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선배님들 정말 팀 해체해요?”
<별☆일없는 집>에서 ‘태바다’가 나가는 콩쿠르가 열리는 아트홀.
한율은 옆 좌석에 앉은 민준에게 기사를 띄운 핸드폰을 보여주며 물었다. 딱 두 컷만 나온 콘티 대본을 뚫어져라 보던 민준이 눈썹 끝을 내리며 웃었다.
“아니, 해체는 안 해. 계약이 끝나면 ‘블랙블러드’란 팀명은 상표권 문제 때문에 못 쓰겠지만… 그래도 멤버들끼리 팀을 유지하는 건 자유잖아.”
그 말인즉슨, 고동과는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네…. 입대는 어디로 하려고요?”
“면회 오게?”
“카메오로 출연해달란 부탁에 바로 와주셨는데, 저도 보답은 해야죠.”
“에이, 면회야 나중에 한율이 네가 입대하면 그때 나도 가면 되는 거고.”
평생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한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강보배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심호흡했다.
“후우. 생전 한번 와본 적 없는 피아노 콩쿠르를 드라마 촬영으로 간접 경험하게 될 줄이야.”
옆에서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카메오로 출연하는 건 민준뿐만이 아니었다. 아트홀 여기저기엔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도 있었다. 콩쿠르 관람객, 혹은 다른 콩쿠르 참가자의 일행으로 나오기 위해.
이는 감독의 부탁이었다. 조금이라도 매체에 얼굴을 비쳐야 하는 아이돌에게도 좋은 제안이라, 어스래빗 멤버들도 흔쾌히 수락했고.
“그런데 너희 혹시.”
민준이 기대로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집들이는 안 해? 넓은 곳으로 이사했다면서.”
“안 해요. 회사 관계자 외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들이지 않기로, 멤버들하고 규칙으로 정해서요.”
“그래….”
민준이 실망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계약 만료 시기가 다가오면서 스케줄이 눈에 띄게 줄었다더니, 정말 한가한 모양이었다. 인기가 많아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사생 스토커도 많아, 여기저기 편히 놀러 다니기도 힘들 테고.
“그러고 보니 선배님, 살 좀 찐 것 같네요.”
“그래? 많이 부은 것 같아?”
“아니요, 적당해서 보기 좋아요.”
“휴….”
많은 카메오와 보조출연자, 단역이 등장하는 피아노 콩쿠르 씬 촬영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딜레이 되면 안 되기에, 촬영은 식사 시간도 없이 계속되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콩쿠르 씬 촬영이 모두 끝난 뒤, 한율은 카메오로 출연해준 멤버들과 민준을 주차장까지 배웅했다. 배웅엔 스타믹스의 지헌과 박현우도 함께 했다.
“우리도 재밌었어.”
“정 고마우면 올 때 호빵이나 사 오든가.”
“그럼 우린 먼저 갈게. 하뉼, 수고해.”
“오늘 감사했습니다.”
민준과는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오메기떡 잊지 마.”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바로 다음 날 받아볼 수 있지만, 선물을 받는 핑계로 만나고자 하는 걸 누가 모를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님.”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8일.
작년 10월부터 시작해, 사고로 인해 주연배우가 교체되고 감독이 경질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던 <별☆일없는 집> 촬영이 근 4개월 만에 종료되었다.
* * *
학교로 향하는 차 안.
한율은 셀캠에다 대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한율입니다. 음… 간만에 드라마 속 학교가 아닌, 진짜 제가 다니는 학교 교복을 입으니 좀 어색하네요.”
옆에서 길우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안뇽, 이프림.”
“그동안 드라마 촬영을 하느라… 나 얼마 만에 등교하는 거지?”
“서한율 씨의 등교는 작년 10월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2학년 종업식입니다, 이 녀석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한율은 새삼 놀란 눈으로 길우성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래?”
“이프림 여러분, 써한이 이렇게 못된 불량 학생이에요. 우리 학교가 방송 활동 인정 안 해주는 일반고였으면, 넌 진작 유급이었어!”
한율은 저를 타박하는 길우성을 무시하면서 다시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이제 저도 고3이니, 한 달 후부턴 될 수 있는 한 성실히 등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운전석에서 조유찬이 끼어들었다.
“한율이 너 다음 달 영화 크랭크인.”
“아, 3학년이 되어도 성실한 등교는 힘들겠네요. 아무튼 오늘은 종업식이기도 하면서.”
한율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조수석에 두었던 화려한 꽃다발을 집었다. 부스럭. 예쁘게 꾸며진 꽃다발이 셀캠 화면을 가득 채웠다.
“‘꽃을 단 토끼’ 리더, 남석이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행을 떠나요
한율과 길우성, 차남석과 박현우가 다니는 대한예고는 아이돌 연습생을 비롯해 이미 데뷔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교문과 학교를 둘러싼 담 아래는 기자와 팬들로 인산인해였다.
“가람이 형이랑 미랑이 누나 졸업식 갔을 때 생각난다.”
작년, 두 사람의 졸업식. 당시 같은 학교 졸업생 중 히아신스의 멤버 호수가 있어서 정말 난리가 났었다. 호수의 사진을 찍거나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졸업생의 가족으로 위장하거나, 몰래 담을 넘는 사람들로 무척 소란스러웠으니.
그래서 어스래빗과 크래는 졸업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빠지는 걸 기다리고 나서야 그라 콘텐츠를 촬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학교 올해 졸업생 중에, 이런 인파를 몰고 올 정도로 인기가 많은 사람이 있었나?’
마침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한율은 아이돌 팬으로 추정되는 여학생들이 든 슬로건이나 머리띠를 살폈다.
[지구를 잘생김으로 발라버려♡남석♡]
[차남서기 졸업축♡]
[☆대박사건☆꽃톢꿀보이스졸업]
“…….”
모인 인파의 4분의 1이 차남석의 팬으로 추정되었다.
“남석이 형이 이렇게 인기가 많았었나?”
“잘생겼잖아. 써한 넌 드라마 촬영으로 바빠서 잘 못 느꼈겠지만, 남석 씨 찍은 드라마에서 남석 씨 나올 때마다 톡창이 난리가 났었대. 잘생겼는데 목소리도 너무 좋고 연기도 잘한다고. 인기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고 역도 찰떡이었는데 인기가 안 많아지는 게 이상하지. 잘생기기도 했고.”
잘생겼다는 말이 세 번이나 들어갔다.
그러나 운전하던 조유찬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티스트는 물론이고 학교 측과 학생들에게 피해가 되니까 졸업식 방문은 자제해달라고, 그렇게 공카랑 공식 SNS 통해서 당부했건만….”
그때 [지구존잘톢] 머리띠를 한 여학생이 한율과 길우성이 탄 차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스래빗 차! 어스래빗 차!”
차량 번호판을 보고 알아본 모양.
“남석아, 거기 있니?!”
조유찬이 룸미러로 한율과 길우성을 보며 말했다.
“절대 창문 열지 마. 선물 대신 전해달라고 도로로 뛰어들기라도 하면 위험해.”
다행히 그때 신호가 풀려, 조유찬은 차를 천천히 이동시켰다. 어스래빗의 차를 알아본 팬들이 홀린 듯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차가 교문 앞에 멈추자 경비원들의 제지에 막혀 길게 목만 뺐다. 정말 자신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맞는지 보기 위해.
“빨리 들어가, 빨리.”
드륵. 차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있던 경호원들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연이어 한율과 길우성만 내리고 문이 닫히자, 차남석을 부르던 팬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한율아아! 이거 남석이 좀 전해줘!”
“우성아!”
달려들어서 선물을 휘두르듯 내미는 팬을 경호원들이 막았다. 한율은 그들에게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거리며 바삐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이런 곳에서 조금이라도 뭉그적거리면 그게 오히려 더 큰 혼잡과 사고를 부른다.
“얘들아아…!”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하는 팬들을 향해, 마찬가지로 미안하다고 빠르게 고개를 꾸벅거린 길우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석 씨 두 시간 후에야 오는데….”
학교는 졸업생의 가족을 제외한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했지만, 사전에 허락을 받은 경우는 예외였다. 졸업식이 거행되는 실내체육관엔 메이저 언론사에서 나온 카메라와 기자들이 한곳에 자리를 잡았다. 멤버가 올해 이 학교 졸업생인지, 방송국에서 스치듯 본 적 있는 아이돌그룹도 옹기종기 모였다.
이런 외부인 중엔 어스래빗 멤버들도 끼어있었다.
“졸업 축하한다, 남석아!”
차칵차칵!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체육관은 거대한 동굴처럼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에 저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졸업 축하해요, 형!”
“현우도 졸업 축하해!”
멤버들은 일단 졸업생들을 데리고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나오니 전신을 훑는 찬 바람에 절로 몸이 떨렸다.
선물 받은 꽃다발을 든 채 박현우가 코를 훌쩍거렸다.
“왜 저까지 끌고 나오는 거죠…?”
“같은 떠비 식구라서?”
“그래도 전 토끼가 아니므로, 먼저 퇴장하겠습니다.”
“왜에, 친한 친구 사이니까 같이 찍으면 좋잖아. 현우아, 여기 봐봐.”
유호가 높이 든 셀캠 안에 박현우를 담았다. 박현우가 꽃으로 하관을 살짝 가리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차남석 친구, 배우 박 모 씨입니다. 지구 토끼들에게 납치당해 엉겁결에 여기까지 끌려 나왔습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네요.”
“집에 가서 뭐 할 건데?”
“그동안 못했던 게임 실컷 해야지. 그러므로!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만 협곡으로 떠납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외친 박현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먼저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에게로 향했다. 박현우와 열 살 터울이라던 동생인지,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가 기다렸다는 듯이 박현우에게 달려가 와락 품에 안겼다.
“오빠, 꽃다발 나 줘!”
박현우가 꽃다발을 든 상태에서 동생까지 번쩍 안아 들었다.
“싫어, 내 거야.”
“나 줘어!”
“싫은…, 야잇! 때리지 마!”
평소에 전혀 안 귀여운 동생이라고 말하더니, 정작 태도에선 정반대의 감정이 흘러넘친다.
길우성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동생이 설정한 삐약 알림음을 몇 년 내내 안 바꿀 때부터 알아봤다.”
“그럼 우리는 이만 남석이가 공부했던 교실을 구경하러 가볼까?”
“고고.”
나중에 그라에 올라갈 이번 졸업 에피소드는 월요일에 있을 강보배와 라이언의 졸업식까지 다 찍은 후 편집을 거쳐 업로드될 예정이었다.
교실이나 연습실 등을 다 둘러보고 난 뒤, 마지막으로 온 곳은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자주 왔던 매점 앞 정자였다.
“그리고 여기는, 평소에 한율이랑 우성이, 현우랑 와서 놀던 곳.”
“여기에서 대본 리딩 연습도 자주 했었죠.”
“그랬지. 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군것질하면서 잡담도 나누고, 형들 흉도 보고.”
“뭣이?!”
흠집이 많은 벤치를 바라보는 차남석의 표정엔 여러 감정이 맴돌았다.
“…이젠 못 그러겠네.”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희미한 눈물기. 그러나 아무리 멤버들 앞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은지, 차남석은 눈을 한번 깜빡거리며 눈물기를 삼켰다. 그리고 짓궂게 씨익 웃으면서 길우성을 놀렸다.
“그나저나 한율이도 스케줄로 바빠서 학교 잘 못 나올 텐데, 이제 우성이 어떡하냐? 친구 없이 밥도 혼자 먹겠네?”
길우성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성큼 물러났다.
“차남석, 싸우자!”
멤버들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싸우자면서 왜 뒤로 후퇴하냐, 우성아.”
“내가 더 세니까 봐 드리는 거임. 남석 씨 싸움 엄청 못 하잖아.”
같이 웃던 차남석이 싸악 정색했다.
“…너 이리 와.”
차남석이 도망치는 길우성을 잡으러 가는 동안, 박가람이 셀캠에다 대고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차남석 졸업 기념, 학교에서의 추억 되짚기는 여기에서 끝입니다. 안뇽~!”
그리고 그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던 그라 영상 제작업체 VJ. VJ는 길우성에게 헤드록을 거는 차남석의 모습을 끝으로 촬영을 종료했다.
* * *
“그나저나 정말… 가는 거야?”
“이미 가고 있잖아.”
차남석의 졸업식 그라 영상을 촬영하고 3시간 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아니.”
팬에게 선물로 받은 털모자를 고쳐 쓰던 길우성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손뜨개질로 만들어진 모자에는 핑크색 토끼 면상이 도트그래픽처럼 그려져 있었다.
“우리 정말 한라산에 갈 거냐고…! 분명 눈이 장난 아니게 쌓였을 텐데….”
“전에 여행 플랜 짤 때 다들 좋다고 수용했잖아. 그리고 최근에 어떤 선배님들이 눈 덮인 한라산 등반하는 거 TV로 봤는데, 진짜 멋있더라.”
“나 눈 내린 산 처음 가.”
유호에 이어서 라이언까지 기대된다는 얼굴로 말하자, 주춤거리던 길우성이 옆에 앉은 박가람을 덥석 잡았다.
“발 한번 잘못 헛디디면 떼굴떼굴 굴러서 거대한 눈사태의 중심이 되어버릴 거요, 형님…!”
길우성의 과장된 사극 톤 대사에, 기내 선반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던 스튜어디스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었다.
박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한라산엔 리프트 없어?”
길우성이 박가람의 옷을 휙 놓으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리프트 같은 소리하고 있네! 거기가 무슨 스키장인 줄 알아?!”
“가람이 너 절대 다른 데 가서 한라산에 리프트 없냐는 말 하지 마라. 창피해지려 그래….”
“그냥 농담한 건뎅….”
“박가람 귀여운 척 금지.”
“차남석 싸우자.”
한율은 유호가 프린트한 이번 제주도 2박 3일 여행 플랜을 살폈다.
오늘은 도착하면 5시가 가까운 늦은 시간이라, 길우성의 부모님이 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것 외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내일 일정도 여유로웠다. 그리고 모레는 아침 일찍부터 한라산 등반, 저녁엔 비행기를 타고 귀경.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희 애들이 좀 시끄럽죠?”
“이건우 갑자기 스튜어디스 누나한테 착한 척하는 거 봐. 어우으.”
“…박가람 너 나와.”
“그나저나 우성이야 원래 제주가 고향이긴 하지만….”
“아닌데? 나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유호는 길우성의 말을 무시하며 차남석과 한율을 향해 물었다.
“너희 둘은 재작년에 제주 내려갔었잖아. 그때 어땠어?”
“그때가 7월이었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7월 중순.”
“그때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라간 거랑 바람이 엄청 변덕스럽고 게 불었던 것밖에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 이것도 생각났다.”
차남석이 한율을 가리키며 웃었다.
“서한율이 난데없이 돌하르방 코 만지던 거.”
“그렇구나.”
유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한율이가 벌써 아들을 낳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구나….”
“전혀 아니에요.”
기억해도 왜 하필 그런 모습을.
한율은 2년 전, 보송화장품 광고 촬영을 하기 위해 갔던 광활한 녹차밭을 떠올렸다. 그곳에 보기 좋은 장식품처럼 세워져 있던 돌하르방.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수호석의 힘을 지니고 있을까, 아니면 벌써 평범한 돌조각으로 전락했을까.
“제주도 왔지로옹!”
한 시간 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길우성이 셀캠을 켜더니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휘잉! 마침 굉장히 강한 바람이 불어와 모자 밖으로 나와 있던 길우성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꺄하하하.”
“우성이가 미쳤나 봐.”
“갑자기 하이텐션이 됐어, 더 부담스럽게.”
멤버들은 슬금슬금 그런 길우성과 거리를 뒀다.
“제주도 내려온 게 그렇게 좋아, 우성아?”
“당연하지! 2년 만에, 그것도!”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길우성이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데뷔하고 나서 처음 내려온 건데.”
“그래, 그래. 기분 좋을 만도 하겠네.”
그제야 제일 먼저 거리를 뒀던 이건우가 길우성의 어깨를 감싸 토닥거렸다. 그러다가 얼굴을 굳혔다.
“가만.”
“응?”
이건우가 미간을 찡그리며 길우성을 위아래로 훑었다.
“너 깔창 깔았지.”
“…빨리 우리 집으로 갑시다, 여러분!”
길우성이 못 들은 척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맛있는 흑돼지가 우릴 부른다!”
길우성의 부모가 하는 식당까지는 예약한 렌터카 두 대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운전자는 유호와 이건우.
지난번, 유호가 운전한 차에 탑승한 적이 있던 한율은 이번엔 이건우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 당시 함께 유호의 차에 탔던 박가람과 라이언도.
“형은 운전대 얼마 만에 잡는 거예요?”
“나? 작년에 면허 딴 뒤로 오늘이 세 번째.”
“…….”
박가람이 활짝 웃으며 라이언에게 물었다.
“우리 무사히 제주도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 지난주에 호 형 차로 두 시간 달려봤어. …호 형 차 문에 작은 흠집을 내긴 했지만, 도로에서 그런 게 아니라 주차 미숙으로 긁혔던 거니까 안심해. 다들 안전벨트 매고.”
시동을 켠 이건우가 두 팔을 걷어붙이곤 운전대를 꽉 잡았다. 그러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안 가요?”
이건우가 조수석에 앉은 한율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비게이션 좀 켜주지 않을래? 나 여기 초행이야.”
“아.”
출발은 동시에 했지만, 목적지엔 유호가 운전한 차량이 더 늦게 도착했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가 흘러나오는 식당 주차장. 같이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던 이건우가 유호를 향해 약 올리듯 웃었다.
“어떻게 4년 전에 면허를 딴 사람이 1년밖에 안 된 나보다 5분이나 느리냐?”
“어두워서 조심히 운전한 것뿐이야. 차에 소중한 멤버들이 타고 있으니까.”
“버스를 타도 30분밖에 안 걸리던 거리가….”
유호의 안전 제일 느림보 차를 타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길우성이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항에서 보인 기분 좋은 하이텐션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55분씩이나 걸릴 줄이야….”
그러더니 갑자기 유호와 이건우를 향해 버럭 외쳤다.
“제주도에서 운전 연습하지 마, 이 싸람들아! 제주도 교통사고 10% 이상이 렌터카가 친 사고라고!”
이런 뭐 같은 녀석
-[야.]
-[내 친구가 봤다는데]
-[길우성 오늘 제주 내려왔다 함ㅋ]
-[멤버들이랑 같이 길우성네 식당에서 밥 먹는 거 봤다고]
-[어쩔?]
“…….”
꾸욱.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에게서 온 톡을 확인한 배수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내내 머릿속으로 했던 온갖 계획과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도. 한때 괴롭힘과 따돌림의 방관자여서 미안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쩌긴 뭘 어째. 만나야지.]
* * *
펜션에서 나가기 전, 길우성이 유호에게 말했다.
“형. 정말 우리가 소중하다면 오늘은 택시를 타고 움직이자.”
“그럼 기껏 빌린 렌터카 비용이 아깝잖아. 아무리 대표님이 여행에 보태쓰라고 용돈을 많이 주셨다곤 해도….”
차남석이 핸드폰을 들었다.
“형, 택시 두 대 불렀어요.”
“그리고 형들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간, 기껏 여유롭게 짠 일정도 굉장히 촉박해지고 밀릴 거야.”
“…….”
187cm 장신의 리더는 풀이 죽은 얼굴로 가방을 끌어안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반면에 이건우는 마음이 홀가분해 보였다. 운전할 때 주변 경치를 마음 편히 볼 수 없어 불편했다고.
“몇 분 후에 온대?”
“5분 후요.”
어스래빗이 오늘 갈 곳은 용암동굴인 만장굴이나, 숲을 기차로 둘러볼 수 있는 테마파크처럼 한적하게 제주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관광지였다. 서울에선 좀처럼 보고 겪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나 여기 유치원 때 한 번, 초등학생 때 두 번, 중학생 때도 한 번 왔었는데….”
길우성은 웬만한 유명관광지는 모두 소풍이나 현장학습으로 왔었다며 투덜거렸지만, 말뿐이었다. 내내 웃으면서 멤버들과 사진을 찍기 바빴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그린라이브에 올릴 콘텐츠를 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좌기훈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이참에 카메라 없이 애들끼리 편히 놀게, 쉬게 두자고.
“아, 길우성 사진 너무 못 찍어. 박다람이, 네가 찍어라.”
“응.”
주말이라 관광지엔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을 두고 소란이 벌어지진 않았다. 외모가 남다른 8명의 소년이 뭉쳐서 다니니 자연스레 시선을 끌고, 그중 차남석 혹은 한율을 알아봐도 멀리에서만 훔쳐볼 뿐이었다.
촘촘하게 짜인 일정에 따라 정신없이 몰려 다니는 단체 관광객이나 가족 단위, 혹은 연인끼리 놀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랬다.
가끔 조심스럽게 다가와 사진이나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는 정도.
“춥긴 해도 신기한 거 많아서 재밌더라.”
“다음엔 초여름쯤에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기차 또 타자.”
펜션으로 돌아올 땐 빵집에 들러서 케이크를 샀다. 마트에도 들러서 바비큐를 해먹을 재료와 군것질거리도 잔뜩.
“고기는 펜션 사장님이 구워주신다고 했지?”
“응.”
“진짜 기대된다. 나 이런 거 진짜 처음 해 봐.”
“다들 처음이지 않을까요?”
“응?”
같은 택시 조수석에 타고 있던 강보배가 뒷좌석에 탄 한율과 길우성, 유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펜션 앞에 웬 사람들이 있는데?”
제주도 여행은 아직 어디에도 알리지 않았는데. 홈마나 집요한 팬들인가? 의아해하던 그들에게 강보배가 말을 이었다.
“남자애들 셋, 여자애 한 명.”
이윽고 환하게 켜진 택시 전조등에 그들의 모습이 비쳤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들.
움찔.
“……?”
“…….”
그때, 케이크 상자를 안고 있던 길우성의 손끝이 작게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미약하게 흔들리는 시선.
혹시. 한율은 바로 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강보배의 팔을 잡았다.
“찍히거나 녹음될 수 있으니 조심해요.”
“어?”
“왜 그…, 아.”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던 강보배와 유호의 미간이 이내 좁혀졌다. 평소에도 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었으나, 왜 한율이 굳이 지금 이런 말을 꺼냈겠는가.
강보배와 유호의 시선이 빠르게 길우성을 훑었다. 두 사람 다 눈치가 빨랐다.
“알았어.”
“너도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걸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건 아닐 거 아냐. 너무 동요하지 마.”
한율의 말에, 잠시 경직되었던 길우성이 움직임을 보였다.
끄덕.
“…어.”
한율은 먼저 택시에서 내렸다. 뒤따라오던 다른 택시에서도 다른 멤버들이 내렸다.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학생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한율은 불청객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멤버들을 향해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가 내렸다. 조심하라는 제스처.
‘순수하게 사과를 하러 온 것 같진 않으니.’
철없던 시절의 실수라고 입 싹 닦고 오랫동안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 이제 와서?
그리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가 이성과 감정을 휘두르는 나이다. 똑같이 맞아도 네가 아픈 건 1이고 내가 아픈 건 5라고, 왜 내 아픔을 더 봐주지 않느냐 자기연민에 쉽게 빠지기도 하는 나이.
‘또 요즘 애들이 워낙 영악해야 말이지.’
“아, 안녕하세요.”
머뭇거리며 다가오던 이들이 어스래빗 멤버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택시 두 대가 천천히 뒤로 후진하고, 환했던 전조등 대신 펜션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만 그들을 어슴푸레 비췄다.
유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놀러 오신 분들이세요?”
“아뇨, 그게….”
검은색 야구모자에 안경을 쓴 남학생이 길우성을 힐끗거렸다. 마찬가지로 검은색 모자를 쓴 다른 남학생이 나서서 말했다.
“우성이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우성아, 아는 분들이야?”
길우성이 크게 심호흡하더니 불청객들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우리가 지금 짐이 많아서. 이것부터 들여놓고 다시 나올게.”
그 순간이었다. 여학생이 성큼 앞으로 나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길우성에게 싹싹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우성아…! 나 좀 살려줘…!”
“……?!”
털썩. 다른 남학생 셋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 좀 살려주라…!”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한율은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당황해하는 멤버들의 면면. 그리고 일그러지는 길우성의 표정.
“갑자기 찾아와서 왜 이러는―.”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소음이 끼어들었다.
삐-, 삑삑삑삑.
“……?”
막 눈물을 쏟아내려 글썽거리던 여학생도,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크게 열어 무어라 말하려던 남학생들도 갑작스러운 기계음에 두리번거렸다. 멤버들 역시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리는 라이언 쪽을 돌아보았다.
바로 곁에 있던 차남석이 한쪽 귀를 막았다.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이거?”
라이언이 환하게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작고 새카만 기기를 꺼냈다. 삑삑삑삑. 기기에서 빨간 불이 연신 반짝거렸다.
“팬이 선물해준 도청, 몰카 탐지기.”
“…….”
“…….”
살랑. 잔잔하게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 사이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라이언이 기기를 들어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응? 블랙박스에 반응하는 건가?”
그러면서 조금씩 불청객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삑삑삑삑.
“아닌데. 사람한테도 블랙박스가 있어?”
“에이씨.”
불청객들이 황급히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허둥지둥 도망치는 그들을 향해 라이언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삑삑삑…. 기계음이 작아졌다.
“잘 가요~.”
그리고 그 자리엔 황당해하는 멤버들만 남았다.
“…대체 뭐냐. 뭔데 이거.”
“…….”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씩씩거리는 길우성도.
손끝에 바람에 실린 마나를 천천히 휘감아 모으던 한율은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거 선물해준 팬 분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응, 사생 조심하라고 줬어.”
이건우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라이언,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녀석….”
띠리링.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를 삐딱하게 쓴 이건우가 부드럽게 기타를 쓸었다.
“제 생일을 축하해주신 이프림 여러분께, 이 노래를 바치겠습니다.
생일파티 라방을 찍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곤 노래를 시작한다. 제주도를 주제로 한 유명한 가요였다.
“떠나요~, 둘이서~.”
불과 몇 시간 전 불쾌한 소동이 일어날 뻔했었으나, 거기에서 비롯된 화와 짜증은 맛있는 바비큐를 먹으면서 가라앉았다. 정확히는, 길우성의 험한 쌍욕이 섞인 랩을 5분 내내 들었더니 그보다 더 감정적으로 굴 수가 없어졌다.
-건우 기타 잘 친다ㅜㅜ 노래도 잘해
-래퍼이자 댄서가 노래도 잘해 악기도 잘 다뤄 ㄹㅇ능력자들만 모아놓은 지구톢들..
-펜션 분위기랑 찰떡ㅠㅠㅠㅠㅠ
-복근톢이 목소리 감미로운 거 보소
-뺨에 묻은 생크림 좀 닦아주지
-복근토낔ㅋㅋㅋㅋㅋㅋ
다음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예정대로 한라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겨울 산을 오를 때 필요한 등산 장비는 펜션에서 빌리고, 한라산 어리목 입구까지는 어제처럼 렌터카가 아닌, 콜밴 두 대를 타고 이동했다.
사실 한율은 백록담까지 가는 정상 코스를 원했지만,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등산 초보자들에게 눈이 쌓인 산은 여러모로 위험할 수 있기에 단념했다.
“우오와아…. 나무에 눈 쌓인 거 봐. 진짜 예쁘다.”
“바람도 안 불고 날씨도 좋아서 정말 다행이다.”
멤버들은 한라산에 도착도 하기 전부터 눈꽃이 활짝 핀 나무를 보곤 저마다 셀캠이나 핸드폰을 들어 촬영했다.
탐방로 입구에 도착한 후엔 한곳에 모여서 준비운동.
“하나둘 셋 넷, 다섯 여섯 여덟 여덟.”
준비운동을 한 후엔 스패츠를 덧대어서 끼워 고정한 뒤 아이젠을 착용했다.
“이건 어떻게 끼우는 거야?”
“나 하는 거 잘 봐요. 먼저 이렇게 펼치고. …아니, 보배 형. 반대로.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써한, 이거 좀 이상한데? 막 엉킨 것 같아.”
“…이리 줘 봐.”
“한율아, 이거 제대로 채워진 거 맞아?”
“잠깐 기다려요.”
한율은 신발에 아이젠을 제대로 끼우지 못하고 헤매는 멤버들에게 직접 아이젠을 채워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스틱을 점검하고 등산 시작.
“움직이면 덥고, 멈추면 추워…!”
입으론 징징거리면서도 멤버들은 곧잘 걷고 올랐다.
“걸을 때 다리에 너무 힘주지 마세요, 관절이랑 근육 다쳐요.”
“옛서얼.”
“우리 누가 제일 빨리 올라가나 내기….”
“다쳐. 안 돼.”
“남는 건 사진뿐이다! 다 같이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 하나, 둘.”
찰칵.
“야이 써한 이 의리 없는 쌍쌍바… 아니, 이 토끼 같은 친구야! 같이 좀 가자, 이 토끼 같은 놈아!”
어스래빗의 첫 번째 여행인 제주도 2박 3일 여행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한라산 등반을 끝으로 무사히 마무리되었다.