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림 엔터테인먼트와 고동 엔터테인먼트에서 히아신스의 라움과 블블의 티스트의 열애설에 대해 공식입장을 내놓은 건 수요일인 13일이었다. 두 소속사의 공식입장은 모두, 두 사람의 열애사실 인정.
실검은 다시 라움과 티스트의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 15일. 고동 엔터에서 또 하나의 공식입장 기사가 나왔다.
[[공식]블블 티스트, 고동과 재계약 ‘의리’]
[보이그룹 블랙블러드의 멤버 티스트가 고동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14일 고동 엔터테인먼트 측은, 티스트는 다른 블블 멤버들처럼 전속계약 만료가 4개월이나 남았으나 블블에 대한 애정과 연습생 생활부터 데뷔까지 함께 한 당사와의 의리를…(중략).
티스트가 고동 엔터와 재계약을 체결함으로서, 다른 블블 멤버들의 재계약 여부와 팀의 존속을 향한 팬들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한편, 티스트는 히아신스 라움과 열애사실을 인정하고 공개연애 중이다.]
-스캔들로 통수치고 민폐를 끼쳤는데 재계약을 했다고???
ㄴ딱히 통수까진 아니지 않냐 돈도 벌 만큼 벌어다줬을 텐데
ㄴ팬들 통수 거하게 맞은 건 생각 안 함?? 쌍욕 박고 싶어 미치겠네 진짜
-어... 음... 그냥 말 아낄래요ㅋㅋㅋㅋ
-속도위반 결혼도 아니고 연애니까 뭐... 그렇긴 한데ㅋ 좀 웃긴다ㅋㅋ.. 애들한테 민폐 끼쳐놓고 고동에도 눌러앉는다는 게ㅋ
-어차피 재계약해도 3, 4년 지나면 다들 군대 갈 거잖아. 그 전까진 블블로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이긴 함..
-회사랑만 의리를 쌓았낰ㅋㅋㅋㅋ ㅅ발 지금까지 같은 팀 멤들이랑 같이 개고생해놓고ㅋㅋㅋ 이왕 이렇게 된 거 ㅌㅅㅌ 빼고 새롭게 팀 만들자
-의리란 단어 쓰지 마세요. 나머지 애들이 다른 데 가면 그건 의리가 없는 거임?
ㄴㅇㅈ 의리도 서로 신의가 깔린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말인데ㅋ
ㄴ연애질로 팀 의리 깨놓은 애가 의리로 재계약한다니 ㅈㄴ모순쩔어ㅋㅋㅋㅋㅋ
-4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재계약을 했다고? 뭔가 딜이 오간 냄새가 나는데ㅋ
“이상하네요.”
‘하양토끼, 까망토끼’의 <눈밭의 산타토끼>와 23일에 있는 크리스마스 봉사, 24일 플리마켓에 대한 홍보 라방을 위해 모인 회의실. 아직 오지 않은 멤버들을 기다리던 한율은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며 말했다.
“예전에 선배님들 얘기하는 거 들었을 땐 다들 재계약 안 할 것처럼 보였는데.”
SNS로 군 입대 암시나, 언성을 높이며 다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제각기 다른 기획사로 뿔뿔이 흩어져도 팀이 유지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한 회사에 소속되어있을 때에 비해선 연습 스케줄 하나 맞추는 것부터가 힘들어질 터다.
같은 기사를 보던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도 그렇게 났었지. 전원 재계약 가능성이 낮다고. 실제로도 최근에 블블 선배님들, 회사로부터 방치당하는 느낌이었잖아.”
“그런데 보통 4개월이나 남은 시점에 재계약을 체결해요?”
“그럴 리가. 전속만료 기일이 다가올 때 즈음에야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지. 그동안 더 좋은 선택지가 생길 가능성이 높잖아. 그리고 블블 정도면 FA시장에 나와도 서로 모셔가겠다고 할 회사도 많을 텐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이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다른 멤버들이 다른 기획사로 갈 걸 뻔히 알면서 이렇게 보란 듯이 재계약을 체결하고, 기사도 티스트 선배님 혼자 블블 존속을 위해 먼저 나서서 재계약을 한 것처럼 은근히 띄워주고 있으니.”
짧은 한숨을 쉰 후 이건우가 말을 이었다.
“이미 멤버들 간에 얘기가 오간 상황 아니면, 지금쯤 블블 선배님들 분위기 엄청 어색할 것 같다.”
벌컥! 그때 라이언이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잔뜩 들뜬 상기된 얼굴로.
“이프림이랑 같이 낄 반지 굿즈 샘플 나왔어!”
멘버들은 동시에 핸드폰을 내려놓곤, 라이언이 가지고 온 반지 굿즈 샘플을 보기 위해 몰려갔다.
달칵. 라이언이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은빛을 띤 반지의 겉엔 멋진 필체로 ‘EPRIM’ 음각이, 안쪽엔 ‘Earth Rabbit’이 새겨져있었다.
“오, 예쁘다.”
“빨리 라방에서 자랑하자.”
“히히.”
벌써 1년
“솔직히 나도 이렇게 끝내긴 싫어.”
보이그룹 블랙블러드의 숙소. 거실엔 블블 멤버 7명 전원이 모여 있었다. 어색한 적막 속에서 산우가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하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란 느낌이 강하게 오니까. 하지만 이미 회사와의 신뢰는 깨졌고, 난 이제 매니저 형들한테 내 지갑, 핸드폰 맡기는 거 불안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
“특히나 연애한다고 인기가 떨어지니까, 그걸 빌미로 후려치듯 딜을 제안한 이번 행태에 완전히 질렸어. 그래, 그 사람들이야 기업이고 우리는 상품이니까, 어떻게 하면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얻을까 궁리하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난 이제 날 사람으로 봐주는 곳에서 일하고 싶거든.”
“…산우 너야.”
묵묵히 있던 티스트가 입을 열었다.
“노래도 잘 부르고 연기하라고 불러주는 곳이 있으니까 그런 말이 쉽게 나오는 거야.”
“그래서, 솔로 앨범 몇 장 내준다는 말에 넘어간 거야?”
“한심하게 보이겠지만… 나 나름대로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거래였어.”
티스트는 마른세수를 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며칠 동안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해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우리 이제 앞날을 확실히 계획해야 하는 나이잖아. 점점 나이가 많아질수록 인기는 떨어지고 무릎 연골도 닳을 대로 다 닳아서 안무에도 한계가 올 텐데 군대까지 갔다 와야 돼. 그리고 제대하고 나오면 아저씨야. 누가 불러줘? 제대하면 제대했다고 반짝 관심 한번 받겠지만, 그 후엔? 예능 나가서 과거 추억 팔이 토크나 해? 그런 것도, 먼저 다녀와서 줄줄이 대기하는 선배님들이 어디 한 둘이야?”
“하….”
티스트의 말에 멤버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티스트의 불안은 모두의, 어쩌면 아이돌 전부의 불안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젊고 빛나는 후배들이 늘어난다. 계속해서 달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그들에게 머리채가 잡혀 뒤로 나동그라진다.
바로 정신 차리고 다시 일어나도 이전처럼 달릴 수 있을까. 따라잡을 수 있을까.
“모르고 들어온 길 아니잖아.”
“머리론 안다고 생각했지, 각오도 충분히 했다고. 지금 인기도 다 내가 꺾어지는 순간 숭덩숭덩 썰려 나갈 거라고. 그런데… 막상 이번 일로 팬들이 배신자라고 욕하고, 내 굿즈 불태우고 그러니까… 다 내 착각이었단 걸 깨달았어. 불안해, 많이. 난 할 줄 아는 거라곤 무대에 서는 것 밖에 없으니까.”
“…….”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한테, 형들한테 강요하고 싶지 않아. 부탁하는 것도 염치없다는 거 잘 아니까. …미안해.”
다시 거실에 무거운 한숨이 번졌다.
“…지난번에도 술 마시면서 얘기했지만.”
조금 전보다 적막이 더 길어질 때 즈음, 민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난 당분간이라도 날 제각기 다른 프레임에 가둬놓고 거기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사람들, 희롱해도 되는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한테서 좀 떨어지고 싶어.”
“사생?”
“사생은 당연히 포함이고….”
민준은 뭐라 더 이어서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닫았다. 잠시 심호흡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무대 좋아해. 팬 분들도 좋고, 노래도 계속 부르고 싶어. 그런데 지금 상태에선 이대로 가다간 만들어진 나랑 진짜 내가 스스로도 헷갈릴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러니 뒤죽박죽이 되기 전에 좀 떨어져서 차분히 돌아보고 싶어. 그리고 우리 회사, 더는 싫어. 이유는 산우 형이랑 같아.”
멤버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팀의 존속이 아닌 해체로 의견이 기울여지고 있으나, 아쉬움을 표하기엔 각자의 생각과 고민, 바람이 너무 잘 이해되었다.
“팬들에겐 미안하지만….”
“미안해도, 우리가 우리를 먼저 챙기는 게 올바른 순서잖아.”
“당분간 쉬고 싶은 거면… 그럼 민준이 넌 회사 아직 안 정한 거야? 연락 오는 곳 많잖아.”
“갈 곳은 정했어.”
“어디로?”
민준은 제게 묻는 수재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섭섭하다, 형? 같이 가자 그랬잖아.”
“…군대?!”
“너 그거 그냥 한 말 아니었어?”
민준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선배님들이 말하길, 머리 식히기엔 거기만큼 좋은 곳이 없대.”
* * *
12월 19일 새벽, 뮤닷의 <락뮤닷> 공용대기실.
“크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구나.”
어스래빗 멤버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껏 꾸며진 대기실 내부를 들뜬 얼굴로 둘러보다가 배정받은 칸막이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작년에 다 같이 복지센터에서 김장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나 지났다.”
“심지어 그땐 데뷔도 하기 전이었지.”
“세월 참.”
“후후….”
“…….”
많아봤자 고작 만22세 이하인 아이들이 꼭 인생 다 산 사람들처럼 아련한 눈빛들을 하고 있다. 한율은 그런 멤버들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크리스탈 래빗과 어스래빗의 프로젝트그룹, 하양토끼, 까망토끼의 <눈밭의 산타토끼>를 방송에서 선보이는 날이었다. 그러나 생방송 본무대는 오르지 않고 사녹만 하기로 했다. 한율과 차남석은 드라마 촬영, 크래는 해외 스케줄을 위해 저녁 비행기를 타야 하는 까닭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드라이리허설. 무대는 다른 때보다 더 넓었지만, 15명이 나란히 서자 좁아보였다.
크래가 먼저 선창했다.
“하양토끼!”
낭랑한 목소리에 이어, 힘찬 목소리.
“까망토끼!”
“입니다!”
15명의 목소리가 섞여 크게 울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조정실과 연결된 스피커에서 화답이 돌아왔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안무 없이 앉거나 서서 부르는 노래라, 드라이리허설은 무난하게 OK사인을 받았다.
“래빗 여러분, 나중에 봅시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스태프들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한 후엔 스튜디오에서 퇴장.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들은 마주치는 스태프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러다가 주변에 사람이 얼마 없을 때, 앞에서 걷던 채아가 휙 돌아보더니 한율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음!”
“……?”
맥락 없는 제스처. 한율은 의아한 눈으로 채아를 바라봤지만, 채아는 히죽 웃으면서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큭. 옆에서 함께 걷던 유호가 낮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한율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스태프 분들이 평소보다 인사를 잘 받아줘서 그래. 네 덕분이라고.”
아아.
타사의 국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만큼 대단하진 않지만, 워낙 인맥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좁은 바닥이다 보니 태도만 조금 조심하는 것일 터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좋은 걸까.
“그나저나 우리 봉사활동이랑 플리마켓 참가신청 어마어마하다고 하더라. 특히 우리가 라방에서 반지 굿즈 샘플 보여준 이후에 더 가파르게 치솟았대.”
“50명 한정으로 특별히 숫자까지 새겨진 굿즈를 팬들 중에서 제일 처음 갖게 되는 거잖아. 한정판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을 제대로 자극시킨 거지.”
“어?”
“안녕하세요!”
그때 복도 맞은편에서 수수한 차림의 감성소녀 멤버 6명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크래 멤버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어스래빗도 따라서 꾸벅.
“와, 부럽다~.”
감소 멤버인 순형이 조금 과장된 톤과 표정으로 웃으면서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 같은 회사 식구들끼리 앨범 냈다면서요?”
“거창하게 앨범까진 아니고, 디지털 싱글 음원 하나입니다, 선배님.”
대답하는 라나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스며들어있지만 다소 딱딱했다. 그러나 순형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래도 연습하느라 진짜 자주 만났겠다. 조금 부럽.”
“정말 부러우시면 선배님도 연습생으로 있는 후배들 빨리 데뷔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응원하겠습니다, 홧팅!”
“네, 홧팅할게요. 귀여운 후배님도 홧팅!”
오고가는 가식적인 웃음소리와 목소리에서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이상한 대치와 분위기는 감소 리더인 제유가 끼어들며 곧 깨졌다.
“드라이리허설 늦겠다. 우린 이만 갈게요.”
제유가 먼저 움직이자 감소의 다른 멤버들도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미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리는 순형의 팔을 잡아끌고 갔다. 그러다 일순 시선이 마주친 한율에게 미미가 한쪽 눈을 찡긋 거렸다.
“다음에 또 봐, 한율아.”
한율은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였다.
“수고하세요, 선배님.”
“아까 크래 선배님들이랑 감소 선배님들 분위기 좀 이상하던데. 원래 사이가 안 좋았었나?”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이건우가 유호에게 물었다. 유호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에 좀 다퉜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때 이유를 물어봤었는데, 우린 알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
“라나 선배님이 그런 태도를 보일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차남석이 한율 옆에 슬쩍 다가와 앉았다.
“따로 연락 주고받은 적 없지?”
주어는 빠졌지만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연락처도 몰라요.”
“그래, 얽혀봤자 너만 손해니까 지금처럼 적당히 거리 유지해. 앞으로도 괜히 친한 척 다가오는 사람들도 좀 조심하고.”
“네.”
몇 시간 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과하지 않은 메이크업과 머리스타일, 남친 룩으로 비춰지는 따뜻한 분위기의 옷을 걸치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무대 앞에는 어스래빗과 크래의 팬덤인 이프림과 달나라주민이 200석의 객석을 반씩 채우고 있었다.
어스래빗과 크래가 등장하자 우렁찬 목소리와 높은 톤의 환호성이 크게 울렸다.
와아아!
꺄아아!
팬들 앞에서 비즈니스를 넘는 다정한 장면을 연출해선 안 되기에, 어스래빗과 크래는 서로를 쳐다보는 일 없이 팬들과 스태프들에게만 시선을 주며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눈밭의 산타토끼>는 곡 분위기상 일부러 응원법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팬들은 조용히 응원봉과 슬로건을 흔들었다. 두 팬덤이 다함께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박자까지 딱딱 맞춰서.
참 놀라운 광경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녹은 두 번 만에 OK. 어스래빗과 크래는 각자의 팬덤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오늘 정말 와줘서 고마워요!”
“갈 때 꼭 차 조심하고! 감기조심하고!”
“너희도 조심히 잘 갔다 와!”
“이번 주말에 봐!”
다시 스튜디오를 나온 후에는 대기실 앞 복도에서 크래와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다.
찰칵.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렇게 WB래빗의 프로젝트그룹, ‘하양토끼, 까망토끼’의 짧디짧은 첫 활동이 끝났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여러 매체와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12월 23일. 어스래빗은 추첨으로 뽑힌 팬 20명과 함께 무료 급식 봉사에 나섰다. 본래는 작년처럼 크래와 함께 하려 했으나, 그러면 여러모로 복잡할 것 같다고 하여 이번엔 완전히 다른 곳에서.
팬들은 처음엔 멤버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에도 퍽 쑥스러워했지만, 함께 음식에 들어갈 재료를 옮기고 다듬고 조리를 하는 동안 점차 익숙해졌다. 그 모습을 찍는 카메라에도.
“와, 사학과면 역사에 대해서 엄청 빠삭하시겠다. 그럼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머릿수건과 마스크, 앞치마, 장갑을 끼고 콩나물을 다듬던 강보배가 마주보고 앉은 팬에게 물었다. 진지한 얼굴로.
“정말 우리가 곰의 자손일까요?”
“아니요.”
팬들 중엔 익숙해지다 못해 과하게 주접을 떠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내가 이 광경을 실제로 영접하게 될 줄이야…!”
…탁. 빠르고 정확한 칼솜씨로 당근을 채 썰던 한율은 손을 멈추곤 팬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오면 위험해요. 한 걸음 뒤로.”
“네엡!”
아침 9시부터 시작된 봉사활동은 점심에 무료급식을 나눠주고 설거지 및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끝내고 나서야 끝났다.
유난히 주접을 부리던 팬이, 참가선물로 받은 한정판 반지 굿즈를 높이 들며 외쳤다.
“그리고 나의 손에 쥐어지는 절대ㅂ…!”
“안 돼! 자칫하면 저작권법에…!”
옆에서 박가람이 입을 크게 벌리며 경악한 표정을 짓자, 팬이 잽싸게 정정했다.
“절대무적 지구의 반지!”
“오오오!”
짝짝짝!
한율은 다른 멤버들, 팬들과 함께 웃으면서 박수를 치다가,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솔직한 내 감상인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팬들과 함께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다녀온 다음 날, 어스래빗은 플리마켓이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수익금 전액 소아암 어린이 돕기 플리마켓♡]
이번 플리마켓은 WB래빗 엔터 단독이 아닌, 다른 기획사 소속 연예인들도 참여한 이벤트였다. 그러나 물품을 내놓은 당사자들이 모두 행사장에 나오는 건 아니었다. 입장 인원도 사전추첨으로, 개별적으로 장소를 안내한 까닭에 행사장은 번잡하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넓은 홀엔 온갖 다양한 물품이 매장처럼 진열되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산타 혹은 루돌프 복장을 하고선, 입장 자격을 확인받고 번호표 순서대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한율은 루돌프 뿔이 달린 머리띠에다가 갈색 망토를 둘렀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이번 플리마켓 입장 인원은 2백 명. 이 중 30명만 어스래빗 그린라이브 팬클럽에서 뽑힌 인원이었다. 그래서 손님 중엔 어스래빗 멤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매장 벽면에 붙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고 나서야 연예인이구나, 깨닫는 정도.
“저기, 혹시 장난감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남편이 무슨 항공모함 장난감인가 뭔가 그거 꼭 사 오라고 해서요.”
“항공모함 프라모델은 이쪽에 있어요.”
한율은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안내했다.
“감사합니…, 80만 원?!”
고마운 얼굴로 따라오던 손님이 프라모델 박스 앞에 놓인 가격표를 보자마자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한율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외숙부께서 미국에 갔을 때 한화로 110만 원 정도 주고 구매하셨는데, 그 가격 그대로 내놓으면 안 팔릴 것 같아서 가격을 30만 원 낮췄어요.”
“어…. 자, 잠깐만요. 이 인간… 아니, 남편한테 전화 한 통만 할게요.”
“네. 모델은 다르지만 다른 항공모함 프라모델이 하나 더 있으니 서두르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연예인들이 이런 행사에 내놓는 물품 대부분은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명품이거나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신청할 때부터 물건들 가격이 아주 저렴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겠으나, ‘장난감’이 이렇게 비쌀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인간아, 80만 원이 누구 집 강아지 이름이니? …그래, 30만 원 깎은 가격이라곤 하더…. …아아, 단순히 조금 비싼 장난감? 그래, 아주 건전한 취미를 가지셔서 감사한데요, 장난감이니까 아들한테 줘도 되지? 같은 유치원 다니는 친구들까지 다 불러서 같이 가지고 놀라고 그럼 되겠다~.”
한율은 구석진 곳에서 남편에게 전화해 조곤조곤 퍼붓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까이 오는 다른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천천히 둘러보세요.”
어스래빗 멤버들은 사진 찍기를 요청하는 손님들과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스래빗 그린라이브 팬클럽 회원 중 입장 자격을 얻고 들어온 팬들과는 준비된 반지 굿즈를 끼고 찰칵.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마워요, 오빠. 앞으로도 이대로 쭉 꽃길만 걸으세요!”
“더 많이 샀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와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했는데.”
“추우니까 목도리 따뜻하게 두르고.”
“메리 크리스마스!”
11시에 열린 플리마켓은 오픈한 지 3시간도 안 되어 물건 대부분이 팔려서 끝났다. 수익금은 천만 단위. 물품을 기부한 배우 중 한 명이 천만 원을 호가하거나 몇백만 원짜리 명품을 몇 개나 턱턱 내놓은 덕분이었다. 씀씀이가 큰 손님들도 많았고.
“수고하셨습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복지재단에서 나온 사람들을 비롯해 각 회사에서 나온 사람들에게도 예의 바르게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론 모두 다 함께 단체 사진 촬영, 찰칵.
“써한, 넌 이제 촬영장 가?”
행사장을 나온 한율은 차에 타고 나서야 루돌프 머리띠와 갈색 망토를 벗었다.
“그래야지.”
“드라마 어디까지 진행된 거야? 그것도 촬영 시작한 지 좀 되지 않았나?”
“두 달 조금 넘었지만, 중간에 사고 있었잖아. 활동이랑 겹치기도 했고.”
“그래서 언제 끝나는데? 우리 1월에 여행가기로 했잖아. 갈 수는 있는 거냐고.”
차남석도 지난주에 드라마 촬영이 모두 끝나, 이젠 스케줄로 바쁜 사람은 한율 뿐이었다.
“빨라도 1월 말에나 끝날 것 같은데.”
“…….”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는 길우성을 보며 차남석이 웃었다.
“개학이 2월 1일 아냐?”
“그라 콘텐츠 촬영도 겸하는 거니까 학교는 빠져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고 보니 고삼즈 이 셋, 이제 두 달만 있으면 고등학교 졸업이구나.”
“미자 타이틀도 일주일 후면 떨어져.”
“아으, 징그러워.”
“지금은 안 징그러?”
라이언이 의아한 얼굴로 이건우에게 물었다. 이건우는 마른 미소를 슥 지으며 라이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
“……?!”
어스래빗 멤버들을 태운 차는 회사 앞에서 멈췄다. 한율은 회사로 들어가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혼자만 조유찬의 차로 갈아탔다.
SNS엔 벌써 오늘 플리마켓을 다녀간 팬들의 후기가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어스래빗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율톢이 입었던 재킷을 겟! ㅋㅋㅋㅋ 중학생 때 입었던 거라 그런지 나한텐 좀 작... ㅋㅋㅋㅋㅋㅋ 옷은 전부 드라이클리닝이나 손세탁으로 깨끗하게 해놓은 후에 가져온 거라 좋은 향기만 났습니다만 저 뵨태 아닙니다 킁킁(진지) 숫자 22가 찍힌 한정판 반지 굿즈도 겟!!! 여러분들 안구보호를 위해 내 얼굴은 가려주는 센스ㅎㅎㅎㅎ #루돌프율톢 #실물진짜대박 #메리톢톢 #퓨마는오지않았어요]
-경쟁률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는데.. 진심 위너ㅜㅜ...
-그렇군요... 퓨마는 오지 않았군요... 지난번 사진에 같이 찍혀서 은근 기대했는데
-율톢 꽃받침하고 눈 감은 거 봐ㅠㅠ저리 청순하고 이쁜 루돌프가 어딨어ㅠㅠㅠㅠ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합니다(넙죽)
그 아래론 다른 이프림의 부럽다는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한율도 셀카를 한 장 찍은 후 자신의 SNS에 올렸다.
[플리마켓 마치고 드라마 촬영장 가는 길. 오늘 와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촬영장에 도착해보니 이프림이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커피차와 간식차까지 보내주어, 한율은 다시 그 앞에서 셀카를 찍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유찬이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이젠 정말 혼자 알아서 잘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