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427)

* * *

…탁. 오늘자 를 기획했던 양주경 PD는 단번에 비운 맥주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래서 얼개가 맹숭맹숭해졌어….”

“왜, 그래도 반응 괜찮은 것 같던데요.”

“그 자극적인 소재를 가지고 시청률도 망이면 더 망인 거지….”

“뭔 소리지. 벌써 취했어요?”

말은 이렇게 해도 술 마시는 걸 말릴 생각은 없었다. 홍석주 PD는 오히려 양PD의 빈 잔에 맥주를 새로 채웠다.

“아니, 내가… 사람들이 예쓰! 그거지! 나쁜 짓을 한 애한테는 벌을 줘야지!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예시를 데려왔거든? 그런데 갑자기 안 된대, 쓰지 말래.”

“왜요?”

“누군지 안 드러나게, 응? 살짝, 아주 살짝, 잘 사는 집 자식이란 것만 언급하려고 했는데….”

양PD는 풀린 눈으로 호프집의 메뉴판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갑자기 팀장이 다 들어내라 그러더라…. 와, 타사인데도 외압이 들어올 줄이야….”

“가만, 오늘 방송 얘기 맞죠? 시청자들이 예쓰! 벌을 줘야지! 라고 외칠 뻔 했다고 했으니… 사생 피해자?”

“크, 역시 홍썩. 눈치가 빨라. 암튼 그래서, 나쁜 스토커 벌준 것만 얘기하겠다! 그랬더니 그것도 안 된대. 왜요? 했더니, 그냥 언급 자체를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하…. 이건 뭐 전에 국회의원 양반 취재했을 때보다 더 뭐랄까… 힘든 건 아닌데 괜히 짜증이 막…?”

탁탁. 안주로 나온 닭다리를 집어 들고 그릇에다 내리치던 양PD가 홍PD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명색이 우리가 MBS PD인데, 왜 타사 국장 눈치를 봐야 되는 거야, 왜. 성역이야? 성역이냐고. 아무튼 꼰대들 진짜 그놈의 지읒목질…. 것도 잘못한 일도 아니고 잘한 일을, 어? 어차피 아는 사람은 다 알더만, 그 집 귀한자식인 거.”

홍PD는 미간을 찡그렸다.

“타사? 국장?"

툭. 양PD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로 조금 전에 눈치 빠르다 칭찬해줬더니 왜 모르는 척이야. 가수에 대한 정보는 예능국 PD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우리 쪽 막내 작가도 아는 건데?”

홍PD가 테이블을 잡으면서 상체를 내밀었다. 그러곤 호프집의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국장 자식인데요? 어디? KBC? SBC?”

“그건.”

양PD는 부담스럽게 거리를 좁히는 홍PD를 닭다리로 방어했다.

“네가 알아서 알아봐야지, PD양반.”

내 촉이 그래

“안녕하세요, 선배님.”

한율은 보컬연습실에서 만난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에게 인사했다. 라나는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안녕.”

지금까진 오며가며 인사만 간단히 나누던 사이였지만, <눈밭의 산타토끼>를 함께 준비하면서 조금 친해졌다. 한 그룹의 리더인데다 24살로 한참 누나라 그런지, 한율을 어린 남동생처럼 대하기도 하고.

“오늘도 수고했어.”

“네.”

‘괜찮은 건가.’

한율은 라나의 얼굴을 살폈다.

어젯밤 가 방송된 이후, 실검엔 다시 [걸그룹 피습미수사건]이 떴었다. 피해자였던 그녀의 이름은 물론이고 [크래 라나, 끔찍한 기억을 잊고 다시 밝은 미소]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인 기사까지 여러 개.

기사엔 그녀를 응원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지만, 오히려 피해자가 범죄욕구를 자극시켰다고 지껄이거나 얼굴과 몸매 품평을 하는 악플러들도 더러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무리 데뷔를 한 후 별의별 정신이상자나 변태들을 겪어봤다곤 해도, 고작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다. 그러니 사건 당시 느낀 충격은 굉장히 큰 트라우마가 되고도 남았을 터.

어제 방송이나 인터넷 반응을 보고 당시의 기억과 감정이 생생히 떠올랐을 텐데, 라나는 불안은커녕 의아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잘 감추는 건지, 강한 건지.’

한율은 멀뚱히 그녀를 보며 말했다.

“선배님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 같아서요.”

“…….”

라나는 말없이 빙긋 웃다가 대답했다.

“한율이 너도 활동 오래하면서 염색과 탈색을 반복하다보면, 그땐 그런 농담이 안 나올 거야.”

“그래서 전 계속 흑발 하려고요.”

“그렇게 안 될 걸? 팬 분들이 여러 가지 머리색 버전을 보고 싶어 하실 테니까? 곡 컨셉에 따라서 변화를 줘야 할 때도 있잖아.”

과연. 아이돌의 숙명인가.

블블의 민준도 평소 머리상태를 보면 아주 가관이었다. 방송국에서 만나는 다른 아이돌들도 그렇고.

“괜찮아요, 전 배우도 겸업이라.”

탈색이나 염색은 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해해줄 터다.

“아, 얄미워.”

그때 보컬트레이너가 들어와 잡담은 자연스레 종료.

두 사람은 가사지를 들고 함께 부를 파트 연습에 들어갔다.

WB래빗 엔터테인먼트의 ‘토끼돌’이 크리스마스 기념 스페셜 곡 준비로 한창 바쁜 동안, 방송가엔 중소기획사의 신인아이돌 중에 3사 방송국의 국장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그리고 그 소문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한 건, 방송국 및 예능 쪽 외주프로덕션 PD들, 그리고 아이돌 전문 연예기획사들이었다.

“그만한 빽으로 눈에 띄게 뜬 신인그룹이 있었나?”

“이쪽 판이랑 완전히 무관한 부서인 거 아냐?”

“그래도 다들 아는 사이라서 편의를 잘 봐줬을 법도 한데….”

“누군지 알아서 잘 봐주면… 나나 우리 회사도 잘 봐주지 않을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눈에 띄게 도와줬겠어?”

“대체 누구야? 누군지 알아야 그 그룹하고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들한테 주의를 줄 거 아냐.”

해당 소문은 커뮤니티사이트의 연예인 관련 게시판 전반에도 빠르게 퍼졌다.

[제목: 돌 속에 숨은 국장 자식(욕아님)이 누구인지 추리해보자.]

[단서는 중소기획사에서 나온 신인아이돌. 이것뿐이다.]

-국회에 제출된 공영방송국 직원 연봉표 보니까 국장이 1억 3천정도 받던데ㅋ 지역국장인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능국장, 보도국장, 이런 사람들인지는 몰라도ㅋ

ㄴ단서 추가-> 부자ㅇㅇ

ㄴ연봉 많이 받는다고 다 부자는 아님

-올해에 나온 신인아이돌이 총 몇 명이냐

ㄴ적어도 100명 넘을걸?

ㄴ히익

-ㅂㄹㅇㅅ 아님? 전에 찝찝한 소문 돌았을 때 얼마 안 가서 아무렇지 않게 활동 재개햇자나

ㄴ고ㄷ이 ㅃ버리고 걔네만 싸고도는 게 좀 수상하기는 함

-난 어스ㄹㅂ 한 표. 그나마 뜬 신인들 중에 얘네 묘하게 성적도 좋고 신인치고 섭외도 잘 됨

ㄴ거긴 그냥 잘하는 애들이 많아서

ㄴㅅㅎㅇ 연기쌉ㅇㅈ

ㄴ드라마작가들이 전부 ㅅㅎㅇ한테 대본 보냈다더라ㅋㅋㅋㅋㅋㅋ

ㄴ얼굴천재ㅊㄴㅅ!!!

-전에 ㅇㅋ인가 걔네 뜬금없이 S사 예능 프로 특별 게스트로 나오지 않았음?

-왜 다들 남돌이라고 생각하지? 여돌에도 금수저로 보이는 애들 많음;

ㄴ나 아는 형이 M 다니는데, 남돌이라고 함ㅇㅇ

ㄴ단서 추가->남자

-3사 방송국 국장 이름이랑 신인아이돌 성 씨 대조해보실 백수 분? 지원받음ㅇㅇ

ㄴ너나 해

“난 이 소문의 주인공이 어스래빗에 있는 것 같다.”

보이그룹 스타믹스의 연습실. 사과패드를 내려놓으며 JE가 말했다.

“내 촉이 그래.”

“뮤뮤 단독 대기실 받는 것 때문에?”

“내가 그때 말했잖아. 뮤뮤 PD도 윗선에서 어스한테 단독 대기실 내달란 지시를 받아서 내준 것 같다고. 그게 국장 선에서 내려온 지시면… 다 이해되지 않냐?”

“그럴싸하긴 한데….”

스타믹스 멤버들의 시선이 간만에 연습실에 나온 지헌을 향했다. 서한율에게서 뭐 들은 거 없냐는 눈빛으로.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난 아무 것도 들은 거 없어.”

“그럼 만나서 뭔 얘기를 하는데.”

“대본만 읽는데?”

“아니, 그런데 락뮤 PD도 걔네 예뻐하는 거 보면… 가능성 높지 않아? 소속이 다르기는 해도, 방송국 놈들 다 뒤로 학벌인맥으로 장난 아니게 얽혀 있잖아.”

그때 한 멤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오히려 블루액션 쪽에 있는 것 같은데. 올해 데뷔한 애들 중에 좀 눈에 띈 그룹이 블루랑 어스잖아. 그런데 어스 애들은… 처음부터 차남석이랑 서한율이 눈에 띄어서 잘 될 삘이었잖아. 특히 서한율은 연기 엄청 잘해서 드라마랑 영화 여기저기에서 눈독 들인 거고. 연기실력이 빽으로 민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

“빽도 있고 실력도 있는 거면?”

“으, 재수 없어.”

지헌이 미간을 구기며 재수 없다고 말한 멤버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연습 안 하냐, 우리?”

* * *

11월 29일. 어제 무사히 토끼돌의 <눈밭의 산타토끼> 녹음을 마친 어스래빗 멤버들은, <있어> 일본 쇼케이스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써한, 너 그 소문 들었어? 올해 데뷔한 신인 중에 방송국 국장 아들이 있대. 우와… 누굴까?”

“…….”

한율은 잠시 길우성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바로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차남석도 어이가 없는 눈으로 길우성을 쳐다보았다.

“길우성, 너 진짜… 몰라서 서한율한테 묻는 거 아니지?”

“엉? 뭐가?”

고개를 갸웃하는 길우성을 보며, 차남석은 뭐라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됐다.”

“……?”

“…….”

딱 한번 집에 왔던 차남석도 눈치 챈 걸, 몇 달 동안 살았던 놈이 모를 리가… 있는 건가. 거실에 문체부나 KBC에서 부친이 받은 감사패가 버젓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벽시계에도 KBC 로고가 생생히 들어가 있었고.

그리고 언젠가 길우성 본인이 했던 말.

『너희 아버지, 발성이랑 발음 엄청 좋으시다. 꼭 아나운서 같아.』

한율은 고개를 돌리며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공항 건물과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예상했던 것보다 알려지는 게 더디네.’

지난 번 가 방송된 이후 모친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때 왜 방송에 간단한 언급조차 되지 않았는지에 관한 이유와, 곧 집에 관한 이야기가 알려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사람들은 누군지 통 감을 못 잡는 분위기.

‘정확히 나라는 걸 아는 사람들의 입이 무거운 건가.’

제 자식을 은근히 알려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던 부친이 비밀로 해 달라 부탁했을 린 없으니. WB래빗 대표도 나서서 떠벌리는 스타일이 아니고.

“형은 전에 집에 왔을 때 눈치 챈 거죠?”

일본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장으로 향할 때, 차남석에게 다가가 조용히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너희 아버지가 KBC에 다니는구나, 짐작은 했지. 하지만 강보배는 눈치 못 챈 것 같더라. 저놈은 그때 고양이들한테 정신 팔렸었잖아. 거실에도 잠깐만 있었고.”

강보배는 라이언과 짤막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이언이 틀린 부분을 지적하고 교정해주는 걸로 보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그에게서 영어를 배우는 모양.

“보배 형은 이해되지만.”

한율은 앞에서 촐랑촐랑 리듬을 실어서 걷는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저놈은 눈치 챘어도 확인 차 물어본 것 같던데? 저놈, 어림짐작으로 단정 짓는 거 싫어하잖아.”

그런가. 한율은 유독 소문 등에 신경을 쓰지 않는 길우성의 태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길우성.”

“엉?”

길우성이 걸음을 멈추며 돌아보았다.

“그 소문, 나 맞아.”

“아.”

길우성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탄산을 마신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크.”

그러곤 다시 촐랑촐랑.

한율과 차남석은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곤 별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을 땐 밤 9시가 될 무렵이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머리만 단정하게 빗고 한 객실에 모여 라방을 켰다.

[지구의 한국톢이(+미국톢이1), 일본 도착☆]

“이프림 아안녀엉~.”

-잘 도착했어?

-전이랑 같은 호텔? 배경이 비슷한데

-안뇽안뇽

-+미국톢이1 먼뎈ㅋㅋㅋㅋㅋㅋ

-제목 누가 쓴 거야ㅋㅋ

-율이랑 석이 라방에서 간만에 보는 듯ㅜㅜㅜㅜㅜㅜㅜㅜ

-석아 드라마 잘보고 있어!!!

인사를 신나게 나눈 후엔, 박가람이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줄줄 읊었다.

“이제 이틀 후인 12월 1일에 바로 여기에서 일본어 버전 앨범도 나오고, 도쿄에서 쇼케도 하고, 다음 날인 2일은 내 생일기념으로 오사카 쇼케도 하고.”

“잠깐만. 중간에 오류가 하나 섞였는데?”

-오사카 쇼케가 가람이 생일기념 이벤이였어?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람이 뻔뻔하게 갖다 붙이기ㅋㅋㅋㅋㅋㅋ

-생일파티 스케일 대박ㅎㅎㅎ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에 뮤닷의 RMMA in JAPAN 있잖아요? 거기에도 나가니까,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다 이프림 덕분이에요. 히힛.”

-응응 라인업 봤어

-울 톢이들이 RMMA에 나가다니ㅜㅜ

-진짜 대세신인답다!!!!

-(뿌듯)

짧은 라방을 끝낸 후엔 어슬렁어슬렁 2명씩 배정받은 객실로 돌아갔다.

“서한율.”

“……?”

객실로 들어가기 전, 박가람이 한율에게 손짓했다.

“줄 거 있으니까 잠깐만 이리로.”

의아한 얼굴로 다가가자 박가람이 한율의 팔을 두 손으로 꽉 잡곤, 그대로 자신의 객실로 들어갔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 그러나 사람을 불러놓고 객실 곳곳을 살폈던 예전과 달리, 박가람은 정말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한율에게 내밀었다.

“먹어.”

“…고작 이거 주려고 방으로 부른 거예요?”

박가람이 준 건 손바닥보다 작은 초코 크런치 하나.

“아무것도 안 주고 부려먹… 아니, 부르는 것 보단 낫잖아.”

“…….”

더 이상 특이한 성격이라 치부하기엔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 같지만, 한율은 왠지 묻기 싫어져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게요. 잘 자요.”

“엉. 너도 잘 자.”

그 시각, 한국의 ‘앗싸일보’ 연예부 사무실.

김 부장은 김 기자가 내민 기획취재 서류를 보며 고심에 잠겼다.

“우리가 먼저 터뜨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부장님? 이 이상 시간을 더 끌다간 다른 곳에서 먼저 터뜨릴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생각 안 해봤겠냐. 그런데 이쪽이 연락을 안 받아.”

툭툭. 김 부장의 볼펜 끝이 누군가의 사진을 가리켰다. 오래된 듯한 사진 속엔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 이미 연락해보셨군요?”

“기자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날 테니 이해는 간다만. 그럼 내일 날 밝는 대로 네가 서 국장 찾아가볼래?”

“네!”

“만나면 특히 입조심하고. 너 예전에 최은희 음해성 기사 썼던 선배기자들이 어떻게 하나 둘 씩 일 접었는지, 들은 적 없지? 허술해보여도 보통내기 아닌 인간이니까 조심해.”

“넵!”

부장실을 나온 김 기자는 문을 닫자마자 어깨를 으쓱였다.

국장이니 뭐니 해도, 그래봤자 국민이 내는 수신료로 월급을 받는 직장인 아닌가. 한번 까발려지면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되어서 허튼 짓도 섣불리 못 하는.

‘그리고 행동 하나만 잘못해도 이젠 그 여파가 아들한테까지 미칠 텐데.’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서한율이 서 국장의 아들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앞으로 KBC 스케줄을 뛰게 될 경우 국장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란 의혹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터다.

‘여기에 만약 서한율이 동료 연예인이나 방송국 스태프들에게 버릇없이 구는 장면 하나만 찍혀도….’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마음껏 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 같은 이슈.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너 지금 키 몇이야?

-[미안하지만 인터뷰는 힘들겠네요.]

“바쁘신 거 이해합니다, 국장님. 하지만 아드님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딱 5분이면 됩니다. 통화로도 괜찮고요.”

개인 연락처를 알 수가 없어 사무실을 통해 연락했음에도, 서석진 국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우리 가족이야기가 인터뷰를 할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떠오르는 대세신인인 어스래빗의 서한율 군 아버님이시잖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다재다능한 아들을 키운 게 누구인지….”

KBC 건물 그림자 아래. 김 기자는 열심히 서한율의 예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서석진 국장은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기자님.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국장님? 서 국장님? …아니, 진짜 본론도 들어보지 않고?”

다시 전화해봤지만 이번엔 아예 받질 않았다. 끙. 김 기자는 미간을 구기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집요하게 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법한 상대이기에,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렸다.

‘이러다 딴 놈들이 채가면 안 되는데….’

당장의 조회수와 광고수익을 위해 무턱대고 터뜨리기에도 위험한 상대다. 김 기자는 어떤 식으로 우회해야 좋을지 고민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웅. 그때 울리는 전화. 김 기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빠르게 들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고동의 김 실장이 웬일로?

“네, 김 실장님. ……네? 하하,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여차하면 아림이랑…. 아아, 네!”

걸음을 옮기는 김 기자의 속도가 빨라졌다. 조금 전 서석진 국장에게 거절당해 의기소침해졌던 마음도 가볍게 달아올랐다.

“당장은 밖이라 힘들고, 제가 20분 후에 다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통화를 끊은 김 기자는 타인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쓰!”

* * *

12월 1일. 어스래빗의 <있어> 일본어 버전 싱글앨범인 [HERE -Japanese Ver.-]가 발매되는 날, 어스래빗은 지난 번 일본 데뷔쇼케이스를 처음으로 가졌던 라이브하우스에서 쇼케이스를 가졌다. 오후 1시에 한 번, 저녁 6시에 한 번. 각각 한 시간씩.

다음 날인 2일은 오사카에서.

“이번에 삿포로는 왜 패스에요? 설마… 티켓이 안 팔릴 것 같아서?!”

오사카 쇼케이스가 끝난 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회사 측이 미리 대관한 식당에서 박가람의 생일파티 겸 회식을 가졌다.

“일정이 여러모로 안 맞아서 그래. RMMA도 있고.”

풍류 락(樂)을 앞에 붙인 뮤닷 뮤직어워즈, 약칭 RMMA는 FJ그룹의 뮤닷에서 주최하는 음악시상식이었다.

해가 갈수록 공정한 시상식이 아닌, 참여한 이들에게만 상을 주는 K-POP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공연스케일이 성대하고 화려해, 가수라면 누구나 서고 싶은 그런 곳.

박가람이 호들갑을 떨었다.

“신인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무대라니…, 무대라니!”

“우성이랑 건우, 너희들 6, 7일에도 특별무대 연습 잡혔다.”

“넵!”

“특별무대?”

처음 듣는 이야기에 한율은 의아한 눈으로 길우성과 이건우를 보았다. 길우성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후…. 이 춤신춤왕이 지금껏 어찌 놀고만 있었겠느냐. 네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동안 나는 나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무려 RMMA에서….”

“RMMA가 신인들 세우는 특별무대 기획 곧잘 하잖아. 예전에 일본에서 좋은 성적 거둔 대선배님들 곡 커버무대 한다고, 우리 팀에서 나랑 우성이가 뽑혔어. 연습한 지 좀 됐는데, 한율이 넌 몰랐구나.”

“쟤가 워낙 바빴잖아. 드라마 촬영 끝나고 오면 노래 연습하고, 우리 무대 연습하고.”

“하긴.”

“퍼포먼스 위주 무댄가 보네요?”

메인댄서 둘을 뽑은 걸 보면.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누구랑 같이 한댔지?”

“블루액션에서 춤 잘 추는 친구랑, ACCOM의….”

호텔로 돌아온 후엔 박가람의 생일 기념 라방을 짧게 진행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와….”

공항으로 갈 준비를 하는 한율을 보며 길우성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는 것도 여간 큰일이 아니란 걸, 써한 널 보면서 깨닫는다….”

“내일 보자.”

달칵. 한율은 잠깐 켰던 객실의 조명을 소등하곤 객실을 나섰다. 그리고 4시간 후, 인천의 <별☆일없는 집> 촬영장에 도착. 자정 넘게 촬영을 하고 인근 호텔에 묵었다가 새벽에 다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녹화 2시간을 위해 국제선을 타다니. 한율이 인기대스타 같다.”

“형, 써한처럼 이러면 드라마출연료보다 비행기 티켓 값이 더….”

“응, 안 나가.”

“오오.”

지난번처럼 도쿄에 있는 한류전문위성채널의 K-POP 소개 프로그램 녹화를 마친 후, 이번엔 어스래빗 멤버들도 다 같이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바로 내일 ‘토끼돌’의 <눈밭의 산타토끼> M/V와 앨범재킷 촬영이 잡힌 까닭이었다.

“이러니까 우리도 인기대스타 같당.”

“으흐.”

우웅.

“……?”

막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던 한율은 모친으로부터 톡을 받았다.

-[율아, 이 아이들 어때?]

곧 동영상 하나가 이어서 올라왔다. 옆자리의 길우성이 멋대로 고개를 기울이며 핸드폰을 훔쳐보더니 시끄럽게 외쳤다.

“아깽?!”

한율은 길우성을 힐끔 째려보곤 영상을 재생시켰다. 길우성이 한율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함께 보았다.

[먀옹먕, 먀앙.]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새끼고양이 4마리가 앙증맞게 울면서 가느다란 다리로 부들부들, 서로의 몸 위로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영상이었다.

길우성이 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커흑…, 마이 하트…….”

“왜? 뭐 봤는데?”

통로 건너편에 앉아있던 강보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깽이…, 눈도 못 뜬 아깽이 네 마리가…!”

“나도! 나도 볼래!”

강보배가 들썩거리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오 팀장이 주의를 주었다.

“얘들아, 차 운행 중엔 자리에 얌전히.”

이 꼬질꼬질한 새끼고양이들은 뭐지. 집에 있는 퓨마와 호랑이는 중성화수술을 한 지 오래되어서 새끼를 낳았을 리가 없었다.

그때 영상 아래로 올라오는 다른 고양이 사진. 새끼고양이들의 어미로 추정되는 성묘였으나, 교통사고라도 당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웬 고양이들이에요?]

-[사람들이 교통사고를 당한 고양이를 구조했는데, 알고 보니 눈도 못 뜬 새끼들이 있는 어미고양이라고 하더라구. 그런데 보호소나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문제로 거두기가 부담스럽다고 해서, 일단 엄마가 임보해볼까 하는데... 괜찮을까ㅜㅜ?]

-[율이 네가 싫다고 하면 사설보호소로 보낼게...]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제 방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아요. 어머니 뜻대로 하세요. :)]

-[고마워, 우리아들! 마음씨도 참 예쁘지^^]

-[아, 그리고 어쩌면….]

한율은 이어진 모친의 용건을 보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알았다고 답변을 보냈다.

“그 아깽이들은 뭐야? 퓨마랑 호랑이 동생?”

한율이 핸드폰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길우성이 물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 옆으로 상체를 쭉 내민 강보배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집에서 잠깐 임보하기로 한 고양이들이래. 다친 어미고양이까지.”

“오오! 그럼 오늘 너희 집에 보러가도 돼?!”

“나 촬영하러 가야되는데?”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응! 써한 넌 일하러 가고!”

“…….”

뭐 이런 뻔뻔한 놈이 다 있나.

강보배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어머님 새끼고양이들 돌보신 적 있대? 나 새끼고양이들 분유 잘 먹이는데. 배변 유도도 잘하고.”

“크으, 역시 보배 형. 태어날 때부터 집사였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한율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마침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안전벨트를 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 팀장에게 갔다. 한율의 제안을 들은 오 팀장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둘만 괜찮다고 하면.”

“네.”

“우성아, 보배야. 잠깐 이리로.”

“…네?”

길우성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넘 시끄럽게 떠들었나보다…, 써한이 고자질했나 보다….”

그날 밤.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숙소엔 길우성과 강보배가 한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너희 어머니가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

그리고 내미는 커다란 유리병. 레몬생강청이었다.

“우리한테도 나눠먹으라 그러셨으니까 3분의 1은 내 거.”

“덜어서 담을만한 병 있어?”

“후. 올 때 사왔지.”

식탁에 둘러선 세 사람은 레몬생강청을 각자의 병에다 옮겨 담았다.

“나 전부터 한율이가 이거 마시는 거 볼 때마다 진짜 무슨 맛일까 궁금했었거든.”

“새콤달콤하면서도 목이 뜨뜻해지는 맛입니다, 형님.”

“먹고 싶다고 했으면 한 잔 정돈 줬을 텐데요.”

“한 잔 정도라니, 너무 짠 거 아냐?”

“촬영은 어땠어요?”

강보배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들이 귀여웠어.”

“발바닥도 조그맣고 꼬리도 얇아서 쥐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분유 먹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크윽….”

촬영 어땠냐니까 순 고양이 얘기만 하고 있다.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곤, 물티슈로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은 유리병 입구를 닦았다.

길우성이 들뜬 목소리로 강보배에게 말했다.

“나중에 우리도 성공하면 더 큰 숙소로 이사 가서 고양이 키우자, 형.”

“그래, 꼭 그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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