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1월 11일 토요일 오후.
KBC <뮤직뮤직>이 방영되기 70분 전, MBS 케이블 채널 MBS K <주말아이돌>에서 어스래빗 편이 방송되었다.
[우리 어스래빗 친구들이 4월 14일, 데뷔했을 때부터 방송날짜 기준으로 거의 7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데, 멤버들은 뭐가 가장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의자 높이를 달리하여 두 줄로 앉은 어스래빗 멤버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키요.]
[키가 제일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원래 막내 라인 키가 비슷비슷했었거든요. 처음 한율이가 들어왔을 때만 해도 우성이보다 조금 작았었는데, 최근에 연습실에서 보니까 한율이가 좀 더 컸더라고요.]
[아흐윽….]
MC들이 기다렸다는 듯, 어스래빗 데뷔 초 프로필을 빼곡하게 적은 이동식 화이트보드를 끌고 왔다.
[자, 그러면 7개월 전 정보와 비교해보고 달라진 걸 수정해볼까요?]
여기에 각자 특기라고 적어놓은 걸로 MC들과의 게임을 빙자한 시간을 갖고, 먹고 싶은 간식을 걸고 애벌레 같은 침낭에 들어가 레이스를 펼치기도 했다.
[이번 코너는, ‘너에 대한 TMI’입니다. 멤버 두 사람씩 마주 보고 앉아서, MC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상대방이 대신 대답해주는 시간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호에 대해 물으면, 호 맞은편에 앉은 한율이가 대답하는 식으로.]
이아름은 두 손으로 꼭 쥔 핸드폰에 더욱 집중했다. 이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어스래빗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마신 음료와 조각 케이크 흔적만 남은 접시와 포크가 놓인 테이블엔 어스래빗 머리띠도 함께 놓여 있었다.
[한율아, 넌 쉴 때 뭐하니?]
화면 속 유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 한율이가 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
“풋.”
“큭.”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그리고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집중하던 소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쉬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쉬는 날이 전혀 없는 거 아니고?]
[쉬는 날이 가끔 있기는 한데, 그럴 때도 항상 회사 나와서 연습하거나, 숙소에서는 창 다 열어놓고 청소하거나… 등산을 가더라고요.]
[등산가는 게 쉬는 거 아냐?]
[등산이 어떻게 쉬는 거야, 몸 괴롭히는 건데!]
의견이 엇갈린 MC들끼리 떠드는 동안 서한율의 얼굴이 잡혔다. 어스래빗 팬에겐 익숙한, 희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
이아름은 그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한율이가 좋아하는 이상형은?]
[제가 보기엔!]
유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깔끔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왜죠?]
[한율이가 지저분하고 불성실한 사람을 그리 안 좋아하더라고요.]
“…….”
이아름은 시선을 내렸다. 그러곤 테이블에 흘린 조각 케이크 부스러기를 티슈로 슥슥 닦았다.
[아니, 그래도 멤버들끼리 모여서 TV같은 거 볼 때, 저 사람 괜찮다~ 이런 이야기 나누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여덟 명인데.]
[교과서적인 대답이 돌아올 걸 알면서도 아이돌에게 위험한 질문을 던져본다.]
[제보도 받습니까?]
[오! 한율이 친구이자 같은 막내가 손을 들었어요?]
[어, 우성이가 한 번 대답해볼까?]
길우성이 손을 내리면서 말했다.
[제가 실제로 써한한테 넌 어떤 사람이 좋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작년에. 그때 본인에게서 똑똑히 들은 말입니다.]
[뭐죠?]
[이프림 집중!]
서한율은 ‘내가 그런 질문에 대답한 적이 있었나?’ 의아해하는 눈으로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길우성이 짧고 굵게 대답했다.
[강한 사람.]
MC 둘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한 사람이요…?]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아.]
그제야 서한율이 생각났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마음을 뜻하는 겁니까, 아니면 육체적으로?]
서한율이 대답했다.
[둘 다요.]
[그럼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깔끔하고, 성실한 여성이 한율이의 이상형이구나!]
[말하자면 그렇죠?]
[…아니, 부정을 안 해?!]
[어째 표정이, 더 이상 말하기 싫으니까 대충 둘러대고 넘어가자, 이러는 것 같은데에?]
실시간 톡창에 이 방송을 함께 보고 있는 사람들의 톡이 빠르게 올라왔다.
-힘쎄고 강한 여자가 이상형이라니!!!!!!!!
-오늘 당장 헬스 끊는다
-우리 청순한 율톢 가지려면 여자가 강하긴 강해야지
-율톢이 어릴 때 특공무술 배웠다고 하지 않았나???
-투포환 계속 할 걸
-힘쎄고 강한 사이에 ‘예쁘고’가 빠졌을 거야....
-율톢 이상형은 국가대표구나...8ㅅ8
-나 율톢 이상형이 왜 힘세고 강한 여자인지 알았음ㅇㅇ 등산 같이 가려고
-다음 팬미팅은 북한산 정상에서 합시다^^
-북한산이 뭐임 한라산 정상ㄱㄱ (의욕충만)
<주말아이돌>은 이번 어스래빗 신곡 <있어> 무대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아름은 다음 주 예고편 영상이 뜨고 나서야 실시간 TV앱 채널을 KBC로 돌렸다. 다행히 <뮤직뮤직>은 아직 시작 전이었다. 어스래빗은 높은 확률로 앞 순서일 테니.
이아름은 이어폰을 빼면서 고개를 들었다. 비슷하게 고개를 든 다른 어스래빗 팬과 시선이 마주쳐 살포시 웃었다.
“진짜 우리 오빠들 주말아 나온 거 보니 너무 좋네요.”
“아까 건우랑 가람이, 서로 안 지려고 막 필사적으로 꿈틀꿈틀 몸부림치던 거 진짜 귀엽지 않았어요?”
굉장히 이른 시간에 있었던 어스래빗 사녹 방청 자리에서 처음 만났지만, 의기투합하여 같이 놀다보니 벌써 이 시간이었다.
그들은 <주말아이돌>에 나온 내용으로 신나게 떠들다가, <뮤직뮤직>이 시작되고 사녹 때 눈앞에서 본 어스래빗의 무대를 다시 화면으로 감상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언니 내일 1차 팬싸 뽑히셨다면서요? 진짜 부럽당….”
“난 아름이 네가 더 부러운데? 꽃토끼 때부터 팬이었다면서. 그럼 애들 다 너 기억할 거 아냐.”
“히힛….”
이아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뭐해영…. 오빠들 점점 인기가 많아지고 바빠질수록 멀어지는 것 같은데….”
“아냐. 그래도 서로 기억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언니랑 뇌 바꿀래?”
“히익.”
“그런데요, 세 분. 혹시 그 사진 봤어요?”
“무슨 사진이요?”
“이거요.”
카페를 나온 네 사람이 길 한쪽에 둥글게 모였다.
“지난번에 웬 미친 아이가 애들 팬미팅 와서 난리쳤을 때 찍힌 건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이 띄운 영상캡처엔 서한율이 찍혀 있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모습이었다.
세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준 소녀가 사진을 확대했다.
“봐요, 한율이 눈 색. 희미하게 파란색으로 물든 것 같지 않아요?”
“어? 진짜네?”
“뭐에 반사된 거 아니에요? 그때 촬영하던 카메라나 핸드폰이 워낙 많아서.”
“그렇겠죠? 그런데 되게 신비스럽잖아요. 타이밍도 그렇고.”
“헉, 혹시 율이 오빠….”
이아름이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외쳤다.
“마법사?!”
소녀들이 꺄꺄 웃었다. 상식적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좋아하는 아이돌을 두고 상상하는 건 뭐든 즐거우므로.
“그 상황에 화가 나서 분노의 바람을 막!”
“진짜 그런 거면 완전 쩔겠당!”
* * *
다음 날 12일. SBC의 스케줄을 마친 어스래빗 멤버들은 옷만 갈아입고 곧장 <있어> 싱글앨범 발매기념 1차 팬 사인회 장소로 출발했다. 주말 저녁이라 도로엔 차가 가득했다.
“은훤이 형이랑 이해원 서로 맞팔한 거 아냐?”
옆에 앉은 차남석이 고은훤의 SNS를 핸드폰에 띄워 보여주었다.
“아뇨. 화해했나보네요?”
“화해는 아니고, 은훤이 형이 술김에 팔로우했더니 바로 받아주더래. 난 네가 둘 사이를 중재했나 했지.”
“은훤이 형이 먼저 물었어요. 해원이 형 안색 안 좋아 보이던데, 잘 지내는 것 같냐고.”
“그 형도 참.”
한율은 보고 있던 <별☆일없는 집> 콘티 대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뒷좌석에 앉아있던 길우성이 덥석! 한율의 좌석을 잡았다.
“써한, 너 마법사설 돌더라?”
흠칫. 대본을 넘기던 한율의 손가락이 짧게 떨렸다.
“…뭐?”
“봐봐. 지난 번 미니 팬미팅 때 찍힌 네 사진. 눈이 파랗게 보여서, 이프림들 사이에 네가 마법으로 분노의 바람을 일으킨 거 아니냐란 농담이 돌아.”
한율은 길우성이 내미는 핸드폰을 받았다. 확대한 사진 속, 두 눈이 푸른색으로 물든 자신이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야. 다음으로 넘겨봐. 우리 처음 팬싸했을 때 무대에서도.”
다음 이미지는 첫 팬 사인회에서 팬들이 선물해준 머리띠나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스토커를 찾았을 때네.’
옆에서 함께 본 차남석이 말했다.
“이건 조명에 반사된 것 같은데? 같이 찍힌 조명색이랑 똑같잖아.”
그러다 아 하면서 한율에게 물었다.
“혹시 그때도 내 착각이 아니었던 건가?”
“그때?”
“작년에 너랑 보컬 나갔을 때. 그때도 잠깐 네 눈이 파랗게 보인 적이 있었거든?”
“그래요?”
“어.”
“그렇구나. 왤까요?”
“나야 모르지.”
처음 겪는 일인 것처럼 행동하는 한율의 반응에, 차남석은 신기하네, 이러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핸드폰을 돌려받으며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고양이 눈이 빛나는 거랑 비슷한 원리인가? 아닌데? 사람 눈에는 휘판이 없는데? 딱히 어둡지도 않았고.”
“휘판? 그게 뭔데?”
“고양이 휘판으로 검색하면 나와염.”
한율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면서 다시 대본을 들여다보았다.
이 세계에서 마법은 허구 속에만 존재한다. 완전히 상식 밖의 일이라, 눈 색이 파랗게 빛나든 붉게 빛나든 가끔이면 팬들처럼 우스갯소리로 떠들거나 차남석 정도의 반응이 고작.
길우성이 뒷자리에 다시 얌전히 앉으며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써한 이 자식, 혹시 렙틸리언인가 뭔가 그거 아니야?!”
팬 사인회는 지난번처럼 당첨된 100명에 한해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2시간 내내 웃느라 나중엔 얼굴 근육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큰 트러블 없이 무난하게.
회사로 돌아온 후 조유찬이 멤버들에게 말했다.
“다들 씻고 30분 후에 연습실로 모여. 크리스마스 스페셜 앨범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 있을 예정이니까.”
“네엡.”
“크래 멤버들도 같이 들을 거니까 안이 비치는 옷이나 반바지처럼 너무 편한 옷은 피하고.”
“네엡.”
30분 후. B연습실로 오동식 팀장과 크래 멤버 7명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네, 실례하세요.”
“누나 머리카락 어쨌어? 왜 단발이야!”
“길우성, 조용.”
토끼돌끼리 어색하거나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오 팀장은 연습실 구석에 비치된 이동식 유리 화이트보드를 끌고 왔다.
크래 멤버들이 신기한 얼굴로 B연습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와, 여기 진짜 간만에 들어와 본다.”
“뭔가 아기자기한 게 잔뜩 있어!”
“호, 저건 뭐야? 봉투로 꽁꽁 포장된 거.”
“아, 그거… 우리가 만든 인형.”
“여기 우리 연습실보다 더 깔끔하당…. 좋은 향기도 나.”
“머리카락 왜 잘랐냐고!”
“길우성, 시끄럽다.”
짝짝. 보드를 적당한 위치에 세운 오 팀장이 박수로 주의를 끌었다.
“다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여러분이 함께 할 일정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래 분들도 자리에 앉아주세요.”
팬이 준 선물이에요
15명의 아이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오 팀장이 보드마커를 들었다.
“가이드 곡을 들려드리기 전에, 날짜별로 설명하겠습니다. 12월 15일에 발표할 토끼돌의 <눈밭의 산타토끼>는 디지털싱글로만 나올 예정으로, 녹음은 27일과 28일에 걸쳐서. 앨범 재킷과 뮤비 촬영은 다음 달 5일에 한꺼번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19일 <락뮤닷> 크리스마스 특집방송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무대에 서며, 미리 고지한 대로 따로 안무는 없습니다. 여기까지, 질문 있으신 분?”
크리스탈 래빗의 리더인 라나가 손을 들었다.
“정말 하루에 재킷이랑 뮤비를 다 찍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곡의 음원수익은 전액 기부될 예정이라, 예산을 적게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들 바쁘기도 해서, 세트를 몇 개 설치한 스튜디오에서 간소하게 찍기로 했습니다. 실물 앨범도 관계자 배포용으로만 소량제작될 예정이고.”
그 외에도 오 팀장은 크리스마스 봉사활동이나 기부를 목적으로 한 플리마켓 이벤트에 대해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눈밭의 산타토끼> 가사지를 나눠준 후 가이드 곡을 들려주었다.
“오, 좋다.”
“뭔가 몽글몽글한 느낌이네.”
“레슨 및 연습 스케줄은 개별적으로 안내될 겁니다. 파일은 각 팀 단톡방에 올릴 테니 유출 안 되게 조심, 또 조심하시고.”
“네엡!”
“네!”
래퍼처럼 정확한 발음에다가 말하는 속도도 빨라, 브리핑은 20분도 지나지 않아 끝났다.
“그럼 이만,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래 멤버들은 어스래빗 멤버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차례차례 연습실을 나갔다.
미랑이 나가려다말고 박가람을 돌아보았다.
“박가.”
“엉?”
“너 요즘 김진수하고 연락한 적 있어?”
박가람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은 아니고, 4월 달에 잘 지내나 궁금해서 한 번 연락한 적은 있어. 그때 그놈이 나 안 볼 것처럼 엄청 까칠하게 굴어서 그 뒤론 안 했지만. 왜?”
“김진수가 누구야?”
미랑은 중간에 끼어든 길우성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콩영이 클럽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애가 이상하게 변했다고 하더라고.”
박가람이 미간을 구겼다.
“클러업?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클럽엘 다녀?”
“콩영은 전부터 디제잉 배우고 싶다 그랬었잖아. 그거 배우러 갔다가 봤대. 술에 완전 떡이 되도록 취해서, 자기 이제 곧 빵 뜰 거니까 지금부터 잘 보이라는 둥 횡설수설. 아무튼 알았어. 앞으로도 연락하지 마. 그 얘기 들으니까 느낌 안 좋더라.”
“구랭.”
“콩영은 누구야? 동창?”
미랑은 길우성의 머리를 툭 누르듯 쓰다듬고는 그대로 연습실을 나갔다. 길우성은 질문의 타깃을 박가람으로 돌렸다.
“동창 얘기야?”
“넌 형님들 얘기가 뭐가 그리 궁금하냐.”
“형님들이라니. 미랑 선배님은 남자가 아니잖아.”
강보배가 소심하게 끼어들었다. 박가람이 별 싱거운 소릴 다 듣겠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쟨 나한테 동성이랑 마찬가지야.”
한율은 그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면서 가사에 적힌 본인 파트를 확인했다. 1절에 라나와 함께 부르는 파트가 있고, 2절은 단독 파트. 후렴구는 다 같이. 인원이 많다보니 분량은 다들 고만고만했다.
“서한율, 숙소 안 가?”
이제 막 11시가 된 참이었지만, 오늘은 새벽 1시에 일어나 방송국으로 갔던 터라 굉장히 피곤했다. 그리고 내일은 드라마 촬영.
한율은 가사지를 접으며 차남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야죠.”
숙소 거실엔 오늘 팬 사인회에서 받은 선물이 놓여 있었다. 멤버들이 회사에 있을 때 다른 매니저들이 가져다 놓은 모양. 멤버들은 각자 이름이 적힌 박스 앞에서 선물을 정리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다음 달에 있을 플리마켓엔 뭘 내놔야 좋을까? 딱히 내놓을 게 없는데….”
다달이 회사에서 용돈이 나오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용돈 수준이라 본인을 위한 소비를 넉넉히 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플리마켓에 내놓을 만한 물건도 딱히 없고.
“집에 한번 갔다 와야 하나….”
“어차피 우리 물건은 그리 기대 안하니까 부담 갖지 말라고 팀장님이 그러셨잖아. 대신 미니 콘서트나 진행보조를 도우면 된다고. 그리고 다른 기획사 분들도 같이 하는 이벤트니까 괜찮을 거야.”
한율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박스 앞에 앉아 안에 든 선물을 모두 꺼냈다. 지난번 팬 사인회 땐 화장품 선물을 많이 받았었지만, 지금은 더순한화장품 전속모델이 되어서 그런지 화장품 종류는 더순한화장품에서 나오지 않는 핸드크림과 향수가 고작이었다. 대신 겨울에 쓸 만한 용품이 많이 들어왔다. 목도리, 핫팩, 수면양말, 장갑 등. 이 외에도 옷과 신발, 팔찌나 귀걸이도 있었다.
‘집으로 보낼 만 한 건.’
당장 쓸 만한 실용적인 물건은 따로 빼두고, 인형이나 머리띠처럼 이곳에 두기엔 자리가 마땅치 않은 물건은 도로 박스에 넣었다.
“한율이가 팬싸에서 받는 선물들 보면.”
빠르게 정리를 마치고 어슬렁거리던 이건우가 한율의 선물 박스를 보며 웃었다.
“그동안 선물 주고 싶었던 걸 참았던 팬들의 벼르고 별렀던 마음이 느껴져.”
“…하.”
그때 옆에서 비슷하게 선물 박스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하던 차남석이 미간을 구겼다.
“왜 그래, 남석?”
“……?”
한율도 의아한 얼굴로 차남석을 보았다. 다른 멤버들도.
“양말 세트 사이에.”
차남석이 열었던 종이상자를 툭 덮었다.
“여자 속옷이 섞여 있어.”
“아이고….”
“미자한테 뭔 짓이야.”
“본인인증 거친 당첨자 상대로 연 이벤이라서 조금만 조사해도 누가 준 건지 다 나오는데, 대체 무슨 만용으로 그런 걸.”
유호가 소파 옆을 가리켰다.
“여기에 따로 둬. 내일 아침에 팀장님한테 말할게.”
“네.”
차남석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상자를 소파 옆에 툭 던지듯 놓았다. 팬이 준 사슴뿔 머리띠를 한 길우성이 차남석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다음 날, 한율은 팬이 선물해준 티셔츠 위에 플리스 재킷을 걸쳤다. 어차피 드라마 촬영을 할 땐 교복 아니면 협찬으로 들어온 의상을 입어야 하지만, 티셔츠를 선물한 팬이 꼭 착장샷을 보고 싶다고 한 까닭이었다.
“…와.”
인천으로 가기 전, 조유찬이 운전하는 차는 박현우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 멈췄다. 박현우는 차를 타자마자 한율의 옷을 보곤 입가를 올렸다.
“그 티셔츠 엄청 깜찍하다? 꼭….”
“팬이 준 선물이에요.”
“어, 그래.”
막 놀리려던 박현우가 김이 샌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한율은 차창을 열었다. 푸른 새벽하늘 아래, 그림자로 물든 크고 작은 건물들과 한적한 도로.
한율은 핸드폰의 카메라 앱을 켜서 박현우에게 내밀었다.
“티셔츠 잘 나오게 사진 좀 찍어주세요.”
“…….”
박현우는 말없이 핸드폰을 받았다. 그러곤 비스듬히 몸을 돌리고 앉아 차창 아래에 팔꿈치를 댄 채 고개를 기울인 한율을 찍었다.
찰칵.
“됐냐?”
한율은 찍힌 사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잘 찍혔네요.”
“수고비는?”
“핫팩 하나 드릴까요? 많이 있는데.”
“필요 없어.”
그럼 말고.
한율은 SNS에다 사진을 올렸다.
[선물 받은 티셔츠 입고 드라마 촬영장 가는 길. :) #예쁜새벽하늘, #박현우씨가찍어줌, #이프림이번주도홧팅]
금세 댓글이 달렸다.
-호랑이 타고 호령하는 왕관 쓴 톢이=서한율
-직접 제작한 티셔츠 같은데ㅎ 선물해주신 분 진짜 뿌듯하시겠다ㅜㅜ
-숨 쉬듯 자연스러운 율톢의 찐팬사랑♡♡♡
-박현우 씨가 찍어줌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 팬싸 끝나고 늦게 들어갔을 텐데 새벽부터ㅠㅠ... 오늘도 몸 조심히 촬영 잘하구 와(´•‿•`)♡
“아, 형.”
SNS 댓글을 확인하는 한율을 뚱한 얼굴로 쳐다보던 박현우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 분 기억나요? 사고 냈던 스태프 분 동생. 형이 비오는 날에 병원까지 데려다 준 사람이요.”
“어, 왜?”
“어제 그 분이 촬영장에 오셨는데, 그땐 경황이 없어서 형 연락처를 못 물어봤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대신 전해달래요.”
어스래빗이 컴백하면서, 박현우의 케어는 매니지A팀 소관이 되었다. 오늘은 한율과 박현우가 함께 찍는 씬 촬영이 많아 조유찬만 나오고.
“아아. 몸은 괜찮아 보였어? 한동안 안 보였었잖아.”
“다친 분들한테 줄 합의금 보태주려고 막노동 뛰고 있었대요.”
조유찬은 안타까운 얼굴로 탄식을 흘렸다.
“아….”
촬영장에는 스타믹스의 지헌이 먼저 와 있었다. 밤새 촬영하고, 근처 호텔에서 잠깐 씻기만 하고 다시 나왔다고. 추위를 많이 타는지, 그는 양손에 귀여운 곰발바닥 모양 장갑을 끼고 있었다.
“왔어? 활동이랑 겹쳐서 피곤하지?”
“선배님이 더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하하….”
“그 장갑은.”
“팬 분이 준 선물. 너도 티셔츠 귀엽다, 야.”
오늘도 큐시트가 빽빽했다. 짧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준비된 의상으로 갈아입고, 아주 가볍게 메이크업을 받은 후 곧바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 * *
MBS 시사교양국 팀 사무실.
양주경 PD는 막 출력한 기획서를 정리해서 팀장에게 내밀었다. 팀장은 첫 장에 크게 적힌 주제를 확인하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돌 사생, 눈 먼 사랑인가 소유욕인가?”
“최근 뮤닷 앞마당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시끄러웠었잖아요. 좋아하다가 틀어진 마음을, 다른 아이돌 팬 미팅자리에서 난리를 치는 식으로 푼 건 정말 상식 밖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상식도 넘고 선도 넘는 일들이, 아이돌 쪽에선 흔히 벌어진다고 하더라고요.”
팔랑팔랑. 팀장은 양PD가 찾은 다른 아이돌 사생팬의 심각한 범죄행위와 피해사례를 훑었다.
“…아. 작년에 크리스탈 래빗 이 친구 피습미수사건도 있었죠? 이거 범인도 사생이었나?”
“네. 그때 범인을 조사했던 경찰서의 아는 사람에게 들었는데, 이 걸 그룹 숙소 공동현관 비번을 누르고 들어가서, 숙소 현관문에다가 계속 꽃다발 같은 걸 걸어놓고 그랬대요. 들어가려는 시도도 몇 번 한 적 있었고. 그리고 뒷장에 보시면, 이건 정말 최근에 들어온 정본데요.”
사락. 양PD가 직접 장을 넘겼다.
“제일 첫 번째로 기재한 사례인 MOHE 안티팬 피해그룹인 어스래빗. 여기 서한율이란 친구가 얼마 전에 사생 팬을 고소해서 법정까지 보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형사재판 결과 나왔고, 지금은 민사 진행 중.”
“오호.”
그제야 시큰둥했던 팀장이 관심을 표했다.
“세게 나갔네요?”
“네. 그러니까 MOHE 사건으로 시작해서, 어스래빗으로 자연스럽게 토스. 그리고 이 사생 팬을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고소하게 되었는지….”
“걘 우리가 건들기엔 좀 그렇지 않아요?”
팀장과 양PD의 시선이 퀭한 눈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가를 향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강 작가님?”
강 작가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번엔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달칵, 달칵.
“어스래빗 서한율 걔, KBC 시사교양국장 아들이라던데.”
“…네?”
“그게 정말이에요?”
“제 친구가 그쪽에 있잖아요. 얼마 전에 상사 대신 뭐 제출하러 갔다가 우연히 국장 책상을 봤는데, 가족사진 액자에 서한율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평소 아이돌에 관심이 많아서 한눈에 알아봤다나.”
강 작가의 말에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보다가 동시에 말했다.
“그럼 더 따야지!”
“그럼 더 따야죠!”
“서석진, 서한율…. 맞네, 성이 똑같네.”
“아이돌들이 왜 사생 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처벌을 주저하겠어요? 자칫하다간 팬심을 집착으로 몰았다고 역풍 맞을까 두려워서 그런 거지. 팬들이 등을 돌리면 수입이나 활동에 큰 지장이 생기니까.”
팀장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대형 기획사나 정상급 아이돌 아니고선 어렵죠. 그런데… 중소 기획사의 신인 아이돌이 합의는커녕 형사재판까지 끌고 가서 땅땅! 빨간 줄을 그었다. 하지만 이건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자라, 아버지 지위도 있어서 가능했던 마땅한 법적대응이었다. 이런 식으로, 역풍이 두려워 입을 다물거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솜방망이 처벌로 마무리해야했던 다른 피해자들을 더 부각시킬 수 있겠네요.”
“그럼 바로 인터뷰 문의 넣을까요?”
양PD가 기대어린 시선으로 팀장에게 물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연락 해봐요. 아빠가 국장이란 걸 알고 있단 소리는 빼고.”
엣헴
“기다려, 내가 금방 밥…. 우욱.”
“…….”
제대로 안 말린 젖은 머리칼에 교복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오던 태바다는, 벽을 짚으며 비틀비틀 화장실로 달려가는 태하늘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밤새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야.
곧 화장실에 먼저 들어가 있던 태산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우….”
태바다의 손이 빠르게 핸드폰을 조작했다.
평소 존경하던 피아니스트가 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장이 크게 울려 퍼지면서,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리를 가렸다.
“하….”
그러다 무심코 스친 시야.
“……!”
태바다는 놀란 얼굴로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데굴, 툭. 싱크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던 달걀을 아슬아슬하게 캐치.
휴. 태바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굽혔던 몸을 폈다.
“…….”
식사준비를 위해 어질러진 조리대. 거기엔 얼룩이 번져 지저분한 수첩도 놓여있었다. 거친 필체로 적힌 건 오므라이스와 된장국 조리법.
이 집에 온 이틀째 되던 날. 태하늘이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들 어릴 때 오므라이스 엄청 좋아했잖아. 가족끼리 다 같이 외식 갔을 때 서로 그것만 먹겠다고 다투고, 안경 쓴 펭귄 얼굴 그려달라고 하고.』
“우리 나이가 몇인데….”
툭. 태바다는 달걀을 안전한 곳에 두곤 등을 돌렸다.
잠시 후, 태하늘과 태산이 피곤한 얼굴로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태바다는 일찍 집을 나가고 없었다.
“대체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신 거예요?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을 하네.”
“어제 알바 끝나고 오는 길에 우연히 옛날 친구를 만났거든. 반가운 마음에 같이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까.”
정말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
태산은 복잡한 표정으로 태하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형, 보험금에 대해서 태바다한테 사실대로 말하는 거 어때요? 아빠는 보험 해약한 지 오래되어서 보험금 자체가 없고, 엄마 보험금 수익자는 새로 혼인 신고한 아저씨였던 데다가 재산 없이 빚만 있었던 상태라… 오히려 장례비로 마이너스가 났다고.”
태하늘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바다가 아예 꿈을 포기할 것 같아서 그래.”
“…….”
“바다 학원비는 내가 어떡해서든 마련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웃으며 말하는 태하늘의 얼굴엔, 대신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체념도 깃들어 있었다.
“OK, 컷.”
잠깐 물러나서 촬영을 구경하던 한율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설을 대신해 투입된 지 3주. 예상했던 대로 지헌의 연기는 조금씩 캐릭터에 물들어가며 나아지고 있었다.
두 배우와 모니터링을 한 감독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지헌 씨는 잠깐 쉬고, 씬25로 넘어갈게요.”
촬영은 이른 아침부터 자정 넘게 진행되었다. 다른 배우들은 중간에 대기하면서 쉬기도 했지만, 한율은 그동안 찍지 못했던 분량을 찍어야 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카메라 앞에서 보냈다.
극중 배경시간이나 촬영허가를 받은 장소와 시간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주연인 지헌과 박현우와 함께 나오는 씬을 우선으로 진행. 그 다음엔 조연, 단독 씬 순으로.
“그래도 한율 씨가 NG를 거의 안 내서 천만다행이지.”
“척하면 척이라서 우리만 정신 바짝 차리면 돼.”
오늘 찍을 마지막 씬은 ‘김그림’의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콩쿠르 참가 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극중 배경시간은 해가 지지 않은 오후였으나, 피아노가 놓인 방이 방음벽으로 둘러져 외부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야간 촬영이 가능했다.
“잘 부탁드려요, 형.”
한율은 피아노연주 대역 ‘주명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드라마 출연이 결정된 후부터 ‘태바다’가 연주해야 하는 곡을 몇 달간 집중적으로 배우고 연습하기는 했지만, 어려운 곡은 그에게 맡겨야 했다.
“네.”
주명석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현재도 대학에서 피아노학과를 전공 중인 대학생으로, 스태프 중 누군가의 사촌동생이라고 했다. 한율과 체격이나 손 크기, 피부 톤도 얼추 맞아 전 감독이 바로 뽑았다고.
쌍둥이처럼 똑같은 옷을 걸친 그의 촬영이 끝나면, 그나마 쉬운 연주는 직접 치고, 어려운 곡은 상반신과 손이 함께 나오는 짧은 부분만 치거나, 치는 척 손과 시선을 움직이며 연기했다.
“OK, 컷! 오늘 촬영 종료! 수고하셨습니다!”
모니터링까지 모두 마쳐 감독의 입에서 철수 지시가 나온 건 새벽 2시가 넘어갈 무렵.
“수고하셨습니다! …형, 몇 시에 왔어요?”
인천으로 올 땐 박현우와 함께였으나, 박현우는 저녁에 촬영이 모두 끝나 먼저 퇴근했다. 새벽부터 어스래빗 스케줄을 챙겨야 하는 조유찬도 함께. 대신에 윤승우가 교대로 왔다.
“30분밖에 안 됐어. 일찍 잤다가 온 거니까 졸음운전 걱정은 안 해도 괜찮아.”
입사 초반엔 많이 과묵했었으나, 몇 달간 함께 일하는 동안 조금씩 대화가 늘었다.
“네.”
한율은 조유찬이 자리를 비운 동안 ‘태바다’의 가방에 넣어둔 지갑과 핸드폰을 꺼냈다. 옷을 갈아입고 감독과 스태프들, 다른 배우들과 주명석에게 인사를 한 후엔 텅 빈 차 뒷좌석에 편히 앉았다.
“락뮤엔 몇 시까지 출근이에요?”
“바로 뮤닷으로 가면 될 것 같아.”
…철컥. 한율은 입을 다물고 안전벨트를 맸다. 가는 동안이나 드라이리허설 후에 쪽잠을 자면 되겠구나.
그리고 자려고 좌석을 뒤로 넘기려는데, 룸미러를 통해 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형?”
“…아니, 그냥. 대단하다 싶어서.”
“다들 이러고 사는데요, 뭘.”
“그래도 힘들다고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아서 그래. 배고프고 졸릴 텐데 짜증도 한 번 안 내고.”
“그런다고 피로가 해소되진 않잖아요. 더 피곤해지고 주변사람들하고 감정만 상하지.”
윤승우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한율은 좌석을 뒤로 넘기고 옆에 놓인 담요를 집었다.
“전 잠깐 잘게요.”
“그래.”
우웅. 히터가 가동되고 곧 차 안의 공기가 훈훈해졌다. 한율은 불편함 속에서 최대한 편한 자세를 잡아 짧은 잠을 청했다.
잠시 후 뮤닷의 <락뮤닷> 대기실 앞 복도.
유호가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서 한율을 맞이했다. 그 옆에는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는 차남석이 있었다.
“드라마 촬영하고 오느라 수고했어.”
“징그럽게 왜 이러세요.”
“보셨죠? 한율이가 원래 이렇게 애교가 없습니다. 상남자에요.”
유호는 예상했다는 듯 웃으면서 한율의 어깨를 감싸듯 툭툭 두드렸다.
“너 오면 준다고, 라이언이 컵스프 챙겨왔어.”
이번 주 잡힌 음방도 모두 MOHE와 겹치지만, 다른 대기실로 배정받았는지 문 옆 명단엔 빠져있었다. 한율은 하나 같이 졸린 상태인 멤버들과 인사를 한 후 라이언이 내미는 따뜻한 컵스프를 받았다.
“잘 먹을게요.”
“응. 하나 더 있으니까 모자라면 얘기해.”
“그럼 미리 하나 더 주세요.”
어제 저녁을 부실하게 먹어서 배고팠다. 라이언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응. 그거 다 마시고 얘기해.”
“써한, 너 어제 호 형이랑 가람이 형 나갔던 프로 못 봤지? <아이돌 장학퀴즈쇼>.”
길우성이 옆에 앉더니 사과패드를 내밀었다.
“가람이 형이 골든 벨 직전까지 가서, 실검에 잠깐 우리 팀이랑 가람이 형 이름 올라갔었다? 촐싹거려서 공부 못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아는 거 많다고.”
박가람이 한율의 앞에 뒷짐을 지고 와서 알짱거렸다.
“엣헴.”
“녹화하고 2주 동안 입이 근질근질했을 텐데, 용케도 잘 참은 듯.”
“엣헴.”
“그럼 상금은?”
“골든 벨을 울리면 백만 원이었지만, 직전에 떨어져서 한우 불고기 세트 교환권만 받아왔음. 그런데 그거 좋은 곳에 기부함.”
“엣헴.”
“박가람 감기냐? 왜 자꾸 기침해.”
박가람은 이건우를 무시하며, 한율에게로 시선을 내리깔면서 거들먹거렸다.
“빨리 잘했다고, 형님 멋지다고 칭찬을 하란 뜻이다. 엣헴.”
한율은 별말 없이 스프를 후룩 마셨다.
“…….”
“엣헴!”
“가람아, 목 상한다. 그만 해라.”
한율이 MBS 제작진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다음 날인 15일, <로얄K뮤직> 스케줄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온 후였다.
2층 사무실 내 회의실. 오 팀장이 테이블에 기댄 채 말했다.
“단순히 기사로 나가는 거랑은 파장이 비교도 안 되게 클 것 같아서, 일단 인터뷰는 거절했어.”
“그래도 언젠가 밝힐 걸 염두에 두고 민사까지 진행한 거잖아요.”
“한율이 너도 이번 연락 아니었으면 당장 밝히자고 하진 않았을 거잖아.”
“그렇죠?”
슬슬 선을 넘으려는 팬 몇 명이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강한 경고까지 날릴 정돈 아니므로.
“우리도 그래. 우리한테 필요한 적절한 타이밍이다 싶을 때 내보내는 게 좋지, 지금 이런 식으로 알리는 건 아닌 것 같아. 당장 방송을 본 대중들은 잘했다고 칭찬할지 몰라도, 팬들은 위축될 테니까. 메리트가 없어.”
“그럼 라나 선배님 일만?”
“음, 라나는 동의했다고 하더라고. 단, 인터뷰는 직원이랑 당시 법률자문을 해줬던 로펌 변호사가 대신 하는 걸로. 라나가 직접 나서면 그런 변태가 꼬이도록 행동을 했을 거라느니, 예쁘면 감수해야 한다느니 지껄이는 정신병자들이 또 몰려들 테니까.”
“다른 선배님들은요? 사생이 또 있는 것 같던데.”
오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없다는 뜻이 아니라, 라나 외에 사생에게 피해를 당한 멤버 이야기를 방송에 내보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다른 회사 분량도 줘야지.”
“MOHE랑 VEL엔터요?”
그 사건을 접하고 기획한 것처럼 시기가 맞아떨어지니.
“PD는 어떤 회사와 인터뷰 중인지 알려줄 수 없다고 했는데, 타이밍이 그렇잖아. 그래서 VEL엔터에도 연락이 갔을 거라 생각하고 그쪽에 연락해봤더니, 방송국에서 그런 연락 받은 적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
“거짓말 같네요.”
“그런 것 같지?”
VEL엔터라면 허위신고자와 공범이 MOHE 멤버들 중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터다. 그러나 방송에까지 직접 나와 그녀를 또 사생팬이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한다?
어떻게든 잘 구슬려 입을 막은 허위신고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 밖에 더 되는가.
“하긴. 자칫하면 다른 MOHE 팬들도 싸잡아 욕먹고, 그룹 이미지도 나빠질 수 있으니 이해는 간다만.”
한율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납득. 그러나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하는 척했다.
“어쨌든 얘기 끝. 씻고 3층 D연습실로 가. <눈밭의 산타토끼> 노래 연습 있을 거야. 너무 피곤하면 잠깐만 하고 숙소로 가서 자고.”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한율이 너도 오늘 하루 수고 많았어.”
한율은 사무실을 나가면서 생각했다. 아이돌 사생을 다루는 기획 프로그램이면, 블블 쪽에도 인터뷰 요청이 가지 않았을까?’
포털사이트에 ‘블블 사생’만 쳐도 관련 기사만 수십 건이다. 고래위키에도 블블이 사생에게 당한 피해사례 페이지가 따로 개설되었을 정도.
우웅.
‘양반은 못 되네.’
블블 민준으로부터 톡이 왔다.
-[이번 주로 활동 끝이지? 쉬는 날 언제야?]
[내년 1월이요.]
-[밥 먹자ㅎ]
-[...................]
간발의 차로 미묘하게 엇갈린 대화.
-[ㅜㅜ]
-[연말 무대에서나 보겟구나...]
[그때 봬요, 선배님. :)]
-[ㅇㅇ]
블블이 요즘 한가한가?
한율은 가벼운 의문을 떠올리며 휴게실 문을 열기 위해 출입증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