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427)

* * *

어스래빗 미니 팬미팅 자리에서 일어난 소동은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특히 커뮤니티사이트의 어스래빗 게시판은 아주 난리가 났다.

[[풀버전]ㅇㅅㄹㅂ 락뮤닷 미니 팬미팅 깽판]

동영상이나 사진도 여럿 올라왔다. 사람들이 워낙 많은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었던 까닭에, 한쪽으로 치우쳐진 짜깁기 편집 영상, 모자이크가 되지 않은 영상은 금세 밀려나거나 욕과 신고를 받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원본은 돌았다.

-깽판친것들 MOHE 팬 맞음. MOHE 팬인 내 친구가 팬싸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라고 확실하다고 말함ㅇㅇ

-“성추행 사실 자체가 거짓이었습니까?”,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존나 당당해서 보는 내가 더 당황

-소문 듣고 타게에서 넘어왔습니다. 진짜 쌩ㅁㅊㄴ에게 당하셨군요... ㅌㄷㅌㄷ//

-뜬금없기는 한데ㅋ 나만 남석이 멘트에 설렜냐...?

ㄴ죄송하지만 저는 우리 팬 분을 더 믿어서요.

ㄴ크으으으으으으

ㄴ평소 톢이들을 두고 음험한 망상을 즐기던 닼프림은 저 멘트에 양심이 아야한 거애오( › ´ -`‹ )

ㄴㅋㅋㅋㅋ

-MOHE 공팬에서 저것들 제명 처리됐다고 함. MOHE 사녹방청와서 저런 짓으로 아티스트 이름 더럽혔다고ㅋ 그리고 이번 사건이랑 MOHE랑 그쪽 팬덤도 아무 상관없다고 선 그음ㅋㅋ

ㄴ그 말을 믿음?

ㄴ그들의 ‘오빠’를 찾아서

-누구 경찰에 아는 휴먼 없음?

“아악, 씨발!”

퍽. <락뮤닷>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MOHE의 차량 안.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안인섭이 쌍욕을 크게 내지르면서 앞좌석을 걷어찼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스타일리스트가 충격에 놀라 돌아봤지만, 주먹으로 차창 아래를 쾅 내리치는 안인섭의 모습을 보곤 조용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씨발, 씨발, 씨발!”

쾅쾅쾅!

“인섭쓰, 왜 그래. 인터넷에 뭐 떴냐?”

“다친다, 그만 해라.”

“이 씨발년이 처돌았나, 진짜! 썅! 돌대가리 같은 년…!”

“쟤 왜 저래?”

“몰라.”

“형! 나 거기 내려줘!”

안인섭의 요구에, 룸미러를 통해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살피던 매니저가 기겁을 했다. 아주 빠르게 스타일리스트의 눈치를 살피며.

“누나 먼저 내려주고.”

“하…. 누나, 택시비 줄 테니까 오늘은 여기에서 퇴근하시면 안 돼요?”

“어? 어….”

목소리에 잔뜩 깔린 날카로운 가시에, 스타일리스트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차는 대로변에 잠시 멈춰, 5만 원짜리 지폐를 손에 꼭 쥔 스타일리스트를 내려주곤 다시 움직였다.

스타일리스트는 사이드미러에 자신이 잡히지 않을 만큼 차가 멀어지고 나서야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왜 전임이 한 달도 못 버티고 관뒀는지 이해되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MOHE 데뷔 초에 MOHE의 코디를 맡았던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전에 언니가 말렸을 때 말 들을걸 그랬어.”

-[내가 말했잖아. 거기 해원이 빼곤 다 쌩양아치들이라고.]

한편 그 시각, 마찬가지로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던 어스래빗 멤버들은 포털사이트 실검에 뜬 [어스래빗 팬미팅 깽판]을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관 검색어는 [어스래빗 MOHE], [어스래빗 성추행범], [어스래빗 남팬] 등이 떴다.

“그 분 정말 어떡해? 모자이크 처리 안 된 사진이랑 영상이 떠돌면 사건이랑 별개로 조롱하는 나쁜 새끼들이… 하.”

“가뜩이나 상처도 많이 받으셨을 텐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냄새가 짙게 풍기는 사건이라 그런지, 연예뉴스란 메인에도 기사가 여럿 올라왔다.

한율은 그 중 눈에 띄는 새로운 기사를 클릭했다.

[경찰, 성추행피해 거짓신고자 귀가조치]

[오늘 7일, 뮤닷에서 열린 보이그룹A의 팬미팅 현장에 성추행범이 있다고 허위 신고하여 소란을 피운 B, C양이 경찰조사를 받고 귀가 조치되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B양은 평소 A그룹을 싫어하여 이 같은 허위신고를 하였으며, C양은 B양에게 금전을 받아…(중략).

B, C양에게 허위로 성추행범으로 지목된 A그룹의 팬인 D씨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A그룹의 소속사는 이번 사건이 D씨를 포함하여 A를 향한 악의적인 공격이라 판단하고 B, C양을 향한 D씨의 법적대응을 전폭적으로 도울 것이며, 자사 또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법적대응을 강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또한 일반인 D씨의 사진 및 동영상을 유포하는 자에게도…(중략).]

-떠비 법적대응 취미설 진짜로 밝혀져

ㄴ멤버들뿐만이 아니라 팬들도 함부로 건드리면 ㅇㅅㅈ먹이는 떠비 클라스ㄷㄷㄷ

-A=ㅇㅅ토끼. B,C=모HE팬.

ㄴㅁㅎ는 이 일과 전혀 관련 없다고 밝혀졌습니다.

ㄴ팬을 팬이라 말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ㄴ팬은 아티스트 닮는 법이다.

ㄴ팬이 일방적으로 저지른 짓을 왜 아이돌이 책임져야 함?

ㄴ깽판녀가 ㅇㅅㄹㅂ 팬미팅에 XX튀기면 만나준다고 한 그 ‘오빠’가 누굴까? 응? ^ㅅ^ㅗ

ㄴ증거도 없이 허위신고한 ㅁㅊㄴ말을 믿는 ㅇㅅㄹㅂ골빈 팬ㅇㅈ? ㅇㅇㅈ :) ㅋㅋㅋㅋㅋㅋ

ㄴ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ㄴ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내일부터 ㅁㅎ 슬로건 든 ㄴ들 다 잡아처죽인다 ㅅ1ㅂ.

ㄴ그런 짓은 우리 애들만 더 곤란해지니까 자제하라고 공지 떴다.

ㄴ어스 팬코하면서 ㅈㄹ하면 너부터 D진다. 가뜩이나 ㅈㄴ빡치는데

앞으로 연락 자주 해요

쾅! 철컥. 김안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경찰서에서 오는 내내 잔소리와 욕을 퍼부었던 부모가 거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저런 걸 자식이라고! 내가 인생 헛살았지, 헛살았어!”

평소였다면 지금까지 부모랍시고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맞받아쳤겠으나, 김안나는 오늘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대체 내가 왜 그랬지? 대체 왜?!’

어둑한 방은 온통 MOHE 굿즈로 꾸며져 있었다. 그 중 특히 MOHE의 메인보컬 안인섭의 굿즈가 많았다.

김안나는 책상 앞에 앉아 스탠드와 노트북을 켰다. 꺼놓았던 핸드폰 전원도.

‘분위기 개판 만들고, 경찰서까지만 가서 착각이었던 것 같다고 빠져나올 생각이었는데, 왜 그 자리에서 병신같이 술술 털어놨냐고…!’

띠링, 띠링. 전원을 꺼놓았던 몇 시간 사이에 들어온 수많은 전화와 메시지, SNS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지저분한 난리를 피웠으니 당연했다.

빠르게 스치는 메시지는 원색적인 비난이 태반이었으나,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은 점차 한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쏠렸다.

“…여보세요? 저 안나인데요….”

-[너 미쳤어? 돌았니?]

전화를 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들리는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하려면 끝까지 똑바로 하든가.]

“그게, 그러려고 그런 게 절대 아니었어요.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그 순간부터 어… 막, 입이 저절로,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져서…. 하, 하지만 오빠 이름은 절대 말 안했어요! 솔직히 목 끝까지 차올랐는데, 오빠 이름만큼은 말하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삼킨 거예요….”

상대방은 횡설수설하는 김안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너 똑바로 들어.]

“네, 네!”

-[넌 MOHE 안티로 돌변한 사생이야.]

“네? 그게 무슨….”

-[네가 저지른 그 정신 나간 짓 때문에, 걔네 컴백하자마자 후배도 모자라 그 팬한테 직접 가서 고개 숙이고 자숙해야 할 판이야, 이 미친년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오빠가 너 때문에 자살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라고.]

흠칫.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예시에 김안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눈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상대가 보지 못한다는 걸 알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게요, 언니…! 뭐든 다 할게요!”

-[일단 집에 있는 MOHE 굿즈부터 싹 치워. 지저분한 음식물 쓰레기랑 같이 뒤섞어서 쓰레기봉투에 처박고, 불태우는 인증샷도 찍어서 나한테 보내. 사진 파일도 보내면 바로 싹 지우고. 그리고….]

* * *

다음 날 새벽, MBS K <로얄K뮤직> 어스래빗 대기실.

MBS는 신인에게도 단독 대기실을 잘 주는 곳이라, 어스래빗은 눈치 보지 않고 들어가 기다랗게 놓인 소파에 널브러졌다.

“설마하니 기다리는 동안 팬 분들 간에 싸움 같은 거 벌어지진 않겠지…?”

“여러 경로로 싸움은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으니 괜찮기를 바라야지.”

오늘 <로얄K뮤직> 라인업에는 MOHE도 있었다. 이틀 후에 있는 <뮤직센터>도, 토요일에 있는 <뮤직뮤직>도, 일요일에 하는 에도 쭉 같이.

“그런데 우리는 어째 다른 팀하고 이런 종류의 충돌이 잘 빚어지는 것 같지 않냐? 아니면 다들 이런가?”

“잘은 무슨, 딱 두 번째구만. 팬덤 간의 사나운 기 싸움은 이 바닥에서 늘 있는 일이야. 우리처럼 극단적으로 부각되지 않아서 안 그래 보일 뿐이지.”

“아하….”

드라이리허설을 하고 돌아온 후에는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고, 사녹이 있기 3시간 전에 눈을 뜨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양치와 세수를 하고 메이크업 받을 준비를 할 때였다.

“어?”

얼굴에 마스크 팩을 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박가람이 놀란 소리를 냈다.

“VEL엔터에서 공식입장 내놨어.”

“뭐라고?”

“안녕하세요, VEL엔터테인먼트입니다.”

“님, 세 줄 요약 좀.”

“…….”

하얀 마스크 팩에 뚫린 눈구멍 속 시선이 이건우를 째려봤다. 그러나 곧 순순히 요약해서 말해주었다.

“어제 일은 안티로 돌변한 MOHE 극성 사생팬이, MOHE 엿먹어 봐라! 라는 마음으로 MOHE가 사주한 것처럼 다른 그룹 팬미팅에서 깽판 친 거다. 끝.”

“헐….”

“그게 말이 돼?”

황당해하는 멤버들 사이에서 한율도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댓글 보니까, 어제 난리친 사람이 예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MOHE 굿즈 소각 인증샷도 나왔나봐. 사진파일 정보도 일주일 전에 찍은 걸로 나오고.”

“어… 그래도 왠지 잘 안 믿겨지는데….”

“MOHE한테 뒤집어씌우려고 경찰까지 부르고 그런 난리를 쳤다고? 허위신고 처벌이 그렇게 약하지 않을 텐데? 거기에다 피해자들한테 고소당할 것도 생각하면….”

“그러게?”

“목격자라고 같이 나선 사람도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거 보고 레알 당황한 눈치였는데.”

“VEL엔터의 공식입장 핵심은.”

한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MOHE 역시 그들의 피해자라는 주장인 거네요.”

“아….”

“맞아. 안티로 돌변했다고 자칫하면 지 이름에 빨간 줄 그을 범죄까지 저지르나 싶겠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의 허점을 파고들어 미친 척한 거라는 궁예 댓글이 많아. 자칭 MOHE 팬이라는 사람들도, 평소 MOHE를 따라다니면서 관종 짓을 하던 극성 사생이었다는 증언 댓글도 잔뜩 달고 있고.”

“이거 냄새가 나는데.”

“꼬리를 잘라 불태우고 물 타기 하는 냄새?”

이런 식이면 경찰서에서 안인섭의 이름이 나왔다고 해도, 사람들은 ‘걔네 MOHE 엿 먹이려고 그런 짓 한 거라며’라고 진위를 의심하고 결국엔 모든 게 흐지부지될 것이다.

‘그쪽도 갑자기 허위신고였다고 웃으면서 실토한 것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을 텐데, 잔머리 하난 잘 굴렸네.’

허위신고자와 공범은 이미 인터넷에 신상이 쫙 퍼진 것도 모자라, 곧 고소까지 당해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겠으나, 그런 걸 걱정했다면 그런 짓을 사주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터다.

‘아니지. 분탕질 좀 치라고만 했지 무고한 사람을 성추행범으로 몰라는 등의 구체적인 지시는 내리지 않았던 것 같으니….’

허위신고자 역시 애초부터 인성이 그른 인간이었던 것이다. 본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수단을 선택하는 그런 인간.

똑똑.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조유찬이 대답 없이 문을 열어 누군지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MOHE의 매니저였다. 그 뒤로 하나 같이 표정이 어두운 MOHE 멤버들이 보여, 소파에 편히 앉아있거나 널브러지듯 누웠던 어스래빗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우리 애들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조유찬이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이쪽이 후배인데다 보는 눈들 탓에 거부하기도 어렵다. 유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유찬이 문을 활짝 열었다. 아직 헤어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 MOHE 멤버 6명이 쭈뼛쭈뼛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이미 어제 사건에 대해선 이 바닥에 파다하게 퍼진 터라, 막 멤버들을 단장시킬 준비를 하던 샵 직원들이나 스타일리스트는 괜히 고개를 돌리며 무언가를 하는 척했다.

MOHE 리더가 머뭇거리다가 어스래빗 멤버들을 돌아보며 운을 뗐다.

“어제 락뮤에서 퇴근하는 길에, 어스래빗 분들에게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소란을 피운 사람들에 대해서도요.”

회사가 시킨 것인지, MOHE 멤버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교무실에 불려온 학생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낮게 깔았다. 그러나 정말 미안하고 우울한 감정이 드러나는 건 이해원 뿐이었다.

“변명 같겠지만, 저희도 평소 그 분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수차례 겪고, 법적대응을 검토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설마하니 저희도 모자라, 다른 그룹인 어스래빗 분들과 일반인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그런 짓을 벌일 줄은…. 다 저희 대처가 느려서 벌어진 일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MOHE 리더가 고개를 숙이자 다른 멤버들도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큰소리로 사과했다. 그 소리에,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복도를 지나가던 방송국 스태프들이 무슨 일인가 멈춰 서서 기웃거렸다.

어제 허위신고자가 마법의 영향으로 내뱉은 발언이 모두 진실이란 것을 아는 한율로선, 참으로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내뱉은 ‘오빠’는 아주 높은 확률로 이들 중 한 명일 테니.

그때였다.

한율의 눈에 이해원이 앞으로 모은 두 손이 비쳤다. 가늘게 떨리는 두 손은 손톱으로 제 살을 뜯을 것처럼 세게 꾹꾹 누르고 있었다.

“…….”

한율의 눈에 희미하게 아른거리려던 푸른빛이 사라졌다.

이들이 품고 있는 수많은 지저분한 진실에서 그는 완전히 자유로울까. 당장 MOHE가 해체되고 연예인으로서 인생이 끝장날 경우, 고작 스물한 살이란 나이에 수 억 원의 빚을 진, 이 마음이 약한 아이는 과연 삶의 끈을 계속 잡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원은 위태로워보였다.

‘지구인에게 측은지심 따위 가져봐야 역겨운 위선 놀이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지만.’

유호가 황급히 그들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저희도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선배님들 잘못이 아니잖아요. 괜찮습니다.”

이건우가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길우성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선배님들도 마음고생 많이 하셨다면서요. 저희는 괜찮으니 고개 드세요.”

“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MOHE 멤버들이 수차례 죄송하다와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대기실에서 퇴장하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해원이 형.”

“…어?”

한율은 이해원에게 다가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형 번호 좀 주세요.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깜빡해서요.”

“아….”

이해원이 매니저의 눈치를 살폈다.

“그, 내가 핸드폰이….”

MOHE의 매니저가 끼어들었다.

“애들 폰을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어서요. 자꾸 사생들이 전화를 걸어대기도 하고,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괜히 인터넷 반응 수시로 체크하면서 무대에 집중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이상하네요.”

한율은 미소에 농도를 더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보니까 다른 멤버 분들은 다 핸드폰 갖고 계시던데. 해원이 형 번호만 유출됐나 봐요.”

“아…? 하하….”

안인섭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는 게 보였으나, 한율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이해원만 차별하는 건가?’ 라는 표정으로 MOHE의 매니저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MOHE의 매니저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이런 상황에 더 이상 안 된다고 버티는 것도 꼴이 우습다 생각했는지, 매니저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면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해원아, 여기 네 핸드폰.”

“…감사합니다.”

한율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해원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SNS 맞팔까지 했다. 그러곤 호감이 가득한 눈으로 이해원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앞으로 연락 자주 해요, 형.”

“으, 응….”

“인증샷도 찍을까요? 효운이 형이 우리 둘 싸운 거 아니냐, 왜 서로 연락을 안 하나 걱정하더라고요.”

“아니, 나 지금 쌩얼이라….”

“나도 그런데요, 뭘. 형은 잘생겨서 괜찮아요.”

한율은 이해원이 당황해하면서 매니저의 눈치를 보든가 말든가, 카메라 앱을 실행시키고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평소의 서한율이 아니야!’, ‘한율이 왜 저래?’란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어스래빗 멤버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하나, 둘.”

몰아치듯 카운트다운을 세자, 이해원은 말 그대로 반사적인 반응을 보였다.

생긋. …찰칵.

“SNS에 올려도 되죠? 우리 팬 분들이랑 형네 팬 분들한테도 보여줄 겸.”

한율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MOHE 매니저에게 묻자,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윽고 MOHE 멤버들이 퇴장했다.

툭. 문이 닫히자마자 어스래빗 멤버들은 진이 빠진 얼굴로 소파나 거울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하아….”

그러나 대화를 나눌 짬은 나지 않았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샵 직원들이 드라이어기를 작동시킨 까닭이었다.

위이이잉. 시끄러운 드라이어기 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한율은 자신의 SNS에 조금 전 이해원과 찍은 사진을 올렸다. 배경에 하얀 마스크 팩을 붙인 박가람의 얼굴 일부가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벼르고 벼르던 해원이 형 번호 딴 날. #로얄K대기실 #형폰해금축하해요 #앞으로자주연락 #5분무응답시112 #여름소풍인연 #모두다홧팅 #시강정체는박다람]

조용히 옆에 온 조유찬이 섭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젠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SNS에 막 올리는 구나….”

“이만하면 저도 알아서 할 때도 됐잖아요, 형.”

“그런데 112는 뭐야?”

한율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뭐긴요. 장난이죠.”

평생 못 가겠네

커뮤니티사이트의 MOHE 게시판.

MOHE의 소속사인 VEL엔터의 공식입장이 올라오자 게시판은 ‘그럼 그렇지’라고 허위신고자와 공범을 욕하는 글로 도배되었다.

-어제 사녹방청 와서 존좋 외치면서 발광했던 게 다 애들한테 뒤집어씌우기 위한 밑밥연기였던 거

ㄴ존나 소름ㄷㄷ

-20만원 받고 목격자한 애는 ㄹㅇ 억울해 보이지 않았음?

ㄴ걔도 통수 맞은 거 아님?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라? ㅋ

-일주일 전에 찍은 굿즈소각 인증샷 보니까 진짜 소름 돋;; 비공굿도 많이 보이던데

ㄴㄹㅇ사생은 정신병인 듯

그 와중에 누군가 서한율의 SNS 게시글을 캡처해서 올렸다. 링크와 함께.

[ㅇㅅㄹㅂ ㅎㅇ SNS에 워니랑 같이 찍은 사진 올라옴]

MOHE 팬들은 처음엔 굴욕 없는 이해원의 민낯에 웃었으나, 이내 사진 아래에 적힌 해시태그에 주목했다.

-워니 폰 압수당했었나?

-5분 무응답시 112???

-딴 애들은 폰 든 거 몇 번 본 적 있는데?

-뭔 해시태그를 저렇게 써놨어 찝찝하게ㅡㅡ

-글고 보니 해원이 사과패드 갖고 있는 건 봤어도 폰 갖고 있는 거 본 적 없는 듯

ㄴㄴㄴ 전에 이어폰 끼고 있던데?

ㄴ그거 MP3ㅇㅇ

ㄴ그걸 들고 다니는 사람이 아직도 있????

ㄴMP3가 머에여?

-해시 그냥 장난으로 쓴 거 아님?

ㄴ나 친구 ㅅㅎㅇ팬인데, 쟤 저런 말 농담으로도 하는 성격 아니라고 함. 것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SNS에선

-ㅅㅎㅇ 좀 가식 냄새 짙지 않음? 친하게 안 지내는 게 좋을 것 가튼데..ㅋ

-아 나 ㅅㅎㅇ 개시른데...

ㄴ왜?

ㄴ그냥 싫음

서한율이 올린 SNS를 본 건 MOHE도 마찬가지였다.

안인섭이 이해원 옆에 앉아 핸드폰을 내밀었다.

“너 얘한테 뭐 흘렸냐?”

간만에 돌려받은 자신의 핸드폰을 살피던 이해원은 안인섭이 보여주는 서한율의 SNS를 보곤 한숨을 쉬었다.

“아까 봤잖아. 오늘에서야 번호 교환한 거.”

“전에 같이 프로그램 찍었을 때 말이야.”

이해원은 안인섭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재차 한숨을, 이번엔 더 크게 내쉬었다.

“나도 곤란해질 걸 내가 왜 얘기해.”

“그렇지? 우리 일이 전부 까발려지면 너도 바로 생매장인데, 우리 똑똑한 해원이가 그럴 리가 없겠지?”

“…….”

“참, 어머니 건강은 어때? 괜찮으셔?”

“…어.”

안인섭이 씨익 웃으면서 이해원의 어깨를 감싸듯 토닥토닥 두드렸다.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다정한 친한 형이었다.

“그래, 다행이다.”

* * *

<로얄K뮤직>은 출연하는 가수들의 비하인드 영상만 따로 모아 본방과 별개로 짧게 내보내기도 했다. 어스래빗도 사녹을 가기 전, 대기실에서 <있어>를 즉흥적으로 아카펠라로 불렀다. 다소 엉망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대는 세트 대신 대형 전광판과 조명으로 꾸며졌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스태프들에 이어 사녹 방청을 온 팬들을 향해서도 인사했다.

“안뇽, 이프림!”

“안녕하세요!”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꺄아아! 즐거운 환호성과 각양각색의 인사가 스튜디오에 울렸다. 마치 어제 불미스러운 일 따윈 전혀 없었다는 듯, 서로 밝은 모습이었다.

“팬 분들 환호성 좀 줄일게요!”

그러나 오늘따라 유독 팬들의 목소리가 컸다. 오디오에 음악소리보다 더 크게 잡혀, 어스래빗은 무대를 4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OK사인을 받았다.

퇴장 전, 박가람이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팬들에게 다가가 화냈다.

“우리가 아무리 보고 또 보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갈 때 핫도그 교환권 챙겨가는 거 잊지 말고! 차 조심하고!”

“다람아 사랑해엑!”

“나도 사랑한다!”

“…화내는 거야, 걱정을 하는 거야?”

“입 꼬리 올리고 화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생방송까지 끝난 후엔 PD와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고 대기실로 돌아와 라방을 켰다.

“안녕, 이프림! 컴백 이틀 째, 퇴근하기 전에 잠깐 라이브를 켜봤습니다.”

라방 중에도 어제 있었던 사건 언급은 피했다. 간만에 무대에 선 감정이나 여러 가지 잡담에 대해 떠들다가, 톡창에 올라오는 팬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제 곧 수능인데, 고삼즈 수능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멤버들의 시선이 차남석과 라이언, 강보배를 향했다. 강보배가 두 손을 교차하여 가슴 위에 살포시 얹었다.

“전 포기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보배 생긴 것만 보면 공부 진짜 잘할 것 같은데ㅋㅋㅋㅋ

-전교1등 싴크남처럼 생겨선

-나도 포기했어ㅎㅎㅎㅎ

-보배야 안경 한번만 써주면 안 돼?

라이언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대학 나중에.”

“나중에? 언제?”

“멤버들 군대 가고 한가해지면?”

“…이언아?”

-아닠ㅋㅋㅋㅋ너무 현실적이잖앜ㅋㅋㅋㅋ

-팀내 유일 군 면제자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너무행8ㅂ8

-아냐 그땐 라이언 너두 대인기스타가 돼서 엄청 바쁠 거양

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평생 못 가겠네.’

한국의 남돌은 미루고 미루다가 20대 후반이 되어야 입대하는 게 이 바닥의 정석이었다. 그러나 4년 후 게이트가 열리고 대혼란의 시기에 접어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면, 사지 멀쩡한 성인 남성 대부분은 군으로 강제 징집된다. 그때가 되면 대학 또한 언감생심.

‘교육 시스템이 다 무너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남는 게 우선인 세상이 될 테니.’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미루지 말고 지금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형?”

“학비도 비싸잖아. 돈도 많이 벌어야지.”

“남석이 넌?”

“저는 실기위주로 보는 곳 지원이라 별 걱정 없어요.”

“크으, 자신감!”

라방을 끝내고 나왔을 땐 어느덧 밤 10시였다.

“한율이랑 남석이 넌 내일 드라마 촬영 있지?”

“네.”

내일은 음방이 없는 날. 어스래빗은 유호와 라이언, 강보배와 박가람만 홍보 차 라디오 게스트로 나가기로 했다.

길우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없으니 학교가 너무 심심하오.”

조유찬이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미안하다, 우성아. 네 스케줄도 잡아주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아니, 그 말이 일하고 싶단 뜻은 아닌데.”

“심심하다며.”

“학생의 본분은 공부입니다, 형님.”

“아이돌의 본분은 연예계 활동입니다, 길우성 씨.”

한율은 생방 전부터 가방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살폈다. 오전에 올린 SNS엔 MOHE 멤버들, 특히 이해원의 사진을 프사로 해놓은 사람들이 해시태그에 넣은 112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잔뜩 달았다.

슥슥. 답글을 달지 않고 가볍게 스크롤을 밀던 한율의 손이 멈췄다.

-[Lee Haewon]고마워^^

“…….”

남들 앞에서만 핸드폰을 주는 척 하고 다시 압수하거나, 누구와 어떤 연락을 주고받는지 일일이 검사받을 지도 모른다. 매니저나 같은 팀 멤버가 이해원인 척 SNS에 글을 올리거나 대답할 수도 있고.

그러나 적어도 이 댓글은 이해원 본인이 단 것 같았다.

“형.”

걷는 속도를 높여 앞서가는 차남석의 옆으로 다가갔다.

“요즘도 은훤이 형이랑 연락해요?”

“어? 은훤이 형?”

꼭 놀란 사람처럼 차남석이 마주친 시선을 반대로 휙 돌렸다.

“가끔?”

한율은 차남석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반응이 조금 수상쩍다.

“잘 지낸데요? 그 형도 내년 대입 준비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 잘 지내는 것 같더라. 학원도 다니고, 오디션도 열심히 보러 다니고.”

“네.”

차남석의 반응이 이상했던 이유는 다음 날 밝혀졌다.

“안녕, 한율아.”

<별☆일없는 집>에서 그 지역 피아노 콩쿠르를 휩쓰는 예고 학생이자, 태바다를 업신여기는 재수 없는 단역 캐릭터 ‘김소리’.

김소리 명찰을 달린 교복을 입고 고은훤이 한율의 앞에 나타났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면서 인사하는 그를 보며,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에요, 형. 형 여기 나오는 거 어제 남석이 형한테 들었어요.”

고은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분명히 비밀로 해 달라고 그랬는데….”

“농담이에요. 지금 알았어요.”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연락 안 했는데, 네가 날 더 놀라게 하는 구나.”

“그나저나 형이 김소리 역이라니…. 단역치고는 너무 잘생긴 거 아니에요?”

“하하. 얼굴이라도 좀 잘생겨야 너한테 완전히 안 묻힌다고 하더라.”

몇 달 안 본 사이에 넉살이 늘었네.

한율도 살며시 웃곤 대본을 들었다.

그와 찍을 씬은 배경 설정에 비해 극히 짧았다.

예고에 입학하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성적도 갖춰야 한다. 그러나 본인의 형편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비싼 레슨비에 좌절하던 태바다. 그리고 그런 태바다에게 접근한 수상한 남성.

『정 그렇게 레슨을 받고 싶다면 내가 일대일로 가르쳐줄 수 있어. 레슨비는 이런 겉만 번지르르한 학원비의 절반만 받을 테니, 생각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 내 집은 저기 왕돈가스 가게 뒤쪽….』

그러나 태바다는 그에게서 짙게 풍기는 술 냄새에, 100% 사기꾼이라고 확신하며 받은 번호를 버린다. 하지만 학교에서 더 이상 피아노 연습을 하지 못하게 된 날, 학교를 뛰쳐나와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정처 없이 걷던 태바다는 문득 자신이 있는 곳이 수상한 남자와 만났던 피아노학원 앞이라는 걸 깨닫는다.

당시 들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수상한 남자의 집을 찾아간 태바다. 시끄러운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희미한 피아노 소리를 단서로 찾은 곳엔 초라한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날 이후 여차저차 수상한 남성, 자칭 전 피아니스트인 ‘김그림’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지 며칠.

“야, 잠깐.”

태바다는 김그림의 집에서 나오다가 김소리와 마주친다.

“너 혹시 이 집에 사는 아저씨한테 피아노 배우냐?”

“그런데요?”

고은훤이 아이돌지망에서 배우지망으로 진로를 바꾼 것은 알았으나,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

짧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옆얼굴에서 웃음으로 가린 분노가 슬며시 엿보인다.

“취미지?”

“대답해야 돼요?”

“싫으면 하지 마. 그런데 만약 입시나 콩쿠르 때문이면.”

한율이 그의 교복과 명찰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것처럼, 그 역시 한율을 위아래로 훑으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네 수준도 알 만하다.”

“뭐?”

난데없이 나타나 기분 나쁜 말을 던지고 퇴장.

당장 뭐라 되받아치고 싶은 말이었으나, ‘태바다’도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던 상태였다. 한율은 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가 머뭇거리며 닫았다. 그러곤 김그림의 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

실제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소리를 듣는 한율의 얼굴엔 ‘태바다’가 느끼는 여러 감정이 세밀하게 구현되었다.

“OK, 컷.”

한율은 고은훤과 함께 모니터링을 하고, 카메라 앵글을 바꿔서 다시 촬영했다. 짧은 씬이라 촬영은 금세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은훤은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한 후 한율에게 다가왔다. 이제 김그림 역을 맡은 중년배우 ‘고두필’과 한율의 씬 촬영이 있지만, 고두필이 아직 도착 전이라 여유가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형.”

“수고는. 짧은 씬인데 NG내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다.”

“연습 많이 하신 거 티 나던데요? 발성이나 딕션도 깨끗하고.”

“정말?”

두 살이나 어린 동생의 칭찬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하건만, 고은훤은 오히려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데 한율아.”

“네.”

고은훤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해원… 잘 지내지?”

“해원이 형이요?”

“아니, 뭐….”

고은훤이 멀리 시선을 던지며 딴청을 피우듯 말했다.

“전에 우연히 걔 나온 기사 봤는데 안색이 많이 썩었더라고. 그런데 어제 네 SNS에 같이 찍은 사진이 올라온 거 보고, 그냥.”

“형도 참 사람이 무르네요.”

“…….”

고은훤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고은훤과 이해원은 중학생 시절부터 친구사이였으며, 같은 기획사의 연습생 동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 출연 후 이해원은 거액의 계약금과 당장 데뷔할 수 있다는 안인섭의 말에 넘어가 JZ엔터와 고은훤을 등졌다.

안인섭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들려주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도 넘어갔으니, 어떻게 보면 오래된 친구를 제 욕망 때문에 배신한 셈. 이후 고은훤도 이해원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은 듯 보였으나, 1년이나 지나자 슬슬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혼자 고립된 것 같았어요.”

“…뭐?”

“손목 안쪽에 담뱃불로 지진 것 같은 흉터도 보이던데.”

“그게 정말이야?!”

덥석! 고은훤이 한율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물었다.

한율은 이쪽으로 쏠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곤 주변을 크게 살폈다. 그제야 고은훤도 잡았던 한율의 어깨를 놓았다.

“아, 미안….”

“괜찮아요.”

“하….”

고은훤이 제 머리를 손으로 거칠게 털면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인상을 구기며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욕.

“그래서 그렇게 말렸는데…. 이 멍청한 새끼….”

이 자식, 혹시?

“…….”

한율은 시선을 내리깔며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옛 생각이 났다.

빠르게 부와 명예를 쌓고 싶다면서 조국을 지고 타국의 귀족 밑으로 들어갔던 마탑 동기. 십 수 년이 지나 다시 재회했을 때, 그는 과거의 야망과 총명함을 잃어버린 그저 그런 하급 마법사로 머물고 있었다.

애초에 개인의 욕망을 위해 조국과 동료를 쉽게 등진 자를 누가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밀어주겠는가. 겉만 멀쩡한 반 썩은 당근을 던져주고 부린다면 모를까.

그는, 오랜만에 만나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해준 과거 동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당시의 선택을 후회한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이미 보이는 꼬락서니가 대신 말해준다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날 향한 암살 계획을 알려주고…, 섬기던 귀족에게 척살 당했지.’

그걸 발설하면 본인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자존감이 바닥까지 무너진 사람은, 본인의 감정의 늪에 빠지죠.”

주변을 둘러볼 여력도 없이 허우적허우적.

그러다 결국엔 자기만족의 파국을 선택한다.

도망치듯이.

“응?”

미간을 잔뜩 구긴 얼굴로 생각에 잠기려던 고은훤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고은훤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이제라도 한 대 후려갈기고 화해해요.”

어차피 게이트가 열리면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 그나마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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