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2월 7일. 이 열릴 예정인 도쿄의 거대한 돔.
어스래빗 멤버들은 소리구름어워즈보다 두 배는 더 큰 규모에 입을 쩍 벌렸다가 고개를 젖혔다. 무대 뒤에 세워진 LED 전광판도 굉장히 큰데, 위에도 커다란 LED 전광판이 사면으로 달려 있었다.
“TV로 봤을 때보다 더 어마무시하다.”
“역시 대기업 자본 스케일….”
“우리가 정말 이 무대에 서는 거야?”
멤버들은 다시 감개무량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이들 곁에는 어스래빗의 첫 RMMA 출연기념 영상을 촬영하는 VJ가 있었다.
한율도 적당히 한 마디 보탰다.
“정말 실수하지 않도록 집중해야겠네요.”
“그래야지. …아, 너 그 기사 봤어?”
리허설 전까진 이만하면 됐다고 판단한 VJ가 카메라를 끄자, 차남석이 물었다.
“이번 RMMA 시상자로 이희우 선배님 나온다던데.”
“네, 봤어요. 이제설 선배님도 나올 예정이라고 하던데.”
RMMA는 가수들도 그렇지만, 호스트나 시상자 역시 라인업이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차남석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블루액션 멤버들이 멋쩍게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야아,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두 그룹은 서로 고개를 꾸벅거리거나 편하게 인사했다.
차남석이 블루액션의 매니저를 빠르게 살피더니 안세현에게 슬쩍 물었다.
“아직도 폰 못 받았냐?”
“어….”
“블블 선배님들은요?”
“선배님들은 순서가 한참 뒤라서 좀 늦게 오실 걸?”
특별무대를 같이 준비하면서 친해졌는지, 길우성도 블루액션 멤버 중 한 명과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나눴다.
“하이요.”
“굿모뉭. 너넨 호텔 어디야?”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곳?”
“혹시 크래 선배님들도 같이…?”
“돌으셨습니까?”
“핑그르르.”
어스래빗이 이번 RMMA에서 부를 곡은 현재까지 반응이 가장 좋은 하나. 반면 블루액션은 1.5곡을 부른다고 했다. 여기에 남자신인상 후보에도 같이 올라 라이벌이나 다름없지만, 분위기를 보면 별 다른 근심 걱정 없는 고등학생들이 모인 것 같았다.
“한율이 넌 요즘 엄청 바쁜 것 같더라?”
안세현이 경상도 억양을 최대한 억누른 어색한 표준어를 구사하며 물었다.
“드라마는 언제부터 방영되는 거야?”
“다음달 15일이요.”
“오, 얼마 안 남았네? 그런데 얼마 전에 은훤이 형 만났다면서? 형은 잘 지내는 것 같아? 잘생긴 건 여전하고?”
최근 인터넷엔 고동 엔터와 블블 관련 기사가 줄어들긴 했지만, 긍정적인 소식도 한 줄 나오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블블과 고동 간의 불화설이 터지기 전까지 동생 그룹이라고 같이 챙겨주던 블블 팬들이, 이제는 블루액션에게 날을 세우는 상황.
안세현은 그 모든 부정적인 기류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억지로 밝게 행동하는 듯했다.
“네. 대입 준비로 여러모로 바쁜 것 같더라고요.”
“이렇게 보컬 출신들이 막 성장해가는 구나…. 뭔가 기분이 좀 묘하다. 작년에 처음 만났을 땐 다들 어리바리해가지곤 카메라도 겨우 찾았었는데.”
“그러게요.”
“그런데… 잠깐만.”
“……?”
안세현이 돌연 심각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러곤 자신의 키와 한율의 키를 가늠했다.
“한율이 너 키 좀 큰 것 같다? 내가 지금 3cm 깔창을 깔고 왔는데 작년이랑 별 차이가…. 너 지금 키 몇이야?”
한율은 얼마 전, <주말아이돌>에서 데뷔 초의 프로필을 수정할 때 새로 측정한 키를 떠올렸다.
“지난달에 쟀을 때 178.9cm 나왔어요.”
한동안 시끄럽겠네
“그러면 182cm네.”
“왜죠.”
“3cm는 올리는 게 기본이잖아. 신발 굽 높이도 있는데.”
“요즘은 그런 수치 부풀리는 거 촌스럽다고 하던데요.”
“대체 누가 그래?!”
“민준 선배님이요.”
회사 직속 선배의 이름이 나오자 흥분하려던 안세현이 금세 수그러들었다.
“어, 그래.”
“그리고 요즘엔 포털사이트에 올라가는 프로필에도 키랑 몸무게는 빼는 추세잖아요.”
“하긴, 워낙 뻥을 많이 쳐야 말이지.”
“너처럼?”
차남석이 웃으면서 묻자 안세현이 대뜸 그와 거리를 벌렸다.
“넌 이제 내 옆에 오지 마라.”
“왜?”
“얘가 179cm면 넌 180cm 넘는다는 소리니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때 여러 명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 울리며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크게 자라는 열 두 명의 승리의 아이들!”
“V12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V12는 어스래빗이나 블루액션과 비교해도 새파란 신인이었으나, 기획사가 FJ계열사라 그런지 무난히 RMMA 출연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병아리들 주제에 소속사 빨로 이런 큰 시상식에 참여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
어스래빗과 블루액션 멤버들은 웃으면서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이건우와 길우성이 서는 특별무대와 더와월 리허설까지 끝냈을 무렵엔, 인지도가 높은 팀들이 속속 도착해 무대 아래가 북적거렸다. 블블도 그 중 하나.
그러나,
“무슨 일 있나?”
“선배님들 분위기 좀 이상한데? 싸웠나?”
다른 팀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곤 있었지만, 블블 멤버들 간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모니터링을 마친 어스래빗이 무대 아래로 내려가 인사를 건네자, 블블 멤버들이 반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반응했다.
“안녕.”
“너희 정말 올해 1년 차 맞아? 이렇게 큰 무대는 처음일 텐데 어떻게 그렇게 여유가 넘쳐?”
“여유 있는 척 허세 좀 부린 거죠.”
“그게 여유 있다고 하는 거거든?”
“라떼는 말이지, 2년 차가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민준이 한율에게 성큼 다가와 씩 웃었다.
“지웠어?”
“뭘요?”
“통화녹음, 지웠냐고요.”
“아아. 아니요?”
민준이 한율의 양 어깨를 덥석 잡고 흔들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겠니! 응?”
한율은 민준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나중에 지울게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응? 무…, 무슨 일?”
민준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인 것 같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없으면 됐어요.”
이윽고 다음 팀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 이상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악소리가 굉장히 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마침 매니저들도 슬슬 호텔로 돌아가자고 하여, 한율은 민준과 내일 보자는 의미로 고개만 꾸벅이곤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이 시작되기 2시간 전, 어스래빗과 V12가 함께 사용하는 대기실.
“오, 떴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겨우 3개가 나란히 놓인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건우의 사과패드를 들여다보았다.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있던 한율도 등받이 위를 팔로 짚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바로 조금 전, 너튜브의 WB래빗 채널에 올라온 영상.
포근하게 쌓인 하얀 눈밭 위로 뽀득뽀득, 토끼 발자국이 찍히는 효과음이 났다. 툭. 새겨진 발자국 옆으로 작은 선물상자가 떨어져 뚜껑이 열리고, 안에 들었던 말린 메모지가 스르륵 펼쳐졌다.
[<눈밭의 산타토끼> -하양토끼, 까망토끼]
그리고 아주 짧게 흘러나오는 <눈밭의 산타토끼> 후렴구. 영상은 바로 며칠 전, 어스래빗과 크리스탈 래빗이 함께 찍은 앨범재킷 이미지로 바뀌었다.
[2017. 12. 15. PM 13:00]
“어? 우리 프로젝트그룹 이름, 토끼돌이 아니네?”
“곡 제목도 이런데 팀 이름도 이러니까 꼭 동요 같다.”
“그러게.”
이건우는 댓글 란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이제 막 올라온 영상이라 아직 댓글 수는 적었지만, 어스래빗과 크리스탈 래빗의 팬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기대된다는 응원 댓글을 실시간으로 달고 있었다.
이건우가 그 중 한 댓글을 소리 내서 읽었다.
“칠칠치 못하게 선물을 떨어뜨린 걸로 보아, 저 산타토끼는 은영이가 분명하다.”
큭. 몇몇 멤버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은영 선배님 진짜 물건 잘 떨어뜨리긴 하더라.”
“걔 지금까지 핸드폰 액정 3번 박살냈을 걸?”
“히익.”
그때였다.
“이거 진짜야?!”
“대박…, 이거 어떡하냐?!”
함께 대기실을 사용하는 V12 쪽이 크게 웅성거렸다. 그러면서 몇몇 멤버들이 어스래빗 쪽을 돌아보았다. 마치 이 소식을 아는지 궁금하단 얼굴로.
“선배님들, 이 기사 보셨어요?”
그리고 어스래빗 멤버들이 무슨 일 있나, 하는 얼굴을 하고 있자, V12 멤버 중 두 명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중 한 명은 배우 김주원의 동생이라고 소개했던 김찬이었다.
“엄청 큰 기사 터졌어요.”
“……?”
“뭔데요?”
김찬이 한율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단독]히아신스 라움, 블블 티스트 8개월 째 열애 중!]
함께 머리를 모아 기사를 본 어스래빗 멤버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얼….”
“8개월?!”
기사엔 선글라스나 모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녀가 데이트를 하는 사진 여러 장과, 두 사람이 히아신스의 라움이나 블블의 티스트란 걸 증명하는 단서까지 세세하게 첨부되었다.
-이제야 터지네ㅋ 저 바닥 관계자들은 얘네 사귀는 거 거의 다 알고 있었다던데
-8개월? 8개월이라고???
-8개월이나 됐는데 이제야 밝혀진 거...? 첩보작전 수준으로 만났나ㅋ
-얘네 국내에 붙어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될 텐데 ㅈㄴ신기ㅋㅋㅋㅋ 진짜 바빠도 할 거 다하는 구나ㅋㅋㅋ
-역시 동물의 왕국♡
-정신들 차려. 아무리 연예인한테 명품 선물하고 돈 갖다 바쳐도 얘넨 지들끼리 사귄다. 이게 현실이다.
예고 없이 갑자기 터진 인기그룹 멤버 간의 열애설에, 댓글 대부분은 비아냥거림 일색이었다. 두 사람을 비롯해 두 팀, 더 나아가 아이돌 전부를 싸잡아 비난하는 악플도 많았다.
어제 블블의 분위기가 안 좋았던 게, 이 기사가 터질 걸 미리 알고 있어서였나.
“와…. 한동안 시끄럽겠네….”
“실검에도 벌써 올라왔어.”
“이제 웬만한 이슈는 다 이 열애설에 묻히겠다.”
“난리 났네.”
단아하지만 몸매를 강조하는 드레스를 입고, 삐딱하게 다리를 꼬아 앉은 이희우는 핸드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무릎을 담요로 덮어주던 매니저가 물었다.
“응? 뭐가?”
블블과 히아신스 멤버 간의 열애설 기사로 소란스러워지는 가수들의 대기실과 달리, 시상자들이 있는 대기실은 비교적 조용했다.
“인기 많은 아이돌 둘이 연애한다고 사람들이 난리야.”
기사 제목을 훑은 매니저가 쯧쯧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고. 한동안 시끄럽겠네.”
이희우는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수십 개씩 새로 달리는 댓글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전에 누구누구 연애한다고 밝혀졌을 때보다 사람들 반응이 더 격해.”
“제설 씨랑 영아 씨? 그거야 당연하지. 여돌보단 남돌 팬들 화력이 굉장히 사납고 날카로우니까. 그리고 배신감도 장난 아니게 들 거 아냐. 팬들한테 사랑한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왔다고 해놓고, 뒤에선 지들끼리 연애한 거잖아. 속이 안 뒤집히겠어?”
“언니 경험담이야?”
“…묻지 마라. 10대 때 받은 상처를 들춰내지 마라. 그나저나 희우 너 오늘 진짜 예쁘다. 셀카 좀 찍자.”
“그래.”
이희우는 핸드폰으로 카메라 앱을 실행해 높이 들었다.
“섹시하게 가슴골 좀 나오게 찍어볼까?”
“찍는 건 상관없는데, SNS엔 올리지만 마. 또 악플러들 꼬일라.”
“하아…. 요가로 꾸준히 몸 라인 다듬으면 뭐 하냐. 보여줄 사람도 없….”
“커흠!”
그때, 언제 왔는지 뒤에서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각도를 올려 다가온 상대를 확인한 이희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나 이내 반듯하게 펴면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제설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이희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응, 꺼져.”
그러나 이제설은 오히려 미소에 농도를 더했다.
“누난 정말 여전하구나.”
이희우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핸드폰 카메라 렌즈를 자신에게 맞췄다.
“셀카에 같이 찍히고 싶지 않으면 이만 가는 게 좋을 걸?”
그러곤 최대한 예쁘게 나오도록 밝게 웃으면서, 찰칵.
“…야. 누가 멋대로 들어오래.”
찍힌 사진 뒤엔 황급히 몸을 낮춘 이제설이 들어와 있었다. 여유롭게 얼굴 옆에 브이 자까지 그려서.
“네 여친한테 보내줄까?”
“그래주면 고맙지. 걔가 질투하는 모습 엄청 예쁘고 사랑스럽거든.”
“…….”
“그렇다고 못 볼꼴을 본 사람처럼 썩은 표정을 짓는 건 너무하잖아. 예쁜 얼굴 그렇게 쓸 거야?”
“하.”
이희우는 짧은 비소를 흘렸다.
“시간이 지나긴 많이 지났나봐?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보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곁에 계속 있는 게 눈치 보였는지, 어느새 매니저는 저만치 떨어져 딴 짓을 하고 있었다.
이제설이 쓴 웃음을 지었다.
“누나 반응을 보니… 아직 멀었네.”
이희우는 이제설과 함께 찍힌 사진을 삭제하며 대답했다.
“알았으면 이만 꺼져줄래?”
“그래, 알았어. …아.”
몸을 돌리려던 이제설이 다시 이희우를 바라보았다.
“위에도 뭐 좀 걸치고. 목이랑 어깨 다 드러났잖아.”
“…….”
이희우는 말없이 이제설을 바라보다가 생긋 입가를 올리면서 몸을 낮췄다. 그러곤 굽이 뾰족한 13cm 킬 힐을 벗어 무기처럼 쥐었다.
“꼭 곱게 말로 하면 안 듣지.”
이제설은 황급히 도망쳤다.
* * *
오후 6시 30분. 이 시작되었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을 도배한 굵직한 스캔들이 터졌으나, 두 주인공을 품은 RMMA는 무슨 일이 있냐는 것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지정된 대기석에 앉은 가수들도 초반엔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블블과 히아신스 쪽을 힐끗거렸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아얏, 아야얏! 귀걸이에 선 걸렸어, 선!”
턱시도를 입고 얌전히 대기석에 앉아 있다가, 무대에 오르기 30분 전이 되어서야 대기실로 돌아온 어스래빗 멤버들은 다급히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었다.
백스테이지에선 마이크와 인이어가 잘 작동되는지 체크했다. 이렇게 큰 공연장에선 사람들의 기척과 함성으로 본인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데다가 반향도 크게 어긋나,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어스!”
“래빗!”
“가자!”
준비가 끝난 후엔 암전된 중앙무대 위로 이동, 더와월 안무대형을 갖췄다. 한율은 차남석과 등을 맞대고 서서,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시상무대를 보았다.
실제론 멀지만, 그 뒤에 설치된 대형 LED전광판을 통해 배우 이희우의 모습이 크게 나왔다. 함께 시상자로 나온 일본배우와 능숙한 일본어로 시상자로 참석한 소감을 읊은 그녀가 봉투 속 내용물을 꺼냈다.
[2017년 RMMA in JAPAN.]
깨끗한 발성과 매끄러운 딕션이 거대한 공연장에 울려퍼졌다.
[베스트 OST상.]
이희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해사하게 웃으면서 파트너에게 발표를 양보했다. 곧 어설픈 한국어 발음으로 베스트 OST 상을 받은 곡명과 가수 이름이 호명되었다. 박수소리, 호스트와 시상자들의 축하 멘트 그리고 소감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대 위 어스래빗 멤버들은 대형을 갖춘 그대로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작게 꼼지락은 거릴지언정,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아직 마이크를 켜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므로.
참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그들이 서있는 무대 위 조명이 부드럽게 밝아졌다. 한율은 어제와 오늘 아침에 진행한 리허설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발끝마다 별 닮은 이슬이 번져.]
시상무대 뒤에 설치된 거대한 전광판에는 어스래빗과 대기석에 앉아있는 가수들, 관객석이 정신없이 잡혔으나, 중앙무대 위에 설치된 4면 전광판엔 한율을 비롯한 어스래빗 멤버들의 모습만이 클로즈업 되었다.
[푹신하고 단단한 세상이 넓어져가.]
지난번 소리구름어워즈에 이어서 또 한 번.
이곳에 모인 수만 명. 그리고 전 세계 200여 지역에서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눈에 한율의 얼굴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the sky above the clouds.]
그 국장 아들이 전데요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아림 엔터테인먼트. 대표실로 올라온 홍보팀장은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아직도 전부 꺼져 있습니다. 회사도, 개인 핸드폰도.”
“후….”
아림 대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바로 몇 시간 전, 아림을 대표하는 걸그룹 히아신스 멤버의 열애설이 터졌다. 만약 다급하게 실검을 장악해야 하는 연막이 필요했다면 간단한 언질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그리고 그가 아는 한, 지금 이런 식으로 급하게 덮어야 할 이슈도 딱히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조금 전 고동 대표에게 연락해봤지만, 고동 대표도 앗싸가 갑자기 뒤통수를 칠 줄 몰랐다며 떠들었다. 진심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목소리로.
‘이것들이 감히 손을 잡고 우릴 물 먹여?’
그것도 하필이면 RMMA처럼 큰 시상식이 열리는 날에.
대표는 매니지먼트부 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부장님은 오늘 RMMA 끝나는 대로 히아신스 애들 전부 외부 연락 차단시키고, 내일 제일 빠른 비행기로 들어오게 하세요. 그리고 매니지 직원 전부 밥 든든히 먹이시고.”
“네?”
“히아신스랑 원카운트 국내 스케줄, 전부 새로 조정하고 협상 들어갑니다.”
이렇게 까발려진 이상, 고동으로 넘긴 정보가 그들의 이익이 되도록 놔두고 싶진 않았다. 그쪽 신인 보이그룹을 은근히 끼워 팔아줄 의리도 사라졌고.
사실상 며칠 빡세게 야근하라는 소리였으나, 부장은 대표가 앗싸보다 고동 엔터 측에 더 화가 났다는 사실을 눈치 채곤 그의 감정에 동조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한편 그 시각, 도쿄에서 열리는 RMMA에서는 막 남자신인상 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2017 RMMA 남자신인상.]
대형 전광판 화면이 남자신인상 후보팀 숫자로 분할되었다. RMMA에 참석한 팀은 앨범 재킷 이미지가 아닌, 현재 대기석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어스래빗 화면에는, 긴장한 얼굴로 시상무대를 바라보다 화면에 제 모습이 크게 잡히자 놀라는 차남석에 이어, 두 손으로 제 눈을 덮은 박가람이 나왔다.
뜸을 들이던 시상자가 올해 RMMA 남자신인상을 호명했다.
[…블루액션!]
“아.”
이름이 호명되는 것과 동시에, 한율은 옆에 앉은 유호의 탄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한율 역시 축하한다는 얼굴로 박수를 치며 블루액션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블루액션 멤버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로 입을 쩍 벌리며 벙벙한 표정을 짓거나,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올해 4월에 데뷔한 블루액션은 초동 앨범 판매량….]
짝짝짝짝. 장내에 블루액션이 신인상으로 뽑힌 이유들이 열거되었다. 그들이 시상무대로 올라가 상을 전달받는 동안에도, 어스래빗 멤버들은 카메라에 아쉬움이 잡히지 않도록, 축하하는 얼굴로 무대를 향해 박수쳤다. 그리고 블루액션 리더가 마이크 앞에 서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정말 너무 얼떨떨해서….]
올해 RMMA의 신인상 수상 기준은 온라인투표 30%, 심사위원 30%, 앨범 판매량 15%, 디지털 판매량 25%.
한율은 울먹거리면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블루액션 리더를 보며 생각했다.
‘음원, 음반 판매량이 블루액션보다 처지긴 했지.’
그러나 이처럼 ‘쟤네가 우리보다 음악적 성적이 높아서 받나보다’라고 무덤덤하게 넘기는 한율과 달리, 방송을 보고 있던 어스래빗 팬들이나 조금이라도 이 바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신인상 블루라고? 어스가 아니라?
-아니 성적은 고만고만하기는 했는데ㅋ 노래나 무대는 어스 쪽이 더 낳지 않았나?
-뮤닷 도랏? 고동한테 접대 받아서 욕 처먹어놓고 또 고동한테 상을 준다고?
-ㅋㅋㅋㅋㅋㅋㅋ어이없어서 웃음만 나오네
-낳(x), 낫(o)
-남돌은 관심 밖이지만 이런 나도 블루 어쩌고 듣보들보다는 서한율은 잘 아는데?
-신인상은 인기로 받는 상 아닙니다. 악플은 모조리 PDF 따서 고동에 보낼 테니 말 함부로 하지마세요.
-ㅅ1발 어쩐지 ㅂㄹㅇㅅ한테 무대 40초 더 준다 했닼ㅋㅋㅋㅋㅋ
-이번엔 또 뭘 받아 처먹은 거냐 뮤닷
-이래서 심사위원 점수 비율이 높으면 안 되는 거
-ㅇㅅㄹㅂ 못 받아서 배 아픈 건 알겠는데 열폭들 적당히 하세요. 숫자는 거짓말 안 합니다.
-팬사인회, 팬미팅 당첨확률 높이려고 앨범 사재기해놓고 숫자 ㅇㅈㄹ
-말은 바로 하자. 앨범 구입으로 당첨되는 이벤 횟수도 ㅂㄹㅇㅅ이 ㅇㅅㄹㅂ보다 더 많았잖아 자연스레 판매량도 올라갔겠지
-그런 경쟁률 높은 것도 능력이고 성적이야 ㅂㅅ들아 패자가 ㅈㄴ 말 많네
-ㅂㄹㅇㅅ에 방송국 국장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