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5일 크리스마스 밤엔, 바로 다음 날 생일인 차남석의 생일파티를 하루 앞당겨서 라방을 하며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29일.
연말 방송가는 그야말로 한 해 동안 큰 활약을 보인 별들의 잔치.
한율은 가수가 아닌 배우로서, 오늘 밤 SBC에서 열릴 연기시상식에 ‘청소년 신인상’ 후보에 이름이 올랐다. 그러나 지금 가는 MBS의 연말 특집방송과 시간대가 겹쳐 그쪽은 불참하기로 했다. 해당 상은 장편 드라마를 찍은 다른 아역배우가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우리가 3사 방송국 연말 무대에 모두 오르다니!”
“흐흐흐.”
어스래빗은 오늘 MBS를 시작으로 다음 날엔 KBC, 이틀 후인 12월 31일엔 SBC의 연말 특집 무대에 한 번씩 오르기로 했다.
아직은 새파란 신인이라서 순서는 모두 1부 초반이었지만, 올해 데뷔한 수십 팀 중 몇 달 전부터 일찍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것 자체가 대단한 성과였다.
“그런데 우리 팀 내일 KBC 가요시상식 신인상 후보로 올라갔잖아. …괜찮을까?”
조심스럽게 묻는 강보배의 말속에 숨은 걱정.
나란히 이름을 올린 후보 중 누구라도 납득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냈다면 몰라도, 성적이 고만고만한 팀들이 붙었을 땐 앞서 다른 시상식에서 상을 받지 못한 팀에게 상을 주는 게 이 바닥의 암묵적인 관례였다.
그러니 평소였다면 ‘RMMA에선 받지 못했으니, 이번 시상식에선 블루액션과 비슷한 성적을 가진 우리에게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들떴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한율이 KBC 국장의 아들이란 사실이 널리 알려진 상황.
“국장 아들이 있어서 상을 줬다는 논란을 피하려고, 일부러 우리를 수상에서 배제할 가능성도 있겠네요.”
자칫 한율을 탓하는 걸로 들리게 될까, 대답 대신 서로를 쳐다보던 멤버들은 당사자가 직접 그 걱정을 입에 올리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좀 아쉽기야 하겠지만.”
한율은 덤덤한 얼굴로 멤버들에게 말했다.
“정말 그런 이유로 떨어지면, 미안해요.”
“……어.”
“정말 미안해 보이진 않지만, 그래.”
“이건 솔직한 내 감상인데.”
유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우리 팀에게 오늘처럼 이런 좋은 자리들이 주어지는 게…, 물론 다른 멤버들도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우리 팀의 인지도를 높여준 한율이랑 남석이, 너희 둘 덕이 크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그런 이유로 떨어져도, 난 괜찮을 것 같아.”
조금 횡설수설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진심으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한번 정돈 너그럽게 봐줄 수 있어.”
한율은 거들먹거리는 길우성을 무시하며 유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받을 수도 있잖아. 우리가 블루액션보다 더 잘했으니까.”
“맞아, 가능성 있어. RMMA랑 다르게 KBC 온라인투표는 국내 투표만 받잖아.”
사실 해외에선 블루액션이 어스래빗보다 인기가 조금 더 많았다. 그 이유는 블블이 블루액션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콘서트를 할 때도 종종 블루액션을 게스트로 부르기도 한 까닭이었다.
어스래빗에게도 크리스탈 래빗이란 인기 많은 선배 그룹이 있긴 하지만, 팬덤 성비 특성상 누나 그룹의 덕을 보기는 힘들었다.
엉뚱한 스캔들이나 안 나면 다행.
“그런 의미에서 우리, 수상소감을 미리 생각해보자.”
“좋지!”
한율은 멤버들이 숙덕숙덕 수상소감 대본을 준비하는 동안,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훑었다.
[블블, 완전체로 서는 마지막 연말 무대 될까]
[블블, 3사 연말 무대 모두 참석! 재계약 언급은 無]
“한율아아.”
MBS 공개홀 대기실 복도 앞.
한율은 평소보다 더욱 업된 텐션으로 다가오는 민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RMMA 이후 3주 만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민준은 다가오면서 활짝 벌린 두 팔 그대로 한율을 가볍게 안았다. 한율은 웃으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다른 블블 멤버들은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 있다고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니에요?”
“쳇. 들켰나.”
대기실 복도에는 가수들의 비하인드 영상을 담기 위한 MBS 측 카메라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일찍 오셨네요? 선배님 순서는 한참 뒤 아니었어요?”
“수재 형 콜라보 무대가 앞에 잡혔거든. 형 혼자만 먼저 보내기도 그렇고, 나도 그냥 일찍 오고 싶어서.”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얼굴은 여러 감정으로 복잡해 보였다. 큰 연말 특집방송을 준비하느라 어수선한 방송국 분위기 자체를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두려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시선엔 많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지난번, 민준이 전화로 물어본 말이 떠올랐다.
『나… 연예인 그만둬도 연락받아줄 거야…?』
정말 해체를 끝으로 은퇴라도 하려는 걸까.
그때 뒤에서 매니저 현장전이 외쳤다.
“한율아, 10분 후 리허설!”
“네, 갈게요.”
민준이 한율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씩 웃었다.
“그럼 리허설 잘하고, 나중에 보자.”
“네.”
한율은 민준을 뒤로 하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
복도에 혼자 남은 민준은 어스래빗 대기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대견한 후배를 바라보던 미소 띤 얼굴 그대로. 그러다가 바로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얽?!”
“…누가 보면 저 귀신인 줄 알겠어요, 선배님.”
대체 언제 다가왔는지, 바로 뒤에는 히아신스의 라움이 서 있었다. 아직 단장 전이라 굉장히 부스스한 새카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으로. 여기에 얼굴도 화장기 없이 창백하고 눈가는 발갛게 부은데다 충혈까지 되어있어서, 정말 귀신 같았다.
“아…, 어, 미안해요. 사람이 있는 줄 몰라서 좀 놀랐어요….”
그렇다고 솔직히 귀신 같다고 말할 순 없었기에, 민준은 머쓱한 얼굴로 카메라의 위치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복도를 돌아다니던 카메라는 어느새 저만치 떨어진 어느 팀 대기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네….”
라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잔뜩 불안한 얼굴로 민준에게 물었다.
“티슷 오빠가 며칠째 연락을 안 받는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무시무시한 직장 상사 아들
MBS 연말 특집방송은 가수들이 곡을 색다르게 편곡하거나 퍼포먼스를 더해, 무대 대부분이 눈과 귀가 즐거웠다.
비록 방송 내내 무대 사이드 객석에 앉아 날아오는 무대 먼지를 모두 마시고, 계속해서 카메라를 의식해야 하는 게 영 불편했지만 말이다.
“와….”
수십 년 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아티스트의 곡을 뮤지컬처럼 편곡한 스페셜 무대가 시작되었을 때.
“역시 수재 형 춤 실력 대박…, 무대 연기도 대박….”
길우성이 입을 쩍 벌리며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율도 블블의 수재와 다른 보이그룹의 멤버, 그리고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과 아이허니의 멤버. 이 넷이 함께 꾸민 무대를 집중해서 보았다.
‘잘하네.’
안무 실력은 물론이고 몰입도와 섬세한 감정연기가 다들 좋았다. 정말 무대를 장악하며 잘 노는 이들만 모아놓은 듯이.
“써한, 오늘 무대 전부 대박이지 않았냐?”
MBS 연말 특집 음악방송은 자정이 훌쩍 지나서야 끝났다.
“선배님들 무대 바로 옆에서 보니까, 여러 가지 배울 점도 더 잘 보이더라.”
생방송 내내 무릎 한번 제대로 못 펴는 자리에 앉아, 한 시도 풀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서 퍽 피곤할 텐데도 길우성은 잔뜩 들떠 보였다.
“이래서 다른 팀이랑 친분을 쌓고 콘서트 앞자리 티켓을 받는 거구나…!”
“아냐…, 그건 아냐….”
옆에서 이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길우성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도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슬슬 에너지 좀 아끼자, 막내야.”
보다 못한 박가람이 말리고 나서야 길우성은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혔다.
“수재 형한테 연락해서 꼭 가르쳐달라 그래야지. 흐힛.”
그렇게 오늘 하루도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히아신스 라움, MBS 연말 특집방송 태도 논란]
[티스트와 라움, 공개 연애 며칠 만에 불화?!]
[득보다 실이 더 큰 아이돌 공개 연애, 라움과 티스트]
블블 쪽은 또 시끄러워지는 모양이지만.
“…….”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핸드폰부터 찾아 인터넷에 들어간 한율은, 연예 뉴스란 메인과 실검을 장악한 이름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개중엔 엉뚱한 이름도 나열되어 있었다.
[수재 미랑 열애]
그러나 이 실검은 어떤 기자의 기사 제목 장난질에서 비롯된 듯했다.
[블블 수재와 크래 미랑, 애틋한 열애 중?!]
[블블의 수재와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이 무대에서 서로 연인처럼 아련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다.
(사진=MBS <연말 특집방송>)]
-세 번 보고 나서야 기레기 낚시질이란 걸 깨달았다..
-....ㅅ1ㅂㅏ르ㅁ!!!! 진짠 줄 알았잖아 이 기레기 새ㄲㅇ ㅑ!!!!
-와... 워... 후... 후우... 순간 치솟은 살기를 가라앉히는 중이다
-낚시질도 정도껏 해라ㅡㅡ 돈이 없어서 쌍욕은 참는다
-27살에 곧 군대도 가는 놈이 20살짜리 여자애 낚아챘다는 소린 줄 알고 도끼부터 찾앗자나요 기자놈아^^
-이 기자 곧 떠비한테 고소미 먹는다ㅋ
ㄴ내 이름은 떠비. 프로고소토끼죠 >ㅅ<)뀨
-같이 연습하는 동안 눈 맞은 걸 재빨리 캐치한 것일 수도 있지ㅋ 이 기사는 나중에 성지글이 될 것이다.
ㄴ(욕). (심한 욕).
ㄴ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ㅁㄹ ㅈㄴ싫어
ㄴ너같은 빠순이가 더 싫다ㅋ
-ㅁㄹ 남자 있지 않나? 애 ㅈㄴ 발랑 까졌다고 소문 장난 아니던데? 아무한테나 꼬리치니까 이런 기사가 뜨지
ㄴ혐생 살던 ㅁㄹ 사생스토커가 지어낸 개소리를 믿는 ㅂ신이 여기 있었넼ㅋㅋㅋㅋㅋ 그 새ㄲ 고소당하고 찌그러진 건 아냐? ㅋㅋㅋㅋㅋ
ㄴ진짜면 어쩔 건데?
ㄴ뭐가 진짠데? 여돌한테 열폭하는 너 자신? ㅋㅋㅋㅋㅋ
ㄴ이제 곧 허위사실유포로 경찰서 출석통지서를 받을 댓글러다.
-수재가 뭐가 아쉬워서 ㅁㄹ을 만남?
ㄴㅁㄹ이 뭐가 아쉬워서 군대 갈 아저씨를 만남?
-그런데 어제 무대에서 둘이 잘 어울리긴 했음ㅇㅇ
이른 새벽부터 할 일없는 사람들 참 많네.
한율은 핸드폰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누르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철컥, 철컥. 삑삑. 마침 매니저가 숙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스래빗 기상!”
* * *
KBC 연말 가요시상식 라인업은 어제 MBS 연말 특집방송과 큰 차이 없었다. 시상식도 겸하는 터라 무대 시간 자체가 적어서 무대를 꾸미는 팀은 적었지만.
어스래빗은 1부 세 번째 무대에 오르기로 하여 드라이리허설도 굉장히 일찍 잡혔다.
“안녕하십니까!”
아직 고데기로 잠재우지 못해 엉망으로 뻗친 머리에다가 편한 트레이닝복 위에 이름이 크게 적힌 리허설 조끼. 어스래빗은 음방 드라이리허설 시간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돌의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다.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손구호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
평소 <뮤직뮤직>은 인사를 해도 딱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안무대형을 갖추는 걸 보고 음악 사인이 내려왔을 뿐. 오늘 무대공연 연출책임자도 뮤뮤PD라, 멤버들은 대답이 돌아올 거란 기대를 하지 않고 안무대형을 갖추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네, 기대할게요.]
“……?”
멤버들은 순간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뮤뮤PD가 웬일이지?
그러나 곧 표정을 수습하며 자리와 자세를 잡았다. 어스래빗이 오늘 가요시상식에서 할 곡은 가장 최신곡인 <있어>.
조명이 환하게 켜진 무대와 대조적으로 그림자가 진 무대 밖에서 카메라 감독이 인자한 미소를 짓는 게 눈에 보였다.
[음악, 큐.]
평소와 다른 일은 모니터링을 할 때도 이어졌다. 음방 리허설 땐 무뚝뚝하게 지적만 하던 스태프가 미소 띤 얼굴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가 하면, 새벽부터 나오느라 고생했다고 살가운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대기실 히터는 잘 작동되냐고, 문제 있으면 바로 말하라는 사람도.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지나가는 스태프들에게도 꾸벅 인사를 하면 그들도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길우성이 한율을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무시무시한 아빠 빽….”
반대편 옆에선 박가람이,
“무시무시한 직장 상사 아들….”
“엄연히 따지면 상사 아들은 아니지 않아?”
“다른 부서 상사 아들은 너무 길잖아.”
“…….”
대기실로 돌아간 후에는 리허설 조끼를 벗고 그 대신 외투를 걸쳤다. 어제 MBS에서도 그랬듯이 오늘 방송은 일반 음방과 달리 사녹이 없는 까닭이었다. 가요시상식이 8시부터 시작이라, 6시 즈음 다시 돌아와 레드카펫을 밟으면 되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수고해. 밥도 꼭 챙겨 먹고.”
그래서 한율은 멤버들과 다른 차를 타고 드라마 촬영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는 수정돼서 새로 온 대본을 숙지하고, 촬영장에 도착한 후에는 인사만 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이러다가 드라마 촬영 끝나면 좀 허전할 것 같아.”
촬영 중 대기시간. 한율처럼 리허설을 뛰고 촬영장으로 온 지헌이 퀭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한율이 너 곧 고3이잖아. 대학은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아니요, 아직.”
“우리 학교로 와. 교수님들이 방송활동 활발히 하는 사람한텐 점수를 후하게 주셔.”
“선배님 아직 졸업 안 하셨어요?”
“졸업하면 군대 가야 하잖아.”
“아.”
오후 4시엔 다시 차를 타고 서울의 샵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어스래빗 멤버들과 합류, 꽃단장을 마친 후엔 레드카펫 입장 시간에 맞춰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는구먼.”
“신인상, 신인상, 신인상, 신인사앙…!”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스케줄을 바쁘게 보내는 동안에도,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다른 이들의 소식도 내용이 달라졌다.
[히아신스 라움, 건강 문제로 KBC 가요시상식 불참]
[블블 티스트, 불화설 잠재운 라움 병문안과 SNS “아프지 마”]
[히아신스, 라움 제외하고 시상식무대 오른다]
새벽에 떴던 수재와 미랑의 실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앞에 한 팀 남았으니까 구두끈 잘 묶었는지 확인하고.”
조유찬의 말에 멤버들이 일제히 상체를 굽히거나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신발 상태를 확인했다. 곧 앞의 차가 아이돌그룹 하나를 내려주고 천천히 떠났다.
어스래빗은 앞의 팀이 포토타임을 마치고 인터뷰를 하는 걸 멀찍이서 보다가, 슬슬 나오라는 스태프의 신호에 심호흡했다.
“한 명씩 천천히, 조심히 내려.”
밴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가장 먼저 문 근처에 앉아있던 박가람이 폴짝 뛰어내리듯 내렸다.
차칵차칵차칵.
“안녕하십니까!”
레드카펫을 밟는 건 소리구름어워즈 이후로 고작 두 번째. 그러나 순서는 비슷했다. 포토존에 서서 포토타임을 가진 후, 레드카펫 MC들과 짤막한 인터뷰.
레드카펫 MC를 맡은 세 사람 중 개그맨 출신의 강바로가 물었다.
“어떠세요? 신인상, 받을 수 있을 것 같나요?”
묻는 말투나 표정이 좀 시비조로 들렸지만, 유호는 겸손한 표정에 부드러운 미소를 덧대며 대답했다.
“후보로 올라간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받을 수 있을 것 같냐고요.”
“아주 사알짝 기대는 하고 있습니다.”
“에이, 여기 KBC 국장님 아드님도 계시잖아요. 한율 씨, 이 방송을 보고 계실 아버지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초면이지만, 참 시청률의 노예 같은 사람이었다.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멤버들과 달리,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메인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 기사 댓글은 보지 마세요, 아버지. 이제 혈압 조심하셔야 하잖아요.”
“다른 할 말….”
“효자네요.”
강바로가 다시 말을 하려는 찰나, 다른 레드카펫 MC인 정태현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아나운서 출신인 그는 몇 달 전, 한율이 나갔던 <목톡톡>의 MC이기도 했다.
“그럼요, 날씨도 상당히 추워졌으니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시청자분들도 다들 건강 유의하셔야 합니다. 이번엔 보배 씨가 가요시상식 참석 소감을 짤막한 프리스타일 랩으로 해볼까요?”
“네!”
인터뷰가 끝난 후엔 안으로 입장. 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이었지만 가는 길에도 사람이 많아, 어스래빗 멤버들은 생글거리는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에 왔던 대기실로 돌아와 문을 닫고 나서야 입꼬리를 싹 내렸다.
“방금 그분 듣던 대로 어그로 장난 아니더라.”
“오늘만 사는 방송인이라더니 진짜였어.”
차남석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용히 말했다.
“괜히 엮이면 피곤한 스타일이라곤 하더라.”
“그래? 어떤데?”
“만약 조금 전 인터뷰로 KBC 측에서 무슨 소리를 들으면,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너튜브에서 구구절절 하소연할 타입. 능숙한 피코와 을질 스킬 소유자.”
“으음….”
“괜찮냐, 써한?”
“뭐가?”
여상히 되묻는 한율을 보며 길우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멀쩡하네.”
그러나 부친은 괜찮지 않을 테니, 한율은 매니저에게 맡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미 부친으로부터 톡이 와 있었다.
-[ㅡㅡ]
-[어떻게.]
-[내가 확.]
앞뒤로 여러 가지가 잘려있었으나,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잘 읽혔다.
[저는 아무렇지 않으니 아버지도 가만히 두세요. 그게 그분 직업이잖아요. :)]
-[그래.]
그러나 부친은 대답과 달리, 사납게 입을 벌리고 하악질을 하는 호랑이의 사진을 떡하니 올려놓았다.
짝짝. 조유찬이 박수로 멤버들의 주의를 끌었다.
“다들 나중에 SNS에 올릴 셀카 좀 찍은 다음에 편히 앉아있어. 화장실은 무대 올라가기 40분 전에 넷씩 다녀오는 걸로 하자.”
“네엡.”
그러는 동안 포털사이트엔 다시 한율과 관련된 실검이 올라오고 있었다.
[KBC가요시상식 국장아들]
[KBC 국장아들]
[KBC국장 한율]
가요시상식은 프로그램 톡창이 따로 없는 까닭에, 방송을 본 사람들은 SNS를 통해 저마다 의견을 올렸다.
-강바로 인터뷰 수준 실화냐 #KBC가요시상식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함ㅋㅋㅋㅋ 거기에서 국장아들이란 소리를 왜 해 #KBC가요시상식
-어스래빗 신인상 받으면 대놓고 국장빽 의심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던데 #KBC가요시상식
-역시 오늘만 사는 주둥이ㅋㅋㅋ #KBC가요시상식
-강바로 이름값 더럽게 못 하네 #KBC가요시상식
-애들도 순간 당황해서 서로 쳐다보던데.. 율톢이 의연하게 대처해서 그냥 넘어갔지ㅋ 이러고 나중에 KBC에서 욕먹으면 욕먹었다고 갑질 당했다고 진상 부릴 거 뻔해서 벌써 속터진다 #KBC가요시상식 #강바로누가섭외했냐
-어스래빗 아부지빽 아니어도 신인상 받을 자격 충분하다!!! 어스래빗 홧팅!! #KBC가요시상식 #지구최강지구톢이 #어스래빗신인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KBC 가요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어스래빗은 무대 순서가 앞이라, 처음부터 가수석에 앉지 않고 대기실에 있다가 백스테이지로 이동했다. 그리고 무대 위 조명이 꺼졌을 때 올라갔다.
이윽고 다시 무대 위 조명이 환하게 켜지고 어스래빗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자, 실시간 TV앱으로 KBC 채널을 보던 사람들의 톡이 올라왔다.
-국장 아들 팀 나왔다
-쟤는 병실에서 엄마 간호 안 하고 왜 여기 있지
-어??
-아 왠지 낯익다 했더니 그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잘생긴 애구나
-국장 아들이 누구임? 뭔 토끼탕에 있다고 하던데
-드라마에서도 존잘이었는데 꾸민 모습 보니 더 존잘이네
-우리 율톢 키 많이 컸다ㅜㅜ
-지금 나오는 십자가 이어커프 흑발이 시사교양국장 아들
-토낔ㅋㄱㅋ탕ㅋㄱㅋㅋ
-시사교양국장 아들이 교양 없이!
-애들 랩 잘하네
무대가 끝난 뒤엔 대기실로 돌아가서 턱시도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무대 아래에 마련된 가수석으로 이동했다.
털썩. <있어>가 댄스곡인데다, 대기실에서 이곳까지 거의 뛰어서 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속으로 애써 눌렀다.
[이어서, 남자신인상 후보 발표가 있겠습니다. 시상은 배우….]
마침 남자신인상이 발표될 차례였다.
한율은 의자 아래에 마련된 음료 페트병을 들었다. 이번 시상식 스폰서 중 한 곳에서 보낸 음료였다. 빠르게 뚜껑을 따서 한 모금만 마시고 도로 닫았다.
시상식 참가 소감을 교과서 읽는 것처럼 어색하게 읊던 시상자들이 봉투 속 내용물을 꺼냈다.
[남자신인상은… 축하합니다.]
가수석을 크게 헤매던 배우와 한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호명했다.
[어스래빗!]
“―우와아아아!”
장내에 조금 전에 불렀던 <있어> 후렴구 부분이 흘러나오고, 박가람과 길우성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멀리 관객석 일부를 채우고 있던 어스래빗 팬덤 쪽에서도 환호성이 들렸다.
꺄아아악!
-오오 받았네?
-솔직히 쟤네 안 줄 줄
-역시 국장 아들 팀이 받네
-국장 빽 없어도 받을 만한 팀입니다. 음해성 발언은 캡쳐해서 신고 들어갑니다
-저거 털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털긴 뭘 털어 투표랑 음원앨범판매성적 다 도합해서 나온 결과로 뽑은 건데
-아빠가 높은 사람이면 아들의 객관적 성적도 후려치는 열폭러들
유호가 박수를 치면서 다른 멤버들에게 일어나라는 듯 돌아보았다. 정말 우리가 받은 건가? 멍하니 주변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치던 멤버들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율도 들고 있던 페트병을 의자 위에 두며 일어났다.
‘받았네.’
무대 위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음악과 박수 소리, 환호성은 그치지 않았다. 시상자들로부터 유호와 이건우가 신인상 트로피와 축하 꽃다발을 받았다.
꾸벅꾸벅. 그들에게 인사를 한 후에야 멤버들은 스탠딩 마이크 앞에 일렬로 섰다. 음악 소리가 작아졌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꺄아아악! 저 멀리에서 이프림이 외쳤다. 토끼야 사랑해엑!!
멤버들은 마이크도 없이 큰 성량을 자랑하는 팬이 있는 곳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웃었다.
“어…. 우선 이 자리에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그렇게 머리를 맞대고 수상소감 대본을 준비하더니, 막상 정말로 받게 되자, 겉으로 의연한 척해도 속으론 적잖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유호가 바보 같이 웃으면서 횡설수설 소감을 말했다.
“가수로서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이 신인상이라는 값진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조금 전 인터뷰 땐 아주 살짝 기대한다고 말했지만….”
유호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가 아차 하며 정면으로 돌아갔다. 아, 이 말은 하면 안 되는구나, 라는 표정.
그러나 그 순간,
“사람들이 오해하니까.”
리더가 삼킨 말을, 다른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 있던 라이언이 대신 뱉었다.
“‘에이, 안 줄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워 노빠꾸
-ㅈㄴ솔직해ㅋㅋㅋ
“그래서 하뉼도 어제, 자기 때문에 신인상 못 받으면 미안하다고 우리한테 미리 사과했거든요.”
거침없이 말하는 라이언의 행동에 당황한 건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율은 애써 웃는 멤버들의 면면에서 속마음이 읽히는 듯했다.
아니, 그걸 솔직히 다 말하면 어떡해.
저 새끼 저거 일부러네.
라이언이 한율을 향해 웃었다.
“하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 모습을 크게 담고 있던 대형 전광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는 한율의 얼굴도 잡혔다.
“다행이네요.”
박가람이 발을 동동거리면서 눈가 아래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아, 나 라이언 때문에 눈물 쏙 들어갔어.”
“그리고 우리가 데뷔하기 전부터 우리를 응원해준 이프림!”
그때 이건우가 적절하게 끼어들어서 어제 준비했던 소감 대본으로 방향을 잡았다. 저 멀리에서 이프림이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꺄아아아!
“이프림이 없었다면 우리 역시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정말 사랑하고! 늘 고맙습니다!”
이어서 차남석.
“그리고 매일 새벽까지 함께 연습하고 고생한 우리 멤버들!”
쩌렁 울렸던 차남석의 중저음 목소리가 확 낮게 깔렸다.
“사랑한다.”
“흐으윽.”
길우성은 멤버들에게 손하트를 날리다가 스스로 오글거림을 못 이겨 혼자 빙글빙글 돌았다. 그걸 옆에 있던 강보배가 바로 잡아 세우는 동안 이번엔 한율이 마이크 앞에 섰다. 무대 아래에서 스태프가 다급한 얼굴로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그리고 우리 WB래빗….”
한율은 WB래빗 대표와 매니저들, 스타일리스트 등. 그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빠르게 부르고 감사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늘 우리를 믿어주고 따뜻하게 지켜봐 주는 가족들!”
“사랑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는 어스래빗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소리로 수상소감을 마무리한 후엔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 서로 어깨나 팔을 토닥거리며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어스래빗의 모습을 담던 화면이 MC석으로 전환되었다.
MC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신인다운, 풋풋하고 솔직한 수상소감이었습니다.]
[신인답지 않은 프로신인 같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정말 소문 그대로였네요.]
-MC들 멘트 모순 충돌ㅋㅋㅋㅋㅋ
-MC들도 당황했네
-국장아들 딕션 쩐다ㅋ 래퍼인 줄ㅋㅋ
-설마하니 국장 아들이 있어서 오히려 못 받을 줄 알았다고,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겠지
-미리 사과까지 했다는 게 더 웃김
-RMMA에선 블루액션이 받았으니까 그냥 어스한테 선심 쓴 거지ㅋ
-응 그래봤자 KBC 시상식 따위 RMMA에 밀린 지 한참 됨ㅎㅎ
-접대 처받아 먹은 뮤닷 RMMA???
-접대하는 기획사보단 그냥 잘난 아부지 둔 쪽이 훨 깨끗하지 뭔 개소리들이야
-서울대 교수 아들이 수능 만점 받아도 아빠 빽으로 만점 받았어 빼에에엑 할 놈들이 많네ㅋ 빽이랑 실력도 구분 못 하는 건가
가요시상식은 4시간 가까이 생방송으로 진행됐지만, 어스래빗 멤버들은 끝까지 집중을 잃지 않았다. 1부 초반에만 무대에 한 번 오르고 그 뒤론 내내 병풍 노릇하며 박수만 치던 때와 달리, 오늘은 묵직하고 예쁜 신인상 트로피가 손에 들린 까닭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러자고 말하지 않았는데, 한 사람씩 트로피를 가지고 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멤버에게 넘겼다. 정말 모두의 보물처럼.
대상 발표가 끝나고 전 출연자가 모두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엔딩 무대. 트로피는 마지막으로 한율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MC가 이른 새해 인사를 던졌다.
[시청자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무대 위 출연자들은 송출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박수를 치고, 카메라가 멀어졌을 때 곁에 있는 다른 가수들과도 꾸벅꾸벅 인사를 나눴다. 꽃가루가 너무 많이 떨어져 더욱 정신없었다.
“신인상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도 퍼포먼스상 축하드려요!”
방송이 완전히 끝난 후에는 계단 근처에 있던 팀부터 차례차례 무대를 내려갔다.
“트로피는 어디에 두면 좋을까?”
“당연히 연습실이지!”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송 중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다른 가수들과 다시 인사. 대기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어스래빗 멤버들은 타인의 시선과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으아아! 신인상이다아!”
“이예에!”
문을 닫자마자 박가람과 길우성이 오두방정을 떨었다. 한율은 트로피를 유호에게 넘기고, 몇 시간 내내 앉아있느라 굳은 몸을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풀었다.
유호가 한 손에 트로피를 든 채 박가람과 길우성에게 일렀다.
“쉿, 다들 조용. 부모님께 전화 안 드릴 거야?”
“아.”
멤버들은 매니저들에게 맡긴 핸드폰을 찾아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해야 하나. 멀뚱히 서 있던 한율도 조유찬에게 핸드폰을 받아 적당히 빈구석으로 향했다.
“…네, 어머니. 안 주무셨어요?”
다음 날인 2017년 마지막 날. 어스래빗은 SBC 연말 특집방송에 출연했다. 그리고 자정이 지나 2018년 1월 1일이 되고 나서야 방송국에서 나왔다.
차에 타자마자 라이언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들어올 땐 열아홉 살이었는데, 나올 땐 스무 살이 됐어.”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
“이제 나와 써한이 팀 내 유일한 10대로군. 후….”
“기뻐?”
“저리 가, 아저씨.”
“…….”
“보배 상처받았다.”
“헉. 미안해, 형아. 내가 말이 심했어.”
한율은 창을 살며시 내려 차가운 밤공기를 마셨다. 밤이 깊었지만, 새해로 접어드는 특별한 날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평소보다 도심이 환했다.
‘앞으로 3년.’
지난 시간이 빠르게 흘렀듯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조유찬이 물었다.
“한율이 넌 내일 정말 간만의 휴일이잖아. 곧장 집으로 태워다 줄까?”
한율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내 스케줄로 바빴으니 오래간만에 조용한 자신의 방, 넓은 침대에서 편히 쉬고 싶었다.
옆에서 길우성이 말에 음률을 실었다.
“나도 퓨마랑 호랑이랑 똑순이랑 똑순이 새끼들 보고 싶은데에.”
“꺼져.”
“…….”
“우성이 상처받았다.”
길우성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차창에 비쳤으나, 한율은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이프림한테 고자질할 테다. 써한이 나한테 꺼지래요, 흑흑흑….”
“너 잘 곳 없어.”
길우성이 예전에 썼던 방을 지금 똑순이 가족이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렇다고 자신의 방에서 재우는 건 싫었다.
“똑순이네랑 같이 자면 되지? 전에 갔을 때 보니까 어머님이 보일러도 뜨뜻하게 틀어놓으셨던데.”
그제야 한율은 짧게 한숨 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길우성이 뻔뻔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내일 낮에 오든가 평생 오지 말든가.”
“낮에 갈게요.”
보배가 기대어린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나도 가도 돼?”
“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작년 1월 1일에도 길우성과 강보배가 집에 왔었다. 차남석도.
시선이 마주친 차남석이 물었다.
“나도 갈까?”
차남석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모양.
“형도 고양이 보려고요?”
“그냥 한 말이야. 할아버지 댁에 가기로 했거든.”
“남석이네 할아버지 궁금하다. 남석이 너랑 닮으셨어?”
“할아버지 젊었던 시절 사진 보면… 나보다 더 잘생기셨어요.”
“히익…!”
경악하는 박가람의 옆에서 유호와 이건우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
“어마무시한 비주얼 집안….”
“아. 라방해야지, 라방. 2018년 1월 1일이 되었으니까, 이프림한테 새해 인사!”
제일 카메라 화질이 좋은 유호의 핸드폰이 가장 앞자리에 있는 한율에게로 넘어왔다. 한율은 핸드폰을 짐벌에 끼운 뒤 그린라이브에 접속에서 라방을 켰다. 제목은 무난하게 [2018년 첫 라이브. -끊김 주의].
“연결됐어?”
“하나, 둘, 셋 하면.”
연결되는 딜레이 시간을 고려, 3초 정도 화면에 비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던 8명의 멤버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하나, 둘, 셋. 해피!”
“뉴 이얼~ 이프림!”
환하게 웃는 그들의 모습 옆으로, 라방이 켜지자마자 접속한 팬들의 인사가 빠르게 올라왔다.
-지구톢!!!!
-해피뉴이얼~~~~♡♡♡♡♡♡♡
-사랑해 어스래빗!!!!!!!!
-방금 무대 넘 잘봤어
-올해도 우리 어스래빗 꽃길만 걷자!!!
-어제 신인상 받은 거 축하해요!!
-끝나자마자 라방 켜줘서 고마워ㅜㅜ 울 톢이들 찐팬사랑 최고다!!!
-울 톢이들도 새해 복 많이 받아>ㅅ<
-싸랑해
-데뷔 2년 차 된 거 축하해☆
-올해는 대상 가자아(๑✧◡✧๑)/아아아아아
접속자 수는 순식간에 만 단위를 돌파했다.
한율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렌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 갈 거다
“잘 뛴다, 우리 냥냥이.”
와옹, 먕.
“조심해, 애들끼리 부딪칠라.”
“…….”
막 일어나서 방에서 나온 한율은, 똑순이 가족이 있는 방에서 들리는 길우성과 강보배의 목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거실 시계는 10시 4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이 낮이에요?”
활짝 열린 문가에 기대며 묻자, 강보배가 웃는 낯 그대로 한율을 돌아보았다.
“미안. 조금 더 늦게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오후에 일이 생겨서.”
“괭이들 보는 걸 포기하게 둘 순 없어서, 어머님께 직접 연락해 양해를 구했다. …아얏. 형아 손을 할퀴면 어떡하냐 이것들아.”
“지금 잔뜩 흥분한 상태라 그래. 조심해.”
“무슨 일이요?”
고양이들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강보배가 일어났다. 접힌 바지 주름을 가볍게 털어서 편다.
“동생이 서울로 놀러 오거든. 혼자 오는 거라 같이 다녀줘야 할 것 같아.”
“동생이면… 형이랑 네 살 차이 난다던?”
“응, 올해 중3 올라가. 고등학생이면 몰라도 아직은 혼자 돌아다니게 두기엔 영 불안해서.”
지난번엔 일부러 캐릭터 샵에 가서 동생이 좋아하는 캐릭터 상품을 잔뜩 사더니. 남매간 우애가 좋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 길치에다 방향치잖아요.”
“괜찮아, 동생이 길을 잘 찾거든.”
“그나마 다행이네요.”
강보배는 한율이 씻고 나왔을 때 고양이 동영상과 사진을 잔뜩 찍고 퇴장했다. 길우성은 보일러가 켜진 따뜻한 바닥에 누워, 새끼고양이들에게 한쪽 팔을 내어준 채 그대로 잠들었다. 그 반대편엔 호랑이가 길우성의 몸에 등을 붙이고 자는 중.
참 남의 집에서 뻔뻔하게 잘 놀고 잘 잔다.
한율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그리고 SNS 업로드.
[1월 1일부터 남의 집에 와서 남의 집 고양이들이랑 잘 자는 뻔뻔한 길우성.]
-뻔뻔한 길우성ㅋㅋㅋㅋㅋㅋ
-아까 보배도 사진 올렸던데ㅎ
-아깽이들 우성이 팔 베고 자는 거 봐 졸귀ㅠㅠㅠㅠㅠㅠㅠ
-흐윽... 심장에 안 좋은 짤이야... 다 귀엽다...
-남이라닝 우성이 섭섭하겠다 율아ㅎㅎㅎㅎ
-우성이 안경 벗겨주고 싶당 자국 생길 것 같아
-율이랑 우성이 볼 때마다 ㄹㅇ찐친케미ㅎㅎㅎㅎ
-냥덕우성 꿀잠자는 중♡기여워♡
“…….”
한율은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을 보다가 도중에 관뒀다.
앞에서 대놓고 ‘나 이 새끼 너무 싫어요’라고 말해도, 팬들은 얘네도 평범한 대한민국 남고딩이라고, 단순히 친구끼리 티격태격한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주방에서 나온 모친이 말했다.
“율아, 밥 먹어야지. 우성이도 깨우고.”
“네.”
한율은 길우성의 다리를 걷어찼다.
퍽.
“야, 밥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