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427)

* * *

“흐아아암…. 야, 서한율.”

<별☆일없는 집> 첫 방송까지 엿새 남은 9일 아침. 촬영장에서 만난 박현우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물었다.

“어제 OSN 새 드라마 봤냐? 윤승권 선배님 나오는 <불러만 BAR>.”

“아니요.”

“어제 일찍 들어갔잖아. 안 봤어?”

조금 떨어져 있어도 이쪽을 향해 열린 귀가 많았다. 한율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라 콘텐츠 촬영하느라요.”

<불러만 BAR>는 예전에 캐스팅 제안과 함께 대본이 들어왔던 드라마라, 내용도 대충 알고 있었다. 그 뒤 얼마 안 가 촬영이 시작됐으니 크게 달라진 것도 없을 터.

“그래도 인터넷 반응은 봤지?”

“네, 괜찮은 것 같던데요?”

조연들의 연기는 조금 아쉽지만, 주연인 윤승권과 최가을은 캐릭터와 아주 찰떡이라고. 장르가 코믹액션 수사물이라 조금 유치하기는 해도, 분위기가 무거운 일반적인 수사물보다 마음 편히 가볍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윤승권 선배님은 좀 아쉬운 모양이더라.”

“왜요?”

박현우가 한율의 팔을 잡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곤 어깨를 으쓱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선배님 은근히 제설 선배님한테 라이벌 의식 갖고 있잖아. 그래서 같은 시기, 같은 요일에 연이어서 방송되는 드라마를 찍게 돼서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던 것 같은데… 제설 선배님이 사고로 하차했잖아.”

“아아. …아, 그러고 보니.”

“왜?”

윤승권과 이제설의 이름을 나란히 들었더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윤승권 선배님이 이제설 선배님 만나면 안부 인사 전해달라고 했었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 부탁받았을 당시,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윤승권의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던 것 때문일까.

“만났었어?”

“네, 전에 샵에서 우연히. 석 달 전이었나…?”

큭. 박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완전 너무한 거 아니냐? 윤승권 선배님이 알면 그거 가지고 은근히 두고두고 씹을걸?”

“지금이라도 전하면 되죠.”

한율은 핸드폰을 꺼내서 이제설에게 톡을 보냈다.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옆에 큭큭거리는 박현우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선배님. 석 달 전에 만난 윤승권 선배님이, 선배님께 안부 인사를 대신 전해달라고 한 게 지금에야 생각나 이제라도 전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곧 이제설에게서 답장이 왔다.

-[?]

-[ㅇㅇ;;]

-[ㅋㅋㅋ]

“그럼 너 차남석 나오는 드라마도 안 봤겠네? 그거 오늘이 마지막 화잖아.”

한율은 박현우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며 대화를 나눴다.

“클립으로 뜬 것만 봤어요. 형 나오는 장면만.”

“걔 가끔 실검에 드라마 제목이랑 캐릭터 이름으로 같이 뜨더라. 우리도 그래야 할 텐데.”

“뜨겠죠.”

오늘 촬영은 주연 중의 주연인 태하늘 이야기가 주라서, 한율은 오후 6시가 조금 지났을 때 퇴근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땐 8시가 다 될 무렵. 메이크업만 간단히 지우고 들어간 연습실엔 멤버 7명이 모두 있었다.

“오늘도 단체연습 시간에 맞춰서 왔네?”

“밥은 먹었어?”

“연습하고 먹으려고요. 어차피 점심도 늦게 먹었고.”

유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디오 리모컨을 들었다. 스트레칭을 할 때 주로 듣는 음악이 재생되고, 한율은 연습용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익숙하게 몸을 풀었다.

2월에 잡힌 동계올림픽 기념 K-POP 콘서트 외엔 당분간 잡힌 공연 스케줄은 없으나, 어스래빗 멤버들은 지난 데뷔 앨범 수록곡부터 시작해서 안무가 있는 곡을 모두 연습했다. 미흡한 점이 보이면 다시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2시간 동안.

“후우…. 수고하셨습니다아.”

“수고하셨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실내온도가 24도로 맞춰져 있어서 연습을 끝내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무리 스트레칭까지 한 후엔 수건으로 땀만 닦고선 TV를 켰다. 오늘이 차남석이 찍은 드라마가 마지막 화라, 다 같이 시청하기로 한 까닭이었다.

TV에 나오는 광고를 보며 길우성이 한율에게 말했다.

“승준이 형네, 1차 붙어서 2차 PR영상 준비한다더라.”

“뮤닷에서 하는 ?”

“엉.”

“그리고 조만간 우리 회사, 연습생 오디션 안내 페이지 다시 열거래.”

WB래빗은 재작년부터 홈페이지의 오디션 지원 버튼 자체를 비활성화시켰다. 그래서 사실상 마지막 연습생은 재작년에 들어온 강보배. 이후 김형수가 콩콩 엔터로 이적하고 정민솔이 그만두고 나가, 남자 연습생은 쭉 5명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뮤닷에서 준비 중인 에는 임승준, 김권, 변지욱. 이 셋만 나가기로 한 상태.

반면 여자 연습생은 11명. 한율이 처음 들어왔을 때와 변동이 없는 상태였다. WB래빗에선 어지간히 사고를 치거나 태도에 문제가 있지 않은 한, 연습생을 쉽게 방출시키지 않는 까닭이었다.

“남자 연습생만 뽑는 건가?”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운 이건우가 대답했다.

“내가 은근히 돌려서 물어보니까, 남자애들만 다섯 명 정도 새로 뽑을 계획이라고 하더라.”

강보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꺼번에 다섯 명씩이나 들이면 좀 그렇지 않나? 파벌 생길 것 같은데.”

“그중 두어 명 정도는 추천으로.”

“그럼 공개로 뽑는 건 셋 정도네요?”

“그렇지. 승권이네 방송 나가는… 4, 5월 즈음? 듣기론 이쪽 업계 사람들이 우리 회사 새 연습생 안 뽑냐고 은근히 물어보고 보챈대.”

“후….”

길우성이 잘난 척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 우리가 신인상을 받을 정도로 놀라운 활약과 성과를 낸 덕분 아니겠어?”

“우린 시기도 잘 탄 거지. 만약 스카이러너랑 원카운트랑 같은 해에 데뷔했다고 생각해봐.”

“이건우 싸우자!”

“너까지 대들래? 덤벼!”

멤버들은 난데없이 팔씨름하는 이건우와 길우성을 무시하며 바닥에 편히 앉거나 널브러진 채 TV만 보았다. 그건 해당 드라마를 촬영한 차남석도 마찬가지였다. 편히 일자로 드러누워, 고개만 뒤로 젖힌 채 TV를 거꾸로 보고 있었다.

쿵. 바닥에 누군가의 손이 떨어지는 진동이 전달되었다.

“후. 아직 날 이기기는 이르다, 막내야.”

“크흑…. 나도 내일 당장 헬스 끊을 테다!”

“아, 시작하기 전에 인증샷 찍어야지. 다들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있어.”

박가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이쪽 보시고.”

찰칵.

인증샷은 드라마가 다 끝난 뒤 박가람이 SNS에 올렸다.

한율은 숙소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박가람의 SNS를 보았다.

[차분한 차남서기 나온 드라마 막방 다 같이 보기 전!!! 안무 연습 끝난 직후라 다들 꼬질꼬질 합니다ㅋㅋㅋ #수고했다남서기 #근데고개안아프냐]

-비활동기에도 쉬지 않고 연습하는구나ㅜㅜ 역시 신인상 받을만한 아이들☆

-애들 다 바닥이랑 붙어있어 _(:3ㄱ)_

-멤 나오는 방송도 꼭 챙겨보고, 드라마 막방이라고 또 모여서 같이 보고ㅎㅎ 지구8톢 우정 영원히♡♡♡♡♡♡

-호톢 다리 진짜 길다 모델포스8ㅅ8

-어떻게 다들 퍼져있는데, 군살은 퍼진 애가 하나두 없냥♡

-굴욕민낯 1도 없는 청정톢이구역

앞에서 길우성이 차남석에게 물었다.

“형 내일 드라마 종방연 가지?”

“어.”

“스무 살 됐다고 막 술 권하면 어떡해? 형네 집 술 약하다면서.”

“한 모금 마시고 쓰러지면 되겠지.”

“…뭐 그런 극단적인?!”

한율은 예전에 차남석이 자신의 집안을 ‘알쓰’라고 했던 걸 떠올렸다. 그의 아버지도 캔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푹 고꾸라져 잠들었다고 했다던가.

그때였다.

“……?”

한율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맞은편에서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4명이 쌍둥이처럼 똑같은 롱패딩을 걸치고 후드티의 후드, 마스크를 쓴 채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 무어라 소곤소곤, 키득키득 웃으면서.

충분히 행인이 지나갈 수 있는 골목이지만, 가끔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숙소로 돌아가는 멤버들을 만나러 오는 팬들이 있었다.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일을 마치면 곧바로 차에서 숙소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직접 겪은 적은 드물지만,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빈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고.

그리고 이번에도 팬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가까워질수록 이쪽의 눈치를 살피면서 목소리를 낮춘다. 그리고 들뜬 시선으로 흘긋흘긋. 그 분위기를 멤버들도 감지했겠으나, 멤버들은 모른 척 태연하게 서로 잡담을 주고받았다.

“우리 숙소 보일러도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전원 켜고 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미리 켜서 따뜻해진 숙소에 들어갈 수 있잖아.”

“그러고 보니 어제 마지막으로 숙소에서 나왔던 사람 누구야? 보일러 안 껐던데.”

“님들 전기요 전원부터 잘 끄세요.”

그렇게 서로 지척이 되었을 때였다. 얌전히 걸어오던 4명 중 한 명이 도로 위 노루처럼 옆으로 튀어나왔다.

“라욘, 싸랑해!”

“……?!”

휙!

“……!”

라이언이 재빠르게 포옹을 피했다. 그리고 허공을 크게 가른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잃는 여학생을 되레 잡았다. 덥석.

“넘어지면 다쳐.”

“…흐아아!”

0.5초. 멍하니 라이언을 올려다보던 여학생이 울상을 지으며 도망쳤다. 다다다. 쌍둥이처럼 꾸민 친구들이 그 뒤를 쫓았다.

“아, 쪽팔려…!”

“미쳤나 봐, 진짜!”

밤 골목을 울리는 소란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라이언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보고 미쳤다고 하는 거야?”

이건우가 라이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건 아니야.”

“그러잖아도 대표님께 말씀드렸어. 우리 숙소, 다른 곳으로 옮기면 안 되겠냐고.”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유호가 말했다. 막 방으로 들어가려던 멤버들이 거실에 우뚝 서서 유호를 돌아보았다.

“정말?”

“응. 초반엔 회사랑 가까워서 좋은 점이 많았지만, 점점 안 좋은 점이 늘고 있잖아. ‘거리도 가깝고, 멤버들도 같이 있으니까 괜찮겠지’란 생각으로 오다가 조금 전과 같은 일도 겪는 거고.”

“숙소 위치도 많이 노출되긴 했지.”

“그래서? 대표님이 뭐라셔?”

유호가 미간을 찡그린 채 입가를 올렸다.

“마침 대표님도 생각 중이셨대. 우리가 이번에 신인상도 탔으니까, 그 기념으로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옮겨줄까… 하고.”

형제 같은 사이

“오오…!”

“그럼 우리 이사 가는 거야? 언제?”

“더 넓은 곳이면 방 세 칸 이상!”

“제발 화장실 두 개!”

“회사랑 떨어진 곳으로 가면, 왔다 갔다 할 땐 뭐 타고 움직여요? 택시?”

“고양이 키워도 돼?”

유호가 미리 연습한 것처럼 속사포로 대답했다.

“집은 아직 구하는 중이라 미정이지만 늦어도 다음 달 설 전까진 옮길 거야. 방 셋, 화장실 둘 조건을 말하니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고, 방범 시스템도 여기보다 더 잘 구축된 곳으로. 오고 갈 땐 될 수 있으면 매니저 형들이 차로 태워다 줄 거야. 마지막으로 고양이는 안 돼.”

한밤중이라 차마 시끄럽게 떠들 순 없었는지, 멤버들은 불끈 쥔 두 주먹을 위로 뻗으며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길우성과 강보배는 시무룩해 보였지만.

한율은 발코니에 놓인 화분을 돌아보았다.

‘새로 옮기는 숙소도 볕이 잘 들어야 할 텐데.’

유호가 말했다.

“어쨌든 내일부터는 숙소 오고 갈 때, 매니저 형들이랑 같이 움직이는 게 좋겠어.”

다음 날.

촬영을 마치고 자정께가 되어 숙소로 온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TV만 홀로 켜진 어둑한 거실. 차남석이 코트를 입은 채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그에게선 고깃집 특유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다른 멤버들은 아직 회사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황.

“형, 왜 여기에서 자요.”

흔들어 깨우면서 얼굴을 살펴보니 딱히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진 않았다. 어제 길우성에게 한 말마따나, 정말 한 잔만 마시고 뻗어버린 건가.

“형. …야, 차남석.”

몇 번 더 흔들자 차남석이 눈을 떴다.

“…어?”

몇 번 끔뻑거리던 그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가, 다시 감겼다가 천천히 열렸다.

차남석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아…. 잠깐만 앉아있으려고 했는데 잠들었다.”

“술 얼마나 마셨어요?”

멍하니 있던 차남석이 실소를 흘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 잔.”

“진짜 약하네요.”

“마시자마자 잠이 미칠 듯이 쏟아지더라.”

그러곤 비틀비틀 외투를 벗더니 방에서 치약을 묻힌 칫솔을 물고 나왔다. 한율은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는 차남석을 보곤 자신도 방으로 들어갔다.

클렌징 티슈로 메이크업을 지우고 다시 나왔을 때, 차남석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상태였다.

“서한율.”

그가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손만 들어서 한율을 불렀다.

“네?”

“이 방 불 좀 꺼주라.”

“…….”

한율은 그 방의 전등 스위치를 껐다. 툭.

“문도 닫고.”

탁.

닫은 문 너머에서 차남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다.”

한율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 * *

1월 15일. <별☆일없는 집> 첫 방송이 나가는 날.

오후 2시부터 너튜브 tv Mu 채널을 통해 <별☆일없는 집> 제작발표회가 라이브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한율은 박현우와 함께 샵에서 꽃단장을 받았다. 제작발표회 장소로 이동할 땐 미리 받은 인터뷰 대본을 들여다보았다.

질문은 제작발표회에 초대된 기자들이 미리 넘긴 걸 제작진이 추려낸 걸로, 답변은 배우들 기획사와 함께 검토해 작성되었다. 현장에서도 질문은 기자가 아닌, 사회자가 모두 대신할 예정.

옆에서 비슷하게 대본을 보던 박현우가 물었다.

“너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나가는 건 처음이지?”

“네.”

“난 영화 <삼투> 때 처음으로 제작발표회 나가봤는데, 너희들이 앨범 나올 때 하는 기자간담회랑 비슷해서 특별히 어려운 건 없을 거야. 그런데 대본은 안 주니까 다 외워서 자연스럽게 대답해야 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작발표회는 한 호텔의 넓은 세미나 홀에서 진행되었다.

<별☆일없는 집>과 tv Mu 로고가 적힌 널찍한 포토월 앞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 마련된 다섯 자리엔 마이크도 하나씩 놓여있었다. 앉는 순서는 감독, 지헌, 박현우, 한율, 마지막으로 지헌이 맡은 ‘태하늘’의 여자 친구가 되는 역할의 배우 최혜승.

제작발표회는 드라마의 짤막한 티저 영상과 하이라이트 영상이 흘러나오고, 감독과 주연 배우들의 인사로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별☆일없는 집> 감독을 맡은 용인주라고 합니다.”

박현우의 말처럼 제작발표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질문과 답변이 미리 준비되어 있고, 사회자가 모두 질문을 대신하는 터라 기자의 돌발질문에 당황할 일도 없었다. 너튜브로 생중계되곤 있지만, 어떤 채팅이 올라오는지 따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장비도 없고.

소통 없는 일방적인 발표회나 다름없었다.

“<별☆일없는 집>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삼 형제가 다시 한집에 모여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가족 힐링 드라마잖아요. 어떠세요? 함께 촬영하면서, 세 분도 정말 형제 같은 사이가 되는 것 같으세요? 현우 씨가 먼저 대답해볼까요?”

박현우가 마이크를 들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저희가 공과 사 구분이 확실한 타입이라.”

지헌도 마이크를 들었다.

“그래도 단톡방은 있습니다.”

“원래 진짜 형제들끼리는 그렇게 살갑지… 않지 않나요? 제가 외동이라 잘 모르겠는데.”

한율의 말에 지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탰다.

“진짜 형제 같은 사이가 되면 곤란해요. 매일 싸우거든요.”

“아, 지헌 씨 경험담이에요?”

“네. 제가 어릴 때부터 형이랑 그렇게 싸워서, 방학 때 부모님이 우리 형제를 한 명은 외가, 한 명은 친가로 따로 보낸 적도 있었어요.”

“그럼 만약 현우 씨랑 한율 씨가 진짜 동생이다! 이래도 매일 싸울 것 같으신가요?”

세 사람은 서로를 한번 본 후 대답했다. 이 질문 또한 대본에 있던 것이었다. 작품에 관한 이야기만 하면 지루할 수 있으니, 제작진 측에서 넣은 분위기 환기성 질문.

“우리 셋이 이렇게 진짜 형제면, 어렸을 때는 현우랑 저랑 좀 투덕거리지 않았을까 해요. 한율이는 워낙 차분한 성격이라….”

“이 중에서 한율이가 제일 막낸데, 제일 어른스럽거든요. 촬영장에서도 그렇고 평소에도 그렇고. 일부러 제가 가끔 시비를 걸어도 말없이 이렇게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박현우가 조금 뚱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한율의 흉내를 냈다.

“뭐가 문젠지 이성적으로 말해줄래요? …이런 식으로 원인부터 차분히 짚으니까, 얘랑은 싸움으로 이어지질 않아요.”

한율은 미간을 찡그리는 대신 조용히 입가를 올렸다. 박현우가 대본에도 없던 대답을 하고 있었다.

지헌이 정리했다.

“가끔 현우가 나한테 대들고, 한율이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차분하게 정리해주고. 그렇게 그럭저럭 평화가 유지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외에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느낀 작품 자체에 관한 소감, 스포가 되지 않을 법한 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천천히 풀어놓았다. 마지막으로는 드라마를 재밌게 잘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부탁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인사.

제작발표회는 45분 만에 끝났다.

“너희들은 오늘 첫 방 누구랑 볼 거야?”

포토타임까지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갈 때 지헌이 물었다.

“난 집, 내 방에서 혼자요. 모니터링할 때 옆에 사람 있으면 집중이 안 돼서.”

“현우 너도 그렇구나.”

너도?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지헌에게 물었다.

“형도 숙소에서 멤버들이랑 같이 살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내가 방을 혼자 쓰거든.”

“방이 몇 갠데요?”

스타믹스도 멤버가 8명이었다. 숙소가 어지간히 넓지 않은 한, 독방을 사용하긴 힘들 텐데.

“방 세 개짜리 집 두 채를 숙소로 쓰고 있어. 제비 잘못 뽑은 4명만 둘씩 한방 쓰고.”

“회사 제공?”

“보증금만. 월세는 우리가 나눠서 내는 걸로. 원래는 회사가 마련해준 전셋집 한곳에 살았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멤버 중 한 명은 곡 작업도 해야 해서 독방이 꼭 필요했거든. 그래서 집 하나 더 빌리는 걸로 협의하고, 나란히 붙어있는 집 두 채로 이사했지.”

“부럽네요.”

이런 것도 어느 정도 수익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선택이었다.

아직 정산을 받기까지 요원한 신인들은, 회사가 마련해준 방 한 칸짜리 집도 감지덕지인 경우가 많았다. 서울의 집값이 좀 비싼가. 여기에 원활한 이동을 위해 도로 상황이 좋고 방송국, 샵과도 가까워야 하니.

박현우가 한율에게 물었다.

“서한율 넌 숙소 생활 안 하고 집으로 들어가도 되지 않아? 굳이 멤버들하고 붙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새벽에 나가고 새벽에 귀가하면 부모님께 민폐잖아요.”

“아.”

‘그러니….’

지난주 유호로부터 숙소를 옮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별생각이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팀으로서 어느 정도 유대감도 쌓였겠다, 금전적인 여유도 있겠다. 그러니 남들보단 조금 이르기는 해도, 독립해도 괜찮지 않을까.

주요 감시대상 1호도 데리고.

그날 밤. 한율은 <별☆일없는 집> 첫 방송이 시작되기 1시간 전인 8시 즈음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엔 드라마 제작발표회를 다룬 인터넷 기사를 몇 건 훑었다.

댓글 반응은 무난했다. 재밌을 것 같다는 반응, 주연이 약한 것 같아 재미없을 것 같다는 반응, 얼굴만 보고 뽑았냐는 비아냥 등등.

-보통 제작발표회에서 하는 캐스팅 비하인드 썰은 없네ㅋ 중간에 사고로 감독이 교체돼서 그런가

ㄴㅇㅇ사고 얘기도 1도 안 함

-그러고 보니 사고 난 사람들 다 어떻게 됨??

ㄴ대부분 현장 복귀했다고 하던데 사고 친 사람만 빼고

-무조건 본방사수!!!!

-믿고보는 ♡율톢♡연기

-현실성없는 삼형제 얘기지만 그러므로 본다

“한율아, 이번 주 금요일에 더순한화장품 새 화보 찍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운전하던 조유찬이 물었다. 한율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뗐다.

“네. 그런데요, 형.”

“응.”

“저 독립해도 돼요?”

“괜찮기는 한데… 지금 팀 숙소 새로 구하고 있잖아. 너무 반대편으로 멀리 떨어진 곳은 좀 피해 주라….”

“네.”

“부모님이랑은 이야기된 거야?”

“오늘 하려고요.”

보름 만에 집으로 온 한율은 씻고 나서 모친이 차려준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부친이 퇴근하고 들어왔을 때 두 사람에게 용건을 꺼냈다. TV 화면 오른쪽 위엔 <별☆일없는 집> 첫 방송 로고가 떠 있었다.

“집을 마련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럼 멤버들 간에 섭섭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숙소 주거비용도 나중에 정산금에서 제하는 금액인데.”

“그래서 같이 살게 되는 멤버들한테도 나중에 정산을 받으면, 그때 집세를 받을까 하는데…. 안 될까요?”

이러나저러나 집주인으로선 당장 부동산 수익이 없는 셈이었다. 어쩌면 몇 년 동안. 그러나 두 사람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좌 대표와 한번 얘기를 나눠보마.”

“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원래 한율이 네가 스무 살이 되면 네 명의로 한 채 해주려고 했던 걸 미리 앞당겨서 주는 것뿐이다. 어쨌든 너무 시세가 비싼 곳은 아이들이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적당한 곳이….”

“방범도 중요해요, 여보. 방송국, 주로 가는 샵이랑도 가까워야 하고, 주차하기도 편한 남향집으로. 율아, 너희 샵 주로 어디… 아, 드라마 시작한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편히 독방 쓸 수 있겠네.

한율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면서 TV로 시선을 옮겼다. 와옹. 소파 위로 뛰어 올라온 퓨마가 한율의 무릎과 허벅지를 꾹꾹 누르듯 밟으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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