들러 마이크와 인이어를 제거. 외투만 걸치고 다시 나왔다. 선배들에게 앨범을 돌리러 가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바로 이프림과의 미니 팬미팅.
“우리 팬 분들 진짜 대단하지 않냐? 음원 사이트에 공개된 게 바로 30분 전이었는데 그 사이에 노래를 다 외우다니…. 아무리 새벽에 가사랑 응원법을 받았다곤 해도.”
“내가 평소에 말했잖아, 형. 우리 이프림 짱쎄다고.”
“그런데 이따가 어떡할 거야?”
박가람이 목소리를 낮췄다.
“인사 다니는 것까진 카메라로 못 찍잖아.”
컴백 비하인드 촬영 카메라는 먼저 미니 팬미팅 장소로 나간 상태. 다른 멤버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까 성량을 낮췄다.
“그래도 여러 사람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공용 대기실인데 뭐 허튼짓이야 하겠어? 고작해야 은근히 돌려 까는 정도겠지.”
“우리 대기실이나 그쪽 대기실이나 항상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가 있으니 물리적인 뭔가를 꾸미기도 힘들 테고.”
“생방 때? 아니면… 다 끝나고 무대에 오를 때?”
“으음….”
며칠 전, 한율과 차남석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유호와 오 팀장은, 다른 멤버들에게도 이해원이 건네준 경고를 비롯해 안인섭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오 팀장의 신신당부.
『여러분은 MOHE 멤버들에게 경계심이나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왜 그래야 하는지는 다들 잘 알죠? 슬쩍 째려만 봐도 그게 빌미가 되어, 여러분을 끌어내리고 싶은 사람들의 합심으로 왜곡된 루머가 생성, 순식간에 처 죽여도 모자란 가해자가 되기 쉽다는 거. 붙임성 있게 대하되, 선도 웃으면서 그으세요.』
『팀장님처럼요?』
『우성아, 잠깐 팀장님이랑 저기 가서 면담 좀 할까?』
유호가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멤버들의 주의를 끌었다.
“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우리는 팬미팅에 집중합시다.”
“네엡.”
오늘 미니 팬미팅은 사녹 방청을 한 2백 명에 한해 진행될 예정이었다. 뮤닷 측에 허가를 받은 구역엔 팬들을 위한 커피차와 핫팩이 잔뜩 든 상자, <있어> 타이틀 곡명이 새겨진 에코백이 테이블에 잔뜩 쌓였다.
미니 팬미팅을 취재하려고 대기 중인 기자도 몇 보였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출입구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에게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하고, 팬들이 모인 곳으로 점점 걷는 속도를 높였다.
“꺄악! 이건우!”
“우성아악!”
그들을 발견한 팬들이 손이나 슬로건을 높이 들며 인사했다. 그러나 제자리에서 발발 동동 구를 뿐, 팬미팅 구역에 두른 벨트 차단봉을 넘진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무질서를 초래하면 앞으로 사녹 방청은 물론이고 공식팬클럽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각종 이벤트 참가자격이 박탈되는 까닭이었다.
어스래빗은 그들 앞에 일렬로 섰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컴백 축하해!”
“와 줘서 고마워!”
멤버들은 한 사람씩 컴백에 대한 소감 및 이곳까지 와서 응원해준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커피차와 테이블 안쪽에서 서서 팬들에게 직접 음료와 핫팩, 에코백을 챙겨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오늘 너무 쌀쌀하지 않아요? 좀 따뜻하게 입고 오지.”
“잠깐만, 누나. 아까 사녹할 땐 내 이름 머리띠한 것 같았는데… 그 사이에 보배 형으로 바뀌었네요?”
핫팩 5개를 싼 투명 포장지엔 어스래빗 멤버들의 스티커가 부착되었다. 그걸 친절하게 에코백에 담아 건네주려던 길우성이 내밀었던 손을 휙 회수하자, 팬이 배시시 웃으면서 머리띠를 벗었다가 반대로 돌려썼다.
“짠.”
“이럴 수가, 양면이었다니…!”
한율은 외투 안에 교복을 입은 또래 학생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학교 안 가고 여기로 온 거에요?”
“너희도 학교 안 갔잖아. 그래서 나도 쨌지!”
참 당당한 소녀 팬이었다.
“…하하.”
“꺄아,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웃는 거 너무 좋아!”
“…….”
취향도 특이하고.
여자가 대부분인 팬들 사이엔 머리 하나가 더 커서 눈에 띄는 남성 팬도 있었다. 이전에도 가끔 보였던 차남석의 팬이었다.
“이번 컴백 활동도 대박나고, 드라마도 대박나길 바랄게.”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국내 팬들과 직접 만나는 자리는 오래간만이었지만, 미니 팬미팅은 큰 문제없이 진행되는 듯했다. 지난번처럼 멤버들을 추행하려는 ‘나쁜 손’도, 일본에서 귀국할 때처럼 질서의식도 배려심도 없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사람도 없고.
그러나,
“저 사람이에요!”
별안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
의아한 시선으로 본 그곳엔, 눈에 띄는 형광색 조끼를 걸친 경찰 두 명이 어스래빗 미니 팬미팅 장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을 대동한 여성 둘이 누군가를 향해 삿대질했다.
“저 남자예요! 저 추행한 사람!”
“맞아요, 저놈이에요! 파란색 모자!”
그들이 가리킨 건 막 차남석에게 핫팩이 든 에코백을 받던 팬이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휙휙 살피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요?”
“네가 아까 사람들한테 밀려서 비틀거리는 척하면서 내 팔이랑 허리 만졌잖아!”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저 그런 짓 한 적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봤는데!”
높은 날카로운 목소리에, 음방을 찾은 다른 팬이나 방송국 관계자들, 기자들의 시선도 이쪽을 향했다. 어스래빗의 미니 팬미팅을 취재하기 위해 왔던 기자들은 지금 이 상황을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 건가 난감해하며 눈치를 살폈다.
어스래빗 팬들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놀라 웅성거렸다. 조금 전 한율 앞에서 해맑게 웃던 여학생이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깡돌 오빠가 그런 짓할 사람이 아닌데….”
어스래빗 멤버들을 만나기 위해 팬들이 줄을 선 벨트차단봉 사이. 본래라면 팬매니저에게 오늘 사녹방청을 온 인원이란 걸 확인받아야지만 이 경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두 여성은 경찰을 앞세워 성큼성큼 들어왔다.
“남자가 여자들 틈에 끼어있는 거 봤을 때부터 싸하다 했어, 내가!”
“잠깐만요!”
그때 어스래빗 팬 중 한 명이 발끈한 얼굴로 나섰다. 데뷔 때부터 사녹이나 팬 사인회에 자주 왔던 팬이었다.
“진짜 그런 짓 당했으면 왜 그땐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요? 그때 소리라도 질렀어야지! 그리고! 남자가 여자들 틈 어쩌고 이딴 말은 왜 하는 건데!”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남자가 남돌은 왜 쫓아다녀! 다 니들 어떻게 해볼까 끼는 거지!”
“지금 성범죄 피해자한테 피해자답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거야?!”
“자자, 일단 진정하시고. 거기 남자 분, 이리로 와 보세요.”
“저 정말 그런 짓 한 적 없습니다!”
즐거웠던 미니 팬미팅 자리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WB래빗 직원들과 경호원들은 소란을 듣고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핸드폰으로 촬영하지 말아 달라 수습에 나섰다. 어스래빗 멤버들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비슷한 생각이 드러나는 얼굴로.
‘뭔가 이상해.’
우리랑 우리 팬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
그때 차남석이 테이블을 돌아서 나갔다.
“남석아.”
조유찬이 그의 팔을 잡았으나, 차남석은 경찰과 마주보고 선 팬과 두 여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유찬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피해자라고 말한 여성이 울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늘 우리 오빠들 컴백이라 기분 좋게 왔는데…, 흐윽, 이게 뭐야아….”
차칵차칵. 망설이던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울음소리와 뒤섞였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몰려온 구경꾼들 사이로 급속도로 퍼지는 의심과 비난의 기류.
“대박.”
개중엔 심각한 상황을 하나의 쇼로 받아들이고 키득키득 웃으며 촬영하는 사람들까지.
차남석이 사건 목격자라고 주장한 여성 앞에 섰다.
“정말 그런 못된 짓한 분이 파란색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지금 우리 의심하는 거야?”
목격자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크게 되묻더니 당당히 외쳤다.
“그래! 파란색 모자 쓰고 있었고, 저 얼굴도 확실히 봤다, 왜!”
“정확히 어디에서요? 몇 시에?”
“와! 여러분들 보셨죠? 피해자 우는 거 보고도 의심하는 거!”
높아지는 목격자의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차남석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그러나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집중하여, 그가 내뱉는 말은 주변에 또렷하게 퍼졌다.
“죄송하지만 저는 우리 팬 분을 더 믿어서요.”
허억. 그 발언에 어스래빗 팬들은 숨을 들이키며 놀란 눈으로 차남석을 쳐다봤고, 구경꾼들은 술렁거렸다. 조유찬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로 덮었다. 유호가 심각한 얼굴로 나섰다.
팬들에겐 감동일 수 있어도, 자칫하면 ‘성범죄 피해자를 의심했다’는 포커스에만 맞춰져 큰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발언이었으므로.
“…흐아앙……!”
잠시 울음을 멈췄던 여성이 비명을 지르듯 더 크게 울었다. 차남석의 말에 당황해하던 목격자도 언성을 높였다.
“뭐 이런 쓰레기 같은…!”
그 순간이었다.
“…….”
한율의 미간이 불쾌감으로 구겨졌다.
—휘이잉!
동시에 난데없이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꺗!”
“우왓, 뭐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모자가 하늘 위로 붕 뜨고, 머리카락도 사방팔방 휘날렸다.
스으. 돌풍은 가로수 위를 흔들곤 금세 사라졌다.
“…어우씨, 방금 뭐였지?”
“갑자기 웬 바람이….”
한율은 천천히 테이블을 돌아, 갑작스러운 바람에 놀라 울음을 멈추고 산발이 된 머리를 잡은 여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녀에게 휴대용 티슈를 내밀었다.
“믿는다는 반대말이 무조건 다른 상대방을 의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속상하셨다면 죄송해요. 저희도 지금 너무 당혹스러워서…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그럼!”
한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성이 스스로 벌떡 일어났다. 언제 서럽게 울었냐는 듯 아주 씩씩하게.
“이렇게 멀쩡한데!”
그러곤 어깨를 으쓱이면서 거들먹거렸다.
“속상할 게 뭐 있어? 너희한테 똥물 제대로 튀기면 오빠가 나 만나준다 그랬는데?”
“……?”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들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목격자라고 나섰던 여성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세게 잡았다.
“미친년아, 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미친년? 그래, 나 미쳤다! 미친년이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성범죄자로 몰지!”
그녀에게 사과했던 한율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에 있던 차남석과 유호가 동시에 한율을 잡아서 그녀에게서 떨어뜨렸다. 위험한 사람에게서 보호하듯 뒤로 감췄다.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성추행을 당했다는 건….”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구라지, 멍청이들아!”
“…….”
“…신고자 분, 잠깐 저희랑 얘기 좀 할까요?”
만나준다는 ‘오빠’가 누군지 물어볼까, 란 생각도 들었으나 한율은 입을 다물었다. 설마 저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에게 직접 시켰을라고.
그러나 경찰이 대신 물었다.
“신고하면서 말씀하신 성추행 사실 자체가 거짓이었습니까?”
“네!”
“거짓 신고를 하라고 시킨 사람이 따로 있는 겁니까?”
“신고는 제가 생각한 거예요! 오빠는 분탕질 좀 치라 그랬고!”
그녀를 바라보는 경찰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이 미친 신고자는.
“그 오빠란 분이 누굽니까?”
“내, 내가 봤다니까요?!”
목격자가 끼어들었다.
“미친년아, 네가 당하는 거 내가 봤….”
“미친년은 너고! 20만원 준다니까 좋~다고 멀쩡한 사람 하나 병신 만들고, 너도 참 양심 까졌다.”
그제야 두 여성의 자작극이란 걸 깨달은 어스래빗 팬들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대체 왜 갑자기 이중인격자처럼 스스로 실토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미친 사람의 뇌구조를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알겠나 생각하며.
“깡돌 오빠, 저 사람들 무고죄랑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요!”
“뭐야, 대체! 뭐하는 애들인데 여기 와서 행패부리는 건데!”
“MOHE 팬 아냐? 우리 애들 말고 오늘 컴백하는 팀 거기잖아!”
“경찰 아저씨! 저 사람들 공무집행방해로 처넣어 버리세요!”
구경하던 사람들도 술렁거렸다.
“혹시 몰카인가?”
“몰카치곤 상황설정이 너무 이상하고 더럽잖아.”
뒤늦게 뮤닷 측 경비 인력이 나와서 모여든 사람들을 물리고, 경찰들은 가해자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된 남성 팬의 연락처를 받은 뒤, 두 여성을 경찰차에 태웠다.
“뭐야, 진짜! 저 미친년들!”
“저런 사기꾼들 때문에 진짜 무고한 피해자 목소리가 묻힌다는 걸 왜 몰라?”
“MOHE 소속사가 시켰나?”
“와…, 진짜 너무 어이없다.”
“깡돌 오빠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진짜 별 미친 것들이….”
그럼에도 어스래빗 팬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 자신들과, 자신들이 좋아하는 어스래빗이 저열한 음해성 공격을 받았다는 분노였다.
차남석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파란 모자를 쓴 팬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물었다.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말라고. 팬은 괜찮다고 웃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같은 성별이라 온갖 오해를 사도 용기 내어 찾아왔을 텐데, 그런 편협 가득한 비난을 들었으니.
하물며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말이다.
벌써부터 먼 곳에선 ‘그러게 왜 남자가 여자가 많은 남돌 팬들 틈에 끼어선’이라고,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절대 가만 안 둬.”
그때 한율 옆에 있던 길우성이 씩씩거리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감히 우리 팬을 건드려?”
등산 가고 싶네요
현장전과 윤승우를 불러 심각한 얼굴로 뭐라고 말한 조유찬은 파란 모자를 쓴 팬을 데리고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자리에서 아직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거나 불안해하는 팬들을 달래는 건 어스래빗의 몫이었다.
“많이 놀라셨죠? 우리 따뜻한 거 마시면서 같이 천천히 심호흡해요. 후우….”
“누나, 울지 마세요. 응? 뚝.”
“속상하잖아…. 어떻게 사람이 저런 식으로 작당해서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 수 있는 건지 정말 이해가 안 가….”
“오빠들 앞에서 쌍욕 쓰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오빠, 이거 MOHE 쪽에 항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
물러가는 척했다가 어스래빗이 어떻게 분위기를 수습하는지,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해서 슬그머니 다시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자들도 카메라 방향을 완전히 돌리지 않았다.
이건우가 팬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살며시 미소 지었다.
“거짓으로 신고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 그런 사람들 말을 믿고 섣불리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것 같아요.”
“맞아요. 그쪽 팬덤이랑 우리 이간질 시키려고 그런 말을 지어낸 거면…, 어휴.”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MOHE 팬인지 아닌지?”
그때였다.
“우리 이프림은!”
별안간 길우성이 높은 화단 턱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외치는 말.
“짱쎄다!”
“…?”
“…?!”
박가람도 그 옆으로 뛰어 올라가 똑같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우리 이프림은 다들 마음도 따뜻하다!”
“우리 어스래빗은 그런 이프림을 싸랑한다!”
“싸랑한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아멘!”
“나무아미타불!”
풋. 두 사람의 바보 같은 모습에 팬들이 크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어스래빗 멤버들은 ‘오글거리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솔직한 감상이 담긴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앗차 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바보 같아도 사랑해주시는 이프림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팬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그들을 달랬지만, 미니 팬미팅을 마치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온 멤버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만약 조금 전 일에 그놈들이 연루된 거면.”
“이건 선을 넘어도 아주 단단히 넘은 거지.”
대놓고 똥물을 튀기러 왔다느니, 분탕질을 치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화가 나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았어? 경찰까지 데려와 놓고 갑자기 거짓말이었다고 술술 분 게?”
“좀이 아니라 많이 이상했지.”
“그냥 미친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니었을까?”
“20만원으로 거짓 목격자까지 만들어놓고?”
“미친 사람 뇌구조를 어떻게 알아.”
“바람한테 세게 따귀 맞고 정신 차렸나? 타이밍이 그렇던데.”
“그나저나 그 팬 분 진짜 걱정된다. 사람들이 막 촬영도 하고 그랬잖아.”
어스래빗 멤버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인터넷에 올라갔을 지도 몰라….”
“형, 이번 일은 어떻게 보면 우리도 피해자잖아요. 사비로 팬 서비스 이벤트를 진행하던 중에 그 사람들로 인해서 엉망이 되었던 거니까. 법적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유찬이 형이랑 그 분은 어떻게 됐어요?”
멤버들의 눈이 현장전을 향했다. 현장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일단 조용. 그리고 지금부터 방송 끝날 때까지 이 이야기는 금지.”
“왜죠.”
“…싫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회사가 알아볼 테니까, 너희는 팬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 의심하는 척도 하지 말고 의연하게 있어. 싫으면 핸드폰 압수.”
“…….”
어스래빗 멤버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앨범을 잔뜩 챙기고 나올 땐, 오랫동안 갈고 닦았던 대외용 미소를 장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그들의 인사를 받는 다른 가수들은 아직 어스래빗 미니 팬미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잠시 후, 어스래빗은 강단밴드와 MOHE, V12와 함께 사용하는 공용대기실로 돌아왔다. 유호가 멤버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속닥거렸다.
“속단은 금물. 이성적으로, 스마일.”
“…스마일.”
데뷔 순서가 강단밴드 다음으로 MOHE였기에, 어스래빗 멤버들은 일단 강단밴드가 있는 칸막이 앞으로 향했다. 칸막이 안은 시끌벅적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먼저 강단밴드에게 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슬쩍 칸막이 안을 보자 MOHE 멤버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이런 경우 나중에 온 사람은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게 암묵적인 룰. 한율은 다른 멤버들과 MOHE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앞으로 30분 정도.’
임의로 ‘자백 마법’이라고 명명한 마법효과가 떨어지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미 경찰서에서 술술 다 불고도 남았을 터. 나중에 아니었다고 번복해도 믿어줄 사람이나 있을까.
졸지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았다가 스스로 웃으면서 자백한 미친 자가 되었으나, 딱히 불쌍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인과응보라며 벌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럴 권리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