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427)

* * *

민준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핸드폰을 내렸다. 그러곤 탁상달력을 집어서 팔랑팔랑 넘겼다. 작년 이맘때는 앨범 준비와 연말 콘서트, 해외 스케줄, 방송 스케줄 등으로 달력이 지저분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일정이 드문드문했다.

그나마 이것도 예전부터 잡힌 콘서트와 그린라이브 콘텐츠 녹화 일정으로, 방송 스케줄은 연말의 음방이나 뮤닷의 RMMA를 제외하곤 전혀 없었다.

‘방송 섭외가 전혀 안 들어오는 건가? 아니면 수재 형 말처럼 정말….’

“민준, 뭐 하냐?”

똑똑, 벌컥. 같은 그룹 멤버인 산우가 노크 직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준은 뚱한 얼굴로 탁상달력을 내려놓았다.

“노크를 하면 사람의 대답을 듣고 문을 여는 게 예의 아냐? 내가 이 말을 몇 번이나 더 해야 돼.”

산우는 민준의 항의를 무시하며 용건을 말했다.

“내일도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집이나 보러 가자.”

“너 혼자 살 집을 왜 나랑 보러 가세요.”

데뷔한 지 5년. 돈도 어느 정도 벌었겠다, 슬슬 숙소를 벗어나 독립을 할 시기이긴 했다.

“너도 어차피 내년에 독립할 거잖아. 집은 몇 달 전부터 직접 발품을 팔면서 보러 다녀야, 정말 자기한테 맞는 집 하나 찾을까 말까 한다고 하더라. 혹시 아냐? 나랑 보러 다니면서 네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할지?”

그 말을 듣자 민준은 귀가 솔깃해졌다.

“몇 시에 나갈 거야?”

지워

토요일. KBC <뮤직뮤직> 스케줄을 나온 한율은 아침에 잡힌 사녹만 참여하고 홀로 방송국을 나가 인천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찍어야 하는 촬영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별☆일없는 집> 제작진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학교 촬영이 주말만 가능한데 지난주엔 촬영을 전혀 못했으니. 내일도 하루 종일 스케줄이 있고.”

“본방 무대에서 빠진 건 처음인데, 괜찮겠죠?”

한율은 달리는 차 안에서 클렌징 티슈로 메이크업을 슥슥 지우며 물었다. 머리는 학교에서 감으면 될 터.

“네 안무 자리는 안무 쌤이 검은색 옷 입고 나가서 채우고, 노래도 호랑 가람이가 나눠서 부르는 걸로 어젯밤에 미리 연습 했잖아. 그리고 방송엔 사녹 분이 나가니까 괜찮을 거야. 팬들한테 미리 공지하기도 했고. 나중에 SNS로.”

조유찬이 잠깐 말을 쉬었다가 이었다.

“본방 무대에 오르지 못해 미안하다고, 귀엽게 사진 하나 올리면 괜찮지 않을까?”

찰칵.

“응? 벌써 찍었어?”

“마침 얼굴이 아수라백작처럼 반반이 되어서요.”

얼굴 왼쪽만 깔끔하게 무대 메이크업을 지운 상태. 어스래빗의 한율에서 <별☆일없는 집> 태바다가 되러 간다고 쓰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한율아.”

조유찬이 살펴보지도 않고 한율을 달래듯 말했다.

“아무리 민낯에 자신 있다고 해도 그런 사진은 올리는 거 아니야. 사진 지워.”

안 되는 건가.

“네.”

한율은 셀카를 찍느라 올렸던 핸드폰을 내렸다. 그러나 사진은 지우지 않았다. 언젠가 팬 서비스 용으로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해서.

“전 노래 좀 들을게요.”

“응.”

한율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밭의 산타토끼> 파일을 재생했다.

우웅. 그때 들어오는 차남석의 톡.

-[너 민준 선배님한테 이거 관련해서 얘기 들은 거 있어?]

“……?”

이어서 올라온 기사 링크를 누르자, 큼지막한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블블 해체 수순?! 수재와 민준, 군 입대 암시]

[2012년에 데뷔하여 최근 해외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보이그룹 ‘블랙블러드’의 전속계약 만료가 5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블블 멤버 전원이 고동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하여 그룹을 유지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18일 새벽 블블의 리더인 수재가 SNS에 ‘여름에 들어가면 고생한다던데….’ 라는 글과 함께 총을 든 인형 사진을 올리고, 같은 팀 멤버인 민준이 ‘가을에 같이 가자니까ㅎ’ 라는 댓글을 달아 두 사람이 함께 군 입대를 준비 중이란 추측이 무성하다.

앞서 블블의 멤버이자 최근 개봉한 영화에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산우는, 배우 전문기획사 관계자와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앗싸일보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한편 커뮤니티사이트의 블블 게시판에는 아티스트의 휴식권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으며, 콘서트와 팬미팅, 팬 사인회 티켓, 굿즈 등의 판매를 위한 과도한 상술, 악플과 허위사실유포, 도를 넘어 범죄까지 저지르는 사생팬을 방치하는 고동엔터테인먼트와의 결별을 응원하는 글이 줄을 잇고 있다.

고동엔터테인먼트 측은 “블블 멤버 전원 재계약에 대해 논의 중”이라며 섣부른 추측은 자제해주길 당부했다. 그러나 주변 관계자들은 블블과 고동 측이 결별 수순을 밟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중략).]

-애들아 다 같이 더 좋은 회사로 옮기자ㅜㅜ

-ㅃ! 이참에 아예 회사 하나 차리자!!!!

-계약 끝나는 시기에 맞춰 입대하는 거 보면 어지간히 저 바닥 생활에 신물이 났다는 것 가튼데

-12년 데뷔면 19년에 계약 끝나는 거 아닌가?

ㄴ얘넨 전속 7년 아니고 6년 계약ㅇㅇ

-안 돼... 아직 안 급하잖아... 이제야 막 빵 터질 시점인데

-그래, 서른 다 돼서 입대해서 어린놈들한테 수모를 겪느니 지금이라도 가는 게 좋을 거다ㅋ

-나라가 부른다!!!!! 가자ヾ(´︶`*)ノ♬

-돈맛을 보면 어떻게든 안 가려고 버티는 놈들이 태반인데

ㄴ그래봤자 꿀보직이나 공익가겠지ㅋ

한율은 댓글까지 대충 훑곤 답장을 보냈다.

[금시초문이요.]

-[ㅇㅇ]

잠시 후, <별☆일없는 집> 촬영장.

“한율아.”

지헌이 한율을 보더니 차남석이 링크로 보내주었던 것과 똑같은 기사를 내밀었다.

“너 블블 선배님들이랑 친하지? 뭐 들은 거 없어?”

“네.”

“조금만 더 하면 더 큰 포텐이 터질 것 같은 이 시점에 군대라니….”

완전히 남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 지헌은 안타까우면서도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회사 사람이랑 리더가 대판 싸웠다는 얘기가 사실인가….”

“싸워요?”

“응.”

지헌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회사에서 언성 높이면서 다투는 걸 들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아무리 화가 나도 때와 장소는 가리는 사람이잖아, 수재 선배님. 그런데 그 얘길 들으니 회사랑 불화가 심해졌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선배님은 계약 언제까지예요?”

“우리는 좀 멀었어. 7년 계약해서… 3년 후? 너희도 7년 계약이지?”

“네.”

“너희도 한참 멀었네.”

한율과 차남석이 전속계약을 일찍 해서 다른 멤버들보다 만료날짜가 반 년 정도 이르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계약이 끝나기 전에 게이트도 열릴 테고.

‘그 때가 되면….’

잠깐 생각에 잠기려던 한율은 눈을 깜빡거렸다.

“잠깐만요.”

“응?”

한율은 지헌이 핸드폰에 띄운 또 다른 기사를 보곤 미간을 찡그렸다.

[사생팬을 형사법정에 세운 신인아이돌, 용기가 아닌]

“이거 메인에 뜬 기사예요?”

“응.”

한율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메인에 뜬 같은 기사를 찾아내 띄웠다.

[올해 중소기획사에서 데뷔한 보이그룹 멤버 A군은 데뷔 초부터 사생팬 B씨에게 시달렸다. B씨는 A군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으며, 숙소까지 찾아왔다. 수차례 거부의사를 밝혔음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B씨의 스토킹. A군은 고민 끝에 결국 B씨를 형사 고소하기에 이른다.

A군의 관계자는 A군의 고소는 용기가 아닌,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마땅한 대응을 취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숙소를 무단침입하고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더욱 악질적인 범죄피해를 당하는 다른 아이돌들은 어째서 A군처럼 ‘마땅한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일까.

아이돌 엔터 산업에 오래 몸을 담은 C씨는 이에 대해,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중략)

타인의 사생활을 침범하면서도 팬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범죄를 합리화하는 사생팬의 실태와 피해, 그리고 해결방안을 모색해보는 MBS 편은 오는 26일 밤 23시에 방송된다.]

* * *

11월 19일. 부산에서 열린 2차 팬 사인회를 끝으로, 어스래빗의 이번 싱글앨범 <있어> 국내활동이 마무리되었다.

SBC 방송국에서 김포국제공항,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아슬아슬하게 팬 사인회 장소에 도착. 2시간 동안 이벤트를 진행한 후에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다시 김포국제공항. 회사로 돌아왔을 땐 자정이 다 될 무렵이었다.

“활동 뒤풀이? 그게 뭐죠? 먹는 건가…?”

“먹는 거지….”

숙소에서 씻으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까닭에, 그들은 비실비실 휴게실로 향했다. 삐릭, 덜컹.

“수고하셨습니다, 형님들!”

늦은 시간이었지만 휴게실에는 연습생인 김권과 임승준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오! 오래간만이다, 아우들아.”

사실 회사에서 오며가며 자주 마주쳤었으나, 박가람은 몇 달 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갑게 두 팔을 벌려 두 사람과 포옹했다.

“연습 끝내고 가려던 참이야?”

“네.”

“너희들 내년에 뮤닷에서 하는 서바이벌 프로 나간다며?”

차남석의 물음에 임승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지욱이까지 셋이서.”

“지욱인 왜 안 보…. 아, 걔 아직 중학생이라서 10시까지 밖에 못 있지.”

“그런데 그거 녹화 3월부터 아니었어? 벌써 준비하는 거야?”

“올해도 한 달 하고도 열흘 밖에 안 남았어. 시간 엄청 빨리 가.”

“히익,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 진짜 빠르다.”

“남석이 형은 드라마 내일 첫 방이지?”

그들은 대화를 나누면서 메이크업을 지웠다. 한율은 씻고 난 후 숙소로 돌아가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2층으로 향했다. 2층 사무실로 들어가니 역시나, 자발적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오 팀장이 자리에 있었다.

“에 연락했더니.”

오 팀장은 한율을 보자마자 찾아온 용건이 무엇인지 짐작한 것처럼 먼저 얘기를 꺼냈다.

“한율이 너라고 특정할 수 없도록 예시 사례로만 간단히 나올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라. 하지만… 자세한 건 방송이 나와야 알 것 같다. 방송국 놈들이 좀 약아야 말이지.”

참 눈치가 빨라서 좋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로 이번 활동 끝났다고, 너무 늦게까지 놀진 말고.”

“네, 팀장님도 들어가세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새벽 1시. 밤공기는 무척이나 찼다.

회사에서 숙소까지 무척 가까웠지만, 늘 멤버들과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걸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가끔 회사 앞에서 기다리던 팬들도 없고, 회사 맞은편 편의점도 손님 없이 한가해보였다.

‘조용해서 좋네.’

일부러 천천히 걸어 도착한 숙소. 환하게 불이 켜진 2층 발코니 창 앞엔 누군가 서있었다.

“써한.”

길우성이 난간에다 상체를 기댄 채 아래로 늘어뜨린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너 왜 이렇게 느리게 걷냐? 빨리 올라와, 치킨 왔어. 네가 먹을 오븐구이 치킨도 시켰다.”

“…….”

한율은 물끄러미 주요감시대상 1호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곧 일본어 버전 뮤비 촬영이 있는데, 마음 놓고 야식을 먹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니에요?”

“괜찮아, 내일 빡세게 운동하면 돼.”

“남자 여덟 명이서 고작 치킨 5마리면 완전 적게 시킨 거지. 그나마 하나는 기름을 쏙 뺀 오븐구이라서 덜 부을 거야.”

“치킨에 레몬티라니 이 무슨.”

“탄산을 뺀 건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거실 바닥에 어디선가 가져온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치킨을 널려놓았다. 함께 온 탄산은 한쪽에 모아두고, 대신 레몬이 동동 뜬 따뜻한 차가 각자 앞에 놓였다.

한율은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허겁지겁, ‘앗 뜨거!’ 하면서도 치킨을 뜯어먹는 멤버들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안 먹어?”

“내일도 아침부터 촬영 있어서요.”

“닭가슴살이라도 좀 먹지….”

치킨 냄새가 진동을 하네. 한율은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침대마다 전기요가 하나씩 깔렸다. 한율은 2층 침대 위로 올라가 전기요 스위치를 켜곤 포근한 이불을 뒤집어썼다. 화요일에 M/V 촬영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 활동이 시작되는 다음 달 전까진 비교적 여유로워질 테다. 잠도 더 잘 수 있고.

‘딱히 신경 써야 할 것도….’

우웅.

점점 따뜻해지는 온기에 취해 잠에 빠지려던 순간이었다.

“……?”

언제부턴가 분신처럼 늘 곁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블블 민준선배님]

왜 이 시간에 전화를?

“네, 선배님.”

-[…한율아아, 밥 머거써?]

들뜬 목소리와 풀린 발음.

취했네.

“지금 새벽 1시 23분입니다, 선배님.”

-[늦었다고 굶으면 안 돼에.]

“…….”

-[2주 동안 활동하느라 수고했어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내일 촬영 있어서 일찍 자야 하거든요, 선배님. 길게 통화 못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는 대화를 나눠봤자 시간낭비다.

-[참 똑 부러져서 좋아. 음, 음. 그래야지.]

딱히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아, 한율은 일단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민준이 혼자 주절거렸다.

-[나도 그랬어야 했는데, 하…. 못 그래서 이렇게 된 것 같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입에 발린 소리 전부 자기들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한 당근? 그런 거였는데…. 아, 내일 촬영 있다고 그랬지? 그럼 나 이거 하나만.]

“뭔데요?”

민준이 울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만약인데, 나… 연예인 그만 둬도 연락 받아줄 거야…?]

며칠 전 본 그 기사를 시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블블과 고동 간에 불화가 심하다느니, 해체니 군 입대니 하는 기사가 포털사이트에 올라오고 있었다. 기사엔 하나 같이 고동 엔터의 ‘섣부른 추측은 자제해주길 당부한다’는 입장이 실려 있었으나, 정작 마음대로 떠들라는 듯 아예 손을 놓은 것처럼.

“선배님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범죄만 안 저지르면 상관은 없는데요.”

-[정말?]

“지금처럼 술 먹고 전화하면 안 받으려고요.”

-[……흐.]

민준은 짧은 웃음을 흘리곤 잘 자라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아침. 한율은 핸드폰에 녹음된 민준과의 통화 녹음파일을 민준에게 보냈다.

한 시간 후, 민준에게서 톡이 왔다.

-[으아아아아]

-[지워!!!!!]

-[빨리 지워어엉․ㅣ어어]

A군 얘기 어디 갔어

11월 26일 밤 11시. MBS 편이 방송되었다.

방송은 11월 7일, 락뮤닷의 <뮤닷> 스튜디오 앞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막을 열었다. 영상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자이크와 음성변조 범벅으로 어지러웠지만, 내용은 해당 사건을 몰랐던 시청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K양: 신고는 제가 생각한 거예요! 오빠는 분탕질 좀 치라 그랬고!]

쿵. 묵직한 효과음과 함께 영상이 일시 정지.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오빠가 시켰다?]

배경이 경찰 제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앉은 책상으로 전환되었다.

K양이 A보이그룹을 위해 B보이그룹의 팬미팅을 망치려 허위신고를 했다는 자백을 들은 경찰의 인터뷰.

[조금 납득하기 힘든 동기. 그러나 저희는 곧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성 변조된 녹취 대화.

[PD: 이 사건에 대해 제보할 게 있으시다고요?]

[제보자: 네. K양이 그 일을 벌이기 전부터, A그룹의 소속사가 K양을 사생스토커로 고소할 예정이었다고 들었어요.]

쿵. 다시 묵직한 효과음.

[사생, 스토커.]

이어서 방송엔 K양이 B보이그룹의 팬미팅 현장에서 난리를 치기 며칠 전, A보이그룹의 굿즈를 버리고 불태우는 사진과,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그들을 향해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부은 이전 게시글이 속속 공개되었다.

[모든 것이, A보이그룹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K양의 자작극이었던 겁니다.]

이후엔 또 다른 아이돌그룹이 사생팬에게 당한 피해사례가 줄줄이 이어졌다. 라이브방송 도중 계속해서 전화를 걸거나, 욕실이나 선물에 설치된 도청장치와 몰카, 도둑질, 위험하게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드는 행위, 택시를 타고 쫓아다니거나 비행기 스케줄을 알아내 같은 기내에 탑승 혹은 출국장까지 따라가서 사진을 찍은 후 탑승을 취소하는 행위 등등.

걸그룹 멤버가 사생팬에게 피습을 당할 뻔했던 유명한 사건과 인터뷰도 이어졌다.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실시간 채팅창은 사생팬을 향한 험한 욕으로 도배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리고 왜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는 걸까요.]

방송은 곧 사생팬에게 대응하는 각 회사의 입장과, 사생팬을 고소했다가 취하하고 용서한 아이돌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C기획사 관계자: 잡아보니까 대부분 어린애들인 거예요. 심지어 초등학생인 경우도 있었고. 본인이 저지른 짓이 범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철이 없던 거였죠. 너희들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차근차근 알려주니 진심으로 반성을 해서, 적당히 합의를 해준 거죠.]

[D기획사 관계자: 팬심으로 멋모르고 따라다닌 팬을 스토커로 고소했다! 이런 식으로 왜곡돼서 퍼지면 끝이에요. 특히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작은 그룹은. 그래서 참는 거죠.]

-아이돌들 돈 때문에 발가벗고 복근이랑 가슴 까고 그럴 땐 언제고 ㅈㄴ 선량한 약자 행세ㅋㅋㅋ

-팬들 눈치보고 그런다는 거임? 사생팬은 팬이 아닌데?

-오히려 팬들은 사생들한테 강경대응하라고 성토하는데 이건 좀 아닌 듯

-사생들이 걔네 실체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어서 그거 다 까발려질까봐 무서워서 고소 못하는 거지 무슨ㅋㅋㅋㅋㅋㅋ

-괜히 아이돌들이 인기가 많아질수록 집돌이 집순이가 되는 게 아님ㅇㅇ

-어리다고 용서를 해주니까 계속 반복되는 거 아냐 진심 몰라서 그랬겠냐?

그리고 이전에 사생범죄를 저질렀던 인물이 나와 인터뷰를 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땐. 그냥 막 미쳤던 것 같아요. 다른 팬들보다 오빠가 날 알아봐주고, 한 번 더 봐주는 것에 대한 짜릿함? 쾌감? 그런 게 있고, 다른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모르는 걸 내가 안다, 나와 오빠만이 안다는 것에 대한 우월감? 그런 감정에 중독이 됐었던 것 같아요.]

-??? 예고 기사에 나왔던 A군 얘기는 어디 감

-사생팬 형사법정에 세웠다던 애 있다고 기사로 나오지 않았었나? 왜 전직 가해자 입장으로 뛰냐

-이따가 나오겠죠

방송은 변호사, 대중문화 전문가, 범죄심리학자의 견해, 마지막으로 조금 전 인터뷰를 한 예전 사생팬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지금도 사생범죄를 저지르거나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내가 널 좋아해서 한 일이야, 그러니 네가 감당해야 해. 이 말을 듣는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라고. 당신이 너무 멋져서 속옷을 훔쳤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해서 당신 집주변에 CCTV를 달고 감시했어. …소름 돋지 않나요?]

방송이 끝나고 리뷰 기사가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에 떴다.

-ㅈㄴ이해가 안 가는 정병들의 이야기였다...ㄷㄷ

-그 시간에 엄빠 어깨라도 주물러드리지, 생판 남 뒤를 왜 쫓아다니는 건지ㅉㅉ

-지가 번 돈으로 돈질하는 거면 상관없는데, 부모님이 힘들게 번 돈을 갖다 쓰면서 범죄까지 저지르는 거 보니까ㅋㅋㅋㅋ

ㄴ이건 자식교육 잘못시킨 부모 문제

-아이돌이 사생팬을 강하게 처벌하지 않는 건, 대부분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 철없이 한 행동이라 아량을 베푼 거지, 뭐 팬을 스토커로 몰아서 오해를 산다는 둥 인기와 수익이 흔들릴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죄다 돈에 연연하는 속물로 몰지 마세요. 그게 바로 평소 당신들의 ‘아이돌은 팬을 지갑으로 본다!’ 이 관점에서 나온 거 아닙니까.

-사생팬은 팬이 아닙니다. 범죄자입니다.

-ㅂ블 얘기는 아예 안 나왔네? 걔네가 사생들한테 시달린 내용만 내보내도 2시간이었을 텐데

ㄴ그 집 지금 그럴 정신없어요ㅠㅠ

-사생팬한테 빨간 줄 그어버린 A군 얘기 어디 갔냐고!!!!!

ㄴ???? 뭔 소리임

ㄴ그 예고기사 사라짐요;; 나 전에 댓글 달았었는데 확인해보니 삭제된 기사라고 뜸ㅋ

“……?”

드라마 촬영을 하느라 를 보지 못했던 한율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뒤늦게 리뷰 기사를 훑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댓글에 적힌 것처럼 방송 예고기사 속 A군— 자신의 이야기가 방송에 전혀 나가지 않은 모양. 한 술 더 떠 기사가 삭제되었다는 걸 보니 조금 의아해졌다.

[팀장님, PD르포 보셨어요?]

오 팀장이 곧바로 답톡을 보냈다.

-[ㅇㅇ 무슨 생각인지, 네 얘긴 전혀 언급을 안 했더라.]

[네.]

누군지 특정할 수 없게끔 예시사례로만 간단히 나올 거라더니, 시간상 편집된 건가?

그러나 전혀 나쁜 일이 아니기에, 한율은 그런가 보다 하면서 신경을 끊고 다른 연예뉴스를 훑었다.

[걸그룹 에스더즈 멤버, 극심한 불안장애로 활동 중단]

한편 그 시각, 서초동에 있는 한율의 집.

한율의 모친인 최은희는 핸드폰으로 오늘자 방송 관련 기사를 훑다가 옆에서 졸고 있는 남편을 두드려 깨웠다.

“여보, 일어나 봐요. …석진 오빠.”

“어…, 음? 나 안 잤어.”

“혹시 당신이 율이 얘기 나가지 않도록 손 쓴 거예요?”

“손은 안 썼는데….”

서석진은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울어졌던 몸을 바로 하면서, 무릎에서 꿈쩍도 않는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전에 당신이 기사에 나온 게 꼭 우리 아들 얘기 같다고 해서… MBS에 있는 친구한테 예고 속 A군이 누군지 아냐고 물어본 것 밖에 없는데?”

“…….”

“왜 그래, 당신?”

“A군 얘기가 방송에 전혀 안 나왔어요.”

“어허. 들킨 모양이군.”

“…….”

최은희는 넉살 좋게 웃는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죠?”

“커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최은희는 재차 한숨을 쉬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소문나는 것도 시간문제겠네요….”

“뭐 어때, 잘못한 것도 하나 없는데.”

서석진도 퓨마를 들어 옆으로 치우곤 일어나,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그러곤 아내의 어깨를 감싸 토닥거리며 안방으로 향했다.

“걱정 마, 여보. 예전과 같은 일은 절대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일단 율이한테 메시지 보낼게요.”

“음.”

툭. 거실 조명도 꺼졌다.

캄캄해진 거실엔, 갑작스레 따뜻한 인간방석을 잃어버린 고양이 한 마리의 항의가 울려 퍼졌다.

와아오옹.

* * *

“인터넷기사 다 내리면 뭐 하냐고, 씨발! 저딴 방송 하나 못 막는데!”

잠잠해졌던 일이 방송으로 다시 들춰지자, 안인섭은 매니저를 앞에 두고 길길이 날뛰었다. 매니저는 필요 이상 흥분하는 안인섭을 이상하다 여겼지만, 그의 뒤에 있는 스폰서를 떠올리며 말을 골라 뱉었다.

“우리도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서 안 나갈 줄 알았어. 그리고 일반 찌라시 언론사랑 다르게 방송국, 그것도 시사 쪽은 줄잡기가 힘들어. 평소 상대하는 인간들 종류부터가 달라서, 엔터 쪽은 일단 시선 아래로 내리깔아 본다고.”

사실은 바로 조금 전 회사 측에서 쪽에 연락해 따졌으나, 그들은 ‘네, 인터뷰를 거절하셔서 저희가 따로 제보 받은 영상과 증언을 토대로 만들었습니다.’ 라며 뭐가 문제냐는 태도로 나왔다. 회사와 연계된 스폰서들은 이깟 사소한 일로 징징거릴 시간에 팬들 관리나 똑바로 하라고 비웃었고.

“노는 물이 다르다, 인섭아. 그리고 적정선은 지켜야지? 우리나 너 예뻐해 주는 사람한테나.”

매니저는 그 말만 던지곤 숙소를 나갔다.

“하, 씨발….”

우웅. 혼자 남은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동안 씩씩거리던 안인섭은 울리는 핸드폰을 들었다. 자잘한 짓을 도맡아 처리해주는 여자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어, 왜.”

-[그 김안나라는 애, 이번 일은 그냥 못 넘어가겠다는데? 너 한번 만나줘야겠다. 만나서 직접 잘 구슬려봐.]

“하!”

안인섭은 기가 막혔다. 시킨 일도 똑바로 못해서 망쳐놓은 게 누군데. 이쯤 되면 정말 안티로 돌변한 사이코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알았어. 약속시간이랑 장소 정해서 연락할게.”

안인섭은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평생 입을 못 열게 약점을 만들어서 잡으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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