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월 4일 일요일 밤 8시.
tv Mu 월화드라마 <별☆일없는 집>에서 삼 형제로 나오는 한율과 스타믹스의 지헌, 배우 박현우가 출연한 <스타학교>가 방송되었다.
교실로 꾸며진 스튜디오에 한율이 등장하자, 출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국장님 아드님 오셨습니까!]
노란색 별이 크게 그려진 하얀색 티셔츠에 파란색 체육복 바지, 넉넉한 품새의 후드 재킷을 걸치고 거들먹거리며 들어오던 한율이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조폭처럼 인사가 이게 뭡니까? 교양있게 합시다, 교양있게.]
<스타학교> 프로그램 실시간 톡창이 웃음 의성어로 도배되었다.
-미친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셀프 디스냐곸ㅋㅋ
-시사교양국장 아들이라 저러는 거?ㅋㅋㅋㅋ
-아닠ㅋㅋ 저기는 K본부가 아니라 J본부잖앜ㅋㅋㅋㅋ
이어서 박현우가 들어오자 출연자들의 허리는 45도로 올라왔고, 지헌이 들어왔을 땐 반듯하게 세워졌다. 그리고 대놓고 실망한 표정.
[뭐야? 너희들이 끝이야?]
지헌이 넉살 좋게 웃으며 교실 문을 보란 듯이 닫았다.
[응, 끝이야.]
[에에이, 칙칙하게….]
[저 드라마는 삼 남매로 갔어야 했어.]
프로그램은 게스트들이 한 명씩 본인이 정말 스타라는 걸 증명하는 PR 시간으로 이어졌다. 가장 먼저 지헌에 이어서 박현우, 마지막으로 한율이 교탁 앞에 섰다.
한율이 토끼 안마봉을 어깨에 턱 걸치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나 누군지 알지? 아까 들어올 때 너희들이 인사했잖아.]
내가 그렇게 생각 안 해
-진짜 멤버들한테 60만 원씩 받는 거??
-매달 480만원ㅋㅋㅋㅋㅋㅋ
-말은 저렇게 해도 다 받진 않을 것 같네요ㅎㅎ
-성인되면 받기로 한 걸 일찍 받...? 걍 집안 자체가 ㅈㄴ 부자네;
-하.. 박탈감 오진다ㅋ 고딩도 서울에 아파트 갖고 있는데ㅅㅂ
-좀 재수 없는데 귀엽다ㅎㅎ
-엄빠가 아파트 사줬쪄!!!>ㅅ<
-웃는 게 이뻐서 봐준다ㅡㅡ
시청자들이 톡창으로 표하는 의문을 녹화 당시 출연자들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출연자 중 리더 격인 주동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혹시 할아버지가 뭐 크게 사업하셔?]
[사업은 아니고.]
한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외가 집안이 옛날부터 여기저기에 땅을 많이 갖고 있었대. 그런데 갖고 있던 땅 중에, 지금은 시세가 굉장히 오른 지역이 몇 군데 있었던 거지.]
[그럼 부동산 재벌인 거야?!]
[전혀, 그 정돈 아니야. 그런데 어머니가 강남에 빌딩 몇 채 소유하고 계시긴 해.]
[와…. 그럼 다달이 들어오는 수익만 해도 장난 아니겠다. 어머니 혹시 해마다 새로운 건물 없나? 한율이한테 줄 건물 없나? 쇼핑하러 다니시는 거 아냐?]
영상 하단에 귀엽게 그려진 중년여성 캐릭터가 건물을 쇼핑하는 이미지가 떴다.
[어쩌면 벌써 한율이 명의로 몇 채 해놓으셨을지도 몰라.]
[듣기로는 어머니도 엄청난 미인이라고 그러던데? 네가 엄마 많이 닮았다고. 끼도 그렇고.]
한율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 잠깐 발레를 하셨었대.]
[우와!]
[그런데 나중에 부상 때문에 관두시고, 아나운서 시험을 보려고 공부를 하셨는데….]
[땅 부자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데, 정말 진취적인 분이시구나?]
[응.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 권유로 미인대회까지 나가셨다고 하더라고. 정확히는 그때 친했던 지인이 같이 나가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대박….]
그리고 영상엔 한 여성의 사진이 떴다.
-와
-머리랑 화장, 옷 다 촌스러운데도 저 정도면 장난 아닌데;;
-약간 서구적인 미인ㅇㅇ
-율톢이 진짜 엄마 닮았구나ㅎㅎㅎ
-늘 저래ㅋ 친구 따라간 사람이 더 예쁘고 잘생김
-쟤 혹시 누나 있음? 여동생이라도
출연자들도 제작진이 보여주는 한율의 모친 사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인이신데?]
[이쯤 되면 아버지가 진정한 승리자 아냐?]
[그럼 혹시 데뷔도 하셨던 거야?]
[하실 뻔 했는데… 못했어.]
툭툭. 토끼 안마봉으로 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던 한율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쁜 사람들 때문에.]
[나쁜 사람들?]
[당시 어머니한테 정말 부조리한 조건을 내밀고 계약하자고 한 사람들이 있었거든. 그런데 어머니가 싫다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해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거야. 믿었던 지인이 어머니 사진을 몰래 찍어서 팔기도 하고.]
표정이 심각해진 출연자들과 게스트로 함께 나온 지헌과 박현우의 모습이 잡혔다.
[외삼촌 말에 따르면, 그때 그 사람들이 부른 기자들이 매일 집 앞에 찾아와서 난리가 아니었었대. 심지어는 돈 주면 정정 기사를 크게 내주겠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지금보다 더 악의적으로 소문을 부풀리겠다고 협박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래서.]
진지하게 말하던 한율이 마지막 악센트를 강조하면서 끊자, 출연자들이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율이 씨익 웃었다.
[외삼촌이 검사가 됐어.]
멍해진 출연자들의 얼굴과 [?????????] 자막이 크게 떴다.
[저런 나쁜 사람들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도록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 이러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하셨대.]
-시스콤인가
-헐...
-검ㅋㅋㅋㅋ샄ㅋㅋㅋㅋㅋ
-시스콤 까지야ㅋ 나도 엄빠 아들샊이가 밖에서 처맞고 오면 괜히 열받던데ㅋ 패도 내야 패야하는데
-엄청 이뻤으니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한 거네 거기에 아나운서 시험까지 준비했으면 공부도 잘해서 똑똑했을 테니
[아무튼 그때 일로 한동안 대인기피증이랑 공황장애로 매우 힘드셨었대. 다행히 지금은 많이 나아지시긴 했는데, 그래도 낯선 사람이 많은 곳은 힘들어하셔.]
-그렇구나... 우리 시어머니에게 그런 아픔이...ㅜㅜ..
-인터넷도 없을 땐 기레기들이나 지인피셜을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지ㅋ 여기에 시기질투까지 껴서 더 부풀려졌을 거고
-...시어머니??
-옛날엔 헛소문 한번 퍼지면 바로 잡기가 더럽게 힘들었음ㅇㅇ
-그 가수 누구도, 사귀던 여자가 너 왜 바람 피웠냐고 달리는 차에서 밀쳐서 죽였다는 괴담 돌았잖아요 그거 아직도 진짜라고 믿는 사람 있던데ㅋ 실제론 병원에서 지병으로 죽었는데
[그럼 부모님이 한율이 너 아이돌하겠다 그랬을 때 안 말리셨어? 걱정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하고 싶으면 하라고, 내 결정을 존중해주겠다고 쿨하게 허락해주셨어.]
[부모님 진짜 멋지시다….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그런데 우리 어쩌다가 한율이 어머니 얘기를 듣게 된 거지?]
한율이 뻔뻔하게 웃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스타가 될 자질을 잔뜩 물려받아 태어났다는 이야기?]
* * *
<스타학교> 방송이 끝나기도 전, 포털사이트 실검에는 지헌과 박현우, 한율의 이름이 떴다. 방송이 끝난 직후엔 [한율 엄마], [서한율 어머니]가 새롭게 뜨더니, 한 시간이 지나자 1위엔 [최은희]가 올랐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기사도.
[최은희, 어스래빗 한율의 어머니였다!]
[30여 년 전, 아름다운 미모와 뛰어난 지성을 뽐내며 미인대회에서 입상했지만, 돌연 종적을 감췄던 최은희가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의 모친으로 밝혀졌다.
4일 방송된 <스타학교>에 출연한 한율은…(중략).
최은희 사건은, 당시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던 조직폭력배 A씨가 최은희를 영입하는 데에 실패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기자들과 최은희의 지인에게 뇌물을 주고 음해성 기사 및 불법 촬영을 사주한 사건이다.
이후 A씨와 공범 B씨, 사주를 받거나 최은희를 협박한 기자들 모두 죄가 낱낱이 밝혀져 형을 선고받았으나, 최은희는 심각한 공황장애를 앓게 되어…(중략).]
-저 때는 방송국 놈들도 미인대회 입상자들한테 엄청 치근덕거렸다고 함ㅇㅇ 또 그땐 수영복 심사니뭐니, 완전 성 상품화 장난 아니었으니ㅋ
-30년 전이면 쌩양아치들이 연예계 점령했을 때네ㅋ 그때 계약 안 하신 게 천만다행;;
-예나 지금이나 기레기 ㅅㄲ들 돈받고 악의적인 기사 싸지르는 거 진짜ㅡㅡ
-아~ 그때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대회 이후로 안 보이셨었는지 이제야 이해되네요~ 그래도 든든한 아들 있으니 부럽네용~ 강남 빌딩 건물주~
-몰카 찍은 지인 ㄱㅆ노답인데?
-그런데 이런 얘기를 스학에서 꺼내다니... 미리 얘기된 거겠지?
ㄴ됐으니 꺼낸 거겠죠ㅇㅇ
-이 와중에 아부지랑 어무니 러브스토리 로맨스영화 같당 동네 오빠 동생 사이에서 서로 첫사랑이 되어 사귀고 결혼까지 간 트루럽
ㄴ자식은 부모님 연애스타일 닮는다던데ㅎ
ㄴ저 난리 났을 때 지금 남편은 어디에서 뭐 하고 있었대요?
ㄴ군복무 중이었다고 함요;
ㄴ아 8ㅂ8
“써한….”
밤 11시.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왔더니 숙소는 내일 있을 이사 준비로 난리였다. 길우성이 거실을 가득 채운 파란색 박스 사이를 가로질러 한율에게 다가왔다.
“너 진짜 우리한테 매달 60만 원씩 받는 거야…?!”
길우성이 바들바들 떠는 손엔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한율, 본인 명의 고급아파트 팀 숙소로]란 기사가 띄워져 있다.
길우성이 배신감에 치를 떠는 얼굴로 외쳤다.
“우리 정산금액에서 다달이 60만 원씩 마이너스 되는 거냐고!”
“10.”
“…엉? 왜 욕을 하고 그러세….”
“집세 10만 원씩만 받는다고.”
시세의 절반의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이다.
길우성이 활짝 웃으면서 두 팔을 위로 뻗었다.
“싸랑한다, 친구야!”
“…….”
저 기사를 봤으면 자신의 모친 관련 기사도 봤을 텐데, 일부러 이러는 건가.
한율은 가만히 길우성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박스 남는 거 있어?”
박스 사이로 난 길이 좁아, 길우성이 후진하며 비켜주었다.
“엉. 형들이 완전 넉넉하게 챙겨옴. 짐 싸는 거 도와줄까?”
“됐어.”
주기적으로 안 입는 옷들이나 선물을 미리 집으로 옮겼던 터라, 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침구나 네 자전거처럼 부피가 큰 건 내일 매니저 형들이 옮겨준다니까, 잃어버리기 쉬운 자잘한 물건들만 잘 챙기면 될 듯.”
“오늘도 촬영하느라 수고했어.”
길우성이 납작하게 접힌 박스를 대신 펼쳐주자, 강보배가 테이프를 들고 다가왔다. 박가람은 혼자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네. 그런데 가람이 형은 뭐 하는 거예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중입니다. 후우….”
박가람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강보배가 쯧쯧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까 잠깐 인터넷 하다가, 악플 봤대.”
“해석의 여지가 많아서 고소하기엔 조금 애매해서 더 빡치는 그런 비아냥거림 있잖아.”
“개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열받죠.”
한율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박가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우리보고 거지새끼들이라잖아. 금수저한테 빌붙어 사는 떨거지들.”
“그럼 숙소 비용을 인당 60만 원씩 올려서 계약서랑 이체 내역을 인증하면….”
“이보세요, 피도 눈물도 없는 서한율 씨?!”
“내가 그렇게 생각 안 하니 상관없잖아요. …형은.”
한율은 박가람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형들을 보는 내 시선보다,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르는 생판 남의 시선이랑 평가가 더 중요해요?”
박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아니요, 문제없습니다…는 뭐지?! 이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은?!”
“후…. 스물한 살 박가람 씨도 열아홉 살 써한에겐 안 되는군.”
“나 쟤한테 진 거냐? 그런 거냐…?”
“하하하….”
한율은 떠드는 그들을 등지고 행거에 걸린 옷을 박스 안에 정리했다. 내일 입을 옷과 사용할 화장품, 가방만 남기고 모두 박스 안에 넣고 나서야 씻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
그리고 내내 꺼두고 잊어버린 핸드폰 전원을 켰다. 모친과 블블의 민준으로부터 톡이 들어와 있었다.
먼저 모친의 톡.
-[우리 아들 예능도 참 잘해^^]
-[[어머니]님이 [서한율]님의 초코톡 계좌로 (비공개)원을 입금하셨습니다.]
-[내일도 홧팅!]
한율은 전화 대신 톡으로 답장을 보냈다.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이라 지금쯤 잠자리에 들었을 테니.
[내일 이사 마치고 연락드릴게요. :)]
그 다음은 민준.
-[ㅡㅡ]
민준은 인터넷 기사 캡처 이미지를 보냈다.
[<스타학교> 한율, 블블 민준과의 인연(부제:민준 술버릇)]
[4일 <스타학교>에 출연한 어스래빗의 한율이 블랙블러드의 민준과의 인연에 대해 언급했다. 2년 전 웹툰 원작 웹드라마…(중략).
민준에게 민준의 술주정 통화 녹음파일을 보냈다고 말한 한율은 카메라를 보면서 ‘선배님, 실은 아직도 그 파일 안 지웠어요.’라고 말해 큰 웃음을 자아냈다.]
-[지운다며]
-[지운다며]
-[지운다며ㅡㅡ]
[저희 이번 주말에 제주도 여행 가는데,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역시 이 시간에 안 자고 있었는지, 곧바로 답장이 왔다.
-[오메기떡ㅡㅡ]
[네. :)]
다음 날, 동도 트지 않은 새벽 6시.
어스래빗 멤버들은 양치와 세수만 하곤 마지막 정리를 했다. 곧 어스래빗 담당 매니저인 조유찬, 현장전, 윤승우 그리고 오동식 팀장이 숙소로 왔다.
“무거운 건 우리가 들 테니, 너희는 중요한 물건이 든 가방만 챙겨서 밴에 실어.”
“네.”
이사 전문업체에선 트럭만 빌린 걸까. 밖에는 이사 전문업체에서 나온 탑차와 기사 한 명만 있었다.
매니저들은 화물칸에다 부지런히 박스를 옮겨 차곡차곡 실었다. 무거운 짐이라곤 서랍장 두 개가 고작이였다. 챙겨갈 가전제품도 청소기 하나. 멤버들도 밴에다 귀중품이 든 가방을 놔둔 후 매니저들을 도왔다.
“와…. 사람이 많으니 순식간에 끝났네.”
마지막으로 화분을 탑차에 옮겨 실은 멤버들은 다시 숙소로 올라왔다. 더는 실어야 할 물건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처음 왔을 때처럼 텅 빈 거 보니까… 기분 좀 이상하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생활감이 사라진 숙소 내부를 둘러보는 멤버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복잡했다. 데뷔조가 되어 처음 이 숙소에 들어왔을 때가 떠오른 모양.
“…훌쩍.”
“응? 가람이 울어?”
박가람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들었다.
“안 울어!”
“님, 거울 보여드릴까요?”
이건우가 키득거리면서 박가람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우리가 여기 재작년 9월에 들어왔었지?”
“벌써 1년하고도 몇 개월이냐….”
“여기 붙은 숙소 규칙도 떼가야 하지 않아?”
차남석이 인터폰 옆에 붙은 [WB래빗 데뷔조 숙소 규칙] 종이를 가리켰다. 소음 유발 금지, 밤 9시 이후 외출 금지, 손님초대 금지 등등. 숙소에서 지킬 아홉 가지 규칙이 적혀 있었다.
‘데뷔조’라는 글자는 누군가가 두 줄로 죽죽 긋곤, 위에 자그맣게 ‘어스래빗’이라고 적어놨다.
“그러고 보니 우리 끝내 10번 공란으로 뒀네.”
“기념으로 챙겨가자.”
“아니, 떼기 전에 사진 한 장 찍을까?”
“오케이, 콜.”
“써한, 뭐 하냐?”
길우성이 발코니에 서서 창밖 아래를 살피던 한율의 팔을 잡아당겼다.
8명의 어스래빗 멤버들이 규칙 안내서가 잘 보이도록 핸드폰 화면 안으로 모였다.
“하나, 둘.”
찰칵.
이제 방문만 잠그면
지금껏 숙소에서 밥을 해 먹어 본 적도, 할 생각도 전혀 없었으나, 한율은 밥솥을 품에 안은 채 새 숙소에 가장 먼저 입성했다. 이사할 땐 쌀을 넣은 밥솥을 가장 먼저 집안에 들여야 한다고, 조유찬이 사비로 챙겨준 물건이었다.
무슨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미신이었으나, 한율이 밥솥을 자신이 사용할 안방에다가 놓자 다른 짐들도 차례차례 들어왔다.
한율의 허브 화분을 함께 옮겨주며 이건우가 신기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한율이 너 화분 정말 잘 키운다. 어떻게 하나도 안 죽고 다 파릇파릇해?”
“식물은 정성이죠.”
“…우리 할머니랑 똑같은 말을.”
허브 화분은 모두 한율의 방에 딸린 발코니에 놓였다. 자전거는 미리 사둔 실내 자전거거치대에 세웠다.
어느새 짐이 모두 새 숙소로 들어오고, 매니저들이 목장갑을 벗었다.
“정리하다가, 8시 30분까지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와.”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따가 회사에서 뵐게요.”
이젠 각자의 방에서 물건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한율도 자신의 짐이 담긴 박스를 방으로 가져와 정리를 시작했다.
8명이 함께 사는 집에서 사용하는 혼자만의 공간. 이제 방문만 잠그면 마음껏 마나 유동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해선 안 되지만.’
잠시 후, 한율은 교복을 걸친 길우성과 차남석, 강보배와 라이언과 함께 신발을 신었다. 유호와 이건우, 박가람이 현관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나머지 정리나 청소는 우리가 할 테니까, 다들 조심히 잘 다녀와.”
“네엡.”
“낯선 사람한테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요.”
“그래, 그래.”
한율은 다른 멤버들처럼 가볍게 손을 흔들곤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우리, 새 숙소에서도 규칙 같은 거 정해야 하지 않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길우성이 물었다. 엘리베이터는 한참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집주인, 네 생각은 어때?”
“정하긴 해야지. 일단 공동으로 사용하는 숙소니까.”
차남석이 물었다.
“너 지금 드라마 마지막 회 촬영 중이지? 정말 예정대로 목요일에 끝날 수 있을 것 같아?”
“아마도?”
“그럼 이번 주말에 여행 갈 수 있겠네? 형들 졸업식에도 참석하고.”
“배고파….”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가다가 중간에 편의점 들르자고 할…, 어?”
“어?”
잡담을 나누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멤버들이 멈칫했다. 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사람도 눈을 크게 뜬 채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환하게 웃었다.
“깜짝이야.”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 안녕하십니까!”
그들은 그에게 꾸벅 인사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제설이 닫힘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그는 롱패딩과 야구모자를 눌러쓴 편한 복장이었다.
“여긴 언제 이사 온 거야?”
“두 시간 전이요.”
“와.”
신기한 우연이 놀랍다는 얼굴로 그들을 살피던 이제설이 씨익 웃었다.
“어스래빗 분들, 만나서 반가워요. 배우 이제설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웃사촌이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배님. 차남석이라고 합니다.”
이제설과 멤버들이 통성명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곧 지하 1층 주차장에 먼저 도착했다.
“너희는 지하 2층이구나. 아, 말 편하게 놓아도 되려나?”
“네, 괜찮습니다.”
“이사 기념 떡도 돌릴 거야?”
“아니요.”
“아쉽다. 나 그런 거 한번 받아보고 싶었는데.”
“선배님은 이사 오셨을 때 돌리셨어요?”
이제설이 소리 내어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니? 아무튼 나중에 심심하면 놀러 와. 먼저 갈게.”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스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차남석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저 분도 이 아파트에 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이사 첫날부터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보배도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밖에서 연예인이랑 마주친 것 자체가 처음이야…. 그것도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니….”
“이런 젠장…!”
“……?”
곧 지하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막 내리려던 그들은 길우성을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길우성이 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아우라가 장난 아니라서, 셀카를 부탁하는 걸 깜빡했어…!”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유찬이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불렀다.
“얘들아, 지각하겠다! 빨리 타!”
어스래빗의 이사 소식은 그날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 올라왔다.
이는 바로 어제 방송된 <스타학교> 때문이었다. 대체 아직 열아홉 살밖에 안 된 금수저 아이돌이, 부모로부터 얼마나 좋고 비싼 아파트를 받았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어스래빗 새 숙소는 한강뷰 고급아파트! 최근 거래 매매가는]
[작년 4월에 데뷔한 보이그룹 어스래빗이 새 숙소로 이사했다.
새 숙소는 강변북로를 바로 앞에 둔 용산구의 아파트로, 최근 매매 실거래가가 20억을 호가하는 48평 고급아파트다. 해당 아파트는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인 서한율의 명의로, 서한율의 부모는 서초구의 50억 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강남에 빌딩을 여러 채 소유한…(중략).]
-우리가 왜 연예인이랑 부모가 사는 집값까지 알아야 하는 거냐
ㄴ기사 제목엔 안 떴구만. 일부러 클릭해서 들어와 놓고 뭔 소리야
-방송 보니까 멤버들한테 집세 받는 것 같기는 한데... 나 같으면 솔까 존심 상할 듯
ㄴ존심 상할 게 뭐 있어요. 데뷔 3, 4년 차도 20평도 안 되는 좁디좁은 숙소에서 못 벗어나는 게 현실인데.
-멤버들한테 받는 집세로 대출금도 갚고 개꿀ㅋㅋㅋ
ㄴ빚 1도 없는 순수 자가임
ㄴ헐
-금수저 재수 없어ㅡㅡ
-방송에선 집세 받는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멤버들이 더 일찍 정산금 많이 받도록 도와주려고 정말 푼돈 수준만 받는다고 합니다. 멤버들이 얼른 잘 돼야 자기도 잘 되는 거라면서요.
ㄴ우리 율톢이 이렇게 착해요8ㅅ8
-얘네 집 세무 조사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ㄴ응 작년에 서국장 모범납세자로 상 받음ㅇㅇ
-아빠는 방송국 국장에 엄마는 미인대회 출신 강남 빌딩 소유주, 외삼촌은 검사? 아들은 연기실력 쩌는 아이돌ㅋㅋㅋㅋ 요즘은 만화에서도 이런 캐릭 안 넣지 않냐ㅋㅋ 현실성 없다고ㅋ
ㄴ사실 소설이나 만화보다 현실이 더한데
-아 나도 떠비 들어갈 걸ㅋ
-한율 오빠랑 결혼하려면 어떡 해야되여?
ㄴ어떡(x), 어떻게(o), 해야되여(x), 해야 돼요(o) 맞춤법 공부부터 해라. 남자든 여자든 아무리 예쁘고 잘생겨도 맞춤법 틀리면 정 뚝 떨어지더라.
-멤버들 제대로 묻어가네ㅎㅎ
ㄴ공짜로 빌붙어 사는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집세 내면서 사는데, 묻어간다고 비아냥거리면 행복하냐?
-아무튼 지들보다 잘나고 가진 거 많으면 일단 후려치려고 안달 난 열폭러들 몰려와 있을 줄 알았다ㅋㅋㅋㅋ
아직도 포털사이트 실검에는 [최은희]와 [최은희 사건]이 떠 있었다. 당시 사건을 상세하게 파헤치거나, 파헤친 기사를 복붙해 한두 줄 첨가한 기사들이 재생산되는 까닭이었다.
기사 대부분은 피해자였던 최은희에 대해 안타깝다는 논조를 담고 있었고, 댓글란에도 많이 힘들었겠다는 내용이 많았으나, 종종 악플도 있었다.
-서울에 자기 집 한 채 없는 거지들이 누굴 걱정하는 거냐^^
-대회 돈 주고 입상했다는 거 사실이라던데? 들키니까 바로 피코하면서 신고로 입 막은 거고
-그 정도 외모에 돈까지 많으면 나라도 전력으로 꼬신다
-저 때 고소당한 기자들 하나씩 다 잘리거나 소송당해서 쫄딱 망했다던데ㅋㅋㅋㅋ 누구 짓일 것 같냐?
-당시 같이 대학 다닌 사람이 말하기를, 저 분 내숭 장난 아니었다고 완전 여우였다고 하던데ㅋ
ㄴ끼가 보통이 아니었을 것 같긴 함ㅇㅇ
그러나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WB래빗에선 곧바로 아티스트 및 아티스트의 가족에 대해 허위사실 유포 및 악플을 다는 사람들에게 선처 없는 강경 대응을 할 거란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자 언제나 그랬듯이 악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여기엔 최은희의 동생이자 서한율의 외숙이 현재 대형로펌 소속 변호사란 사실이 드러난 것도 컸다.
이처럼 인터넷은 아직도 한율의 집안과 관련된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한율은 드라마 막바지 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실검에 더는 한율과 관련된 검색어가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블블 관련 검색어와 기사가 떴다.
[블블 티스트와 히아신스 라움, 연애 전선 이상 無!]
[블블 수재와 민준, 5월 동반 입대 예고]
[블블, 여전히 재계약 멤버는 티스트 혼자… 이대로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